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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인문학/고대 그리스 로마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필사본5)

by 비사벌 2024.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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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5세기 철학자들

02. 탈레스Thales

탈레스는 6세개 초반에 활동하였으며, 기원전 585년의 일식을 예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희랍의 철학과 과학적 전통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본문 4). 탈레스가 자신이 견해를 글로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고대에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항해용 천문 안내서를 썼다고 말학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의 견해를 서술하면서 그의 저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는다.

탈레스의 삶과 행적을 알려주는 정보원으로서 가장 오랜 저자는 헤로도토스이다. 탈레스의 행적과 관련된 일화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지만 대체로 그가 다방면에서 능력이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실로 탈레스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가운데 7현인에 속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헤로도토스는 탈레스가 할뤼스 강의 흐름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믿지는 않았지만, 탈레스가 그런 정도의 일을 했으리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탈레스가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도시들에게 정치적인 연합을 형성해서 페르시아의 팽창에 효과적으로 저항하도록 조언했다는 이야기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식견을 엿보게 한다. 그런가 하면 사실성은 희박하지만 전형적인 철학자로서 탈레스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들도 있는데, 우물에 빠진 사색가의 이야야기와 쓸모없다느 비난으로부터 철학을 옹호하는 이야기는 이런 주제의 일화들 가장 오래된 형태이다.

허구적인 일화는 탈레스를 천문학자로 묘사한다. 천문학에서 탈레스의 행적오로 꼽히는 가장 유명한 것은 일식의 예언이다. 탈레스의 일식 예언은 물론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 지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볼수는 없다. 오늘날의 일식 예측은 날짜뿐 아니라 일식의 경로도 명시하며, 경로를 따라 다른 장소에서의 부분 일식과 전체일식 시간을 명시한다. 오늘날의 예측들은 매우 정확한 지식을 필요로 하며, 그런 지식은 탈레스 시대 한참 후에도 가능하지 않았다. 달과 지구의 타원 궤도 17세기에 비로소 확정되었으며, 탈레스의 직계 후계자들(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아직 지구를 구형으로도 인식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탈레스가 일식을 예언했다는 헤로도토스의 전거가 사실이라면, 그의 예언은 오랜 기간에 걸친 경험적 관찰에 의지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헤로도토스의 전거에도 보듯이 탈레스가 에언한 것은 일식이 일어나는 해였고, 날짜나 시간, 그리고 일식을 관찰할 있는 특정한 장소는 아니었다. 이런 대략적인 일식 예언은 바빌로니아의 방법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탈레스는 바빌로니아의 기록들에 의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점성학과 종교적인 목적 때문에 일식이나 지점의 주기와 같은 천체 현상들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기원전 8세기 중반부터 자세한 기록을 누적해 왔다. 당시 밀레토스의 국제적인 교섭관계로 , 탈레스는 바빌로니아의 기초 자료들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천문학과 관련된 탈레스의 다른 행적들(작은 곰자리의 관찰, 지점과 그것의 변화를 측정하는 ) 역시 바빌로니아에 의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거들은 탈레스를 수학의영역에서도 여러 발견들의 장본인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의 발견들은 그의 천문학이 그렇듯이 기원이 탈레스 자신에게 있지 않다. 전승에 따르면 탈레스는 기하학을 이집트에서 배워왔다. 이집트의 기하학이 땅을 측정하고 건물을 배치하기 위한 실용적인 지식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면, 희랍의 기하학은 유클리드의원리들에서 보듯이 일반적인 정의와 정리를 취급하며 측정이나 게상에 몰두하지 않는다. 에우데모스 이래로 고대 수학 사가들은 희랍의 기하학이 출발부터 이런 특징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수학자들은 지속적으로 기존의 지식을 조직화하여 증명의 포괄적인 체계로 만들어갔는데, 과정에서 탈레스가 희랍 수학의 토대를 닦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생각하고 특정한 정리들을 그의 것으로 돌리려 했다. 그러나 최근의 수학 사가들은 이런 접근을 부정한다. 증명의 원리가 아테네 여신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나온 것처럼 기하학자의 머리에서 완성된 형태를 불쑥 나왔을 가능성은 적으며, 그보다는 오랜 기간에 걸쳐, 아마도 철학에서 증명의 사용에 영향을 받아 발전했을 것으로 본다(증명의 사용은 파르메니데스에서 비로소 등장한다). 따라서 프로클로스가 에우데모스르르 쫓아서 탈레스의 공로로 돌리는 가지 정리들은 방면에서 탈레스의 행적과 관련이 있는 실제 문제들을 이론적으로 깔끔하게 해결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탈레스는 기하학자로서 그런 원리들을 언급하지 않고서도 초보적인 측정 기구를 사용해서 문제들을 해결하여 동시대인들의 명성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탈레스의 가까운 후계자들이 수학 이론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이런 추측의 배경이 법하다.

탈레스의 우주론에 대한 정보는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의존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탈레스의 견해로 돌리는 명제는 가지다. 하나는 지구가 위에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은 만물의 근원arche이라는 명제이다. 지구가 위에 있다는 생각은 근동의 신화적 우주론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이집트에서 도입되었을 것이라는 심플리키오스의 언급도 있거니와 당시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여러 지역에 그런 관념이 폭넓게 퍼져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들은 풍부하다.하지만 탈레스의 그것을 신화적 세계관의 단순한 연장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다른 전거에 따르면, 탈레스는 지진의 원인을 지하에 있는 물의 운동으로 설명한다. 땅이 위에 있음을 전제할 이해 가능한 이러한 설명은 탈레스의 착상이 단순한 신화적 사고의 답습이 아니라,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발상으로 이해할 여지를 준다.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생각과 관련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의 물을 자신의 4가지 원인설에 맞추어 질료인으로 해석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선배 철학자들의 사상을 이처럼 자신의 고정된 분석틀로 재단한 것은 그들 사이의 유사성을 드러내는 유용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혼란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에 따르면,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명제는 모든 사물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단적으로 말하면모든 사물은 물이다 된다. 그래서 탈레스의 주요 문제는모든 사물들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이며, 우리가 아는 탈레스는 최초로 이런 물음을 제기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물질의 근본 형태와 다른 물체들이 그것들로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관심을 갖는 이런 물음은 탈레스 이후의 자연철학자들이 대답하고자 했고, 오늘날의 물리학자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물음의 성격과 다르지 않다. 탈레스가 물을 이처럼 사물들의 구성요소로 생각했을 가능성을 배제해야 이유는 없지만, 우리에게 너무 분명해 보일 아니라 후계자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종류의 문제에 대한 탈레스의 침묵이 의심스럽다. “만약 세상의 모든 것이 물로 구성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서 세상에는 다른 종류의 사물들이, 더구나 불과 물처럼 상극으로 보이는 그런 것들이 있을 있는가?”

질료인으로서 개념은 영속하는 실제 개면에 맞춘 아리스토텔레스 나름의 해석일 뿐이고, 탈레스의 실제 생각은 세계가 생겨난 기원으로서 물이었을 있다. 이런 생각은 땅이 위에 있다는 착상과 연결될 아니라, 탈레스가 영향을 받았을 근동의 신화들 가운데 함축되어 있으며, 오케아노스[] 모든 사물의 원천으로 지목하는 호메로스의 언급과도 통한다. 기원으로서의 관념은 세계의 원시 상태는 어떤 것이며 세계의 현재상태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주목한다. 탈레스는 세계가 태초에 무한하게 펼쳐진 물에서 나왔으며, 세계는 여전히 물위에 있고, 물은 여전히 특정한 자연 현상[예컨대 지진] 원인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태초의 물과 연결되겠지만, 사물들이 물로 이루어졌다는 믿음은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탈레스의 우주론은 신화적 우주론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셈이다.

탈레스의 견해를 조명해 확실한 증거 자료가 이상 없는 상황에서 어느 방향의 해석이든 추정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어쩌면 탈레스에게는 기원으로서 관념과 구성요소로서의 관념이 애매하게 섞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물을 사물의 구성요소로 보는 이유였를 것으로 추측하며 제시하는 생리학적 사례들은(모든 생물들이 취하는 자양분이 축축하다는 , 정액이 물기를 포함한다는 ) 탈레스에서 충분히 떠올랐음직한 이유들이다. 이들 사례는 신화적 우주론의 영향과 함께 탈레스에게 물이 우주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분화된 세계의 본질에도 포함된다는 생각을 동시에 갖게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노선은 가까운 후계자인 아낙시메네스로 이어져 확장되고 다듬어졌을 것으로 있다. 아낙시메네스는 모든 사물이 공기에서 나왔고 공기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그럴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psyche , 그리고 살아 있는 세계에 대해서 탈레스의 생각을 엿보게 하는 간접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탈레스는 혼이 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석이 쇠붙이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에 혼을 가졌다고 믿었다. 혼을 생명의 원천으로 여기는 것은 희랍적 사유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혼의 있고 없음에 따라 살아 있음과 죽음이 나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들과 동물들이 혼을 갖는다고 말했으며, 나아가 운동이 생명의 특성이라고 주장했다. 운동은 성장과 질적인 변화를 포함하며 그래서 식물도 소유하는 넓은 의미의 운동이다.

그러나 자석이나 호박은 동식물처럼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거나 변화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자석과 호박이 혼을 지녔다는 탈레스의 생각이 철학 이전의 정령론animism 따른 신화적 표상을 보충하는 진술인지, 아니면 확장된 개념(운동과 변화의 ) 더불어 제한된 의미의 물활론hylozoism 천명하는 진술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리고 탈레스가 자석과 호박의 관찰사례를 일반화해서 모든 사물은 생명릉 가졌다는 생각에까지 나아갔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추측에 따른 보고이기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가 모든 것이 신으로 충만하다고 믿었다는 말을 하면서, 믿음을 우주에 혼이 스며 있다는 믿음과 결부시킨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더라도 혼과 신의 연결 가능성을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으며, 비록 탈레스에게 신화적 전례들의 영향이 직간접적으로 강하게 작용했을지도 그의 우주론에서 철학적 사고의 가능성들을 배제할 분명한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탈레스에게 전체로서의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생명력으로 충만한 것어었으며, 그러한 생명력은 광범위함과 영속성을 말미암아 신적이라고 불리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같다. 생명력과 (세계의 기원이자 아마도 본질적 구성요소로 보았을) 물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연관성을 추측해 수는 있겠으나, 탈레스가 그것을 물과 결부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전거는 전혀 없다.

 

03.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os

탈레스가 최초의 희랍 철학자라는 명칭을 얻게 것은 주로 신화적인 서술을 포기했기 때문인 반면, 아낙시만드로스는 세계를 포괄적이고도 자세하게 설명하려 시도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초의 인물이다. 연대기 작가 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아낙시만드로스는 기원전 547/6 64세였다. 그는 탈레스가 일식을 예언했던 (기원전585/4) 25세였다. 그는 탈레스보다 젊었지만 아마도 많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한 주요 자료 출처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리고 테오프라스토스를 차례 직접 인용하는 학설지 저자들이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정보는 짧고 불완전하다. 따라서 우리가 접한게 되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전반적인 사상은 소요학파의 언어로 보고된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 자신의 것으로 인정받는 단편은 테오프라스토스의 짧은 인용을 통해 전해진 문구가 전부다. 신뢰성이 없는수다 증언을 도외시하더라도 아낙시만드로스가 어떤 종류의 책을 분명히 썼다는 것은 테오프라스토스의 직접 인용에서, 그리고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보고에서 확인할 있다.

아낙시만드로스게게 아페이론은 우주 만물이 생겨나는 원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아페이론은 탈레스의 물을 대신하는 원초적인 질료이다. 아페이론은 물이나, , 그리고 다른 철학자들이 근원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질료들과는 다르다. 그것은 영원하고 나이를 먹지 않으며, 운동중에 있고, 다수의 하늘과 세계들이 이것으로부터 생겨나며 이것에 의해 둘러싸인다고 묘사되는 그런 것이다. 아페이론에 대한 이런 뵤사가 암시하는아페이론 의미는 첫째 공간적 한계가 없는 무한히 것이고, 둘째 시간적 한계가 없는(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며, 셋째 다른 것과 구별되는 특정한 어떤 것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무규정적인 것이다.

아페이론은 물도 불도 아니며, 뜨겁지도 차갑지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으며, 축축하지도 건조하지도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세계 내의 모든 사물들과 모든 성질의 궁극적인 원천인 아페이론은 사물들 가운데 어떤 것일 없으며, 사물들이 갖는 성질들 가운데 어떤 성질을 가질 없다. 그래서 아페이론은 이상 묘사하기 곤란하다.

아페이론은 신적이고 사멸하지 않으며, 운동중에 있으므로, 탈레스의 물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페이론은 세계를 생산할 있다. 아페이론을 신적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사멸하지 않음은 전통적으로 신화의 신들에게 주어지는 성질이다. 이것은 아낙시만드로스가 아페이론을 단순히 신적인 지위에 올려놓았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적인 것이 아페이론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신화의 신들은 시작(탄생) 있으나 아페이론은 시작도 끝도 없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이 운동한다고만 말하고 있을 어떤 형태의 운동인지, 그리고 운동이 세계의 형성과 변화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점은 아낙시만드로스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고 일원론자들을 자주 질책한다. 어째든 아낙시만드로스가 아페이론이 운동한다고 생각한 것은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변화도 일어날 없을 것이고, 그래서 우주는 결코 시작될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주의 형성은 아페이론에서 대립자들이 떨어져나오는데 데서 시작된다.( 대립자 개념은 아낙시만드로스에서 처음 등장하며, 이후 여러 철학자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에 의해 사용된다). 우주발생에서 주요 대립자들은 (뜨거운 ) (차가운 )이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대립자들의 상호작용과 균형을 가정했으며, 우주의 구성과 운행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대립자 개면은 이론적인 측면에서 탈레스의 문제점에 대응책이 된다. 탈레스에서 우리는 원초적 질료인 물에서 다른 사물들이 어떻게 나오는지에 대한 설명을 찾아볼 없다. 그래서 물을 일차적 실체로 놓을 경우 불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의문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성질도 갖지 않는 아페이론에서 어떻게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산출될 있을까? 아낙시만드로스는 온과 냉이 아페이론에서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에 온과 냉을 산출하는 어떤 것이 먼저 아페이론에서분리되어 나온다 말한다. 온과 냉은산출자에서 동등한 힘을 가지고 동시에 산출되기 때문에 쪽이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한다.

산출자에서 나온 온과 냉의 구체적인 모습은불꽃공기(짙은 안개)’이다. 불꽃은 껍질이 나무를 둘러싸듯이 공기를 바짝 둘러싸는 궁형의 껍질이다. 구영의 불꽃이 부서져 둥근 것들로 나뉘고, 그것들이 해와 , 그리고 별이 된다. 짙은 안개는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우리가 밟고 다니는 (지구)으로 분화된다. 축축한 땅은 태양에 의해서 말려지고, 남아 있는 습기들은 바다가 된다. 아페이론은 분화과정의 시초에만 나타나고 후에는 사물들이 주어진 단계를 밟는다. 세계의 다양함은 올림포스 신들의 개입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에서 여럿으로의 분화와 한뽁에서 다른 쪽의 분리 과정에 기인한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는 단순한 대칭 구조를 보여준다. 중앙에 높이가 (원의 지름) 3분의1 되는 원통 모양의 지구가 있다. 우리는 평평한 한쪽 표면(원통의 )위에 산다. 지구 둘레를 불의 바퀴들이 에워싸고 있고, 불의 바퀴는 안개로 감싸여 있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바퀴마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안개의 한부분이 터져 있고 곳으로부터 풀무의 주둥이에서 공기가 분출되듯이 불이 빠져 나온다. 그렇게 빠져나오는 불꽃이 우리가 보는 별들이다. 별들이 움직이는 것은 바퀴가 풀무의 주둥이(분출구) 함께 돌기 때문이다. 별의 바퀴가 지구에서 가장 가깝고 해의 바퀴가 가장 멀며, 달의 바퀴는 중간에 있다. 해의 터진 부분(우리 눈에 보이는 ) 지구와 크기가 같다. 바퀴들의 지름은 지구 지름의 18배이고 해의 그것은 지구의 27배이다. 별들의 거리(바퀴들의 크기) 대한 언급은 없지만, 달과 해의 거리 설정방식에 따르면 별들의 거리는 지구 지름의 9배로 추정할 있다. 별들은 제각기 지름이 같은 자신의 바퀴를 가지며, 평행하게 (해와 달의 바퀴보다) 기울어져 있어서 서로 충돌하거나 해와 달을 가리지 않는다. 천체현상에 대한 설명은 일식현상과 달의 위상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완성된다. 이것들은 바퀴에 숨구멍(분출구) 공기에 의해 임시적으로 또는 주기적으로 폐쇄됨에 따라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생각은 탈레스에 비해 혁신적이다. 탈레스는 땅이 물로 떠받쳐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물은 무엇으로 떠받쳐지는지 의문이 생긴다. 다른 것이 그것을 떠받쳐야 한다면 같은 물음이 계속된다. 지구가 모든 방향에서 같은 거리에 놓여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생각은 무한후퇴를 해소한다.

기상 현상에 대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설명은 천체현상에 대한 설명방식과 유사하다. 기상현상의 발생도떨어져 나옴에서 비롯된다. 공기(짙은 안개) 가장 미세한 증기들은 바람이 되고, 좀더 짙은 증기는 남아서 구름이 된다. 과정은 세계 형성의 시초에 바다와 바람이 생겨나는 과정과 유사한다. 천둥과 번개는 구름에 에워싸였다가 터져나오는 바람에서 생긴다. 설명도 천체들(짙은 안개로 둘러 싸인 바퀴의 일부에서 터져 나오는 ) 대한 설명을 상기시킨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바람이 해와 달의 운동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기상 현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처럼 공기의 산물인 바람을 강조하는 것은 아낙시메네스와의 관련성을 엿보게 한다.

인간을 포함해서 생물들의 기원에 대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설명에서도 우주와 기상 현상에 대한 설명과의 유사성을 읽을 있다.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이 생기며, 생겨나는 것은 어떤 속에 둘러싸여 있다가 밖으로 터져나와서 존재하는 방식이다. 최초의 생물은 가시투성이 껍질로 싸여 있다가 나중에 껍질을 터뜨리고 나왔으며, 사람도 물고기 같은 생물 속에 갇혀 있다가 성장한 다음 몸을 터뜨리고 나온다고 말한다. 사람이 물고기 같은 생물속에서 길러졌다는 발상은 최초의 생물이 축축한 것에서 생겨났다는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유아기의 무기력함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착상의 기발함을 보여준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론은 소박하지만 기하학적 구조와 수학적 비례관계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과학적인 사고의 진전을 보여준다. 그리고 기상현상과 생물의 발생과 전개과정의 유사한 설명방식도 과학적 사고의 단초를 보여준다. 이런 경향은 아낙시만드로스의 말을 담은 직접 인용에서도 표현된다. 단편은 대립다들의 상호변화 과정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상호변화란 A 소멸될 A 다른 어떤B(A 생겨날 , 소멸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 바뀐다는 것과 A, B 각각은 정해진 길이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덧붙여서 생성과 소멸은 A B 저지르는 불의의 행위이며 A 그에 대해서 보상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A, B 상호 대립하는 원소적 힘으로 이해하는 것은 함축하는 바가 크다. 대립하는 원소적 힘으로 변환은 계절의 순환과 연관 지어 이해할 있다. 여름에는 더위가 우세하고, 겨울에는 추위가 우세하며 , 가을에는 더위와 추위가 균형을 이룬다. 여름이 오면 더위가 추위를 몰아냄으로써 잘못을 저지르고 추위의 영역 일부를 차지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더위는 잘못의 대가를 지불하고 추위는 그에 따르는 보상을 받고 다시 균형을 유지한다. 겨울이 되면 추위가 더위에게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면 다시 보상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처음에 하나가 지배하고 다음에 그와 대립하는 것이 지배하는 상태들 사이에 규칙적인 교대의 끝없는 순환이 일어난다. ‘습함-건조함, 밝음-어두움, 옅음-짙음, 단일-복합같은 대립 쌍들을 가지고도 마찬가지로 세계의 여러 가지 특징을 설명할 있을 것이다. 대립하는 원소들의 상호작용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자연에서 변화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설명하는 들어맞으며, 그래서필연에 따라서불가피하게 그리고 균일하게 비인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법칙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보게 된다.

