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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개발 경제 일반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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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사벌 2024.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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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살만 루시디

아흐메드 살만 루슈디 기사(영어: Sir Ahmed Salman Rushdie, 1947년 6월 19일 ~ )은 인도에서 태어난 영 국소설가 · 수필가이다. 그는 봄베이(현재의 뭄바이)에서 태어나 자라났으며, 14살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역사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부커상을 세차례 수상한 《한밤의 아이들》과 1988년에 발표되어 격렬한 비판을 받은 《악마의 시》로 유명하다. 그의 서사 스타 일은 신화와 환상과 현실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마술적 사실주의포스트모더니즘 기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 작품 활동은 환상적인 이야기이자 과학 소설의 면모도 일부 보이는 《Grimus》로 시작한다. 이 작품 은 발표 당시 독서 대중과 비평가들에게서는 외면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 소설인 《한밤의 아이들》은 그 에게 문학적인 명예와 부를 가져다주었고, 현재까지 그의 최고의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이 작품은 그 후로 지금까지도 인도 탈식민지 현실의 글쓰기 형태를 규정하는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광 고 카피라이터 일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소설은 이후 1993년에 부커 중의 부커상(영 어: Booker of Bookers)을 수상했다. 또한 2008년에는 최고의 부커상(영어: The Best of the Booker)을 수상했다. 한밤의 아이들의 큰 성공 이후, 루슈디는 《수치》(영어: Shame)라는 소설을 집필했다. 이 두 작품은 마술적 사실주의의 스타일을 차용하여, 이민자로서의 관점으로 쓰여진 것이다.

루슈디는 《아라비안 나이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등의 동양 고전 문학뿐만 아니라 현대 문학 으로부터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한밤의 아이들》은 귄터 그라스의 《양철 북》과 같은 소설들에서 주 제를 빌려 왔으며, 루슈디 자신도 그러한 소설에 영감을 얻어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악마의 시》는 명백히 미하일 불가코프의 고전 러시아 소설인 《거장과 마르가리타》과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Marriage of Heaven and Hell〉에 영향을 받았다고 작가 본인도 작품을 통해서 밝히고 있다.

《한밤의 아이들》과 《수치》(영어: Shame)의 주제는 각각 인도파키스탄이다. 그의 후기작에서, 루슈 디는 《무어의 마지막 한숨》(영어: The Moor's Last Sigh)라는 작품을 가지고 스페인으로 작품의 무대를 확장했고, 인도와 이베리아 반도간의 상업/문화적인 연결을 탐구했으며, 《그녀 발아래 땅》(영어: The Ground Beneath Her Feet)에서는 인도 사회와 미국 록앤롤의 상호 영향과 국경을 넘나드는 사랑에 대해 다루었다. 《한밤의 아이들은 루슈디의 작품으로 최고의 것이라는 찬사를 얻었다. 그러나 1989년 이후의 작품들은 《악마의 시》와 비슷한 관점에서 비판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루슈디는 그의 작품들로 인해 부커상, 유럽 연합 문학상 등 수많은 다른 상들을 수상했다. 또한 그는 왕립 문학협회와 Commandeur des Arts et des Lettres의 회원이기도 하다.

 

122. 라파엘로

라파엘로 산치오 다 우르비노(이탈리아어: 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년 4월 6일 ~ 1520년 4월 6 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화가이다. 흔히 라파엘로 불린다.

아테네 학당》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아테네 학당>은 에피쿠로스, 피타고라스, 안티스테네스 등 고 대 그리스의 학자가 학당에 모인 것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라파엘로는 이탈리아 마르케 지방의 우르비노에서 태어났다. 그는 화가이자 지성인인 조반니 산티의 아들 이었다. 라파엘로는 젊어서부터 조형과, 감정, 빛, 공간표현 문제까지 두루 연마하였다. 그의 천재성은 16 세에 그를 대가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1504년 그는 미켈란젤로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는 피렌체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성모 마리아 와 아기 예수>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1508년에 교황 율리우스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간 그는 프레스코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교황청의 건축과 회화, 장식 등 미술 분야에 관한 감독 책임을 맡고 있던 라파엘로는 37세의 생일에 갑자 기 죽게 된다. 그의 위대함을 알아 보고 교황 직위를 내리려 했던 추기경 레오 10세는 라파엘로가 죽자 그 를 애도하며 국가 장례를 치르게 한다. 라파엘로는 로마의 판테온에 묻혔다.

 

123.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독일어: Albert Einstein, 영어: Albert Einstein 앨버트 아인스타인[*], 1879년 3월 14 일 ~ 1955년 4월 18일)은 독일 태생으로 스위스미국에서 활동한 이론물리학자이다. 그의 일반 상대성이 론은 현대 물리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21년 광전효과에 관한 기여로 인하여 노벨 물리학상 을 수상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생애 동안 300개 이상의 과학 논문을 포함하여 다양한 업적과 활동으로 학문의 발전에 기여했 으며, 현대에도 천재적 인물의 대명사로 잘 알려져 있다.

특수 상대성 이론과 광양자설

1900년 봄, 아인슈타인은 연방 공과대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시민권 문제와 유대인에 대한 배척으로 취직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가정교사, 임시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다행히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한 후, 대학 친구였 던 수학자 마르첼 그로스만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베른에 있는 특허 사무소의 심사관으로 채용될 수 있었다. 특허 심사관으로 근무하던 1905년,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일련의 중요 한 논문들을 다섯 편 연달아 발표한다. 우선 5월 한 달 동안 차례대로 브라운 운동에 관한 '정지 액체 속에 떠 있는 작은 입자들의 운동에 대하여', 빛의 광전 효과를 설명하여 고전 양자론을 태동시킨 '빛의 발생과 변화 에 관련된 발견에 도움이 되는 견해에 대하여', 그리고 특수 상대성이론을 소개한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역학 에 대하여'를 발표하였다. 1905년 8월에는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설을 제창한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의존하는가'를 발표하였다. 1905년에 발표한 이 네 편의 논문들은 최초로 원자의 존재와 통계적 요동을 바 탕으로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는 한편, 현대물리학에서 양자역학상대성이론이라는 두 축을 등장시키게 되 는 혁명적인 논문들이었다.

또한 도중에 같은 해 7월에는 '분자의 크기에 관한 새로운 규정'을 발표한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으로 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이 논문은 고체를 이루는 분자의 운동과 에너지에 관련된 것이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전개

이후 특수 상대성이론이 알려짐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유럽에서 점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상대성 이론을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도입하여 중력을 포함한 이론으로 확장하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특허 사무소 를 떠나서 학계로 입성한 그는 스위스에서 그리고 프라하와 독일의 대학교에서 정교수로 있었으며, 1912 년 겨울에 모교인 ETH 취리히의 교수로 돌아왔다. 1914년에는 독일의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 자리를 얻어 베를린에 머무르게 된다. 1914년에 드디어 일반 상대성 이론의 측지선 공식에 대한 최초의 형식화인 ' 일반 상대성 이론의 형식적 기초' 를 발표하게 되었다. 그는 일련의 시행 착오 끝에 1915년에 발표한 4편의 논문 중 마지막인 '중력의 장방정식'에서 마침내 일반 상대성 이론의 완결된 장방정식을 최초로 구현해 내었다.

 

124.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독일어: Franz Joseph Haydn, 문화어: 프란쯔 요제프 하이든, 1732년 3월 31
~ 1809년 5월 31일)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16살까지 소년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던 음악가이다.

로라우 출생.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6곡의 교향곡, 68곡의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 시대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 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만년에는 미사곡 과 《천지창조(天地創造) Schpfung》(1798), 《사계(四季) Die Jahreszeiten》(1801) 등 오라토리오풍의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125. 바뤼흐 스피노자

바뤼흐 스피노자(네덜란드어: Baruch Spinoza, 라틴어: Benedictus de Spinoza, 히브리어: ברוך שפינוזה, 포 르투갈어: Bento de Espinoza, 1632년 11월 24일 ~ 1677년 2월 21일)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포르투갈계 유대인 혈통의 철학자이다. 스피노자가 쓴 저작의 과학적 태도와 포괄성, 철학사적 중요성은 스 피노자 사후 오랜 세월동안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오늘날 스피노자는 18세기 계몽주의와 근대 성서 비 판의 토대를 놓은 유럽 17세기 철학합리주의자 세 거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대작 《에티카》 에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정초주의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였으나, 정신-육체 이원론에는 반대하였으며 서 양 철학에서 중요한 철학자로 손꼽힌다. 헤겔은 모든 근대 철학자에 대해 "그대는 스피노자주의자거나 아예 철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스피노자는 네덜란드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생활해, 유대 문화에 대해 정통하였으나 비판적인 사상 때문에 유대인 랍비들은 스피노자에게 제명 조치하고, 23살 때에 스피노자는 유대 사회에서 추방되었다. 또 스피노 자의 모든 저작은 가톨릭 교회의 금서 목록에 올랐다.

스피노자는 안경알을 깎는 일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으며, 생전에 교수직을 비롯하여 보수나 명예를 거부 하였고 가족의 유산은 누이에게 주었다. 스피노자는 자연 실체와 도덕적 본질을 합일하였는데 이 작업은 고 대 스토아 학파의 사상을 근대적 의미로 부활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철학자이자 혁명가인 프리 드리히 엥겔스는 스피노자가 자기원인(Causa sui)으로서의 자연을 규명한 것과 동시에 이것이 세계 만유(존 재성) 및 인간성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혔다는 점에서 그가 당대 종교성으로 대표되는 중세기적 몽 매주의(蒙昧主義)로부터 인간을 해방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도덕적 특성과 철학적 성 취를 두고 20세기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철학의 왕자'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스피노자는 폐병으 로 44살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인은 안경을 깎을 때 나는 유리 먼지 때문에 결핵이나 규폐증이 악화된 것으 로 보인다. 스피노자는 덴하흐(헤이그), 스파위(Spui)거리에 있는 신교회(De Nieuwe Kerk)에 묻혔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너무나 유명한 그러나 숱한 오 해를 자아내기도 하는 이 말을 과연 스피노자가 직접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말은 종교개혁자인 마르 틴 루터가 한 말이다. 독일 아이제나흐 루터 하우스의 비석에 이 문구와 함께 문구 밑에 'Martin Luther' 라는 이름이 박혀 있다.) 그러나 독특한 스피노자의 철학에 비추어 볼 때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도 아닌 듯하다.그 에 의하면 우주와 세계,즉 시간과 공간이 하나이므로 시작과 종말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니 순 간적 지구 변화에 연연하지 않고 갈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자연, 신, 그리고 단 하나뿐인 실체는 같은 개념이다. 무한자는 '능산적 자연'(산출하는 자연)으로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궁극적인 힘이다. 이에 대비되는 유한자는 '소산적 자연'(산출된 자연)이 다. 이 두 자연은 힘을 가진다.

 

126. 12사도

사도(使徒)라는 말은 신약성경의 그리스어코이네 그리스어(이하 헬라어)의 '사신', '사절', '차사'를 의미하는 호 아포 스톨로스(그리스어: ὁ ἀπόστολος)에서 유래하였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을 번역하며 '파견된 자', '사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샬리아'(히브리어: שלייה)의 번역 단어로 사용되었다. 기독교 형성 후 신약성경 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12 제자들을 구분하여 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라틴어성경을 번역하며 헬라어 단어를 라틴어식으로 음차하여 '아포스툴루스'(라틴어: apostulus)로 사용하였다. 기독교신약성경에서 사도 의 자격은 성육신하여 역사인물로 살아간 예수 그리스도, 즉 역사적 예수를 만났고, 그분의 가르침을 배운 사람이기 때 문에,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직제자 12명을 사도(마가/마르코 3:16-19)라고 부른다.

하지만 가룟 유다(이스가리옷 유다)가 그리스도를 배반한 후 자살하여 사도직을 버리자, 사도들은 '예수께서 활동하실 때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 중 하나인 마티아에게 사도직의 부름을 주었다(사도행전 1:21-26). 이후 성령강림주일에 탄생한 교회(사도행전 2:1-47)를 탄압하던 사울(회심 이후 파울로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하여 자신의 사 도로서의 권위를 주장하였다(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10). 그래서 대다수의 기독교에서는 바울로를 넓은 의미에서의 사도로 인정하며, 그의 회심을 정교회와 천주교의 교회력에서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로 기념한다.

흔히 사도는 12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마태/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같고, 루카 복음서에서는 다르게 나 타난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마태오와 마르코에 나온 다대오 대신 야고보의 아들 유다를 사도로 기록한다. 이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루카 복음서와 요한복음서에서 각각 언급되고, 사도행전에서도 언급되는 인물이다.

 

127. 북아메리카 대륙 영국인 정착

북아메리카 대륙은 영국의 기업가 집단과 청교도 집단으로 버지니아 타운과 매사추세츠 보스턴에 각각 정 착하여 미국 땅을 개척했다.

미국 최초 13개 주 가운데 매사추세츠와 버지니아를 제외한 다른 주들은 다양한 목적이 뒤섞여 있어 골고 루 발전하게 되었다.

 

128. 오만과 편견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는 제인 오스틴이 쓴 소설이다. 영국의 가장 위대한 명작들 중 하나 로 사랑받고 있다.
본 작품이 집필된 1800년 전후 유럽에서는 《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 있어 영국도 깊게 영향을 받고 있 었지만, 본 작품에서는 정치적인 언급은 거의 없고, 10년 1일과 같은 시골의 지주(젠트리) 사회가 그려져 있 다.

당시의 영국의 상류계급은 크게 귀족원에 의석을 가지고 작위를 가지는 귀족과 그 이외의 대지주 계급(젠트 리)으로 나눌 수 있었지만, 젠트리 계급 내에서도 역사적 혈통, 친족의 질, 재산 등에 의해 격을 따지고 있었 다. 일반적인 사교 의례에서는 동등하게 대우를 받았지만, 결혼 등 현실 문제에서는, 그러한 격차를 많이 따 졌다.

본 작품의 등장인물은 대부분이 지주(젠트리) 계급이다. 주인공 다아시는 지주 출신에 작위가 없지만, 예부 터 명문가인 백작가와 인척 관계가 있고 연수입 1만 파운드의 재산이 있다. 빙리는 그다지 명가는 아니지만 부유하며, 연 수입 5000파운드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 여주인공의 집안인 베넷 가는 지주이지만 중류 계급 이고, 연 수입2000 파운드 정도로 상당한 격차가 존재하고 있다.

당시 재산의 대부분은 장자가 상속하며, 그 이외의 남자, 여자에게는 상속재산의 극히 일부이나 지참금으로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적은 집에서는 그 정도의 재산도 상당한 액수였지만, 자식들이 많은 집에서 는 많은 재산을 나눠 줄 수 없었다.

지주 계층은 생활을 위해서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으며, 직업을 가지는 중류 계급은 자산이 많아도 신분이 낮은 사람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상속재산이 적은 남자는 군인, 목사, 공무원 등이 되었으며, 가장 간단한 것은 많은 재산을 상속한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상속재산이 적은 남자, 여자는 모두 부유한 결혼 상대를 찾기에 적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재산 중 토지, 저택 등의 부동산은 분산을 피하고자 상속 조건을 지정한 한 상속인에게 상속되는 경우가 많 았다. 베넷 가에서는 부동산은 남자 한정의 한 상속인 상속이 되고 있는 데다가 그 이외의 재산은 거의 없어 서, 딸들은 얼마 되지 않는 지참금만 가지고 결혼해야 했다.

공간적 배경은 영국의 시골 롱본(Longbourn)이며, 그곳에 사는 베넷 일가의 딸들이 배우자를 찾게 되는 과 정을 다룬 소설이다. 베넷 씨가 죽으면, 롱본에 재산을 상속시킨다는 계약에 따라 다섯 자매와 베넷 부인은 베넷 씨가 죽으면 재산을 모두 잃을 처지에 놓여있었다. 베넷 일가의 상속 계약에는 여자에게 상속을 금지 하는 조항이 있었으므로, 베넷 씨의 친척인 목사 콜린스 씨가 재산을 상속할 예정이었다. 베넷부인은 그러 한 사태를 걱정했으므로 그의 딸들에게 빨리 배우자를 찾아주려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베넷 씨는 베넷부인 과 달리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으며 주인공인 엘리자베스는 경제적 사정이야 어찌되었던 사랑을 위해서 만 결혼하려 결심한다. 그의 소망은 친절하고, 아름다운 언니 제인이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면 그와 함께 살 려는 것이었다.

소설은 옆 마을 네더필드 파크에 젊고, 부유한 신사인 빙리 씨가 별장을 빌려 이사를 오면서부터 시작된다. 베넷 부인은 빙리 씨에게 딸들을 시집 보낼 목적으로 빙리 씨에게 무던히도 잘보이려 노력한다. 빙리 씨가 참가한 무도회에서 아름다운 맏딸 제인은 빙리와 인상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는 한편, 둘째 엘리자베스는 빙 리의 친구로 따라온 다아시가 자신을 경시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듣게되어 그의 오만함(pride)에 반감을 가지 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의 지성과 위트있는 재치에 점차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 지만 엘리자베스는 나쁜 첫인상에 대한 편견(prejudice)이 굳어져 그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129. 바로크 미술

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는 것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둔다. 흔히 바로크 미술의 시작 지점은 로마이고, 최초의 바로크 미술가카라바조라고 간주되고 있다. 미술사에서 바 로크는 미술의 모든 장르와 하나의 시대를 한꺼번에 포함하는 마지막 양식이다. 바로크 이후로 미술사에서 는 동시대에 여러 가지 미술 사조가 등장하며, 각각의 장르에 따라 서로 다른 양식을 보이기도 한다.

  • 카라바조
  • 루벤스
  • 렘브란트 반 라인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 안토니 반 다이크
  • 베르니니
  • 벨라스케스
  • 루카 조르다노

130. 찰스 다윈과 자연선택설

자연선택(自然選擇, 영어: natural selection)이란 특수한 환경 하에서 생존에 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이, 그 환경 하에서 생존에 부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에 비해 생존과 번식에서 이익을 본다는 이론이다. 자연도태(自 然淘汰)라고도 한다. 이 이론은 진화 메커니즘의 핵심이다. ‘자연선택’이라는 용어는 ‘인공선택’(artificial selection)과 비교를 하려고 했던, 찰스 다윈에 의해 일반화되었으며, 그의 인공선택이라는 용어는 현재는 품 종개량(selective breeding)으로 더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인공선택의 주체가 인간의 목적이라면, 자연선택 은 개체의 변이가 주체가 된다. 모든 유기체의 개체 내에는 변종이 존재하고 있다.

과거에는 '자연선택설'로 불리기도 했으나, 현재 과학계에서 자연선택이 더 이상 가설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인정받은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최재천 교수는 '자연선택의 원리'라는 용어를 제안하였다.

자연선택은 찰스 다윈이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다윈은 이를, 같은 이라도 다른 격리된 환경에 적응하면
개체변이가 생기는데, 이러한 변이 중 생존에 유리한 변이가 살아남고, 이러한 변이가 생존경쟁과 자연선 택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후대로 전해져서 진화가 일어난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다윈의 주장은 개체변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영국에서 회색가지나방은 밝은 색 개체와 어두운 색 개체가 둘 다 서식하지만, 산업 혁명 기간 동안에는 나 방이 휴식을 취하는 많은 나무가 그을음으로 색이 어두워졌으며, 어두운 색의 나방에게 포식자로부터 은폐 하는 경우에서 이점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환경은 어두운 색 나방에게 더 많은 생존 기회를 제공하여 어두운 색의 자손을 생산하였으며, 어두운 색의 나방이 잡힌 지 50년만에 공업 지역인 맨체스터에 서식하는 대부분 의 나방이 어두운 색이 되었다. 1956년 청정대기법으로 균형이 뒤집혀, 어두운 색의 나방은 다시 희귀해졌 으며, 나방의 진화에 자연 선택이 미친 영향을 증명하였다.

적응도(fitness)란 개념은 자연 선택에서 중심적인 개념이다. 넓은 의미에서, 더 "적합한" 개체는, 잘 알려진 문구인 적자생존과 같이, 생존을 위한 더 나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나, 이 용어의 정확한 의미는 더욱 미묘 하다. 현대적인 진화 이론은 적응도를 유기체가 얼마나 오래 사는지로 적응도를 정의하지 않고 얼마나 번식 에서 성공적이었는지로 정의한다. 한 유기체가 그 종의 다른 개체보다 절반 동안만 살았더라도 성체까지 생 존한 자손를 두 배로 낳았다면 그 개체의 유전자는 다음 세대의 성체 무리에서 더욱 많아진다. 자연 선택은 개체에서 작동하지만 우연의 효과는 적응도는 한 집단 안의 개체들에 대하여 "평균적으로" 정의될 뿐이라 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한 유전자형의 적응도는 그 유전자형를 가진 모든 개체에 대한 평균적인 효과와 일치 한다.

