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공리주의
공리주의(功利主義, 영어: Utilitarianism)는 19세기 이래 영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윤리적 사상이다. 인간 행 위의 윤리적 기초를 개인의 이익과 쾌락의 추구에 두고, 무엇이 이익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행복이라
고 하며, '도덕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최대행복의 원리(Greatest Happiness Principle)라고 부른다.
이 사상은 근대 시민사회의 윤리적 기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고전경제학의 사상적 기초와 자본주
의 질서 구축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공리주의의 제1원리인 개개인의 사익추구가 공익의 보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배치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벤담(1748년 - 1832년), 존 스튜어트 밀 (1806년 - 1873년) 등이 대표적 공리주의자들이다.
공리주의의 체계화는 18세기 말 영국의 벤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공리(功利)의 크고 작음을 입법 및 도덕의 유일한 기준으로 생각했다. 즉 쾌락은 선(善)이고 고통은 악(惡)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쾌락을 증대
하고 고통을 감소시키는 행위는 옳고, 그 반대의 행위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벤담은 각자가 자기 공리의 최 대를 구할 때 그 총계로서 사회 전체의 공리도 최대로 된다고 생각하였다. 산업혁명 후 자본주의의 모순에 직 면해서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은 벤담의 이론의 후반 부분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로 대체했다. 그러나 공리의 원리에 있어서도 도덕의 기준은 변함이 없었다.
공리주의가 공리(功利),쾌락 외에 도덕의 제2원리로 주장하는 최대 다수의 최고 행복도 구호에 불과할 수 있 다. 도덕의 최고원리가 개인의 쾌락인데,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공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이익과 공리의 우선적 추구가 사회적 공공적 복지를 담보하기는커녕 파괴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했기 때문이다. 약 육강식의 초기 방임적 자본주의가 개인의 사익추구는 공익을 저절로 보장한다 했지만 결과는 극심한 빈부격 차와 모순을 낳아 대대적으로 구조적 수술을 하고 수정 자본주의로 거듭난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도 이에 대 한 반성이나 보완없이 계속해서 쾌락, 이익 우선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철학으로서 문제가 많다.
밀의 공리주의는 초기의 벤담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양적 쾌락에서 질적으로의 쾌락을 주장한 것이 돋보이는 점이다. 그러나 쾌락을 정신적 쾌락으로 대체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별히 새로운 것이 없으 며, 정신적 쾌락이 비정신적, 양적 쾌락보다 우월한 가치를 띤다는 논리도 철학적으로는 입증하기 어렵다. 물 질적 쾌락이 어느 정도 충족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어떤 정신적 가치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고, 현실적으로 정 신적 가치에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사람도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공리주의의 결함인 사익의 추구와 사회적 공익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없다는 것이 밀의 치명적 한 계이다. 개인을 교양하고 계몽한다고 해서 될 것이 아니고,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속성 상 구조적 변화와 변혁이 반드시 필요한 법인데 밀은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벌린에 의하면 "공리주의는 쾌락, 사익추구라는 시각과 전체의 복리증진이라는 상반된 관점 사이에서 딜레마 에 빠진 채 문제해결에 실패했다. 경험주의를 자처하고도 윤리의 당위만 설파할 뿐 과학적 논증을 하지 않음 으로써 모순의 늪을 헤맸다"는 것이다. 결국, 공리주의는 윤리, 선악 판단의 근거와 기준을 제시하는 데 성공 하지 못했다. 다만 공리주의는 철학이 도전해야 할 윤리의 최고원리를 두고 깊이 고민했고 철학이 조롱당하 는 현실에서 그 빛을 완전히 잃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252. 무함마드의 아내들과 딸
무함마드는 40세의 미망인 카디쟈와 결혼하여 6명의 자식을 낳았고, 여섯째인 딸 파티마는 수니파에서 말하 는 4대 칼리프이자 시아파에서 말하는 초대 이맘인 알리와 결혼한다.
아이샤는 수니파에서 말하는 초대 칼리프 아부바크르의 딸로서 무함마드가 제일 아끼는 부인이다.
253. 아메리카 인디언
아메리카 원주민(-原住民, 영어: Indigenous peoples of the Americas 네이티브 아메리칸[*])은 아메리카 대륙 의 원주민을 지칭한다. 흔히 ‘인디언’이라고도 하나 이는 영어의 ‘American Indian’에서 온 말로, 엄밀하게
는 미국내 아메리카 원주민만을 지칭할 때도 있다. 언어권에 따라 앵글로 아메리카의 토착민은 인디언, 라 틴 아메리카의 토착민은 인디오라 부르기도 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북미에서는 인디언(Indian), 남미에 서는 인디오(Indio)라고도 하는데, 이 호칭은 원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원주민을 인도인으 로 오인한 것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겨지며, 또한 인디언의 아름답고 자연친화적인 삶의 방식을 보고 신의 품속(In + Dios(스페인어))란 이름으로 지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때때로 경멸의 의미를 지니고 의미가 불확 실한 까닭에 영어권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이라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북극권
의 이누이트를 포함하는 경우도 있으나, 인디언이라 호칭할 경우에는 보통 이누이트는 포함되지 않는다. 또 한 지역별로 다양한 인종형질적 차이와 언어적 차이를 보이는 까닭에 이들을 하나의 동계민족으로 간주하 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예를 들어 브라질 열대우림지역의 부족과 미국 대평원 지역의 부족, 남미끝의 티에라 델푸에고 섬의 토착종족간에는 언어, 문화, 신체적 특징 등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254. 윌리엄 세익스피어
윌리엄 셰익스피어(영어: William Shakespeare, 1564년 4월 26일[주 1]~1616년 4월 23일)는 영국의 극작가 이자 시인이다. 잉글랜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런던으로 이주하고서 본격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일약 명 성을 얻었고, 생전에 '영국 최고의 극작가' 지위에 올랐다.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처럼 인간 내면을 통찰한 걸작을 남겼으며, 그 희곡은 인류의 고전으로 남아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다. 당대 여타 작가와 다르게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자연 그 자체에서 깊은 생각과 뛰어난 지식을 모은 셰 익스피어는 당대 최고의 희곡 작가로 칭송받는다. 셰익스피어는 각본을 총 36편, 14행시(소네트)를 총 154 편 썼다.
셰익스피어 희곡 전집은 1623년 극단 동료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셰익스피어는 생전에 이미 최대의 찬사를 받았고, 죽은 후에도 계속 숭앙의 대상이 되어 거의 신격화되었다.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이 "영국은 언젠가 인도를 잃을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위대한 인 류의 유산이었다. 그는 '온화한 셰익스피어'라고 불리었지만, 인간에 대한 통찰력만큼은 그 누구에도 비할 수 없으며, 근대 영어의 잠재력을 끌어내어 시극미(時劇美)의 최고를 창조하였다라고 평가받는다.
셰익스피어의 탁월함은 그의 문학적, 연극적 상상력과 감칠맛 나는 표현력에서도 드러난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이 속한 극장의 구조를 십분 활용하면서 구조의 제약을 뛰어넘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관객과 독 자를 매혹한다. 같은 이야기 소재라도 셰익스피어의 손에 들어가면 모든 이의 정서에 공감을 줄 수 있는 보 편성을 갖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시공을 초월하여 거의 모든 삶의 영역을 탐구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들어 있다. 심 지어 현대의 경영학자들이나 정치가들에게도 셰익스피어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또한 ‘사느냐 죽느 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유명한 대사처럼 셰익스피어는 감히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숱한 명 대사를 남겼다. 작품 속 표현 한 마디 한 마디가 관객들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만들고, 교묘하고 신비로운 표현은 그 속에 인생의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오늘날 영어의 풍부한 표현력은 셰익스피어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그의 작 품이 가져다 주는 문학적 향취에 취해 감탄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대사에는 운문과 산문이 혼재되어 있다. 절대 다수는 운문이지만 극적 필요에 따라 산문으로 대사를 쓰기도 했다.
255. 폴 고갱
폴 고갱(Paul Gauguin, 1848년 6월 7일 ~ 1903년 5월 8일)은 프랑스의 후기인상주의 화가이다. 파리에서 태어 났다. 생전에는 그리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종합주의 색체론에 입각한 작품을 남 긴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생의 마지막 10여년을 타히티를 비롯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생활하며 작 업하였고 이 시기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고갱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와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고갱 사후 파리의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두 번의 유작전을 파리에서 개최하였고 그제서야 명성을 얻게 되었
다. 고갱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회화뿐만아니라 조각, 판화, 도예, 저술 등의 다방면에서 작품을 남겼다. 고갱의 화풍은 클루아조니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표작들의 주제는 원시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256. 원자
원자(原子, atom)는 화학 반응을 통해 더 쪼갤 수 없는 단위를 말한다.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원자는 원 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핵은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다. 또 핵반응을 통해서는 더 작은 단위로
나뉜다. 원자와 혼동하기 쉬운 개념으로 '원소'를 들 수 있는데, 원자가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라고 한다
면, 원소는 물질을 이루는 성분의 종류라고 하겠다. 한편, 여러 원자의 화학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분자는 물질 의 성질을 가지는 가장 작은 입자이다. 인도 유럽어에서 쓰이는 atom은 고대 그리스어 a-tomos에서 온 것으로 서 더 이상 나뉠 수 없는(a-: 부정, tomos: 쪼갬)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뜻과는 약간 달리 동양에서 쓰이는 원자(原子)라는 한자어는 물체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는 현대 물리학적 해석에 준용하여 atom을 번역한 것이라 고 볼 수 있다.
atom이라는 낱말은 언어적으로 고대 그리스어에 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추상적 개념은 이미 기원전 5세 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쓴 것이다. 이러한 어원대로라면 당대에 알고 있는 가장 작은 기본 단 위(현재는 쿼크와 렙톤)가 원자가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물리학과 화학에서는 이 항목의 정의에 따른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강한 상호작용으로 결합해 있다. 이들 양성자와 중성자의 개수에 따라 원자를 주 기율표로 분류할 수 있으며 화학적인 성질이 결정된다. 이 결합을 바꾸면 아주 강한 힘이 나온다.
257. 리하르트 바그너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독일어: Wilhelm Richard Wagner, 1813년 5월 22일 ~ 1883년 2월 13일)는 영향력 있는 독일의 피아노 연주자 겸 작곡가이자 지휘자, 음악 이론가, 그리고 수필가이다.
그는 새로운 교향악적인 오페라(또는 "악극")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곡은 연속적인 대위법적 텍스처, 풍부 한 화성과 오케스트레이션, 그리고 유도동기(라이트모티프, Leitmotif; 특정한 인물이나 상황에 연관된 음악 동 기)의 교묘한 사용을 눈여겨볼 만하다. 바그너의 반음계적 음악 언어는 유럽 고전음악의 이후 발전을 암시하며, 이는 극단적인 반음계법과 무조성을 지향한다. 그는 음악적 사고를 그의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이라는 발상을 통해 전환해 나갔고, 이는 그의 기념비적인 네 개의 오페라 연작 니벨룽의 반지 (1876) 을 통해 잘 드러 나 있다. 유도동기와, 종합적인 음악적 표현이라는 그의 개념은 많은 20세기의 영화음악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바그너는 또한 극도로 찬반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인물로서, 이는 그의 음악과 드라마에 대한 혁신으로 인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반유대인적 시각에도 기인한다.
258.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년 8월 27일~1831년 11월 14일) 은 관념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남성 철학자이다. 칸트의 이념과 현실의 이원론을 극복하여 일원화하고, 정신 이 변증법적 과정을 경유해서 자연·역사·사회·국가 등의 현실이 되어 자기 발전을 해가는 체계를 종합 정리하 였다. 1770년 독일 뷔르템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1778년부터 1792년까지 튀빙겐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 후 1793년부터 1800년까지 스위스의 베른과 독일 헤센주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는데, 이 때 청년기 헤겔의 사상을 보여주는 종교와 정치에 관한 여러 미출간 단편들을 남겼다. 첫 저술 《피히테와 셸링 의 철학 체계의 차이》가 발표된 1801년부터 주저 《정신현상학》이 발표된 1807년 직전까지 예나 대학에서 사강사 생활을 했다. 그 후 잠시 동안 독일 바이에른주 밤베르크 시에서 신문 편집 일을 했으며, 1808년부터 1816년까지 독일 바이에른주 뉘른베르크의 한 김나지움에서 교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2년 간 독일 바덴뷔 르템베르크주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한 후, 1818년 독일 베를린 베를린 대학의 정교수로 취임했다. 주요 저서로 《정신현상학》, 《대논리학》, 《엔치클로페디》, 《법철학 강요》, 《미학 강의》, 《역사철학강의》 등이 있다. 1831년 콜레라로 사망했으며, 자신의 희망대로 피히테 옆에 안장되었 다. 헤겔 철학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독일 관념론의 거성인 칸트 철학에서 출발하여 이를 마무리 지었다고 보 는 견해가 지배적이다.[2] 칸트 철학의 근간은 인식론이며 이를 기초로 하여 칸트는 소위 '심리 철학', 윤리학 그리고 우주론과 신학에 접근하였다. 칸트의 인식론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은 인식의 주체인 '자아'인데, 이 개념은 이미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에 의해서 철학적 연구 대상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 코지토'(cogito: 나는 생각한다)의 문제는 칸트에게 물론 지대한 관심을 끌었지만 그는 결코 경험의 한계를 벗 어나서 '자아'의 문제를 별도로 다루지 않는다.
자아의 문제와 관련하여 헤겔은 칸트 철학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헤겔은 '개념'의 문제, 다시 말 해 인간 사유의 산물 자체를 독자적인 그 무엇으로 간주한 것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 인식론에 접근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개념'은 헤겔 철학에서 일종의 '논리 적 범주'로서 스스로 운동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와 같은 개념의 운동은 여러가지 헤겔 철학 용어로 풀 이되는 바, Idee (개념, 이념), Natur (자연), Geist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용어가 도대체 어떤 뜻으로 쓰이며 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헤겔은 정반합(正反合)의 개념으로 변증법을 정형화 하였다. 헤겔의 이러한 변증법은 후 일 헤겔 좌파 철학자 들을 거쳐 카를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변증법은 만물이 본질적으로 끊임 없는 변화 과정에 있음을 주 창하면서 그 변화의 원인을 내부적인 자기부정, 즉 모순에 있다고 보았다. 원래의 상태를 정(正)이라 하면 모 순에 의한 자기부정은 반(反)이다. 만물은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운동하며 그 결과 새로운 합(合)의 상 태로 변화한다. 이 변화의 결과물은 또다른 변화의 출발점이 되고 이러한 변화는 최고의 지점에 도달할 때까 지 계속된다.