 

04. 아낙시메네스 Anaximenes

아낙시메네스의 생애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밀레토스 사람이고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이자 동료라고 전해진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는 아낙시만드로스보다 어느정도 젊었을 것으로 추정될 , 정확한 생존 연대도 불확실하다. 아낙시메네스에 대한 자료들의 대부분은 학설지 저자들(심플리키오스, 아에티오스 그리고 히폴뤼토스) 의존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은 구절에 불과하고 길이도 짧다(‘형이상학에서 실체로서의 공기, ‘기상학에서 태양의 움직임과 지진의 원인에 대한 언급이 전부다). 아낙시메네스가 사용한 문체(‘단순하고 간결한 이오니아식 문체’) 대한 평은 그가 책을 썼음을 시사한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근원적인 실체로 보았다. 공기는 이른바 4원소(, , , 공기) 가운데 하나다. 어떤 성질도 갖지 않는 중립적인 원리(아페이론) 가정하여 대립자들을 설명하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과 비교해 보면, 특정한 성질을 갖는 사물을 근원적인 실체로 놓는 아낙시메네스의 이론은 일견 후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론이란 이해 가능하며 실제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확인할 있는 원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조건에서 보자면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은 약점이 있다. 아낙시만들스의 아페이론은 우리의 경험에 낯설고, 묘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를 우리가 제시할 없는 그런 것이다. 더구나 우주의 산출(발생) 대한 설명에서 대립자들의 산출 과정은 기원이 모호한 어떤 (‘산출자’) 의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아낙시메네스의 공기가 아페이론보다 우수한 원리이다. 변화의 원리를 포함하는 단일 실체로소의 공기는 우주 사물들의 폭넓은 다양성을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산출해 낸다. 공기는 다른 형태를 있으며, 조건이 맞으면 다른 유형의 실체가 되기조차 한다. 공기는 적당히 희박해지면 불이 되고, 적당히 응축되면 바람이 되고 , , 등등이 된다. 이런 설명은 물의 결빙과 얼음의 해동, 물의 증발과 구름의 응결 우리에게 익숙한 현상들을 통해서 쉽게 이해할 있고, 실제로 아낙시메네스의 이론은 이런 현상들에 대한 반성이 뒷받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일한 사물이 다른 형태를 띠며 바뀌는 이런 변화의 과정은 탈레스의 의문시되는 문제(“물이 만물의 근원이라면 모든 것은 물의 성질을 갖지 않는가?”) 답을 준다. 모든 것은 공기의 성질을 갖는다. 공기는 조건에 따라서 불이 되고, 물이 되고 등등이 되므로 , , 등등의 성질을 가진다. 그리고 공기가 이런 성질들을 취하는 과정을 규정하는희박응축 아낙시만드로스의 모호한 과정{‘분리또는떨어져 나옴’)보다 우리에게 한층 친숙한다. 회박과 응축이 뜻하는 바는 알기 쉬우며(공기가 주어진 법위 내에 많이 또는 적게 있음) 표현은 둘이지만 하나의 원리(‘밀도 차이’) 연결된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대립 쌍은뜨거운 것과 차가운 이라면, 아낙시메네스의 이론에서는희박과 응축(또는느슨함과 촘촘함’)이다. 희박과 응축은 대립 쌍이지만, 아낙시만드로스의 대립 쌍과는 달리, 밀도 차이라는 양적인 개념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낙시메네스는 자신의 대립 쌍을 사용해서 아낙시만드로스의 대립 쌍을 설명한다. 희박해진(느슨해진) 숨은 따뜻하고, 응축된(촘촘해진) 숨은 차갑다. 온과 냉은 이처럼 희박과 응축으로, 밀도의 차이에 의해서 연결되며 따라서 설명 가능한 것이 된다. 그런 만큼 아낙시메네스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높여준 것이다. 세계는 서로 연관된 현상들의 범위가 증가함에 따라 이해의 정도도 증가한다.

희박과 응축은 운동과 변화의 원인이 되는 원리는 아니다. 이것을 운동의 원리로 놓는다는 것은 운동의 대상이 되는 사물과는 별개의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런 뜻의 운동 원리는 엠페도클레스에서 처음 나온다. 응축과 희박은 공기에서 일어나는 , 공기의운동 양태를 묘사한다. 공기는 언제나 움직인다. 공기의 움직임이 감지될 정도로 매우 활발할 , 그것은 바람이며 이미 어느 정도 응축된 형태이다. 이와 같이 움직임의 정동에 따라 공기가 어떤 장소에서는 응축되고 어떤 장소에서는 희박해져서 다른 물체들이 생기게 된다고 아낙시메네스는 생각했던 같다. 다른 물체들이 생기는 과정에 대해서 전거들은 공기가 희박해져서 불이 되고, 응축되는 정고에 따라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며 , , 돌이 된다고 일관성 있게 증언해 주고 있다.

그러나 아낙시메네스는 모든 종류의 자연물이 공기에서 직접 생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인 형태의 사물들(, 공기, 바람, 구름, , , ) 있고 다른 종류들은 그것의 복합물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공기는 불이나 등과 마찬가지로 다른 물체들의 구성 성분으로 동등하게 기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복합체들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아낙시메네스의 설명을 이상 들을 없어서 정확하게는  없지만, 그렇다고 기본적인 사물들이 엠페도클레스에서 처음 등장하는 원소들(, , , 공기) 같은 것은 아니다. 원소stoichion 다른 것을 구성하지만 자신은 다른 것에서 생기지 않는다. 아낙시메네스에서 불이나 등은 공기에서 생긴다. 게다가 공기도 다른 것에 생긴다는 언급이 있따. 공기가 불이나 물을 구성하는 원소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공기가 응축되는 정도에 따라 바람이 되고 물이 되듯이, 거꾸로 물이나 바람이 희박해지는 정도에 따라 공기가 된다. 이처럼 아낙시메네스가 생각하는 밀도 차이에 따른 변화는 원소들의 결합과 분해에 따라 변화와는 다른 것이다.

공기도 다른 사물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그리고 자연의 다른 복합물들을 형성하는 물이나 , 등도 공기와 동등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면,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사물의 기본 형태로 여겼을까? 희랍 말로아에르aer’ 불리는공기 보통 어두운 안개를 뜻하지만, 아낙시메네스의 아에르는 우리의 공기(대기) 개념에 한층 가까운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공기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처럼 범위가 무한히 광대한다. 그것은 모든 것들에 에워싸며 그래서 무한정한 (아페이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실로 공기는 분화된 세계의 가장 영역을 차지한다는 장점이 있다. 나아가 공기는 (프네우마) 비교된다. 숨은 전통적으로 우리의 또는 생명의 원리로 이해되었다. ‘공기--세계 비교하는 대목에서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마치 세계의 숨으로 간주하는 같다. 그래서 (공기) 쉬는 인간이 살아 있듯이 공기() 감싸는 세계도 살아 있다(이런 식으로 아낙시메네스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에서 보게 되는 가정, 만물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가정을 공유한다). 그러니까 공기는 사람 속에서와 똑같이 역할을 우주에서도 한다. 그렇다면 공기는 우주를 둘러싸며 그것에 스며들어 모든 것을 제자리에 있도록 유지하는 작용을 한다고 생각할 있다. 이런 생각은 인간과 우주는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기능도 유사하다는 이른바, 대우주-소우주 관념의 시초라 할만하다. 이런 관념 아래서 아낙시메네스가 어느 정도까지 우주를 살아 있는 거대한 유기체로 취급하고자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철학 이전의 통속적 세계관과 타협한 흔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기가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혼의 우주적 등가물이라는 이해는 통속적 세계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며, 아낙시메네스가 공기를 근원적인 물체로 선택하게된 중요한 동기였음에 틀림없다.

이처럼 만물을 살아 있게 하는 공기는 신적인 내지는 신이라고 생각되었을 법하다. 아낙시만드로스의 근원적인 실체인 아페이론도 신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는 마찬가지였다(아리스토텔레스는 대부분의 자연철학자들이 자신들의 근원적인 질료를 신적인 것으로 여겼다고 말한다). 전거들은 아낙시메네스의 공기가 신적인 속성을 갖는 그치지 않고 신들이 생겨나는 근원이라고도 말한다. 이것은 올림포스 종교를 자연철학에 포함시켜려는 아낙시메네스의 시도를 반영하는 것일 있다. 그렇다면 아낙시메네스가 신들의 존재를 실제로 부장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증거는 없을지라도 전통적인 신관을 비판하는 일에 크세노파네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선구자일지 모른다.

아낙시메네스에서 우주의 생성은 공기의 응축에서 시작한다. (지구) 천체들보다 먼저 생겨났다. 땅의 형성은 무한하게 펼쳐진 최초의 공기 일부가 응축되어 이루어진다. 그리고 천체들은 공기에서 바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생겨난다. 땅에서 내뿜어지거나 증발한 습한 증기가 희박해져서 불이 되고 불에서 천체들이 생긴다. [지구] 모양은 테이블 윗면 또는 뚜껑처럼 평평하다. 아낙시메네스가 지구를 평평하다고 점에서는 아낙시만드로스와 같은 생각이지만, 지구가 어떤 것의 지탱도 받지 않고 머물러 있다는 가설은 따르지 않는다. 지구는 공기로 떠받쳐진다. 태양과 , 등의 천체들 역시 공기로 떠받쳐지며 공기에 의해 운반된다. 황도를 따라 움직이는 태양의 운도, 위상변화를 보이는 달의 운동 그리고 행성들의 운동을 끓임없이 움직이는 바람(가볍게 응축된 공기)으로 설명하는 것은 수긍이 가지만, 공기 위에 있는 지구의 머물러 있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공기 위헤 올라타고 있는apocheisthai 지구의 평평함이 공기를 자르지 않고 떠받치게 하는 저항을 제공한다고 말하지만, 공기는 모든 측면에서 지구를 에워싸고 있어서 어떤 방향으로도 차단되지 않는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 중에 있는 나뭇잎을 생각했을 모른다. 나뭇잎들은 바람의 저항 때문에 단단한 물체들보다 천천히 떨어지지만, 나뭇잎 아래의 공기가 나뭇잎을 벗어나서 나뭇잎 주변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떨어딘다.

전체들은 지구 아래로 지나가지 않고, 우리의 머리 주위를 도는 펠트 모자처럼 지구 주위를 돈다. 이런 구조의 천체는 아낙시메네스에게서만 있는데, 펠트 모자는 반구형의 천구를 비유한 것이다. 천구 모델은, 아낙시메네스가 염두에 두었는지는 없으나, 천체들, 특히 태양이 공기로 지탱되는 지구 아래를 지날 경우 지구의 균형을 깨뜨리는 문제를 해결한다. 펠트 천구는 북극에서 지구 주위를 통과하는 위에서 회전한다. 태양은 지구 아래로 돌지 않고 지구 주위를 돌고, 항성들은 극점 주위를 모두 똑같은 속도로 서로 상대벅으로 똑같은 위지를 유지하면서 둥글게 돈다. 지국의 북쪽은 천체의 극점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것이 태양과 , 그리고 일부의 별들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는 이유이다. 그리고 기울어짐이 지구의 북쪽이 높다 말하는 원인일 것이다.

아낙시메네스는 기상 현상에 대한 설명에 공기의 역할을 강조하며(구름, , 우박 그리고 눈은 주고 공기의 응축에 기인한다), 번개와 천둥에 대해서는 아낙시만드로스와 같은 설명을 제시했다고 한다. 아낙시메네스의 우주론이 중요한 내용에서 아낙시만드로스의 것과는 다르지만, 자연 현상에 대한 관심과 현상을 이해 가능한 자연 사물의 작용에 입각해서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사람의 공통점은 매우 크다. 그들의 이론체계가 보여주는 이런 특징들은 희랍 철학과 과학적 전통에 기여했으며, 이루 철학자들(아낙사고라스, 디오게네스,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에게 유산으로 계승된다.  

 

05. 피타고라스 Pythagoras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70년경에 태어나 490년경에 죽었다. 그의 생애 사상과 관련해 가장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그런 만큼 가장 영향력 있었던 것은 기원후 3세기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200-250) 신플라톤주의자들인 포르퓌리오스(234~305) 이암블리코스(245~325) 피타고라스 전기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기원전 1세기경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 존속되었던 신피타고라스주의에 속하는 사람들의 저술들을 바탕으로 것들이다. 그런데 신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피타고라스를 신적인 존재로 묘사하는가 하면, 그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희랍(헬라스) 주요 사상들의 원천으로 부각시키는 ,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과장하여 소개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경향을 신플라톤주의자들인 포르퓌리오스와 이암브리코스가 그대로 이어받았다. 따라스 신피타고라스주의자들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저술들은 역사적 피타고라스가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행했는지를 알아내는 혼란을 초래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비교적 피타고라스에 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가 참고한 자료가 신피타고라스주의들의 것들이어서 그의 저술도 신뢰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들의 글들 속에는 주요한 초기 자료들을 인용한 것들도 있어서, 적어도 이것들은 역사적 피타고라스의 생애와 사상을 재구성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결국 역사적 피타고라스의 생애와 사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왜곡된 후기의 자료들이 나오기 이전의 초기 자료들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 이들 자료 중요한 것들로는 우선 기원전 4세게 무렵의 것들로서 지금의 소실된 아리스토텔레스(384~322) 저서의 단편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인 디카이아르코스(360~250) 아톡세노스(370~290) 단편들, 그리고 시켈리아(시칠리아) 역사가 티마이오스(350~260) 단편들이 있다. 그런데 자료들은 구전에 기초한 것들이었기에 중요한 문제들과 관련해 불일치를 보이는 한계도 있다. 피타고라스의 관련해 일차적인 주요 자료들은 피타고라스와 같은 시대 사람들의 증언들을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저자들의 증언들이다. 이것들은 아쉽게도 많지 않으며 또한 간략한 언급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의 경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증언들이 다른 초기 철학자들의 경우보다는 폭넓게 있는 편이다. 이를테면 크세노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이온, 헤로도토스, 이소크라테스, 그리고 플라톤의 증언들이 있다. 이렇듯 여러 증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가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생애와 관련해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신빙성 있는 것은 아주 적다. 비교적 신빙성 있는 이야기를 간추리면 이러하다. 그는 기원전 570년경에 사모스 섬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면서 이집트을 여행하기도 하지만, 기원전 530년경에 폴뤼크라테스의 폭정 때문에 이탈리아 남부에 크로톤으로 이주한다. 거기서 많은 사람을 이른바파타고라스적 삶의 방식으로 인도하여 공동체를 만들고 종교적, 도덕적으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갖는다. 하지만 기원전 510년경 아마도 피타고라스적 삶의 방식이 지닌 배타성으로 인해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압박이 가해지자, 그는 메타폰타운으로 이주하고 기원전 490년경에 죽음을 맞는다.피타고라스 사후에도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이탈리아 남부의 여러 나라의 국사를 돌보며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기뤈전 450년경 크로톤에서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이 회의를 하던 밀론의 집을 퀼론의 추종자들이 불살라 상당수의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이 희생된다. 후로도 피타고라스학파에서 명의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크로톤 사람인 필롤라오스가(기원전 470~385) 타라스 사람인 아르퀴타스(기원전 428~350)이다.

일반적으로 피타고라스는 수학자이며 합리적인 우주론자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이해를 뒷받침할 만한 초기 자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초기 자료들을 통해 일단 있는 것은, 그가 혼의 전의설metempsychosis 전파자이며, 이른바 피타고라스적 삶의 방식의 창시자라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합리적인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보이는 불가사의한 능력의 소유자로도 보인다.

혼의 전이설과 주요 관련 자료는 헤로도토스의 디카이아르코스의 글을 인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포르퓌리오스의 . 크세노파네스와 키오스 사람인 이온의 말을 인용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글을 있다. 이온의 증언을 보면, 그는 피타고라스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사후에 혼의 삶이 있다는 견해를 사람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피타고라스는 단순히 사후에 혼의 삶이 있다는 그치지 않고 사람의 혼이 불사적이며, 다른 종류의 동물들로 옮겨간다고, 그래서 모든 동물은 동족관계에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피타고라스가 가졌던 생각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혼의 전이는 주기적으로 일어난다는 것도 피타고라스의 믿음이었다고 봄직하다. 이렇게 보면 피타고라스의 혼의 전이설은 불교의 윤회설과 흡사해 보인다. 그러면 피타고라스는 언젠가는 이런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있다고 보았던 것일까? 적어도 헤로도토스의 살목시스이야기에 나오듯, 인간이영원히 살아남아 온갖 좋은 것을 소유할 곳으로 가게 이라는 언급은 인간이 언젠가는 윤횡의 굴레에서 벗어날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를 남기고 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가 윤회의 주기를 헤로도토스가 말하듯 3000년이라고 믿었는지, 그리고 헤라클레이데스가 말하듯이 혼이 식물로도 옮겨간다고 생각했는지는 없는 일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들에서 피타고라스 자신에 대해서는 단지 한번 언급하는데, 그를 삶의 방식의 창시자로 묘사하고 있다. 플라톤의 증언에 따르면, 피타고라스 사후 100 넘은 시점까지도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고 평판도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피타고라스적 삶의 방식은 피타고라스의 공동체에서 은밀하게 공유되었으며, 아무나 공동체에 가담할 수는 없었다. 크로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귀족조차 성품이 좋다는 이유로 거부되었을 정도였다.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타 까다로운 자격요건을 갖추어야 했으며친구들의 것들은 공통의 것이다koina ta ton philon’이라는 규칙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타고라스적 삶의 방식에 특징적인 것은 종교의식이나 식생활을 비롯한 생활방식과 관련된 금기사항들의 준수이다. 금기사항들은 글이 아니라 구두로 제자들에게 전달되었던 금언 형태의 가르침akousmata 속에 담겨 있었다. 가르침은 피타고라스주의자들pythagoreioi 보통 사람들을 구분해 주는 징표나 상징이 되는 것으로서 symbo;로도 불리었다. 금기사항들의 일부는 본문 28-31 통해 있다. 피타고라스가 종교의식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이소크라테스의 글을 통해서뿐 아니라,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실된 책에서 인용된 것으로 여겨지는 구절, 가장 올바른 것은 무엇인가? 신께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있다.

피타고라스적 삶의 방식에 특징적인 규칙으로는 종교의식이나 음식과 관련된 말고도 흥미로운 것들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친구들의 것들은 공동의 이라는 규칙, 재산 공유의 규칙이 있었고, 또한 자기 통제라는 도덕적 훈련을 위한 묵언의 규칙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소크라테스는 대중 연설을 중시하던 기원전 4세기에조차도 사람들이 말로 대단한 평판을 가진 사람들보다도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의 묵언에 감탄했다고 전해준다(소크라테스, ‘브리시스’28). 개인적인 훈련을 위한 묵언의 규칙 말고도 피타고라스의 가르침akousmata 외부에 발설해서는 된다는예사롭지 않은 묵언 규칙 또는 보안phylake’ 규칙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이이성적 존재to logistonzoion 부류는 신이고, 다른 부류는 인간이며, 다른 부류는 피타고라스와 같은 존재이다라는 것을 비밀로 했다고 한다(아리스토텔레스 단편 192).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이 이처럼 피타고라스의 특정 가르침을 비밀로 했다면, 그의 모든 가르침이 보안의 대상이었다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암블리코스에 따르면 히파소스hippasos 12개의 오각형으로 이루어진 구형에 대해 누설했기 때문에, 누군가(아마도 히파소스) 12각형이나 무리수에 대해 누설을 했기 때문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하는데(피타고라스적 삶에 관하여 88,47). 이런 것들은 지어낸 이야기들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피타고라스의 모습을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것처럼 그리고 있는 초기 자료들을 주목해 필요가 있다. 본문 11 12 신피타고라스주의나 신플라톤주의와 같이 피타고라스를 과장하고 신격화하는 후기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적절한 것도 같다. 하지만 이야기들의 출처가 역사적 피타고라스에 관한 상당한 권위를 인정받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단편들이므로, 그것들이 피타고라스와 무관한 것으로 보기 힘들다. 그러니까 피타고라스와 관련한 일화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라고 말하기 힘들더라도, 그가 자연철학의 시대에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자로 여겨졌었다는 분명하다고 보아야 같다.

피타고라스라고 하면 그이 이름이 붙은 정리가 곧바로 연상될 만큼 수학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안타깝게도 초기 자료에서 그널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본문에 수와 관련된 여러 글을 실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보고로 여겨지는 본문 32 정도만 신빙성 있는 자료라 있다.-그렇다면 어떻게 정리가 피타고라스와 연관 지어진 것일까? 근거 자료들은 모두 산출가인 아폴로도로스의 시구와 같은 구절들에서 유래한다. 시구는피타고라스가 널리 알려진 도식(정리gramma) 발견했을 , 일로 그는 유명한 황소 제사를 거행했다 짤막한 구절로 되어 있다(‘필롤라오스 본문 60). 구절에서발견했다 표현은증명했다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실제로 피타고라스가 그걸 증명했음을 보여주는 초기 자료도 없다. 더욱이 수학의 증명방법이 개발된 것은 기원전 5세기 말이나 4세기 초에 이루어진다. 그러면 시구에서발견했다 것이 증명없이최초로 알아냈다 것을 뜻하는 것으로 수는 없는가? 그렇게 보기도 힘들다. 피타고라스 이전에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정리가 증명되지는 않은 상태로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기원전 2000년부터 3:4:5 같은 피타고라스 정리의 조합들이 설형문자의 문서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는 특정한 기하학적 관계에 대한 발견자라거나 엄격한 증명을 하는 기하학자라고 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단지 그는 정리가 참이라는 것을 알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피타고라스는 정리를 알고 황소 제사를 거행했다는 말이 전해질 만큼 기하학적인 관계를 몹시 중시했음이 분명하다.