 

131. 하이든의 런던 교향곡

런던 교향곡 또는 런던 교향곡집은 요제프 하이든1793년부터 1795년까지 작곡한 교향곡을 부르는 이름 이다. 제2기 런던 교향곡이라고도 부른다.

음악사에서 이 런던 여행의 하이든처럼 환영받고 높이 평가된 작곡가는 거의 없었다. 유력한 신문이 매회 연주할 때마다 작품평을 실어, 앙코르로 열광하는 청중의 상황을 보도한다는 것은 이제까지는 없었던 일이 었다. 이전의 연주회처럼 하노버 스퀘어에서 들을 수 있었던 하이든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제1회 2월 10일. 교향곡 99번 내림마장조 (초연)

제2회 2월 11번. 교향곡 99번 재연, 현악4중주 1곡 (영국 초연). 이 해에 연주됨 현악4중주는 1793년에 작 곡된 작품 71, 또는 작품 74중에 하나로 보인다.

제3회 2월 24일. 협주교향곡, 그 외 1791년, 또는 1792년에 연주된 교향곡의 재연. 제4회 3월 3일. 교향곡 101번 ‘시계’ (초연).
제5회 3월 10일. 교향곡 101번 (재연), 제2회에 연주된 현악4중주 재연.
제6회 3월 17일. 1791년, 또는 1792년에 연주된 교향곡 재연

제7회 3월 24일. 1791년, 또는 1792년에 연주된 교향곡 재연, 현악4중주 1곡 (영국 초연). 제8회 3월 31일. 교향곡 100번 ‘군대’ (쵸연), 제7회에 연주된 현악4중주 재연.
제9회 4월 7일. 교향곡 100번 (재연).
제10회 4월 28일 2곡의 교향곡이 연주되었으나 어느 작품인지는 확실치 않다.

제11회 5월 5일. 2곡의 교향곡 연주, 1곡은 98번인 것 같다. 현악4중주 1곡 (영국 초연) 제12회 5월 12일. 2곡의 교향곡이 연주되었는데, 1곡은 100번 ‘군대’였다.

이 사이 5월 2일에는 런던에서 3번째의 자선 음악회를 열어 2곡의 교향곡을 연주했다. 그 중의 1곡은 대호 평을 받은 100번 ‘군대’였다. 이 시즌을 끝으로 하이든이 출연한 잘로몬 콘서트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시즌 이 끝나자 하이든은 각 지방을 여행하며 친구들을 찾아 친분을 두텁게 했다.

 

132. 선험적 지식 : 경험에 종속되지 않는 지식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 영원불멸한 진리를 추구했던 기존의 형이상학을 재고하고, 과학적 방법으로 철학의 토대를 새로 마련하 고자 함.
- 보편타당한 지식 기반 위에 새로운 경험을 종합하면 앎의 한계를 확장할 수 있다고 여김.
보편타당한 지식 + 새로운 지식 = 학문이 가야 할 방향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판단만이 우리 인식을 확장시킬 수 있음.
선험적: 경험과 무관하게 보편타당한 ↔ 경험적: 보고, 듣고, 맛보고, 만져보고 확인하고 실험하며... (일반 화는 가능하지만 보편타당X)
종합판단: 경험을 종합하여 참거짓을 판단(지식 추가) ↔ 분석판단: 명제 자체로 참거짓 판단(기존 지식 되 풀이)
기하학, 수학의 명제, 물리학의 명제는 모두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선험적 종합판단이란 바로 과학적 판단을 일컫는다.
선험적 인식이 가능하려면 우리 안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선험적인 형식이 갖추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으로 세계를 파악하는데, 우리가 갖추고 있는 그 선험적 형식을 ‘직관’이라고 부른다.
즉, 우리의 감각 기관은 직관에 의존해 대상들을 받아들인다.
직관으로 받아들인 앎의 재료들은 정돈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다.
이것들을 잘 간추리는 체가 있는데, 그것을 ‘범주’라고 부른다.
범주를 이용하여 앎을 정돈하는 것을 ‘개념’이라고 한다.
그런데 개념은 형식에 불과한 것이라서 원재료가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감성(직관)으로 받아들인 내용이 오성(범주, 개념)의 도움을 받아 정돈되고 종합돼야 ‘인식’이 나온다. 직관만 제 역할을 하고 개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인식은 어수선한 불완전 인식이다.
개념이 제 역할을 해도 직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인식은 알맹이가 빠지고 껍데기만 남은 불 완전 인식이다.

 

133. 막달라 마리아

מרים המגדלי :막달라 여자 마리아(공동번역), 막달라 마리아(개신교), 마리아 막달레나(가톨릭)(히브리어 라틴어: Sancta Maria Magdalena, original Biblical Greek: Μαρία ἡ Μαγδαληνή, literally ,ת

"Mary the Magdalene")는 기독교 신약성경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성 추종자중 한 명이 다. 갈릴래아 출신이며 고향의 이름이 막달라(Magdala)이므로 ‘막달라 여자 마리아’또는 '막달라 마리아'라 고 불린다. 성서에서는 예수를 따르던 여성들 가운데 항상 첫 번째로 언급된다. 로마 가톨릭교회성녀로 축일은 7월 22일이며, 특히 동방 정교회에서는 부활절 후 제2주일을 ‘회개한 여자의 주일’로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를 기념한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모두 지켜 본 증인인 동시에, ‘참회의 성녀’로서 수많은 전설에 의해 덧씌워져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을 매료시켜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 지위에 대해 재검토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갈릴래아 호수 서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막달라는 염색업과 직물업이 발달한 도시로서 특히 다른 지역들 보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곳이었다. 이러한 곳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생활에 대하여 성 서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 대해 네
복음서가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자신한테서 7마리의 귀신을 쫓아내 준 예 수 그리스도에게 감사하여 그를 믿고 고향을 떠나 동행하였는데,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가 두 강도 사이 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져 죽었을 때 그 곁에 있었던 사람들 중의 하나이며, 예수가 무덤에 묻히는 모습을 지 켜 보았고, 부활절 아침 시체에 바를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찾아갔던 세 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 뿐이다. 예수는 또한 부활한 뒤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내었다. 마태오의 복음서 등에 따르 면, 그녀는 예수의 부활 소식을 사도들에게 알리기 위해 보내졌다. 이 때문에 그녀는 초기 그리스도인들로부 터 ‘사도들 중의 사도’로 불렸다.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전 해지지 않고 있다.

 

134. 베스트팔렌 조약

베스트팔렌 조약(-條約 독일어: Westflischer Friede, 영어: Peace of Westphalia)이란 오스나브뤼크뮌 스터(각각 1648년 5월 15일과 10월 24일)에서 체결되어 프랑스어로 조문이 쓰인 평화 조약을 일컫는다. 웨 스트팔리아 평화회의를 "국제법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이 조약의 원인이었던 30년 전쟁을 "최초의 국제 전쟁"이라고 부른다. "국제법의 아버지" 네덜란드 그로티우스가 사망한 지 3년 후의 시점이다. 이로써 신성 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48년)과 에스파냐네덜란드 공화국간의 80년 전쟁이 끝났다. 이 조약에는 에스파냐,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합스부르크 가)와 각 동 맹국 제후들과 신성로마제국내 자유도시(Freie Reichsstadt)들이 참여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 회의를 통해 나온 것으로, 국가 주권 개념에 기반을 둔 새로운 질 서를 중부 유럽에 세웠다. 1806년까지 이 규정은 신성로마제국 헌법의 일부였다.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전쟁 을 종식한 1659년 피레네 조약도 종종 여기에 포함하기도 한다. 외교사가들은 근대 외교조약의 효시를 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정하고 있다. 30년 전쟁로마 가톨릭교회개신교간의 대립이라는 종교적 문제 를 명분으로 발발했지만, 이후 전개 과정에서는 종교보다는 왕조와 국익을 앞세워 길어진 유럽 국가들의 정 치적인 전쟁이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국가인 부르봉 왕가프랑스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지 원하다가 후반기에는 직접 합스부르크 왕조오스트리아 에스파냐 등과 전쟁을 했다는 사실에서 극명하 게 나타난다.

이 조약을 통해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개신교 국가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에서 벗어나 생존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역사에서 처음으로 프로이센이 왕국으로 등장하였다. 네덜란드스위스는 독립을 인정 받았으며, 프랑스는 이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확장하였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서의 프랑스, 동의 스웨덴이 패권국의 지위를 유지한 1648년-1700년을 베스트팔렌 체제(Westphalia System)라고 한다. 베스트팔렌 체제는 스페인 계승전쟁으로 서유럽 패권이 프랑스에서 영 국으로 넘어가고, 대북방 전쟁으로 동유럽 패권이 스웨덴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면서 종료되었다.

 

135. 캉디드

캉디드(Candide, ou l'Optimisme)는 프랑스의 작가 볼테르가 1759년에 쓴 철학적 풍자 소설이다. 당시의 지배 계급이었던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 와 종교재판소 등 성직자들의 부패상을 묘사해 큰 파문을 일으킨 작품이다.

당대에 논란이 되고 있던 철학사상을 염두에 두고 쓴 볼테르의 철학소설이다. 볼테르는 ‘순박한’ 캉디드를 통해 당시의 정치, 철학, 종교 등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삶에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는 역경을 겪으면 서도 낙천주의자 캉디드가 추구했던 행복은 많은 논점을 던지고 있다.

매우 유순하고 고지식하고 순박한 소년 캉디드는 웨스트팔리아의 툰더 텐 트롱크 남작의 성에서 자라게 된 다. 그는 남작의 아들 및 그의 누이동생 퀴네공드 양과 함께 팡글로스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 선생은 ‘세상은 최선으로 되어있다’(Tout est pour le mieux)는 것을 증명해 보이곤 했다. 요컨대 “세상과 인생의 의의 및 가치에 대해 악이나 반가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현실의 세계와 인생을 최 선의 것으로 보는 주의” 말이다. 비록 현실은 괴롭다 치자! 그래도 미래는 분명 즐겁고 희망적으로 볼 수 있 다는 생각의 낙천관은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캉디드의 삶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캉디드가 남작으로부터 퀴네공드 양을 사랑한다는 의심을 받고 성에서 쫓겨나, 불가리아 군 대에 들어가는 일,네덜란드에서 착한 재침례교도를 만난 일, 아메리카에서 겪는 일, 등 그가 만나는 일들은 최선의 상태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악, 최악으로 되어있다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가 가는 곳은 엘 도라도를 제외하고는 어디나 낙천적인 모습들보다는 추한 모습이며 악한 모습들로 가득 차있다. 군인도, 거 룩해야할 종교계의 신부들의 모습도 추악한 모습들뿐이다. 어디에나 정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와 사기, 평화가 아니라 싸움이나 전쟁만이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발생하는 지진 같은 것 그가 가는 곳 어디나 불행의 요소, 즉 비관적인 요소들만이 등장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나는 사람들도 그에 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는 일을 막거나 방해하는 사람들, 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 기를 치고, 속이고 핍박을 가하는 사람들이며, 그가 어깨를 기대어 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그에게 의지하려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뿐인가? 착하디착하고,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주인공 캉디드는 본의 아니게 가톨릭 종교재판소 판사를 죽이기도 하고 예수회 신부를 칼로 찌르고 도망치기도 하고, 원숭이를 죽이기도 한다. 어디에 가나 속고 사기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며 도무지 되는 일이라곤 전혀 없다. 그야말로 그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 면 이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이며 최악으로 구성된 비관적인 세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에게는 그토록 존경하는 팡글로스 선생이 가르쳐준 낙천주의 철학을 버리는 일만이 남아있다.

이제 그 일을 부추기기 위한 존재로 마르탱이 비관주의 또는 염세주의를 들고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까? 그러면 이제 우리의 주인공 ‘캉디드’는 “세계 및 인생을 추악하고 괴로운 것으로 보며, 진보나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철학”의 편에 서야하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의 순진한 주인공은 낙천주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여러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모두가 비 관적인 일뿐이다. 심지어 그의 주변 인물들이나, 잊혔던 인물들이 다시 나타나지만 그들 역시, 그들의 경험 담 역시 온갖 추악한 일들뿐이다. 결국 선과 악으로 대별되는 마음의 싸움에서 악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신 의 섭리라면 이제는 이 세상을 비관주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거기서 그는 팡글로스를 다시 만난다. 팡글로스의 모습은 변했으나 여전히 낙천적이다. 그래서 낙천 주의는 유보되지만 이후에도 당하는 일마다 비관적인 상황들뿐이다. 그러면 이 소설은 낙천주의를 비판하 고 비관주의를 옹호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 소설은 어떤 철학의 편을 드러내지 않고, 독자에게 그 판단을 유 보하며 끝을 맺고 있다.

 

136. 렘브란트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네덜란드어: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년 7월 15일 ~ 1669 년 10월 4일)은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이다. 일반적으로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기도 하다. 예술 분야에서 그의 기 여는 역사가들이 소위 네덜란드 황금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불러오게 하였다.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1632년) - 마우리스하위츠, 헤이그

돌다리가 있는 풍경 (1637년) - 레이크스 미술관, 암스테르담

야경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 (1642년) - 레이크스 미술관, 암스테르담

세 개의 십자가 (1653년) - 국립도서관, 파리

밧세바 (1654년) - 루브르 박물관, 파리

137. 만유인력

만유인력의 법칙(萬有引力-法則, 영어: law of universal gravity)이란 질량을 가진 물체사이의 중력끌림 을 기술하는 물리학 법칙이다. 이 법칙은 아이작 뉴턴1687년 발표 논문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혹 은 프린키피아(Principia)〉를 통해 처음 소개된 법칙이다. 현대의 용어를 사용하여 이 법칙을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모든 점질량은 두 점을 가로지르는 선을 따라 다른 모든 점질량을 힘으로 끌어 당긴다. 이 힘은 두 상호작 용하는 점질량 사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며, 두 점질량 사이의 거리에는 제곱에 반비례한다. 이를 수식으 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F=G*m1m2/r2 여기서

  • F:두점질량간의중력의크기
  • G:중력상수,
  • m1 :첫번째점질량의질량
  • m2 :두번째점질량의질량
  • r : 두 점질량간의 거리이다.
    뉴턴은 이 법칙을 그의
    운동의 제2법칙에 넣어 행성의 가속도를 구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행성의 궤도가 질량 : 물질의 양 / 무게 : 중력장에서 물체에 작용하는 힘
  • 타원형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더욱이 뉴턴은 중력이 행성의 진로 뿐만 아니라, 달의 세차 운동, 혜성의 운 동, 은하수의 생성 및 빛의 굴절 등에도 적용되는 매우 일반적인 힘의 하나임을 인식하였다. 이것이 바로 뉴턴이 중력을 만유인력(universal force)라 부르게 된 이유이다.

 

138.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독일어: Wolfgang Amadeus Mozart, 1756년 1월 27일 ~ 1791년 12월 5일) 는 오스트리아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궁정 음악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피아노바 이올린을 배웠고, 그 후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아들로 잘 알려진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서 작곡법과 지 휘를 배웠다. 그는 35년 생애 동안 수많은 교향곡, 오페라, 협주곡, 소나타를 작곡했으며,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오늘날 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널리 존경받 고 있다.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 가톨릭 성당에서 세례명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 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라틴어: 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였 다. 흔히 알려진 중간 성명인 아마데우스(독일어: Amadeus)는 세례명 중간 성명의 그리스어 어원 테오필루 스(Theophilus)를 라틴어로 바꾼 것이다.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이었는데, 볼프강의 누나인 나네를을 어려서부터 가르쳤다. 전한 바에 따르면, 볼프강은 세 살 때부터 누나를 보고 스스로 건반을 다루고 연주하 는 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어린 아들의 재주를 알아보았고, 볼프강에게 직접 피아노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나네를 뮤직북에 쓴 레오폴트의 기록에 따르면, 어린 볼프강은 네 살 때 여러 곡을 배웠으며 다섯 살 때 이미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어린 모차르트의 작곡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집 에서 그를 시험하기도 하였지만, 모차르트는 그 사람들에게 뛰어난 작곡 실력과 재능을 보였고, 사람들은 비 로소 모차르트를 믿기 시작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교육열은 대단하였는데, 특히 6세 때 뮌헨으로 데려가면서 유럽 각지로 연주 여행을 보 내 여러 작곡가와 교류하고 배우게 하였다. 1763-1766까지 독일 여러 도시는 물론 파리, 런던 등을 돌며 많 은 작곡가와 교류한 서유럽 일주는 모차르트에게 부담과 동시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1764년에서 1765 년 사이 영국 런던에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 작곡 등 배우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후 모차르트는 수차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음악을 공부하였는데, 마르티니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운 것을 비롯해 다양한 교 향곡과 오페라를 접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어머니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와 함께 한 여행에서 만하 임, 파리 등을 다니며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여러 대도시와 궁정에서 연주를 보인 모차 르트는 잘츠부르크에 머물며 궁정음악가로 활동하였었으나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궁정과 여러 갈등을 일 으켰고, 결국 대주교와의 불화를 계기로 1781년 으로 떠나 이후 죽을 때까지 이곳에 머무른다. 그곳에서 콘스탄체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 모차르트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82년 결혼을 성사시켰다.

일부 문헌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활하던 1784년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도 만났다. 그 는 어려운 집안사정에도 자신을 찾아온 베토벤을 반갑게 맞이하였는데, 이 때 베토벤의 나이는 불과 14세였 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자신의 곡을 즉흥적으로 또 다른 작품으로 훌륭히 소화하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 며, 교육비를 일절 거절하고 베토벤을 가르치는데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베토벤은 어머니의 사망 소 식을 듣자 모차르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빈을 갑작스럽게 떠났다. 만난 지 불과 한 달만의 일로 이것이 두 거장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베토벤이 다시 오스트리아 빈에 찾아온 것은 1792년의 일로 그 때는 모차르트 가 죽은지 1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전거는 오토 얀이 저술한 모차르트의 전기가 유일하므 로, 오늘날에는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만났다는 일화에 대한 신뢰성은 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모차르트는 죽은 후 빈 외곽의 성, 마르크스 묘지에 묻혔다. New Groove에 따르면 그가 여러 사람과 함께 묻힌 것은 사실이나 이는 가난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당시 빈의 중산층의 일반적 장례 풍습대로였다. 묘비가 나무였던 것 또한 당시 오스트리아 빈 중산층의 흔한 장례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당시 빈 에서는 화려한 장례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장례식 날 비가 오고, 천둥이 쳤다고 하나 동 출처 에 따르면 사실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이었다고 한다. 현재 모차르트의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는 것은 성 마르크스 묘지가 더 많은 묘지를 수용하기 위해 이장을 거듭하였기 때문이다. 아내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남편이 죽은 후 추모 음악회, 미발표 작품의 출판 등으로 경제적으로 성공하였다. 1809년 그녀는 덴마크 출 신의 외교관이던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재혼했다. 그들은 덴마크로 이주했다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여생을 마감했다. 콘스탄체와 새 남편은 모두 모차르트에 대 한 전기를 남겼다.

 

139.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독일어: 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년 7월 1일 ~ 1716년 11월 14일) 는 독일철학자이자 수학자이다. 라이프니츠는 책을 쓸 때 라틴어(~40%), 프랑스어(~30%), 독일어 (~15%)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라이프니츠는 철학수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이작 뉴턴과는 별개로 무한소 미적분을 창시하였으며, 라이프니츠의 수학적 표기법은 아직까지도 널리 쓰인다. 라이프니츠는 기계적 계산기 분야에 서 가장 많은 발명을 한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파스칼의 계산기에 자동 곱셈과 나눗셈 기능을 추가했고, 1685년에 핀 톱니바퀴 계산기를 최초로 묘사했으며, 최초로 대량생산 된 기계적 계산기인 라이프니츠 휠을 발명했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모든 디지털 컴퓨터의 기반이 되는 이진법 수 체계를 다듬었다.

철학에서 라이프니츠는 낙관론으로 유명하다. 라이프니츠는 일부 제한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 주가 신이 창조할 수 있는 최선의 우주라고 결론지었다. 라이프니츠는 르네 데카르트, 바뤼흐 스피노자와 함 께 17세기 최고의 3대 합리주의론자 중 한 명이다. 라이프니츠의 업적은 현대 분석철학을 앞당겼지만, 한편 으로 그의 철학은 스콜라 철학적인 면도 있다.

라이프니츠는 물리학공학에 많은 공헌을 했고, 생물학, 의학, 지질학, 확률론, 심리학, 언어학, 정보과학 분 야에서 나중에 나올 개념들을 예견했다. 그리고 정치학, 법학, 윤리학, 신학, 역사학, 철학, 언어학에 관한 저 술을 남겼다. 방대한 분야에 걸친 라이프니츠의 공헌은 다양한 학술지와 수 만개의 편지, 그리고 출판되지 않은 원고에서 발견되었다.