헤겔은 정반합(正反合)이라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의 변증법을 설명하기 위해 하인리히 샬 리베우스(Heinrich Moritz Chalybaus, 1796~1862)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헤겔은 정반합이라는 표현 대신, ' 즉자-대자-즉자대자', 혹은 '긍정-부정-부정의 부정' 이라는 표현을 썼다.
헤겔에게 절대 이성은 변증법에 의해 도달되는 최고의 지점, 즉 더 이상 변화될 필요 없는 최고의 위치를 뜻한 다. 얼핏 보면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과 고정화된 절대 정신은 상충되는 맥락이 있지만, 이러한 헤겔 철학의 전 제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노에시스 노에세 오스(noēsis noēseōs)개념을 차용하여 절대 이성은 순수 사유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사유로서 이 러한 모순점을 논리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헤겔은 세계사를 절대정신(이성)이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하였다. 헤겔은 인간의 역사 역시 변증법적 발전을 겪는다고 파악하였으며 그 결과 이성이 최고의 발전 단계에 이르러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 없는 상태를 역사의 종말이라 명명하였다. 헤겔은 당대 독일이 역사의 종말 단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하였다가 많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이 개념은 나중에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유명한 논문에 등장한 후 동명의 책 으로도 출판되었다.
259. 무아위야 1세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프얀(아랍어: معاوية بن أبي سفيان Muʿāwiyah ibn ʾAbī Sufyān[*], 602년~680년, 재 위 661년~680년)은 우마이야 왕조의 시조이다. 우스만 이븐 아판의 친척으로, 메카에서 출생하였다. 무함마
드가 메카 성에 들어오자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1대 칼리프(이슬람교의 교주)인 아부바크르 때 시리아 원정에 공로를 세워, 후에 다마스쿠스의 지사가 되었 다. 우스만 이븐 아판의 시대에는 측근 중 한 명으로서 세력을 키운다. 우스만의 사후 4대 알리와 대립하였다. 661년 알리가 암살되자 예루살렘에서 즉위,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겼다. 그 후 이라크를 평정하여 이슬람권 최초의 세습 왕조를 세워 국정의 정비와 영토의 확장에 노력하였다.
260. 오토 폰 비스마르크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쇤하우젠 후작(독일어: Otto Eduard Leopold Fürst von Bismarck-Schönhausen, 1815년 4월 1일 ~ 1898년 7월 30일)는 독일을 통일하여 독일 제국을 건설한 프로 이센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프로이센 쇤하우젠에서 융커의 아들로 태어났다. 괴팅겐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이후 공 무원으로 근무하다 1847년 프로이센 의회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1848년 베를린에서 혁명이 일 어나자, 그는 반(反)혁명파로 활동하였고, 185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로 참석, 이때부터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를 배제해야 한다'는 '소(小)독일주의' 통일관 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 주재 대사와 프랑스 주재 대사를 거치면서 국제적 외교감각을 지닌 정치인으 로 성장하였다.
1862년 빌헬름 1세의 지명으로 수상(kanzler)에 취임(1873년 퇴임)하였고 이후 1862년 12월 1일에서 1866 년 12월 31일까지 빌헬름 1세의 대리청정을 직무 수행하였다. 수상 취임 후 첫연설에서 군비확장을 주장한 《철혈정책》연설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철혈정책에 따라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비를 확장하여 1864 년 덴마크를, 1866년 오스트리아를 제압하였고 이후 일으킨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년-1871년)에서 승 리하여 독일 제국을 선포, 통일을 이룩하였다.
이후 비스마르크는 1871년-1890년까지 독일제국의 제국수상(Reichskanzler)으로서 유럽 외교무대를 주도 하면서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위해 노력했다. 3제 동맹,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3국 동맹, 이중보 호조약 등 수 많은 동맹과 협상관계를 체결하였고,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발발하자 베를린 회의를 주 재하여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국내적으로 1872년부터 남부독일의 가톨릭교도를 억압하기 위한 문화 투쟁을 벌였으며, 1878년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를 억압하였다.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과 식민지 획득을 장려하여 아프리카에 독일 식민지를 획득하는 데 공헌을 하기도 하였 다. 1890년 빌헬름 2세와의 정책 갈등으로 사직, 정계은퇴를 하였다. 1898년 7월 30일 사망했다.
비스마르크는 일찍이 그의 정치가로서의 경력에 있어 독일 통일의 기회가 있을 것임을 인식했고 하나의 통일 국가로서 프로이센을 준비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1871년 독일제국은 민주주의를 신중하게 제한했으며, 그는 1870년대와 1880년대에 걸쳐서 반(反)-가톨릭과 반(反)-사회주의 법률을 만들었으나 성 공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독일 정치 문화에 불신과 분열이라는 파괴적인 유산을 남겼다.
261.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옙스 끼, 1821년 11월 11일/구력 10월 30일 ~ 1881년 2월 9일/구력 1월 28일)는 러시아의 소설가이다.
1861년 형과 함께 잡지 《시대》를 발간하고, 《학대받는 사람들》, 《죽음의 집 기록》을 연재하여 큰 인 기를 얻었으나, 이듬해 발행 금지를 당하였다. 1864년 형과 함께 새로운 잡지 《세기》를 창간하였으나 실 패하여 큰 빚을 지게 되었다. 1866년 걸작 《죄와 벌》을 완성하였다. 1867년부터 외국, 특히 드레스덴에 거주하면서 《백치》, 《악령》 등을 쓰고 귀국하였다. 1874년 《미성년》을 발표하여 큰 돈을 벌어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베리아 유배 시절에 악화된 지병인 간질과 취미로 즐기던 도박 등이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의 작품 속에 중요한 요소들로 간질과 도박 등이 자주 등장한다. 도박은 그의 인생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 하게 했고, 빚을 갚기 위해 출판사와 무리한 계약을 하여 마감에 쫓기는 나날을 보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죄와 벌》, 《도박꾼》 등은 불러주는대로 받아적는 구술 필기의 형태로 작성되었다. 속기사였던 안나 스 니트키나는 훗날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소설 이외의 저서로는 《작가의 일기》가 있다. 이것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잡지 《시민》에서 도스토옙 스키가 담당했던 문예란 에 게재했던 것으로, 문예 지평, 정치·사회평론, 에세이, 단편 소설, 강연 원고, 종교 론 등을 포함하고 있어 훗날 도스토옙스키 연구에 귀중한 문헌 자료가 되었다.
1880년 그의 최후의 걸작인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탈고하였다. 그 즈음에는 이미 사물을 분간하 지 못할 만큼 눈이 어두워져 있었고 도스토옙스키가 침대 누워 구술한 것을 아내 안나가 속기하여 작품을 완성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881년 1월 28일에 폐동맥 파열로 인하여 가족의 간호를 뒤로하고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임종 직전 아내에게 시베리아 형무소에 있었던 시절 지니고 있었던 성경책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고 같은 날 밤 11시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죽었다.[7] 유해는 같은 달 31일 페테르부르크의 알 렉산드르 네프스키 사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 가운데 한 명으로 불리며 20세기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신흥 자본주의 압박 밑에서 신음하는 소시민층의 대변자인 동시에 열렬한 슬라브주의자였다. 그의 작 품은 비단 문학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종교·사회 문제 등 각 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표 작으로는 《죄와 벌》(1866년), 《카라마조프의 형제》(1879년 ~ 80년) 등이 있다. 진보적 사회 운동을 하 다가 탄압받은 경험이 그의 문학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당시 퍼지고 있던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식층(인텔리겐치야)의 폭력적인 혁명을 부 정하고, 기독교, 특히 정교회 교리에 바탕을 둔 기독교 사상을 담고 있다. 그의 기독교 사상은 기독교의 교리 와 사상을 변증하는 호교론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을 행한 기독교의 폭력을 비판함 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그의 소설은 흔히 이질적, 극단적 심리의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인간 심리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을 보여주고 당대 러시아의 정치, 사회, 정신세계 등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때로 그를 실존주의의 창시자로 여기기도 하 는데, 발터 카우프만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지하실의 수기》를 "실존주의를 위한 최고의 서곡"이라 묘사 한 바 있다.
262.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빌럼 반 고흐(네덜란드어: Vincent Willem van Gogh 핀선트 빌럼 판호흐[*], [ˈvɪnsɛnt ˈʋɪləm vɑn ˈ ɣɔx], 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는 네덜란드 화가로 일반적으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
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의 작품 전부(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측 두엽 기능장애로 추측됨)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만들어냈다. 그는 생존기간 동안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후에 비로소 알려졌는데, 특히 1901년 3월 17일 (그가 죽은 지 11년 후) 파리 에서 71점의 반 고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커졌다.
반 고흐는 흔히 후기인상주의 화가로 분류 되며, 또한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 표현주의에 미친 영향이 막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관점에서 보일 수 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작품에 바쳐졌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도시인 오테를로에 있는 크뢸러-뮐러 박물 관도 상당히 많은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의 수집을 보유하고 있다.
반 고흐가 그린 몇몇 그림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사이에 순위가 매겨지기도 한다. 1987년 3월 30일 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0만 미국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다.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첫째판)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한국돈으로 약 580억원)에 일본의 다이쇼와제지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당시 74세)에게 팔림에 따라,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당시 사 이토가 지불한 8,250만 달러는 낙찰가 7,500만달러에 경매가 구전 10%가 가산된 금액이다. 이후 '가셰 박사 의 초상'은 미국의 수집가에게 4천 400만 달러에 다시 팔렸다.
263. 원소의 분류 : 금속, 비금속, 반금속
비금속(nonmetal, 非金屬)은 금속이나 준금속이 아닌 화학 원소를 말한다. 전기음성도가 높아 결합시 다 른 원자로부터 원자가 전자를 받아들이는 성질이 있다.
비금속 원소는 대부분 주기율표의 오른쪽에 차지하며, 위로 갈수록 비금속성이 커진다. 수소는 예외적으 로 알칼리 가 있는 왼쪽 위에 자리하고 있으나 비금속의 성질을 띤다. 비금속은 전도체인 금속과는 달리 부 도체거나 반도체이다. 비금속은 금속에게 전자를 받아 이온 결합을 하거나 다른 비금속과 공유 결합을 한 다. 비금속의 산화물은 산성이다.
금속 원소가 80여 종류가 되는 데 반해 비금속은 12 종류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금속은 지구, 특히 지각 을 구성하는 주성분이다. 생물의 몸은 대부분 비금속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기본적으로 수소, 탄소, 질소, 산소, 플루오린, 네온, 인, 황, 염소, 아르곤, 셀레늄, 브로민, 크립톤, 아이오딘, 제논, 라돈을 비금속으로 분류한다. 또한 이 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아스타틴도 기본적으로 비금속에 분류된 다. 특히 탄소, 셀레늄, 아스타틴을 준금속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264. 바그너의 반지 사이클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작곡한 4개 악장의 서사 악 극곡이며 오페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위대한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독일어 원제(原題)는 Das Rheingold, Die Walkure, Siegfried 그리고 Die Götterdämmerung 이다.[1] 저주 받은 반지가 저주에서 풀려나기까지의 여정과 그 반지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푸치니를 비롯한 이후 작곡가 세대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 오페라는 고대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의 전설집인 사가(saga) 및 중세 독일의 영웅 서사 시 니벨룽의 노래에 기초하여 대폭 창작되었다. 이들을 대개 ‘반지 사이클’, ‘바그너의 반지’, 또는 간단히 ‘반 지’라고 부른다. 1848년부터 1874년까지 약 26년이 걸렸으며 바그너 혼자 대본을 쓰고 음악을 작곡했다. 반 지를 이루는 4개의 악장극은 다음의 순서대로 연주된다.
- 제1부 (전야)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 제2부 (제1야) 발퀴레(Die Walküre)
- 제3부 (제2야) 지크프리트(Siegfried)
- 제4부 (제3야)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 의 악장극들은 독립적이지만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작곡가가 의도한 바와 같이 4개 모두(또는 전야제 작
- 품인 라인의 황금을 제외하더라도 3개)를 같이 봐야 한다.
- 니벨룽의 반지는 크게 보탄을 중심으로 하는 신들의 세계, 난쟁이 니벨룽족의 세계, 지크프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들의 세계가 몰락한 후 인간의 세계가 새로이 탄생되는 과정이 묘사 되고 있다. 반지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 사랑, 배신, 복수 그리고 종말을 통한 권력의 허망함, 인생의 덧없음 등 인간의 삶에 있어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연주시간은 약 16시간으로 각각
265. 카를 마르크스
카를 마르크스(문화어: 칼 맑스、독일어: Karl Marx : 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는 독일의 철학 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이론가, 언론인, 공산주의 혁명가다.
트리어 출신.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843년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했다. 정치성 다분한 저 술활동으로 인해 마르크스는 무국적자 신세로 수십년 간 영국 런던에서 처자식과 함께 망명생활을 했다. 런 던에서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합작,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연구하며 주요 저작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은 1848년 출간된 소책자 《공산당 선언》과 3권짜리 《자본론》이다. 마르크스의 정치사상과 철학 사상은 그 이후의 사상사, 경제사, 정치사에 거대한 영향을 남겼으며, 마르크스주의라는 일대 학파를 이루 어 그 이름은 보통명사, 형용사화되었다.
마르크스의 사회경제정치이론을 집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라 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인간 사회가 계급 투쟁을 통해 진보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계급투쟁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와 피 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투쟁으로써 나타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가르는 기준은 생산수 단을 통제하는지 여부다. 생산수단은 부르주아에 의해 통제되며,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게 자신의 노 동력을 판매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임노동자로 부려먹힌다. 소위 사적유물론이라는 비판이론에 의해 마르크스는 과거의 사회경제체제들이 그러했듯 자본주의 체제 역시 내재된 결함에 의해 내부적 긴장이 발 생할 것이며 그 긴장에 의해 자멸하고 사회주의 체제라는 새로운 체제로 대체될 것이라 예측했다. 자본주 의 체제는 이런 불안정성과 위기취약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계급적대가 발생하고, 노동자들이 계급의 식을 가지게 된다. 의식화된 노동자들은 정치권력을 쟁취하고, 마침내 계급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 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로 구성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할 것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골자다. 마르크스 는 자신의 예측이 현실화되기를 앉아 기다리지 않고, 노동계급이 혁명적 행동으로써 자본주의를 거꾸러뜨 리는 사회경제적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저술·출판작업에 평생 매진했다.