또한 피타고라스는 중심적 협화음symphonia 정수(1, 2, 3, 4) 비율 사이의 관계를 발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옥타브=2;1, 5=3:2, 4화음=4:3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해 신빙성 있는 초기 자료도 없고, 오히려 피타고라스 시대에 이미 관계가 알려져 있던 것으로 지적된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가 관계를 발견하거나 증명했다고 하기보다는, 관계에 대해 알고, 그것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하는 적절할 것이다. 그는 음악을 수적인 측면에서 아니라, 지혜의 원천인 델포이의 신탁도 테트락튀스, 정수(1, 2, 3, 4) 연관시키고, 나아가 우주도 수들과 연관시키고 있을 만큼 관계를 대단히 중시했다. 그러면 피타고라스가 우주를 수들과 어떻게 연관시켰는지를 다음 절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본문 32 이암블리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보고를 인용한 것으로 여겨지며, 피타고라스의 우주론을 이해하는 더없이 중요한 자료이다. 피타고라스는 지혜의 원천인 델포이의 신탁을 테트락튀스, 정수(1, 2, 3, 4) 연관시키고, 테트락튀스를 다시세이렌들seirenes 이루어내는 화음(조화harmonia)” 연관시키고 있다. 모호한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세이렌들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이렌들은, ‘오딧세이아 12.39-46)에서 섬에 살면서 노래로 선원들을 홀려서 죽이는 요정들로 묘사된다. 하지만 알크만alkman 세이렌을 무사mousa 동일시하기도 하고, 플라톤은 여덟 세이렌이 천구들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국가). 여기서 다시 피타고라스의 문제의 구절로 돌아가 보자. ‘세이렌들이 이루어내는 화음(조화)’이라는 그의 표현은 바로 플라톤의 말하는천구들의 화음 싹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초기 자료에 따르면 피타고라스에게는천구개념이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의 경우에는 천구의 화음이란 표현보다는 우주의 화음이라는 표현이 무난할 것이다. 결국 피타고라스는 테트락튀스와 우주의 화음을 연관시킨것이며,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있다. 우주는, 음악적 협화음들이 경우처럼 정수 1, 2, 3, 4 이루어지는 비율들에 의해서 표현될 있는 화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피타고라스는 우주를 수적인 구조를 지닌 것으로 보았다고 있다. 그런데가장 아름다운 것은 조화(화음)이다 것이 피타고라스의 생각이니, 피타고라스의 우주론은 이렇게 재구성해 있을 것이다. 우주는 수적인 비율로 표현할 있는 조화를 지닌 것으로서 아름다운 것이다. 달리 말해서, 우주는 아름다운 것이고, 이는 그것이 조화를 가졌기 때문이며, 조화는 수적인 비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피타고라스의 생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수적 비율에 기초한 피타고라스의 우주론은 합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피타고라스는 이오니아철학자들과 같이 신화적인 사고를 벗어나 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했던 철학적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의 우주론은 비합리적인 면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바다는 크로노스의 눈물이고, 곰자리는 레아의 손이며, 플레이데아스는 무사mousa들의 뤼라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지진은 죽은 자들의 모임일 따름이고’, ‘천둥은 타르타로스에 있는 자들이 겁먹도록 그들을 위협하기 위한 것이다라고도 말하는 여전히 신화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혼의 불사설과 관련한 피타고라스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를테면 그는태양과 달은 축복받은 사람들의 섬이다’, ‘행성들은 페르세포네의 개들이다고도 말하는데, 이런 말들은 선하게 살면 태양과 달로 가서 축복받은 삶을 살고, 악하게 살면 행성들로 가서 응징을 당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연설명을 통해 사람들이 도덕적 의식을 고양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피타고라스가 우주의 아름다움을 조화와 수적 비율로 설명할 것도 우주 자체에 대한 자연철학적 설명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삶의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피타고라스는 인간의 삶의 방식에 더없이 관심을 가진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와 관련해서는 자연철학자들이 증언한 것들도 있고, 게다가 상반된 평가를 보이기도 해서 흥미롭다. 헤라클레이토스는피타고라스는 어느 누구보다도 탐구를 했고. 저작들을 선별해 내어 자신의 지혜, 박식, 술책kakotrchne 만들었다.” 말함으로써 그의 지지로서의 지위를 의심한다. 그는 피타고라스가 박식하긴 하지만박식이 분별력을 갖게끔 가르치지는 못한다 말할 아니라, 또한피타고라스는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원조이다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반명에 엠페도클레스는 피타고라스와 관련해예사롭지 않은 일을 아는 어떤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생각들로 가장 부유한 자이며, 특히 온갖 지혜로운 일에 정통한 자이다라고 증언한다. 좋은 평가를 담고 있든 아니든, 그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시기의 증언들이 비교적 폭넓게 있는 편이다. 이는 그가 상당한 유명인사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에 대해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듯이, 그의 사상에는 상반된 , 합리적인 면과 비합리적인 면이 공존한다. 그는 수학에 기초한 합리적인 측면을 보이는가 하면, 신화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측면을 보이기도 한다.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자로서 그의 모습도 합리적으로 이해할 있는 범위를 훌쩍 넘어서 있다. 이런 측면을 피타고라스는 하나로 통일하지 않은 남겨두고 있다. 이로 인해 피타고라스주의는 피타고라스 사후 기원전 5세기쯤에 부류에 나뉘어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부류는듣고 따르는 사람들akoumatikoi’이고, 다른 부류는학문하는 사람들mathematikoi’이다. 부류의 입장 차이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피타고라스주의자들에 관하여에서 이암브리코스가 인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글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포르퓌리오스의 글은 역사적 피타고라스가 이미 부류를 구분하여 가르친 것처럼 언급되어 있는데, 실제로 그랬는지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부류의 성격을 구분해 주고 있다. 부류의 대립은 기원전 4세기에 사실상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피타고라스 사후 피타고라스주의의 전통에서 가장 뛰어난 철학자로는 기원전 5세기에 전성기를 보낸 필롤라오스를 있다. 그는 피타고라스의 부류 학문하는 사람쪽이었을 것이다. 피타고라스와 필롤라오스 사후에도 피타고라스주의의 전통은 플라톤 아카데미 계승자들을 거쳐 신피타고라스주의, 그리고 신플라톤주의로까지 이어졌으니, 적어도 8세기 동안이나 피타고라스주의가 존속했던 셈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아카데미 계승자들 이래로 피타고라스를 진리의 화신처럼 추어올려 역사적 피타고라스의 모습을 왜곡해 놓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철학자로서의 피타고라스의 공헌은 우선 수학적 우주론의  싹을 보여주었다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불분명한 상태로 제시되었고, 더욱이 신화적인 요소가 덧붙어 있어서 의미가 크게 퇴색되고 말았다. 하긴 수학적 우주론보다는 오히려 피타고라스에게 일차적인 관심사는 종교적 도덕적인 문제였다. 혼의 불사설과 전이설을 바탕으로 그의 철학은 응당 삶의 방식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우주에 대한 관심도 결국은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옳은 것이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는 다른 자연철학자들처럼 형이상학자라기보다는어떻게 살아야 하는가pos biotron하는 윤리적 문제에 답을 구하고 실천하는 도덕적 현자라고 평가하는게 적절할 것이다.

 

06. 크세노파네스 Xenophanes

크세노파네스는 이오니아의 도시국가 콜로폰 출신이다. 남겨진 그의 시에 담긴 내용으로 추정해 보면, 그는 이오니아가 페르시아의 퀴로스에 의해 멸망한 기원전 546/5년쯤에 희랍 본토로 망명해 희랍 전역을 전전하며 일생을 보낸 듯하다. 역시 그의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망명할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쯤으로 보이고 70 가까이를 듯하니 그는 90 넘겨 듯하다. 그가 기원전 620-617(마흔번째 올림피아기)경에 태어났다는 아폴로도로스의 전언도 있지만, 대략 기원전 570~560년경에 태어났으리라는 것이 오늘날에는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사망년도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그는 이오니아의 포카이아가 페르시아에 공략당한 유민들이 남부 이탈리아에 엘레아라는 식민도시를 건설할 쯤에 곳에 가서 가르친 적도 있다고 한다. 이것이 그가 엘레아 학파의 설립자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가지 근거가 되고 있다. 또한 플라톤은소피스트/ 242d에서우지 지역의 엘레아 부족은 크세노파네스나 그보다 휠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는데, 모든 것이라 불리는 것은 하나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신화로써 설명하네라고 말해서 고대의 문헌 중에서는 최초로 엘레아 학파의 성립과 크세노파네스를 연결지었다. 이러한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다시 나타나며 이후로 고대의 저술가들의 책에 반복해서 나타난다. 따라서 크세노파네스가 엘레아 학파의 창시자라는 견해는 고대에는 정설이었다. 그러나 버넷은 플라톤의 증언이 진지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면서 크세노파네스를 엘레아 학파의 설립자로 보는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비록 버넷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 과학성을 강조하려는 입장에서 사고의 정합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무리하게 크세노파네스를 철학자의 반열에서 빼고자 점은 있지만, 버넷 이후로 크세노파네스의 사상을 엘레아 학파의 전통에 당연히 연결하는 관행에는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 제논, 멜리소스가 대변하는 엘레아 학파의 생각에 직접적으로 연결지을 만한 내용이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간접적으로는 엘레아 학파의 생각의 전조를 미리 보이는 대목이 크세노파네스의 토막글에 많이 발견되는 것은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크세노파네스의 토막글이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추측은 믿을 만한 구석이 많다. 특히 밀레토스 학파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운율을 사용해서 자신의 철학적 사고를 펼친 파르메니데스에게는 역시 시를 사용해 자신의 사상을 펼친 크세노파네스의 영향력이 전해 잇다는 주장을 설득력이 높다.

주지하다시피 크세노파네스는 희랍의 신인동형론적 신관을 비판하고 일신론적 신관을 주장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와 같은 시인들과 일반인들이 신들에게 인간들만이 갖고 있는 품성을 부여한다고 비판하고 신은 인간과 다름을 역설하였다. 신은 인간과 형체와 생각이 조금도 비슷하지 않는데, 인간들은 자신의 생각만으로 신들을 자기식으로 꾸며 낸다고 크세노파네스는 지적한다. 신들이 태어난다거나 사람과 같은 형체를 갖는다거나 신들이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는 발상은 바로 이런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크세노파네스는 적극적으로 신이 하나이며 움직이지 않고, 마음으로 만물을 움직인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렇게 해서 그는 전통의 신관을 극복하고 신이 갖는 정신의 측면을 강조하여 신의 단일함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신관은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to eon 떠울리게 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신에 대한 그의 생각과 대비해서 바라볼 있는 생각은 자연에 대한 크세노파네스의 생각이다. 크세노파네스는 자연철학이 출발한 밀레토스에서 멀지 않은 콜로폰 출시능로 이오니아 철학의 전통에 익숙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크세노파네스라는 모든 것은 흙과 물에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은 만물의 기원arche 찾으려 했던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밖에는 그는 자연철학자들이 그랬듯이 땅의 모양과 위치에 대한 논쟁에 가담하며, 바다, 바람, 구름, 태양, 무지개 등과 같은 자연 현상을 논의하면서 자연철학자의 풍모를 확연히 드러낸다. 이런 자연현상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는 사람들의 자연 현상을 신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람들이 이리스 여신으로 잘못 알고 있는 무지개는 사실 구름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렇게 그는 신화적 관점을 탈피해서 자연 현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한편, 신을 자연과 형체에 얽매여 파악하는 전통의 신관을 넘어서 신을 정신으로 보고 있다.

신에 대한 크세노파네스의 생각의 편에는 신에 대한 경외감과 경건함이 자리잡고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앎의 능력에 대한 회의가 자리잡고 있다. 인간은 번에 모든 것을 수도 없고 사람들이 안다고 믿는 것은 참이라기보다는 그것과 유사한 것인 의견dokos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지만 크세노파네스는 인간의 앎이 어쩔 없이 의견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고, 시간을 두고 탐구하다 보면 나은 것을 발견한다는 것을 생각도 갖고 있었다.

신에 대한 크세노파네스의 생각은 실천적으로 신에 대한 인간의 경건함으로 드러난다. 그는 술자리의 태도에 대하여 읊은 시에서 신에 대한 경건한 자세를 사람이 갖추어야 훌륭한 태도 주으이 하나로 꼽는다. 또한 그는 사치스러운 삶을 경계하고 올림피아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들을 영웅시하는 세태를 비판하고 육신의 힘보다는 지혜를 국가 위한 덕목으로 받들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신들을 의인화하는 서사시인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국가에서 플라톤이 피력한 시인 비판론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07. 헤라클레이토스 Herakleitos

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스 출신이며 69번째 올림피아기인 기원전 504~501년에 전성기를 누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것을 제외하고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애에 대해 믿을 만한 자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스토아 학파인 클레안테스와 스파이로스 등은 주로 그의 이론적인 측면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이 생애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주로 기원 3세기에 활동했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전해준다. 그는 여러 저명한 인물들에 관해 떠돌던 당시의 자료들을  자유로이 수집해서 본격적인 전기를 편찬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들은 주로 임물들에 대한 전설들이나 남아 있는 저작들을 모티브로 삼아 상상력을 가미해서 만들어낸 일화들이므로 신뢰하기가 힘들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가 그에 대해서 학실하게 있는 것은 그가 남긴 말들, 그의 사상에 국한되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최초의 철학적 평가를 내린 플라톤은 그의 사상을만물이 흐른다panta rhei’ 요약했고 우리는 이것을 만물유전설이라 부르고 있다. 플라톤은 있는 것들의 불변성을 강조했던 파르메니데스와 대립적인 위치에 헤라클레이토스를 놓는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대립구도는 플라톤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과 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라는 양극을 설정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하지만 현재 전해지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들 중에서 만물유전설의 직접적인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만물의 근원질료를 불에서 발견해 인물로 평가하면서 밀레토스 자연학의 계승자로서 자리매김했다. 두가지 평가는 다소 모순적인 측면을 지니는데, 전자가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를 강조한 반명, 후자는 만물의 단일한 근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고대 사상가들이 그러하듯이 사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들의 이론을 전개하기 위해 특정한 맥락에서 이전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있으며 그들의 사상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헤라클레이토스 이론의 전체적인 모습은 그를 계승한 스토아 학파를 통해서 드러난다. 비록 자신들의 관점에서 헤라클레이토스를 오해한 측면이 상당 부분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아 학파는 고대 세계에서 그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유일한 적자로서 평가될 있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의 저작과 마찬가지로 스토아 학파의 저작들도 지금 우리에게는 단편으로만 전해진다. 사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은 상당 부분 후대 기독교 교부들인 클레멘스, 휘폴뤼토스, 오리게네스 등의 저작에서 발췌된 것들이다. 이들은 기독교적인 사상을 지닌 최초의 이교도의 모습을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발견하고자 했으며, 따라서 로고스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불을 최후의 심판과 연결하고자 했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 경향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진면목을 바라보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왔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해석들 전부를 단지 후대 사상가들의 편의에 따른 취사선택과 단편들의 체계적인 왜곡과정으로만 수는 없다. 동안 근대 문헌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의 단편들을 인용맥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여 자체로 복원하고자 하는 활발한 작업자들이 성과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올바른 단편해석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절차라 여겨진다. 하지만 원래의 단편의 복원이라는 과제와 그것의 해석이라는 과제는 차이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문헌 자체가 인용맥락들이 그의 사상을 반드시 왜곡한다는 강력한 전제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한, 직접적인 자료를 접할 있었던 저자들에 비해 지금의 우리들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원래 의도를 파악할 있다고 보증할 없다. 따라서 결국 우리는 기존의 해석 경향들을 최대한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석들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 유연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에 대한 좀더 정확한 이해는 남아 있는 100 개의 단편들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적절한 배열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그는 한편의 저작을 남겼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원해 어떤 형태의 저작이었는지는 논쟁이 분분하다. 우선 그의 단편들은 희랍의 현인들이 남긴 경구를 닮아 있으며, 따라서 그의 원재 저작 역시 단편적인 경구들의 모음집이었다는 추측이 가능한다. 점은 후대의 해석자들이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서 단편을 원래의 맥락에 관계없이 손쉽게 인용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지지받을 있다. 반면에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그의 저작이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전해주는데, 만일 우리가 이를 신뢰할 있다면 저작은 분명한 저술 의도를 지니고 체계적으로 쓰여진 것이었다고 추측할 있다. 또한 저작의 서문으로 평가되고 있는 단편는 체계적인 이오니아 산문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다른 여러 구절도 여러 가지 다양한 산문체의 특성을 보여주므로, 그가 반드시 경구 형식만을 고집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를 고려해 보았을 , 그이 단편들의 완전히 정확한 배열은 불가능하더라도 일단은 그것들이 나름의 체계를 지니고 서술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편이 전체적인 사상파악에 도움이 것이다. 책에 제시된 단편들의 순서는 단지 내용의 유사성에 따라서 묶여졌으며 원래의 저작형태가 어떠했을지에 대한 특정한 고려 없이 배열되었음을 밝혀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타인들의 무지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비판은 반대로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의 사상이 이해되기 힘들었다는 점을 증명한다. 당시의 사람들뿐 아니라 이후의 사람들도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분명하게 파악하기 힘들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그에게는수수께기를 내는 ’, ‘어두운 라는 호칭이 붙여졌다. 이는 그가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앎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앎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비판은 어리석은 대중들에 대한 한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앎을 둘러싼 당대의 사고체계와 한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내포하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비판이 대중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지자로서 알려진 자들,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와 같이 희랍인들의 정신적인 스승들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대의 피타고라스, 크세노파네스, 아르킬로코스, 헤카타이오스 등의 당대의 유명인사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들의 어떠한 이론을 비판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없지만 가지 분명한 점은 그가 이들을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던 인물들로서 거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지혜가 이들이 말한는 박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탐구의 정신으로 충만한 이오니아의 지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으며, 따라서 그것이 강조하는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탐구를 부인하지 않는다. 때문에 파르메니데스 이후의 감각에 대한 회의주의와는 달리 감각의 증거를 신뢰한다. 반면에 그는 단순한 경험자료들의 축적이 지혜를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혜를 갈구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탐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사물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박식은 지혜를 가르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참된 지혜는 실용적인 지식들의 무분별한 집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것을 파악하는데 있다. 따라서 그의 탐구는 감각에 대한 그릇된 사용, 감각이 전해주는 사물의 모습을 잘못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습성을 비판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헤라클레이토스 이전 시기에 지배적이었던 앎의 모델에 따르면, 앎은 감각aisthesis이나 직관nous 같은 인식기관이 대상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얻어진다. 다시 말해서 눈과 , 귀나 입이 사물을 직접 보거나 냄새맡거나 듣거나 맛보는 등의 직접 접촉을 통해서 사물은 자체로 즉시 기관들이 알려지게 된다. 이러한 앎의 모델은 직관을 통한 앎의 획득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직관은 눈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인식기관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앎의 모델에서는 대상과의 접촉이 그것에 대한 앎의 획득을 의미하며, 사이에 어떠한 불일치도 생겨나지 않는다. 따라서 많이 안다는 것은 직접 경험한 것이건 신의 도움에 의한 것이건 간에, 많은 대상들과 접촉했다는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에서부터 앎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그가 말하는 참된 앎은 대상과의 직접적인 접촉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우선 그가 말하고자 하는 앎의 대상은 이전과는 달리 인식기관의 접촉에 의해서 즉시 파악될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들으면서 그것을 파악할 없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발견하고자 하는 탐구의 대상은 발견하기 어려운 성격, 자신을 숨기면서 다진 징표만을 보이는 어떠한 것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탐구를 필요로 하지만 그러고도 아주 적은 것만을 발견할 있다. 다음으로 이러한 인식대상의 차이는 이에 상응하는 인식기관의 차이를 요구한다. 그가 인식의 기관으로 여겼던 psyche에게서 강조되는 기능은 개별적인 대상 각각을 파악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것들을 비교하고 공통성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앎은 직관에 의한 앎보다는 추론에 의한 앎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그가 강조하는 것은 지식의 양적인 증가가 아니라 여러 지식들을 하나의 지혜로 이끌 있는 혼의 능동적인 작용이다.

