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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개발 경제 일반상식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 수업 365 4

by 비사벌 2024.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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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 캐치 22

《캐치-22》(Catch-22)는 미국인 작가 조지프 헬러소설이다. 한국에서는 1995년 안정효의 번역으 로 실천문학사에서 출판되었다.
소설은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가상의 미국 육군 항공대 B-25 폭격기 편대의 조종사 요사리안을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부분의 사건은 256 비행대의 대원들이 이탈리아 서부 의 피아노사 섬에 배치된 상태에서 일어난다. 조지프 헬러는 동일한 사건들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재조 명하는 방법으로 독자에게 소설의 줄거리를 조금씩 이해시킨다. 소설은 독자에게 혼란을 줄 정도로 빠 른 속도로 진행되며, 부조리적인 유머를 통해 음울한 현실을 이야기한다.

정식 출판 이전, 소설의 한 장이 잡지에 Catch-18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출판사는 비슷한 시기에 출판된 Leon Uris의 소설 Mila 18(역시 2차대전을 주제로 함)과 혼동되지 않도록 제목을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18이라는 숫자는 유대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며, 비교적 유대적인 내용이 많 았던 소설 초기 버전의 내용과 관계가 있다.

Catch-11을 제목으로 사용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1의 반복을 통해 소설의 반복되는 내용을 암시하기 위 한 것이었으나, 영화 Ocean's Eleven의 개봉으로 인해 이 제안 역시 거부되었다. Catch-14라는 제목 또 한 출판사 측이 14가 별로 "우스운 숫자(funny number)"가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함으로 인해 거부 된 듯하다. 결과적으로, 11과 마찬가지로 2의 반복을 통해 소설 속의 데자부에 대해 암시하는 제목 Catch-22가 선택되었다.

《캐치-22》는 관료주의적 행정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의 사용으로 인해 "Catch- 22(캐치-22)"라는 표현은 영어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잡았다. 소설에서 "캐치-22" 는 군사적 규칙으로서, 순환논리적인 구조를 통해 병사들이 전투 임무로부터 빠져나가는 것 등을 원척적 으로 금지한다. (예를 들어) 전역을 하기 위해선 정신병 등 금치산자 판정을 받아 전역을 신청해야하는데 이 요청은 금치산자 스스로 제기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무효가 된다.

《캐치-22》의 문체는 "캐치-22"라는 규칙의 구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모순적이며 자기반복적이다.

소설의 주인공 존 요사리안(John Yossarian)은 28세의 미 육군 항공대 256 비행대 소속 대위이며, B-25 폭격기 조종사이다. 요사리안이라는 캐릭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작가 자신을 모델로 만들어진 듯하다. 예를 들어, 요사리안과 마찬가지로 헬러는 2차대전 중에 이탈리아 해안의 섬에서 폭격기 조종사로 복역 했으며, 아비뇽(Avignon)을 폭격하던 도중 동료들을 잃기도 했다. 소설 중에서 그는 아시리아인으로 묘 사되지만, 그의 이름은 아르메니아계로 보인다. 헬러가 노년기에 쓴 후속편 Closing Time에서, 그가 아 시리아인을 가장하는 아르메니아인임이 밝혀진다.

요사리안의 개인 이름(first name)이 존이라는 것은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야 Korn 대령의 대사를 통해 밝혀진다: "Call me Blackie, John. We're pals now." 보다 뒷부분에서, 의사도 그를 존이라고 부른다. Closing Time은 군대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 관계로 그의 개인 이름이 비교적 자주 사용된다. 작가는 주 인공의 군사 문화로부터의 소외를 나타내기 위해 "요사리안"이라는 비미국적인 이름을 사용했다. 이는 Cathcart가 그의 이름을 "an odious, alien, distasteful name, that just did not inspire confidence. It was not at all like such clean, crisp, honest, American names as Cathcart, Peckem and Dreedle"라고 표현함으로써 더더욱 강조된다.

052.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노트르담 드 파리 대성당(프랑스어: Cathdrale Notre-Dame de Paris 카테드랄 노트르담 드 파리[*], 영 어: Notre-Dame de Paris 또는 Notre-Dame Cathedral)은 프랑스 파리 시테 섬 동쪽 반쪽에 있는 프 랑스 후기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이 대성당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 건물로서 파리 대주교좌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흔히 프랑스 고딕 건축의 정수로 이야기된다. 이 대성당은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인 비올레르뒤크에 의해 파괴된 상태에서 보호되어 복구되었다. “노트르담”은 “우리의 귀부인”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성모 마리아를 의미함).

노트르담 대성당은 최초의 고딕 성당 가운데 하나이며, 고딕 전 시대에 걸쳐 건설하였다. 대성당의 조각 들과 스테인드글라스자연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는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부족한 세속 적인 외관을 더해준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세계에서 최초로 벽날개를 사용한 건물이기도 하다. 이 대성 당은 원래 성가대석과 중랑(中廊) 주변에는 벽날개가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공사가 시작되고 (고딕 양식에서 유행한) 꽤 얇은 벽들이 점점 높아지면서 커다란 균열이 벽이 밖으로 밀릴 때 생겼다. 그래서 성당의 건축가들은 바깥벽 주변에 지지벽을 만들었고, 그 뒤에 비슷한 방법으로 추가되었다.

이 대성당은 유명한 도미니코회 신학자 장 바티스트 앙리 라코르데르가 1840년에 연 사순절 설교로 유 명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요한 유명인이나 국가에 고용된 학자들이 설교를 한다. 하지만 청중들의 상 당수는 외국인들이며, 이들만으로 관습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1790년경 프랑스 혁명의 급진적인 시기에 노트르담 대성당은 반기독교 사상에 의해 모독을 당했으며, 많은 성상이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 19세기에의 다방면에 걸친 복원 작업이 완료되어 대성당은 이전 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2019년 화재가 발생 하여 내부 첨탑이 무너졌다. 프랑스 현지시간으로 2019년 4 월 15일 오후 6시 50분쯤, 우리 시간으로 2019년 4월 16일 새벽 1시 50분쯤 보수 공사 중이던 첨탑 주 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1160년 파리의 성당이 ‘유럽 임금들의 본당’이 되자 성당의 규모가 제 역할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 모 리스 드 쉴리는 파리 교구장에 착좌하자마자 원래의 성당을 무너뜨렸다. 전해지는 바로는 파리의 새로 운 영광스러운 대성당의 모습을 상상한 드 쉴리가 그것을 원래 성당의 바깥 흙에 스케치하였다고 한다. 건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교구장은 몇 채의 집들을 무너뜨렸고, 성당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운송 하기 위해 새 도로를 만들었다.

공사는 국왕 루이 7세 시대인 1163년에 시작되었고, 대성당의 주춧돌을 드 쉴리가 올릴지 교황 알렉산 데르 3세가 올릴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드 쉴리 주교는 대성당을 건설하는 데에 자신의 삶과 재산 대부분을 바쳤다.

독특한 탑 두 개와 서쪽 정면을 건설하는 일은 약 1200년에 시작되었는데, 일반적인 건설 과정과는 달리 중랑(中廊)이 완성되기 전이었다. 건설 과정에서 많은 건축가가 일했으며, 이는 서쪽 정면과 두 탑의 각 각 다른 높이와 다른 양식에서 발견된다. 1210년에서 1220년 사이, 4등 건축가는 장미창이 있는 층과 탑 뒤의 거대한 현관의 건설 과정을 감독하였다. 두 탑은 1245년경에 완성되었으며, 대성당은 1345년경 에 완성되었다.

053. 플라시보 효과

위약(僞藥) 또는 플라시보(영어: placebo)는 심리적 효과를 얻기 위하여 환자가 의학이나 치료법으로 받아 들이지만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가짜 약제를 말한다. 영어로는 플러시보(placebo, 라틴어로 '마음 에 들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다. 위약과 관련하여 잘 알려진 현상으로 심리 현상 중 하나인 위약 효과(placebo effect)가 있다. 이를 플라시보 효과 또는 플러시보 이펙트라고 그대로 읽기도 한다. 의사가 환자에게 가짜 약을 투여하면서 진짜 약이라고 하면 환자의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믿음 때문에 병이 낫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약이 부족할 때 많이 쓰였던 방법이다.

초기 플라시보 통제의 구현은 악령 쫓기의 신빙성을 없애기 위한 가톨릭교회의 노력과 더불어 16세기 유 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위약 효과를 이용한 위약의 투여는 의료 행위에 있어서 필수 윤리 조건인 의사와 환자간의 신뢰를 깨뜨릴 수 있다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되고 있다. 실제로 진짜 의약품이 아닌 위약을 투여한 사실을 환자가 알아차 렸을 경우, 일부에게서 위약 효과와 반대되는 노시보(Nocebo) 효과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는 환자의 건강 상태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현재 위약의 사용은 실제 치료에서 는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

의약적 가치가 없는 치료제가 긍정적인 효과를 내는 것

 

054. 악곡 형식

악곡의 형식 또는 악식(樂式, musical form) 이란 음악의 형식을 말한다.

모든 음악작품은 '변화'와 '통일'이라고 하는 상반된 양면을 다 가지고 있다. 전자는 이른바 원심력인 것이 고. 후자는 구심적인 힘에 비유된다. 어떤 작품이 풍부한 변화를 가졌고, 또한 견고한 통일감이 있다면, 그 작품은 성공하였다고 하겠다. 멜로디, 화성, 리듬, 음색 등 음악의 여러 요소의 다종(多種)·다채(多彩)한 사 용이 작품에 변화를 가져온다. 통일감은 이와 반대로 전체를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소재에서 만들어내는 것 으로 확보된다. 그러나 변화를 구하는 나머지 작품이 다양한 소재의 단순한 나열에 그친다면 결과는 잡다 하고 산만한 인상에 그칠 것이며, 너무나 제한된 소재는 단조로워서 거북하고 지루한 인상을 주기 쉽다. 그 리하여 바람직하기는 적은 소재에 어떻게 다양한 변화를 주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곡가는 이 상반된 2개의 힘 '변화'와 '통일'의 겨룸에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구체적인 구조(構造)에 어울리게 음()으 로 표현하는 것이다. 악식(음악의 형식)이라 함은 이 구조를 가장 큰 요소로 가지며, 음악작품에 하나의 형 태를 주고 있는 이념(理念)을 말한다고 정의(定議)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형태는 개성적일 수도 있고, 평 범할 수도 있으며, 아름다울 수도, 추할 수도 있다. 즉, 형식은 단순한 주형(鑄型)으로서의 구조만을 가리키 는 것이 아니고, 또한 구조만이 그 작품을 성공시키는 열쇠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악식에는 미학(美學)의 영역에 속하는 면과 구조상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형식은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것, 즉 한 작품의 도식(圖式)이라고 할 만한 구조에 한한다. 물론 각자의 작품이 다르듯이 그 구조도 천차만 별하여, 원칙적으로 아주 똑같은 구조는 있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소나타 형식은 제시부(提示部), 전개부(展 開部), 재제시부(再提示部)의 3부로 된다고 대별(大別)한 원칙을 보일 수는 있어도, 그 세부적인 구조에서 는 시대, 양식, 악기, 작곡가의 개성, 창의 등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실로 다양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것도 작곡가는 미리 정한 도식에 따라 작곡하는 것이 아니며, 구조는 자기의 내적 창조력의 욕구에 따라 창조되고 변경되기 때문이다. 즉, 작곡가는 형식(구조)을 작곡한다. 따라서 형식(구조)은 그 때마다 새 롭고 항상 1회에 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다른 형식간에도 공통하는 원리(또는 이념)는 존재하므 로, 베토벤리스트의 소나타를 비교해 보면, 또 베토벤 자신의 몇 개의 소나타를 살펴보면 위에서 말한 바는 충분히 명확해진다. 푸가소나타는 주제의 전개나 3부구조라는 아이디어를 공유(共有)하면서도 다 른 몇 가지 점에서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으므로, 우리는 많은 작품에서 푸가를 진정한 푸가로, 소나타를 소나타이게 하는 그 구조적 특징을 추출(抽出)하여 정리·분류하는 것이 가능하다.