이처럼 다채로운 활동을 하면서도 그가 남긴 연구는 방대한 양에 달하지만, 바쁜 생활 탓인지 연구를 편지나 메모 등 형태로 남긴 게 많다. 철학만 보더라도 생전에 발간한 게 《변신론》(1710)뿐이며, 사후 출판 가운 데서도 그의 사상을 정리한 책은 별로 없다. 그의 철학의 특징은 그 이전의 여러 가지 사상적 대립을 모두 자 기 것으로 받아들여서 조화시킨 점이다. 데카르트적 물체관과 피에르 가상디의 원자론, 기계관과 목적관, 섭 리와 자유, 경험론이성론, 나아가 근세사상과 스콜라 철학의 조화까지 찾아볼 수 있다. 주요 저서로는 《모 나드론》, 《형이상학 서설》, 《인간오성신론》 이 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는 달리, 라이프니츠는 대학에서 철저한 철학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의 철학 학사 논 문을 감독한 제이콥 토마시우스 교수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지만, 평생에 걸친 스콜라 철학아리스토텔레 스 철학은 그가 다른 길을 걷게 만들었다. 라이프니츠는 또한 루터교 대학에서도 존경을 받은 기독교 스페 인 사람인 프란시스코 수아레스의 저서를 열심히 읽었다. 라이프니츠는 르네 데카르트, 크리스티안 하위헌 스, 아이작 뉴턴로버트 보일의 새로운 방식과 결론에 깊게 관심을 가졌지만, 그들의 업적을 스콜라 철학 의 틀에 갇힌 채로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프니츠의 방식과 관심거리들은 종종 20세기의 분석철 학언어철학을 예견했다.

그 당시의 삼각함수, 로그함수의 수학적 개념은 추상적이였는데, 라이프니츠는 1692년과 1694년에 이를 명 료화 시켰다. 또한 가로좌표, 세로좌표, 기울기, , 그리고 수직선과 같은 기하학적 개념들을 함수의 그래프 로부터 이끌어 내었다. 18세기에는 함수와 이런 기하학적 개념들 사이의 연관성이 약해졌다.

라이프니츠는 선형 방정식의 계수를 배열(오늘날의 행렬)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하였다. 행렬을 이용하면 그 방정식의 해를 찾는 것이 쉬워지는데, 이 방법은 후에 가우스 소거법으로 명명되었다. 라이프니츠의 불 논리 수리논리학의 발견 또한 수학적 업적의 일부이다.

 

140.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最後晚餐, 이탈리아어: Ultima Cena, 영어: The Last Supper)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의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의 요청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은 가톨릭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마지

막 날의 최후의 만찬의 정경을 그린 것이다. 그림은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수도원의 식당 벽화로 그려진 것으로, 가로 880cm, 세로 460cm 작품의 거 한 오나르도는 1495년부터 제작에 착수하 여, 1498년에 완성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미완성이라고 불리는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 몇 안되는 완성된 작 품의 하나이지만, 가장 손상이 심한 그림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과학적 연구가 회화에 응용된 이 그림은 석고에 유채(油彩)로 그렸기 때문에 그의 생존중에 파손되었다. 원형의 미()는 성 필리포 등의 제작 과정을 보여 주는 소묘(素描)에 의존하여 파악해야 한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초기 르네상스의 양식을 개혁하였느냐 하는 것은 카스타뇨기를란다요의 같은 제목의 벽화와 비 교하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간결하게 그 중심 과제에 육박하였고 또한 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구 도나 소묘 같은 기술적 문제뿐만 아니고, 그가 인간의 행동과 정신적 반응에 보여 준 깊은 통찰력은 그의 이전 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화면의 초점은 원근법에 따라서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머리 부분에 맞추어 그가 시각상의 중심점을 차지한다. 제자들은 전술한 네 패로 정리되어 전화면이 완전히 육체적·정신적 통일체(統 一體)를 이룩한다. 인물은 전형인(典型人)의 표현이며 평소 그가 연구한 소묘의 무수한 초상에서 추상하여 보 편화한 것이다.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에 그려진 이 만찬의 그림은 기묘한 현실감을 가지고 있다. 이 장면 에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한복음 13장 21절)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표시하여 거 기에 심한 동요가 일어난다.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 자고 있던 요한이, 레오나르도의 화면에서는 성급하게 그 리스도에게 다그쳐 묻는 베드로 쪽을 머리를 기울여 그것을 듣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같은 자리에서 고립되 어 있지 않는 유다는 앞으로 몸을 구부려, 머리는 다른 사도들보다 낮으며 그 표정도 어둡고 애매하다. 그리스 도는 흥분한 주위에 휩싸이지도 않고 대오(大悟)한 사람처럼 평온하다. 열두 사람들의 제자들은 세 사람씩 네 패로 갈라져서 그의 몸짓과 동작에 의하여 서로 결합되어 있다.

 

141. 프랑스의 루이 14세

루이 14세(프랑스어: Louis XIV, 1638년 9월 5일 ~ 1715년 9월 1일)는 프랑스의 왕이자 나바라[1]의 군주이 다. 본명은 루이 디외도네(프랑스어: Louis-Dieudonn)이고, 공식 칭호는 루이 드 프랑스-나바르(프랑스 어: Louis de France et de Navarre)다. 그는 다섯 살 생일이 채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랐다. 아직 정치를 개 인적으로 통치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아서 이탈리아 추기경 쥘 마자랭이 1661년 죽을 때까지 사실상 역할을 대신하였다. 루이는 1715년 9월에 죽을 때까지 왕의 자리에 있었는데, 77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4일 전이었 다. 그의 치세기간은 최종적으로 72년 3개월 18일으로 유럽의 군주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 었다.

루이 14세는 세간에는 태양왕(프랑스어: Le Roi Soleil)이란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 을 믿었기에,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학설을 지지했다.

루이의 치세 상당부분은 유럽에서 프랑스의 힘과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3번의 주요 전쟁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2번의 작은 분쟁─상속 전쟁, 재결합 전쟁─을 치렀다. 이 시대 프랑스의 정치와 군사상 걸출한 인물의 면모를 살펴본다면 마자랭, 장바티스트 콜베르, 튀 렌, 보방을 들 수 있다. 프랑스 문화 또한 이 시대 번성하여 위대한 명성을 가진 인물들이 나타났는데, 몰리에 르, 장 라신, 부알로, 라 퐁텐, 르브룅, 리고, 루이 르 방, 쥘 아르두앙 망사르, 클로드 페로, 르 노트르 등이 이 시기의 사람이며, 이들의 대다수는 루이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왕과 왕실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루이 14세는 그의 전임자가 만든 중앙 집권화의 일을 계속 추진하여 프랑스의 지방에 끝까지 남아 있던 봉건 제도의 잔재를 청소하고 수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 갔다. 그의 성과를 방해한것 은 지방의 힘있는 귀족들로 많은 이들이 반란으로 일어났고, 그들 소수를 가리켜 프롱드라고 불리었다. 루이 는 이들 힘있는 귀족들을 베르사유 궁전의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여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게 하면서 서서히 약화시켰고, 이를 통해 귀족들의 힘을 제어했다. 그 결과 그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절대 군주의 전형으로 고찰 되게 되었다.

또한 절대 군주의 자리를 다져 “짐이 곧 국가니라(L'tat, c'est moi)”와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역사학 계에서 이 말은 그의 정적들이나 볼테르가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루이 14세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로 하이힐을 최초로 신었고 귀족들이 그것을 따라하여 유행처럼 번졌다고 한다.

1715년, 76살의 늙은이가 된 루이 14세는 72년 동안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무리하게 전쟁을 수행, 경제를 파 탄시킨 자신의 정치행적에 대해 자각과 후회를 가져 임종을 맞기 직전에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었다.”라는 간곡한 유언과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3] 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77세. 루이 14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국민들 은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느님 앞에 감사하며 크 게 기뻐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프랑스에는 혁명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여 74년 뒤인 1789 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루이 14세는 프랑스 교회로마 가톨릭으로 통일하는 것이 절대왕정에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용기병을 동원 하여 개신교인들을 학살하고 박해해 강제로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시켰다.

 

142.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또는 후기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모더니즘 후(라틴어 post: 뒤, 후)의 서 양의 사회, 문화, 예술의 총체적 운동을 일컫는다. 모더니즘의 이성중심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내포 하고 있는 사상적 경향의 총칭이다. 2차 세계대전 및 여성운동, 학생운동, 흑인민권운동과 구조주의 이후 일어난 해체현상의 영향을 받았다. 키워드로는 데리다가 주장한 해체(deconstruction, 탈구축)인데 탈중심 적 다원적(多元的) 사고, 탈이성적 사고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으로 1960년대 프랑스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데리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보드리야르 등이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용어 자체가 역사학적 구분에서의 근현대에 스쳐간 수많은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학 자, 지식인, 역사가 사이에서 그 정의를 두고 극한 논쟁이 일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포스트모 던적 생각이 철학, 예술, 비판 이론, 문학, 건축, 디자인, 마케팅/비즈니스, 역사해석,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구분 되는 용어로 사용되며,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생한 시기의 사회·문화의 접변 현상만을 가리킨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알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구에서 근대 혹은 모던(modern) 시 대라고 하면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이성중심주의 시대를 일컫는다

학자들과 역사가들의 거의 대부분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수많은 모더니즘의 주요 개념으로부터 반발과 차용 을 통해 모더니즘을 확장하거나 대체시킨 사조로 본다. 예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은 합리성, 객관성, 진보 와 같은 이상에 많은 의미를 두었다. 이것들 이외에도 19세기 후반에의 실증주의와 실재주의 운동이나 계 몽사상에 뿌리를 둔 여타 사상들을 중시하였다.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러한 이상들이 전반에 존재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을 던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신봉자들은 종종 포스트모더니즘이 특수한 경제·사회적 상황의 결과로써 도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특수한 경제·사회적 상황’이란 후기자본주의와 방송 매체의 성장 등을 의미하는 데, 이러한 상황들이 당시 사회를 새로운 역사적 시기로 진입하게 하였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신봉자들 의 주장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가와 저술가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지 모더니즘의 확장일 뿐이지, 그 자체로 새로운 시대나 사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요약하자면, 전기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은 우리 시대의 경제적·기술적인 상황들이 소통과 의미의 항구적이고 객관적인 것, 즉 실체(이데아)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소통과 제조, 교통의 혁신에서 비롯된 세계 화는 분립된 근대적 삶이나 문화적 다원론, 상호 연결되어 정치, 소통, 지식생산 등의 집중화된 중심을 잃고 상호 연결된 세계 사회의 한 원동력으로 종종 언급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와 같이 분립(分立)된 사회가 필연적으로 거짓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나 혹은 대서사(혹은 큰 이야기 meta-narrative)와 헤게모니(hegemony)의 단일화와 같이 포스트-모던

으로 표현되는 응답/인식을 창조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단일화’란 전통적 장르, 구조와 문체의 틀을 파 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는 로고스 중심주의의 범주를 전복시킨 것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 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철학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모더니즘과 구조주의의 반발 작용이었다. 구조주의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그것이 포스트구조주의로 이어지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실제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당히 비슷한 개념이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로 분류되 는 철학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률적인 것을 거부하고 다양성(多樣性)을 강조하였으며, 이성을 중시하며 등장한 모더니즘이 추구한 정치적 해방과 철학적 사변도 하나의 이야기(거대 서사 혹은 큰 이야기)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했다. 또한, 칸트가 순수 이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했던 이념의 실현을 불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치철학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으로는 모더니즘이 대표하는 이성이 좀 더 시대를 이끌어 나가고, 이성이 도구 로 변질된다고 생각되는 시점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반박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은 하나의 사상으로 모더니즘 이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무시한, 일종의 시대착오로 비판 받는다.

 

143.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네덜란드어: Het Meisje met de Parel)는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의 걸작으로, 이름에서 암시하듯이 소녀가 걸고 있는 진주 귀고리를 그림의 초점으로 사용하였다. 헤이그 마우리츠호이스에 전시되어 있으며, "북유럽의 《모나리자》", 또는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고도 불린다.

페르메이르 특유의 미묘한 빛의 표현, 단순하지만 조화로운 구성, 선명한 색채가 특징이다. 빛의 효과를 사 용하여 두 번 이상의 붓터치로 그려진 진주는 왼쪽 윗부분이 밝게 빛나고 있으며, 아랫 부분은 하얀 옷깃을 반사하여 부드럽게 비추면서 맑고 투명한 느낌을 준다.

그림에서 머리에 터번을 두른 진주 귀고리의 소녀는 누군가를 보기 위해서 왼쪽 어깨를 틀어 고개를 돌리고 있다. 큰 눈동자와 관능적인 입술, 특유의 시선과 표정이 보는 사람에게 비밀스러움이 어우러진 신비감을 주고 있다.

 

144. 백신

백신(영어: Vaccine, 문화어: 왁찐←일본어: ワクチン 와쿠친[*], 러시아어: Ва􏰀ц􏰁􏰂а 바크찌나[*] 독일어: Vakzin 바크친[*]) 또는 예방주사 (豫防注射)는 항원, 즉 병원체를 약하게 만들어 인체에 주입하 여 항체를 형성하게 하여 그 질병에 저항하는 후천 면역이 생기도록 하는 의약품이다. 병을 예상하는 목적 으로 백신을 주사하는 것을 예방 접종 (豫防接種)이라고 한다.

백신은 병원체의 상태에 따라 완전히 병원체를 죽여 만드는 사백신과 약독화시켜 만드는 생백신으로 구별 할 수 있다. 약독화한 생백신은 대부분 바이러스이지만 간혹 세균도 있다. 사백신은 바이러스 또는 세균 전 체를 죽여 사용하기도 하고 일부만을 분획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분획화한 사백신은 분리한 물질에 따라 단 백 기반 백신과 다당 기반 백신으로 나뉜다.

백신의 투여 후에 일어나는 면역 반응은 백혈구체액이 관여한다. 백혈구가 관여하는 것을 세포 면역, 체 액이 관여하는 면역을 체액 면역이라고 한다.

우두법을 발견한 에드워드 제너라틴어를 뜻하는 Vacca를 차용하여 쓰기 시작했으며, 루이 파스퇴 르가 Vaccine이라 명명하여 영어프랑스어에서는 이 명칭으로 쓰고 있다. 독일어 철자는 Vakzin이다. 한 국에서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독일어 Vakzin에서 유래한 왁찐이라는 말을 널리 썼으나, 20세기 후반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영어 Vaccine에서 유래한 백신이라는 말이 퍼져 현재는 거의 백신이라는 말로 사용하 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여전히 왁찐이라 부르며, 예방주사라 말하기도 한다.

 

145. 모차르트의 레퀴엠

《레퀴엠 D단조 (K. 626)》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91년에 작곡한 레퀴엠이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작곡하던 도중에 사망했기 때문에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으며, 사후에 모차르트의 제자인 쥐스마이어 가 모차르트가 남긴 스케치를 토대로 곡을 완성하였다. 쥐스마이어 판 외에도 하이든의 제자인 노이콤이 완 성한 노이콤 판, 바이어 판, 몬더 판 등 여러 판본이 있으며 어떤 음반에서는 두 가지 이상의 판본을 섞어서 연주하기도 한다.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이 익명으로 곡을 청탁한 것이었다. 아내의 장례식 때 자기가 작곡했다고 거짓말하고 연주하려고 했던 것으로 8월 말경, 심부름꾼이 검은 망토를 두르고 그 앞에 나타났는데, 모차르트는 죽을 때까지 이 저승사자 같은 이미지에 시달리며 이 레퀴엠을 '자신을 위한 레퀴엠'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썼다. 게다가 하필 오페라 마술피리〉나 〈티토 황제의 자비〉 등의 작곡을 병행 중이었기 때문에 막판 3달 사 이에 건강이 더 나빠졌다.

 

146. 시간

시간(時間)은 사물의 변화를 인식하기 위한 개념이다. 세월(歲月), 광음(光陰)이라고도 한다.

시간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는 것은 고대부터 철학자과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이다. 그러나 시간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갈래의 폭넓은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시간의 정의를 제공하는 것은 어렵다. 또한 시간이 사건의 측정을 위한 인위적인 단위에 불과한지, 아니면 사건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리학적 의미를 갖는 어떠한 양인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산업혁명은 '시간' 이라는 개념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전에는 서구에서조차 기계적이고 객관적이며 측 정 가능한 '시간'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딱히 없었다. 공전과 자전에 따라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고 시간을 대략적으로 가늠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예부터 발전해온 학문은 천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은 시간의 측정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철도회사 가 생기고, 각종 물품회사가 생기면서 객관적인 시간의 측정과 여기의 정확성은 '돈'과 직결되는 문제가 되 었다. 즉, 개인과 사회, 국가에게 있어서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경쟁력의 핵심이 된 것이다.

정리하면, 시간의 단위는 오랫동안 사건들 사이의 간격과 그 지속 기간에 대한 으로 생각되어 왔다. 예를 들어,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과 하늘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태양의 육안 운동, 이 차고 기우는 변화, 진자의 진동처럼, 명백하게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물체들을 시간의 단위에 대한 표준으로 사용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아인슈타인상대성이론, 카를 융동시성 이론,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시간 등이 논 의되면서 어느 누구에게나 객관적인 것으로서 여겨지던 시간은 그 의미가 많이 변화하고있다. 이렇게 시간 의 상대성과 주관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자, '시간' 이라는 주제는 작가, 화가와 철학자들에게 새로운 의미로 서의 중요한 테마로 자리잡게 된다. 또한 이러한 시간에 대한 관심은 현대에 들어서 시간여행, 거꾸로 가는 시간, 시간이 멈추는 등 시간에 대한 흥미로운 영화들이 제작되는 계기가 된다.

 

147.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나사렛의 예수
요셉 가야바는 예수를 불경죄로 체포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넘겼고 빌라도가 예수에게 십자기에 매달 아 죽이는 사형을 선고했다.

 

148. 표트로 대제

표트르 1세 알렉세예비치(러시아어: Пётр I А􏰃е􏰀сеев􏰁ч, 1672년 6월 9일 ~ 1725년 2월 8일) 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황제(재위 1682년 ~ 1725년)였다. 표트르 대제(러시아어: Пётр Ве􏰃􏰁􏰀􏰁􏰄 표트르 벨리키[*])로 불리기도 한다. 표트르 1세는 서구화 정책과 영토 확장으로 루스 차르국 러시아 제국으로 성립했다.

몽골-타타르의 멍에 때문에 서유럽과의 교류 단절 및 중세 수준 문화에 머물던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급진적인 서구화를 밀어붙인 지도자다. 지나친 서구화의 반발로 여러 번의 정변이 있었으나, 모두 피의 숙청 으로 마무리했고,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에서 대승해서 변방의 국가였던 러시아가 이후 유럽에 주요 정치세 력으로 당당히 등장할 수 있게 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훗날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비견되는 인물. 스탈 린이 존경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는 스탈린 시절에 표트르 대제가 높이 평가된 사실을 봐도 알 수가 있다.

 

149. 멋진 신세계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올더스 헉슬리가 1931년에 쓰고 1932년에 출판된 디스토피아 SF 소 설이다. 소설의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멋진 신세계》는 헨리 포 드가 태어난 해인 1863년을 인류의 새 기원으로 삼은 가상의 미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작품 속의 배경은 포 드 기원 632년(서기 2496년)의 영국이다. 소설 속의 세계는 하나의 통일된 정부의 통제하에 있으며 모든 것 이 포드주의에 따라 자동 생산된다. 심지어 사람도 컨베이어 시스템에 실려 수정되고 길러져 병 속에서 제조 되고 태어난다. 《멋진 신세계》는 극도로 발전한 기계 문명이 철저히 통제하는 계급 사회를 그린다. 헉슬리 는 기계 문명의 발달을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대두한 전체주의와 연결시켜 비인간적 기계 문명이 가져올 지옥을 경고하였다.

"멋진 신세계"라는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 제5막 1장 가운데 미란다의 대사에서 따왔다.

O wonder!
How many goodly creatures are there here! How beauteous mankind is! O brave new world, That has such people in't.

William Shakespeare, The Tempest, Act V, Scene I, ll. 203–206[5]

오 놀라워라!
이 많은 훌륭한 피조물이라니!
인간은 참으로 아름다워라! 오 멋진 신세계, 이런 사람들이 사는 곳.