나아가 여러 단편에서 탐구의 중요성이 특히 강조되고 있다는 점은 그가 이미 성취된 앎의 사용뿐만 아니라, 앎에 이르는 과정 또한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참된 앎을 획득할 있는 어떤 체계적인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는 탐구의 과정에서 겪을 있는 여러가지 어려움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의 단편들은 탐구의 목적지인 동시에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 숙고하고 사색했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서 제시된다. 그가 말하는 탐구의 목적지는 만물을 통해서 만물을 조정하는 예지를 포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을 통해서만 성취될 있다. 다시 말해서 목적지를 알고 예상하고 있는 자만이 그것을 발견할 있다. 인간들은 본래 이러한 지혜를 받아들일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발견해 가장 중요한 사실은 만물이 하나의 원리에 따라서 생성, 소멸하면 원리는 만물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자신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점을 파악한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그는 로고스라고 부른다. 로고스는 이후의 철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로고스는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우선 의미할 있다. 이점에서 그는 탐구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로 평가받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공동으로 말을 사용하고 의사소통을 하며 무언가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들이 공동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마치 26에서 호메로스가 이를 죽이고 있는 소년들에게 속았듯이, 말은 사물을 분명히 드러내는 역할을 하면서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 장님이었던 호메로스의 보는 상태는 사람들이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하나의 강력한 비유를 제공한다. 이처럼 그가 말하는 로고스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면서도 단지 일상적인 말이 아니라 사물의 참된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가 만물에 공통적인 원리를 로고스라고 부른 까닭도 바로 원리가 언어의 올바른 사용과 이해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날 있다는 점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참된 보선을 가리키는 로고스는 말의 차원을 넘어서 사물의 본성 자체로도 여겨진다. 48 언명에 비추어보았을때 그가 로고스를 자신의 말과 분리해서 사물의 본성자체로 생각한다는 암시를 받는다. 우리는 또한 4에서 로고스를 그의 말과 별도의 어떤 것으로 여갤 있게끔 하는 언어 유희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말하고 있는 로고스는 동시에언제나 그러한바로 로고스이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이라는 의미와 본성 자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로고스의 성격은 이후에 말과 실제, 나아가 노모스와 퓌시스의 대립이라 불릴 만한 어떤 문제를 야기할 있는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가 점을 염두에 두지는 않은 듯하다.

로고스는 이외에도모음비율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들은 후대에 이성적 사고나 논리적 추론이라는 의미로 발전될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가 말하는 앎은 각각의 사물들을 비교하고 그것들의 공통성을 한데 모아서 파악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드러나는 사물의 참된 모습은 다름 아닌 대립적인 것들이 한데 묶여서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대립적인 것들을 하나의 문장에 묶어서 표한하는 그의 문체가 보여주듯이 로고스는 대립하는 것들 각각이면서 동시애ㅔ 그것들을 한데 묶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일견 불화하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통일적인 세계를 이루어낸다. 또한 로고스는 사물들의 임의적인 모음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일정한 비율을 표한하고 있는 것들의 모음이다. 만물이 어떤 원리에 따른다는 것은 그것들이 언제나 동일한 비례관계를 통해서 표현될 있으며 관계를 벗어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가령 활의 비유는 하나의 이미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의 비례관계를 표현해 주는 공통의 틀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가 사용하고 있는 풍부한 비유적인 표현들을 단지 하나의 구상적 이미지로만 생각해서는 되며 실재의 정확한 비율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헤레클레이토스가 발견해낸 실제의 비율은 대립자들로 표현된다. 대립자들에 대한 생각은 그의 독창적인 생각이기보다는 희랍적 사고의 기본적인 전제에 가까우며, 직접적으로는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하지만 대립자에 대한 생각을 우주론의 핵심에 끌어옴으로써 대립 자체의 의미가 충분한 깊이와 강도를 지니고 사유되기 시작한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공적이다. 희랍에서 대립자들에 대한 사고는 계절이나 기상현상들의 주기적인 변화를 관찰한 것에서 기원했을 것이며, 헤라클레이토스에서도 대립자들의 주기적인 변화는 대립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모델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대립관계는 가지의 고정된 모델을 따르지 않는데, 이것은 그의 탐구 방식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인다. 그의 단편들을 살펴보면 그가 다양한 자연현상들을 자신의 틀에 맞추어 재단하지 않는다는 점을 목격하게 된다. 많은 단편에서 그는 경험적인 사실들로 그대로 표현하고 있으며, 표현들은 특정 이론에 입각하지 않아도 자체로 참된 진술이다. 이는 밀레토스 자연학의 실증적 경향을 극단적으로 수용하면서 속의 내재한 사변적인 요소들을 제거해 나간 결과라고 있다. 그는 특정ㅎ한 대립관계를 중요하게 여긴 같지 않으며 만물이 어떤 방식으로든 대립의 관계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에 집중한 같다.

그가 제시한는 대립자들의 구상적인 표현은 인간 경험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경험에 파악하지 못한 사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이 보기에 특정한 가치를 지니는 하나의 사물이 다른 동물들의 관점에서는 그와 대립하는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가령 같은 바닷물도 물고기와 사람에게 각각 삶과 죽음을 가져다 준다. 또한 진흙탕이나 볏짚, 또는 살갈퀴는 인간들에게 불필요한하거나 심지어는 해로운 것이지만 돼지나 당나귀 또는 황소들에게는 맑은 물이나 , 좋은 음식보다도 소중하다. 나아가 아름다움도 원숭이와 사람에게 다른 기준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므로, 결국 가장 아름다운 세계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쓰레기 더미로 보일 있다.

이러한 가치의 상대성은 가치가 부여될 있는 조건에 대한 성찰에 이르도록 한다. 인간이 부여하는 가치들은 서로를 통해서만 인식될 있고 따라서 대립적인 성격을 지닌다. 질병과 굶주림, 피로를 모르고 지낸다면 자신의 건강과 포만, 휴식도 달콤하고 좋은 것으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행위나 상황이 없다면 사람들은 결코 정의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신만이 모든 것을 정의롭다고 여길 것이다. 인간이 사물을 평가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이러한 대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가치의 대립적인 성격은 비단 인간의 습관이나 관습, 또는 인간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물이 대립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까닭은 사물 자체가 대립적인 가치를 부여받을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곧게 만들기 위해서는 축융기가 실을 둥글게 감아야만 한다. 축융기는 실을 곧게 만드는 동시에 구부린다. 위의 점은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필연적으로 대립하는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보여준다. 원을 그릴 때는 어떠한 점에서 출발하더라도 점으로 되돌아와야만 원이 그려질 있으며, 출발점과 끝나는 점이 다른 것은 이미 원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또한 위로 향해 있는 길은 아래로도 향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길은 위로도 향해 있을 없다. 이것은 단지 임의로 부여된 대립적인 성격이 아니며 대립자 한쪽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쪽이 있어야만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전체 우주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다. 그의 우주론에서는 밀레토스 자연학이 제시하려고 했던 천체들이나 기상현상들에 대한 자연학적 설명은 거의 찾아볼 없다. 자연현상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태양에 관한 것에 한정되어 있는데, 그나마도 태양에 대한 자연학적 설명이라고 있는 것들은 극히 예외적이다. 전해지는 몇몇 간접전승들에 따르면, 천체들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천체들은 사발모양으로 생겼으며, 사발들은 불을 담고 있는데, 불들은 받에서 만들어지는 증발기에 의해서 보충된다. 또한 사발 모양의 천체들이 회전하면서 식현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은 전통적인 견해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에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주론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관심사는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에 대한 개별적인 설명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운행원리이다. 그의 우주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불인데, 세계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이며 그것은 적절히 타고 적절히 꺼진다. 또한 불은 동일한 비율에 의해 바다와 , 그리고 뇌우로 변화한다. 그가 불을 만물의 근원질료로서 생각하는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그가 불을 아낙시만드로스의 공기와 유사하게 어떤 질료적인 것으로 파악했다는 점을 뒷받침해 근거는 많지 않으며,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 질료로서의 의미는 그리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는 불을 선택한 까닭은 그것이 변화하는 만물의 원동력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84 85 만물의 생성과 소멸에 어떤 원동력이 필요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만물의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을 헤라클레이토스는 또한 전쟁으로 표현한다. 비록 불과의 관련성을 직접 지시하고 있지 않더라도 이러한 단편들은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동력을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히폴뤼토스가 언급하고 있는 단편은 불이 세계의 생성과 소멸에 관련된 것으로 묘사한다.

불에 대해서 하나의 중요한 점은 그것이 만물의 변화를 규제하고 조정한다는 점이다. 불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할 있는 80에서 만물을 조종하는 번개는 우주의 불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세계 운행의 이상적인 원리를 상징한다. 인용맥락이 다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90 역시 불을 부정의의 심판자로서 그리고 있다. 또한 불은 만물을 교환시키면서 가치들을 평가하는 역할을 맡는다. 우주적 불의 상징인 태양이 등장하는 단편들도 적도와 정의dike 개념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밀레토스 자연학이 우주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 비해서 헤라클레이토스의 관심은 놀라울 정도로 인간의 전반에 걸쳐 있다. 그는 우주론과 인간의 삶을 분리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의 우주론에는 윤리적인 당위의 어조가 강하고 그의 인간에 대한 언명들은 만물의 공통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우주와 인간의 삶을 함께 사유하고자 하는 후대의 어떠한 사상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드러나듯이 그의 우주론을 인간에 관한 단편들과 완전히 결합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그의 나머지 단편들은 살펴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가지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도움이 것이다. 첫째로 그의 단편 전체에 핵심에는 언제나 앎이 자리잡고 있다. 다음으로 그에게서 삶과 죽음은 인간과 우주를 연결하는 사유의 틀이 된다.

우선 종교에 대한 그의 언급들을 살펴보자. 우리는 전통적인 신들에 대한 관념의 비판을 이미 크세노파네스로부터 들을 있다. 이에 반해 밀레토스 자연학이 전통적인 신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헤라클레이토스는 전통적인 관념을 직접 비판하는 같지는 않다. 분명히 수는 없지만 그가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를 비난하는 까닭이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그들의 관념 때문은 아닌 듯하다. 클레멘스가 인용한 단편은 당시의 의인적인 신관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주로 종교적인 제의에 관한 것이며, 99 역시 정화제의 관한 오래된 관행을 비판하고 있다. 이를 보았을 그의 비판은 의미를 망각하고 관례적으로 변질된 제의들을 생각없이 답습하고 있는 당시의 사람들을 겨냥한다고 보인다.

비록 그의 비판이 제의를 향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전통적인 신들에 대한 대중의 관념에 대한 재해석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올림포스 신들을 직접 언급하는 구절은 제우스에 관한 단편과 디어니소스와 하데스의 동일성에 대한 단편이다. 그는 이들 단편에서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신화적인 모티브를 환기시키고 그것을 새로운 맥락에서 재해석하면서 신들에 대한 당시의 생각들이 포착하지 못하고 숨어 있는 의미를 끄집어낸다. 다시 말해서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인 제우스는 만물의 운행을 조정하고 그것의 정의를 보증하는 유일하게 현명한 것으로 해석되며, 디오니소스와 하데스는 삶과 죽음의 동시성과 공존을 보여주는 맥락에서 재해석된다. 따라서 그는 올림포스 신들의 체계를 단지 거부한 것이 아니라, 신화들이 지닌 힘과 진실성을 십분 활용해서 자신의 사상을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점에서 , 그가 당대의 제의들을 비판한 것은, 결국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신적인 것들의 의미를 사람들이 숙고하도록 촉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종교와 관련된 다른 중요한 주제는 인간의 혼과 사후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 이전에는 인간과 관련해서 혼의 적극적 의미가 강조되지 않았다. 호메로스에서의 혼은 살아 있는 인간을 살아 있도록 만드는 숨결에 불과하며 살아있는 인간이 죽음에 직면했을 그를 떠나는 역할만을 한다. 혼의 역할이 본격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의 죽음 이후인데, 이는 비록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혼이 개개인들에게 사후에도 계속해서 생존할 있음을 보증해 준다. 그러나 호메로스에서의 혼이 인간을 살아있게 만드는 생기의 역할과 사후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고 추론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자아를 위해서 어떠한 적극적인 기능도 하지 못한다. 아낙시메네스가 혼을 공기와 유비적으로 표현하면서 인간의 삶을 유지해 주는 적극적인 기능을 부여했을 때조차, 이것은 생기로서의 혼의 역할을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혼에 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중요한 기여 하나는 인간의 혼에 앎의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이후에 독자적으로 자라나게 정신의 영역을 새로이 개척했다는 점이다. 그에게서 혼은 말을 알아들을 있는 능력을 갖는다. 앎에서 로고스의 중요성을 생각했을 , 이것은 혼이 앎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혼에 앎의 기능을 부여하면서 그의 탐구는 인간의 자아로 향하게 된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탐구은 혼에 대한 내적 체험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있다. 그가 106에서깊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혼이 어떤 외연, 특히 깊이를 지닌 것으로 경험되고 있음을 있다. 또한 107에서 혼이 지닌 외연은 확장될 있는 성질을 갖는 것으로 언급된다. 혼이 갖는 이러한 외연이 어떤 경험을 표현한 것인지, 다시 말해 그것이 심리적인 외연인지 물리적인 외연인지를 확정하기는 힘들지만, 그것은 심리적으로 체험되는 동시에 물리적으로 표상된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혼에 인식의 능력을 부여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심리적인 어떤 것으로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것으로 표상된다. 때문에 인식의 상이한 단계에 따라서 규정된 혼의 여러 가지 상태는 물리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혼의 건조한 상태가 되면 가장 뛰어나고 현명한 상태가 된다. 반면에 그것이 젖게 되면 즐거움을 얻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목적지를 상실하게 되며, 결국 심한 경우에 죽음에 이르러 물로 변화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혼의 삶과 죽음은 앎의 상이한 단계와 관련되며 또한 다른 물리적인 원소들과 관련을 맺는다.

죽음과 인간의 운명에 관련된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정확히 어떠한 세계를 그리고 있는지를 해석하기는 매우 까다롭다. 분명 그는 당시에 성행하던 시신에 대한 공경을 강력히 비난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믿어졌던 사후 세계와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일반벅으로 수용되던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은 하데스에 대한 믿음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믿음에 따르면, 인간은 죽은 이후에 지하의 하데스로 가서 기력없고 앞못보는 상태로 살아간다. 지금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희랍인들 또한 죽음 이후에 인간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하여 무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비록 그것이 하데스에서의 비참한 삶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사후의 생존을 보장받기를 바랐다. 이러한 하데스에 대한 믿음 이외에도 당시에 급속히 번져갔던 윤회에 대한 믿음도 죽음에 대한 인간들의 두려움을 달래주는 믿음 체계로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이 죽음에 대해서 당시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믿음 체계들을 얼마나 수용했는지는 남아 있는 단편들을 통해 결정하기 어렵다. 어떤 단편들은 하데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들을 담고 있거나 아니면 그것을 암시하는 전통적인 모티브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이것을 자신의 사상에 어떤 식으로 수용하고 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또한 그가 비록 만물의 순환을 말하고 있다 할지라고 오르페우스나 피타고라스의 윤회사상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에게서 윤회사상의 모티브를 발견할 있다고 하더라도 윤회는 불멸하는 영혼이 계속해서 새로운 육신을 바꾸어 갈아입는 방식이 아니라 영혼 자체가 소멸하고 새로운 것으로 생성되는 것을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사물의 생성과 소멸에 다름 아닌 것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며 현실세계와 다른 어떤 내세를 상정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들의 혼은 죽음과 동시에 다른 원소, 가령 물로 변화되며, 또한 후손을 통해서 자신의 몫을 이어가고자 한다. 반면에 가장 현명하고 뛰어난 자에게는 몫이 부여되며 신들과 인간들의 존경을 받고 가사자들로부터의 열속하는 영예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가 얻게 되는 몫이나 영예가 어떠한 것이며, 그것이 특히 그의 우주론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있는지는 여전히 해석의 문제로 남아 있다. 또한 그가 죽음과 삶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잠든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에 비유해서 말하는 하지만 이것 역시 해석하기 까다로운 부분 하나이다. 분명히 말할 있는 것은 이전의 밀레토스 자연학이 다루지 않았으며 단지 서사시인들이 신화를 통해 표현했던 삶과 죽음의 문제를 헤라클레이토스가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했으며, 나아가 자신의 사상 전체의 중심적인 과제 하나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애에 관해서 우리가 있는 부분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다소 신뢰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가 에페소스의 입법요청을 거부했다는 일화는 그가 현실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는 암시를 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정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편의 여러 곳에서 있듯이 그는 다수의 대중에 의해서 지배되는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서 심한 혐오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소수의 사람들을 선호한 것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123 통해서 있듯이 소수의 부유한 자들에 의한 통치를 정당화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비록 이성적인 정치 체제에 대해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는 모든 고시가 공통의 것에 기반을 두고 그것을 수호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민의에 의해서 형성되었건 뛰어난 사람에 의해서 제정되었건 간에 도시의 법률은 그러한 공통의 것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느느 희랍의 윤리 사상에도 근본적인 혁신을 가져왔다. 그는 이전의 밀레토스 자연학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윤리적인 내용들을 그의 사상의 중심적인 주제로 부각시켰으며, 동시에 이전의 윤리학이 생각하지 못했던 철학적인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당시나 이전에 지배적이었던 윤리적인 흐름은 크게 호메로스적인 전통과 현인 전통으로 나누어 있다. 호메로스에게서 탁월한 인간이 지녀야 자질은 신체적인 뛰어남, 언변을 통해서 드러나는 실천적인 지혜, 그리고 좋은 가문이나 박대한 부의 소유 등이었다. 그리고 개인에게는 자신의 뛰어난 자질을 경쟁agon에서 발휘하여 공동쳊의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영예를 획득하는 것이 윤리적인 미덕이었다. 육보격의 서사시는 바로 이러한 영웅적인 윤리를 그려내는 적합한 웅장함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계급 간의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한 이후에 등장한 현인들의 가르침은 조화 단결에 초점을 맞춘 공동체의 윤리이며, 이를 위해서 절제와 신중함이 중요한 덕목으로 떠오른다. 그들이 짧고 외우기 쉬운 경구를 통해 이러한 덕목을 전달한 것은 윤리가 이제 영웅들의 세계에서 내려와 대중들이 공동체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실천적인 언명들을 담아 내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수많은 단편이 경구의 형식을 따른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 그가 당시의 현인 전통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짐작할 있다. 반면에 그의 윤리적인 언명들은 대중들의 삶을 위한 실용적인 지혜를 전해주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으며 점에서 그의 윤리가 마치 서사시의 영웅들처럼 뛰어난 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하지만 이제 영웅들은 이상 전쟁터에서 자신의 뛰어남을 증명한 자가 아닌, 만물이 도처에서 매순간 전쟁을 치르고 있음을 깨닫는 자이다. 다시 말해 그는 깨달음이라는 계기를 윤리학의 중심적인 요소로 도입하고 있으며, 깨달음은 우주와 인간에 관한 깊은 사색을 통해서 로고스를 파악하고 그것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헤라클레이토스 이후에 윤리학은 이상 대중들을 위한 실천적인 구호에 머무를 수가 없게 되었으며 우주론이나 인식론과 불가분의 관련성을 맺게 된다. 그는 우주에 대한 앎과 인간의 삶을 하나의 것올 파악한다. 그에게서 인간의 윤리적 행위와 유리된 앎은 존재하지 않으며 앎과 분리된 윤리적 행위는 불가능하다. 우주의 원리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서 살아간다는 생각은 헤라클레이토스 이전에는 찾기 힘들다. 그에게서 자연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은 분리되지 않으며, 앎이야말로 영역을 매개해 주는 동시에 인간의 가장 탁월한 덕이다.

 

08. 파르메니데스 Parmenides

파르메니데스느느 이오니아의 포카이아인들이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된 남부 이탈리아에 새로 개척한 도시 엘레아에서 이주민 2세로 태어났다. 전통적인 연대기 서술은 그의 출생 연대를 엘레아가 세워진 540 전후로 상정하였지만, 이런 문제에 있어서 통상은 정확성이 떨어지는, 그래서 사안에서는 오히려 신빙성 있어 보이는 플라톤의 언급을 따라 기원전 515 전후로 추측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있다. 부유한 귀족 출신이고 엘레아의 입법에 관여했으며, 매년 취임하는 공직자들이 그가 만든 법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을 했다는 기록(플루타르토스콜로테스에 대한 반박)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단지 사변적 사상가로만 사람이 아니라 당대인들의 실제 삶에도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존경받은 인물이었던 같다.

흔히 크세노파네스의 제자였다고 이야기되지만 피타고라스 학파와의 관련을 중시하는 전승도 있다(본문 4번과 5). 이오니아에서 시작된 철학이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탈리아 반도에서 펼쳐졌고 새로운 흐름이 바로 부류라는 점에서 가지 전승 나름대로 일리는 있다 있겠는데, 어떤 방식의 영향이 파르메니데스 저작에 들어 있는가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그에게 여향을 주었을 만한 사람이 바로 이오니아에서 활동한 헤라클레이토스인데, 파르메니데스가 먼저 활동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물론 없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대체로 헤라클레이토스가 먼저이고 파르메니데스는 철학은 그의 철학에 대한 대응의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는 방향으로 논란이 정리되어 있다.

엘레아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단지 시간상으로만이 아니라 중요성의 정도에 있어서도, 그야말로 초기 희랍 철학사의 한가운데 우뚝 있는 철학자라고 해도 손색과 이견이 없다. 이오니아에서 시작한 초기 희랍 철학사는 파르메니데스에 와서 일대 도전과 전환을 맞게 되고, 그리하여 이후 희랍 철학사 서양 철학사는 길게 드리운 파르메니데스의 그늘 아래에서 펼쳐지게 된다. 서양 철학사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일련의 주석이라고 어느 철학자의 말이 크게 무리 있는 평이 아니라 한다면, 비슷한 시각에서 바로 플라톤 철학이 파르메니데스 철학에 대한 일련의 주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철학자들이나 철학사가들이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이런 평가에 대체로 공감하는 것은 희랍 철학사에서 파르메니데스 철학이 내용과 형식 측면에서 일대 진전을 이루어냈다고 말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내용의 측면에서 파르메니데스 철학은 이전 철학자들의 자연 설명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토대로 자연/실재에 진정한 접근 방식이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자연/실재에 대한 설명의 기준과 원리를 제시하고 잇다. 자연 세계의 아르케arche-‘근원’, 기원 내지 구성 원리에 대한 물음과 대답이 이전 철학자들의 관심사였다면,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적 기획은 물음과 대답 자체가 어떤 의의와 한계를 지니는지를 반성하는데서 출발했다. 그런 반성의 산물의 바로 그의 형이상학과 자연학이다. 진짜로 있는 to eon 화두로 삼아 전개되는 원리aletheia편의 존재론이 그의 형이사항적 사변의 산물이라면, () 밤이라는 원리를 기초로 삼아 전개되는 의견doxa편의 우주론 내지 우주 생성론은 그의 자연철학적 사변의 산물이라 있다.