055. 질료형상론

이데아(idea)로 해석할 수 있다.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등장하는 개념 중 하나이다. 그런 데 두 철학자가 에이도스(이데아)에 대해 가진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잘 구별해서 사용해야 한다. 참고 로 두 단어의 어원은 각각 '에이도(eido)'와 '이데인(idein)'인데, 둘 다 '보다(to see)'라는 의미이다.

주의할 점은 플라톤 철학에서 에이도스가 나왔다고 그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에이도스인 게 아니 다. P를 플라톤, A를 아리스토텔레스라 하면 'P에이도스=P이데아, A에이도스=A이데아'이지만, P에이도 스≠A에이도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P이데아도 A이데아와는 다르다. 기본적으로는 이음동의어인데 이 단어가 누구의 철학에서 쓰였냐에 따라 동음이의어란 말.

일반적으로 플라톤 철학에서는 주로 이데아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는 주로 에이도스라고 써서 구 분하는 듯하다.

먼저, 플라톤 철학에서 에이도스는 영혼의 눈(이성)으로만 볼 수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자세한 내 용은 이데아 항목을 보자. 이 에이도스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의 한 축을 이루며, 반대 개념으로는 현상이 있다(현상계↔이데아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에이도스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형상(form)을 말한다. 이 에이도 스에 대응하는 개념은 힐레(hyle,matter,질료)이다(반대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현실세계가 질료와 형 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주장을 질료형상론, 혹은 형상질료설이라고 한다.

질료형상론을 간단히 설명할 때 주로 사용되는 것이 인물 조각상의 예이다. 조각상에서 질료는 대리석이 고 형상(에이도스)은 인물의 형태이다. 즉 질료는 '가공해서 뭔가가 될 수 있는 것'이고, 형상은 가능태인 질료를 현실태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다시말해 질료형상론이란, 세계는 '1)질료가 형상을 실현하여 사물(=energeia,현실태)을 구성한다. 2)사물은 또다시 어떤 상위 사물의 질료가 된다. 3)반복' 이라는 시 스템에 의해 작동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사족을 달자면 '질료+형상=현실태'라기보다는 '질료→형상=현실태'에 가깝다. 질료는 형상(에이도스)를 실현한다는 목적을 가지는데 이 목적을 실현한 상태를 두고 현실태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힘이 작 용하여 점차적으로 형상을 실현해 가는 것이다.

하나 더 주의할 점은, 비록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식론적으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에이도스에 대한 두 철학자의 상이한 해석이 서로 상반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의 반 대 개념은 '현상'인데, '현상'은 에이도스라기보다는 그냥 사물에 가깝다. 플라톤이 에이도스를 인지해야 할 진리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에이도스는 질료에게 있어서 실현되어야 할 목적이라 고 보았다는 점에서는 같기 때문에 오히려 대조 대상보다는 비교 대상으로서 거론되는 편이다.

056. 모세

모세(히브리어: מֹשֶׁה)는 구약성서출애굽기(탈출기)부터 신명기에 나오는 예언자(預言者)이며, 이스 라엘 민족의 지도자이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위대한 예언자 중 하나다. '모세'는 이집트의 공주, 즉 파라오의 딸이 지어 준 이름이라고 한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애굽(이집트)의 총리 였던 요셉을 모르는 바로(파라오)가 즉위하자 바로는 당시 고센 땅에서만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엄청난 인구가 왕권을 위태하게 할까 두려워 이스라엘 백생들을 혹 독하게 부렸다. 그들은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과 밭일 등 온갖 고된 일을 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다. 한편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가 줄지 않자 히브리 산파(한 사람은 시브라였고 또 한 사람은 부아였다)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히브리 여인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에, 사타구니를 보고 아 들이거든 죽여버리고 딸이거든 살려두어라." 그러나 산파들은 파라오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사내아이 들을 살려주었고, 파라오가 그들을 꾸짖으면 '히브리 여인은 기운이 좋아 산파가 가기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린다.'며 둘러댔다. 그러자 파라오는 이집트의 군대에게"히브리인들이 계집아이를 낳으면 살려두되 사 내아이를 낳으면 모두 강물에 집어넣어라."라고 명령했다.(출애굽기 1:6-22) 이때 태어난 사람이 모세이 다. 모세는 어머니와 누나 미리암(후에 여자 예언자 즉, 여자 설교자가 된다.)의 기지로 겨우 살아남았다. 아기를 더 숨겨둘 수 없게 되자 갈대상자를 얻어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바르고 그 속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숲 속에 놓아두었는데, 마침 파라오의 딸이 강에 목욕하러 왔다. 공주는 아기를 보자 측은지심이 들 어 키우고자 했다. 숨어서 이 광경을 보던 누나 미리암의 제안으로 히브리인인 모세의 어미가 유모 일을 하게 되었다. 공주는 모세를 양자로 삼았고, 에서 건진 아이라는 뜻으로 모세라고 이름도 지어주었다. 40세가 된 모세는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심한 노역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감독을 죽였다. 이 후 이집 트와 가나안의 중간 지대인 미디안으로 피신한다. 망명자가 된 그는 미디안 종교의 사제인 이드로의 딸 과 결혼하여 살면서 이드로의 영향으로 종교 지도자로서의 소양을 익혔다. 그 실례로 소위 모세 5경이라 고 불리는 레위기를 보면 제사법 및 종교건축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저절로 이 타오르는 초자 연현상(엘모의 불)을 계기로 야훼를 만난 그는 민족을 구원하라는 명령에 따른다. 파라오가 노동력 손실 을 우려하여 해방요구를 거부하자 모세는 신의 계시를 받고 초자연적인 10가지 재앙을 일으켜 굴복시킨 다. 야훼의 도움으로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들은 갈대 바다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하며, 그들의 신과 모세 를 믿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모세는 불평불만이 심한 백성들과 논쟁을 벌이며, 광야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들 의 불평은 그치지 않았고, 그때마다 야훼는 만나 등을 내려주며 야훼 공동체가 실천해야 할 율례를 익히 게 하였다.[1]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는데, 모세가 해야 할 일은 민족을 구원하는 일이었지 가 나안 입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나안의 입성은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루어냈다.

출애굽(이집트 탈출)의 연대는 B.C 1446년설과 B.C. 1229년 두 가지가 있다. 성서고고학자들 중에 출애 굽기에 나오는 기적을 자연현상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고대 이집트가 암흑에 빠 져들었다는 9번째 재앙의 경우 당시 그리스의 산토리니 화산 분출로 인해 퍼진 화산재의 영향이라고 분 석한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은 40년간 사막을 여행했으며, 십계명야훼로부터 받았다. 물 론 모세가 받은 십계명은 처음부터 열 가지 계명으로 분류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기독교 교파마다 계명의 분류가 다르다. 루터교로마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십계명은 1계명과 2계명이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성 공회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은 분리되어 있다.

모세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기술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신명기 34장 에 그의 죽음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것 등을 이유로 모세오경의 모세저작설을 부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 러나 신명기 1장 1절은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밝혀 주는 암시가 있다. 문서설에 따르면 신명기의 원 저자는 모세이나, 모세가 죽은 후에 모세의 죽음에 대한 신명기의 기사를 모세의 후손들이 첨가했다고 본 다.

057. 샤를마뉴 대제

카롤루스 마그누스(라틴어: Carolus Magnus, 독일어: Karl der Große 카를 데어 그로세[*],
: Charlemagne 샬리메인[*], 프랑스어: Charlemagne 샤를마뉴[*], 스페인어: Carlomagno 카를로마뇨 [*], 740년 혹은 742년 4월 2일 또는 747년 ~ 814년 1월 28일)는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2대 국왕 이다. "마그누스"는 "위대하다"는 뜻이다. 그 생전 이름은 Karulus이고, 칭호는 Korolus magunus이다. 카롤루스 대신 샤를마뉴라고 불리기도 한다.

카롤루스는 서부, 중부유럽 대부분을 차지해 프랑크 왕국을 크게 확장했다. 재임하는 동안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800년 12월 교황 레오 3세에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와 반대되는 서로마 제국 황제직을 수여 받았으며, 황제가 되고서 교회 통해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국내외적인 카롤루스의 업적은 서유럽과 중세시대를 정의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프랑스, 독일, 이탈리 아, 신성 로마 제국 등 재임연표에서 샤를 1세 또는 카를 1세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피핀의 뒤를 이어 동생인 카를로만과 함께 왕국을 통치하였으나 후에 사이 나빠지자 전쟁의 위기 가 닥쳤으나 카를로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고비를 넘겼다. 프랑크 왕국을 위협하던 사라센과 전쟁을 일 으키던 중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서 언급되었던 론세스바예스 전투(779년)에서 끔찍한 패배를 겪기도 하 였으나 교황의 보호자가 된다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속 시행해 나아갔다. 778년부터 802년까지는 이베리 아 반도의 사라센인들을 격퇴하였다. 또한 롬바르드 왕국, 사라센과의 장기전쟁을 끝낸 후 유럽 동쪽에 사는 민족 중 특히 작센족을 778년부터 800년대까지 수시로 원정, 굴복시켜 가톨릭교로 개종시킨 후 자 신의 영토로 이주시켜 훗날 오토 왕조 출발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카롤루스는 프랑스, 독일 군주의 시초 인물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이후 최초로 대부분의 서유럽 을 정복하여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 시켰으며 또한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현재 유럽의 정체성에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유럽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사후 그는 '대제'로 번역되는 마그누스(라틴어) 또는 마 뉴(프랑스어)의 칭호를 얻었으며,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카롤루스 대제 또는 샤를마뉴(라틴 어 이름 카롤루스의 프랑스어 발음), 카를(카롤루스의 영어, 독일 발음)이라고 불린다. 또한, 독일에서는 카를 대제라고 부른다.