- 윌리엄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제5막 1장

올더스 헉슬리는 1931년 5월에서 8월 사이 프랑스의 사나리수르메(Sanary-sur-Mer)에서 《멋진 신세계》 를 썼다. 당시 헉슬리는 이미 여러 편의 저술로 사회 풍자 작가의 명성을 쌓았다. 1920년 부터 《베너티 페어》 (Vanity Fair)와 《보그》에 기고하기 시작하여 1921년에는 첫 소설 《크롬 옐로》를 발표하였고, 이후로도 《어릿광대의 춤》 (1923년), 《하찮은 이야기》 (1925년), 《연애대위법》 (1928년)과 같은 작품들을 발표 하였다. 《멋진 신세계》는 그의 다섯 번째 소설이자 최초의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가 H. G. 웰스의 《현대 유토피아》(1905년)와 《신과 같은 사람》(1923년)으로 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150. 타지마할

타지마할(힌디어: ताज महल, 우르두어: تاج محل)은 인도 아그라에 위치한 무굴 제국의 대표적 건축물

다.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자신의 총애하였던 부인 뭄타즈 마할로 알려진 아르주망 바누 베굼을 기리 기 위하여 1632년에 무덤 건축을 명하여 2만여 명이 넘는 노동자를 동원하여 건설하였다. 건축의 총 책임자 는 우스타드 아마드 로하리로 알려져 있고, 뭄타즈 마할이 죽은지 6개월 후부터 건설을 시작하여 완공에 22 년이 걸렸다.

타지마할은 총 17헥타르에 달하는 거대한 무덤군의 중심 부분이며, 실제로 무덤군은 응접실, 모스크 등이 따로 딸려있다. 무덤의 건설은 거의 대부분 1643년에 완료되었으나, 추가적인 보조 작업이 약 10년 동안 진 행되어 1653년에야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타지마할을 건설하는 데에는 당시 가치로 3천 2백만 루피아, 현재의 가치로는 8억 2천 7백만 달러가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지마할 건설 당시, 황제 직속 건축가인 우스타드 아흐메드 라하우리의 감독 아래 20,000여 명에 달하는 예술가들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타지마할은 페르시아, 터키, 인도 이슬람의 건축 양식이 잘 조합된 무굴 건축의 가장 훌륭한 예이다. 1983 년 타지마할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인도에 위치한 무슬림 예술의 보석이며 인류가 보 편적으로 감탄할 수 있는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흰색 대리석 돔의 영묘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나, 타지마할의 규모는 더 크다. 네 귀퉁이의 높 이 40미터의 미나레트는 수직으로 보이나 붕괴가 발생했을 때 건물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미세하게 바깥쪽 을 향하고 있다.

샤 자한이 타지마할이 완성된 직후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건물을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하여 공사에 참여 했던 모든 사람들의 손목을 잘랐다는 설화가 내려오지만, 거의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를 그저 허구적 이 야기로 치부하고 있다. 2007년 7월 7일 신() 세계 7대 기적에 선정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타지마할의 한 첨탑이 점점 기울고 있다는 것을 BBC방송에서 발견하였다. 인도아그 라 야무나 강(Yamuna River Agra)에 타지마할이 세워졌는데 그 기초를 안정적인 유지를 위해 흑단나무로 했는데 아그라 야무나 강(Yamuna River Agra)이 완전히 마르면서 지난 30년 동안 3.5cm가 기울었다고 보 도했다.

151. 마리퀴리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폴란드어: Maria Skłodowska-Curie, 1867년 11월 7일 ~ 1934년 7월 4일) 는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과학자이다. 본명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폴란드어: Maria Salomea Skłodowska)이고, 프랑스식 이름은 마리 퀴리(프랑스어: Marie Curie)이다.

방사능 분야의 선구자이며 노벨상 수상자이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로,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라이너스 폴링과 함께 노벨상 2관왕에 등극한 인물로 유명하다.

퀴리 부부는 아예 공동으로 연구하기로 하고, 지루하고 긴 실험을 반복하며 피치블렌드의 성분을 분리하여 1898년 마침내 베크렐이 연구했던 우라늄보다 감광작용이 4배나 강한 새로운 물질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 고 이 미지의 물질이 두 가지 원소의 혼합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그중 하나를 분리해내는 데 성공하였 다. 새로운 원소는 우라늄염보다 400배나 감광작용이 강했다.

퀴리 부부는 새로운 원소의 이름을 마리의 조국 폴란드를 기리는 의미에서 ‘폴로늄’이라고 명명했다. 마리는 우라늄이나 폴로늄처럼 자연계에서 감광작용과 전리작용 및 형광작용을 나타내는 물질들에 대해 처음으로 방사능(또는 방사성물질)이라고 불렀고, 이들 물질에서 나오는 빛을 방사선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원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감광작용 능력이 우라늄보다 무려 250만 배나 강한 원 소를 발견하고, 강력한 빛을 ‘방사’한다는 뜻으로 원소의 이름을 ‘라듐’이라고 지었다

 

152.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돈 조반니(Don Giovanni, K. 527)》는 로렌초 다 폰테의 대본으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87 년에 작곡한 오페라로, "돈 조반니"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 해 10월 29일 프라하에스타테츠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2막으로 되어 있다.

《돈 조반니》는 여러 장르의 음악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널리 여겨지며, 특히 돈 후안의 전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여러 오페라 작품 중에서는 비교를 넘어설 정도이다. 《돈 조반니》는 드라마 조 코소 또는 해학곡에 속하는데, 완전히 희극적이거나, 완전히 비극적이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 돈 조반니(돈 후안)(Don Giovanni): 주인공. 매우 방탕한 젊은 귀족. (드라마틱 바리톤)
  • 돈나 안나(Donna Anna): 돈 옷타비오의 약혼녀. (드라마틱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 돈 옷타비오(Don Ottavio): 돈나 안나의 약혼남. (테너 렛졔로)
  • 돈 페드로 또는 기사장(Don Pedro 또는 'Il commandatore'): 세비야의 기사장. (바쏘 프로폰도)
  • 돈나 엘비라(Donna Elvira): 부르고스의 여인으로, 돈 조반니에게 버림받음. (스핀토 소프라
  • 레포렐로(Leporello): 돈 조반니의 시종 (바쏘 부포)
  • 쩨를리나(Zerlina): 시골 소녀 (수브레트 소프라노)
  • 마젯토(Masetto): 체를리나의 애인 (리릭 바리톤)
  • 합창단에는 농부, 시종, 사신(邪神) 등이 있다.

 

153. 인식론

인식론(認識論)은 지식에 대한 제반 사항을 다루는 철학의 한 분야로서 지식의 본질, 신념의 합리성과 정 당성 등을 연구한다. 인식론(Epistemology)은 고대 그리스어의 episteme(지식 또는 인식)와 logos(이론)을 합친 데에서 비롯하였다.

인식론이 다루는 중요 주제는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지식에 대한 철학적 분석진리, 신념, 정당화 등의 개념과 연관되는 방식에 대한 연구.
  2. 회의주의에 대한 제반 문제
  3. 지식과 정당화의 기반과 범주
  4. 지식과 정당화의 규범

인식론 연구에 대한 위의 구분은 스코틀랜드 철학자 제임스 프레더릭 페리에가 1854년 《형이상학의 원리: 앎과 존재의 이론》에서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다.

지식이 믿음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아릭 위해서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 어떤 것이 거짓인지 정말 알 수 없기 때문에 지식은 참이어야 한다.
진짜 지식은 정당화된 것이어야 한다.
확정성

불가지론, 근삿값, 믿음, 확정성, 의심, 결정론, 인식론, 가류주의, 운명론, 가설, 정당화, 허무주의, 확률, 과학 이론, 회의주의, 유아론, 이론, 진리, 불확정성

 

154. 예수의 부활

예수의 부활(resurrection of Jesus, 復活)은 신약성경 저술자가 "안식일 전날(현재의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안식일 다음날(현재의 일요일)에 무덤에서 되살아 났다"고 서술한 내용에 대해 일반적으로 "환 상을 보았다"고 해석하는 것과 달리 문자 근본주의에 입각하여 그대로 믿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신앙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단순히 ' 인간이 죽음에서 되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되 살아 난 것'으로서 스스로 하느님이자 인간임을 보여 주는 것이며 나아가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이 됨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죄과(罪過)를 씻기 위한 죽음이지만, 부활은 인간 의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을 이겼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로써 하느님 스스로가 생명과 죽음의 주()임을 계시 했다"고 말하며 바울은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선교(宣敎)는 헛된 일이며, 또한 여러 분의 신앙도 헛된 것이다"(고린도 전서 15:14)라고 서술하면서 또한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와 만났다"는 밝히고 있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부활은 예수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한 지 사흘만에 부활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기독교의 믿음과 신학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예수의 부활은 부활한 지 사십 일이 지나 하늘에 오른 일과는 다른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로마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는 새로운 무덤에 묻혔으나 죽은 사람들 가운데 서 일어나 하늘에 오르기 앞서 사십 일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 봄마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못박 힌 날인 성 금요일 사흘 뒤인 부활절에 예수의 부활을 축하한다. 부활절 시기는 유월절의 시기와 거의 일치 한다.

복음서의 일화에서 예수는 그가 죽어서 부활할 것임을 예언하고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에 기초한다 고 말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구원구속이라는 계획의 일부로 본다.

 

155. 벤자민 프랭클린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년 1월 17일 ~ 1790년 4월 17일)은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Founding Fathers) 중 한 명이자 미국의 초대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는 특별한 공적 지위에 오르지 않았 지만, 프랑스 군()과 동맹에서 중요한 역할했고, 미국 독립에서 중추였다.

그는 계몽사상가 중 한 명으로서, 유럽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피뢰침, 다초점 렌즈 등 발명하였다. 달러화 인물 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10달러)과, 벤저민 프랭클린(100달러) 두 명뿐이다.

정치가로서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자치에 대해 영국의 관리들과 토론을 벌일 때 식민지의 대변인으로 활 약했고,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으며, 미국 독립전쟁 때 프랑스의 경제적·군사적원조를 얻어냈다. 또한 영 국과 협상하는 자리에서 믹국석대여 1참 식민지를 하나의 주권 국가로 승인하는 조약을 맺었으며, 2세기 동 안 미국의 기본법이 된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들었다. 특히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기초한 '미국독립선언문' 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 1729년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지 경영
  • 1752년 전기유기체설 제창
  • 1753년 영국의 로열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선정
  • 1754년 올버니회의에 펜실베이니아대표로 참석, 최초의 식민지연합안 제안
  • 1757년 영국에 파견, 식민지에 자주과세권 획득
  • 1766년 영국에서 인지조례 철폐
  • 1775년 제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이니아대표
  • 1776년 독립선언 기초위원 임명
  • 1783년 파리조약 미국대표 일원
  • 1785년 펜실베이니아 행정위원회 위원장
  • 1787년 헌법회의 펜실베이니아대표
  • 1790년 84살에 세상을 떠남

 

156. 포스트식민주의

포스트식민주의란 단순히 식민지배 이후의 시대(post-colonialism)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대구 분이 아니라 식민시대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식민주의적 사고와 인식에 반대하는 사고방식 혹은 관점
을 말한다(Loomba, 1998; Young, 2001). 예를 들어, 서방과 동방, 1세계와 3세계와 같은 말은 후자를 후진 적이고 주변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의식의 구성물이다. 식민시대는 끝났지만 식민주의 논리의 근거가 되었 던 가정들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어쩌면 새로운 권력관계나 지식의 통제를 통해 식민시대가 지 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경영사학자의 말처럼 고대 로마로부터 현대 미국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항
상 포스트식민주의 시대에 살아왔다”(Ferguson, 2004).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은 이렇게 잔존하는 식민주의 의 영향에 저항하고, 과거에 침묵했던 피지배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케냐의 한 작가는 ‘마음의 탈 식민화(decolonize the mind)’라고 불렀다(Prasad, 2003).

경영과 조직관리의 영역에서도 식민주의적 관점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서구의 경영이론과 실천은 합 리적이고, 우수한 실천(best practice)으로 간주되며, 비서구적 경영은 기이한 것으로 여기고 배제된다. 둘 째, 다양한 배경과 특성을 가진 비서구적 경영과 실천을 과도하게 단순화하여 동질적인 것(열등한 것)으로 취급한다. 셋째, 비서구적 맥락에 서구적 사고와 개념을 잘못 적용하는 것이다(Frenkel, 2008). 포스트식 민주의 이론의 대표자들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호미 바바(Homi Bhabha), 가야트리 스피박 (Gayatri Spivak) 등에 의하면 포스트식민주의는 모방, 혼성성, 그리고 제 3의 공간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개 념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157. 호쿠사이

가츠시카 호쿠사이(일본어: 葛飾 北, かつしか ほくさい, 1760년 10월 31일? ~ 1849년 5월 10일) Katsushika Hokusai는 일본 에도 시대우키요에 화가이다. 삼라만상 그 어느 것도 그려냈으며, 전 생애 동안 3만 장을 넘는 작품을 발표하며 판화 외에 직접 그린 그림도 걸출했다. 고흐 등, 인상파의 색채에도 영 향을 주었다.

대표작으로 《부악삼십육경》(일본어: 富嶽三十六景 후가쿠 산주롯케이[*]), 《호쿠사이 만화》(일본 어: 호쿠사이 만가[*]) 등이 있다.

그는 서른 번이나 호를 바꿨다. 제자에게 호를 넘기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었다. 아흔세 번을 넘는 이사에 대 한 이야기도 유명한데(하루 만에 세 번이나 이사한 일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에만 몰두해 방이 어지러워지면 이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아흔세 번째로 이사하면서 예전에 살던 집으 로 옮겼을 때, 방이 이사갈 때와 별 차이가 없이 어지러웠기 때문에 더 이상 이사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식생활은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러고도 90세 넘게 장수했던 것은 소귀나물(慈姑)을 매일 먹었기 때문 이라고 한다.

후가쿠 36경 (富嶽三十六景)

• •

  • 호쿠사이 만화 () - 전 15권. 실려 있는 그림은 총 4000점에 달함.
  • 팔방을 노려보는 봉황도(八方鳳凰)
  • 그외-풍경화,춘화(문어와해녀),상상화등여러종류의우키요에를그림.만년에는육필화도다 수 남김.

후가쿠 100경 (富嶽百景)

 

158. 최면

최면 또는 최면 상태(催眠, Hypnosis, 그리스어의 hypnos(잠)에서 온 말임)는 한 사람이 잠을 자고 있는 것 처럼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그를 그 상태로 만든 사람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최면은 의식을 희미하게 만들어 의식 밑의 무의식을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최면 기술은 환자들의 공포를 억제하거나 행동을 바꾸고 고양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최면은 종
종 공연 무대에서 최면 대상자들이 기묘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다른 종류로 집단 최면자기 암시가 있는데, 전자는 한 사람이 아닌 다수를 대상으로 최면을 거는 것이며 후자는 대상자가 자신감을 회복하는 용도로 이용된다.

최면은 혼수상태와 같이 정신을 잃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자신이 걸리는 것을 거부하면 최면에 걸리지 않 는다. 혹 최면을 걸었다 해도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은 말하지 않는다.

 

159. 소나타 형식

소나타 형식(Sonata form), 또는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이란 고전파 시대 초기부터 광범위하게 사용된 악곡 의 형식을 말한다.

소나타라는 명칭을 갖는 악곡은 16세기 중엽에 출현한 이래 오늘까지 여러 시대를 통하여 작곡되어 왔으나, 그 형식 내용은 천차만별하다. 예를 들면 바로크 시대에 애호되었던 '교회 소나타'나 '실내 소나타'와 고전파 소나타 사이에는 형식상의 공통점은 하나도 없으며, 같은 건반악기를 위한 소나타일지라도, 스카를라티 베토벤에서, 그 구조는 아주 다르다. 이와 같은 관계는 이 밖에도 많이 찾아볼 수 있으나, 그것은 소나타 가 이탈리아어의 Sonare('울린다' 또는 '연주한다'는 뜻)라고 하는 추상적인 말에서 연유하며, 어떤 구체적인 양식이라든가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악식상의 용어로 쓰이는 소나타 형식 은 한 특정 구조를 가진 형식을 뜻한다. 즉 17세기 중엽부터 이른바 '전고전파'의 작곡가들에 의하여 준비되 고 고전파, 그 중에서도 베토벤에 의하여 완성된 후 낭만파로 계승된 형식으로서, 이들 시대의 교향곡, 실내 악, 소나타 등의 급속한 제1악장은 대부분이 이 형식(소나타 알레그로)으로 되어 있다.

전형적인 소나타 형식은

1. 제시부(Exposition)
2. 전개부(Development) 3. 재현부(Recapitulation)

의 3부로 되었고, 대개의 경우 재현부의 뒤에 종결부(終結部, coda)가 붙어 있다. 이 코다는 소규모인 것은 글자 그대로 결미이지만, 대규모인 것은 그것만으로 독립된 부분을 형성하기도 한다. 또 제시부 앞에 완만한 서주(序奏)가 붙는 일도 때때로 있다. 각 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T는 주제의 약자이다.

 

160. 존 로크

존 로크(John Locke, 1632년 8월 29일 - 1704년 10월 28일)는 잉글랜드 왕국철학자·정치사상가이다

로크는 영국의 첫 경험론 철학자로 평가를 받지만, 사회계약론도 동등하게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사상들은 인식론과 더불어 정치철학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가장 영향력있는 계몽주의 사상가이 자 자유주의 이론가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들은 볼테르루소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 혁명뿐만 아니라 여러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영향은 미국 독립 선언문 에 반영되어 있다.

평화·선의·상호부조가 있는 낙원적 자연 상태에서 노동에 의한 자기 재산을 보유하는 자연권의 안전 보장을 위하여 사회 계약에 의해서 국가가 발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국가의 임무는 이 최소한의 안전보장 에 있다고 하는 야경국가론이다. 그것을 위한 권력으로서 국민은 계약에 의하여 국가에 그것을 신탁(信託) 하였다고 주장하여 국민 주권에 기초를 두었으며, 명예혁명 후의 영국 부르주아 국가를 변론하고 영국 민주 주의의 근원이 되었다.

로크의 정신에 관한 이론은 "자아 정체성"에 관한 근대적 개념의 기원으로서 종종 인용되는데, 데이비드 흄 루소 그리고 칸트와 같은 이후의 철학자들의 연구에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 로크는 "의식"의 연속성을 통 해 자아를 정의하려 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는 또한 정신을 "빈 서판"(백지 상태, 즉 "타불라 라사")으로 간 주하였는데, 데카르트나 기독교 철학과는 다르게 사람이 선천적 관념을 지니지 않고 태어난다고 주장하였다.

저서

  • <인간 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당시 ‘새로운 과학’ 곧 근대과학을 포 함한 인식의 문제를 다룬 그의 主著
  •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 <기독교의 합리성(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존 톨런드의 초안에 대한 답변서로 작성한
  • 글임.
  • <관용에 관한 편지(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

161. 복음서

복음서(福音書)란 고대 그리스어의 '좋은 소식'이라는 뜻을 가진 ‘에반겔리온’(Ευαγγέλιον: euangelion, 라틴어 Evangelium)을 한자어로 풀이한 것으로서, 기독교에서는 문서나 구전 형태로 내려오던 예수전승(Jesus Traditional)을 복음서 저자들이 기술한 신학적 문헌들을 뜻한다.[1][2] 흔히 신약성경마태 오 복음서부터 요한 복음서까지의 네가지 복음서를 일컬어 사복음서라 하며, 요한 복음서를 제외한 세가지 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에반겔리온'이라는 고대 그리스어는 원래 일상 생활에서 편지를 주고 받거나 공고에서 마치 관용어처럼 쓰 였다. 이 낱말은 역시
로마 시대에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쓰였으며, 때로는 황제의 칙령을 에반겔리움 (Evangelium)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가스펠(Gospel)이라고도 부른다.
정경으로 채택된 복음서는 4개가 있고 이를 사복음서라고 한다. 이중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가 복 음서 셋을 통틀어
공관복음서라고도 한다.

  • 공동번역성서 표기(현 가톨릭 성경 표기/구 가톨릭 성경 표기/개신교 성경 표기)
  • 마태오의 복음서(마태오 복음서/마두복음/마태복음)
  • 마르코의 복음서(마르코 복음서/말구복음/마가복음)
  • 루가의 복음서(루카 복음서/루까복음/누가복음)
  • 요한의 복음서(요한 복음서/요왕복음/요한복음)

 

162. 조지 워싱턴

조지 워싱턴(영어: George Washington, 문화어: 죠지 워싱톤, 1732년 2월 22일 ~ 1799년 12월 14일)은 미 국의 초대 대통령(1789년~1797년)이다. 1775년부터 1783년까지 벌어진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대륙군 총사 령관으로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미국의 대국민들이 그를 국왕과 같은 군주로 인식하여 서로 거리감을 느꼈으 나, 점차 미국의 건국과 혁명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 한 정치인으로 등극했다.