마르크스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나 부정하는 입장에서나 모두 마르크스가 인류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하나임을 전제한다. 그의 경제학 저술은 오늘날의 노동 및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한 이해 대부분의 기 초를 놓았다. 셀 수 없이 많은 학자, 노동조합, 예술가, 정당이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고, 마르크스의 사상 을 각자 재독해, 변형, 변용했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근대 사회학의 뼈대를 세운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266. 알 가잘리
아부 하미드 무함마드 이븐 무함마드 알가잘리(라틴어: Algazel 알가젤, 1058년~1111년)는 무함마드 이후 의 가장 위대한 무슬림이라고 일컬어져 온 신학자로, 철학이나 수피즘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종교 제학 의 소생(蘇生)》 《미혹으로부터의 해방》과 기타의 명저를 많이 후세에 남겼다. 정통파 신학과 수피즘의 조화가 그의 가장 큰 공적이라고 하나, 이븐 시나에서 정점에 이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플라톤파 철학 을 가장 잘 이해했고, 이를 비판함으로써 반대로 정통파 이슬람을 고수한 공적도 또한 그에게 돌려야 한다.
이슬람 종교사상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때까지 분리되어 있던 신학·법학과 수피즘을 종합하 여 후자의 인격적·신비주의적 체험과 직관지(直觀知)를 기초로 정통 신학을 재구성했다. 이것은 공인된 아 시아리 신학과 이슬람 교도 대중간의 거리를 메우려는 시도였으며, 이때까지 수피즘과 대립하고 있던 신학· 법학자 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수피즘을 섞어서 형해화(形骸化)되어 있던 종교 체계에 새로운 생명을 불 어 넣었다. 그가 죽은 16년 뒤에 최초의 정규 수피 교단(敎團)이 형성되고 뒤이어 다수의 수피 교단이 전 이 슬람 세계에 걸쳐 이슬람 교도를 교단으로 조직하였다.
그의 종교적 편력은 지식인의 정신적 동요를 나타낸 것으로 처음에 그는 법학자·신학자로 성공을 거두었으 나 학문의 형식 논리에 반항하여 스스로 자기의 내적 세계를 강조하여 이슬람의 여러 종교학, 특히 주지적(主 知的)인 철학파를 차례로 편력한 뒤 최종적으로 내면적인 고뇌를 거친 다음 수피즘의 종교 체험에 도달하 게 되었다.
그의 역할은 이슬람 종교사상에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오게 되어, 첫째 이슬람의 학문을 스콜라 신학으로부 터 탈피시켜 《꾸란》과 하디스를 살아 있는 것으로 부활시켜서 마치 기독교가 유럽에서 스콜라주의의 얽 매임을 깨뜨린 것과 같은 상태로 만들었다. 둘째로는 외경(畏敬) 요소를 다시 도입하였다. 셋째로는 앞서 말 한 바와 같이 수피즘의 지위를 이슬람교 내에 확립하였다. 넷째로는 철학을 일반 이슬람 교도에 접근시켰다.
267.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과 여성 참정권 운동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Elizabeth Cady Stanton, 1815년 11월 12일 ~ 1902년 10월 26일)은 미국의 사회운동가, 노예제도 폐지론자, 그리고 초창기 여성 권리 운동의 선도적인 인물이었다. 1848년 뉴욕 세네 카 폴즈에서 개최된 최초의 여성 권리 집회에서 행했던 그녀의 감성 선언은 종종 최초로 조직화된 여성의 권리와 여성의 참정권 운동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여성은 자기 자신의 운명의 조정자이며, 여성을 한 사람 의 시민으로, 국가의 한 구성원으로 여긴다면, 여성은 다른 모든 구성원과 같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 며,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 여성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어머니, 아내, 자매, 딸'로서의 여성의 역할은 단지 부수적인 역할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268. 롤리타
《롤리타》(영어: Lolita)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1955년에 쓴 소설이다.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가 사춘 기 소녀 돌로레스 헤이즈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소설의 제목 '롤리타'는 돌로레스 헤이즈(Dolores Haze)의 애칭이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내용만큼이나 참신한 소설 스타일로 유명하다. 유 머와 비극적인 요소가 골고루 섞인 희비극으로, 뛰어난 작품성과 금기시되던 주제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소설에 쓰인 "님펫 (Nymphet)", "Nubile", "Faunlet" 같은 새로운 단어들이 널리 쓰이게 되 었다.
1962년에 스탠리 큐브릭 감독과 1997년에는 아드리안 라인 감독이 영화화했다.
유럽인 험버트 험버트는 여러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미국 문화를 신랄한 유머를 곁들여 묘사하는 뛰 어난 지성을 갖춘 인물이나, 정작 자신이 열렬히 사랑하는 소녀 롤리타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는 비뚤어 진 인간이다. 미국으로 옮겨온 그는 어렸을 적 잃은 연인 애너벨 라이(Annabel Leigh)의 모습을 셋집 주인 의 어린 딸 롤리타에게서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다.
어린 소녀에게 품는 비정상적인 성욕을 가리키는 롤리타 컴플렉스(로리콘)는 이 소설의 제목에서 유래한 다. 작가 본인인 나보코프는 이 용어가 자신의 소설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별로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 문학자로, 1910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가 소풍에서 벼락에 맞아 죽은 뒤 아버지의 리비에라(Riviera) 호텔에서 자랐다. 험버트는 (그가 님펫이라 부르는) 사춘기 전후 의 매력적인 여자아이들에 대한 열애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는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어린 시절의 연인 애 너벨 과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후유증이다. 그는 부인과 이혼한 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에 파리 를 떠나 뉴욕으로 이사하는데, 그 기간동안에 프랑스 문학 교과서를 저술하기도 한다. 1947년, 그는 집필 활동을 위해 뉴잉글랜드의 램스데일(Ramsdale)이라는 작은 마을에 가서 방을 빌린다. 집주인인 샬로트 헤 이즈(Charlotte Haze)는 과부로, 12살의 딸 돌로레스(롤리타)와 함께 살고 있었다. 롤리타에게 첫눈에 반 한 그는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어머니인 샬로트와 결혼한다. 서서히 롤리타는 그의 머릿속에서 애너벨 의 기억을 대체해간다.
269. 별이 빛나는 밤
《별이 빛나는 밤》은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정신병을 앓고 있을 당시의 고흐가 그린 작품이다. 1889년 상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나와 기억으로 그린 그림이지만, 당시 고흐 는 정신장애로 인한 고통을 떠올려 그림 속의 소용돌이로 묘사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별이 빛나는 밤》은 그가 고갱과 다툰 뒤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이후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 그린 것이다. 고흐에게 밤하늘은 무한함을 표현하는 대상이었고, 이보다 먼저 제작된 아를의 《밤의 카 페 테라스》나 《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에서도 별이 반짝이는 밤의 정경을 다루었다. 고흐 자신은 《별이 빛나는 밤》의 작업을 마쳤을 때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작품이 소개될 당시 미술계 의 반응도 변변찮았다. 현재 이 그림은 1941년부터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상설 작품으로 전시되 고 있다. 비연속적이고 동적인 터치로 그려진 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사이프러스와 연결되 고, 그 아래의 마을은 대조적으로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보여준다. 교회 첨탑은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를 연상시킨다. 그는 병실 밖으로 내다보이는 밤 풍경을 상상과 결합시켜 그렸는데, 이는 자연에 대한 반 고흐 의 내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을 구현하고 있다. 수직으로 높이 뻗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이프러스는 전 통적으로 무덤이나 애도와 연관된 나무이지만, 반 고흐는 죽음을 불길하게 보지 않았다.
270. 화학 결합
화학 결합(化學結合)은 원자 또는 원자단의 집합체에서 그 구성 원자들 간에 작용하여, 이를 하나의 단위체 로 간주할 수 있게 하는 힘 혹은 결합을 말한다.
화학 결합은 크게 이온 결합, 공유 결합, 금속 결합, 배위 결합 등으로 구분된다.
두 개 이상의 분자, 이온, 또는 원자 사이에 형성할 수 있는 4가지 형태의 결합이 있다. 분자 간의 힘은 분자 들이 서로 더 끌어당기게 하거나 멀어지게 하는 힘을 말한다. 가끔 이러한 힘은 어느 물질이 지닌 물리적인 특성의 일부(이를테면 녹는점)를 정의하여 놓고 있다.
- 쌍극자 쌍극자 상호작용
- 수소 결합
- 런던 분산력
- 양이온-파이 상호작용
271. 19세기 민족주의
국민악파(國民樂派, musical nationalism)는 작곡자가 자기 민족의 의식을 가지고 자기 민족의 고유한 특 색을 음악에 담던 19세기 후반 서양의 음악 사조를 일컫는다. 국민악파가 대두되기 전 200여 년 가까이 유 럽의 뛰어난 음악가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독일인이었지 만, 낭만주의 운동이 개인의 감정을 강조하자 작곡가들은 각 나라나 지방의 고유한 전통을 표현하기 위해 정성을 쏟았으며, 자기 나라의 음악 영향을 소중히 여겼다.[1]
음악 양식에 국민성을 끌어들이는 것은 19세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 전부를 국민악파 음악이 라 부를 수는 없으며, 제국주의의 침략 등 어떤 사회적ᆞ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의식적으로 국민 정 체성을 반영한 음악 소재를 작품화하였을 경우에 국민악파 음악으로 정의할 수 있다.
국민악파는 주로 각 민족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민요나 춤곡 등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민족적 요 소를 있는 그대로 작품 속에 도입하는 경우도 많으나, 민족성을 기저에 깐 음악 형식이나 여러 음악 어법을 쓰기도 하고, 또 민요의 가사나 문학, 혹은 전설, 고담, 역사, 자연풍토, 민중생활 등을 소재로 하기도 하며 그 시대의 민족주의적인 새로운 문학을 제재로 자국어로 된 성악곡이나 오페라, 교향시, 모음곡 등의 표제 음악을 작곡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까지는 중부 유럽이 고전 음악의 중심이었으나, 이제는 주변의 다양한 민족 출신의 음악가가 많이 등장하였다.
272.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독일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는 독일의 문헌학자이자 철학자이다. 서구의 오랜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에 깊이 매진하였고, 이성적인 것들은 실제로는 비이성과 광기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관념론과 기독교는, 세계를 두 개로 구분짓는다. 이를테면 기독교는 이승 이외에도 하늘나라가 있다고 가르 친다. 또한 플라톤은 세계를 현상계와 이데아계로 이분한다. 니체는 이러한 구분에 반대하며 '대지에서의 삶을 사랑할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현실에서의 삶을 비방하는 자들을 가리켜 퇴락한 인간이라 부르며 비 판하였다. 이렇듯, '영원한 세계'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 혹은 칸트가 말하는 '목적의 왕국' 등에 반대하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기독교의 아류로 보고 비판하기도 했다.
니체는 전체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반유대주의 등을 비판했다. 그러나 인종주의자였던 동생이 니체의 책을 조작하여, 그의 사상이 파시스트들에게 왜곡되기도 했다. 진리의 가치를 묻는 그의 질문은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퇴페성 비판 : 그는 기존의 도덕적 세계관이 삶을 옥죄고 있다고 인식했다. 모든 시대의 현자들은 삶에 대해 같은 결론을 내렸다: 삶이란 의미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에 기독교와 불교를 포함한 종래의 도덕적 사상 들을 데카당(퇴폐적인 것)이라 칭하며 비판한다. 플라톤 연구자이기도 한 니체는 기독교에 대해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 사상에 불과하다.”라고 평가를 내린다.
신은 죽었다.
신의 죽음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가치의 상실을 의미한다. '신의 죽음'이란, 종교 혹은 이상주의 등의 신 앙이 상실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달리말해, "신의 죽음이란 허무주의의 도래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최고가치의 상실과 허무주의의 출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삶의 최고가치가 상실된 상태에서 개인 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기독교와 불교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 책에서 니체는 일견 불교에 대해 호평을 내리지만 이내 기독교와 불교 양자를 퇴폐적인(데카당트) 종교로 규정짓는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는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이며, 불교는 삶에 지친 노인들을 위한 종교이다.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는 자신을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소개한다.
나는 디오니소스 신의 마지막 제자이자 정통한 자이다 : 나는 기어이 한 번쯤 내 친구인 그대들에게, 나에게 허락하는 한, 이 철학을 조금은 맛보게 하는 일을 시작해도 좋을 것이 아닌가? 여기서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그리스 비극'에 대한 상징으로 활용하고 있다.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해석 탓인지, 니체는 '성장'이라는 개념을 좋아했는데, 이는 그리스 비극 정신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도 드러난다. 니체에게서 그리스 비극 정신이란, 니힐리즘을 근본으로 하는 고통을 힘의지로 승화시키는 태도이다. 니체는 탈아의 도덕을 뛰어넘는 인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를 위버멘쉬라 부를 수 있다. 위버멘쉬는 또한 종래의 안일한 인간을 뛰어넘은 인간유형이다. 이렇게 보면 위버멘쉬는 종래의 성(聖)과 속(俗)을 뛰어넘는 인간이다.
허무주의: 목표가 결여되어 있으며 : '왜?'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결여되어 있다. 허무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고 가치들이 탈가치화 하는 것. 허무주의는 병리적 중간 상태를 표현한다(병리적이란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결론짓는 끔찍한 일반화를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두 가지 뜻이 있다.
- 능동적 허무주의 (Der aktive Nihilismus)
- 수동적 허무주의 (Der passive Nihilismus)
'수동적 허무주의'은 약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쇠퇴한 니힐의 현실을 직시할 것을 회피하고 찰 나적인 향락주의나 무관심한 이기주의 등 퇴폐적 삶에 의해 공허감을 채워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허무주의 는 잠재적인 형태로 예감될 뿐이며 그 참된 극복은 무한히 연기된다. 이에 대해 소모적인 현실 도피의 삶을 거부하고 니힐의 병근(病根) 한가운데로 적극 개입함으로써 허무의 현실을 초극하려는 것이 '능동적 허무주 의'이다. 이러한 능동적 허무주의의 입장에서 모든 현존하는 가치나 질서가 뽐내는 절대적 권위를 파괴해 갈 때,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자유로이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싹튼다. 우상(偶像)의 가면을 벗기는 이기(利 器)로서 무(無)를 내세움으로써 무를 단순한 생의 소모 원리(消耗原理)로부터 생의 적극적인 창조 원리로 전환시켜 나가는 '능동적 허무주의'야말로 허무주의의 지배 밑에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당연한 생활 방식이 라고 니체는 말한다. - 위버멘쉬는 어원적으로 '뛰어넘는(Über) 인간(mensch)'을 뜻한다. 다시 말해 극복하는 인간이며, 극복함으 로써 창조하는 인간이다. 새겨두어라 형제들이여.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창조하는 것이다. 세계가 생겨난 이 래로 지금껏, 스스로에 대한 비평을 허용하는 권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위버멘쉬는 근대적 가치와 도덕 및 신앙을 뛰어넘는 인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종래의 규범들은 인간에게 해로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위버멘쉬는 탈아의 도덕을 극복해내는 인간이다. 이를테 면 극기복례 혹은 순교자 개념을 극복해내는 인간이며, 그럼으로서 창조해내는 인간이다. 위버멘쉬 개념은 ' 풍습의 도덕'과 대립될 뿐 아니라, '인간말종(Der letzte Mensch)'과도 대립되는 개념이다. '인간말종(Der letzte Mensch)'란 현실에 안주하는 인간형 혹은 권력욕에 물든 인간을 가리킨다. 위버멘쉬는 초월적,신적인 힘을 갖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종래의 탈아적 가치를 극복하고 새 것을 생성시키는 인간을 의미한 다. 이 원숭이들을 보라. 이들은 권력을 원하며, 무엇보다도 권력의 지렛대인 돈을 원한다. 이들 모두는 높은 권좌를 원한다. 그러나 권좌 위에는 똥이 있는데.