 

05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롬비아 마그달레나 주의 작은 도시 아라카타카에서 태어나 그의 부모가 바랑키야로 이주하게 되자, 어 린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조부모에 맡겼다.
그의 문학 세계는 어린 시절 조부모에게 받은 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바랑키야에서 부모와 함께 살면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12세에 중고등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여 18세까지 공부했다. 그 후 수도 보고타카르타헤나 대학교에서 법률과 언론학을 공부했다.

학업을 마친 후 기자가 되어 유럽 특파원으로 일했고, 그 후 멕시코에서 창작 활동을 했다. 쿠바 혁명 이 후에는 쿠바에 거주하면서 쿠바 통신사의 외국 특파원으로 근무했다. 이탈리아 로마, 미국 뉴욕, 프랑
스 파리
,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쿠바 아바나 특파원을 지내면서 작품을 썼다.
생애의 대부분을
멕시코 멕시코시티유럽에서 보냈다. 그는 마술적 사실주의를 전 세계에 소개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며, 그의 작품은 문학적 성취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많은 문학 평론 가들은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일컬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아르호 카르펜티에르, 카를로스 푸엔테 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훌리오 코르타사르와 함께 20세기 남미의 위대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며 또한 그를 콜롬비아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라고 일컫게 한 《백년 동안의 고독》 은 마콘도(Macondo)라는 가공의 땅을 무대로 하여 부엔디아 일족의 역사를 그린 작품이며, 1982년 노 벨 문학상 수상에 영향을 주었다. 1981년에는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가 라틴아메리카에서만 200만 부 이상 팔렸으며, 1982년 라틴아메리카 현대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1995년 《사랑과 또다른 악마들에 관하여》의 프랑스어판을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하였다. 2014년 4월 17일 멕시코 멕시코시티에서 향년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059. 르네상스 미술

르네상스(프랑스어: Renaissance, 영어: Renaissance, 이탈리아어: Rinascimento[1]) 또는 문예 부흥(文 藝復興), 학예 부흥(學藝復興)은 유럽 문명사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일어난 문예 부흥 또는 문화 혁신 운동을 말한다. 과학 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져 중세근세와 이어주는 시기가 되었다. 여기서 문예 부흥이란 구체적으로 14세기에서 시작하여 16세기 말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옛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 중심(人間中心)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였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는 일종의 시대적 정신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유럽은 르네상스의 시작과 더불어 기나긴 중세시대의 막을 내렸으며, 동시에 르네상 스를 거쳐서 근세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정신, 혹은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비롯되었으며, 얼마안가 알프스를 넘어 유럽의 다른 국가, 즉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페인 등지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은 이 운동에 거의 영향을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세기 초 이 운동의 인문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의 원동력이 되어 교회 개혁과 학문적 방법에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이슬람 세계, 비잔틴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하여 서유럽과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11세기 이후 상업의 발달과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도시의 활성화로 도시는 점차 도시국가 형태의 자치도 시가 되었다. 13세기 말의 경제성장기에는 사회계층의 변화가 심해져서 특유의 시민문화가 형성되었는 데 도시국가는 그 특성상 고대의 도시국가와 유사한 점도 있어 로마법이나 정치제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 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초기 르네상스를 제현인물로 피렌체 출신의 '단테'가 있다. 그는 정적에 의해 추방당해 유랑생활을 하던 중 대표작인 '신곡'을 완성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지옥, 연옥의 안내인으로 등장시키는데, 영 혼의 정화를 통해 천국으로 승천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고전문학과 가톨릭을 조화시켜 대 서사시를 그려 내었다.

단테보다 후대 사람인 페트라르카는 로마 제국 시대에 인간이 최고의 것을 성취했고 그 이후 점차 부패 하여 중세 암흑시대까지 이르렀다고 보았다. 그는 역사를 종교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진보로 간주했으므로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유산을 재발견하여 "재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전문헌을 모으고 라틴어로 시와 책을 쓰다가 이런식으로 고전 교양을 모아 인간의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사색하는 방식을 '인문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속어로 책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온고지신적인 태도는 이후의 예술, 과학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페트라르카는 '리비우스'의 역사와 '키케로' 의 도덕철학에 관심을 보였고 최초의 인문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화에서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조토'이다. 그는 시공간을 다룸에 있어 고대의 스타일 을 원용하였다. 법률에 있어서는 '볼로냐 대학'을 중심으로 '로마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는데 그 체계화 를 이룬 사람은 '바르톨루스'다.

이러한 움직임은 1348년의 흑사병과 각종 정치적인 격변으로 더이상 꽃피지 못했다. 이러한 인문주의 가 다시 꽃피게 되는 것은 15세기가 되어서였다.

르네상스의 시작점을 오스만투르크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1453년)에서 찾는 관점도 있다. 그것은 대포와 화약이 전쟁의 중심으로 들어온 전환점이 된 전쟁이었고 비잔티움 제국, 그리스 학자들은 그리스 로마의 문헌들을 가지고 로마로 도망쳤다. 이들은 이탈리아에 새로운 에너지를 주었으며 유럽의 오래된 종교적 질서가 붕괴되는 것에 일조하였다.

060. 멘델의 유전학

멘델의 유전법칙(영어: Mendelian inheritance)은 그레고어 멘델완두콩을 이용한 7년의 실험을 정 리하여 1865년에서 1866년 사이에 발표한 유전학의 법칙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발표 초기 그리 큰 관심을 받지 않았으나 20세기 초 재발견된 후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915년 토머스 헌트 모건보 페리-서튼 유전자 이론과 함께 멘델의 유전법칙을 유전학의 기본적인 법칙으로 제시하였고, 이로써 고 전 유전학이 완성되었다.

법칙의 도출
우열의 원리
순종의 대립 형질끼리 교배시켰을 때 잡종 제 1대(F1)에서 우성 형질만 발현한다. 원래 '우열의 법칙'으 로 불렸으나, '우열의 법칙'이라고 하기에는 어긋나는 예가 많아 '우열의 원리'로 정정되었다.

분리의 법칙
우성만이 발현된 잡종 제1대(F1)를 자화 수분하여 얻은 잡종 제 2대(F2)에서
14의 확률로 열성이 분리 된다.

독립의 법칙
멘델이 선택한 7가지 대립형질 중 두 쌍 이상의 대립 형질이 유전되는 경우, 각각의 형질은 서로에게 영 향을 미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발현한다.

법칙의 수정

불완전 우성(중간유전)
완두콩이 아닌 다른 식물의 경우 붉은 꽃과 흰 꽃의 잡종 1세대가 분홍색 꽃으로 발현하고 잡종 2세대 에서 붉은 꽃, 분홍 꽃, 흰 꽃이 1:2:1로 발현하여 어느 한 쪽 형질이 완전한 우성을 보이지 못하는 경우 가 있다. 이를 불완전 우성이라 한다. 불완전 우성의 경우에도 유전형의 전달은 여전히 멘델의 법칙을 따른다.

유전자 연관
여러 유전자가 연관되어 유전형이 발현될 경우에는 독립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 양적 형질 위 치를 보이는 사람의 피부색과 같은 유전 형질은 수 많은 유전자가 연관되어 발현하기 때문에 독립의 법 칙이 지켜지지 않는다.

중간 유전
대립 형질의 유전자 사이의 우열 관계가 불완전하여 유전자형이 잡종일 경우 중간 형질이 나타난다. 이 때, 대립 유전자 사이의 우열 관계가 불완전하여 우열의 법칙에 어긋나고, 잡종 제 2대에서 유전자형과 표현형의 분리비가 일치한다.

예를 들어, 분꽃의 꽃 색깔의 경우, 붉은색 분꽃의 유전자형을 RR이라 하고 흰색 분꽃의 유전자형을 WW 라 할 때, 이들의 생식 세포의 유전자형은 각각 R과 W가 된다. 이 두 생식 세포가 결합하여 생긴 잡종 제 1대(F1)의 유전자형은 RW(잡종)이며, 분홍색으로 표현된다. 또한, 잡종 제 1대의 생식 세포인 R,W 를 사화 수분시키면 잡종 제 2대(F2)에서 붉은색(RR):분홍색(RW):흰색(WW)=1:2:1로 나타난다.

현대 유전학에서 멘델의 유전법칙은 유성생식 과정에서 일어나는 염색체감수분열 결과로 이해 된 다. 즉, 평소 염색체는 2배체를 이루며 잡종 1세대에서 우성과 열성의 유전자는 각자 염색체 쌍을 이루 고 있어 우성만이 발현된다. 그러나 생식세포는 감수분열로 인해 우성과 열성 가운데 한 가지의 유전자 만으로 구성되며, 이것이 배우자와 다시 합쳐 잡종 2세대가 발생하기 때문에 위에서 살핀 우열의 법칙 과 분리의 법칙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061. 안토니오 비발디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이탈리아어: Antonio Lucio Vivaldi, 문화어: 안또니오 비발디, 1678년 3월 4 일 ~ 1741년 7월 28일)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성직자,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가이다. ‘붉은 머리의 사제’(司祭, il Prete Rosso)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음악가로서 대중화를 시도한 인물 중의 하나이 기도 하다. 4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된 《사계》의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붉은 머리라서 평생 붉 은 머리의 신부라는 조롱과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체력이 좋지 않았던 그는 미사보다는 작곡이나 성가대 업무를 주로 보았다.
그의 작품은
오페라와 여러 곡의 교회 음악과 기악곡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바이올린을 주로 한 협주곡 이 유명하며, 그 때까지의 악곡에 비하여 리듬이 활발하고 노래하듯 아름다운 선율이 특징이다. 그의 작 품은 독일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바흐는 그의 작품을 건반악기 연주용으로 편곡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신포니아 23곡, 합주 협주곡 <조화의 영감>,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사계> 등이 있 다. 특히 <사계>는 표제 음악의 표본으로 불린다. 그는 약 500곡이나 되는 기악작품, 약 40곡의 오페라 외 에 모테토,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을 작곡했다. 작곡은 처음에는 베네치아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으 나 대부분은 수고(手稿) 형태 외엔 남아 있지 않다. 비발디는 무엇보다 우선 토렐리(1658년~1709년), 알 비노니(1671년~1750년)들에 의하여 개발된 독주 콘체르토의 세계에서 안정된 양식을 확립시킨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 복수(複數)의 독주악기로 하는 콘체르토도 수없이 썼으나 이것은 대개 빠르게-느 리게-빠르게의 3악장으로 되었으며 전합주와 독주가 교대하는 리토르넬로 형식으로 했다.