내용상의 이런 혁신은 진전과 병행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앞선 철학자들의 담론에는 주장이 있고 가르침이 있지만, 그것에 대해 이유를 대고 정당화하는 논변argument 완변학 모습으로 들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논변을 철학의 방법으로 확립시킨 철학자가 바로 사람이고, 그의 현존 저작에는 서양 지성사에서 최초로 완전한 논변의 모습을 갖춘 논의가 들어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철학다운 철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바로 파르메니데스에서부터라고까지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우리가 파르메니데스에 대해 말할 무엇보다도 특이하다고 만한 것은, 이제까지 말한 바와 같은 파르메니데스 철학의 위상과 중요성에 대한 공감의 크기가 그의 실제 저작에 대한 이해나 공감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서로 다른 시각에서 철학자를 이해, 평가할 있고, 그런 일은 철학사에서 흔히 일이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에게서 특이한 점은 그의 저작에 대한 이해가 천차만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의 중요성과 위대성에 대해서는 고대에만이 아니라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거의 모든 철학사나 철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파르메니데스 연구가 다른 초기 희랍 철학자들의 경우와 구별되는 다른 점은 그의 저작이 비교적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의 저작은 호메로스적 운율로 만들어진 서사시의 모습을 띠고 있는데, 가운데 대략 150 개의 시행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저작의 핵심 부분이라고 널리 동의되는 진리편은 소실된 부분이 미미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서로 노릇을 한다고 있는 서시도 온전히 남아 있다. 많은 논란의 대상인 의견만이 상당부분 소실되어 학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뿐이다. (어쩔 없이 우리는 여러 간접 전승들에 의존하여 의견편의 원래 모습을 짐작할 밖에 없다. 간접 전승들 가운데 일부가 본문에 소개되어 있는데, 본문 28-34까지는 의견편에서 개진되는 그의 자연학적 성찰이 그의 철학 내에서 갖는 위상에 관련된 부분이고, 본문 42-58번까지의 의견편의 세부 내용에 관련된 부분이다.) 이렇게 다른 초기 희랍 철학자들의 경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존 상태가 좋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텍스트는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읽혀왔고, 심지어 같은 구절들을 토대로 상반되기까지 그림들이 제시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200여년 지속된 현대 파르메니데스 연구는 초기 희랍 철학 가운데서도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에 속한다고 있다.

그의 저작에는 다른 초기 희랍 철학자들에서와 마찬가지로자연학에 관하여peri physeos’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표제를 자신이 붙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예컨대 본문 32번의 심플리키오스 같은 사람) 없지는 않지만, 그것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표제의 정당성까지도 의심하는 이들이 많다. ‘자연physis’이라는 용어가 부변의 본성이라는 측면과 더불어 생성, 성장, 운동, 변화 등의 측면을 함께 포함하고 있어 그의 저작 전체를 포괄하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를자연부정론aphysikos’ 또는무우주론자acosmist’ 보는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전승이 바로 이런 정신에서 나왔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의 저작 2 의견편에 대해서는 이런 표제가 부당하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현대 다수 학자들의 견해와 달리 고대에는 의견편 교설이 파르메니데스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공유되어 있었던 것도 간과할 없는 대목이다. 그런 정신에서 파생된 것이 그를자연 탐구자physikos/physiologos’ 보는 플루타르코스나 심플리키오스 등의 전승이다. 이렇듯 자연에 관한 그의 태도가 어떠했는가에 관해서는 이미 고대에서부터 격렬한 논란이 있어 왔고 오늘날에도 문제가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사안이지만, 파르메니데스 이후 고대의 어느 시기부터 그의 저작이자연에 관하여라는 표제로 불렸다는 것만큼은 의심할 없는 사실인 같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그의 저작은 크게 부분으로 나뉘는데, 각각서시’, ‘진리편’, ‘의견편이라 불린다. 구절들 하나하나가 논란에 열려 있지만, 비교적 논란의 여지가 적은 방식으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시(단편 1) 파르메니데스가 익명의 여신을 만나러 가는’(여행) 서사시적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너울을 걷어붙이고 밤의 집에서 빛으로 태양의 딸들이 길잡이 역할을 하고 암말들이 끄는 마차를 상태에서, 시인은 자기 충동이 이끄는 대로 길을 간다. 마차 양쪽 바퀴의 축은 빛과 소리를 내면서 시인을 날라주고, 일행은 결국 밤과 낮이 길에 놓여 있는 에테르의 문에 이른다. 문을 지키는 디케(정의) 여신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처녀들( 태양의 딸들) 부드러운 말로 설득하고, 디케는 빗장을 밀어내어 문을 열어주게 되며, 일행은 문짝의 벌어진 틈을 가로질러 마찻길로 들어선다. 그리하여 시인음 이름 모르는 여신을 만나 환대를 받고, 여신에게서 가르침을 받게 된다. 여신은 시인이 지나온(여행) 성격을 규정하면서 앞으로 배우게 내용이 무엇인지 이야기 해준다. 그녀는 시인이 배우게 내용을 로서 제시한다.

여신이 설파하는 본격적인 내용 크게 진리편(단편 2부터 단편 8, 49까지) 의견(단편 8, 50부터 단편 19까지)으로 나뉜다. 진리편의 서두(단편 2)에서 여신은 앎을 향한 탐구의 길로서 제시한다. ‘있다(또는 ‘…있다’esti)라는 길과있지 않다(또는 ‘…이지 않다ouk esti)라는 (여기서 우리는 탐구의 여신이 서시에서 말한 배움의 다르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후자를 배울 없는 길로 기각하게 되고, 이후 단편 7까지의 내용은 확고한 앎을 가능하게 하는 길로서있다라는 길만 성립한다는 논점을 확립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런데 단편 6 단편 7에서 길을 혼동하는가사자의 제시되고 기각된다. 핵심 단편으로 간주되는 단편 8 유일하게 남은있다 길에 관한 논의이다. 확실한 앎의 대상인 있는 것은 불생불멸하며 온전한 덩어리이고 부동이며 완전하다는 것을표지( 특징)’ 갖고 있다는 것이 주장괴고, 표지를 정당화하는 논변들이 이루어진다. 논변들의 끝자락에 논변들을 아우르면서, 있는 것을 완벽하게 둥근 공의 덩어리에 비유하는 것으로, 있는 것에 관한 논의가 마무리된다.

진리편 논의를 마감하면서 여신은 이제 자기 이야기의기만적인 질서 들으면서 가사자들의 의견을 배우라고 명한다. 가사자들의 어떤 견해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그럴듯한설명으로 제시되는 우주론은 형태, () 밤을 원리로 놓는 자연 설명이라는 점이 단편 8 후반부와 단평 9에서 얼개로 제시되고, 단편 10 단편 11에서는 앞으로 개진될 우주론이 다를 항목들이 열거된다. 이후 단편 18까지 분야별 설명(우주 그림과 디이몬의 역할, 에로스이 탄생, 달의 작용, 지구의 성격, 가사자의 사유에 관한 이론, 남녀의 발생과 결합 ) 제시되고, 단편 19에서 이런 생멸이 끝없이 되풀이됨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독사편의 자연 설명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다리 나뉨 주로 의존했던 이오니아적 설명에는 빠져 있던섞임 논의선상에 올라와 있고, 이것은 이후다원론자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조명된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은 부분들까지 접했을 것이 분명한 플루타르코스의 전승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의 의견편에는 자연학적 저술이 담게 마련인 주요 내용들이 모두 포괄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철학 다편을 이해하는데 쟁점이 되는 주된 문제들을 중요성이 인정되는 정도에 따라 열거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각각은 앞의 문제들에 의존한다.

  1. 진리편의있다(또는 ‘…이다’) 의미와 주어. ‘있는 to eon’ 성격
  2. 진리편에 언급된 길의 수와 의미, 길들 간의 관계
  3. 독사편의 내용과 위상, 결국 그것의 진리편과의 관계
  4. 파르메니데스 철학과 이전, 이후 사상의 연관
  5. 서시의 의미와 역할

문제들 하나하나에 구체적으로 살을 붙이는 것은 자리에서 만한 일이 아니며, 독자들의 몫으로 남긴다(파르메니데스 철학에 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 국내와 서양의 대표적인 이차 문헌들은 권말[참고 문헌]파르메니데스항목에 제시하였다). 그저 다음과 같은 점만 덧붙이로 한다. 그는 논변의 전통을 확립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시로 철학한 사람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와서 이루어지는, 논변이라는 철학 전통의 확립은 다른 한편으로 전통, 특히 서사시 전통과의 긴밀한 연결 고리를 갖고 이루어진다. 그는 앞선 철학 전통과 전통을 일면 계승하면서 동시에 철저한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이후 철학의 전개도 크게 방향으로 나뉜다. 그의 직계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른바엘레아 학파 그의 논변적 정신과하나의 있는 옹호하는데 주력했다면, 이들과 대척점에 있는다원론자들원자론자들 변화, 운동하는 여럿을 적절한 원리로 일관되게 설명하겠다는 이오니아적 정신을 살리는 방안을 강구했다. 달리 말하면, 전자 그룹은 그의 혁신적 측면을, 그리고 후자 그룹은 그의 전통적 측면을 각각 발전시켜 가게 되는 것이다.

 

09. 제논 Zenon

제논은 엘레아 출신으로 파르메니데스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다. 플라톤이파르메니데스에서 하는 증언에 따르면, 대략 기원전 449년경에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 파르메니데스, 제논 사람이 만났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출생에 관한 고대 최초이자 유일한 증언일 플라톤의 증언을 신뢰한다면 대화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당시 나이를 미루어 제논의 출생년도를 대략 기원전 489년경으로 잡을 있다. 연도는 아폴로도로스가 보는 제논의 40 시절의 연도인 기원전 464-460년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그러나 아폴로도로스의 증언은 스승과 제작 사이는 무조건 40, 전성기는 무조건 40세로 잡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플라톤의 대화편 장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플라톤이 굳이 없었던 사실까지 꾸며대지는 않았으리라는 추정하에 플라톤의 증언이 한결 신빙성이 있다고 받아들여진다.

제논의 출생에 대한 유일한 증언이다시피 것이 사실 여부의 확인이 곤란한 플라톤의 대화편 속의 설정인 것에서 있듯이, 제논의 일생에 대하여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기원후 10세기 말엽 완성된 일종의 백과사전인수다 간략히 전해진 것이 전부다. ‘수다 따르면, 제논을 엘레아의 참주 네아르코스(또는 디오메돈) 축출을 모의하다 발각돼 심문받던 자신의 혀를 스스로 끊어 참주에게 뱉어서 맷돌에 으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가 저술의 제목으로 전하는 가지가 있지만 그다지 믿을 만하지는 못하다. 다만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제논의 역설들이 실렸으리라 추정되는 저술에 관해서는 가지 추측이 있다. 제논의 역설 중에는만일 여럿이 있다면이라는 가설로 시작되는 역설들이 있는데, 이것들은있는 것이 여럿인 세계 성립할 없음을 입증하려 한다. 역설들은 플라톤이파르메니데스에서 밝히고 있듯이 제논 자신의 논증 형태가 그대로 직접 인용된 것들로 보인다. 하지만운동의 역설이라고 이름붙은 제논의 가지 역설은운동 불가능함을 입증하려는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것이지만 제논 자신의 논증 형태를 그대로 살려서 인용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종류의 역설은 모두 우리 상식에서 벗어나는 결론을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지만 형태나 직접적인 논박의 대상이 다르다. 따라서 가지 다른 형태의 역설들은 각기 다른 책에 실렸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제논이 적오도 종류 이상의 저술을 했으리라는 추측이다. 이런 추측은만약 여럿이 있다면이라는 형태의 논증들이 담겨 있는 제논의 저술이 있다는 플라톤의 증언이파르메니데스 담겨 있기 때문에 성립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증언을 의심하고, 제논의 권의 저술에여럿의 세계 아니라, ‘운동 부정하는 논증들도 같이 담겨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한다. 거꾸로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간접적으로 전하는 제논의 역설들의 본래 형태가 플라톤이 전하는만약 여럿이 있다면 형태였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예컨대 유명한 아킬레우스의 역설은 본래만약 여럿이 있다면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느리면서 빠르다 형태였으리라는 추측이다.

역설의 형태와 관련해서 저술의 문제와는 별도로 제논의 역설의 목적에 관한 논란이 있다. 플라톤의파르메니데스 따르면, 제논은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역설들을 만들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반대해서 있는 것이 하나라면 많은 우스운 결과를 야기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역설들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제논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역으로 여럿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박하여, 있는 것들은 여럿이라는 그들의 가정이 있는 것은 하나라는 가정보다 훨씬 우스운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밝혀보이려 해도 했다고 플라톤은파르메니데스에서 전하고 있다. 이렇게 논증의 상대방을 설정하고, 귀류법을 사용해서 상대방의 전제가 모순에 부딪혀서 이상 유지될 없음을 보이는 제논의 논증 방법을 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논을 변증술의 창시자라 하였다.

그런데 플라톤이 전하는 제논의 목적에 대한 반대 의견이 고대에서부터 전하다. 에우데모스로부터 촉발된 듯한 논쟁을 반즈가 정리해서 다시 제기한다. 반즈에 따르면 남아 있는 제논의 논법은 전형적인 귀류법 형식이 아니다. 제도로 귀류법이 되려면 처음에 출발한 전제가 불합리한 결론을 도출함에 보이고 다음에 전제가 거짓임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제논의 논증에는 마지막 끝내기 수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반즈는 제논의 논증이 귀류법이 아니라 에우데모스의 증언처럼 양도논법으로 이루어진 것로서, 다원론뿐만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의 일원론마저 공격의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제논은 일원론자가 아니라 부정론자nihilist라는 것이 반즈의 생각이다.

하지만 논증의 목적이 무엇이냐와 무관하게 제논의 역설들은 플라톤의 증언대로라면 본의 아니게 도출된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찬반격론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논변들을 그저 솜씨 좋은 자의 궤변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는 사람들에서부터 정교하면서도 심오한 논변이라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하다. 이런 엇갈린 평가에도 불구하고 제논의 실제로 역사적으로 수행해 역할은 그를 주목할만한 철학자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그의 역설들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 그와 관련된 개념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예리하게 다듬을 있었다. 또한 제논은 자신 이후의 자연철학자들로 하여금 물질의 최소 크기에 관한 주제에  민감할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제논의 논증 방식은 가지의 유산을 남겼다. 한편으로여럿이 있다면 그것들은 닮은 것이면서 닮지 않은 것들일 수밖에 없다 같이 가지 주제의 측면에서 논증을 구성한 방식은 프로타고라스가 받아들여서 5세기의 소피스테스들의 가장 악명높은 무기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추상적인 논증 방법들을 뒤따른 흔적이 5세기의 몇몇 문헌에 남아 있으며, 플라톤은 영향을 받아파르메니데스 지극히 추상적인 논의를 전개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역설들 중에서도 운동과 관련된 역설들은 시간, 공간, 운동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식에 대하여 주목하도록 사람들을 재촉하였고, 제논의 결론을 받아들이거나 반박하도록 몰아붙였다. 특히 20세기 들어 같은 역설들은 수학자와 철학자 사이에 공간, 시간, 무한에 관한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0. 멜리소스 Melissos

멜리소스는 제논과 달리 엘레아 출신이 아니면서도 제논과 더불어 파르메니데스 이후의 엘레아학파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가 사모스와 아테네의 전쟁 당시 페리클레스를 상대로 해전에서 차례나 승리를 거둔 장군이었다는 증언(플루타르코스)으로 , 페레클레스를 상대로 거둔 두번째 해전 당시인 기원전 441년에 이른바 전성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제논이 기원전 449 전후에 40세의 나이로 아테네에 들렀다는 플라톤의 말과 비교해 , 제논과 멜리소스는 비슷한 연배였거나 멜리소스가 다소 어렸을 듯하다. 제논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며, 그가 아낙사고라스와 교류했으며, 그의 저술자연에 관하여 혹은 있는 것에 관하여라는 제목이었다는 기록 정도가 남아 있다. 밖에 그의 사상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모방한 위서로 보이는멜리소스, 크세노파네스, 고르기아스에 관하여 비교적 소상히 해설되어 있다.

멜리소스는 스승 파르메니데스나 제논에 비해 상대적으로 철학사에서 폄하되어 왔는데, 이는 그의 생각이세련되지 못하다거나정교함이 결여되어 있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평가한 대체로 기인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최근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반박되어 왔으며, 멜리소스는 엘레아학파의 철학을 답습한 아마추어 철학자가 아니라 나름 철학을 정립한 철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철학사를 통해 멜리소스를 평가할 가장 곤란한 점은 멜리소스와 원자론자들 사이의 관계다. 멜리소스의 저작의 저술 연도에 대한 확실한 전승이 없기 때문에 저술이 원자론자 이전에 나온 것인지, 이후에 나온 것인지를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멜리소스의 저술이 원자론과 밀접한 연관를 맺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전에 나왔다면 원자론은 멜리소스의 다원론 논박에 대한 대응의 성격을 갖추고 있으리라 있고, 이후에 나왔다면 멜리소스의 저술은 원자론에 대한 비판을 함의하고 있다고 보아야 것이다.

앞에서 밝힌 멜리소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낮은 평가는파르메니데스는 정의logos 측면에서 하나인 것에 매달린 듯하고, 반면에 멜리소스는 질료의 측면에서 하나인 것에 매달린 듯하다 자신의 판단에 따른 결과인 듯하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사실 다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정의의 측면에서 하나의 특성을 밝혀나간 것이 사실이지만 멜리소스는 질료의 측면을 긍정적으로 보아 하나를 규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제논과 같이 멜리소스는 파르메니데스의 하나를 질료의 측면에서 이해해서 세계를 설명하려는 다원론자들을 공격하고자 했기 대문에 질료의 측면에 중점을 것으로 보아야 것이다.

 

11. 엠피도클레스 Empedokles

엠피도클레스는 아크라가스 출신으로 그의 생존 연대를 확실하게는 결정할 없다. 그가 60 가량 살았음을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서 있다. 아폴로도로스는 84번째 올림피아기인 기원전 444-1년을 그의 전성기로 보며 그가 기원전 444-5년에 투리오이를 방문했다고 전하다. 아낙사고라스가 기원전 500년에 태어났고 고르기아스가 기원전 485년에 태어났음을 받아들이고, 고리기아스가 엠페도클레스의 제자였고 엠페도클레스는 아낙사고라스보다 젊었지만 아주 젊은 것은 아니라는 전거를 받아들이면, 그의 생존 연대는 대략 기원전 495(2)-435(2)년이다.

엠페도클레스가 태어난 아크라가스가 위치한 섬은 대지 제의의 고향으로 여신 데메테르르르 숭배했으며, 이후 엘레우시스교뿐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오르페우스교 피타고라스주의의 영향이 강했던 지역이다. 엠페도클레스의 어린 시절에 아크라가스는 참주 테론의 통치 아래 있었다. 테론이 죽은 민주주의는 쇠퇴했고 당시의 정치적 격동 속에서 엠페도클레스는 지도적 역할을 맡았다. 후에 그는 민주제의 옹호자가 되었으나 그의 민주적 이상과 방법들이 많은 적을 만들어내어 결국 펠로폰네소스에서 추방되어 죽었다.

엠페도클레스의 사상 형성과 관련된 배경은 가지이다. 먼저 엠페도클레스의 사상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투리오이가 고대 피타고라스주의와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의 중심지라는 점에서 투리오이로의 여행이 그의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이다. 나아가 엠페도클레스는 기원전 5세기의 희랍, 니체가 비극의 시대라 불렀고 희랍에서 서정시와 낭만주의 시대로 분류되는 시대를 경험한 인물이다. 그런 만큼 그는 핀다로스의 시를 듣고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 다른 한편 시대는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가 활동한 합리주의의 시대, 희랍에서 위대한 계몽과 회의의 시대이며, 시대에 희랍 사상은 몇몇 주목할 만한 사상가들에 의해 새로운 세계관의 문턱을 넘어섰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피타고라스주의와 오르페우스교가 그의 사상에 미친 영향을 접어둔다면, 그는 탁월한 변론가rhetor였을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의 추종자이자 제자였다고 전해진다.