힘의 의지
니체 철학에서 힘에의 의지란 자기 보존 본능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가 주창한 생에의
의지라는 개념과 대립되는 개념. 찰스 다윈이 주장한 생존 경쟁이라는 개념과도 대립된다.
니체는 '생존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천재는 – 작업이나 업적에서 – 필연적으로 낭 비하는 자이다 ; 전력을 다한다는 것. 이것이 그의 위대함이다......말하자면 자기 보존 본능이 풀어져 있다; 발산되는 힘의 압도적인 압력이 그에게 그러한 보호와 신중함을 금한다.
도덕비평
니체 철학에서 도덕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 잘 알려진 것은 '노예도덕'과 '주인도덕'의 분류이다.
- 비교적 덜 알려진 명명법들: 풍습의 도덕, 탈아의 도덕, 자기희생의 도덕, 연민의 도덕[27]
- 니체의 도덕비평은 '사회학적/정치학적' 측면보다는 주로 심리학적/가치론적 측면에서 진행된다.
-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적 개념의 족보를 다루며, 도덕과 그 부대개념들이 역사 안에서 어떻게 형 성되어 온 것인지를 기술한다.
• 주인도덕은 자기긍정에서 비롯된 가치평가를 반영한다.
노예도덕은 억압받는 인간의 원념(怨念)에서 발원한다. 즉 노예도덕은 원한도덕이다.
주인도덕은 좋음과 나쁨을 가려 물으며 이를 가치평가의 잣대로 삼는다. 노예도덕은 형이상학적 의미의 선 과 악을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상정한다. 다시 말해, 주인도덕은 개인의 호오(好惡)를 기준으로 하고, 노예도 덕은 사회적 선악(善惡)을 기준으로 한다. 주인에게 '좋음'이란, 자신과 타자를 고양시키는 것이다. 주인에게 ' 나쁨'이란,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노예도덕은 주인도덕과 대립된다. 주인은 자신을 기준으로 '선'을 상정하지만, 노예는 먼저 '악'을 떠올린다. 노예도덕에서는 '주인에게 복수하지 못하는 무력감'이, '자발적 용서'로 둔갑한다. 노예도덕에서는 노예가 느 끼는 무력감이 미덕으로 위장한다. 주인의 미덕이 약자의 눈에는 악덕으로 비쳐진다.
도덕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알기 위해서는, 《도덕의 계보》 이외에도 니체가 쓴 《아침놀》이나 플라톤이 쓴 《고르기아스》를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아침놀》에서 니체는 '관습의 도덕'이라는 개념을 거론하며 이 를 비판한다. 《고르기아스》를 읽다보면 중간 즈음부터 칼리클레스가 등장하여 자연과 규범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 책에서 칼리클레스는 '규범'이 약자 패거리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며, 규범이란 소수에 불과한 강자 를 억압하는 도구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입장은 칼리클레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영원 회귀"라는 생각은 차라투스트라의 기본 생각이고 니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생각"이다. 영원한 회 귀는 오직 이 순간으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다. "목표 없는 시간"이라는 무시무시한 순간 속에서 인간은 자신 삶의 본래의 임무를 경험한다. 영원한 회귀의 신적인 순간은 미학적, 즉 비극적-디오니소스적 상태의 순간이 다. 이 상태는 현존재에 대한 긍정(Amor Fati)이 이루어지는 최상의 상태이고, 그 상태 속에서 허무주의가 극 복되고 인간과 모든 현존재의 빈곤이나 과잉은 긍정된다. 비극적-디오니소스적 상태는 가장 작고 보잘것없 는 것의 회귀일지라도 영원 회귀에 대한 생각이 받아들여지는 상태이다. 최상의 세계 완성의 순간, 세상이 완 벽하게 되는 "갑작스런 영원"의 신적 순간, 웃는 신 디오니소스가 춤을 추면서 우리 몸을 관통해 지나가는 디 오니소스적 순간은 세상을 미학적 현상으로 영원히 정당화하는 순간이다. 니체는 이런 경험, "위대한 정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일어나는 완벽한 밝은 대낮의 직관으로 차라투스트라의 기본 생각이기도 한 자신의 철학 하기의 원래 목적과 기본 경험을 분명하게 말한다. 미학적 현현으로서의 영원회귀. 아름다움 속에서 모순들 은 억제되고 영원 회귀의 순간인 미의 디오니소스적 순간 속에서 과거의 지나간 것과 미래에 도래할 것으로 서 공존의 경험은 영원한 현재의 이 순간으로 이루어진다. 영원이 시간이 되고, 시간이 영원이 된다. 이 순간 에 시간은 갑작스런 영원의 정오-순간으로 지향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의 지위에서부터 회귀를 가르 친다. 위버멘쉬는 "위대한 회귀"에 있어 자신의 심연을 보고 견디어내며 자신을 넘어서고, 비극적-디오니소 스적 상태에서 자아를 잊어버리는 초개인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이다. 위버멘쉬는 "영원의 샘물" 속으로 던져 지는,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순간에 영원 회귀의 "정오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번갯불이다. 영원 회귀의 순간은 힘의 충일로서의 디오니소스, 즉 비도덕적인 예술가 신 디오니소스가 삶을 영원히 긍정하는 순간이 다. 니체의 예술가 복음을 따르자면 종교가 아니라, 예술이 삶의 "형이상학적 활동"이다. 예술, 가장 "커다란 삶의 자극"이 영원 회귀 철학의 구상이다. 니체의 영원 회귀의 기본 이론은 예술의 형이상학이고, 반(反)그리 스도적 예술-종교이고, 삶의 최고도의 충만이다.
273. 마흐디
마흐디(아랍어: مهدي, 안내받은 자) 혹은 메흐디(아랍어: مہدی, 달 중 하나)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말론에 서, 심판의 날 전에 지구에 7년, 9년 혹은 19년 동안 머무르면서 죄와 부정, 포악한 세상을 없애는 예언받은 구
원자이다.
수니파의 전통에서는 마흐디를 지칭하는 하디스들이 있다. 시아파에서는 마흐디에 대한 믿음이 강력하고 종 교 중심적인 생각이고,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모습이 마흐디의 출현과 닮았다고 여겨지는 무함마드 알 마흐 디와 가깝게 연결돼 있다.
바하이교 학자 무잔 모멘은 다음 믿음들이 수니파 무슬림들과 시아파 무슬림들 사이에서 유사하다고 여긴다.
- • 마흐디는 무함마드의 자손일 것이며, 하산 이븐 알리와 후사인 이븐 알리의 자손일 것이다.
- • 그는 무함마드와 같은 이름을 가질 것이다.
- • 그의 출현은 악마 마시흐 앗다잘의 출현과 수반될 것이다.
- • 라마단과 같은 달에 일식과 월식이 일어날 것이다.
- • 빛나는 꼬리를 가진 별이 마흐디가 오기 전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다.
- • 그는 아랍 제국을 건설할 것이다.
- • 그는 재난이나 전쟁과 같은 탄압의 세상을 정의와 공평으로 채울 것이다.
- • 그는넓은이마와오똑한코와짙은눈썹이있을것이다.
- • 그의 얼굴은 달의 표면에서 빛날 것이다.
- 마흐디 대변인의 이름은 이슬람의 예언자의 이름과 쿠란 절의 앞글자인 ی로 시작할 것이다.
274. 앤드류 카네기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년 11월 25일 ~ 1919년 8월 11일)는 미국의 철강 재벌이다. 2008년 기 준으로 세계적인 철강회사인 US 스틸은 카네기의 철강회사를 투자자인 JP 모건이 합병을 통해 설립한 회사이 다.
커네기의 저서로는 『앤드루 카네기 자서전』,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 『승리의 민주주의』, 『오늘의 문제』, 『사업의 왕국』 등이 있다. 사업 일선에서 은퇴한 카네기는 1919년 8월11일 세상을 떠나기 까지 18년간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뉴욕에 900만달러를 기부해 공공도서관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2509개의 도서관을 지었고 미국의 과학발전을 위해 카네기 멜론대학의 전신인 카네기 과학연구원과 기술원 을 설립했는데 시카고 대학 등 12개 종합대학과 12개 단과대학을 지어 사회에 기증했으며 각종 문화예술 분야 에 거액을 쾌척했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 90%가량에 이르는 3억500만달러를 사회에 환원, 그는 “많은 유산 은 의타심과 나약함을 유발하고, 비창조적인 삶을 살게 한다”는 이유에서 부의 대물림을 혐오했다.
275. 허클베리 핀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영어: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은 1885년 2월 처음 출간된 마크 트웨인의 소 설이다. 1851년 늦여름 미시시피 강. 증기선을 보며 남미를 여행할 꿈을 꾸는 남루한 차림의 소년 허클베리 핀 과 흑인 노예 짐의 모험이 시작된다. 인종과 문화의 차이로 갈라져 있는 두 친구지만 자유분방한 헉 핀과 짐이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 강을 표류하며 생애 최고의 이상한 여행을 떠난다. 그 속에서 짐은 헉에게 당시 사람들 의 믿음과는 달리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평등하며 존중되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이 소설은, 신분이 낮은 서 민 주인공의 노상 경험을 기록해서, 독자가 사회의 암울한 그늘을 간접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악한 소설’의 갈래에 속한다. 미국의 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미국의 모든 현대 문학은 마크 트웨인이 쓴 《허클베리 핀 의 모험》이라는 책 한 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교육과 문명을 거부하는 화자의 고백적인 자서전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전통적인 사고에 도전하는 미국의 신세계에 적합한 새롭게 열린 사고의 길을 열었기 때 문이다. 또한 반어법과 해학으로 미국의 가장 심각하고 예민한 사회 문제인 인종 차별을 과감히 풍자하면서도, 미국 고유의 정서인 유머로 미국 문화의 토대를 조심스레 두드리는 용기는, 흑인을 주인공의 동반자이자 분신 으로 세우고 문학 작품에 흑인 방언을 사용한 저자의 개척 정신과 부합한다.
276. 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프랑스어: Un dimanche après-midi à l'Île de la Grande Jatte)는 프랑스의 신 인상주의 화가 조르주피에르 쇠라(Georges-Pierre Seurat)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캔버스 유화(油畵)이며, 크기는 207х308cm이다. 1884년부터 1886년에 걸쳐 제작되었으며 현재 미국 시카 고 미술원(Art Institute of Chicago)에 소장되어 있다
신인상주의의 창시자인 조지 쇠라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1886년 제8회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되어 이목을 끌었다. 파리 근교의 그랑드 자트 섬에서 맑게 개인 여름 하루를 보내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담고 있 다.
다양한 색채와 빛, 그리고 형태들을 점묘 화법을 통해 꼼꼼하게 표현하고 있다.
쇠라는 빛의 분석이 인상주의의 수법을 따르면서도 인상주의의 본능적이며 직감적인 제작 태도가 빛에만 지 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형태를 확산시키고 있는 점에 불만을 느끼고, 여기에 엄밀한 이론과 과학성을 부여하고 자 도모하였다.
세심한 구성과 단순화된 기하학적인 형태가 강조된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그리기 위해서 유채물 감으로 70점 이상의 예비 스케치와 드로잉을 했다.
색채를 원색으로 환원, 무수한 점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이른바 점묘화법(點描畵法, Pointillism)을 도입함으로 써 통일성을 유지하고 인상주의의 색채 원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인상주의가 무시한 조형 질서를 다시
구축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런 점에서도 이 그림은 오늘날 매우 의의 있는 작품으로서 평가되고 있다.
277. 물질의 상태
물질의 상태(物質- 狀態)는 상에 의해 다른 물질 상태이다. 역사적으로는 거시적인 성질로 구별되고 있었다. 즉, 고체는 정해진 크기와 형태를 갖는다. 액체는 정해진 크기를 갖지만 형태는 정해져 있지 않다. 기체는 크 기도 형태로 정해져 있지 않다. 최근 들어 물질 상태는 분자간 상호작용으로 이를 구별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고체는 분자간의 상호 배치가 정해져 있고 액체에서는 근접 분자는 접촉하지만 상호 배치는 정해지지 않은 반 면 기체는 분자가 꽤 떨어져 있고 분자 간 상호작용은 각 운동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또, 플라스마는 고도로 이온화한 기체로, 높은 온도에서 생긴다. 이온의 인력, 척력에 의한 분자 간 상호작용에 의하여 이러한 상태를 일으키는데, 이로써 플라스마는 자주 "제4의 상태"로 불린다.
분자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다른 힘으로 조직화된 물질의 상태는 다른 물질의 상태로 생각할 수 있다. 이를테 면 페르미 응축, 쿼크-붙임알 플라스마를 들 수 있다.
물질의 상태는 또 상전이라는 용어에서도 정의될 수 있다. 상전이는 물질의 성질의 갑작스런 변화로부터 구조 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정의에서 물질의 상태와는 다른 집합과는 다른 열역학적 상태이다. 물은 몇 개 의 다른 고체 상태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또, 초전도의 출현은 상전이와 관련이 있고 "초전도 상태"라 불리는 상태가 있다. 이와 같이 액정 상태, 강자성 상태는 상전이에 의해 특별한 성질을 갖는다.
표준적인 상태 : 고체, 액체, 기체
비표준적인 상태 : 유리상태, 액정상태, 자석 금속 상태
낮은 온도의 상태 : 반도체 상태, 초유동체 상태, 보스-아이슈타인 응축 상태, 뤼드베리 분자 상태 고에너지 상태 : 플라스마 상태, 퀴크 붙임알 플라스마 상태
그 밖의 제안 상태 : 축퇴 물질 상태, 초고체 상태, 스트링 네트 액체 상태, 슈퍼글라스 상태
278.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구력: 1840년 5월 7일 ~ 1893년 11월 6일, 신력: 1840 년 4월 25일 - 1893년 10월 25일)는 낭만주의 시대의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 지휘자이다. 백조의 호수와 호 두까기 인형, 비창 교향곡의 작곡자이다.