 

062. 논리학

논리학(論理學, 문화어: 론리학, logic)은 '논리' 및 그것과 관련된 구성과 원리들을 분석하고 체계화하는 학문이다. 타당한 논증, 곧 추론증명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일반적으로는 논증의 학문이라고 정의된다. 판단·추리·개념 등과 관련하여 올바른 명제를 전제로하는 '타당한 추론(推論)의 형식'(Valid form of inference)에 관한 인문 과학이라고도 한다. 흔히 철학의 한 분과로 분류되나, 형식적 논리학은 수 학기초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한편 라이프니츠는 '모든 과학들이 공리들을 규명할때 그러한 사용에 서 그리고 그러한 원칙에서의 논리학의 당위적인 역할'이라는 맥락의 서술을 한바있다.

형식 체계를 중심에 두지 않는 논리학을 흔히 비형식 논리학으로 부르는데, 여기서는 추리 형식의 타당 성뿐만 아니라 판단이나 개념의 내용이 진리인 것 같은 인식을 얻기 위한 사고의 경로나 그 형태를 연구 한다. 예로부터 뛰어난 철학자들은 자기의 철학적 인식을 올바른 것으로 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 역적 논리학 대신 모두 제각기의 입장에서 특징있는 인식론적 논리학을 설정했다. 베이컨귀납적 논리 학, 칸트선험적 논리학, 헤겔이나 마르크스변증법적 논리학, 듀이실험적 논리학 등이 그 대표적 인 경우이다.

사리에 맞는 합리적인 사고로 그 내용을 올바르게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반드시 그래야 하는 사고의 규범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데, 심리학도 사고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나 심리학이 사고를 하는 원인에 초 점을 두는 것이고 논리학이 사고 과정 자체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둘은 구별된다.
형식 논리학은 개개의 판단이나 개념의 내용에 상관없이 추리의 형식상 타당성만을 문제로 삼는다. 형식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전논리학이 있으며 현대의 형식논리학은 흔히 수리논리학(기호 논리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며, 현대 수학의 근간을 이루는 수학기초론을 구성하기도 한다.

한편 올바른 추론의 절차에서 '올바르다'는 의미는 연역적 추론에서는 '타당성'이 성립한 경우를 그리
귀납 논리학에서는 '귀납적으로 강한' 추론을 가리킨다. 특히 '귀납적으로 강하다'는 의미는 '전제를 제 시하고 그 전제로부터 나오는 결론이 성립되는 확률이 1'에 가까워지는 추론을 말한다. 또한 타당한 추론 은 논리적으로 전제들이 제시되면 그 전체들로 부터 나오는 결론과 상관없이 추론의 타당성을 판별할 수 있는데 이를 '타당한' 추론형식이라고 부른다.

063. 다윗왕

다윗 왕(영어: David, 히브리어: ָוִדדּ, 아랍어: داود)(생애기간 : 기원전 1107년 - 기원전 1037년)은 이 스라엘 왕국의 제 2대 왕으로서 40년 간(기원전 1077년 - 기원전 1037년) 통치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유 다 지파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목동, 음악가, 시인, 군인 ,정치가, 예언자, 왕이었으며, 히 브리어 성경(구약성경)에서 매우 탁월하게 두드러져 언급되고 있는 사람이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 를 다윗 왕가의 자손으로 언급하고 있다.

다윗은 목동이었던 청소년 시절, 이스라엘이 적국인 블레셋 나라와 대치하고 있던 전쟁 중에 이스라엘 을 조롱하던 블레셋 군대의 거인 장수인 골리앗을 자신의 무릿매 돌로 이마를 정통으로 맞춰 쓰러뜨려 죽였고 결국 다윗의 공헌으로 이스라엘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왕이었던 사울은 다윗을 신임하게 되었고 다윗의 음악 연주 실력을 인정하여 자주 그의 연주를 들 었다. 그 후 다윗은 군인으로서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백성들이 "사울은 전쟁에서 천 명을, 다윗은 만명을 죽였다네"라며 다윗의 전쟁에서의 업적을 더 칭송하자,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기 시 작하였으며 죽이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다. 결국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지만, 그의 지지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사울 왕의 뒤를 이어 기원전 1077년 30세의 나이에 유다 지파의 왕좌에 먼저 올랐고 기원전 1070년에는 통일된 온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었다. 망명시기에 다윗은 민중들의 존경 을 받아서 아둘람에 사회에서 소외된 민중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유다 지파의 왕이 된 때부터 계산하여 총 40년 간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출애굽 이후 약 400년
간 정복하지 못한
시온성과 예루살렘 주변을 정복하였다. 그는 생애 거의 전체를 통해 이스라엘에 주어 진 여호와의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종교적으로 나라를 단합시켰으며, 그의 통치 기간 중 이스라엘 나 라는 큰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성경에는 다윗의 죄와 실수들도 언급하고 있다. 예로서 자신이 왕이었던 때에, 전쟁터에 나가 있 던 우리아라는 군인의 아내 밧세바를 겁간(劫姦)하였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적 군에게 죽도록 조치하여 심각한 를 범한 일이 있었다. 성경에는 하나님(야훼)이 예언자 나단을 통해 그의 죄를 밝히자,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빌었으므로, 하나님은 다윗이 죽임을 당하지는 않도록 자비를 베풀었지만, 그로 인해 다윗의 집안에 재난이 닥칠 것이며 하나님이 막아주지는 않을 것임을 선 언했다.

아들이었던 압살롬헤브론에서 반란을 일으켜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을 모사로 삼고 예루살렘으 로 진격하여 다윗이 죽을 뻔 했으나, 전열을 가다듬고 요압을 앞세워 승리하게 된다.

다윗은 자신의 나머지 생애 동안은 계속 하나님과 국민들을 위해 봉사하였으며, 하나님을 위한 성전 건 축을 위해 토지를 마련하고 건축 설계를 하고 많은 자금과 건축 재료들을 모아 아들 솔로몬에게로 넘겨 주었다. 기원전 1037년에 아들 솔로몬이 공식적으로 왕권을 이어 받았고 성전은 솔로몬 통치중에 건축 되었다. 또한 성경 기록에는 다윗 왕가를 통해 모든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출현할 것이라는 기록이 나 온다.

  •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제 2대 왕이었으며 40년 간 통치하였다.
  • 다윗은 음악과 시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서 자신이 직접 많은 노래를 작사, 작곡하였으며 많은 시도 남겼다. 그의 노래와 시 일부는 히브리어 성경시편에 기록되어 남아 있다.
  • 성경에 포함된 책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라고 알려진 시편을 기록하였다.
  • 4000명의 대규모 합창단과 합주단을 조직하였고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사람 288명을 두었다.
  • 이스라엘 왕국에서 여호와에 대한 숭배를 위해 백성들을 연합시키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쳐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 이스라엘 왕국에서 숭배 중심지가 된 예루살렘의 거대한 성전 건축을 위한 터전을 닦았다.

064. 마그나 카르타

마그나 카르타 혹은 대헌장(라틴어: Magna Carta, Magna Carta Libertatum, 영어: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은 1215년 6월 15일에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하여 서명한 문서로, 국왕의 권 리를 문서로 명시한 것이다. 왕에게 몇 가지 권리를 포기하고, 법적 절차를 존중하며, 왕의 의지가 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문서화하기 시작 하여 전제 군주의 절대 권력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흔히 영국 민주주의 의 시발점으로 강조되는 것과 달리, 문서 자체에 민주주의적 요소는 없다. 이 문서에서 민주주의의 시사 점은 후대에 국왕과 대립이 발생했을 때 계속 확대 해석된 것이다.

본래는 귀족의 권리를 재확인한 봉건적 문서였으나, 17세기에 이르러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왕의 전제 (Autocratic)에 대항하여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최대의 전거(Authority)로서 이용되었다. 특히 일 반 평의회의 승인 없이 군역대납금(Scutage) ·공과금을 부과하지 못한다고 정한 제12조는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서, 또 자유인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 의한 재판이나 국법에 의 하지 않으면 체포 ·감금할 수 없다고 정한 제39조는 보통법재판소에서의 재판요구의 근거로서 크게 이용 되어 금과옥조(Golden section)가 되었다.

이와 같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투쟁의 역사 속에서 항상 생각하게 되고 인용되는 가장 중요하 고 기본적인 문서로서 영국의 헌정뿐만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되었다.

마그나 카르타로 인해 왕의 권한은 크게 줄어들었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권리는 크게 늘었다. 이는 곧 의 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마그나 카르타는 원래 고위 귀족신분만을 위한 문서였으나 후대에 가서는 부르 주아 시민들에 대한 것으로 확대 해석되었다. 특히 12조에서의 왕의 과세권 제한 내용은 이후에 발생한 권 리 청원, 권리 장전 등의 영국 부르주아혁명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고, 영국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것 으로 평가된다.

다음은 마그나 카르타의 주요 조항 중 일부이다.

  • 제12조 오래된 관습상 인정되어 온 것(관례로 굳어진 것) 외의 과세 혹은 봉건 지원금은 귀족들의 자문을 거치지 않으면 부과할 수 없다. 다만 왕이 인질이 되었을 때의 협상금, 왕의 아들이 기사가 될 때 필요한 비용, 왕의 장녀의 혼인에 필요한 비용 등은 예외로 한다.
  • 제21조 대귀족은 동료 귀족에 의해서만 처벌될 수 있다. 그러나 큰 죄목(반역죄 등)일 경우로만 제한한다.
  • 제39조 자유민은 동등한 신분을 가진 자에 의한 합법적 재판 혹은 국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 감금, 추방, 재산의 몰수 또는 어떠한 방식의 고통도 받지 않는다.

조약의 내용들로 알 수 있듯이 대헌장은 오직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봉건 제후의 권리만을 보장하는 문 서였다. 또한 이 문서에서의 자유민이란 성직자, 귀족, 자유 시민(거주와 이주의 자유가 있는 평민)을 뜻 한다.

 

065. 오지만디아스

오지만디아스(Ozymandias)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가 창작한 소네 트(sonnet)이다. 1818년 1월 11일 런던의 이그재미너(Examiner)지에 처음 발표되었다.