소크라테스의 인물이 있기 전에는 엠페도클레스야말로 개인의 전기적 상황이 그의 사상 내용과 없이 결부된 인물 명이다. 그가 죽은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에피메니데스나 피타고라스의 전설에 못지않은 그에 대한 전설이 세상에 회자되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일화나 그가 편의 시를 보면 도무지 일관되지 않은 기질과 정신 세계를 지닌 기이한 인물로 보이기조차 한다. 그런 만큼 고대에서나 오늘날에도 그의 사상의 본말은 차차하고 우선 그의 인물됨을 둘러싼 다양한 평가가 있었다.

고대의 저자들 중에 그에게 거의 처음 관심을 보인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며, 그는 호메로스와 비교해서 엠페도클레스는시학에서시인은 못되고 자연학자physiologos 일컬어야 마땅하다 평한다. 오늘날 몇몇 평자들이 그에게 받은 인상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희랍보다 훨씬 앞선 시대, 아니 차라리전혀 다른 세계에 인물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의 당대의 새로운 유형이라기보다 다분히 오래 유형의 인물로서 도즈는그리스인과 비이성적인 에서 그를주술사이자 자연학자이고, 시인이자 철학자이며, 변론가, 의사, 대중의 조언자 여전히 미분화된 역할들을 한꺼번에 떠맡은 샤먼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그의 인물됨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까닭은 그의 시가 현저히 대조적인 특징 때문이다. ‘자연에 관하여peri physeos에서 엿보이는 명민한 관찰력과 확고한 사고력의 소유자가 또한정화의례들kathamoi 썼고 자신을 신이나 주술사로 자처한 것에 대해 많은 학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시는 서두에서부터 뚜렷이 대조를 보인다. ‘자연에 관하여 시종일관 이오니아적인 과학적 태도와 엘레아적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나와 여럿, 정자와 운동, 세계주기, 세계발생론과 동물발생론, 생리학, 인식학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육보격의 운율로 자연 세계에 관해 노래한다. 시는 희랍의 서사시 전통을 바탕으로 은유와 직유, 반복, 긴밀히 짜인 논변들의 교차를 통해 시의 효과를 노리는 독특한 문체로 씌어 있다.

자연에 관하여에서는 자연학자의 태도로무사 여신의 믿음직한 가르침들pistomata’ 전하는 반면, ‘정화의례들에서는 치료자이자 예언가의 태도로 자신이진리를 알고있으며 자신의 말이복된 신들에 관한 훌륭한 agathos logos’이라고 자처한다. 그러나 그는 추락한 영혼daimon으로서 지상에 유배되었고 그리하여 그가 겪어야 잔혹한 윤회의 수레바퀴에 탄식하며 흘림으로 심화되는 죄의 오염과 지상의 삶의 불운에 고뇌한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가 대지의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천상의 지복의 삶으로 회귀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엠페도틀레스의자연에 관하여 파르메니데스 이후 희랍철학에서 합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우주론을 제시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파르메니데스가 진리편에서 제시한 실제의 규준들을 수용하고, 규준들을 만족시키는 실재들을 우주론의 토대에 놓는다. 이를 기초로 그는 생성과 소멸에 대해 파르메니데스가 가한 비판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감각세계를 설명할 길을 모색한다. 이러한 우주론의 전제로서 그는 우선 있지 않은 것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생성과 있지 않은 것으로의 소멸을 부정한다. 파르메니데스처럼 엠페도클레스에게도 실재들이 지닌 특성은 생성 소멸하지 않고 불변부동하며akinetoi 동질적homoia이다.

그러나 그는 파르메니데스가 실재에 부여한 원칙들을 모두 수용하는 반면에 수에서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을 상정한다. 여럿의 실재들은 희랍 초기의 사유에서 신격화된 형태로 알려져 있던 가지 원질인 , , 공기, 흙이다. 그는 원질을 있는 to eon으로 상정하고 그것들에 각기 독립된 성질과 실체적 형태를 부여한다. 그는 원질에 각기 존재론적 동등성과 독립성을 부여함으로써 원질이 각기 성질 또는 종류에서 하나인 실재임을 보장하고, 변화하는 실재에 대한 이오니아적인 사유와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실재를 가리키는 사용한 엠페도클레스의 용어는 만물의 뿌리thizomata 가사적인 것들의 pege이다. 피타고라스주의가 그에게 미친 영향을 고려할 그가 말한 용어들은 고대 피타고라스 학파의 텍트락튀스에서 나왔을 있다. 희랍에서 4원소에 대한 생각은 엠페도클레스의 갑작스러운 영감에 따라 등장한 것이라기보다 점차적으로 도달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할 시기에 가지 원소를 처음 인식했던 것이 엠페도클레스인지 확실히 결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4원소에 대한 그의 사상의 독창성은 대체로 의심없이 받아들여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희랍 철학에서 세계의 시원 또는 자연학의 출발점으로서 원소의 지위를 처음으로 분명히 사람은 엠페도클레스이다

나아가 엠페도클레스는 감각세계의 모든 변화의 현상을 뿌리의 혼합mixis 분리diallaxis 환원해 설명한다. 사람들이 생성과 소멸이라 부르는 현상은 뿌리들의 혼합과 분리이다. 사물들의 모양과 장소 변화는 혼합 또는 분리의 결과이다. 혼합은 여럿에서 하나가 ek pleonon hen einai 뜻하며 분리는 하나에서 여럿이 됨을 뜻한다. 엠페도클레스는 이러한 혼합과 분리의 원인으로서 사랑philotes 불화neikos 힘을 신격화된 형태로 제시한다. 실재들은 본성상 운동하거나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만 결합되고 불황에 의해서만 분리된다. 엠페도클레스의 우주론은 점에서 다른 이오니아 물활론과 근본에서 다르다. 그가 희랍의 물활론 사상을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탈피했는지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운동의 원인과 대상을 구분한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의견편 이후 그에 의한 물활론의 탈피가 멀리까지 진전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없다.

특히 엠페도클레스의 혼합 이론은 희랍 사상에서 주목할 만한 진보 질적 사고에서 양적 사고로의 전환으로 평가된다. 그에게서 원소들이 사랑에 의해 하나로 되는 혼합은 개념적으로는 가지로 구분된다. 그것은 원소들이 구로 되는 혼합을 뜻하며,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개별적인 유기체로 되는 혼합을 뜻한다. 개념적 구분의 근거는 구가 오직 사랑에 의해서 지지되는 만큼 분리나 반목이 없는 반면에, 현세계의 유기체의 형성에서는 사랑과 불화가 공존하며 대결하는 만큼 혼합과 분리가 번갈아 행해지는 있다.

혼합은 대부분의 화학적 혼합처럼 구성물들의 성질이 상실되는 혼합이 아니라 원소들의 성질이 그대로 유지되는 기계적 혼합이다. 유기체의 구성에서 원소들은 질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양적 비례에 따라 혼합된다. 그의 혼합 이론은 처음으로 우주론에 제작techne 모델을 도입했다고 평가되며 이는 후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스토아 학파에 영향을 준다.

나아가 엠페도클레스는 원소들의 혼합과 분리를 유기체뿐만 아니라 대우주에도 적용된다. 우선 그는 원소들이 사랑에 의해 하나로 되는 혼합을 순환 주기에서 구로 묘사하고, 불화에 의해 여럿으로 되는 분리를 세계로 상정한다. 흔히사랑의 언급되는 시기에는 가지 원소가 하나의 구를 이룰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혼합된다. 불화의 힘이 배제되고 사랑이 전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완전한 지배에서는 원소들의 가시적인 성질과 형태가 분간될 없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자신의 성질과 종류를 유지한다. 이러한 사랑의 혼합체는 이후 아낙사고라스가 말하는어떤 것도 분별되지 않는 완전히 섞인 상태 모델이 된다.

그는 하나에서 여럿으로 여럿에서 하나로 되는 분리와 혼합의 시기가 순환 속에서 거듭 교체된다고 함으로써, 아낙시만드로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 이어 순환 사상을 우주론에 새롭게 도입한다. 흔히 우주의낮과 비유되는 시기의 교체는 세계주기의 교체major alteration 해석된다. 이는 사랑의 지배에서 불화의 지배로 바뀌는 교체를 가르킨다. 불화가 지배하는 두번째 시기에는 사랑과 불화의 힘이 공존하고 서로 대결하며, 불화가 증대하는 시기와 사랑이 증대하는 시기로 다시 구분된다. 작은 시기의 교체는 교체minor alteration 일컬어지며, 교체의 중간에는 불화의 극점이 있다고 여겨진다. 엠페도클레스의 세계주기의 구분에는 상이한 여러 해석들이 있으나 전통적으로 그의 세계주기는 단계 또는 단계로 구분된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자연적 구조와 인간 동식물의 형성은 불화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는 두번째 시기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시기에는 사랑과 불화의 힘이 공존하여 대결하는 만큼 혼합과 분리가 거듭 이루어지며, 그에 따라 유기체의 생성과 소멸도 혼전을 빚으며 거듭 반복된다. 그러나 세계주기의 구분뿐 아니라, 이른바 세계 여부를 둘러싸고 19세기 이후 상이한 해석 전통이 있으며, 그의 세계발생론과 동물발생론은 세부적인 면에서 많은 이견이 있다.

엠페도클레스에서 감각과 인식의 기본 원리는 물체의 친화성 원리로서 이는 4원소 혼합 이론을 감각 인식에 적용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물체들에는 표면에 조밀하게 들어선 통로poros들이 있으며 원소들뿐만 아니라 원소들의 혼합체로부터 방출물들aporai 나오는 이것들이 자신들과 크기가 같은 통로들에 들어감으로써 감각이나 인식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흙으로써 흙을 보며, 물로서써 물을, 아이테르로써 신적인 아이테르를, 불로써 파과적인 불을 본다”. 그의 이러한 인식 원리를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비슷한 것에 의한 비슷한 것의 인식he de gno sis tou homoiou to homoioi으로 해석한다.

나아가 생각noema 장소를 심장kardia 연결하는 그의 견해는 호메로스 이래 희랍의 전통으로서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쿠로스 그리고 스토아학파에서도 영향을 있다. 특히 심장이 아니라심장 주위의 생각이라고 것은 그의 새로운 사고방식. 그는모든 것이 사려phronesis 갖고 생각의 몫을 가진다  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에 이어만물은 생각한다pephroneken hapanta” 만물유심사상을 제시하나 자세한 전거는 남아 있지 않다.

엠페도클레스의 두번째 정화의례들 그의 윤리학과 종교 사상을 담은 단편들이다. 그러나자연에 관하여 비해 시는 남아 있는 단편이 많지 않다. 그것은 이야기 대상이나 태도, 시와 현저하게 다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시는 단편들의 배치와 구분은 물론이고 해석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또한 엠페도클레스의 우주론과 관련해서 일관성과 통합성을 찾기도 쉽지 않다. 그의 사상적 배경과 남아 있는 단편들로 시에는 고대 피타고라스주의와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의 흔적이 들어 있다. 거기에는 , 정화, 환생과 윤회, 금욕, 구원의 사상 희랍 초기부터 있었던 윤리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워선, 시의 제목인카타르모이katharmoi’ 일반적으로 희랍에서 정화 제의를 가리킨다. 카타르모스는 미아스마miasma 뮈소스mysos 불리는 오염을 정화하는 의식이다. 오염의 원인은 죄이며, 이는 전쟁과 불화에 의해 야기된 살생이나 육식과 동물 제의에서 빚어진 살육의 결과이다. 엠페도클레스의 여러 단편은 이러한 정화 사상을 담고 있으며, 이것이 구원과 윤회의 모티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는 그의 우주론이 윤리학으로 발전된 것일뿐더러 특히 우주론에서의 순환 사상이 종교적으로 각색된 것이다.

엠페도클레스의 정화 사상은 헤시오도스적인 황금시대를 바탕으로 한다. 그기 말을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단편은 희랍에 널리 퍼져 있던 황급시대에 대한 믿음이 그의 사상에 반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가 상정했음직한 황금시대는 세계발생 이전에 있었던 우주의 상태가 아니다. 사랑이 완전히 지배하는 시대에는 신적인 구만 있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에게 황금시대는 불화의 침입으로 구가 파괴되었으나 아직은 사랑의 힘이 강하게 유지되는 세계발생의 초기 단계로 짐작된다. 이는 전통적으로 희랍에서 단순 쾌활함과 지복의 시대가 크로노스의 시대로 여겨졌고 그에 이어 제우스와 포세이돈의 시대가 이어진다고 사상과는 사뭇 다르다. 그가 상정한 황금시대는 동물들과 다른모든 것들이 인간들에게 유순하고 온화했으며인간들 사이에서도 살육과 육식으로 인한 오염이 아직 없었던 시대이다.

그러나 엠페도클레스는 태초의 인간들의 황금시대가아낭케의 신탁 따라 필연적으로 막을 내린다고 역설한다. 이는 자연학적으로는 순환 주기의 시간적 교체 사랑이 지배하는 시기가 불화가 지배하는 시기로 필연적으로 교체됨을 의미한다. 그가 태초의 인간들과 다이몬daimon 동일시했는지는 없다. 그러나 그는 인간들의 허물hamartia 불화neikos 초래한 죄로 인해 다이몬에 속한 인간이 지상으로 추방되었다고 역설한다. 지상으로 추방된 다이몬은 육화된 가사적인 족속으로서 투쟁과 탄식 가운데 태어나며살육과 원한, 죽음의 종족들로서 미혹의 들판을 헤맨다”.

엠페도클레스는 추방된 자이자 떠돌이로서 다이몬이 겪는 환생과 윤회의 고통을 묘사하면서 여기에 자신을 포함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윤회에는 엄격한 삶의 위계가 설정된다. 위계에서는 식물보다는 동물이, 동물보다는 인간이 높은 위치에 있으며, 인간들 중에서도 예언자, 시인, 의사, 통치자가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마지막으로 윤회의 수레에서 벗어나 천상의 다임몬으로 회귀하는 기간을 엠페도클레스는 3 년으로 설정한다. 추방된 다이몬의 윤회와 회귀는 자연학적으로는 우주 순환의 영속적이고 필연적인 자연 법칙이다. 하지만 엠페도클레스는 이를 윤리적 차원에서 구원과 정화로 승화시킨다. 그가 요청한 정화는 다섯 개의 샘에서 청동으로 물을 퍼내는 알려지지 않은 정화 제의와 관련된다. 구원은 악을 멀리하고 월계수 잎과 콩을 금하는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주의의 계율과 관련된다. 

그러나 엠페도클레스는 이러한 전통적인 정화 제의나 계율과 나란히 신적인 정신과 지혜를 강조함으로써 종교적 차원과는 다른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는 전통적인 신인동형적 신을 비판하고 신의 정신phren 동일시한다. 그는 이상적인 인간형을 제시하면서 지혜로운 일들sophon ergon 정통하고 생각을 다해모든 있는 것들tonontob panon’ 각각을 간파할 것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엠페도클레스의 윤리학은 최종 지점에서 자연학의 근본 원리와 그에 대한 논변적인 인식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인간에게 근본적인 윤리적 대립 쌍인 행복과 불행을 신적인 생각과 어두운 의견doxa이라는 대립쌍과 일치시키며 전자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한다.

 

12. 필롤라오스와 기원전 5세기 피타고라스주의자들

피타고라스학파 철학자들과 관련해서는 다른 자연철학자들의 경우와 비교될 없을 정도로 출전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피타고라스나 피타고라스주의자들과 관련한 자료는 풍부하지만 상당히 과장된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에 대해 과장된 정보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세기 후반 무렵, 플라톤의 계승자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플라톤의 후기 형이상학을 피타고라스에게 귀속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테오프라스토스도 그런 경향을 보인다. 이런 경향은 나중에 더욱 강화되어, 피타고라스를 진리의 원천처럼 추어올리고, 피타고라스 이후에 더욱 강화되어, 피타고라스를 진리의 원천처럼 추어울리고, 피타고라스 이후에 나온 모든 철학적 진리를 그에게 귀속시키는 이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피타고라스나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의 이름을 빌린 많은 위작들을 내놓기까지 하는데, 대부분은 대략 기원전 150-기원전 100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피타고라스주의자의 고유한 사상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신빙성 있는 자료와 그렇지 않은 자료를 구분할 있는 기준을 마련하는 일이 더없이 중요하다. 

필롤라오스는 피타고라스학파에서자연에 관하여 책을 펴낸 첫번째 인물로 간주된다. 지금은 책의 일부로 여겨지는 단편들 밖의 증언들만 남아 있다. 단편들 어떤 것이 진짜 필롤라오스의 책에 있던 것인지, 그리고 어떤 증언이 신빙성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부분적으로 이견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판별하는 틀의 기준에는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보여주는 것은 가짜이고, 기원전 5세기의 피타고라스주의에 대한 아리스토테렐스의 설명과 일치하는 내용은 진짜로 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기준으로 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플라톤의 계승자들이나 테오프라스토스처럼 무리하게 피타고라스를 진리의 원천으로 보지도 않고,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을 구분해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피타고라스주의의 체계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논하고 있고, 피타고라스주의자의 책을 보고서 언급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있는 구절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메논의 언급을 보면 메논 자신이 필롤라오스의 책을 보았음을 짐작할 있는데, 그렇다면 그의 선생인 아리스토텔레스도 책을 접하기 어렵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필롤라오스는 피타고라스 아르퀴타스와 더불어 피타고라스학파에서 중심적 위치를 갖는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의 철학자로서, 기원전 470년경에 태어나서 385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그는 피타고라스가 죽은 100 후에 태어났고, 아르퀴타스보다는 50년쯤 앞서 태어난 셈이다. 자연철학자들과 비교하면 그는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보다는 세대 정도 뒤에 태어나고, 데모크라테스보다는 세대 정도 앞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와 관련해서는 이견이 있다. 아라스톡세노스는 그가 타라스 사람이라고 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메논과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크로톤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이견의 해소를 위해 필롤라오스가 이탈리아 남부의 크로톤에서 태어났으나 나중에 타라스에 정착해서 것으로 추정하는 일반적이다.

필롤라오스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일원으로 분류되지만, 단순히 피타고라스주의자라고 이해될 없는 면도 지니고 있다. 그는, 피타고라스처럼 혼의 전이설이나 여러 금기 사항의 준수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피타고라스의 수학적 우주론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피타고라스에게서는 없던 한정하는 것들perainonta 한정되지 않은 것들aperia이란 개념으로 새로이 형이상학적 체계를 세운다. 이를 통해 그는 자연철학의 주된 흐름 속에 분명한 위치를 갖게 된다. 파르메니데스 이후 자연철학자들이 파르메니데스를 의식하지 않고 철학할 없었듯이 필롤라오스 역시 그랬고, 나아가 다른 자연철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충분히 고려하며 철학적 탐구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롤라오스의 핵심 사상은 가지 원리, 한정하는 것들과 한정 되지 않은 것들 조화에 관해 언급된 단편들에 담겨 있다. 그러므로 우선 가지 원리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인식론, 우주발생론 등을 개괄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들 속에 담겨 있는 몇몇 문제점들을 검토해 것이다.

필롤라오스는 우주와 속에 있는 모든 것이 한정되지 않은 것들과 한정하는 것들이라는 요소로 짜맞추어졌다(조화롭게 이루어졌다hamochthe 보고 있다. 요소가 우주의 근원적인 요소 혹은 우주를 설명하는원리근원arche라는 것이다. 필롤라오스가 요소를 만물의 근원 혹은 원리로 삼은 이유는 본문7 통해 있다. 단편은 필롤라오스의 단편들 가운데 가장 난해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개략적인 언급에 그치기로 한다. 본문 7 외형상 엘레아학파에 특징적인 선언논증 형식을 보여준다. 우선 가능한 선언지 셋이 제시된다. 존재하는 것들이 모두 한정하는 것들이거나, 아니면 한정되지 않은 것들이거나, 아니면 한정하는 것들과 한정되지 않은 것들이라는 것이 필연적이다.” 다음으로 가지 선언지가 제거된다. 존재하는 것들이 모두 한정되지 않은 것들만 분류될 수도 없고, 한정된 것들로만 분류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서 필롤라오스는 우주와 속에 있는 것들은 한정하는 것들과 한정되지 않은 것들로 짜맞추어졌다는 결론에 이른다.

필롤라오스가 한정하는 것과 한정하지 않은 어느 하나만을 원리로 보지 않고 다들 원리로 채택한 것은 이전 자연철학자들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것으로 있다. 필롤라오스 이전에도 자연철학자들은 한정되지 않은 것이나 한정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왔다. 이를테면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가 한정되지 않은 자체나 그런 성격을 갖는 것을 근원원리arche 되는 것으로 있고, 다른 한편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to eon 한계한정peiras 개념을 사용하여 특정지운바 있다. 필롤라오스는 이와 같은 전통을 비판적으로 보고, 한정되지 않은 것과 한정되는 , 다를 원리로 받아들임으로써 전통을 비판적으로 종합하고자 것으로 있다.