1775년 대륙회의에서 워싱턴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 전쟁 첫 전투인 보스턴 전역렉싱턴 콩코드 전투부터 파리 조약으로 독립을 승인 받을 때까지 총 사령관으로서 복무하였다. 워싱턴은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와해될 것 같았던 대륙회의를 주재하고, 각지에 서 모인 결속력 없는 군대를 통솔하면서, 동맹국인 프랑스와 의견을 조율하여야 했다. 1783년 전쟁이 끝난 후 워싱턴은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의 영국의 국왕인 조지 3세는 워싱턴이 고향으 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만약 워싱턴이 그리한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1787년, 조지 워싱턴은 연합 규약을 대체하는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열린 필라델피아 헌법 제정 의회를 주재하였다. 워싱턴은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써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 선되었고, 연방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정부 각 부서의 관례와 임무에 대한 기초를 놓았 다.

워싱턴은 해외 문제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취하지 않는 정책을 택하였다. 1795년 워싱턴은 전쟁을 회피하고 자 영국과 제이 조약을 맺었다. 토머스 제퍼슨과 그가 이끄는 민주-공화당이 영국과의 조약을 반대하였지 만, 워싱턴은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며 강행하였다. 워싱턴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 부채를 조성하였고, 효율적인 세금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국가 은행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워 싱턴은 공식적으로는 연방당 소속이었지만 퇴임 연설에서 당파성과 파벌주의 그리고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 쟁에의 가담 등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공화주의적인 덕목을 강조하였다.

워싱턴은 1799년에 향년 67세로 사망하였다. 헨리 리는 장례식에서의 연설에서 워싱턴을 "전쟁에서도 으뜸, 평화에서도 으뜸, 그리고 그의 국민들 마음 속에서도 으뜸"(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s of his countrymen)이라 칭송하였다. 역사학자들은 꾸준히 그를 가장 훌륭한 미국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미국의 1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163. 안톤 체호프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러시아어: А􏰂то́􏰂 Па́в􏰃􏰅в􏰁ч Че́х􏰅в, 영어: Anton Pavlovich Chekhov, 문화어: 안똔 체호브, 1860년 1월 29일 ~ 1904년 7월 15일)는 러시아의사, 단편 소설가, 극작 가이다.
체호프의 희곡(주로 후기의 4작품)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
挽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 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訂 正)된 해석이다. <세 자매>나 <벚꽃동산>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 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寫眞的)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作劇術)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 이다.

 

164. 낭만주의

낭만주의(浪漫主義, 영어: romanticism, 문화어: 랑만주의)는 서유럽에서 발생한 미술적, 문학적, 지적 사조 (思潮)이다. 18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1800년~1850년 사이에 정점을 찍었다.

18 ~ 19세기 계몽주의신고전주의에 반대하여 나타난 낭만주의는 로맨티시즘(Romanticism)이라는 단어 의 기원에서 알 수 있듯이 비현실적인, 지나치게 환상적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이성과 합리, 절대적인 것에 대해 거부한 사조였다. 낭만주의의 첫 주자는 계몽주의 시대에 독일의 루소라고 불리던 헤르더이다. 헤 르더는 감정과 감성, 민족역사를 강조하였으며, 그의 저서 "인류 역사의 철학적 고찰"은 후에 러셀헤겔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느낌과 감정을 강조하였으며, 계몽주의들이 설파 했던 이성에 대해 강한 회의 를 품었지만, 낭만주의자들은 결코 이성이라는 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과거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의미로 파악 되었던 이성을 역사적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수정하여 고려하였다. 또한 이 낭만주의는 개성을 강조하고, 사회를 과거와 달리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다. 탄생과 성장, 쇠퇴와 소멸을 겪 는 것은 사회의 한 특징이라 말하였으며, 이것은 후에 《문명 형태학》(아놀드 토인비)을 형성하는 데 큰 영 향을 주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독일의 슐라이에마허에게 큰 영향을 주어서 자신의 신학방법으로 감정(Gefhl, feeling)을 기독교 종교의 본질로 보았다.

19세기 중엽에 성립된 로맨티시즘은 산업 혁명으로 인한 사회 변화를 따르기 보다는 과거의 중세 봉건사회 나 이국적인 것에서 이상을 찾고자 했다. 그 주요한 동기는 사회의 분열과 이기주의의 만연을 부정하고, 중 세에서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던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고 싶다는 원망(願望)이다. 때로는 중세에서 전인격적 (全人格的)인 완성이 가능했었다고 해서 그것을 다시 일으키려고 한다. 후자는 개인을 절대화하는 것에 의 해 현실적으로는 니힐리즘으로 발전해 간다. 이에 대해 전자로부터는 사회를 개인보다 우월한 것으로 만드 는 이데올로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그것은 사회유기체론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상은 사회 를 절대화하려는 내셔널리즘으로 그 맥락이 이어지게 된다.

계몽주의의 최고의 성과가 이성에 의한 비합리적인 정치체제의 타파였는데, 혁명을 통하여 드러난 인간의 취악한 면을 보고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주변이 어지럽게 변하는 데 당혹하였으며, 모든 원리 가 붕괴되는 것을 보고 일체에 대한 불신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정신의 폐허 위에 자신의 심성(心 性)에 맞는 문화를 이룩하려고 한 것이 낭만주의 정신의 본질이며, 그 결과 자아에 대한 확인과 그 내부에로 의 침잠(沈潛)이 시작되었다. 내면에야말로 진실이 있다고 주장하고 1798년 독일의 예나에서는 A.W.슐레 겔과 W.슐레겔 형제가 《아테네움:Athenum》지를 창간하였으며, 영국에서는 워즈워스콜리지가 자연 의 관조(觀照) 중에 상상력에 의한 우주와의 영적 합일감을 노래한 《서정민요집》을 간행함으로써 각기 자 국 낭만주의의 효시(嚆矢)를 이루었다.

낭만주의는 문학에 선명하게 나타나서, 그 무렵부터 중세의 이야기나 이국정서 등에 비상한 흥미를 모으고 있다. 그것은 지나치게 위압적인 경향에서 놓여나 인간의 자연적 욕구인 자유·정열로 내닫는 것이지만, 미술 의 경우는 단지 제재를 문학이나 정서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혁신적인 사상을 뿌리쳐 감정을 자유롭 게 토론하고, 그 내용이나 색채에 훨씬 정열을 의식케 하는 표현을 찾아 나아가고 있다. 신고전주의는 고대 의 모방을 존중하고 있었으나, 낭만주의는 하나의 전형(典型)을 갖기보다도 개인을 해방하여 개개인의 감수 성에서 새로운 창조를 추구하고 있다. 신고전주의는 무궤도(無軌道)를 극도로 금지했으나, 낭만주의는 이성 에 치우친 냉정함이 본래의 감동이나 정열을 없앨까 싶어 염려하고 있다. 이미 그것은 제1보로서, 프뤼동의 우아하고 고상한 작품도 로맨틱한 꿈을 생각하게 되지만, 그러나 확연한 기운을 보인 것은 그로의 정열적인 제작이었다. 그로루벤스의 정열적인 색채에 심취하고 있으나, 한편에서는 스승 다비드의 엄중한 교의(敎 義)를 존중하면서도 그 분방한 천성은 유감없이 작품에 나타나서, 특히 전쟁화에는 초연(哨煙)의 냄새와 더 불어 사람을 뒤흔들 것 같은 감동이 움직이고 있다. 그로는 그 색채에서도 약동이야말로 작품의 생명임을 증 명하고 있는데, 그로에 이어서 제리코가 나오고, 다시 들라크루아가 나타나서 낭만주의는 크나큰 비약을 하 게 되었다.

 

165. 인지 부조화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는 자신의 태도와 행동이 일관되지 않고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상태이 다.
심리학에서, 인지부조화란 두 가지 이상의 반대되는 믿음, 생각, 가치를 동시에 지닐 때 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과 반대되는 새로운 정보를 접했을 때 개인이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나 불편한 경험등을 말한다. 레온 페스팅거의 인지 부조화 이론은 사람들의 내적일관성에 초점을 맞췄다. 불일치를 겪고 있는 개인은 심리적 으로 불편해질 것이며, 이런 불일치를 줄이고자 하거나, 불일치를 증가시키는 행동을 피할 것이다. 개인이 이 러한 인지부조화를 겪을 때 공격적, 합리화, 퇴행, 고착, 체념과 같은 증상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인지 간의 관계는, 두 개의 인지들의 관계와 인지와 행동의 관계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인지간의 관계에 서 개인들은 그들의 태도나 행동을 여러 방법을 통해 조절할 수 있다.

두 개의 반대되는 인지와 행동으로부터 오는 부조화의 정도는 두 가지 요인에 달려있다.

위에서 언급한 인지 부조화의 강도에 따라 인지 부조화를 줄이고자 하는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1]

인지부조화 이론은 개인이 그들의 경험과 현실사이에서 일치를 추구할 것이라는 가정으로 시작되었다. 이 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들의 인지나 행동을 다른 것과 일치시키기 위해 불일치를 해소하려고 할 것이다. 이러 한 노력은 사람들에게 긴장과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레온 페스팅거의 말에 따르면 네 가지 방법으로 부조화 를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더 이상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나 소주 한 병을 마셨다. 이 때 부조화를 줄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인지와 행동이 일치할 경우 - 두 인지나 행동이 다른 하나와 관련이 있을 때 인지와 행동이 무관할 경우 - 두 인지나 행동이 다른 하나와 관련이 없을 때

인지와 행동이 불일치할 경우 - 두 인지나 행동이 다른 하나와 반대될 때

1. 인지의 중요성: 더 중요한 가치에 중점을 두고, 그에 따라 부조화의 강도가 커진다.

2. 인지의 비중: 불일치하는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

1.행동을 바꾼다. (소주를 더 이상 마시지 않는다.)

2.인지를 바꾼다(행동을 정당화한다). (조금씩은 마셔도 상관없다.)

3.새로운 인지를 통해 행동이나 인지를 정당화한다. (적당량의 술은 신체에 긍정적이다.)

4.가지고 있는 믿음에 의한 정보를 무시하거나 부정한다. (소주는 술이 아니다.)

패스팅거의 실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인지부조화는

믿음/불일치 패러다임

유도된 복종 패러다임

자유 선택 패러다임

노력 정당화 패러다임 등 주요 네가지의 패러다임의 형태를 취한다.

인지부조화의 고전적인 설명은 이솝의 "여우와 포도"라는 우화에서 표현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서 여우는 높 은 곳에 매달려 있는 포도를 보고 이를 먹고 싶어한다. 여우가 그것을 닿을 수 없다고 생각하자, 그는 포도가 아직 덜 익었거나 실 것이라며 먹을 가치가 없다고 결정 내린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모든 멍청이들은 자신 이 가지지 못한 것을 경멸할 수 있다’이다. 이 예는 다음과 같은 패턴을 따른다: 무언가를 원한다. 그것을 얻 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을 비판하며 자신의 부조화를 줄인다. 욘 엘스터는 이와 같은 패턴을 ‘좋을 대로 적응하기(adaptive preference formation)’라고 불렀다.

 

166. 모차르트 협주곡 21번과 교향곡 41번

피아노 협주곡 21번 C 장조(K. 467)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85년에서 작곡한 피아노 협주 곡이다.

곡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알레그로 마에스토소 (Allegro Maestoso)
  2. 안단테 (Andante)
  3. 알레그로 비바체 아싸이 (Allegro vivace assai)

마로니에 <칵테일 사랑>에서도 쓰였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교향곡 41번 C 장조 ‘주피터’(K. 551)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88년 교향곡 40번 g 단조(KV. 550) 에 이어서 단 몇 주 만에 작곡한 곡이다. 이 곡의 웅장함을 상징하는 ‘주피터(Jupiter)’라는 별칭은 모차르트가 직접 붙인 것은 아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곡은 모차르트 생전에는 연주된 적이 없다고 한다.

 

167. 개인의 정체성

정체(正體) 또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은 존재의 본질 또는 이를 규명하는 성질이다. 정체성은 상당 기간 동안 일관되게 유지되는 고유한 실체로서 자기에 대한 주관적 경험을 함의할수있다. 정체성은 자기 내부에 서 일관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어떤 본질적인 특성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 어떤 대상의 인식으로서의 정체, 인간의 정체성, 기업의 정체성, 군대의 정체성, 국가의 정 체성 등 다양하다. 통상 정체성이라고 하면 인간의 정체성을 말한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자신이 세상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 개인'으로서 존재한다는 자각을 한다. 정체감 의 형성 과정에서 아동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소망, 사고, 기억, 외모 등을 가지고 있다는 자각을 한다.

인간은 양육자나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정체성 형성을 시작하는데, 태어나자마자 보육원으로 보내진 아이도 일생에 한 번은 자신의 생모나 생부라는 존재를 자기 인생에서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에릭 에릭슨의 발 달이론에서 12세부터 18세까지 청소년기에는 정체성이 형성되거나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상황을 맞게 된 다. 그 시기에 친구, 외부 집단과 접촉하면서 의미있고 풍요로운 자기 개념을 만들거나, 외부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관계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리는 현상을 맞기도 한다.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하고 인간이 종교를 갖는 것도 정체성 형성과 연관이 있다. 과의 관계 설정, 우주와의 관계 설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설정하고 이를 통해 존재의 안정감을 유지하며 삶 의 부조리나 희로애락을 처리해 나간다.

정체성은 철학적·심리학적·사회학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이다. 인터넷의 발달은 인간의 삶에 큰 변 화를 가져왔고 그로 인해 정체성 문제도 다각도로 조명되었다. 오프라인에서의 인격과 온라인상에서의 인격 이 전혀 다르게 자신의 삶을 연출할 수 있게 되면서 당사자도 어느 모습이 자신의 진짜 모습인지 혼란스러워 지게 되고, 사회적으로도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가 탐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인간의 정체성과 직결 되는 인공지능의 발달도 정체성 문제를 본질적 측면에서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168. 가톨릭교

로마 가톨릭교회(라틴어: Ecclesia Catholica Romana, 영어: Roman Catholic Church), 천주교(天主敎) 또는 가톨릭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약 13억 명의 신자를 가진 세계 최대 규모의 기독교 교파이다. 세계에서 오래된 기독교단 중의 하나로서 특히 역사적으로 서유럽 문화에서 거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9년 기준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이외에도 구가톨릭교회, 반교황파 가톨릭교회, 독립 가톨릭 교회 등이 분파하여 별도로 활동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보수적 장로교 교단이나 침례교 등 일부 개신 교인은 천주교에 대해 "태양신, 마리아를 숭배한다"고 하며 천주교에 대해 이단으로 여기기도 한다.

교계제도피라미드식 성직자 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하나 의 교회만을 세웠으며, 그 교회는 바로 사도들의 으뜸인 성 베드로만이 유일한 계승자라 주장하는 교황을 단장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계승자라 역시 주장하는 주교들이 있는 집단, 즉 가톨릭교회라고 가르 치고 있다. 더불어 가톨릭교회는 교황이 완벽하지 않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확 정하는데 있어 결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무류성의 특권을 누린다고 가르친다. 다음은 그들이 만든 무류 성이다. 1 전체 교회의 최고 목자로서 공식으로 선언한다. 따라서 교황도 개인 자격으로나 로마 교구의 교 구장 자격으로 선언한 것은 무류하다고 보장할 수 없다. 2 어떤 진리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의사를 밝혀야 한다. 따라서 교황의 통상적인 설교, 지도, 권유, 해설, 반박, 경고 등이 다 무류하지는 않다. 3 신앙이나 도 덕의 문제에 국한된다. 따라서 교황이 아무리 강력하게 주장할지라도 과학, 예술, 인문, 정치, 경제, 사회 등 에 관한 주장이라면 무류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무류권에 의해 확정된 교리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성 모의 무염시태와 승천 뿐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4대 교리는 천주존재(天主存在), 삼위일체(三位一體), 상선벌악(賞善罰惡), 강생구속 (降生救贖)이다. 천주존재는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창조주, 즉 하느님(천주)이 존재함을 믿는 것이며,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三位)가 한 하느님이라는 뜻으로, 세 위격(位格)이 서로 구별됨과 동시에 하나의 신성(神性)을 이룬다는 교리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확정되었다. 상선벌악은 하느님은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지만,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린다고 믿는 것이며, 강생구속은 인간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 됨(강생,성육신)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신 보속했으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경신례는 미사 또는 성찬예배라고 불리며, 이 경신례 안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 성변화하는 성체성사를 거행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예절과 규율, 교리와 신학의 주안점 등의 다 앙성을 반영하여 라틴 교회와 자치 조직인 동방 가톨릭교회 그리고 탁발수도회봉쇄수도회 등의 여러 조 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공경하는 특징이 두드러지는데, 신약성서의 가르침대로 성령(하 느님)의 힘으로 그녀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하였다고 가르친다. 그녀와 관련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 요 교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그녀를 간택한 하느님의 특은으로 그녀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원죄 가 감면되었으며(원죄 없는 잉태), 삼위일체에 따라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이며(하느님의 어머니), 평생을 처녀로 살았고(마리아의 평생 동정), 사망한 다음에는 하느님에 의해 들어올림을 받았다는 것(성모 승천)이다.

세례성사 : 신자에게 물을 묻히거나 신자를 물에 잠기게 해서 행하는 것으로 원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

견진성사 : 세례를 받은 사람이 하는 두 번째 신앙 고백을 의미

성체성사 :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예식으로 가톨릭 신자들은 이때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 가 말 그대로 살과 피가 된다고 믿는다.

고해성사 : 죄의 용서를 구하는 예식
병자성사 : 죽어가는 사람에게 성스러운 기름으로 축복을 내리는 예식 성품성사 : 사제 서품을 방은 사람으로 인정하는 예식
혼인성사 : 결혼한 사람을 인정하는 예식

 

169. 토머스 페인

토머스 페인(영어: Thomas Paine, 1737년 1월 29일 ~ 1809년 6월 8일)은 18세기 미국의 작가이자 국제적 혁명이론가로 미국 독립 전쟁프랑스 혁명 때 활약하였다. 1776년 1월에 출간된 《상식론》Common Sense[아메리카 식민지 주민이 느끼지 못하는 자신의 침해 당한 권리를 알게 해서 보편적인 느낌으로 전환 시킨다. 그것은 상식이 된다.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다가 누군가 일깨우면 반향이 일어나며 동의하고 '전환' 된다.]로 미국이 공화국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독립이 가져오는 이익을 펼쳐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어준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 책에서 봉건과 왕을 강하게 비판했다. 미국 독립 전쟁 때《위 기론》(Crisis)을 간행, 시민의 전투 의지를 끌어올렸다.

그런 일이 가능했다고 한다면, 우리가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성경의 선지자들과 같은 가짜와 괴물이 자기 말을 하나님의 말인 것처럼 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 가운데서 신용을 얻게 된 것보다는 수천의 귀신 들로 하여금 이리저리 다니게 하면서 귀신들의 교훈들 - 만약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한다면 - 을 공적으로 전 파하도록 허락했다면 훨씬 좋을 뻔 했다.

모든 전쟁을 보라. 그 전쟁들이 어디에서 비롯했는가? 이 불경건한 계시종교라는 것에서부터, 그리고 하나 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셨다는 이 괴상한 믿음에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성경의 거짓말들이 그 원인이었다...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약탈과 잔인함과 살인이다. 신약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 고 있는가? 약혼한 한 여인을 꾀어 방탕한 짓을 한 전능자를 믿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난봉에 대한 신앙 이 믿음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170. 버지니아 울프

애덜린 버지니아 울프(혼전성 스티븐 (Stephen), 영어: Adeline Virginia Woolf, 1882년 1월 25일 ~ 1941 년 3월 28일)는 20세기 잉글랜드모더니즘 작가이다. 울프는 의식의 흐름 장르를 탄생시키고 완성한 작 가 중 한 사람이다.
울프의 결혼 전 이름은 애덜린 버지니아 스티븐이며,
1882년 1월 25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18세기에 있어서의 문학과 사회》의 작가였으며, 어머니는 줄리아 덕워스이다. 버지니아는 아 버지의 방대한 서재를 이용할 수 있었다. 1895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울프는 최초의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 났다. 1897년,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역사학그리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904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울프는 두 번째 정신이상증세를 보여 투신자살시도를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1912년 레너드 울프와 결혼하고 1915년 항해》을 출판한 뒤 1919년에는 《밤과 낮》을 간행했다. 1925 년에는 《댈러웨이 부인》이 큰 인기를 받았고 1927년에는 《등대로》, 1928년에는 《올랜도》가 호평을 받았다.