제목 오지만디아스(Ozymandias)는 고대 이집트 제19왕조 제3대 파라오 람세스 2세의 그리스어 명칭에서 기원했다.

나는 고대의 나라에서 온 여행자를 만난 적이 있네. 그가 말하길 '돌로 되어 거대하지만 몸통은 없던 두 다리 사막에 서 있었네.

근처 모래 위에는
반쯤 묻힌 깨진 두상이 누워있었는데, 그 표정이 찌푸려져 있고, 주름진 입술엔 독선의 냉소가 감돌고 있었기에,

조각가에게 말하길 "왕의 정열을 잘 읽었구나.
그것을 조각한 조각가의 손과 그것에 생명력을 부여하던 왕의 심장을 뛰어넘어 생명없는 물체 위에 각인된 채로 살아남았소."

그리고 받침대 위에는 이런 글들이 적혀있었네-
"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 중의 왕
너희 강대한 자들아, 나의 위업을 보라, 그리고 절망하라!"

그 옆엔 아무것도 없었네. 뭉툭하게 삭아버린
그 엄청난 잔해의 주위로, 끝이 없고 황량하며, 외롭고 평탄한 모래 벌판이 멀리까지 뻗어 있었네.'

1818년 발표한 셜리의 ‘오지만디아스’는 르네상스 시대에 페트라르카 스타일의 엄격한 14행 운문 형식의 소네트이다. 시적 화자는 지금은 부서지고 넘어져 사막에 누워 있는 한때 위대했던 왕의 동상에 대해 자신 이 들은 이야기를 한다.

세속적인 정치권력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가치가 있음을 암시한다.

066. 비너스의 탄생

[[파일:Birth of Venus detail.jpg|섬네일넛비너스의 탄생 확대본. 비너스의 탄생(이탈리아어: La nascita di Venere) 또는 비너스의 탄생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화가인 산드로 보티첼리의 대표적인 그 림 가운데 하나로 이탈리아 피렌체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로마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 하는 여신인 비너스가 성숙한 여성의 모습으로 바다에서 탄생하면서 해안에 상륙하는 내용을 묘사한 그 림이다.

비너스의 탄생은 1483년경 보티첼리가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세스코 데 메디치의 카스텔로 별장을 장식 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되지만 몇몇 학자들은 피에르프란세스코가 보티첼리에게 비너스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릴 것을 제안했고 조르조 바사리가 그 외의 그림들을 현재까지 피렌체에 전시해 놓은 것으 로 본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이 그림이 줄리아노 데 메디치 (1478년 파치 가의 음모로 암살됨.)의 연인이
포르토베네레 출신의 미인이었던 시모네타 베스푸치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한 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달력" 그리고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시편"은 보티첼리에게 영감을 주 는 데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고전적인 여신 비너스는 물 위에 떠 있는 조가비에서 나온 채로 정신적인 사랑의 상징인 제피로스(서풍) 가 부는 바람을 타고 해안에 상륙하고 있으며 계절의 여신인 호라이의 한 명이 꽃에 덮인 외투를 비너스 에게 건네주고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파엘로와 같은 르네상스 화가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엄격한 고전적 사실주의와 차이를 두고 있다. 비너스의 목은 비현실적으로 길고 왼쪽 어깨의 기 울기는 해부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각도를 하고 있는데 이는 작품의 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067. 표면 장력과 수소 결합

표면장력(表面張力, 문화어: 겉면켕김힘)은 액체의 표면이 스스로 수축하여 되도록 작은 면적을 취하려는 힘의 성질을 말하며 계면장력의 일종이다. 소금쟁이과와 같은 곤충위에 걸을 수 있게 도와 주는 것도 이 속성에서 비롯한다. 또 다른 예로 바늘 등의 금속 물질, 면도 칼날, 포일 조각과 같은 조그마한 물체들이 물 표면 위에 뜨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모세관 현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분자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따라 분자가 서로 접촉하여 응축하려고 하며, 이 결과 표면적이 적은 원모양이 되려고 한다. 물방울이나 비눗방울이 둥글게 되는 것도 이 원리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표면장력은 온도가 오르면 낮아진다. 온도가 오르면 분자 운동이 활발하게 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또, 불순물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표면장력은 측정기를 통해 측정할 수 있다. 또, 액체의 물리적, 화학적 작용은 표면 장력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가 불가능하다.

수은 > 물 > 비눗물 > 에탄올 순으로 표면 장력이 크다. 비누나 합성 세제와 같은 계면활성제는 물에 녹아서 물의 표면 장력을 감소시킨다. 표면장력이 클수록 분자 간의 인력이 강하기 때문에 증발하는 데 많은 시간 이 걸린다.
화학에서 수소 결합(水素結合)은 N(질소), O(산소), F(플루오린) 등 전기 음성도가 강하고 크기가 작은 2주 기 원소수소를 갖는 분자가 이웃한 분자수소 원자 사이에서 생기는 정전기적인력으로 일종의 분자간 인력(분자 사이에 끌어당기는 힘)이다. 수소 결합을 하는 물질은 그 상호작용의 세기가 수소결합을 하지 않 는 분자보다 매우 강하여 분자량이 비슷한 다른 분자들에 비해 녹는점과 끓는점이 높고, 융해열과 기화열이 크다는 성질이 있다.

수소 결합은 분자 내에서 일어나는 원자간의 화학결합이 아니라 분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인력에 의한 결합 으로, 분산력 , 쌍극자-쌍극자 힘, 쌍극자- 유발 쌍극자힘과 같은 분자간 상호작용 보다 훨씬 강해 수소'결 합' 이라고 부르지만, 이온결합, 공유결합과 같은 결합보다는 훨씬 약하다.따라서 이온결합,공유결합에 비 해 등의 외적 요인으로도 쉽게 분리될 수 있다.

수소 결합을 하는 물질은 분자내 쌍극자 모멘트가 발생하는 극성 분자로 에 잘 녹는다. 물(H2O)과 수소 결합을 하여 용매와 용질 사이의 인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에서의 수소 결합은 H-O-H···O-2H 형태로 나타난다.
분자에서 2개의 수소 원자가 부분적으로 (+)전하를 띠고, 산소 원자가 (-)전하를 띠어서 굽은형 구조

나타낸다. 이때 물은 극성을 띠게 되는데, 이런 극성 때문에 (+)전하를 띠는 수소 원자와 (-)전하를 띠는 산 소 원자 사이에 강한 정전기적 인력이 생겨서 결합이 형성된다.

이 때 물 분자 사이에 생긴 수소 결합의 결합력(인력)은 다른 분자들의 결합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하다. 따라서 물 분자 사이에 생긴 수소 결합의 강한 인력을 끊기 위해서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따라서 같은 양 의 에너지를 가할 때 다른 물질에 비해 온도가 쉽게 올라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끓는점어는점이 높아 진다.

또한 수소 결합으로 인해 물에 많은 양의 을 담을 수 있기 때문에, 비열열용량도 커진다. 이 현상이 지 구 생태계를 유지시키며, 바닷가에서 해풍육풍을 발생시키는 역할을 한다. 바다는 육지보다 비열이 커 서 쉽게 가열되거나 냉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낮에는 육지 쪽이 빨리 가열되므로 공기가 상승한다. 그 자리 를 메우기 위해서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공기가 이동하므로 해풍이 분다. 밤에는 육지 쪽이 빨리 냉각되므 로 상대적으로 온도가 높은 바다 쪽의 공기가 상승한다.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공 기가 이동하므로 육풍이 분다.

순수한 물이 얼어버릴 때, 물의 수소 결합으로 인해 얼음은 빈 공간이 많은 육각고리 모양결정을 형성하 게 된다. 이때문에 얼음이 되면 부피는 증가하고 밀도는 감소한다. (일반적으로는 다른 물질들은 액체 상태 물질의 밀도보다 고체 상태의 물질의 밀도가 훨씬 크다) 이런 현상 때문에 영하의 기후에서 호수의 물고기 들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수소 결합에 의해 분자 간의 강한 인력 때문에, 물의 표면 장력도 크다. 예로, 모세관 현상이 물의 수소결합으로 인해 나타나는 강한 표면장력에 의한 대표적 현상이다.

068. 비발디의 사계

《사계》(四季, 이탈리아어: Le quattro stagioni)는 이탈리아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1725년에 작 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작품 번호는 Opus 8, No. 1-4이다. 비발디의 바이올린 1235 협주곡 중에 가장 유명한 곡으로서 또한 가장 사랑받는 바로크 음악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곡은 본래 열두 곡이 포함된 《화 성과 창의의 시도》의 일부분으로 출판되었으나, 사계절을 묘사한 첫 네 곡이 자주 연주되면서 현재와 같 이 따로 분리되어 사계로 불리게 되었다. 각 곡은 3악장으로 되어 있고, 빠른 악장들 사이에 느린 악장이 하나씩 끼어져 있다. 곡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제목이 붙인다. 사계를 구성하는 네 개의 협주 곡은 각 계절을 잘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겨울"은 어둡고 우울한 반면에 "여름"의 1악장은 천둥번개를 떠오르게 한다. 사계에는 작가를 알 수 없는 짧은 시(소네트)가 계절마다 붙어 있으며 그것이 곡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 소네트를 비발디 자신이 썼다는 이론도 있다.

소네트의 번역은 아래와 같다.

제1악장. 따뜻한 봄이 왔다. 새들은 즐겁게 아침을 노래하고 시냇물은 부드럽게 속삭이며 흐른다. 갑자기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와 번개가 소란을 피운다. 어느 덧 구름은 걷히고 다시 아늑한 봄의 분위기 속에 노래가 시작된다.
제2악장. 파란 목장에는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목동들이 졸고있다. 한가하고 나른한 풍경이 다.

제3악장. 아름다운 물의 요정이 나타나 양치기가 부르는 피리소리에 맞춰 해맑은 봄 하늘

아래에서 즐겁게 춤춘다.

여름

제1악장. 뜨거운 여름이 다가오면 타는 듯 뜨거운 태양아래 사람도 양도 모두 지쳐버린다. 느닷없이 북풍이 휘몰아치고 둘레는 불안에 휩싸인다.
제2악장. 요란한 더위에 겁을 먹은 양치기들은 어쩔 줄 모르며 시원한 옷을 입으면서 따뜻 한 음식을 먹는다.

제3악장. 하늘을 두쪽으로 가르는 무서운 번갯불. 그 뒤를 우레소리가 따르면 우박이 쏟아

진다. 잘 익어가는 곡식이 회초리를 맞은 듯 쓰러진다.