그런데 한정하는 것들과 한정된 것들이라는 원리arche들은 서로 닮은 것들도 닮은 부류들도 아닌 상태로 있어서”, 원리만으로는 우주와 속에 있는 사물들이 구성될 없다고 필롤라오스는 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원리를 묶어주는 것으로 조화harmonia 상정한다. 결국 필롤라오스는 우주와 만물의 생성 이치를 설명하기 위해 가지 원리를 상정한 셈이다. 그는 한정하는 것들과 한정되지 않은 것들이 조화를 이룰 경우에만 우주와 마물이 생성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한정 되지 않은 것들이 한정하는 것들에 의해 한정되기 조화가 이루어질 때만 그것들이 생성된다는 것이 필롤라오스의 생각이다.

한정하는 것들이란 중심점, 구형과 같은 기하학적 요소와 수적 비율이나 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있다. 그리고 한정되지 않은 것들이란 , 공기, , 등의 질료적 요소와 시간, , 허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있다. 그러면 조화harmonia 어떤 것일까? 필롤라오스가 조화의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음계harmonia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음계란 무한한 연속체로서의 소리가 일정 비율들에 의해 한정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필롤라오스가 생각한 음계는 옥타브와 4음과제5음을 2:1, 4:3, 3:2 비율로 갖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정되지 않은 것들이 수적 비율로서의 한정하는 것들에 의해 한정되어 음계와 같은 조화로운 음악적 구조가 이루어질 우주와 만물이 생긴다는 것이 필롤라오스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플라톤의 우주론에 영향을 주었다.

본문 7 보면 그는 파르메니데스 이후에 다른 철학자들이 그렇게 했듯이영원한 존재혹은 불변하는 근원적인 요소를 상정한다. 하지만 그는 영원한 존재와 관련하여 아주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신적인 앎과 인간적인 앎을 구분함으로써, 크세노파네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알크마이온처럼 인간의 앎과  관련해 회의주의적인 혹은 겸허한 태도를 갖고 있다.

다른 한편 필롤라오스는 앎과 관련해서 수나 한정하는 것의 기능을 중시하고 있다. 다음 언급을 주목해 보자. “모든 것이 한정되지 않은 것들이라면, 애초에 앎을 가질 것이 없을 것이다”. “알려지는 모든 것은 진정 수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 없이는 아무것도 사유될 수도 알려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구절을 보면 사물들이 한정되어 있지 않다면, 혹은 수를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사물들에 대한 앎을 가질 없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한정을 가짐 혹은 수를 가짐을 우리가 앎을 갖는 필요조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단순화시키면, 한정하는 것과 혹은 수가 앎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 필롤라오스의 생각이다. 이처럼 그가 앎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한정하는 것과 수가 같은 기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본다. 앎과 관련한 수의 역할에 필요조건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들도 있고 충분히 고려해 볼만 하지만, 일단 필롤라오스가 구사한 조건 진술은 그렇지 않다.

그는우주는 하나이며, 한가운데부터 생기기 시작했으며”. “우주의 중심부 한가운데에는 우주의 화덕hestia이라 불리는 불이 있다 말하고 있다. 태초에 우주가 생성될 우주의 중심화 우주의 화덕부터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최초로 짜맞추어진hamosthen, 천구 한가운데에 있는 하나인 to hen 화덕이라 불린다고도 말하는데, 여기서 짜맞춤의 요소들은 물론 한정하는 것들과 한정하지 않은 것들로 있다.

나아가 다른 자연철학자들처럼 필롤라오스도 이른바 소우주-대우주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특히 우주의 탄생과 인간의 탄생 사이에 유비관계가 성립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본문 29 본문 66-68 통해서 있다. 우선 그는 우주의 화덕이 불로 되어 있다고 보듯이, 사람의 몸이 뜨거움thermon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는 사람이 태어난 곧바로 바깥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쉰다는 보듯이, 우주의 화덕인 하나인 to hen 구성된 곧바로 한정되지 않은 공기를 들이쉬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 공기 혹은 숨을 들이쉬고 내쉼을 통해 외부의 찬공기와 내부의 뜨거운 공기의 상호 작용은 흙과 물과 같은 질료가 형성되게 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같다. 그리고 우주의 화덕이 허공이나 시간도 들이쉬는 것으로 언급되는데, 허공은 공간적으로 개개의 사물들이 서로 구분되게 해주는 것이고, 시간은 우주가 형성되어 가고 행성들의 운행주기가 측정되게 해주는 요소로 이해할 있다. 

필롤라오스는 우주의 형성은 우주의 중심화, 우주의 화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10개의 천체들이 구성됨으로써 완결되는 것으로 본다. 열개의 순서들은 다음과 같다. 우주의 화덕-대지구antichton-지구--태양-다섯 개의 행성들-항성들의 구의 순서로 있다고 본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들과 달리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둘째 자리에도 있지 못하고 셋째 자리를 차지한다.

혼의 관해 필롤라오스의 견해도 흥미롭다. 그의 혼의 가지 기능을 구분하고, 기능들을 몸의 부분들과 연결시키며, 머리에 지성nous 위치시키는 흥미로운 견해를 펴고 있다. 혼의 기능 구분은 아리스토테렐스의 구분과 유사하다. 그리고 혼의 기능들은 몸의 부분들과 연결시킨 것은 플라톤이티마이오스편에서 혼의 부분을 신체의 부분들에 위치시킨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심장을 중시한 엠페도클레스와 달리, 지성을 머리에 위치시킨 것은 알크마이온과 플라톤 갈레노스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필롤라오스의 의학론은 주로런던의 저자 미상 선집 담겨 있다. 선집에는 질병이 인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에서 생긴다고 주장하는 20명의 사상가들의 견해가 소개되어 있는데, 필롤라오스는 사람이며, 본문 29 선집에서 필롤라오스에 대한 항목의 부분이다. 그는 인체가 뜨거움 혹은 열이라는 하나의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는 열을 가지고 질병을 설명해야 것으로 보이는데, 질병을 담즙과 점액을 통해 설명한다. 이는 그가 요소를 뜨거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인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타고라스주의자들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전해 주고 있는데, 그는 구전되는 증언들에 더하여 필롤라오스의 책을 주요 전거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들은 필롤라오스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아닐 없다. 그러나 그는 이전 철학을 자신의 용어로 변증적 목적을 위해 재구성하는 경향이 있어서, 피타고라스주의자들과 관련한 그의 증언들이 어느 정도나 신뢰할 만한 것인지는 주의를 기울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형이상학’ 1 5장에서 데모크리토스와 동시대 혹은 이전에 시대의 피타고라스주이자들, 5세기의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을이른바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이라 부르면서 이들의 견해를 전해주고 있다. 문제가 있는 가지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수는 모든 사물의 원리(근원)이다. 수는 질료적 원리이다. 사물은 수로 구성된다. 짝수는 한정되지 않은 apeiron이고, 홀수는 한정된 peperasmenon이다.

이런 견해들을 필롤라오스의 단편들과 비교해 , 우선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분명하다. 이미 앞서 살펴보아듯이, 필롤라오스는 사물의 원리를 한정하는것들과 한정되지 않은 것들 조화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한정하는 것들이나 조화는 수들로 이해될 있더라도 적어도 한정되지 않은 것들은 그렇게 이해되기 힘들다. 필롤라오스의 견해와 비교해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본문 57 58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이 수를 추상적 단위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크기를 갖는 단위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감각적 실체들 사물이 수들로 구성된다’, ‘사물은 수이다라고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증언은 피타고라스주의의 입장을 반영한 같지 않다. 왜냐하면 적어도 필롤라오스는 사물들이 수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고, 한정하는 것들과 한정되지 않은 것들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해서는 논의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필롤라오스는 홀수든 짝수든, 혹은 홀짝수든 수들은 한정하는 것들 일부하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철학사를 기술한 책들을 보면 피타고라스학파는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사의 주된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인상을 쉽게 받는다. 하긴 피타고라스의 경우는 주된 흐름 속에서 철학을 했다고 보기 힘든 점들이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필롤라오스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의 단편들을 보면, 자연철학의 주요개념들, 이를 테면 본성physis, 우주kosmos, 한정하는 것들, 한정되지 않은 것들, 조화harmonia, 원리근원arche, 근원적 존재esto ;ousia 같은 용어들이 쏟아져나온다. 이런 개념 사용만 놓고 필롤라오스는 자연철학사의 주류 속에 편입될 있는 철학자임을 있다.

필롤라오스가 피타고라스에게서 받은 중요한 영향은 우주를 수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라 있다. 피타고라스는 테트락튀스를세이렌들이 이루어내는 화음조화 연관시킴으로써 우주를 수적인 구조를 지닌 것으로 보았고, 이런 통찰을 필롤라오스는 한정하는 것들과 한정되지 않은 것들 조화하는 원리를 통해 체계적인 형이상학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있다. 그리고 그는 피타고라스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인식론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도 주목된다. 그의 형이상학은 플라톤에게 영향을 주었고, ‘티마이오스편이나필레보스편은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13. 아낙사고라스 Anaxagoras

아낙사고라스는 기원전 500년에 태어나 428년에 죽었다. 그는 이오니아의 클라조메나이 사람이었다. 그의 철학은 엘레아 철학의 영향을 깊이 받기는 했으나, 그의 기상학 이론에서 보듯이 밀레토스 학파의 영향, 특히 아낙시메네스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다. 전해지는 말로서 기원전 467년에 그는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 있었던 운석의 추락을 예견했으며, 아테네로 건너가서 30 동안 활동했다. 거기서 그는 아테네의 저명한 정치가 페레클레스와 교분을 맺었다. 교분관계와 그의 과학적인 사고로 말미암아 기소를 당하게 되었고 불경죄로 유죄판결을 받는다. 태양이 신이 아니라 불타는 돌덩어리라고 믿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낙사고라스의 재판과 추방에 관한 이야기들은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어째든 그는 소크라테스보다 앞서서 자신의 철학적 신념 때문에 기소를 당한 최초의 지성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를 떠나게 되었고 이오니아의 트로이 부근에 있는 람사코스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 거기서 그는 학식으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으며, 임종시에 어린이를 위한 공휴일을 정하도록 유언으로 남겨 지키게 했다고 했다.

당시 그는 희랍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정치나 세속사에 관심이 없었고 오르지 지적인 탐구에만 몰두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가 했다고 전해지는 예측들은 예언() 대비되는 그의 과학적 능력을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그는 권의 (‘자연학’ : 자연에 관한 연구) 썼는데, 책은 값이 저렴하여 쉽게 구할 있을 정도로 대중적이었다(그의 다른 저작들에 대한 암시는 현존하는 단편들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알기 쉽게 명료한 산문체로 책은 물질의 본성과 그것의 원초적 상태, 그리고 우주발생의 과정을 시작하게 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존재(지성), 그리고 현재의 우주를 다루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책의 잔존 단편들 대부분은 심플리키오스의 인용에 힘입고 있다. 이들 단편은 첫번째 권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며, 거의 완전히 분실된 두번째 권의 기초를 이루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낙사고라스에서도 세계는 한정되지 않은 근원적인 덩어리부터 전개되었으며, 근원적인 덩어리는 여전히 계속해서 현재의 세계를 포함한다. 그러나 아낙사고라스가한정되지 않은 또는문한정 언급할지라도 그는 근원적인 덩어리를 자신의 밀레토스 학파 선배들과 다르게 규정한다. 그것은 분화된 세계에서 만나는 모든 물질이 고르게 섞인 것이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아낙사고라스는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15 출생)보다는 분명히 젊었고, 제논(기원전 489 출생) 엠페도클레스(기원전 495 출생)보다는 약간 나이가 많았다. 아낙사고라스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은 강하지만, 다른 철학자와 그의 관계는 분명치 않다. 아낙사고라스도 자연학의 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파르메니데스에서 유래된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던 철학자 가운데 사람이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절대적 구별과 논리적 결과인 생성과 소멸의 부정을 받아들인다. 역시 엠페도클레스처럼 생성과 소멸의 사례들로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는 존재하는 것들의 섞임과 분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 간에는 차이가 있다. 엠페도클레스의 경우, 섞임은 때에 따라서 복합물의 생성 원인이 되기도 하고 복합물의 소멸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분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아낙사고라스의 경우, 생성은 섞임(정확히 말하자면떨어져 나옴이다) 뿐이고 소멸은 분리일 뿐이다. 엠페도클레스의 체계보다 아낙사고라스의 체계가 생성과 소멸의 부정을 철저하게 고수한다. 엠페도클레스의 경우에 피나 같은 실체들은 4원소(, , , 공기) 결합으로 형성되고, 해체되어 다시 그것들로 돌아간다. 아낙사고라스는 이런 종류의 생성과 소멸도 배제한다. 피와 살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피나 , 등으로 변한다. 그러나 이들 실체는 엠페도클레스적인 의미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양적으로 아주 적어서 눈에 보이지 않을 이미 음식 속에 들어 있다. 음식이 소화되면 속의 (보이지 않는) 피는 분리와 섞임의 과정에 의해서 우리 속에서 (보이는) 피가 된다. 뜨거운 음식이 차가워졌을 , 속의 뜨거운 것이 소멸하고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차가운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뜨거운 음식 속에는 차가운 것이 이미 들어 있었다. 양이 너무 작아서 감지도리 없었을 뿐이다. ‘차갑게 감지할 없는 차가운 것이 감지할 있는 차가운 것으로 되고, 감지할 있는 뜨거운 것이 감지할 없는 뜨거운 것으로 되는 과정이다. 이런 방식으로 아낙사고라스는 엘레아주의의 중심 논제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현상들과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을 전개한다.

우주의 기원, 정신과 물질의 본성에 대한 아낙사고라스의 설명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다섯 가지 종류의 실재와 여섯 가지 기본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섯 가지 실재들은 ⓐ일상의 거시적인 대상 기본 사물 부분() 씨앗, 지성(정신)이고, 여섯 가지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생성, 소멸은 없다. 수많은 종류의 기본 사물들이 있다. 모든 것의 부분이 모든 속에 들어 있다. 사물은 속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사물들에 의해 성격이 정해진다. 가장 작은 부분들은 없다. 지성은 다른 어떤 사물과도 섞이지 않는다.

거시적 대상들이란 사람, 동물, 돌맹이, 금덩어리, 지구 같은 일상의 경험적 사물들을 가르킨다. 거시적 사물들은 기본 사물들이섞인 (복합물)’이다. 동물은 , ,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것들이 기본 사물이다. 그리고 감각적 성질들(온과 , 건과 , 색깔과 냄새) 기본 사물에 속한다. 어떤 사물(Y) 속에 들어 있는 기본 사물(X) (부분) 거칠게 말해서 Y속에 들어 있는 X 총합이다. 총합은 몫들의 개수 총합이 아니라 양의 총합이다. 아낙사고라스는 동물이 살과 피의 몫을 포함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든 모든 것의 몫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도 한다. 나무와 다이아몬드의 몫들이 사람 속에 들어 있으며 뜨거움과 축축함의 몫들이 얼음 속에도 들어 있다. 몫들이 너무 적어서 오관으로 감지되지 않을 뿐이다. 아낙사고라스 체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몫이 모든 것의 하위 몫들로 갖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순수한 실체는 없으며 어떤 것이든 몫들로 끝없이 분석된다.

씨앗들은 기본 사물들(, , , , ) 미시적인 입자들이다. 그것들은 모든 거시적 사물들 속에 들어 있다. 그리고 각각의 씨앗 역시 모든  것의 몫을 포함한다. 거시적인 사물에는 가지 이상의 기본 사물들(, , ) 조각()들로 구성되는 복합체인 동물(식물 등의 유기체) 아니라, 금덩어리, 핏방울, 같은 기본 사물의 거시적인 조각들도 속한다. 미시적 대상인씨앗들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기본 사물들의 조각들이다.

이를테면 원소 수은은 자연에서 주로 황화물로 불리는 적색 황화수은의 형태로 발견된다. 이것은 종종 화합되지 않은 수은을 동반한다. 광석 덩어리는 그런 식으로 황화수은 형태의 수은과 순수한 수은의 작은 방울 형태의 수은을 약간씩 포함한다. 아낙사고라스의 용어로 말하자면, 광석 덩어리 속에 있는 수은의 몫은 속에 들어 있는 수은의 양이다(방울 형태의 수은과 황화수은은 형태의 수은을 합친것). 수은 방울들은 아낙사고라스의 씨앗들에 해당된다(씨앗들이 너무 작아서 보이지는 않지만). 덩어리 속에는 황의 몫도 들어 있다(황화수은 속의 모든 ). 아낙사고라스의 그림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복잡하다. 광석 덩어리 황의 몫이 수은의 몫을(그리고 다른 모든 기본 사물들이 몫들도) 포함한다. 방울 형태의 수은 역시 마찬가지이다. 씨앗에 해당하는 미시적인 수은 방울도 순수한  수은이 아니고 모든 기본 사물의 몫들을 포함한다. 물론 순수한 수은 방울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수은의 몫을 많이 포함한다. 나아가서 몫들의 몫들 각각 역시 모든 기본 사물의 몫들을 포함하며 그렇게 해서 끝없이 계속된다.

기본 사물을 아리스토텔레스는원소stoicheion’또는근원arche’ 동일시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같은 부분으로 것들homoiomeres’대립자들tanantia’ 표현한다.같은 부분으로 것들이란부분이 전체와 같은 이름을 갖는 이다. 흙덩어리나 금덩어리, 뼈는 어떤 부분을 떼어내더라도 마찬가지로 흙이고 금이고 뼈이다. 이와는 달리 같은 부분으로 것이 아닌 것들, 이를테면 얼굴이나 나무는 부분적으로 다른 이름으로(, 뿌리) 불린다. ‘같은 부분으로 것들이라는 표현은 아낙사고라스가 사용하지 않은 분명하다. 기본 사물들의 다른 유형으로서의 대립자들이란 온과 , 건과 습의 쌍들을 말한다. 성질들(‘대립자들’) 실체로 취급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이지만(우리의 상식적 생각은 실체와 성질을 명확하게 구별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힘입고 있다), 아낙사고라스는 대립자들을 원리들로 간주하는 밀레토스 학파의 전통을 존속시킨다. 그는 거시적인 대상인 뜨거운 덩어리를 , , 무거움, (), 기본 사물들의 덩어리(복합체) 간주한다. 덩어리가 나타나는 방식은 속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기본 사물들에 의해서 정해진다. 우리가 금덩어리를 금덩어리로 확인하는 것은 속에 금의 몫이 다른 어떤 사물들의 몫보다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몫이 모든 속에라는 사물 일반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존재는 지성이다. 지성의 특별한 지위는 지성의 기능에서 드러난다. 지성은 인식하고, 지배하며,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며, 운동을 일으키는 주제다. 엠페도클레스의 가지 원소와는 달리 아낙사고라스의 사물들은 전적으로 물리적인 용어로 이해된다. 그리고 엠페도클레스의 원동력인 사랑과 불화와는 달리, 아낙사고라스의 지성에는 도덕적인 측명이 결여되어 있다. 아낙사고라스에서 모든 변화는 섞임과 분리에 기인한다. 섞임과 분리는 운동에서 나오며 운동은 궁극적으로 지성에 의해 일어난다. 내가 자신을 움직일때, 움직이게 하는 것은 속에서 나를 살아 있는 존재로 유지시켜주는 나의 지성이고, 움직여지는 것은 물질적인 나의 육체이다. 운동의 주체인 나의 지성은 전체 지성의 작은 부분이다. 이렇게 사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지성의 힘은 사물에 대한 지성의 지배력을 의미한다. 지성은 사물을 움직이게 한다. 지성은 사물들이 코스모스를 형성하도록 운동하게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사물을 지배하는 것이다.

지성은 우주 전체와 속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지성은 모든 속에서 언제,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지배할 있다. 지성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다. 지성은 사물들의 무한정한 몫들과 몫들의 몫들 속에는 물론이고, 둘러싸는 무한한 여럿들 속에 들어 있다. 지성은 모두 똑같기 때문에, 그것은 내적인 한계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한정이 없다. 지성이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과 다르지 않다. 지성은 다른 사물들과 섞여 있지 않으므로 다른 사물의 섞여 있음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지성의 지배력은 순수성과 미세함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다른 어떤 사물도 일정한 크기를 가지며, 다른 사물들의 무수한 몫을 포함한다. 지성은 그런 이질적인 섞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때문에, 모든 사물의 무수한 몫을 관통하여 스며들 있다. 지성의 무한한 공간적 범위, 지극히 미세함, 그리고 다른 사물들과 섞이지 않음은 비물질적 존재 개념으로 나아가려는 아낙사고라스의 노력을 시사한다. 그러나 지성의미세함 여전히 물리적 사물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것은 엠페도클레스의 사랑과 불화와 마찬가지로 공간 속에 연장되어 있으며, 사물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사물 속에 물리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아낙사고라스가 지성을 사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궁극적인 주체로 놓고, 그것이 사물들과 전혀 섞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는 운동하는 것으로부터 운동의 원인을 명확히 구별한 최초의 철학자로 불리 만하다. 예정의 철학자들은 사물들은 형성하고 우주를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운동을 일으키는 원리를 물리적인 사물로부터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아낙시메네스의 공기는 자체가 언제나 운동 중에 있으며 그래서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은 어떤 식으로든 혼이나 , 그리고 로고스와 동일시된다. 엠페도클레스는 좀더 정교하다. 그러나 사랑과 불화의 작용은 부분적으로는 정신적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물질화되어 섞인 것들의 일부가 된다.