그의 작품은 선율적 영감과 관현악법에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1860년대에는 러시아의 민족주의 음악파 인 러시아 5인조의 지도자 밀리 발라키레프와 교제하여 국민악파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반에는 낭만주 의 경향의 곡을 작곡하였으며 베토벤, 슈베르트의 전통을 러시아로 확산시켰다. 말년에는 유럽 순회 공연을 다녀 성공하기도 했다. 작품 중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의 작품으로 고전 발레 음 악 중 최고의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279. 양상
논리학에서, 양상 논리(樣相論理, 영어: modal logic)는 논리 체계의 일종으로, 명제의 필연성·가능성·불가능 성과 같은 양상(modality)을 서술할 수 있는 논리이다. 예컨대 진리 양상 논리에서 기호 □는 명제가 반드시 참임(필연성)을, ◇는 명제가 참일 수 있음(가능성)을 나타낸다.
280. 지하드
이슬람교에서 지하드(아랍어: جهاد)는 아랍어로 고투 혹은 분투를 의미한다. 성전은 지하드에 포함되는 내용 이기는 하지만, 지하드와 성전이 동의어인 것은 아니다. 라마단에 해 떴을 때 욕구를 참고 금식을 하는 것도 영적인 지하드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의 일부가 전쟁이라는 대외관계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지하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슬람의 국제 질서관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슬람은 출현 초기부터 그들의 세계를 이슬람식의 정의가 실현된 '이슬람의 영역 '(다룰 이슬람)과 비이슬람의 질서가 온존하는 '전쟁 영역'(다룰 하르브)으로 분화하여 그 대응관계를 모색하 였다. 이슬람의 영역 안에도 무슬림 공동체와 무슬림이 아닌 '피보호민'(아흘룰 짐마)의 공동체로 구성되어, 피보호민들은 이슬람 정복지에서 이슬람법을 존중하며 인두세(지즈야)를 내는 대가로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들의 신앙과 법률을 지켜나간 자들이었다. 무슬림의 관점에서 이들 피보호민은 언젠가는 병합해 야 하는 대상이었는데, 그 병합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전쟁일 수도 있고 평화적일 수도 있는 지하드였 다. 즉 이슬람에서 지하드는 이슬람 세계와 비이슬람 세계의 관계를 처리하기 위한 지렛대 역할을 하는 수단 이었다. 또한 단순히 종교적인 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생활 전반에 걸쳐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려는 모든 노력(즉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합일된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게 임하는 것. 등의 생활상의 개선 의지 및 노력)이 지하드일 수 있다.
이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지하드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고, 수니파에서는 지하드를 교리에 넣지 않지만 카라 지(Khariji)파에서는 교리에 포함된다. 이슬람 대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는 지하드를 격려하면서도 원래 실 천 의무는 개인 차원의 의무사항이기에 개인 차원과 집단 차원의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무슬림들이 꼭 수행해야 할 의무도 아닌 지하드를 일반 무슬림들의 종교적 실천 의무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 하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다수 정통파의 주장을 따라 이슬람의 종교적 실천 의무는 다섯 가지(이 슬람의 다섯 기둥)로만 한정되고 지하드는 그 의무에서 제외된다. 소수파인 시아파의 경우 지하드를 실천 의 무로 간주행 한다고 하면서 오늘날까지 그 수행을 강력히 촉구하는데, 여기서는 지하드를 신에 가까이 가기 위한 정신적 지하드인 대(大)지하드와, 전쟁수단에 의한 소(小)지하드로 나누고, 종교신앙적 가치로 보았을 때 대지하드가 소지하드보다 훨씬 높다고 주장한다.
아랍어 단어인 '지하드'는 동사 '자하다'의 동명사로서 '정신적 및 육체적으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한다'는 뜻이 다. 이러한 복합적인 뜻이 이슬람의 종교적 지향과 교감을 이루면서 '신의 길에서 헌신적으로 노력(분투)한다' 는 종교적 함의로 승화하였다. 여기서 '신의 길'을 '이슬람(혹은 이슬람에서 말하는 옳은 길)'으로 풀이하면, 지 하드는 곧 이슬람을 위해 헌신하고 분투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하드를 행하는 사람은 '무자히드'라고 한다.
281. 블라디미르 레닌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러시아어: Вади́р Иьи́ч Ле́, 문화어: 울라지미르 일리이츠 레 닌, 1870년 4월 22일(구력 4월 10일) ~ 1924년 1월 21일)은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혁명가, 정치경 제학자, 정치철학자, 정치인, 노동운동가로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공산주의자이면서도 특별히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레닌주의 이념의 창시자이다. 알려진 니콜라이 레닌이라는 이름은 혁명 가로서 그가 사용하던 가명이다.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이다.
그는 1917년 3월 15일에서 1918년 3월 3일까지 러시아 임시정부 국가원수로 재임하였고, 1918년 3월 3일에 서 1922년 12월 30일까지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가원수를 지냈으며 1922년 12월 30일에 서 1924년 1월 21일까지 소비에트 연방 국가원수를 지내는 등 1917년 3월 15일에서 1923년 4월 30일까지 는 6년간 레닌 시대를 펼치며 6년간의 최고권력자로 실권하였지만 1923년 4월 30일에서 1924년 1월 21일 을 기하여 향년 54세로 병사할 때까지 이오시프 스탈린이 1년간 국정 관련 실권을 잡았다.
1924년 1월 21일 니콜라이 레닌 그가 향년 54세로 병사 후 그의 실질 성향 후계자 스탈린은 1924년에서 1941 년까지 소련의 최고 국정 관련 실권자로, 그리고 1941년에서 1953년까지 소련의 국가원수 겸 최고 국정 관련 실권자로 군림하는 등 1923년 4월 30일(레닌이 아직 사망하기 9개월 전)에서 1953년 3월 5일(스탈린이 사망 한 일자)까지 30년간을 스탈린 시대로 군림하였다.
학생 때 혁명 운동에 가담하고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오랫동안 제정(帝政)의 관헌에서 탄압을 받으며 이론적· 실천적 활동을 계속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스위스에 망명하여 1916년 《제국주의론》를 저술하고 마르 크스주의를 제국주의 단계에 적응시키려 했다. 3월 혁명이 시작되자 4월에 적국인 독일을 경유하여 귀국하 고 노동자와 병사에게 발표한 소위 ‘4월 테제’로 시민 민주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을 투쟁 방침으로 제시하여 혁명을 이끌었다. 7월 사건 뒤에 재차 망명했으나, 11월 혁명으로 볼셰비키 의 권력 획득을 지도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했다. 1918년 제2회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인민위원회 주석에 선출되고, 좌우 기회주의와 싸우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네프에서 보여주는 현실적응정책을 취하여 러시아 공산화에 주역이 되었다.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혁명이론에 충실한 국가를 건설하려 했고, 국 영화, 국유화 및 사상적 단결을 통해 국론통일을 지향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호치민, 마오쩌둥, 요시프 브로 즈 티토, 피델 카스트로, 김일성 등이 그의 공산주의 국가 모델의 영향을 받았다.
282. 보바리 부인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장편 소설이다. 실제로 있었던 개업의(開業醫) 드라마르의 아내인 델피느의 자살사건에서 취재하여 5년간에 걸쳐 완성하였다. 사실소설의 전형적 걸작이 다. 주인공 엠마는 북프랑스 루앙 부근의 부유한 농가의 외동딸이며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꿈을 품은 미모(美 貌)의 정열적인 여성이다. 의사 샤를 보바리와 결혼을 하지만 곧 환멸을 느낀다. 그것을 안 바람둥이 루돌프 는 그녀에게 접근하여 간단하게 정복해 버린다. 그러나 그녀가 열중하자 간단히 그녀와의 관계를 끊는다. 엠 마는 절망하였으나 이어 젊은 서기 레옹을 사랑하여 밀회를 거듭한다. 그간 그녀는 가사를 돌보지 않고 남편 몰래 낭비한 빚 때문에 결국 자살해 버린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꿈 많은 여성의 인생과 결혼에 대한 환멸의 이야기이며 '파멸(破滅) 소설'의 전형이다. 종 교와 양속을 해치는 것이라고 하여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판결을 받았다. 대비평가 생트뵈브는 이것 을 과학적 인간분석의 우수한 선구적 작품으로 보았고, 텐은 발자크 이래 가장 뛰어난 소설이라 하였다.
283. 표현주의
표현주의 (表現主義)는 20세기 초에 일어난 미술의 한 양식이다.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파와 마찬가지로 표현주의는 자연주의 경향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표현주의에서는 표현적 측면이 미학적, 객관적인 측면에 비해서 압도적인 무게를 지닌다. 이것은 미술가들 이 자신들의 체험을 관람자를 위해서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표현주의는 조형예 술에서 생겨난 양식이며, 미술운동으로 20세기 초(1901-1925년)에 특히 독일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 던 양식경향이다. 영혼의 표현을 나타내는데 주력한 표현주의는 사물의 외면을 묘사하는 인상주의와는 대 립되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말해 표현주의는 인상주의의 특징인 빛과 색채의 유희를 벗어나려는 데에 초점 을 두었다. 인상주의의 대표적 화가들인 세잔, 고갱, 반 고흐의 그림은 표현주의의 특징을 선구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들 화가들은 이미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 시키고 색채를 사용하는 데 몇몇 매우 간결하고 원색 에 국한하고자 노력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표현주의의 화가들은 위에 언급한 화가 들의 특징을 이어받음과 동시에 한걸음 더 나아가 자연 대상을 단순히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을 영향 하에서 표현주의는 새로운 양식 경향들과 부분적으로 중첩되거나 부분적으로 대체되었다.
색채, 역동성, 감정과 같은 요소들은 거의 모든 표현주의 미술작품에서 발견된다. 표현주의 화법을 통해서 나타난 색채, 형태를 자유롭게 다루는 것은 혼합되지 않은 색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 목판화와 같은 형태, 소재를 본질적인 것으로 축소한 것, 전통적인 원근법의 해체에서 아주 또렷하게 드러났다.
이 시대의 미술가들은 인상을 현실에 충실하게 재현하거나 아름다운 형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인상 주의 화가와는 대조적으로 표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내적 흥분을 표현했고, 직접적이고 자발적으로 '통렬 하게 느끼'고 해석된 소재를 전달했다. 에른스트 키르히너, 에리히 헤켈, 카를 슈미트 로트루프, 오토 뮐러, 막스 페히슈타인이 주축이 되어서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예술가 집단 다리파'(1905-1913년)와 바실리 칸딘 스키, 프란츠 마르크, 아우구스트 마케, 가브리엘 뮌터, 파울 클레가 속해있던 뭔헨에서 결성된 청기사파 (1911-1914년)가 대표적인 표현주의 집단이었다. 표현주의는 당시에 존재했던 기존 질서와 시민 계층에 대한 항의의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표현주의의 생성은 당시에 일어났던 삶의 개혁 운동과 밀접한 연관 속에 서 고찰되어야만 한다.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프리드리히 니체를 자신들의 생각을 선취한 사람으로 삼았
다. 헤르바르트 발덴(Herwarth Walden)이 발행한 잡지 〈슈투름Sturm〉과 새롭게 창간된 예술 문학 잡지 들이 주요 예술가들에게 토론의 장으로 이용되었다. 낡은 미술적 형식들이 포기되었다. 결과적으로 표현주 의는 자연주의와 대립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표현주의의 강령은 계속해서 부정적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에, 인상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양식적 특성으로 즉 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미술이 강령에서부터 생겨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표현주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정 신적 태도였다. 1906년 키르히너는 다리라는 제목을 지닌 목판화에서 다리파의 강령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 다.
"창작하는 새로운 세대가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우리 젊은이들은 함께 외친다. 그리고 미래를 짊 어질 젊은이인 우리들은 편안하게 자리를 잡은 늙은 세력에 대해서 팔과 삶의 자유를 스스로 마련하고자 한 다. 창조를 하도록 충동하는 것을 직접적이고 거짓 없이 재현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편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표현주의의 중요한 대표 화가들은 자신들이 표현주의자라고 지칭되는 것을 격렬하게 거 부했다. 예를 들면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와 오토 뮐러는 이런 표현이 자신들의 양식과 독창성에 적합 하지 않기 때문에 표현주의자라는 명칭을 거부했다. '청기사파'의 몇몇 회원들이 함께 했고, 예술적으로 아 주 생산적이었던 튀니지와 북아프리카로의 여행은 미술사에 기록되었다. 오늘날에는 독일 표현주의의 많 은 작품들이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너시에 있는 노튼 시몬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1차대전 직전의 불안한 사회정세를 배경으로 뮌헨에서 일어나, 1920년대 중반 무렵 독일의 인플레이션 이 그칠 무렵까지 계속된 건축운동이다. 이 동안의 활동은 별로 통일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아르 누보에서 국가적인 로망주의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형태의 것을 내포하면서 전개되어 갔다. 그것들은 유기적인 형태 나 불안정한 동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많았다. 이들 운동 중에 들어가는 작품으로서 멘델존의 아인슈타인탑 (塔), 헨가의 칠리관(館), 페르치히의 급수탑(給水塔), 자르츠브르크 축전극장(祝典劇場) 계획안, 시타이너 의 괴테관(館) 등이 있다. 베를린의 AEG 공장에 의하여 표현주의에로 이행한 페터 베렌스는 그 뒤 국가적 인 로망주의로 이행한다. 그리고 표현주의 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항의로서도 사용되었다.
284. 광화학
광화학(영어: photochemistry)는 빛을 쬐였을때 일어나는 화학 반응을 연구하는 화학이다. 생체 내 이용으로 는 광합성이 있으며, 산업적으로는 포토리소그래피 등에 이용된다. 분광화학과는 관련 없다.
빛과 화학 반응의 관련을 연구하는 물리화학의 한 분야로서 빛을 흡수한 물질의 화학 반응, 또는 화학 반응 의 결과 일어나는 발광 현상 등을 연구한다.
빛에 의한 화학 반응을 연구하는 물리화학의 한 분야. 빛을 흡수한 물질의 화학 반응, 또는 화학 반응의 결과 일어나는 발광 현상(發光現象)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전자 상태의 연구와 들뜬 분자의 반응, 발광, 활성 상 실 등의 과정 연구도 포함된다. 광화학은 기초적인 분야로서 원자나 분자의 전자 상태, 자유 라디칼의 생성 및 반응, 기본 반응 과정 등의 연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빛에 의해 물질이 변한다는 사실은 햇빛에 의한 물감의 퇴색처럼 예전부터 관찰되고 있었으며, 탄소 동화 작 용 등 널리 알려진 것도 많았으나, 광화학의 기초가 확립된 것은 빛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명확해진 20세기에 들어온 후이다. 20세기 초부터 발전한 양자론(量子論)과 이를 기초로 한 원자 · 분자의 규명은 광화학의 이론 적 바탕이 되었다. 빛은 광양자(光陽子) 또는 광자(光子)라는 에너지 입자의 흐름이며 빛이 물질에 닿으면 물 질 내의 전자가 이 에너지를 얻어 높은 에너지 상태가 된다. 이를 광여기(光勵起)라 한다. 광여기된 물질은 대 부분 원상태로 돌아가지만 종류에 따라서는 분해되거나 다른 물질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새로운 물질을 합성 한다. 광여기된 원 ·분자의 수명 · 전자구조 · 화학적 성질의 연구에 의해 레이저가 발견되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광화학 반응인 사진의 현상(現像)에서는 젤라틴 속에 할로겐화은 결정을 분산시 키고, 거기에 빛을 쬐면 빛이 닿은 부분의 할로겐화은이 불안정하게 되므로 여기에 히드로퀴논 · 메롤 둥의 환원제(還元劑)를 작용시켜 은입자(銀粒子)를 석출한다. 실제 사진의 경우에는 빛의 양이 적어도 될 수 있게 빛을 쪼인 할로겐화은을 함유한 결정 전체가 흑화(黑化) 하도록 되어 있다.