가을

제1악장. 농부들이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나누며 술과 춤 잔치를 벌인다.
제2악장. 노래와 춤이 끝난 뒤 시원한 가을밤이 찾아들어 마을사람은 느긋한 마음으로 잠자 리에 든다.
제3악장. 이윽고 동이 트면 사냥꾼들이 엽총과 뿔피리를 들고 개를 거느린 채 사냥을 떠나 짐승을 뒤쫓는다.

겨울 

제1악장. 얼어붙을 듯이 차가운 겨울. 산과 들은 눈으로 뒤덮이고 바람은 나뭇가지를 잡아 흔든다. 이빨이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추위가 극심하며 따뜻한 옷을 입으면서 시원한 음식을 먹는다.
제2악장. 그러나 집안의 난롯가는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로 가득차 있다. 밖에는 차가 운 비가 내리고 있다.

제3악장. 꽁꽁 얼어붙은 길을 조심스레 걸어간다. 미끄러지면 다시 일어나 걸어간다. 바람 이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겨울이다. 그렇지만 겨울은 기쁨을 실어 다 준다.

이 소네트와 더불어, 비발디는 "멍멍 짖는 개"(봄의 2악장 중), "햇살로 인한 나른함"(여름의 1악장 중), "잠 에 빠진 술고래"(가을의 2악장 중)와 같이 곡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지시사항으로 제공하였다. 결국 사계는 음시(tone-poem)이자 표제음악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069. 스토아학파

스토아 학파는 그리스 로마 철학의 한 학파이다. 스토아(στοά)란 원래 전방을 기둥으로, 후방을 벽으로 둘러싼 고대 그리스 여러 도시에 있어서의 일종의 공공건축(公共建築)을 의미하는데 이 학파의 창시자 제 논아테네의 한 '주랑(柱廊)'(스토아)에서 강의를 한 데서 연유하여 이 말이 학파 전체를 나타내는 명칭으 로 쓰이게 되었다.

이 학파는 통상 역사적으로 3기로 구분되어 기원전 3세기를 '고() 스토아' 시기(제논, 클레안테스, 크리시 포스), 기원전 2~1세기를 '중기스토아' 시기(파나이티오스, 포세이도니오스), 기원후 1~2세기를 '후기 스 토아' 시기(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부른다.

지리적으로 고찰한 경우 고스토아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중기 이후는 주로 로마로 활동무대를 옮 기고 있다. 또 파나이티오스를 제외하고 이 학파에는 순수한 그리스인이 없고, 대부분 소아시아의 신흥무 역도시 출신의 셈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의 출신계층과 직업도 상인의 자제 ·고학생·노예·황제와 같이 잡다했다.

스토아는 하나의 핵을 중심으로 형성·계승되어 고정된 사상체계는 아니다.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사 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고 내용은 다양성을 갖고 있다. 스토아파 사람들은 학문을 우주의 구성·생성을 주 된 대상으로 하는 '자연학'과 '논리학'·'윤리학'의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3개 부문은 각각 독립하 고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을 매개로 하여 상호 관련되어 자연학에서 윤리학에 이르는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 다만 사람과 시대에 따라 초점의 추이는 엿보여 고스토아에서 후기로 넘어감에 따라 윤리학에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스토아 사상은 윤리학 면에서는 주로 키니코스 학파의 계보를 쫓고, 자연학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갖가지 요소가 혼재하며 절충되어 있어 선행하는 특정 학파와 관련짓 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다만 이 학파의 사람들에게서 지배적인 현상은 외적 권위나 세속적인 것을 거부하 고 금욕과 극기의 태도를 갖고자 하는 것인데, 실천적 경향과 유물론적 일원론은 각각 키니코스 학파와 헤 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은 흔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살던 시대가 이전과 같이 좁은 특 정의 폴리스(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동·서 양세계에 걸친 지배 권의 확립이나 로마 제국의 성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생활 공간이 확대된 시대이며, 또한 정치적으로 도 과도기이던 사실에 기인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시대에 개인은 생존 근거를 추상적인 공론이나 정치적· 사회적 현실 중에서가 아니라 자기의 의지라든가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사실 중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스토아의 근본 특징은 이 세계(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체이며, 어떤 불과 같이 미세한 물질로 구성 되어 있다고 하는 자연학에 있다. 신 조차도 예외는 될 수 없이 인간이나 그것을 둘러싸는 자연과 마찬가지 로 물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만물은 이 근원적부터의 생성과 그 곳으로의 환귀의 과정을 반복하도록 결정지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물체로서의 신이 마치 봉밀이 벌집 속으로 번져나가듯이 우주 만 물을 관철하여 순환하는 것이 섭리이며, 인간의 측면에서 말하면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스토아에게는 우주 만물은 동질이며 상호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한발 나아가 신·자연·운명·섭리는 동의 어로 되어 있다. 다만 작용을 하는 것과 작용을 받는 것과의 상위가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 작용의 원천도 감각(물체로부터의 자극과 그것에 대한 반응)에서 구해지고 있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종종 "인간은 우주라는 큰 도시의 시민(코스모폴리티스)이다"라고 주장하는데 이 발상 도 이상과 같은 관점과 관련이 있다. 이런 견해를 취하는 한 스토아의 입장은 유물론일원론 결정론이라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유물론은 근원적 물체가 '프네우마'라고 표현되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어 딘가 포착될 수 없는 것으로, 유물론과 표리 관계에 있는 유심론으로 전체계를 전환시켜 버릴 가능성을 갖 고 있다. 사실 스토아는 후기로 접어들면서 그런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스토아의 유물론적 일원론은 앞서 본 신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범신론과 표리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의 사상은 전체로 볼 것 같으면 이러한 모순된 면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표 면상의 주장 내지 학파가 창설된 당시의 주장과 상반되는 사실이 점차 강조되어 온 경우가 있다. 가령 윤 리학 면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필연성 중에서 "인간이 여하히 자유를 획득하여 사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필 연과 자유와의 관계가 문제이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일관하여 산다" 이는 본시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통찰함으로써 인간의 유덕한 생활에 의해 유익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선택하면서, 우주의 커다란 흐름 에 순응하여 조화있게 살고자 하는 주체적·적극적 태도를 의미했다. 논리학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주법 칙의 인식수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후기가 되면서 자기의 권능내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 여 후자를 선악과는 무관한 것으로 무시 내지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려 한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종종 아파 테이아(어떤 것에도 마음의 동요를 받지 않는 것)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도 후기로 옮아감에 따라 소 극적 의미로 강조되었다.

스토아의 사상은 고대말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종교·문학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령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을 스토아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이른바 신플라톤주의의 기초를 확립하였 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오리게네스도 그리스도교를 신학으로 체계화하는 데 있어서 스토아의 입 장을 원용하고 있다. 자연사상의 성립이나 브루노, 스피노자의 사상 등 근세에 있어서도 신과 자연을 동일 시하려는 스토아의 관점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 후기 스토아의 윤리 사상은 몽테뉴 등의 모랄 리스트들에게 일종의 처세훈으로 애독되었다. 현대에 있어서는 논리학 분야에서 말과 말의 관계가 아니 라, 명제 상호의 관련을 문제 삼으려는 스토아의 논리학이 재평가되고 있다.

 

070. 솔로몬 왕

솔로몬(영어: Solomon 혹은 Jedidiah, 히브리어: ְלֹמֹהשׁ 쉴로모), 구약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왕국의 제 3대 왕으로서, 기원전 971년부터 기원전 931년까지 유다이스라엘의 민족을 다스린 것으로 여겨진다. 솔로몬 혹은 샬로모라는 말은 ‘평화’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다윗 왕의 아들로 이집트 왕녀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고, 국내 건설과 국경 방위에 힘썼다. 예루살렘 신전 을 비롯한 장대한 도시를 건설하는 한편, 외국과의 통상을 맺어 이스라엘 전성기를 이루어 '솔로몬의 영화' 라고 칭송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에 대한 과중한 세금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이스라엘 왕국 분열의 원인을 가져왔다. 그는 지혜가 뛰어났으며, 문학에도 뛰어나 이스라엘 문학의 시조라 일컬어진다. 많은 작품 중 < 잠언>이 남아 있다. 후반기에서 우상을 섬겨 여호와께 큰 죄를 지었다.

 

071. 칭기스칸

칭기즈 칸(몽골어: inggis Qan, 한국 한자: 成吉思汗 성길사한: 1162년 4월 16일-1227년 8월 25일[1])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이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법천계운성무황제(法天啓運聖武皇

)이다. 본명은 테무진(몽골어: ᠲᠡᠮᠦᠵᠢᠨ Temin, 한국 한자: 鐵木眞 철목진)으로,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정복하고 몽골 제국을 성립시켜 몽골과 중국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정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072. 윌리엄 포크너

윌리엄 커스버트 포크너(William Cuthbert Faulkner, (1897년 9월 25일 ~ 1962년 7월 6일)는 미국 작가 이다.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그는 194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명성은 그가 쓴 장편 소설과 단편 소설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집도 냈고, 때때로 시나리오도 썼다.

포크너가 한 창작의 대부분은 그의 고향인 미시시피를 무대로 하고 있고, 그는 미국 남부 문학에서 마크 트웨인, 플래너리 오코너, 그리고 테네시 윌리엄스와 함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 다. 1920년대 중반에 그의 책이 정기적으로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까지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그는 미국 역사 전체에 걸쳐 위대한 작가로 여겨지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The Sound and the Fury 음향과 분노 (1929), As I Lay Dying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1930), Light in August 8월의 빛 (1932). Absalom, Absalom! 압살롬, 압살롬 (1936), 네 권의 소설이 포 함된다.

073.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이탈리아어: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 년 5월 2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 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창 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인상 깊은 사물, 관찰한 것, 착상 등을 즉시 스케치하였다.

그리스도의 세례〉(1472년~1475년)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베로키오 공방 시절: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왼쪽의 천사를, [베로키오]는 오른쪽의 천사를 그린 것으로 알려짐. 교회의 통제를 거부하 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그렸다.)
〈수태고지〉(1475년~1480년)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예수를 잉태한 성모에게 천사 가브리엘 이 왔다는 루가 복음서의 탄생 설화를 소재로 함

〈동굴의 성모〉(1483년~1486년) – 루브르 박물관, 파리, 예수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갔다 는 루가 복음서의 전승 내용을 소재로 함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1488년~1490년) – 차르토리스키 박물관, 크라코우 (Krakow), 폴란 드 모델은 세실리아 가레라니(Cecilia Gallerani)로 뤼도빅 르 모르(Ludociv le More)의 정부(情婦) 로 알려져 있다. 그림 속의 흰 족제비는 다양한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순결함 혹은 순수함 그 리고 모로 집안에 대한 상징으로 주로 해석된다.