아낙사고라스의 우주 발생론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모든 사물이 함께 있었다”. 어떤 것도 분별되니 않는 완전히 섞인 상태였다. 분화의 시작은 섞인 것에서 퍼져 있는 지성의 회전을 시작하도록 했을 일어났다. 회전은 작은 영역에서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회전이 일어나는 영역이 점차 확대되어 갔고, 회전에 의해서 원시 혼합체로부터 분별 가능한 사물들의 분리가 일어났다. 아낙사고라스도 엠페도클레스처럼같은 것들을 같은 것들과모이게 하는 우주발생적인 회오리를 가정한다. 회오리는 원시 혼합체 속의 기본 사물들의 몫들을 재배열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어떤 씨앗드은 자라서 거시적인 크기를 갖게 되었다. 공기와 에테르의 몫들이 원시 혼합체에서 가장 규모가 컸기 때문에, 그것들은 다른 기본 사물들에 비해서 덧붙여져서 씨앗들로 집중되는 유효했다. 그래서 공기와 에테르는 원시 혼합체에서 분리될 잇는 최초의 구별 가능한 사물이다. 다른 종류의 사물들은 원시 혼합체의 잔유물에서, 그리고 공기나 에테르에서 분리되었다.

회오리 작용에 의해서 좀더 가벼운 에테르는 주변으로 갔고, 좀더 무거운 공기는 가운데로 갔다. 코스코스의 다른 구성요소들의 분리도 우리가 예상할 있듯이, 축축한 , 차가운 , 그리고 어두운 것은 가운데(‘땅이 있는 ’) 이동하고, 반대되는 것들은 주변으로(‘에테르 안의 곳가지’) 이동했다. 좀더 가벼운 것들로부터 좀더 무거운(촘촘한) 것들이 떨어져나오는 과정은 계속된다. 구름에서 물이 분리되고 물에서 땅이 분리되어 나온다. 땅에서 돌이 차가움으로 인해 굳어진다. 촘촘한 것들은 가운데로 이동한는 규칙의 예외는 천체들이다. 회전운동이 계속되면서 돌들이 에테르 쪽으로 멀리 던져지기도 한다. 그것들은 에테르와 함께 돌게 되며 태양, , 별이 된다. 아낙사고라스의 천체들은 순수하고 가벼운 불이 아니라 불붙은 돌덩어리이다. 우주적 회오리가 집어 올린 돌덩어리들은 때때로 미끌어져 땅으로 떨어지는데 이것이 운석이다. 이처럼 코스모스의 전체적인 형성은 떼어내고 분리시키는 회오리의 작용에 따라 효과적으로 설명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이를 두고 아낙사고라스가 우주의 근원적인 운동을 출발시키기 위해서 지성을 끌어들였지만, 그것을 이상 우주의 지성적인 창조자 또는 조정자로 사용하지 않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나머지를 설명했다고 비판한다.

아낙사고라스는, 태양은 펠로폰네소스보다 붉게 달아오른 돌덩어리이고, 그것이 땅위에 있는 물을 증발시키고 남은 부분이 바다이며, 달빛은 태양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지개가 공기 습기에 비친 햇빛의 효과라는 것을 인식했다. 땅은 평평하며 공기가 받쳐줌으로써 공중에 있다는 그의 주장은 아낙시메네스를 그대로 따른다. 그리고 번개와 다른 기상현상들에 대한 이론, 지진과 바닷물, 나일강의 홍수, 생명의 기원, 그리고 생물학과 관련된 여러 문제에 대한 그의 설명들도 이오니아의 전통에 있다. 중에서 뇌가 감각의 근원이라는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코스모스가 지성에 의해 형성된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도 특이하다.

테오프라토스가 전하는 아낙사고라스의 감각이론에 따르면, 감각은 엠페도클레스에서와는 달리같은 것들사이의 만남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대립되는 것들)’간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난다. 이를테면 어떤 것이 뜨거운 느낌을 주는 것은 우리의 (촉각)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가울 때이다. 시각의 경우 눈동자에 맺히는 상은 동공의 색과 같을 때가 아니라 대립되는 색일 보인다. 다른 감각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감각은 대립되는 것들이 작용한 결과로 주어지기 때문에 모든 감각에는 고통이 따른다고 아낙사고라스는 주장한다. 감각 시간이 길거나 강도가 강할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순간적이거나 강도가 미세할 경우에는 느끼지 못하는데 이것은 감각의 약점이다. 그래서 감각은 사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감각이 실재를 이해하는 전적으로 오해를 일으키며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아낙사고라스는 감각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은 실재와 어떤 관계를 갖는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낙사고라스가 우리의 약한 감감들로부터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이상 알지 못한다. 분명히 그는 우리의 정신(지성)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우주적 지성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우리의 지성은 본래 그것과 같은 것이다. 아낙사고라스는 감각들과 지성이 어떻게 협동하여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론을 내놓지는 않았다.

 

14.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Leukippos & Demokritos

레우키포스는 원자론의 창시자로, 데모크리토스는 완성자로 알려져 있다. 어떤 이들은 레오키포스가 데모크리토스의 스승 또는 친구라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 생존했던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최소한 원자론적 주장과 관련해서는 의미가 없다. 데모크리토스는 기원전 460년경 이오니아의 식민도시 압데라에서 태어났고 레우키포스는 그보다 앞선 기원전 470년경에 아마도 밀레토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데모크리토스는 당시 이집트, 페르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많은 철학자와 교분을 나누며 두루 견문을 쌓은 매우 박학다식한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아테네에 머문 기간이 짧아서인지 속에서의 명성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기원 1세기경 트라쉴로스가 정리한 것에 따르면, 데모크리토스의 저작은 4부작 형식의 윤리학 저작 2부문 8, 자연학 저작 4부문 16권과 그런 형식 이외의 자연학 저작 9 모두 61권에 달할 정도로 방대했을 뿐만 아니라, 주제 또한 윤리학, 자연학, 수학, 음악, 기술 광범위한 분야에 두루 걸쳐 있었다. 키케로는 그의 무제가 기운이 넘치고 더할 나위 없이 명료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수많은 글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300 개의 직접인용 단편들 뿐이다. 물론 이들 단편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다른 철학자들이 남긴 것들에 비하면 많은 것이긴 해도 대부분 윤리적 내용을 담은 것들이고, 오늘날 데모크리토스를 원자론자로 알려지게한 자연철학 관련 단편들의 수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레우키포스와데모크리토스의 기본적인 관심은 전통적 물활론에 대한 엘레아의 비판에 의해 운동도 변화도 없이 정지해 버린 세계를 끊임없이 운동하면서도 없어지지 않은 현실세계로 구제해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파르메니데스적 일자의 성격과 똑같은 완전히 꽉찬 pampleres on, 자를 수도 없고atomoi 분할할 수도 없으며adiairetoi 있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도 않으며apatheis 허공kenon 갖지도 않는 원자들을 상정하였고, 동시에 수가 무한하다고 생각했으므로 그것들을 떼어놓는 것이자 그것들이 움직일 있는 곳을 상정하였다. 그리고 장소hotpos 허공to kenon, 아무 것도 아닌 to ouden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자연세게의 기본원리들이자 참된 사실로서 아톰, 원자atoma 허공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저없이 있는 것은 있지 않은 것보다 조금도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있는 to on’ 원자뿐 아니라, 엘레아 기준으로 이른바없는 to me on’ 허공 또는 물체soma 못지않게 모두 실제로 있는 ousia이라고 선언한다. 허공도 일종의 본성physis 내재 고유한 실재hypostasis idia 가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비존재도 존재 못지않게 있는 것임을 승인하는 이와 같은 원자론의 견해는 두말할 필요 없이 여럿이 실재와 운동의 가능성을 보증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허공이 별도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면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게다가 떼어놓는 to dieirgon 없다면 여럿도 있을 없기 때문이다. 원자들 각각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와 같이 그것 자체로 하나의 한정된 실재로서 생성, 소멸하지도 잘라지지도 않으며 서로 섞일 수도 없다. 그러나 원자들은 무수하게 존재하며 허공 속에서 끝없이 운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것이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로 대변되는 원자론의 기본원칙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내세워진 실재로서의 원자는 비록 실제로 성질로서 관찰된다 할지라도 자체로는 감각적 성질을 일체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성질은 감각기관과 함께 작용하여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원자들은 각각 형태schema: A N 차이), 배열taxis: AN NA, 위치thesis : Z N 따라 구별되며, 구별은 원자들의 이합집산을 통해 나타나는 사물의 속성 내지 성질과 관련된다. 또한 이들 원자는 무한한 허공 안에 서로 떨어져 있고 위에서 언급한 그러한 것들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허공 속에서 움직이고 서로 따라가 붙잡으면서eppikatalambanousas충돌한다. 그래서 어떤 것들은 아무 곳으로나 튀어나가고, 어떤 것들은 형태들과 크기들과 위치들과 배열들이 일치함에 따라kata ten symmetrian 서로 얽혀서 함께 머물고 그렇게 해서 결합체들syntheton 생성 또한 이루어진다.

요컨대 운동과 질적 변화의 현실적 실재를 부정할 없었던 그들은 이미 엘레아 근본주의 앞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버린 성질의 실재성은 포기하되,  성질을 무성질의 실재인 원자들의  부대현상epiphainomena으로 대체하고자 하였고, 운동의 원인을 해명하기 보다는 허공의 도입을 통해 운동을 설명이 필요없는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오래 전부터 이어온 운동의 문제에 대한 전통적 해답의 하나를 제시해 주고 있다. 마치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보이는 공기 중의 먼지처럼 일차적 문제, 원자는 태곳적부터 필연ananke 기계론적인 인과의 법칙에 따라 허공과 무한한 속에서 항상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세계의 생성에 관한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은 그리 분명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미 알려진 세계 생성의 과정이 그에게도 반복해서 나타난다. 자체로는 운동 능력을 갖지 않은 원자들은 허공 속에서 크기, 무게baros 차이에 따라 필연ananke 의해 서로 밀쳐내고 움직이고 충동하면서 회오리dine 일으키고 회오리 안에서 서로 부딪히고 온갖 방식으로 회전하면서 비슷한 것들이 비슷한 것들 쪽으로 따라 분리되면서 세계들kosmoi 생성된다.

이를테면 레우키포스는 대지의 생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온갖 형태의 많은 물체가 무한한 것에서 조각으로 잘라져 거대한 허공으로 한데 모여서 회오리dine 만들어지는데, 회오리 안에서 물체들이 많아져서 이상 균형을 유지하며 회전할 없게 되면, 마치 체로 걸러지듯이 미세한 것들은 바깥의 허공으로 물러나가고, 나머지 것들은 서로 얽혀 함께 보조를 맞추어 움직이면서 공처럼 둥근 피막 같이 생긴 구조물systema 분리된다. 이후 이것은 안쪽에 접해 있는 있는 물체들이 중심의 저항으로 일어난 회오리로 인해 움직이게 되면서 점차 깎여나가 얇아지고, 깍여나간 것들은 포함한 안쪽의 물체들은 가운데로 흘러 하나로 합쳐지면서 대지가 생겨난다. 그리고 피막처럼 둘러싸고 있는 자체는 바깥의 물체들이 유입됨에 따라 다시 커지고 회오리에 의해서 움직이면서 뭐든 접촉하는 것들을 덧붙여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서로 얽혀 모종의 덩어리들을 만들어내는데, 처음에 그것들은 축축한 진흙덩어이지만 회오리 전체와 함께 돌면서 마르게 되고 결국 불붙어서 (천체)들이 생겨난다.

인식과 사고에 관한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 견해는 기본적으로 감각과 사고 모두가 원자의 접촉hapta이라는 동일한 물리적 과정을 통해 얻어진다는 일관된 전제 위에 있다. 이를테면 시각작용의 경우 와서 부딪치는 상이 없이는 누구에게도 위의 가지 감각과 사고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시각작용은 보이는 것과 모양이 닮은 어떤 상들이 보이는 것으로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와 시각에 부딪치는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은 그러한 인식과정의 동일성에 대한 주장과 더불어 거의 불타협적이라 있을 정도로 사고와 감각을 각각 적법한gnosien 인식과 서출적skotien 인식으로 첨예하게 구분한다. 전자는 진리의 판단을 위한 신뢰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지만, 후자는 참된 alethes 분별에 따르는 틀림없음aplanes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점은 데모크리토스의 인식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회의론이니 독단론이니 현상론이니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와 같은 첨예한 인식론적 구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인할 있는 증거들에 따르면, 갈레노스가 전하는 의심심장한 단편이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처럼 일단 데모크리토스에게서 감각과 이성, 감가과 사고는 진리인식을 위한 상호 보조물임을 보여준다. 비록 감각은 불분명하고 실재etee에서 멀어져 있어도, 그들에게 어느 곳에서도 현상과 실재간의 단절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적 현상은 사고에 필수적인 것이다. 요컨대 감각은 우리를 데리고 있는 곳까지 데리고 가고 우리가 지각의 문지방을 지나갈 이성이 이어받는다. 위에서의 구별이 나타나고 있는 해당 단편 내에서조차 이미 서출적 인식이 작은 것에 대해서 이상 수도 들을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맛볼 수도, 접촉에 의해 감각할 수도 없으며 그럼에도 우리가 더욱 미세한 것에 대해서 탐구해야 , 적법한 인식이 뒤따라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감각과 사고가 다른 과정이 아니라 다만 동일한 과정이 새로운 수준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암시한다. 참으로 그것은 근본적으로 감각과 사고가 다른 과정이 아니라 다만 동일한 과정이 새로운 수준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암시한다. 참으로 그것은 유물론적 가정이 유지되고 있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관념론적 가정에서는 도저히 주어질 없는 것으로서, 오늘날의 생리심리학적 인식이론과 통찰력 있게 연결되는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데모크리토스 단편들 중에는 예상과는 달리 자연철학에 관한 것보다 윤리학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윤리학적 주장들이 과연 그의 유물론적 자연학에 기초해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데모크리토스는 신체에 대한 혼의 우월성을 명백히 표명하고 있기 대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위와 같은 혼의 개념의 윤리학적 성격은 다름 아닌 자연학적 성격에 기초해 있는 것임이 곧바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데모크리토스에게서 혼이란 자연학적으로는 혼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덩어리이고, 혼의 원자가 안정된 상태에 있는 것이 혼의 평안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실재로서의 원자의 형태와 배열과 위치의 좋음, 원자의 좋은 상태는 원자가 안정되어 동요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행복은 데모크리토스의 자연학설에 기초해 혼의 존재 방식, 존재 상태를 의미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이러한 유익하고 진정한 혼의 상태를 ‘eutymia 유쾌함’, ‘atambie평정’, ‘euesto 지냄’, ‘terpsis즐거움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은 처음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에 대한 배움을 통해 주어진다. 그러므로 혼을 배우고 익히는 것으로서의 지혜phronesis 중요하다. 이로부터 그의 교육론이 제시된다.

본성physis 가르침didache 유사한 것이다. 가르침은 사람을 개조metarhysmoi하며, 개조함으로써 본성을 재셩성physiopoiei하기 때문이다.”

원자론자들에게 있어 사물의 감각적 성질의 차이가 원자의 형태rhysmos, 배열, 위치의 차이에 따라 발생하는 것임을 유념하면 결국 데모크리토스의 입장은 인가의 혼이 원자적 구성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고정되어 있다고 보는 전통적 사상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그만큼 데모크리토스에 있어서 교육의 가능성은  중시된다. 요컨대 혼을 구성하는 원자덩어리의 어떤 구조, 형태를 다시 다른 형태의 것이 되게 함으로써 혼의 존재방식을 더욱 좋은 것으로 변화시키는 , 이것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적 자연학에 근거한 그의 교육론이다. 기술techne 지혜sophie 모두 누군가가 그것을 배우지 않는 다면 얻을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형의 과정에는 여전히 대우주에 작용하는 필연의 원리가 작용한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 자연 일체가필연에 의해생성하며, 곳에서 우연tyche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전혀 없다. 굳이 우연이라 함은 실재로서의 원자의 단순히 형태, 배열, 위치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것을 실체로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안정한 혼은 이러한 무분별aboulie=anoie 유발하며 교육은 이러한 그릇된 상태, 변화시키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의 지혜phronesis이다. 아무리 신체가 아름답고 부와 평판이 있어도 지성과 분별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그러나 혼의 원자론적 구조를 변화시키고 재형성한다는 것은, 엄밀하게 그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할 있는 힘의 상정은, 여전히 원자론적 자연 이론의 필연의 테두리를 위협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데모크리토스 또한 인간의 의지, 인간의 주체성의 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격변기르르 사는 지식인으로서 데모크리토스 역시 개인의 안심양면을 위한 스스로의 혼의 평정뿐 아니라, 통제 불능의 욕망들이 복잡하게 부딪치던 당시의 사회적 혼란상을 어떻게든 국가의 운영을 통해 해결해 내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리하여 그가 급기야 인간의 혼이 원자로부터 만들어졌듯이, 정치제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형성된다고 보고 혼에 대한 재형성이 지혜, 교육에 의해 가능했던 것처럼, 정치적 제도의 재형성 역시 정치적 지식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지도 모른다. 종국적으로는 무지amatie 어리석음이 모든 잘못과 불행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데모크리토스의 사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상속받은 당대의 철학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원전 6세기 화폐경제가 발생한 이래 이미 사회 경제적으로는 국제화된 발칸반도의 사상적 정황에서는 소박한 전통적 물활론이 이상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엘레아로부터 흘러 들어온 논리주의의 위세는 누구도 거부하기 힘들었고, 프로타고라스 소피스트들은 외계를 인식하는 어떤 기준도 없으며, 그것은 단지 주관의 집합으로서 상대적이고 어떤 특정 사회에서만 일시적으로 유효한 것임을 가르쳤다. 그리고 다른 외래 사상인 피타고라스의 영혼론은 시대의 데카당한 분위기 속에서 영향력을 키워갔다. 데모크리토스는 사이에서 탈출구를 발견해야 했다. 이것은 이미 그의 목푝가 근본적으로 회의론 내지 상대론 또는 순전한 논리적 사변이나 애매한 종교적 구원 어느 것에도 매달릴 없었음을 보여준다. 분명 그는 당대의 현실을 구제하려는 확고한 철학적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자신의 철학적 목표를 위해 자신을 위협하는 도전적인 사상들을 너무 비켰갔다. 추상적 사유와 사태에 대한 개념적 파악의 경향은 그의 단순하고도 소박한 유물론적 사고가 대처하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광범위하고도 뿌리 깊게 당대의 사상계를 압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이 체계는 전통적인 자연세계의 법칙과 의미를 분간할 아는 이성의 참된 능력과 지식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이성에다 감각을 넘겨줌으로써 지식 간의 구별을 정당화하기가 힘들었다. 그에 따라 자신이 가정해야 했던 지식의 기초를 명시적으로 제공할 수도 없었다.

반면에 거의 바로 뒤에 이어 현상의 구제에 관심을 가졌던 플라톤은 데모크리토스보다 훨씬 용의주도하고도 치밀하게 주위의 사상을 오히려 자신의 이론에 용해시켜 나갔다. 하물며 플라톤은 자신의. 목적론적 사고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데모크리토스의 기계론적 사고를 아카데미에 발도 붙이게 하고 가르침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이어가도록 했지만, 정작 자신은타마이오스편에서 누가 보기에도 분명하게 선배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적 착상을 자신의 중요한 통찰의 일부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플라톤은 데모크리토스의 이름을 자기 어느 곳에서도 거론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당대 종합적인 현실구제이론을 꿈꾸었던 라이벌로서 그에 대한 플라톤의 애즈을 시사하는 것이라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화해할 없는 상대였다. 플라톤에게 존재와 가치는 본질적으로 목적론적 구도에 연결되어 있었고, 예지적 영혼 부재의 기계론적 원자론은 그가 꿈꾸던 미와 질서로 가득한 목적의 왕국을 여지없이 흔들어놓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후의 주류적 사상을 형성한 플라톤 후예들의 추상적 사유는 데모크리토스를 간과 또는 무시했고, 그의 유물론적 노선에 관한 무제 또한 충분히 개진되지 못했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는 자연에 관한 종합적인 사상가로서 많은 주류적 사상가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그러나 결코 완전하다고는 말할 없지만 기존의 것과는 아주 다른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데모크리토스의 이러한 가르침과 한계를 동시에 의미 있게 간취하고 되짚어보고 넘어서는 일은 에피쿠로스(BC342`270)에게로 이어졌다가, 루크레티우스(BC 99-55) 거쳐 그로부터 휠씬 뒤인 근세의 기계론적 유물론에 와서야 주목받는 철학적 주제가 되었다. 모든 지적 활동을 물리적 접촉으로 환원시킨 진지한 최초의 시도가 전적으로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해서 놀랄 없다. 여전히 우리는 그의 대답성과 일관성을 칭송해야 것이다. 이미 그는 2400 전에 자연의 관찰에 대한 설명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던 것이다.

나는 페르시아의 왕국을 얻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원인 설명mian aitiologian 찾아내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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