1941년 3월 28일 우즈 강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행방불명되었는데, 강가에 울프의 지팡이와 발자국이 있었 다. 이틀뒤에 시체가 발견되었으며, 서재에는 남편과 언니에게 남기는 유서가 있었다. 자살의 원인으로는 허 탈감과 환청,어린시절 의붓오빠들로부터 받은 성적 학대, 정신이상 발작에 대한 공포심 등으로 추정된다.

  • 《댈러웨이 부인 》(1925년)
  • 《등대로》 (1927년)
  • 《올란도》 (1928년)
  • 《자기만의 방》 (1929년)
  • 《파도》 (1931년)
  • 《세월》 (1937년)

 

171. 프란시스코 고야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스페인어: Francisco Josde Goya y Lucientes [fɾanˈθisko xoˈse ðe ˈɣoʝa i luˈθjentes][*], 1746년 3월 30일 - 1828년 4월 16일)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 화가이다. 고야는 궁정화가이자 기록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8세기 스페인 회화의 대표자로 특히 고 전적인 경향에서 떠나 인상파의 시초를 보인 스페인 근세의 천재 화가로 알려져 있다.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 관적인 느낌과 대담한 붓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 었다.
작품으로 벨라스케스풍의 종교화와 초상화 및 민중 생활에서 제재를 취한 사실적 풍속화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초상화 <옷 입은 마하> <벌거벗은 마하> <카를로스 4세의 가족> 등과 역사화 <5월 3일 처형>, 그 리고 동판화 <투우> 등은 특히 유명하다. 대다수의 작품이 마드리드 왕립 회화관에 보관되어 있다.

고야의 작품은 그가 콜레라를 앓고 청각을 잃은 1792년을 기점으로 전기 작품과 후기 작품으로 뚜렷이 나뉜 다. 전기 작품은 고야가 궁정화가로서 그린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들과 여러 테피스트리들로 화려하고 밝은 느낌의 그림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1792년 이후 고야의 그림은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게다가 반도 전 쟁이후의 참상을 겪으면서 그의 그림은 무거운 주제와 어두운 색조를 담은 것으로 변하게 된다. 말년 부인을 잃고 퀸타 델 소르도에 그린 일련의 검은 그림에서 그의 이러한 성향은 최고조에 달한다.

 

172. 번식(생식)

생식(生殖)은 생물이 다음 세대를 만드는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다음 세대의 형성 목적이 개체 수 증가에 있는 만큼, 개체수를 증가하는 방법 일체를 생식이라고 표현 하기도 한다. 생식은 생물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생식의 방식에 따라 무성생식유성생식, 무수정생식(apomixis)등으로 나뉜다.

무성생식은 다른 개체의 유전 물질의 개입 없이(생식기관이나 생식세포의 형성 없이) 일어나는 생식이다. 즉 생식을 전담하는 장기나 세포의 형성 없이 개체수의 증가가 일어난다면 무성생식이다. 무성생식은 종종 영양 생식이라고도 하는데, 핵의 유사분열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 부모와 유전적으로 동일한 자식인 클론을 생산한다. 만약에 자손에 어떤 변이가 있다면 이는 유전물질의 변이인 돌연변이 혹은 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무성생식은 새로운 개체를 만드는 빠르고 효과적인 수단으로 자연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유성 생식 세포(배우체)가 형성되고 두개의 배우체가 형성된 접합자(수정란이라고도 한다)가 다음 세대를 만 드는 생식 양식을 유성생식이라 한다. 유성생식을 하는 개체에서는 반드시 세대교번이 나타난다. 그러나 세 대교번의 생물에 따라 그 모습이 크게 다를수 있다. 유성생식은 무성생식과 다르게 감수분열을 포함한다.

 

173. 루트비히 판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독일어: 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서 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 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 리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비창 소나타》, 《월광 소 나타》등이 있다.

베토벤의 작품은 보통 세 시기, 즉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한다. 이 방식에 의하면 1802년 정도까지를 초기 로, 그 이후부터 1814년 정도까지를 중기로, 그리고 1815년 무렵부터를 후기로 본다. 초기, 즉 고전기는 요 제프 하이든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도 새로운 방향을 찾아 그의 작품의 지 평을 넓힌다. 초기의 중요한 작품은 교향곡 1번, 교향곡 2번, 첫 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 첫 세 개의 피아 노 협주곡, 20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도 들어있다. 중기, 즉 영웅기는 그의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면서 시작된다. 영웅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면 모를 나타내는 대 편성곡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작품으로는 교향곡 3번부터 교향곡 8번까지 여섯 개의 교향곡과, 나머지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삼중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7번부터 11번까지 다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과, 7개의 피아노 소나타(발트슈타인, 열정 등), 또 크로이처 바이올린 소나타와 그의 유 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를 들 수 있다. 후기는 1815년경부터인데, 지적인 깊이와 형식적인 혁명성 그리고 집 중성과 인간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가령 현악 사중주곡(작품번호 131번)은 7개의 악장으로 이루 어져 있다. 교향곡 9번은 마지막 악장에 오케스트라와 더불은 합창을 집어넣었다. 그 밖의 이 시기 작품으로 는 장엄 미사, 마지막 다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 대 푸가, 마지막 다섯 개의 피아노 소나타 (함머클라비어 소 나타 등)이다.

베토벤을 둘러싼 찬반 논쟁 가운데 하나는 그가 낭만주의 작곡가인지, 아니면 고전주의 작곡가인지에 대한 것이다. ‘낭만주의적’의 의미와 낭만주의 음악 시대 자체의 기간에 대한 의견이 사람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베토벤을 이 운동이나 기간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문맥에 따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문학과 예술의 한 미학적 시기로 간주한다면, 베토벤은 분명히 독일의 괴테·실 러영국의 퍼시 실리와 같은 문학적 낭만주의 시기의 첫 절반에 위치한다. 그는 또한 슈포어E. T. A. 호프만의 민속적 특징에 자주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74. 자유주의

자유주의(自由主義, 영어: freedom 영어: liberalism)는 개인의 인격의 존엄성을 인정하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인의 정신적, 사회적 활동의 자유를 증대시키려는 정치 사상이다. 자유평등을 최상의 정치·사회적 가치로 삼는 역사적 전통이며, 사회철학적 관점이자 이념이다.

자유주의는 서구의 계몽주의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이 용어는 역사적으로 시대와 지역마다 그리고 사 용되는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교회와 왕권이 독점력을 갖고 있던 입법 권력을 시민의 대표자로 구성된 의회에 귀속시키는 운동을 통해 발현되었다. 결과적으로, 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즉, 의회·행정부의 공존 틀을 점 진적으로 도입·발전시켜나가는 과정과, 권력 분립을 통한 개인 자유의 지속적 신장을 목표로 하는 모든 운 동과 관련이 된다.

자유주의에서의 liberal, liberty은 라틴어 liber에서 유래했다. 참고로 1868년 워싱턴에서 체결된 중미조약 부록에서 처음으로 한자어 自由로의 번역이 이루어진다. 한편, 自由라는 한자어의 연원은 정확히 추정할
수 없으나, 신라말기의 당나라 유학파 문신인
최치원의 시() 바다 갈매기에서 "出沒自由塵外境(자유로이 세상 밖을 드나들고)" 라는 문장이 등장하는걸 보면 고대 중국에서부터 쓰이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175. 동방정교회

동방 정교회(東方正敎會, 영어: Eastern Orthodox Church)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교세가 큰 기독교 교단으 로 약 2억 5천만 명 이상의 신자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중의 하나로 서유럽 뿐만 아니라 (아나 톨리아를 포함한) 그리스동유럽, 러시아, 캅카스, 근동의 역사와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정 교회(正敎會) 또는 보편되고 사도적인 정교회라고도 불린다. 동방 정교회에는 전통적 공교회주의를 따라 지 역과 국가간의 연합체 형태의 구조이며, 중요한 의결 사항은 공동회의를 통해 의사 결정을 내린다. 콘스탄티 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모든 정교회 주교들 사이에서 ‘동등한 가운데 첫 번째’(Primus inter pares)로 인 정받아 공동회의 의장으로 있으며,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가 정교회의 중심 이라 할 수 있다.

동방 정교회 신학은 니케아 신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에 따 라 세워진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자처하며, 동방 정교회의 주교들은 사 도들의 후계자들이라고 가르친다. 동방 정교회는 성전(聖傳, 거룩한 전승)에 따라 전승된 초기 기독교 신앙 을 실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동방 정교회의 교회 조직은 크게 총대주교청(總大主敎廳)과 독립 교회(獨立 敎會), 자치 교회(自治敎會)로 구성되어 있다. 동방 정교회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혈성사, 고백성

, 신품성사, 결혼성사, 성유성사 등 일곱 성사를 인정하고 있으며, 이들 성사 중에서 성체성혈성사는 ‘성사 중의 성사’이자 성찬예배(聖餐禮拜, 거룩한 리투르기아)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본래 로마 가톨릭교회와 하나의 기독교 교회였으나 특히 교황의 수위권을 둘러싼 교리적 분 쟁 때문에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로 갈라섰다. 또한 451년 칼케돈 공의회 때에는 그리스도론에 대한 이견 으로 오리엔트 정교회와 분열하였다.

 

176.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프랑스어: Rvolution franaise [ʁevɔlysjɔ̃ fʁɑ̃sɛːz], 1789년 5월 5일 ~ 1799년 11월 9일) 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엄밀히 말해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 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킨다.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 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Ancien Rgime)하에서 자본가계급이 부상하고(18세기에 모든 선진국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현상),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된 가운데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 던 평민의 불만을 가중시켜 마침내 흉작이 일어난 1789년에 봉기하게 되었다. 도시민과 농민의 개입(대공포) 으로 폭력양상을 띤 이 혁명은 2년간에 걸쳐 전 체제를 전복시켰다. 이 혁명은 혁명의 소문을 들은 피지배 민 족의 자유와 독립 쟁취 의식을 고취하여 여러 민족을 거느린 주변 여러 강대국을 불안하게 하였다. 프랑스 혁 명은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렸지만 혁명 후 수립된 프랑스 공화정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on Bonaparte)가 일으킨 쿠데타로 무너진 후 75년간 공화정, 제국, 군주제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굴곡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으나 역사상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프랑스 혁명은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사에서 정치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계급으로 옮겨지는, 역사 분 야에서 완전히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전환점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고 존경 받는 군주제가 급진적인 민중에 의해 전복된 이 사건은 유럽 대륙 전체에 그야 말로 큰 충격이었다. 절대군주제의 시대가 끝난 것이었다.

 

177. 모비딕

《모비딕》(영어: Moby-Dick; or, The Whale)은 허먼 멜빌장편 소설이다. 모비 딕은 소설 속 고래의 이 름이다. 1820년 11월 20일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포경선 '에식스호(Essex)'가 커다란 향유고래에 받혀 침몰한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되었다. 백경(白鯨)이라고도 부른다.

1851년 10월18일 런던에서 리처드 벤틀리(Richard Bentley)에 의해 《고래》(The Whale)라는 이름의 세 권 짜리 삭제판으로 처음 출판되었다. 이어서 무삭제판은 1851년 11월 14일 뉴욕에서 하퍼앤브라더스(Harper and Brothers)에 의해 '모비딕'(Moby-Dick)이라는 제목으로 두 권짜리로 나오게 된다. 인간과 자연의 투쟁을 다루었고, 소설 형식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한국판의 번역 초판은 1954년 로버트 딕슨의 축약본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된 노희엽씨 번역이 가장 오래됐 다. 그리고 최초의 완역본은 양병탁씨에의해 1959년 발표되었다. 하지만 초판은 현대어와는 상당히 다른 표현 으로 많아 난해하였으며 1995년 중앙미디어 출판사 판에이르기까지 여러번 개정판을 내놓았다. 이후 다른 한 국어판들이 작가정신등 여러 출판사에서 완역, 출판된바있다.

에이허브 선장(Captain Ahab)
포경선 피쿼드 호(Pequod)의 선장으로
고래잡이 사냥에 나섰다가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는다. 그 뒤 모 비 딕을 잡아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뒤쫓다가 결국 모비 딕에게 목숨마저 잃게 된다.

스타벅(Starbuck)
낸터키트(Nantucket) 출신으로 피쿼드 호의 1등
항해사이다. 큰 키에 열정적인 성격이면서도 신중함을 가진

선원이다. 그래서 모비 딕을 잡기 위해 선원들을 선동하는 에이허브 선장에 맞서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피쿼드 호와 운명을 함께 하였다. 커피 브랜드 스타벅스의 어원이기도 하다.

퀴퀘그(Queequeg)
아메리카 토착민 추장의 아들로 기독교 세계로 나오지만, 포경선에서 기독교 세계가 아메리카 토착민의 세계 와 다를 것이 없음을 깨닫고 아메리카 토착민의 신앙을 간직한 포경선 작살잡이가 된다. 이스마엘과 절친한 친구가 되어 피쿼드 호를 타고 고래잡이 사냥에 나서지만 풍랑 속에서 이스마엘을 구하다가 상처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파상풍을 앓다가 사망한다.

이스마엘(Ishmael)
가난하지만 성실한
청년으로 바다를 동경해 포경선을 타기로 결심한다, 퀴퀘그와 함께 피쿼드 호의 선원이 되 어 고래잡이 사냥에 나선다. 모비 딕과의 싸움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는다.

스텁(Stubb)
피쿼드 호의 2등
항해사이다. 타고난 낙천가로 어떤 위험에 맞닥뜨려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헤쳐 나가는 장 점이 있다.항상 입에 파이프가 있고 얼굴에 미소가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플라스크(Flask)
피쿼드 호의 3등 항해사로 작은 키에 늠름한 아메리카 토착민 젊은이다. 매우 전투적이어서
고래를 보면 끝까 지 쫓아가 죽여야 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또한 무척 용감해 목숨을 걸고 모비 딕 사냥에 나선다.

패들러(Fedallah)
에이허브 선장이 모비 딕을 잡기 위해 밀항시킨 무리의 우두머리이다.
배화교 신자이며, 선원들과 어울리지 않

으나 에이허브 선장 곁에서 충직하게 보좌해 준다. 자신이 죽는다면 에이허브 선장도 곧 죽을 것이라는 예언 을 하였고, 모비 딕과 싸우다 목숨을 잃고 만다.

모비 딕(Moby Dick)
에이허브가 가장 혐오하는 커다란 흰
향유고래로 다른 항유고래들에 비해 엄청나게 큰 몸집을 지녔으며(당시

존재했던 배들과 소설의 묘사로 간주했을 때 27미터가 넘는 거구로 추정) 다른 고래들과 달리 매우 교활하다. 수많은 고래잡이들을 죽이거나 불구자로 만들었으며, 작살에 아주 많이 맞아도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듯 고 래잡이들과 싸웠다. 에이허브 선장이 한쪽 다리를 잃게 한 장본인이다.

 

178.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영어: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년 4월 23일 ~ 1851년 12월 19일) 는 영국의 화가이다.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회화에 손을 대어 왕립 미술원에서 그림 수업을 한 뒤, 잠깐 사이에 준회원에서 27세 되던 1802년 에 정회원으로 올라갔다. 여러 곳의 풍습과 풍경을 주로 그렸으며, 특히 빛의 묘사에서 획기적인 표현을 남 긴 화가이다.

후에 문학가 러스킨이 격찬하여 명성이 높아졌으며, 일생 동안 풍경화를 계속 그린 화가로서 17세기 프랑스 클로드 로랭을 능가하는 것이 그의 생애의 염원이었다. 그런만큼 중기(中期)에는 로랭의 영향이 보이나 후반에는 여기에서 벗어나 한층 더 빛의 묘사로 들어간다. 터너는 1819년부터 약 10년마다, 세 번 이탈리아 로 여행을 갔는데, 물과 하늘, 그리고 빛나는 남국의 태양은 터너의 꿈이요 시였다. 터너는 풍경의 일체를 빛의 묘사에 집중시켜 빛 속에 용해시켜 갔는데, 그것은 균정(均整)이 잡힌 윤곽에서 정중하게 그린, 당시로 서는 대담한 창작이었다. 더욱이 그는 다시 창작을 계속하여, 《항구 앞바다의 눈보라》(1843)에서 배의 그 림자까지 거칠게 불어대는 태풍 속으로 꺼지는 듯 눈보라의 심한 상태를 주제로 잡고, 과거의 회화에 전례 없는 동적인 표현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에는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1832), 《전함 테메레이르호()》 (1839), 《안개 속의 해돋이》, 《비·증기·속력》, 《황금가지》 등이 있는데, 원숙한 빛의 표현이 아름답다. 이상하게도 제자나 후계자가 없는 화가로서 고독한 성격이었으며, 본가 외에 체르시에 은거하면서 이름을 바꾸어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없이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179. 줄기세포

줄기 세포(-細胞, 영어: stem cell)는 실제로 태생기 전능세포(pluripotent cell)를 지칭한다. 이는 어떤 조직 으로든 발달할 수 있는 세포를 의미한다. 줄기 세포는 주로 초기 분열 단계의 배아로부터 채취된다. 이 단계

의 세포는 아직 장기 형성 능력이 없으므로 사전에 입력하는데 따라 특정하게 선택한 세포계(cell line)로 배 양될 수 있다. 간세포(幹細胞), 모세포(母細胞)라고도 한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줄기 세포 연구 를 진행 중이다. 줄기 세포를 인류가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기술이 확보된다면 질병 치료의 신천지가 열리 게 된다. 장기 이식이 매우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종류에는 배아줄기세포와 성체줄기세포가 있다. 배아줄기세포의 경우에는 모든세포로 분화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고 성체줄기세포의 경우에는 특정 세포로만 분화한다는 특징이 있다.

줄기세포는 인간 배아를 이용한 배아 줄기세포(embryonic stem cells)와 혈구세포를 끊임없이 만드는 골수 세포와 같은 성체 줄기세포(adult stem cells)와 인간 체세포를 이용한 유도 만능 줄기세포 (iPS cells) 가 있 다.
유전자 치료(gene therapy)는 특정한 질병의 치료를 위해 해당 질병과 관련이 있는 유전자를 세포에 첨가하 여 유전적 결함을 치료하거나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는 치료법이다. 세포에 유전자를 첨가하기 위해서는 운 반체가 필요한데, 주로 바이러스(virus)가 이 운반체 역할을 담당한다.

줄기세포는 자가분열(self-renew) 능력을 가져 기존의 유전자 치료의 문제인 번거로운 치료 과정과 횟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알려진 연구가 많지 않음에도 좋은 유전자 치료의 재료가 될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현재까지는 아래에 언급하는 것과 같이 주로 성체줄기세포(adult stem cell)를 이용한 유전자 치료가 연구되 고 있다.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는 면역 거부 반응, 다른 조직으로 이동하여 엉뚱하게 분화하는 문제 그리고 줄기세 포가 암세포로 변할 수 있는 문제 등을 가지고 있다. 유전자 치료의 경우는 바이러스를 이용하기 때문에 바 이러스에 의한 독성과 염증반응, 유전자 삽입에 의한 돌연변이 그리고 줄기세포 치료와 마찬가지로 면역 거 부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문제 등을 가지고 있다. 줄기세포를 이용한 유전자 치료는 이 두가지 치료가 합 쳐진 것이기 때문에 두 치료 방법의 문제들을 모두 공유하고 있다. 생물학적 위험성이나 치료 효과와는 별 개로 치료하는데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점 역시 가지고 있다.

또한 줄기세포가 체내에서 오래 머무르기 때문에 부작용을 시간을 가지고 지켜봐야 하며 질병의 완화와 치 료 효과의 지속성 역시 관찰과 연구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

 

180.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교향곡 9번 라단조 "합창"》은 루트비히 반 베토벤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1]에서 지은 곡이
며,
1824년 완성했었다. 음악사에서 처음으로 성악이 들어간 교향곡 작품이다.[2]〈합창〉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바로 제 4악장에 나오는 합창과 독창 때문이며, 그 가사는 프리드리히 실러환희의 송가에서 가 져왔다.

베토벤 작품들은 물론 서양 음악 전체에서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3] 자필악보는 현재 유네 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4] 또한, 제4악장에서 나오는 주제선율은 유럽연합의 공식 상징 가(유럽가)로 사용하며(도이칠란트어 가사는 공식 가사로 지정되지 않았다), 자필악보는 2003년 런던 소 더비 경매장에서 3,300,000달러에 낙찰되었다.

1817년, "런던 필하모닉 협회"(현재의 왕립 필하모닉 협회)에서 교향곡을 의뢰받은[6][7] 베토벤은 1822년 에 작곡을 시작해 1824년 연초에 마쳤다. 교향곡 8번(1812년) 이후 약 12년 만의 일이었다. 베토벤은 일찍 이 "환희의 송가"에 관심이 많아서 1793년에 이미 곡을 붙였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교향곡독창합창을 도입하는 것은 베토벤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음악가에게 처음이라서 많은 어려움 이 있었다. 베토벤의 전기를 집필한 제자 안톤 쉰틀러는 후일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제4악장을 작곡하기 시작하면서 베토벤은 전보다 훨씬 힘들어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실러환희의 송가 를 적절히 도입하는 것 때문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베토벤이 방에 들어와서는 '해냈어, 드디어 해냈다고!' 라고 하면서 소리를 질러대고서는 '실러를 대상으로 한 불멸하는 송가를 부르세'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보 여줬지요."