〈음악가의 초상〉(1490년경) – 암브로시니아 미술관, 밀라노, 43 x 31 cmᅳ 다 빈치의 유일한, 남성을 그린 초상화로 알려졌다. 모델은 프란치노 가퓌리오(Franchino Gaffurio)

〈리타의 성모〉(1490년~1491년) – 에르미타지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최후의 만찬〉(1498년경)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수도원 식당, 밀라노

모나리자〉(1503년~1506년) – 루브르 박물관, 파리

〈암굴의 성모〉(1508년경) – 국립 미술관, 런던
〈성 안나와 성 모자〉 (1510년경) –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프로이트가 다 빈치의 동성애를 증명할 수 있는 단서로 본 그림. 성 안나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즉, 예수의 외할머니이다.
〈세례자 요한〉(1514년경) –
루브르 박물관, 파리, 다 빈치의 손으로 완성된 마지막 작품으로 남 성과 여성 사이의 모호한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다 빈치는 파동 운동 이론, 연통관 내의 압력, 유체에 미치는 압력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그 응용면에 있어 서 양수기수압의 발견자였다. 새의 나는 방법에 대한 연구로 비행기의 원리를 생각하고 공기의 연구에 서 바람의 발생과 구름과 비의 발생도 이론적으로 추구했다. 또 공기 역학, 조류의 비행 등의 연구 노트에 는 낙하산, 헬리콥터, 플레이트 날개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해부학에 있어서도 인체의 각 부분의 작용을 역학적 원리로서 분명히 하였다. 그 밖에도 식물학 등에 관해 서도 연구를 하였다. 그는 예술과 과학의 창조에 대한 비밀을 밝힌 천재였다. 저서로 그림에 관한 르네상스 예술 이론의 중요한 문헌인 <회화론>을 비롯하여 많은 논문이 있다. 한동일 서강대학교 교수가 쓴 《라틴 어수업》(흐름출판)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과 과학공부 뿐만 아니라 라틴어 공부도 했다.

1519년 4월 23일 유언을 남기고 5월 2일 사망했다. 그의 나이 67세였고, 조르조 바사리는 레오나르도의 전기에서 레오나르도가 프랑수아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적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그 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란세스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074. 지진

지진(地震, 영어: earthquake, tremor, temblor)은 자연적 원인으로 인해 지구의 표면이 흔들리는 현상이 다. 흔히 자연적 원인 중 단층 면에서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변위 자체를 지진이라고 한다. 현상적(現象的) 인 정의로는, 지각 내에 저장되어 있던 변형력이 탄성진동(彈性振動) 에너지로 바뀌어 급격히 방출되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지진은 지각 또는 맨틀 내 암석의 파괴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파괴가 일어난 장소를 진원 이라 하며, 진원 바로 위의 지표점을 진앙이라 한다. 그리고 특히 화산활동에 의해 일어나는 지진은 일반 지진과 구별하여, 화산성 지진이라 한다. 화산성 지진은 일반적으로 작고 그 진원도 얕지만, 장기간 많은 지진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일이 있다. 이와 같이 시간적·공간적으로 여러 개가 한꺼번에 발생하는 일련의 지진을 지진군(earthquake swarm)이라 한다.

자연적 원인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지진의 대부분은 대륙 이동을 설명하는 지질학 이론인 판 구조론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지진은 구조 지진이라고 한다. 지질학자들은 탄성반발 이론으로 지진의 원인을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지진은 화산활동과 관련하여 일어날 수 있다. 지하 마그마의 움직임은 지진을 유발할 수 있으며, 이 런 지진을 관측함으로써 화산활동을 감시하고 분화를 예측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변환단층에서 일어나는 지진들의 진원은 수십 km 정도이나, 진원의 깊이가 깊은 곳에서는 수 백 km에 달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지진이 수렴형 경계발산형 경계보존형 경계 같은 판의 경계에서 일어나는데 그외에도 단층산맥과 같은 단층지대에서도 일어나며 습곡산맥에서도 활발히 일어난다. 또한 판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지진도 종종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지진을 판 내부 지진이라고 한다.

인공적 원인

어떤 지진들은 인공적 원인에 의해 발생하기도 한다. 땅이 흔들리거나 암석 사이의 공극에 물이 차거나 빠 지거나 하면 암석의 강도가 변하기 때문에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 지하수의 개발, 저수지, 인공적인 폭발, 큰 건물의 붕괴 등이 있다.

  • 저수지에 의한 지진중에서 가장 큰 지진은 1967년 12월 10일 인도 마하라슈트라 서부의 코이나 지 방에서 일어났던 규모 6.3의 지진이다.
  • 핵실험, 채석장 발파, 가스 폭발 등 인공적 원인을 발파 (explosion)라고 하며, 이로 인한 지반진동 을 학술적으로 발파 진동(振動)이라 한다. 폭발에 의한 지진 중 가장 큰 지진은 1961년 소련의 핵 무기 실험 때 관측되었다. '이반(차르봄바)'이라고 이름붙인 50 메가톤급 핵폭탄을 터트렸는데, 이 때의 규모는 7이나 되었으며 이때 생긴 지진 충격파는 지구를 3번이나 왕복할 때까지 관측되었다.

진원·진원역·진앙

지진은 지구 내부의 에너지가 축적되어 암석의 파열이 일어나는 한계를 넘어설 때 일어나는데, 그 발생 장 소를 진원역(震源域)이라 한다. 대규모의 지진일수록 진원역이 확대되어 수백 km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진원역에서의 파괴는 한순간에 전체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한 점에서 시작되어 일정한 속도로 퍼져 나 가는데, 파괴가 최초로 시작된 점이 진원(震源, focus)이며 대개 진원역 가장자리에 있다. 진원 바로 위의 지표상의 점을 진앙(震央)이라 한다. 지진계에 의한 관측으로 진원의 위치(진앙, 진원의 깊이)와 진원역에서의 파열의 전파 모양을 구할 수 있다. 이 때, 본진 이후에 일어나는 수많은 여진(餘震, after shock)의 진원 분포나 지진에 따르는 지각변동 등을 이용하여 파열의 전파를 구할 수도 있다. 섬나라나 혹은 또는 반도나라가 지진에 제일위험하고 취약하다. 그리고 반대로 대륙나라가 지진에 제 일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다.
지진소
지진이 일어나는 장소를 조사해 보면 지진은 그 진앙의 분포로 보든 진원의 깊이로 보든 지각 또는 상부 맨틀(mantle)의 일정한 부분에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많다. 이를 지진소(地震巢)라 한다. 가령 일본의 동북지방의 지진소는 크고 두꺼우며, 맨틀 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서남 일본의 지진소는 작 고, 지표에서 30∼40km 깊이에 있다.
지진대
옛날부터 지진이 일어나기 쉬운 곳은 띠 모양으로 분포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이를 지진대라고 한다. 세계 적으로는 환태평양 지진대(環太平洋地震帶)라는 태평양 둘레의 지진대가 유명하다. 일본 부근의 지진 분 포를 잘 조사한 결과, 띠모양을 이룬다기보다는, 지진소(地震巢)로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음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일본 부근에 관해서는 지진대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075. 헨리 퍼셀

헨리 퍼셀(영어: Henry Purcell, 1659년 9월 10일 ~ 1695년 11월 21일)은 영국의 작곡가이다. 퍼셀의 대표 작품으로는 오페라,《디도와 에네아스》가 있다.
런던 출신으로 가수와 작곡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부터 가곡을 쓸 만큼 재능이 풍부했지만 집안이 어려워 왕실 소년성가대에 들어가 하프시코드를 조율하거나 악기를 손질하는 일을 했다. 존 블로에 게 사사했으며 1677년에는 궁정의 상임 작곡가 및 지휘자가 되었다. 1679년부터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오르 가니스트로 활동했고 더 나아가 왕실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도 활약했다. 그는 격무에 시달리다가 36세 의 젊은 나이로 유언을 남기지 못할 만큼 쇠약해져 죽었다. 짧은 생애 동안 400곡이 넘는 다수의 교회 음악 과 기악곡을 남겼으며, 이 밖에도 《디도와 아이네아스 Dido and Aeneas》(1689)를 비롯한 《아더왕 King Arthur》 《요정의 여왕》 《인도의 여왕》 등의 오페라를 씀으로써 영국 바로크음악의 발전에 많은 공헌 을 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곡은 메리 2세를 위한 장례 음악이었다.

퍼셀의 작품들은 기수(奇數)의 소절(小節)로 이루어진 주제(主題), 불규칙한 프레징, 박자와 리듬의 충돌 등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것들로서 왕정복고(王政復古) 후의 영국음악은 그의 창작에 의하여 비로소 국제적 수준에 도달하였다.

 

076. 에피쿠로스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Epicureanism) 를 창시한 것은 신()과 같이 추앙을 받던 에피쿠로스이다. 다수의 제자 가 쾌락주의를 계승하여 그리스어논문을 쓴 필로데모스, 메트로도로스가 유명하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설을 라틴어로 남김없이 철학시(哲學詩)로 정리해 낸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더욱 유명하다. 메트로도로스는 람프사코스의 사람으로 열렬한 에피쿠로스 동조자였다. 그를 안 후 그의 곁을 떠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스승보다 7년 앞서 53세로 타계하였다. 그는 에피쿠로스의 모사(
模寫)라고까지 불리었던 선량한 사람으로, 곤란에 부딪혀 또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학파의 사람들은 철학을 행복 추구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행복이란 일종의 정신적 쾌락으로, 그것을 구하며 그것 을 얻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단순히 그때그때의 일시 쾌락으로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언제 어떤 때에도 마음이 '어지럽혀지지 않은 상태'를 쾌()로 보았다. 공()의 생활을 단념하라, 숨 어서 조용히 살라고 권하고 있다. 국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를 지킬 필요에서 계약을 맺은 단체에 불과 하다.