광화학의 기본 법칙으로는 제 1법칙과 제 2법칙이 있다. 광화학 제 1법칙은 「물질에 의하여 흡수된 빛만이 광화학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광화학 반응 제 2법칙은 「빛의 흡수는 언제나 광량자(光量子)를 단위로 하여 이루어지며, 흡수는 항상 분자나 원자가 한 번에 단 하나의 광량자를 둘러싸는 꼴로 일어난다」 는 것이다. 이 제 2법칙은 아인슈타인의 광량자설에 입각하여 빛을 E = hr1(h는 플랑크 상수, r1는 빛의 진동 수)의 에너지를 가지며, P = h/r2 (r2는 빛의 파장)의 운동량을 가진 하나의 입자(광량자)로 생각하여 분자나 원자가 한 번에 하나의 광량자를 둘러싼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화학 반응의 예로는 빛이 반응 분자에 대한 활성화 에너지를 부여하므로 자유 에너지가 증가하는 식물의 광합성을 들 수 있다. 또한 사진 화학, 형광, 인광 등의 분야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285. 안토닌 드보르자크
안토닌 레오폴트 드보르자크(체코어: Antonín Leopold Dvořák, 1841년 9월 8일 ~ 1904년 5월 1일)는 낭만 주의 시대에 활동한 체코의 작곡가로, 관현악과 실내악에서 모국의 보헤미안적인 민속 음악적 작품성 풍색 과 선율을 표현하였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에 의하여 확립된 체코 민족주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만든 음악가 이다. 1890년부터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과 그 밖의 것을 가르치고 있었으나, 1892년의 51세 때 뉴욕의 국 민음악원의 원장으로 초빙되었다.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현악 4중주곡 <아메리카> 등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드보르작의 작품이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1894년의 여름 휴가로 귀국(이 때 피아노 독주곡, 8개의 <유모레스크>를 작곡했다. 그 중에서 7번째의 것이 바이올린으로 편곡되어 유명하다하자 다시 미국으로 가기가 싫어졌지만 일단 돌아가서 결국 다음해 봄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오래도 록 미국에 머물러 있을 것을 바라는데도 불구하고 계약을 도중에 파기하여 귀국하고 말았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슬라브풍의 음악에 흑인과 인디언의 멜로디를 조화하며 작곡을 한 걸로 알려져있다. 귀국 후 만년 의 약 10년간은 일반 민족주의 음악의 작곡가와 같이 오페라와 교향시에 주력하여 <루살카>(1901 초연)와 같은 귀여운 오페라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창작력이 그 정상에 달한 것은 이 이전, 특히 도미 직전인 수년 간으로 추측된다. 피아노 3중주곡 <도무키>(1890-1891)가 그 좋은 한 예이듯이 종래의 독일류의 음악형식 에 구속되지 않은, 슬라브인의 변화와 대조를 좋아하는 민족성에 한층 잘 맞는 새로운 형식적 질서를 낳은 것 도 그 무렵이었다. 1901년엔 빈의 종신 상원의원으로 귀족이 되었고, 같은 해 프라하 음악원의 원장이 되기도 한, 독립 전의 체코의 문화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받은 뒤 1904년 뇌일혈로 사망, 국장으로 모셔졌다.
286. 실용주의
실용주의(實用主義) 또는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은 1870년 무렵 미국에서 시작된 철학적 전통이다. 일 반적으로 찰스 샌더스 퍼스의 《실용적 극대》 발표를 실용주의의 출발로 본다.
당신의 개념이 가리키는 대상의 효력을 생각해 보라. 그러면, 그러한 효력을 갖는 당신의 개념이 대상에 대 한 당신의 개념이다.
실용주의는 생각의 기능이 설명, 재현, 실재의 반영 등과 같은 것이란 아이디어를 거부하고, 그 대신 예측, 문제 해결, 행동과 같은 일들을 위한 도구로 파악하였다. 실용주의는 지식의 본질, 언어, 개념, 의미, 과학과 같은 철학의 주요 주제 모두가 그들 나름의 특정한 유용성과 성과를 기준으로 볼 때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실용주의 철학은 "인간의 경험 안에서 실행적 시험을 거쳐야" 아이디어의 특정되는 적 용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실용주의는 이상주의, 사실주의, 토미즘 등이 세계를 불변의 것으로 파악하는 것 과 달리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실용주의, 즉 프레그머티즘이란 낱말은 19세기 말 퍼스가 자신의 사상을 나타내기 위해 만든 신조어이다. 퍼 스는 자신의 사상이 여러 철학 사조의 주장들 가운데 과학적인 내용을 결합하여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하였 다. 그러나, 이후 실용주의란 말은 원칙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정치적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도 혼용되었다.
287. 천사 가브리엘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사람, 영웅, 힘’이라는 뜻으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계통의 종 교들에서에서 주로 하느님의 전령(傳令)으로 전해지는 대천사이다.
가브리엘은 타나크와 신약성경에 모두 등장한다. 다니엘서에서 그는 예언자 다니엘에게 나타나 그가 체험 한 환시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모습으로 등장한다(다니엘 8,15-26; 9,21-27). 루가 복음서에서는 즈가리야 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각자에게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탄생할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루가 1,11–38). 루가 복음서에서는 특별히 그를 가리켜 ‘주님의 천사’(루가 1,11)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성경에 서는 가브리엘을 대천사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에녹서와 같이 신구약 중간기 문헌들에서는 가브리엘을 대천 사라고 부르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오리엔탈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등에서는 미카엘, 라 파엘과 더불어 대천사로 불리며 공경받고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지브릴(Jibra'il)이라고 불리며, 무함마드를 비롯한 여러 예언자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 기 위해 파견된 네 명의 대천사 가운데 한 명으로 여기고 있다.
288. 베르사유 조약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프랑스어: Traité de Versailles, 독일어: Friedensvertrag von Versailles) 은 1919년 6월 독일 제국과 연합국 사이 맺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평화협정이다. 파리 강화 회의 도중에 완료 했고, 협정은 1919년 6월 28일 11시 11분에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서명했으며, 1920년 1월 10일 공 포했다. 조약은 국제 연맹의 탄생과 독일 제재에 관한 규정을 포함한다. 독일 제재 안건은 파리 강화 회의에 서 다루지 않았다. 지도자들은 서약을 개별적으로 작성하였고, 각각의 주장은 다양하였다. 미국 대통령 우드 로 윌슨은 자신이 새롭게 구상한 14개조 평화원칙을 국제 사회에 공표하기를 원했다. 윌슨은 새로운 외교 관 계는 사람들 스스로 주권을 갖고 국가간의 협력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합국의 승리에 그의 군 대가 큰 역할을 했으므로 그에게 대단한 명성이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복수심이 커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일을 정돈하기를 원했다. 강대국 사이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이 론을 바탕으로 프랑스가 유럽 대륙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 역시 강대국 독일을 방치하길 원했다.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는 반대로 독일의 경제와 정치를 압박하고 프랑스의 재건을 위해 독일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원했다.
그들 사이의 타협은 그 누구도 완벽하게 만족시키지 못했고, 조약은 항상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비판을 받아 왔다. "모든 것은 너무 빠르게 처리되었고 전쟁의 끔찍한 현실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엉망으로 처 리되었다.", "강압적인 이 평화는 새로운 증오를 키울 것이다." 또는 "유럽의 경제 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논의되지 않았다."
289.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프랑스어 En attendant Godot, 영어 Waiting for Godot)는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사 무엘 베케트가 쓴 2막의 부조리극이며, 부제로 "2막의 비희극"라 붙였다. 이 작품은 1940년대 후기에 작성되 어, 1952년에 처음 발간되었다. 베케트는 처음 자신에게는 외국어인 프랑스어로 이 작품을 썼으며, 1954년 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이 작품은 1953년 1월 3일 파리 시의 바빌론 극장에서 프랑스어로 초연되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처음에 비평가들로부터 각기각색의 다양한 반응을 얻었고, 베케트가 "이 작품은 그것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뜻한다"라며 해석을 돕는 것을 거부하면서, 고의적으로 불분명하게 비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희곡 자체는 무엇이 희곡이 연극적 중요성을 가지게 하는지에 대한 개념을 정제시키 며, 많은 유명한 극작가들 - 톰 스토퍼드, 해롤드 핀터, 에드워드 앨비, 샘 세퍼드-에게 영향을 끼쳤다.
- 블라디미르(디디) - 떠돌이, 고도를 기다린다.
- 에스트라공(고고) - 떠돌이, 고도를 기다린다.
- 포조-잔인한지주
- 럭키 - 포조의 노예, 끈에 묶여 포조에게 끌려다닌다.
- 양치기 소년
290. 절규
《절규》(노르웨이어: Skrik, 독일어: Der Schrei der Natur, 영어: The Scream of Nature; 1893-1910년 작[1]) 는 노르웨이의 예술가 에드바르 뭉크의 연작 중 하나인 표현주의 그림으로, 핏빛의 하늘을 배경으로 괴로워 하는 인물을 묘사하였다. 배경의 풍경은 노르웨이 오슬로 (당시 크리스티아니아)의 이케베르크 언덕에서 보 이는 오슬로피오르이다.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 가고 있었다. 해질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 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가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뭉크가 1892년 1월에 남긴 글은 매우 유명하다. 화자의 절망적인 심리상 태를 곡선으로 표현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붉은 구름으로 나타내었으며, 화면 하단에서 비 명을 지르고 있는 인물은 마치 유령과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데, 뭉크는 깊은 좌절에 빠진 사람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와 같은 형태의 왜곡을 하였다고 한다.
291. 아이작 뉴턴
아이작 뉴턴 경(영어: Sir Isaac Newton,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1727년 3월 31일, 율리우스력 1642 년 12월 25일~1727년 3월 20일)은 잉글랜드의 물리학자, 수학자이다. 학계와 대중 양측에서 인류 역사상 가 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1명으로 꼽힌다.
1687년 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Principia")는 고전역학과 만유인력의 기본 바탕을 제시 하며, 과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저서에서 뉴턴은 다음 3세기 동안 우주의 과 학적 관점에서 절대적이었던 만유인력과 3가지의 뉴턴 운동 법칙을 저술했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 과 그의 중력 이론 사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지구와 천체 위의 물체들의 운동 을 증명하는지 보여줌으로써, 태양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점들을 제거하고 과학 혁명을 발달시켰다.
뉴턴은 또한 첫 번째 실용적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고, 프리즘이 흰 빛을 가시 광선으로 분해시키는 스펙트럼 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빛에 대한 이론도 발달시켰다. 또한, 그는 실험에 의거한 뉴턴의 냉각 법칙을 발명 하고 음속에 대해서 연구했으며, 뉴턴 유체의 개념을 고안하였다.
수학적 업적으로 뉴턴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학의 발달에 대한 성과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증명하고, 소위 뉴턴의 방법이라 불리는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f인 을 푸는 방법을 발명하고, 거듭제곱 급수의 연구에 기여했다.
갈릴레이가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표시가능함을 증명하고, 뉴턴은 그것을 증명했다.
- 17세기 말경 뉴턴은 물체에 가해지는 힘이 속도가 아니라 가속를 일정한 비율로 증가시킨다는것이 증 명되었다.
- 뉴턴은 1687년 물체의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을 "프린키피아 라는 책에서 증명했다.(아래 확인) 뉴턴은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뉴턴은 전통적인 기독교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심 또한 깊었다. 그는 그를 오늘 날까지 기억되도록 만든 자 연과학보다도 성서 해석이나 오컬트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한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H. 하트(Michael H. Hart)가 저술한 "The 100"에서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기록되었 다.[2] 그는 삼위일체설을 부정하였고 유일신인 창조주를 믿었다.
- 뉴턴의 운동법칙(Newton의運動法則)은 물리학에서 물체의 운동에 관한 역학적 기본 법칙이다. 일반적으로 고전 역학의 기초인 뉴턴의 운동의 세 가지 법칙을 이르는데, 제일 법칙은 관성의 법칙이고 제이 법칙은 가속 도의 법칙이며 제삼 법칙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다.
-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모두에서 우세 를 보임으로써, 여전히 과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음이 입증됐다.
- 어떤 물체(질량)에 외부로부터 힘이 작용되지 않으면 그 물체는 원래의 운동상태를 지속한다. 이것을 " 관성의 법칙" 라고 한다.
- 물체에 힘을 작용하면 그 물체에 가속도가 붙게 되는데, 그 가속도의 크기는 "가속도의 작용하는 힘의 크기에 비례"하고, 그 물체의 질량에 반비례한다.
- 어떤물체에 작용하는 힘에는 그와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힘인 "반작용"이 작용한다(작용 반작용 의 법칙).
292.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말러 (독일어: 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1911년 5월 18일)는 보헤미아 태생의 후기 낭만파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작곡가로서 그는 19세기 오스트리아-독일 전통과 20세기 초의 현대주의 사이의 다 리 역할을 했다. 지휘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확립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나치 시대 동안 유럽에서 공연 금지를 포함한 무관심의 기간 후에야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1945년 이후 새로운 음악 세대는 그의 음악을 재발견했 다. 그 후 말러는 20세기의 작곡가들 중 가장 자주 연주되고 녹음된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었다. 2016년 BBC 뮤직 매거진 151명의 지휘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그의 교향곡 중 3개는 역대 최고의 교향곡 10위 안 에 올랐다.
보헤미아(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일부)에서 독일어를 구사하는 유대인으로 태어난 말러는 어린 나이에 음악 적 재능을 보였다. 1878년 빈 음악원을 졸업한 뒤 유럽 오페라하우스에서 지휘직을 연이어 맡아 1897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감독으로 발탁됐다. 빈에서 10년 동안, 감독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말러 는 반유대 언론의 적대와 비난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혁신적인 작품들과 공연 수준의 기준에 대한 고집은 특히 바그너,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의 지휘자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였다. 후반기에는 잠시 동 안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감독을 맡았다.