그러나 그 착상은 곧장 실현되지 않았고 오늘날과 같은 제4악장을 완성한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181. 사회계약

사회 계약(社會契約論)은 철학, 정치학, 사회학에서 시민과 국가 사이의 책임과 권리에 관해 국가 내부에 서 통용되는 암묵적 동의로, 또는 좀 더 폭넓게는 그룹과 그 구성원 사이, 또는 개개인들 사이의 계약이라 는 개념으로도 쓰인다. 사회 내부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들의 선택에 의해 그리고 폭력적 계약 없이 사회 안 에 존재하게 된 사회계약의 조건들에 동의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 달리 폭력은 자연상태로 돌아 가려는 문제적인 시도를 의미할 것이다. 종종 지적되듯이 실제로 사회 계약은 인간의 선하거나 악한 인류 학적 개념에 의존하고 있었다.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장 자크 루소는 이러한 사회 계약의 대표적 철학자들 이다. 특히 이들은 민주주의와 여타 사회주의의 이론적인 토대를 구축했다.또한 몇 가지의 대립하는 자유 주의의 이론적 기초 작업을 실행하기도 했다.

사회 계약은 정치적 이론으로서 국가와 인권의 목적과 정당성을 설명해준다. 홉스의 전형적인 이론에 따르 면 그 본질은 다음과 같다: 사회가 없었을 때, 우리는 자연상태에 살고 있다. 즉 우리는 무제한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자율성의 부정적인 면(downside)은 해로운 자유와 해롭게 하는 자유도 포 함되어 있다; 긍정적 권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자연권과 끝없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Hobbes, 1651)”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암묵적으로 사 회 계약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권리가 가지는 명예를 존중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우 리는 각각 시민권을 얻게 되고, 몇 가지 자유는 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사회의 ‘군주적 위치 (figurehead)’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우리의 공통된 이해를 대변하며 우리의 권능(power)의 위임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 군주적 위치가 바로 주권자의 자리이다.

 

182. 종교개혁

종교 개혁(라틴어: reformatio, 독일어: Reformation, 영어: Reformation)은 서방교회의 개혁을 위한 교회 내부 운동으로 1517년을 기준으로 본다.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당시 서방교회가 교 황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 정치, 서방교회의 면죄부 판매, 연옥에 대한 교황권 주장, 그리고 공로사상을 비 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하여,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 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함으로써 부패한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와 교회의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 던 서방교회 개혁 운동이다. 이 종교 개혁의 이전에도 이미 서방교회 내부에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윌리엄 틴 들, 사보나롤라, 웨셀 간스포트과 같은 선구자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가들의 신학운동이 있었다. 이미 교회 개혁의 영향은 중세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어왔다. 인문주의자들의 방법을 통하여 성경을 원 문으로 해석하고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의 기록,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모든 제도인 교황과 교회직제, 교회전통보다 더 높은 권위에 두었다

 

183. 토머스 제퍼슨

토머스 제퍼슨(영어: Thomas Jefferson, 1743년 4월 13일 ~ 1826년 7월 4일)[2]  미국의 정치인으로 3번 째 미국 대통령(재임 1801년 ~ 1809년)이자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다(1776년). 제퍼슨은 영향력 있 는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미국 공화주의의 이상을 논의 역대 대통령 중 존경을 받는 대통령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일어난 큰 사건은 루이지애나 매입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부 원정이었다.

 

184. 가지 않은 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우리는 현실에서 어느 길이 최선인지 알 수 없고, 우리의 선택이 그만큼 무작 위적이고 무지한 추측이라는 것이다.

 

185. 인상주의

인상주의(impressionism, 印象主義) 또는 인상파(印象派)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색채·색조·질감 자체에 관심을 두는 미술 사조이다. 인상주의를 추구한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빛과 함께 시시 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하였다. 1860년대 파리의 미술가들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인상주의라 는 이름은 클로드 모네의 유화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에서 비롯되었는데, 비평가 루이 르로이 가 《Le Charivari》지에 기고한 비판에서 처음으로 쓰였었다. 인상주의 미술은 인상주의 음악인상주의 문 학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인상주의가 태동할 당시는 현대와 달라서 관영(官營)인 단 하나의 전람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살롱이라고 불 렀다. 살롱은 한 해에 한 번만 개최하는 단 하나의 발표기관이었다. 19세기 후반에는 화단도 각 경향으로 나뉘 었기 때문에 그 대립이 현저해지고, 살롱 중에서 보수적인 세력은 1863년에 혁신적인 작품을 대량으로 낙선시 켰던 것이다. 그 중 마네나 미국의 화가 휘슬러가 있었는데, 낙선 화가는 그것을 부당히 여겨 정부에 강요, 별 도로 낙선 화가 전람회를 개최했다. 그때 마네가 출품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누구에게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숲속에 피크닉을 간 파리 사람들을 그렸는데, 묘사가 참신함에도 불구하고 그 화면에서 특히 여성을 나체로 그렸기 때문에 마네는 풍속을 문란케 한다고 공격을 받았다.

이어 1865년 마네는 살롱에 그의 대표작인 <올랭피아>를 출품했는데, 이것도 미풍을 해친다는 이유에서 이전 보다 더욱 공격을 받았다. 마네는 공격을 피하여 일시 에스파냐로 여행을 했는데, 귀국하자 그 과감성에 끌려 주위에 청년화가들이 모여들었다. 그 모임은 1866년부터 몽마르트르의 크리시가에 있는 카페 게르보아에서 열렸는데, 문인 졸라도 참가하여 성의 있는 토론이 반복되었다. 모임은 보불전쟁(普佛戰爭)으로 중단되었지 만 전후에도 계속하여 모이는 화가들끼리 인상파의 전람회가 열렸다.

피사로, 모네, 시슬레, 드가, 세잔, 르누아르, 모리조, 기요맹 등은 1874년 4월에, 파리 카프신가()의 전 나다 르 사진관을 회장(會場)으로 하여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회장에 우연히 모네의 풍경화인 《인상, 해돋이》 가 있어, 그것을 들어 잡지 《샤리바리》의 비평가 르로아가 그저 인상을 그리는 일당(一黨)이라는 데에서, 인 상파라고 야유한 연유로 인하여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 인상파의 전시회는 1886년 제8회까지 계속되는데, 최 초에는 압도적인 매도(罵倒)로 시작하여 화가의 고투(苦鬪)가 계속되었다. 이윽고 고갱도 인상파 전시회에 참 가했다.

인상주의라는 이름은 1874년 4월 25일 미술 비평가 르로이가 파리의 전시회에서 비판적인 뜻으로 사용한 것 에서 유래하며, 오늘날 서양 미술사에서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사조로 쓰이고 있다. 인상주의는 빛의 변화 에 따른 순간적인 형태의 변화를 포착하려는 미술양식을 말하며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깊이없는 사 물의 인상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모습을 포착해내기 위 해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색채 표현에 있어서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이용한 색채분할법을 사용하였다. 이 와같은 인상주의는 회화에서의 재현적인 사실적 묘사가 더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상주의는 서양 미술사에서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지고 애호되는 화풍으로 평가되고 있다. 인상주의가 대중에게 커다란 호감을 주게 된 중요한 요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꼽힌다.

  • 인상주의 미술은 전통적인 그림의 주제와 기교에 얽매이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그림의 동기와 대상을 찾았다.
  • 인상주의 미술은 사실주의 미술처럼 도시의 일상뿐만 아니라 프랑스 시골의, 특히 프로방스 지방의 햇 살 아래의 수시로 변화 하는 풍경을 현장에서 직접 화폭에 음악으로써 생동감과 친근감을 주게 된다.
  • 인상주의 화가는 빛과 색의 조화, 대상과 면의 구성을 나름대로 실험하였으며, 이는 고갱고흐, 세 잔 등의 후기 인상주의로 이어져 프랑스의 야수파와 독일의 표현주의등 현대 미술의 형성에 결정적 영 향을 끼치게 된다.

 

186. 전자기파 스펙트럼

전자기 스펙트럼(電磁氣 - , electromagnetic spectrum)은 전자기파파장에 따라 분해하여 배열한 것이다. 일반적인 스펙트럼가시광선 영역에 대한 것이라면 전자기 스펙트럼은 보다 넓은 전자기파의 범위에 대한 것이다.

187. 낭만주의 시대

낭만주의 음악은 일반적으로 서양음악사에서 1815년 나폴레옹의 패전 이후부터 1960년까지의 음악을 일컫는 다. (실질적으로는 1890년대까지) 1890년부터 1980년대까지의 음악을 세기전환기 음악으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19세기 음악은 보통 낭만주의 음악(Romantic music)으로 지칭되어 왔으나 이는 양식사나 제도사적으로 관계 되어 매우 문제시된다. 최근
음악사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19세기 = 낭만주의'라는 등식은 적절치 못한 것으 로 간주되고 있다. 이 명칭이 19세기 음악사를 결정짓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경향 중에서 유독 '낭만주의'만을 일 방적으로 강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일반화된 명칭은 마치 19세기 전반에 걸쳐 통일 된 "낭만적" 시대 정신과 보편적 시대 양식이 존재하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19세기 음악 은 역사주의 음악(Historismus), 비더마이어 음악(Biedermeier), 민족주의 음악(Nationalismus), 사실주의 음 악(Realismus), 인상주의 음악 등 다양한 사조의 경향이 혼재되어 있다. 낭만주의는 19세기 전반 주도적인 역 할을 담당하긴 했지만 이는 결국 19세기에 다양한 한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현재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선에서 그 흐름을 추구해 보면 우선 독일 낭만주의로 슈베르트에서 슈만까지 를 다루고, 동기의 낭만파군으로는 주로 프랑스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나 쇼팽을 든다. 그리고 후기낭만 주의에의 길로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 말러의 선이 주목되며, 그 밖에 그 주변이나 또는 대립으로서 브람 스, 브루크너, 프랑스의 구노, 비제, 이탈리아의 베르디를 들 수 있다. 또한 스칸디나비아나 슬라브 각국에 대 한 낭만파의 영향도 만들어진다.

이와 같이 포괄적으로 살핀 흐름에서도 명료하듯이, 낭만파의 음악은 예술철학이나 다른 예술과의 관련방식 이나 대상으로 하는 곡종 등의 점에서 각각 다른 수단에 의하고 있다. 그러나 작곡이론상에서의 공통된 문제 점은 개성적인 작품에 대한 심리의 미묘한 반영을 꾀한 결과, 조바꿈이나 색채의 변화에 관련되는 화성법, 또 는 관현악법에 있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모든 예술 속에서 음악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기악음악의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 었다는 사실이다. 음악은 "일반적인 말처럼 하나하나의 명확한 뜻을 지니지 않고 그것만으로 무엇인가를 표현 하려는" 음의 언어로서 파악되며, 따라서 작곡가는 시적, 회화적, 설화적, 극적인 세계와 결부된 감정의 움직임 을 적극적으로 음악에 나타냈다.

 

188. 조지 버클리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ˈbɑːrkli/, 1685년 3월 12일 1753년 1월 14일)는 아일랜드철학자이 자, 성공회 주교이다.

버클리의 철학은 우리가 지각하는 것만이 실체이며, 지각하지 못하는 것의 실체는 없다는, "존재하는 것은 지 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극단적인 경험론에 속한다.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지각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끝에 1709년 발표한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시 론(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으로 처음 주목을 받았다. 당시에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 지만 오늘날 그의 결론은 기초적 광학이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그 이론은 물질적인 것은 없고, 오직 정신적인 사건과 그것을 지각하는 사고방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쓴 글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것은 《인간 지식의 원리론(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1710)와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나눈 대화 세 마당(Three 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 1713)》(필로누스(Philonous)는, "정신을 사랑하는 사람"(lover of the mind)의 뜻으로, 버클리 자신을 나타냄)가 있다. 1734년, 그는 이후 수학 발전에 영향력을 크게 끼쳤던, 과학의 기초에 대한 비 평인 The Analyst를 출판했다.

 

189.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누스 1세(라틴어: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년 2월 27일 - 337년 5월 22일)는 중 기 로마 황제(재위 306년 - 337년)이다. 흔히 기독교사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통칭하며, 동방 정교회는 모두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 (대) 콘스탄티누스(그리스어: Μέγας Κωνσταντίνος, 라틴
: Sanctus Constantinus Magna)로 호칭한다. 306년 7월 25일 브리타니아요크에서 병사들에 의해 군주 로 추대되어 죽는 날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첫번째 기독교인 로마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세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 이 되었는데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정 식 종교로 공인했다. 또한 교회의 압류된 재산을 돌려 주고 이에 대한 국가의 보상을 정했다. 그는 또한 325 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의 발전에도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Nova Roma)’로 공표하고 330년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 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337년, 그가 죽자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로 개명했고, 세계 최초의 기독교 도시로서 이후 천 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존재하게 된 다.

천도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다양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 기독교 성직자에게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게 하는 법령을 반포하였다. 또한 이전과는 다르게 성직자의 사유재산 소유를 승인하였다.
  • 검투사 시합을 금지시키는 법령을 제정하였으나, 실제로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검투 경기는 4 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 십자가형을 금지하고 교수형으로 대신하였다.
  • 도축업에 종사하거나 제빵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대대로 직업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같은 직
  • 종을 대대로 유지하는 관습은 중세 유럽에까지 계속되었다.
  • 그때까지 토지를 빌려서 농사하는 사람들을 농노로 바꾸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중세 장원 경제의 기초
  • 가 이때 놓여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0.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어: Napolon Bonaparte, 코르시카어: Nabulione di Buonaparte, 이탈리아어: Napoleone Bonaparte, 독일어: Napole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는 프랑스 제1 공화국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다.

코르시카 출신의 하급귀족으로 시작해 프랑스 혁명의 혼란한 시대 속에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통해 프랑스 를 승리로 이끌며 유럽의 모든 열강들을 굴복시키고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된 인물이다. 샤를마뉴 이후 프랑스 최초의 황제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대의 유럽은 나폴레 옹을 빼고는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엄청난 족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근대 유럽이 배출한 최고의 군사적 천재 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가 남긴 나폴레옹 법전은 전 세계의 민법 관할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나폴레옹이 유 럽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법치주의, 능력주의, 시민 평등사상 등 혁명의 정신들이 온 유럽에 전파 되었다. 근대 유럽은 영국의 산업혁명이라는 경제적 혁명과 프랑스 혁명이라는 정치적 혁명을 통해 탄생한 세계였으며 결 국 이후 전 세계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근대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유럽화, 된 만큼 유럽 뿐 아니라 전 세 계 역사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그가 전쟁사에 남긴 영향은 대단했는데 현대전에까지 영향을 끼친 군사전략가(클라우제비츠, 투하체프스 키, 슐리펜 계획까지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았다.)이다. 전술과 전략은 물론이고 훈련, 조직, 군수 심지어는 의 복과 포상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전반적으로 선진화시킨 장본인이다. 그가 육성한 프랑스 육군은 유 럽을 넘어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조직된 선진 군대였고 결국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프랑스 육군 을 흉내내게 된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출신 하급귀족으로 파리 육군사관학교 졸업 이후 프랑스 육군 포병 소위 임관되었다. 그 는 프랑스 제1공화국에서 눈에 띄게 지위가 올랐고 제1차 제2차 대프랑스 동맹과의 전쟁에서 강력한 반 프 랑스 연합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1799년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제1통 령에 취임하였다. 5년 뒤에 프랑스 원로원이 그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 나폴레옹이 이 끄는 프랑스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을 주도하였다. 유럽의 모든 강대국이 이 전쟁에 휘말렸으며, 많은 승리 뒤 에 프랑스는 유럽의 지배적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유럽의 각국들을 분할하고 서로 견제하게 만드는 한편 자신의 측근들과 친척들을 유럽 다른 나라들을 통치케 하여 프랑스의 위상을 유지시켜나갔다. 하 지만 스페인의 무장시민들의 끈질긴 쿠데타와 1812년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나폴레옹의 삶을 완전히 돌려놓 았다. 그의 대육군은 스페인과 러시아에서의 실패로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손실을 보았으며 이후 재건 된 프랑스 군대는 규모는 여전히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육군이었으나 내실에서는 결코 전성기 때 만큼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1813년라이프치히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의해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그 동맹이 파리에 입성하였고, 나폴레옹을 정권에서 내려오게 하고 엘바 섬으로 유배 보냈다. 1년이 채 되지도 않 았을 때 그는 엘바 섬에서 도망쳐 나오고 권력을 다시 잡았지만, 1815년 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완전히 상실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영국 왕실에 의해 구속된 채로 세인트 헬 레나 섬에서 보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위암으로 결론이 났으나, 그의 사인은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으며, 일부 학계 측에서는 비소 중독설도 제기되었다.

 

191. 주홍글씨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는 미국소설이다. 미국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의 대표작으로, 1850년 발표되었다. 세무서에서 근무하다가 실직한 호손이 배우자의 격려를 받아서 쓴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다. 청교도 신자 호손의 죄와 인간의 위선에 대한 통찰 력이 담겨 있다.
청교도
목사 딤즈데일의 죄책감과 그와 간음한 헤스터의 순수한 마음을 대비시켜서 17세기 미국 청교도들의 위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간음한 헤스터에게 A라는 붉은 낙인을 찍는다는 설정에서 붉은 낙인 '주홍 글씨'는 인간을 얽매는 굴레를 뜻한다.

17세기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간음혐의를 받은 피고 헤스터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 판사들은 헤스터와 간음한 남성이 누구인지를 묻 지만, 그녀는 끝까지 답변하지 않는다. 간음을 뜻하는 A라는 낙인을 찍힌 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서도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 다. 이때부터 헤스터와 딤즈데일은 대비된다. 헤스터는 자신도 삯바느질을 해서 딸 펄과 단 둘이 먹고 사는 어려운 처지였지만, 가난 한 이웃들을 돕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의 도움을 받는 이웃들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이에 반해 딤즈 데일은 겉으로는 거룩한 개신교 목사로 행세하지만, 속으로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한편, 헤스터가 죽은 줄 만 알았던 전 남편 칠링워 스가 돌아와서는, 헤스터를 죄를 짓게 한 사람을 찾겠다 결심한다. 딤즈데일에게서 몇몇 수상한 점을 발견한 칠링워스는 그를 점점 의심하게 된다. 마침내 헤스터와 딤즈데일은 도망하기로 결심하지만, 결국 딤즈데일은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숨을 거둔다. 주요 등장인물

헤스터 프린(Hester Prynne)

본작의 주인공으로, 몰락한 영국 귀족 가문의 딸이다. 모종의 이유로 로저 칠링월스와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한동안 칠링월 스와 함께 암스테르담에 체류하다가 (남편의 계획에 따라) 먼저 뉴잉글랜드로 건너왔고,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따라오지 않자, 동 네 목사인 아서 딤즈데일과 연애한 끝에 사생아인 펄을 낳는다. 처벌을 받은 이후로 몸가짐을 조심히 하고 선행을 베푸는 데에 매진 함으로써, 점차 동네 사람들의 평판 또한 개선된다............

아서 딤즈데일(Arthur Dimmesdale)

신망받는 보스턴의 목사이자, 펄의 친부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한 뒤 뉴잉글랜드로 건너와 목사가 되었다. 작중에서는 이마가 넓은 수려한 외모를 지닌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또한 (헤스터와 함께 저지른 죄의 영향으로) 심약하며 잘 놀라는 성격으로 묘사되 어 있다. 헤스터가 본작의 초반부터 죄가 드러나 처벌을 받은 데에 비하여, 줄곧 죄를 밝히지 못했다가 23장에 가서야 이를 고백하는 점에서 헤스터와 대조된다.

로저 칠링워스(Roger Chillingworth)

학식 있는 의사로서 본디부터 싹싹한 성격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간통해 처벌받는 장면을 목격하고 난 뒤로는, 그 공범자를 찾아내 비밀스럽게 복수하는 데에 혈안이 된다. 일종의 복수귀로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헤스터가 간통했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퍼뜨리거나, 이들을 대놓고 못살게 굴거나, 또는 이들을 보스턴에서 쫓아내 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헤 스터의 정부(情父)를 찾아내 그에게만 비밀스럽게 복수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복수귀'와는 확연히 거리가 있다. 그가 이러 한 방식의 복수를 하는 이유는 자신이 헤스터의 남편인 것을 수치스러워 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펄(Pearl)

헤스터가 간통으로 낳은 사생아이다. 외모는 헤스터를 닮아 예쁘지만,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또래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때로는 어머니조차 곤란하게 하는 등 이상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작중에서 헤스터의 곁에 있으면서, 헤스터에게 그의 죄 를 깨닫게 하는 존재로서 등장한다. 23장에서는 아서 딤즈데일이 자신의 잘못을 완전히 고백한 뒤로는, 딤즈데일의 입술에 키스함으 로써 그러한 이상한 성정을 떨쳐낸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이 책에서는 죄에 대한 신의 처벌로 나와 있다.