말러의 삶의 대부분은 지휘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제한적이다. 그가 빈에서 학생이었을 때 작곡 한 피아노 사중주곡과 같은 초기 작품들을 제외하고, 말러의 작품은 대부분 대형 관현악단, 교향악 합창단, 그리고 오페라의 솔로 연주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 작품들은 초연 되었을 때 논란이 많았다. 예외로 그의 두 번째 교향곡 〈부활〉, 3번째 교향곡, 1910년 그의 8 번째 교향곡은 성공적이였다. 말러의 음악 후계자들 중에는 제2 비엔나 학교의 작곡가들, 특히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이 있다. 드미트리 쇼 스타코비치와 벤저민 브리튼 또한 말러에게 영향을 받은 20세기 후반의 작곡가들이다. 국제 구스타프 말러 협회는 작곡가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5년 설립되었다.
말러는 그의 생애 동안에는 위대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알려졌으나, 그는 사후에 후기 낭만파의 중요한 작곡가로 평가되었으며, 특히 교향곡과 가곡 (특히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와 〈죽은 아이를 위한 노 래〉), 교향곡과 가곡의 두 성격을 띠는 《대지의 노래》가 유명하다.
그는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작곡하였고, 교향곡을 길이와 우주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야 모두에 있어서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올려놓았다. 또한 말러는 베토벤의 영향 을 받아 교향곡에 성악을 주입하는 시도를 하였다. (그의 《교향곡 3번》은 일반적인 교향곡 레퍼토리 중에 서 가장 긴 약 100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한다. 그의 《교향곡 8번》은 천 명이 넘는 연주자에 의해 초연되었 으며 교향곡 중에 가장 거대한 오케스트레이션을 갖고 있다.) 그는 그의 교향곡 일부에 니체와 괴테의 철학, 중세 종교 상징주의와 영성을 표현하는 가사를 사용했다. 그의 작품은 이제 세계 주요 관현악단의 기본 레파 토리의 일부가 되었다.
293. 현상학
현상학(現象學, phenomenology)은 에드문트 후설에 의해서 창시된 철학이다. 신칸트 학파와 같이 대상을 의식 또는 사유에 의해서 구성하는 논리적 구성주의에 서지 않고, 또 분석철학과 달리 객관의 본질을 진실로
포착하려는 데에 철학의 중심을 두는 것이다. 경험과 의식의 구조들을(the structures of experience and consciousness)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상학의 선구를 이루는 것으로서는 베른하르트 볼차노 의 논리학과 프란츠 브렌타노의 심리학을 들 수가 있다. 볼차노는, 명제가 나타내는 의미는 그 진·위에 상관 없이 주관에서 독립하여, 그 자체에 있어서 성립한다고 생각하였다. 브렌타노는 이와 같은 객관적인 진리의 심리학적 포착을 중심문제로 삼는다. 그는 의식이란 '무엇에 관한 의식'이라는 점에 조심하여 의식현상의 본 질은 대상을 '지향'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브렌타노의 제자 알렉시우스 마이농(Alexius Meinong, 1853- 1920)은 이와 같은 '의식의 지향성'이라는 관점에 의거해서 대상의 본질구조를 밝히려 하였다. 그의 대상론은 보통 표상되는 현실적인 대상만이 아니고, 다만 사유될 수 있을 뿐인 비현실적인 것도 충분한 대상으로서 인 정하는 것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위와 같은 두 면을 이어받아, 한편에서는 객관적 진리를 어디까지나 엄밀하 게 나타내려고 하는 동시에, 이것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려 하는 '기술학'이다. 그는 '사상 자체에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것을 모토로 한다. 그에 의하면 철학은 엄밀학, 보편학이어야 한다고 한다. 이제까지의 철학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성이 불충분하였고, 또 참으로 객관적인 존재로 향하지 않고 다만 주관적인 세계 관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철학의 무정부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철학은 이러한 점을 고쳐야만 수학 과 같은 보편학으로 되어 '철학의 기초학', '엄밀학으로서의 철학'이 된다고 한다.
294. 부처
석가모니(釋迦牟尼 · Śākyamuni, 기원전 624년? ~ 기원전 544년?[주해 1])는 불교의 교조이다. 석가는 부족 명으로 “능하고 어질다”라는 뜻이고, 모니는 “성자”라는 뜻이다.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 · 석존 · 불 · 여래 등 의 10가지 존칭과 아명인 싯다르타 고타마가 있으며, 서양에서는 흔히 고타마 붓다라고 칭한다.
샤카족의 중심지인 카필라 왕국(현재의 네팔)에서 국왕 슈도다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간의 삶이 생로병 사가 윤회하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29세 때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다 른 수행자의 수행법을 따라하거나 고행을 하였으나 이는 무의미하고 중도가 긴요함을 알았다. 부다가야
의 보리수 밑에서 선정을 수행하여 35세에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Buddha, 佛陀)가 되었다. 이후 인 도의 여러 지방을 편력하며, 포교와 교화에 힘썼고, 쿠시나가라에서 80세로 입멸하였다.
샤카족의 성자라는 의미에서 “샤카무니”(산스크리트어: शा(मु*न) 또는 한자 음차인 “석가모니”(釋迦牟尼) 라고 불리고, 줄여서 “샤카”(산스크리트어: शा() 혹은 “석가”(釋迦)라고 한다. 또한 세존, 석존, 불, 여래 등 10가지의 존칭이 있는데, 모두 깨달음을 성취한 존재를 칭한다. 본명은 “싯다르타 고타마”(산스크리트 어: ,स ाथ0 गौतम, Siddhārtha Gautama, 팔리어: Siddhattha Gotama, 한국 한자: 悉達多 喬達摩)로 “고타
마”는 성이며, “싯다르타”는 이름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라고도 한다. 싯다르타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으로 “소원성취” 혹은 “모든 소원을 이루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성씨인 고타마에 깨달음을 성취한 존재라는 뜻의 “붓다(불타 · 불 · 부처)”를 더하여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라고 하기도 한다.
기원전 6세기경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 부근 히말라야 기슭에 카필라 성(가비라성, 지금의 네팔 티 라우라코트)을 중심으로 샤카족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 정 반왕)와 마야 부인(Mahamaya)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카족은 일종의 공화정(귀족정 내지 과두정)이 행해지 고 있었다. 왕이라는 수장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 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코살라 왕국에 예속 되어 있었다.
슈도다나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왕비가 6개 이빨을 가진 흰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서 임신했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임박하자, 당시 풍습에 따라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구리성)로 향했 는데, 기원전 624년경 음력 4월 8일[주해 3] 룸비니에서 꽃이 만발한 무우수 나뭇가지를 잡고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서 석가모니를 낳았다.[1] 이때 하늘에서 오색 구름과 무지개가 피었으며, 가릉빈가(迦陵頻伽)가 아름다 운 소리로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고, 구룡이 나타나 몸을 닦아 주었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는데, 그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올랐고,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 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쳤다. 이는 “우주만물은 오직 자 기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세상을 사는 고통도 생각하기 나름이므로 자기 스스로 편안하게 할 수 있다” 라는 뜻에서 모든 불교의 처음이자 마지막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싯다르타는 생후 7일 만에 어머니 마야 부인을 여의고 이모인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의 손에 자랐으 며, 뛰어난 지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성장하면서 진리에 관해서도 명상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궁 전 안의 안락함이 모든 인간의 생활인 줄 알았다. 어느 날 궁 밖으로 나와 밭갈이하는 농부를 보고 인간들이 수고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인간 사회의 고통을 깨달았다. 그리고 새에게 잡아먹히는 벌레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쇠약한 노인을 보고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다. 태어나서 병들어 신음하고 죽어야 하는 생 로병사의 운명에 슬픔을 금치 못하였다. 석가의 이러한 우울한 심정을 눈치챈 부왕은 혹시 아들이 당시의 많 은 젊은이들처럼 출가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16세의 나이에 골리 왕국의 공주 야쇼다라(Yaśodhara)와 혼인 시켰다. 이후 아들을 낳았는데 수행에 방해가 된다며 이름을 “라훌라(Rahula)”라고 지었다. 부왕은 많은 미 녀들을 시켜 주야로 향연도 베풀었으나, 오히려 출가를 재촉하는 동기만 되었다.
29세가 되던 해 어느 날 밤,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깨우쳐야 한다고 결심하고서 가족에게 무언의 이별을 고 한 채 출가하였다. 이 출가에는 여러 동기가 중첩되어 작용했지만, 가장 강력했던 요인은 “무상한 이 세상의 괴로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도(道)를 추구하려는 끊임없는 열정이었다. 싯다르타 왕자가 카필라 성 동문 밖에서 노인, 남문 밖에서 병자, 서문 밖에서 죽은 자, 북문 밖에서 승려를 만났다는 불전의 사문유 관(四門遊觀) 이야기는 무상고(無常苦)에 대한 강렬한 자각을 의미한다. 아들 라훌라가 있으니 후계자에 대 한 근심은 하지 않게 된 싯다르타는 시종 차닉(車匿)을 데리고 백마 타고서 성문을 빠져나갔다.
싯다르타는 시종과 헤어지고 나서 바라문 고행자의 가르침을 받아 단식하고 고행하였다. 그는 정신을 통일하 려고 허리를 땅에 대지 않고 결가부좌 유지하는 등 온갖 고행을 하였으나 해탈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고서 혼 자 성지를 찾아 수행하기로 하였다. 그는 삭발하고, 옷 갈아입고 구걸하면서 남쪽의 마가다 왕국을 향해 갔 다. 마가다 왕국의 수도 라자그리하(Rajagrha, 王舍城)는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고, 많은 수도자가 모이는 곳 이었다. 여기에서 브라만교의 행자(行者)에게서 요가를 배웠으나, 역시 정신적으로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번 에는 네란자나 강(Nairanjana, 尼連禪河) 부근에서 단식과 불면의 고행을 하였다.
한때 부왕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귀국을 권하였으나, 석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부왕은 석가의 환국을 단 념하고 5명의 현자를 뽑아 태자를 수행하게 하였다.[1] 이 기간이 6년이었는데, 이러한 육체적인 고행도 효험 이 없음을 알고 그만두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고행을 같이하던 5명의 수도자도 떠나갔다. 석가는 목욕을 하 고 심신을 맑게 하여 마을 처녀가 갖다 준 젖과 죽을 마시고 체력을 회복하였다. 그것을 본 5명의 수도자는 석 가가 타락했다고 여겨 떠났다는 설도 있다.[3] 이후 부다가야 근처에 있는 우루베라 촌의 보리수 밑에 풀을 깔 고 법좌를 정하여 빨랑까좌(교족좌)[4]를 하고 깨닫지 못하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조용히 내 관(內觀)의 고행을 계속하였다. 이 고행은 일체의 공리적 관념을 버리고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을 끊어 없 애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함이었다. 이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도를 닦는 마음을 좌절시키려고 달려 드는 마왕(魔王)들과의 싸움으로 묘사되었다.
35세 되는 해의 12월 8일 이른 새벽(남방불교의 전설에는 바이샤카월의 만월이 된 밤)에 드디어 ‘대각(大覺)’ 을 이루고 생·로·병·사의 본원을 끊어 없애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어떠한 번뇌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 대 정적(靜寂), 즉 열반의 세계를 체현(體現)한 것이며, 올바른 자각을 얻어 눈을 뜬 부처가 된 것을 의미했다.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는 보리수 밑에 대좌하여 7일 동안 12연법을 달관하여 모든 의혹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한동안 깨달음의 경지를 혼자 즐기다가 얼마 후 이러한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고자 하였다. 우 선 지난 날에 같이 고행하던 5명의 수행자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바나레스 교외의 사르나트(鹿野苑)를 방문 하였다. 그들 5명은 고행을 그만둔 석가를 경멸했으나 이내 쾌락과 고행의 양극단을 배제한 중도의 설법에 감화되었다. 이 최초의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불타의 제자가 된 5인의 비구(比 丘)가 생기면서 불(佛)·법(法)·승(僧)의 불교 교단이 성립하였다.
이후 45년간 라자그리하와 슈라바스티(Sravasti, 舍衛城)를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범위에 걸쳐 설법을 해나 갔다. 불타의 가르침은 심원하면서도 상대에 따라서 문답 형식이나 비유 또는 인연 설화(因緣說話)를 활용하
고, 평이한 말로 친절을 다하여 설법했으므로 점차 제자가 늘어났다. 경제적으로 돕는 귀의자도 나타나서 라 자그리하의 빔비사라 왕이 가란타의 동산에 건물을 짓고 헌납하니 승가람의 시초가 되었다. 이를 죽림정사라 고 부른다. 사위성에도 기원정사라는 큰 절을 세워 사부중의 완성을 보았다.
80세의 고령이 될 때까지 설법을 그치지 않았는데, 파바시에서 받은 공양이 잘못되어 심한 이질(식중독)을 앓았다. 고령인데다 금식을 자주 했었기에 장이 매우 약한 탓이었다. 병이 위독함을 깨달은 불타는 최후의 목 욕을 마치고 사라(沙羅)나무의 숲속으로 들어가 북쪽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누워 발을 포갠 다음 밤중에 제 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폈다. 이후 쉬지 말고 수행에 임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조용히 쿠시나가라에
서 입멸하였다. 기원전 544년 2월 15일(남방불교에서는 베사카월의 만월의 밤)이었다. 유골과 사리는 왕후, 귀 족들이 분배하여 각자의 나라에 가지고 가서 탑파를 세우고 봉양하였다.
자신을 등불 삼고 자신에게 의지할 것이지,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
법을 등불 삼고 법에게 의지할 것이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 대열반경
불기는 부처가 탄생한 해가 아니라, 빠리닙바나(반열반)에 든 해부터 계산하는데, 이는 큰 스승을 추념하는 의미에서 부처와 함께하지 못할안거(安居)의 해를 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950년 세계불교도우의회 (WFB)가 창립된 후 1956년에 상좌부 불교(스리랑카와 동남아) 국가들은 부처의 탄생지인 룸비니(Lumbini) 에서 부처의 반열반 2500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는 부처의 탄생과 반열반을 기원전 624년 ~ 544 년으로 본 것으로 현재 모든 불교 국가 및 UN에서 통일 불기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고고(苦苦)
- 우리가 여기에 태어났다는 것은 바로 아픔의 뿌리이다 (生).
- 태어나서 늙게되는 것은 또한 아픔이다 (老).
- 살아가면서 병이 들면 아픔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病).
- 삶을 언젠가는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것에 아픔을 깨닫는다 (死).
- 괴고(壞苦)
- 사랑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깨닫는다 (愛別離).
- 미워하고 한숨지으며 아픔을 깨닫는다 (怨憎會).
- 무엇을 얻고자 하나 얻지 못하면서 아픔을 깨닫는다 (求不得).
- 행고(行苦)
- 사람으로 태어나 가진 다섯 가지 조건에서 비롯되는 아픔을 깨닫는다 (五取蘊).