주변 등장인물
리처드 벨링엄(Richard Bellingham)
뉴잉글랜드 지사이다. 실제 역사와는 달리, '뉴잉글랜드를 다스릴 만한 훌륭한 인물'로 묘사된다. 2장에서 헤스터를 추궁하는 고위인 사들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며, 또한 7~8장에서 헤스터에게서 펄을 떼어내려는 인물로도 등장한다.
존 윌슨(John Wilson)
보스턴의 신부들 가운데 하나이다. 선량한 성격을 지녔지만 본인은 그 성격을 지닌 것을 못마땅해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벨링햄이 헤스터에게서 펄을 데려가려는 에피소드에서 칠링워스가 헤스터의 정부에 관심을 보이자, 그런 식으로 죄에 대해 캐는 것은 하느님 께 어긋나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히빈스 부인 (Mistress Hibbins)
리처드 빌링햄의 누이이다. 작중에서는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것으로 등장한다. 8장에서 헤스터가 펄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자, 조만 간 (숲 속에서 악마와 함께) 보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마녀 재판에 의해 처형되었다.
앤 허친슨(Anne Hutchinson)
신앙지상주의자이다. 청교도 종교관과 대립하는 탓에 뉴잉글랜드에서 쫓겨난 뒤 네덜란드 식민지(오늘날의 뉴욕)에서 살았다가 인 디언의 습격을 당해 죽는다. 본작의 제1장에 찔레꽃 덤불에 대한 묘사와 관련해 잠깐 언급되는 것이 전부이다.
존 윈스럽(John Winthrop)
옛날 뉴잉글랜드 지사들 중에 한 사람이다. 12장에 헤스터가 그의 수의와 관련해 그의 집에 다녀갔다가 교수대 앞에서 딤즈데일을 만나는 식으로 잠깐 언급된다. 작중의 정확한 연도와 관련한 정보를 제공하는 유일한 표지이다. 정사에서 그는 1649년 3월 24일에 사망하는데, 작중에서는 5월 초순으로 미루어져 있다. 실제 역사와 작품 속 역사의 이 같은 차이는 문학적 허용의 대표적 사례로서, 호손의 로맨스적 성격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192. 휘슬러의 어머니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유명한 초상화는 어머니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그림이다.

193. 서캐디안 리듬

활동일주기(活動日週期, 영어: circadian rhythm 또는 sleep-wake cycle) 또는 '생체시계'[1]는 식물, 동물, 균 류, 심지어 박테리아까지 포함하는 지구 상의 생명체들에서 생화학적, 생리학적, 또는 행동학적 흐름이 거의

24시간의 주기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생물에서 하루, 조수, 주간, 계절, 그리고 일 년과 같이 시간에 따른 리듬 을 연구하는 학문을 시간 생물학(chronobiology)라고 한다. 생체 리듬은 체내에서 발생하지만 일주기 생체 리듬은 빛, 어둠, 기온과 같은 외부의 요인들에 의해 환경에 알맞게 동기화하는데 이를 차이트게버(Zeitgeber, 독일어 ‘시간 기여자’)라고 한다. 자이트게버 중에서도 빛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다.

서캐디안 : 대략 하루의 라틴어

최초에 생체 시계에 대해 고려된 것은 기원전 4세기경으로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선장이 낮 동안에 콩과 식물 (tamarind)의 잎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였다. 현대에 이르러 18세기 프랑스 과학자 드 메랑(Jean-Jacques d’Ortous de Maran)은 Mimosa pudica라는 식물이 지속적인 어둠 속에서두었을 때도 24시간을 주기로 계 속해서 잎이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한 세기 후에는 스위스의 박물학자 드 캉돌(Augustin Pyramus de Candolle)은 자연상에서는 미모사의 잎이 24시간을 주기로 움직이지만 불규칙하게 조명을 주었을 때는 20- 28시간을 주기로 움직임을 알아내었다. 일주기 생체 시계에 대한 연구는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에서도 이루어 졌다. 1894년에 명암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절지동물의 지속적인 색의 변화를 키셀이 관찰하였다. 브래 디는 바퀴벌레를 비 주기적인 환경에 두면 외부의 자극 요인 없이도 일주기로 리듬이 유지되지만 완벽하게 24 시간에 맞지 않으며 주기적 환경에 다시 둘 경우 원래의 리듬을 회복함을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또한 초파리 는 계속 빛이 공급되는 환경에서도 700세대에 걸쳐 일주기 생체 리듬이 유지되었으며 메추라기는 실험적으 로 빛을 제거하였을 때 행동뿐만 아니라 생리적으로도 리듬이 유지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194. 프란츠 슈베르트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독일어: Franz Peter Schubert, 1797년 1월 31일 ~ 1828년 11월 19일)는 오스트리아 작곡가이다. 음악의 최고봉 중 한 사람이다. 관현악곡·교회 음악·실내악·피아노곡 등 명작이 많은데, 특히 리트(독일 가곡)에 뛰어난 작품이 많으며, 19세기 독일 리트 형식의 창시자이다.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긴 채 31세로 병사한 그는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600여 편의 가곡, 13편의 교향곡, 소 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으며, 가곡의 왕이라고 불린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1년 뒤인 1828년, 그는 자신이 대위법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깨닫고 다시 공부하다가 (키즐러에게) 11월 17일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몸져 누웠다. 그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기억력이 감퇴하여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을 비틀거리는데다 허깨비가 보이며 혼잣말을 하는 등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이다가 이틀 뒤인 11월 19일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빈에서 요절하고 말았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유해 를 교회에 묻으려 했으나 당시 그를 돌보던 둘째 형 이그나츠가 평소에 존경하던 베토벤의 옆에 묻어주자고 제안을 해 빈 중앙 묘지의 베토벤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슈베르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 았는데 식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설,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설과 매독의 악화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며 현 재는 매독으로 인한 사망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별세한 해에 만들어진 최후의 가곡 14곡을 모은 것이 《백 조의 노래》이다.

슈베르트는 그 짧은 일생에 수많은 가곡과 기악곡, 교향곡 등을 작곡하였으나,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 은 가곡이다. 690곡에 이르는 가곡들이 모두 훌륭하다는 평을 듣지만, 특히 《겨울 여행》이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백조의 노래》 등이 특히 뛰어난 작품이며, 자유로운 표현력을 지니는 멜로디의 아름 다움, 그리고 화성의 미묘한 변화 등 낭만주의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교향곡에서는 제8번의 《미완성》 이 특히 유명하나, 제9번 《대교향곡》의 아름다움도 잊어서는 안된다. 피아노곡에서는 《마왕》, 《방랑자 환상곡》, 《스케르초》, 《악흥(樂興)의 한때》 등이 알려져 있고, 실내악곡에도 《죽음과 소녀》나 《송 어》 등 걸작이 많다. 그 밖에 오페라·음악극의 작품도 있으며, 가곡을 비롯하여 교향곡·실내악·피아노곡 등 1,200여 곡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5. 조셉스미스와 모르몬교

모르몬교 혹은 몰몬교(영어: Mormonism)는 1820년대와 30년대에 뉴욕 서부에서 조셉 스미스가 시작한 회 복주의 기독교 후기성도 운동의 주요 종교적 신앙이다. 1820년대 조셉 스미스 2세가 처음 창시했다. 후기성 도들(몰몬교도)은 스미스의 사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솔트레이크 계속에 정착, 현재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 도 교회로 대부분 계승되었다. '몰몬'이란 성경과 함께 그들이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몰몬경에서 나온 말인데, 이를 출판한 스미스는 자신이 신의 도움으로 금판(golden plates)을 번역한 것이라고 말한다.

 

196. 관념론

관념론(觀念論, 영어: idealism, 독일어: Idealismus, 프랑스어: Idalisme)은 실체 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체는 근본적으로 정신적이거나 정신적으로 구성되었거나 또는 비물질적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적 입장이

다. 인식론에서 관념론은 정신으로부터 독립된 것을 인식할 가능성에 대한 회의로 나타난다. 사회학적 측면 에서 관념론은 인간의 생각, 특히 믿음과 가치가 사회를 어떻게 형성하는 지에 주안점을 둔다. 존재론적 교 의로서 관념론은 더 나아가, 모든 것은 마음이나 정신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관념론은 "모든 것은 물질 적으로 실제한다"고 보는 물리주의나 물리적 실체와 정신적 실체를 분리하여 파악하는 이원론의 주장은 모 두 배척한다.

관념론은 마음 · 정신 · 의식물질 세계를 형성하는 기초 또는 근원이라고 주장은 유심론(唯心論)과 동의 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유심론이 유물론에 반하여 물질적 실재를 부정하는 것과 달리, 관념론은 실재론

반하여 정신에 기반하지 않는 객관적 실재의 인식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이에서 더 나아가 물질 세계마음, 정신 또는 의식이 현재 가지고 있는 생각 또는 상념의 현현 또는 표상이라는 입장과 물질 세계 가 원인의 세계가 아닌 결과의 세계라는 입장으로 사물의 세계가 "본질적인" 실체(實體) 또는 실재성(實在 性)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임시적인" 실제성(實際性)만을 가진다고 보는 환영설(幻影說)도 관념론의 일부를 이룬다.

경험의 세계가 정신에 기초한다는 현존하는 가장 이른 논의는 인도와 그리스에서 발생하였다. 인도의 힌두 관념론자와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자는 실체의 토대 또는 진정한 성질로서의 만연한 의식을 옹호하는 내재 신론적 논증을 펼쳤다. 반면에 기원후 4세기에 인도에서 발생한 대승불교 교파인 유가행파는 정신만을 인 정하는 관념론의 근거를 대부분 인간의 경험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에 기반을 두었다. 이러한 주관적 관념론 으로의 전환은 18세기 유럽에서 유물론에 대한 회의적 논증을 채용하여 관념론을 되살린 조지 버클리와 같 은 경험론자의 등장을 예견하였다.

이마누엘 칸트로 시작하여, G. W. F. 헤겔,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아르투 어 쇼펜하우어와 같은 독일 관념론자들은 19세기 철학을 지배하였다. 모든 현상의 정신적 또는 "관념적" 특 성을 강조하는 전통은 영국 관념론부터 현상론, 실존주의를 아우르는 관념론적, 주관주의적 학파를 탄생시 켰다. 이러한 관념론 학파의 역사적 영향은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실용주의, 실증주의와 같은 관념론의 형 이상학적 가정을 거부하는 학파에게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다.

대표적인 관념론으로는 힌두교우파니샤드 철학과 베단타 학파, 불교유식설화엄종, 유대교카발 라, 피타고라스 학파영혼 불멸설, 플라톤주의이데아론, 신피타고라스주의, 기독교 신학, 영지주의, 헤 르메스주의, 신플라톤주의, 원효일심 사상, 유교성리학, 라이프니츠모나드설, 버클리의 유심론, 칸 트비판철학, 헤겔절대정신 시대정신론 등이 있다.

 

197.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

아일랜드 대기근(영어: Great Famine, 아일랜드어: An Gorta Mr, An Drochshaol)은 1845년에서 1852 년까지 영국아일랜드 섬에서 일어난 집단기근, 역병과 집단 해외이주의 시기를 일컫는다. 아일랜드 외부 에서 이것은 보통 아일랜드 감자 기근으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아일랜드어에서 이것은 an Gorta Mr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대기근"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것은 ‘an Drochshaol’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나쁜 인생"을 의미한다.

대기근의 기간동안 대략 백만명의 사람들이 죽고 백만명이 아일랜드를 떠나 해외로 이주하였다. 이로인해 아일랜드의 인구는 20%에서 25% 감소하게되었다. 대략적인 기근의 원인은 감자의 역병이었다. 하지만 당 시 1840년대 도중 감자 역병이 유럽전체를 휩쓸며 감자 농사를 황폐하게 했지만, 대기근이 발생하지는 않 았다. 그러나 당시 아일랜드는 인구의 3분의 1이 감자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정치적, 인 종적, 종교적, 사회와 경제적 요소들이 아일랜드인들을 감자에 의존하게 만든 계기는 여전히 오늘날 역사적 논쟁의 주제가 된다.

이러한 아일랜드 기근의 여파로 아일랜드의 인구는 크게 감소하였고, 대기근 이후에도 아일랜드인들의 해 외이주는 계속 증가하였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1900년대 중반까지 아일랜드의 인구는 계속 감소하여 결과 적으로 본래의 800만명에서 절반으로 줄게된다.

 

198. 월트 휘트먼

월트 휘트먼(영어: Walter "Walt" Whitman , 1819년 5월 31일 ~ 1892년 3월 26일)은 미국시인, 수필가· 기자였다. 초월주의에서 사실주의로의 과도기를 대표하는 인물의 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에는 두 양상이 모두 흔적으로 남아있다. 미국 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기며 종종 "자유시의 아버지"[1] 라는 호칭을 듣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풀잎》(The Grass, 1855)이 있다.

휘트먼은 《풀잎》 1855년판 서론에서 "시인의 증거는 시인이 국가에 헌신하는 만큼의 깊은 애정을 가지고 국가가 그를 포옹해 주는가"라고 주장을 하였다. 휘트먼은 시인과 사회 사이에는 빼놓을 수없는 공생 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내 노래》(Song of Myself)에서 전능적인 1인칭의 이야기를 이용하여 특히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서사시로 뛰어난 영웅을 등장시키는 전통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의 아이덴티 티를 등장시킨다. 《풀잎》은 또한 당시 미국에서 진행하고 있던 도시화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도 반영하고 있다.

 

199. 에드가르 드가

에드가 드가(프랑스어: Edgar Degas 에드가르 드가[*] [ɛdɡɑʁ dəɡɑ], 1834년 7월 19일 ~ 1917년 9월 29일) 는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인상주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루이 르 그랑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1855년앵그르의 제자 인 루이 라모트의 소개로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면서 거장들의 그림을 익혔

다. 1856년부터 1년 간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르네상스의 거장, 특히 기를란다요, 만테냐의 작품을 배우고, 또 니콜라 푸생한스 홀바인의 그림도 배웠다. 1865년에 살롱에 《오르레앙 시의 불행》을 출품하고, 프로 이센-프랑스 전쟁 후, 인상파 전람회에 참가하였으나 뒤에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1] 1870년대 전반기에는 그는 자신이 선호하는 두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오페라 극장(특히 발레리나)과 롱샴 경마장의 경주가 그것이다.[2]

1872년에는 어머니의 고향인 미국 루이지애나주뉴올리언스로 떠나 미국의 역동성을 목격했다. 1873년 파 리로 돌아와 인상주의 화가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말년에는 지병인 눈병이 악화되어 시력을 거의 잃 는 바람에 주로 조각에 몰두했다. 또한, 그는 어린 시절 모친의 외도와 불륜을 지켜본 상처가 큰 탓에 여성을 혐오하게 되었고, 이는 그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게 만든 결정적 원인이 되고 만다.

초기의 화풍은 고전적으로 《보나의 초상》, 《꽃을 든 여인》, 《이오 부인》 등의 초상화에서 출발했으나, 차츰 무용, 극장 등의 근대적 민중 생활의 묘사를 시작했다. 움직이는 것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그 리는 독자적인 수법을 썼다. 특히, 보는 각도를 바꾸어 가면서 정확한 데생과 풍부한 색감을 표현하였다. 무희 를 모델로 한 작품이 많아 '무용의 화가'로 불린다. 주요 작품으로 《댄스 교습소》, 《국화 옆의 여인》 등이 있다.

 

200. 수면

잠 또는 수면(睡眠)은 동물이 일정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의 활동을 쉬면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의 식은 없거나 줄어들고, 감각 기관이 상대적으로 활동을 중단하며, 거의 모든 수의근의 움직임이 없는 것이 특

징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줄어드는 것으로 각성과 구별되며, 쉽게 의식을 되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겨울잠 이나 혼수상태와는 구별된다. 수면 중에는 동화 상태가 고조되며, 성장과 면역, 신경, 뼈, 근육 계통의 회복이 두드러진다. 수면은 모든 포유류조류, 다수의 파충류, 양서류, 어류에서 발견된다.

수면의 목적과 기제는 부분적으로만 확인되었으며, 활발한 연구의 대상이다. 잠은 종종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 으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신진대사를 약 5~10%만 줄일 뿐이다. 겨울잠을 하는 동물들은 겨울잠 중에 대사 저하가 보이긴 하지만, 잠을 자야 하며, 이를 위해 저체온에서 발열 상태로 돌아온다.

NREM 수면(비-렘수면)의 4단계

제1단계: 뇌파가 베타파(β)에서 알파파(α)로 바뀌어 간다.

  • 제2단계: 세타(θ)파 및 방추형과 K 복합 뇌파가 나타난다.
  • 제3, 4단계: 델타(δ)파가 나오기 시작하며, 두 단계는 델타파의 양으로 구분한다.
  • 렘(REM,Rapid eye movement,급속 안구 운동) 수면은 신체적, 심리적인 회복, 단백질 합성 및 기억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되고있는 역설수면이다. 역설수면(逆說睡眠)은 몸은 잠을 자고 있으나 뇌파는 깨어 있을 때의 알파파(α)를 보이는 수면 상태이다. 자율신경성 활동이 불규칙적인 수면의 시기로, 보통 안구가 신속 하게 움직이고 꿈을 꾸는 경우가 많기에 램수면으로 언급된다. 한편 영아기에는 렘수면이 수면의 50%를 차지 하다가 점차 줄어드는것으로 알려져있다.

201. 펠릭스 멘델스존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바르톨디(독일어: 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문화어: 펠 릭스 멘델스존-바르톨디, 1809년 2월 3일 ~ 1847년 11월 4일)는 독일의 초기 낭만파 시대의 작곡가, 피아니 스트, 오르가니스트, 지휘자로, 영어권 국가에서는 흔히 펠릭스 멘델스존이라고 한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부유한 시민층 계급의 명망이 있는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유명한 철학자인 모제스 멘 델스존(Moses Mendelssohn)은 그의 할아버지다.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멘델스존 바르톨디(Abraham Mendelssohn Bartholdy)는 1804년에 자신의 맏형 요제프의 은행에서 일하게 된다. 어머니인 레아 멘델스존 바르톨디(Lea Mendelssohn Bartholdy)는 살로몬의 제조업 가문 출신이다.

아브라함과 레아는 1804년에 결혼하여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로 거처를 옮긴다. 1805년에 태어난 펠릭스 멘델 스존의 누나인 파니 헨젤(Fanny Hensel)은 음악적 재능을 가졌다고 한다. 다른 남매로는 1811년생인 레베카 디리흘레트(Rebecca Dirichlet), 1812년생인 파울 멘델스존(Paul)이 있다. 아브라함 멘델스존의 모든 자녀들 은 1816년 3월 21일에 신교회 신부로부터 개신교의 가정 세례를 받았다. 여기서 바로 펠릭스는 야코프 루트비 히라는 세례명을 받게 된다.

1844 년 여름에 있었던 멘델스존의 8 번째 영국 방문에서 그는 런던에서 다섯 개의 필 하모닉 콘서트를 진행 했으며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 계절은 이전과 같았습니다. 매일 3 주 전에 매일 약속이 채워졌고 나머지 2 개월 동안 나는 더 많은 음악을 듣게되었습니다. " (레베카 멘델스존 바르 톨디에게 보낸 편지, 소덴, 1844 년 7 월 22 일). [64] 계속되는 방문에서 멘델스존은 빅토리아 여왕 과 남편 앨버트 왕자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의 음악을 크게 경 쳤던 작곡가였다. [ 66]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 엘리야 는 버밍엄 트리엔날레 뮤직 페스티벌 (Birmingham Triennial Music Festival) 에 의해 위촉 받아 1846 년 8 월 26 일 버밍엄 타운 홀 (Town Hall) 에서 초연되었다. 그것은 영국에서 그의 시간 동안 많은 멘델스존의 작품을 저술하고 번역 한 윌리엄 바돌로매에 의해 영어로 번역 된 독일어 텍스트 로 구성되었습니다. [67 ]

1847 년 영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멘델스존은 베토벤 의 피아노 협주곡 4 번 솔로 연주자였으며, 앨버트 공 과앞빅톨링필 영왕 오케스트라와 협연 하여 스코틀랜드 교향곡을 연주했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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