연기설이란 “이것으로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너와 나와 만남도 바로 깊은 인 연의 까닭이다. 네가 있으니 내가 있는 것인 만큼 자타가 불이(不二)함을 깨달아 머무름이 없는 자비를 실천 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연기(緣起)”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인연으로 인하여 생겨난다”는 뜻이다. 자비란, 연기를 깨달을 때 나타나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사랑. 다시 말해 자타불이(自他不二)를 전제로 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한다. 진정한 자비란, 인간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 즉 미물에까 지 미치는 사랑을 의미한다.
우주 만물과 타인들과의 불가피한 인과 관계를 깨닫게 되면,
내가 소중하듯 남도 소중함을 알게 되고,
나의 기쁨을 같이 기뻐하게 되고, 남의 슬픔도 같이 슬퍼하게 된다
사성제란 곧 욕심이 없으면 고통이 사라지고 올바른 수행생활로 열반과 해탈에 이를 수 있음을 가르치는 불 교 핵심의 진리로서 여러 불교교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苦)성제 : 모든 것은 다 고통이다
집(集)성제 : 그 고통은 바로 탐욕과 진노와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멸(滅)성제 : 번뇌와 무명을 모두 끊어 버린 절대평화, 절대자유 해탈의 경지를 가리킨다. 도(道)성제 : 멸의 세계에 이르기 위한 “여덟 가지의 올바른 수행 생활”을 설명하여 팔정도의 방법이 있다.
팔정도란 지나친 쾌락과 지나친 계율, 고행을 금지한 중도로서의 여덟 가지 바른 수행법이다.
- 정견: 불법의 진리인 사성제(四聖諦)를 바르게 인식
- 정사유: 올바르게 사유
- 정어: 올바르게 사유하고 그에 따라 말함
- 정업: 올바르게 사유하고 그에 따라 행동함
- 정명: 올바른 생활방식으로 의식주를 바르게 하는 것
- 정정진: 바른 마음가짐으로 노력하는 것
- 정념:실체와사고·감정의움직임에대하여깨어있는것
- 정정: 바른 선정으로 심신을 조용히 갖고 무상무아(無常無我)를 깨달음
삼법인은 불교의 중심 사상으로 일체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을 말하며 나중 에 일체개고가 열반적정으로 대체되었다.
-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이 덧없이 변한다. / 변화만이 유일하다.
- 제법무아(諸法無我): 영원한 자아의 본체란 있을 수 없다. / 힌두 전통의 Atman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일체개고(一切皆苦):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하리라 집착하면 모든 것이 다 고통이다. / 영원한 만족
- 은 없으며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 열반적정(涅槃寂靜): 애욕의 불길을 완전히 끄면(열반) 영원히 고요한(변함없는) 진리의 자리가 드러
- 난다(적정).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깨달고 상대적인 유위세계를 초월하면 무위세계인 열반에 이르러 적멸의 고요함을 누린다.
295. 윈스턴 처칠
윈스턴 레오너드 스펜서 처칠 경(영어: Sir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KG, OM, CH, 1874년 11 월 30일 ~ 1965년 1월 24일)은 영국의 총리(1940년 5월 10일 ~ 1945년 7월 26일, 1951년 10월 26일 ~ 1955 년 4월 7일)를 지낸 정치가이다.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관을 맡고 있었다. 처칠은 전쟁이 일어나 기전부터 군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어 속도를 빠르게 향상시키는 등의 국방개혁을 열정적으로 하 고 있었으나, 독일이 잠수함을 개발하는 바람에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만 투르크(현 재 터키 공화국)의 무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영국군을 파병한 작전도 인명과 재산피해가 커서 사실상 실패한 작전이 되었다.
작전실패에 대한 문책으로 장관직을 사퇴한 처칠은 처제의 권유로 우울증을 잊기위해서 시골에서 수채화를 그렸다. 제1차 세계대전에 중령으로 복귀하여 참전하였다. 당시 그는 유머를 활용하고 복지를 개선하여 군인 들의 사기를 높였는데, 모든 장병들을 목욕을 하게 하여 만연해 있던 피부병을 치료하게 했으며 "겁먹지 말게. 전쟁은 웃으면서 하는 것이야."라고 설득하여 군인들의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진정시켰다.또한 그는 알렉 산더 플레밍을 도왔다.
보수당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보수당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꿨다가, 다시 보수 당에 입당하였다. 때문에 당시 보수당계 정치인들에게 처칠은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후 정계에서 퇴출되었 지만 다시 정치에 복귀하였다.
처칠은 한때 나치 독일이 영국을 공습할 것을 염려해 과거 공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던 일이 있었는 데 당시 정계에서 무시되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이 진짜 영국을 공격하여 처칠의 견해가 맞다는 것이 입증되 자 영국 정부는 처칠을 다시 해군장관에 임명하였다. 이후 네빌 체임벌린이 외교문제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 고, 조지 6세의 승인으로 처칠이 총리에 임명됐다. 이 후 처칠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막아내고 연합국의 승리 를 가져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처칠 시대에 지은 벙커는 현재도 영국 지하에 있다
1945년 1월 1일에서 1945년 7월 26일까지 6개월간 영국 군주 조지 6세의 대리청정을 전담 수행하기도 한 처 칠 영국 총리는 1943년에서 1945년까지 전후 유럽 문제를 놓고 연합국이 몇 차례 회담을 열었는데, 여기서 부 분적으로 소련이 동유럽 국가를 병합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처칠은 소련 지도자 스탈린이 혐오스러운 체제를 이끄는 "악마"같은 폭군이라고 보았다. 1943년 11월 22일 카이로에서 미국의 프랭클린 루 스벨트, 중국의 장제스와 함께 3국 수뇌 회담을 가졌다.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마자 루스벨트와 처칠은 테헤란 으로 장소를 옮겨 소련의 스탈린을 만났다. 테헤란 회담에서 처칠은 영국은 폴란드가 독립 국가로서 복원되는 데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말하였다. 영국은 이 문제가 연합국간에 마찰의 소지가 될 것을 우려하여 폴란드 문 제를 꺼내길 우려하였다.
296.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핑걸 오플래허티 윌스 와일드(영어: 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1854년 10월 16일~1900 년 11월 30일)는 아일랜드의 극작가, 소설가, 시인, 단편 작가이자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날카롭고 약삭빠 른 재치로 유명하며, 런던의 후기 빅토리아 시대 사람으로 가장 성공한 극작가일 뿐만 아니라, 당시에 잘 알려 진 유명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와일드는 퀸즈베리 사건이라는 유명한 재판으로 인해 극적인 몰락을 겪게 되고, “막중한 풍기문란”으로 감옥 에 수감된다. 학자인 H. 몽고메리 하이드는 이 용어가 영국 법정에서 “비역죄”(Buggery Act 1533)에까지 이 르지 않은 동성애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사건 때문에 영국에서 영원히 추방되어 평생 돌아가지 못 했으며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뇌수막염에 걸려 사망했다.
297.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대의 화가'로 꼽힌다. 프랑스 북부 노르파드칼레의 르샤토캄프레시스에서 태어났다.
22세 때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고, 1893년 파리 국립 미술 학교에 들어가 구스타프 모로에게서 배웠다. 1904년 무렵에 전부터 친분이 있는 피카소·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20세기 회화의 제일보로 불리는 야수
파 운동에 참가하여, 그 중심 인물로서 활약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주로 니스에 머무르면서, 모로코·타히티 섬을 여행하였다. 타히티 섬에서는 재혼을
하여 약 7년 동안 거주하였다.
만년에는 색도 형체도 단순화 되었으며, 밝고 순수한 빛의 광휘와 청순 명쾌한 선에 의하여 훌륭하게 구성된 평면적인 화면은 '세기의 경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시작하면서 1951년에 완성한 반(Vannes) 예배당의 장식은 세계 화단의 새로운 기념물이다.
그는 조각·동판화에도 뛰어났고, 직물의 디자인, 삽화 등 새로운 분야도 만들었다. 그리고 대표작으로 <춤> <젊은 선원>이 있다.
298. 실수
수학에서, 실수(實數, 영어: real number)는 주로 실직선 위의 점 또는 십진법 전개로 표현되는 수 체계이다. 예를 들어, -1, 0, 1/2, √2, e, π 등은 모두 실수이다.
실수에 대하여 사칙 연산(덧셈 · 뺄셈 · 곱셈 · 나눗셈)을 실행할 수 있다. 실수는가 가능하며, 실직선에서 더 왼쪽에 있는 수가 더 오른쪽에 있는 수보다 작다. 특히, 실수는 0보다 큰 양수 · 0보다 작은 음수 · 0으로 분류 된다. 또한, 실수는 정수의 비인 유리수와 그렇지 않은 무리수로도 분류되며, 정수 계수 다항식의 근인 대수 적 수와 그렇지 않은 초월수로도 분류된다. 실직선은 복소 평면의 일부로 볼 수 있으며, 이 경우 실수는 허수 와 함께 복소수를 이룬다.
공리적으로, 실수는 완비 순서체로 정의되고, 이는 동형 의미 아래 유일하다. 구성적으로, 실수는 유리수 코 시 수열의 동치류 · 데데킨트 절단 · 십진법 전개의 동치류로서 구성된다. 실수의 완비성은 공집합이 아닌 실 수 유계 집합이 항상 상한과 하한을 갖는다는 성질이다. 이는 유리수와 구별되는 중요한 성질이다.
실수 집합은 비가산 집합이다. 즉, 자연수 집합과 실수 집합은 둘다 무한 집합이나, 그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수 집합의 크기는 자연수 집합의 크기보다 크다. 연속체 가설은 자연수 집합보다 크며 실수 집합보다 작은 크기를 갖는 실수 부분 집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이다. 연속체 가설은 ZFC(즉, 선 택 공리를 추가한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에서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으며, 연속체 가설을 만족하거 나, 그 부정을 만족하는 ZFC의 모형이 모두 존재한다.
299. 인상주의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와 모리스 라벨
클로드 아실 드뷔시(프랑스어: Claude-Achille Debussy, 문화어: 클로드 드뷔씨, 1862년 8월 22일 ~ 1918 년 3월 25일)는 프랑스의 작곡가이다.
그의 대표작품으로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바다, 피아노 전주곡, 영상 1, 2집, 어린이 차지, 오페라 펠레 아스와 멜리장드 모음곡<베르가마스크>중 달빛 등이 있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년 3월 7일 ~ 1937년 12월 28일)은 프랑스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음악원 선배인 클로드 드뷔시와 함께 20세기 초 인상주의 사조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관현악곡인 볼레로 로 유명하며, 무소르그스키가 작곡한 피아노곡인 전람회의 그림의 관현악 편곡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의 오케스트레이션은 다채로운 음색과 악기의 사용으로 유명하다.
300. 마르킨 하이데거
마르틴 하이데거(독일어: Martin Heidegger, 1889년 9월 26일 ~ 1976년 5월 26일)는 메스키르히에서 출생 한 독일의 철학자이다. 흔히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정작 하이데거 자신은 그러한 칭호를 거부하 였다. 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 1928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를 지냈다. 독일의 히틀러 집권시기에는 나 치 독일을 공공연히 지지하는 발언을 자주 해 한나 아렌트 등과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치 독 일 패전후 독일 비(非)나치스화 청문회에서 그의 정부였던 유태인 한나 아렌트의 증언등으로 처벌을 피했고 이후 5년 동안 학문 활동을 금지당했다.
하이데거가 태어난 독일의 메스키르히는 마을 주민들이 모두 가톨릭 신자였고 매우 보수적이었다. 독일 남 부의 반유대주의정서는 이 곳에도 스며들어 있었고 하이데거 사유의 보수성도 이 마을의 보수성과 연관이 있다. 하이데거는 이곳 성마르틴 성당의 종을 치던 아이였다. 그는 메스키르히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903 년 김나지움(인문계 중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1916년까 지 지급된 장학금은 그가 장차 가톨릭 사제가 된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1909년 김나지움을 졸업한 하이 데거는 예수회에 들어가지만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예수회 신부가 되기에는 몸이 약하다는 이유였다. 하이 데거는 대신 일반 신부가 되기 위해 1909년 바덴주 프라이부르크대학 신학부에 입학했다. 1911년 그는 학 업을 중단하고 철학으로 진로를 바꾼다. 그 시절 하이데거는 가톨릭 잡지 등에 여러편의 서평을 실었다.
1915년에는 사강사가 되었고, 다음해부터 후설에게서 현상학을 배웠다. 제1차 대전에 종군한 후, 후설의 조 수를 겸하면서 현상학을 강의하였다. 1927년 현상학의 기관지에 《존재와 시간》을 발표하여 일약 독일 철 학의 제1선에 등장하였다. 1928년에는 후설의 후임으로서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형이상학 이란 무엇인가》는 그 취임 강연이다. 1933년 3월 총장에 피선되었으나 주(州) 문교부와 충돌하여 1934년 2월에 사직하였다. 1945년에 휴직하였다가 1950년에 복직하여 명예 교수가 되었다.
초기시절에는 하인리히 리케르트의 가치 철학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그의 철학은 《존재와 시간》을 중심으로 하는 전기 철학과 1930년~35년 사이의 소위 전회 이후의 후기 철학으로 나뉜다. 그의 대표작인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은 후설의 현상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딜타이의 생의 철 학 등의 영향하에 독자적인 철학을 개척하여 현존재의 존재의미를 탐구하는 실존론적 철학을 수립하였다.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은 방법론적으로는 해석학적 현상학이며 그 대상으로 보자면 현존재, 즉 인간실존에 대한 존재론이다.
한편 현존재로부터 존재 자체로 핵심적 주제가 옮겨간 후기 철학은 역사적으로 존재 자체가 인간 현존재에 게 어떻게 스스로를 현시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 이래의 역사는 존재망각으로 점철되었 으며 특히 오늘날과 같은 기술시대는 존재망각이 극단에 이른 시기라고 한다.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이 플라 톤 이후로 "어떠하다(성질)"라는 뜻을 "존재"라는 개념을 써서 접근하려고 했지,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존재에 대한 모든 연구가 특정한 성질에만 국한되어있고, 존재 자체를 어떤 성질이 있는 형질로 취급했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이미 상정하는 전제"를 분석하는 것이 어떤 대상을 탐구하는 데 우선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철학자와 과학자가 더 기본적이고 이론에 앞서는 존재를 무시했기때문에 그 들의 이론을 보편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잘못 되었으며, 우리가 존재와 인간 존재를 그릇되게 인정하였다. 이 러한 뿌리깊은 몰이해를 피하기 위하여, 하이데거는 철학의 역사를 하나 하나 되짚어 보면서 철학적인 질문 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후기의 주요 저작으로는 《철학에의 기여》, 《기술에 대한 논 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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