에피쿠로스에게 철학의 목적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데 있었다. 그가 말하는 행복하고 평온한 삶은 평 정(ataraxia), 평화, 공포로부터의 자유, 무통(無痛, aponia)의 특징이 있다. 그는 쾌락과 고통은 무엇이 좋 고 악한지에 대한 척도가 되고,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인간을 벌주거나 보상하지 않고,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으로는 빈 공간을 움직이 는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쳤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규모는 작지만 매우 헌신적으로 그를 추종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초기 멤버에는 Hermarchus, Idomeneus, Leonteus, 그의 아내 Themista, 풍자 작가 Colotes, 람사쿠스의 수학자 Polyaenus 와 Metrodorus가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여성을 예외가 아닌 정식으로 받아들인 첫 학파였다. 이 학파는 원래 에피쿠로스의 집과 정원에서 열렸다. 정원으로 통하는 문에 있는 조각은 세네카의 편지 중 하나에 다 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방황하는 나그네들이여, 여기야말로 당신이 거처할 진정 좋은 곳이요. 여기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 즐거움이 있습니다. HOSPES HIC BENE MANEBIS, HIC SUMMUM BONUM VOLUPTAS EST 에피쿠로스는 우정을 행복의 재료로 중요히 여겼고, 학교는 친구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라 종종 비유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계급을 매겼고, 그들이 그의 교의에 맹세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077. 솔로몬 성전과 거룩한 상자

예루살렘 성전 또는 거룩한 성전(히브리어: בית המקדש, 벳 하미크다쉬, 거룩한 집})은 예루살렘성전 산(하르 하바이트)에 있었다. 유대교 믿음에 의하면, 하나님의 "발등상"을 상징한다(히브리어 "쉐키나").

제1성전솔로몬 왕기원전 10세기기원전 957년에 7년 동안 지었다. 고대 유대교의 중심이 되는 곳 이었다. 이 성전은 모세장막실로, 노브, 기브온 장막을 대체한 것이었으며 유대교의 믿음의 중심이 되 는 곳이다. 제1성전은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부숴졌다. 새로운 성전의 건축은 기원전 535년에 시작되었다. 히아투스 후에 기원전 521년경까지 건축이 이루어졌으며, 516년 완성되어 515년 봉 헌되었다. 에스라서에 기록되었듯이 키루스 대왕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다리우스 대왕이 보수하였다. 5세 기 후 제2성전헤로데 대왕에 의해 기원전 20년경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이를 제2성전이라고 한다. 70 년 유대 독립 전쟁이 진압될 때에 로마 제국에 의하여 무너졌으며, 흔히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서쪽 벽만 이 남았다. 성전 바깥의 벽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이슬람 사원인 바위의 돔은 성전 터 위에 7세기 후반부터 서있었으며 알아크사 모스크도 비슷한 시기부터 성전 뜰 자리에 서 있었다.

유대교 종말론제3성전에 대한 예언이 있다. 이는 메시아가 오기 전에 예루살렘에 세워질 것이며, 유대교 원리주의자와 보수 유대교에서는 제3성전을 기다리고 있다.

2007년 8월 30일에, 주택단지에 파이프를 설비하다가 제2성전의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2007년 10월 에 고고학자들이 제1성전 유적을 확인하였다.

 

078. 흑사병

흑사병(黑死病, 영어: Black Death, Pestilence, Great Plague, Plague, Black Plague)은 14세기에 유럽에서 창궐하여 7500만~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이다. 흑사병 병원균에 관한 많은 이설이 있었으나 2010 년-2011년 남유럽인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DNA 분석 결과 페스트의 병원균인 페스트균이 병원균으로 밝 혀졌다.

흑사병은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평원지대에서 시작되어 비단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1343년경 크림 반 도에 닿았다. 거기서부터 화물선에 들끓던 검은쥐들에 기생하던 동양쥐벼룩을 기주로 하여 지중해 해운망 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때 흑사병으로 유럽의 총 인구의 30-60%가 목숨을 잃었다.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4세기를 거치며 3억 5천만 명-3억 7500만 명 정도 로 거의 1억 명이 줄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줄어든 세계 인구가 흑사병 이전 수준까지 회복되는 데는 17세 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 뒤로도 19세기까지 유럽에서는 페스트가 산발적으로 유행했는데(런던 대역병 등), 흑사병의 병원체를 페스트균으로 확정한다면 흑사병이란 1345년에서 1840년까지 유라시아 대륙에서 계속된 제2차 페스트 범 유행의 일부로서 14세기 유럽의 범유행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4세기 페스트 유행은 유럽사에서 종교사, 사회사, 경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079.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는 미국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이다. 첫 출판일은 1925 년 4월 10일이며, 이야기는 1922년 여름의 뉴욕시와 롱 아일랜드에서 펼쳐진다.

피츠제럴드는 그 자신이 '재즈 시대(Jazz Age)'라 이름 붙인 시대를 이 소설에서 그려냈다. 제1차 세계대전 의 혼돈과 충격을 겪은 후, 미국 사회는 1920년대 경제 성장에 따라 유례 없는 번영을 누렸다. 동시에 수정 헌법 제18조에 규정된 금주령은 밀수업자들을 백만장자로 만들고 계획 범죄를 부추겼다. 그의 소설에서 의 닉 케러웨이 같았던 피츠제럴드는 시대의 부와 매력에 심취했지만, 그는 시대가 품은 황금만능주의와 도덕성 결여에 불만을 품었다.

위대한 개츠비는 처음에 인기가 없어서 피츠제럴드 생전에 판매 부수는 25,000부에 못 미쳤다. 출판된 지 1년 안에 브로드웨이 연극과 할리우드 영화로 개작되기도 했지만, 이 소설은 대공황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오랫동안 잊혀졌었다. 1945년과 1953년에 다시 출판된 후, 빠르게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현재는 미국의 위대한 소설로 평가되어 전 세계 대학과 고등학교의 영문학 교과과정상의 수업 자료로도 쓰이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닉 캐러웨이 (Nick Carraway)의 관점에서 1922년 초여름 웨스트 에그 (West Egg)에서 이루 어진다. 그는 중서부 (현대 미국의 인디애나 주, 일리노이 주 등을 포괄하는 지역으로 원작에서는 단순히 서 부로 지칭 됨)에서 살아왔으며, 예일 대학교를 졸업했고 세계 1차 대전에 참가한 인물이다. 그는 주식 채권 기술을 배우기 위해 고향을 떠나 뉴욕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가 웨스트 에그에 집을 구한 뒤, 닉은 그의 이웃 제이 개츠비 (Jay Gatsby)와 친구가 된다. 제이 개츠비 는 그의 롱 아일랜드 대저택에서 매일 밤 호화 파티를 벌이는 엄청난 부자이다. 개츠비의 막대한 재산은 많 은 소문의 주제이다. 닉이 그의 파티에서 만나는 손님 중에 그의 과거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또한 웨스트 에그보다 더 좋은 지역인 이스트 에그 (East Egg)에 살고 예일 대학교의 미식축구 선수 로 활동했으며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톰 뷰캐넌 (Tom Buchanan)과 톰의 아내이자 닉의 칠촌 여동생인 데이지 (Daisy Buchanan), 재산이 많은 전 여자 골프 선수인 조던 베이커 (Jordan Baker)를 만난다. 개츠비는 그의 파티로 유명하다. 그 파티는 그의 웨스트 에그 대 저택에서 열린다. 매주 토요일 수 백 명의 사람들은 개츠비의 집으로 몰려 온다. 호화스러운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다. 닉은 곧 정신 나간 이 파 티 자체를 경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개츠비는 나중에 그의 전 애인이던 데이지와 우연히 마주치기를 바 라며 이런 파티를 연다는 것을 닉에게 말해준다. 데이지와 개츠비는 오래되지 않아 그의 부탁을 받은 닉의 주선으로 만난다. 그러는 동안에 닉과 조던은 만남을 가진다. 닉은 조던과 톰과 데이지의 집에 처음 들렀을 때 만났다. 닉은 이미 이 만남이 허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결국 맨해튼의 호텔에서, 톰은 개츠비가 데이지를 사랑 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 데이지에게 개츠비가 주류 밀수 업자라고 폭로한다. 이 후, 개츠비는 데이지로 하여금 톰에게 더이상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으며, 톰과 함께 했던 지난 5년을 잊고 개츠비에게 돌아오고 싶다 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녀는 망설이며 개츠비 가 말한 대로 말하지만, 톰은 데이지와 개츠비 사이의 어색한 관계를 알아차렸다. 그는 개츠비와 데이지가 같이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해도 둘 사이에 아무 일이 없을 거라며 개츠비를 비웃었다.
한편 톰의 친구인 자동차 수리점 주인 조지 윌슨 (George Wilson)과 그의 아내 머틀 (Myrtle Wilson)은 말다툼 중이었다. 머틀은 톰과 부적절한 관계였고, 이것을 조지가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집 밖으로 도망 쳐 나와 길을 건너다 그만 데이지와 함께 돌아가던 개츠비의 노란
롤스로이스 차에 치여 죽었다. 한참 뒤에 서 따라오던 톰과 조던과 닉은 교통사고가 난 것을 발견했다. 톰은 윌슨이 드디어 한 건 잡았다고 중얼거렸 지만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발견한 후 잠시 멈춰 상황을 보기로 했다. 톰은 곧 그의 숨겨진 애인이 죽었다 는 것을 알게 됐다. 충격적인 상황 속에서 윌슨은 거의 미쳐서 노란 차에 대해 말했다. 톰은 윌슨에게 그 노 란 차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호텔로 놀러 가면서 윌슨의 차고에 기름 넣으려고 들렀을 때는 톰이 개츠비의 노란 차를 몰고 개츠비가 톰의 차를 몰고 있었기 때문에 톰은 윌슨에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톰은 윌슨에게 총을 건네고 개츠비가 어디 사는지 윌슨에게 알려준 후, 데이지와 함께 멀리 여행 떠날 준비 를 했다. 이때 개츠비는 그의 수영장에서 튜브를 타고 둥둥 떠있었다. 개츠비는 데이지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침울해 했다. 그는 데이지로부터 전화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윌슨이 다가와서 총을 쏴 개츠비를 죽였다. 그러고 나서 윌슨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잔디 위에서 자살했다.

개츠비의 죽음 후 닉은 그의 장례식이 참석할 사람들을 열심히 물색했다. 하지만 개츠비의 밀수 업 동업자 메이어 (Meyer Wolfsheim)조차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에 함께하기를 거절했고, 데이지는 톰과 여행 을 가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한편, 개츠비의 아버지인 개츠 씨 (Henry Gatz)가 개츠비의 장례식에 왔고 그는 여전히 과거를 추억하고 있었다. 그는 닉에게 개츠비의 집이 찍힌 닳아빠진 사진과 개츠비가 어 렸을 적 쓴 책을 보여주었다.

개츠비의 넓은 인맥에도 불구하고, 닉, 개츠 씨, '부엉이 눈'(Owl-eyed man), 그리고 몇 명의 개츠비의 집 사들과 아버지만이 개츠비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부엉이 눈'은 일찍이 어느 여름 개츠비의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는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이었다. 닉은 그 후로 이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장례식을 전후로 조던, 톰, 데이지와 연락이 끊긴 뒤, 닉은 실망에 빠진 결과 뉴욕을 떠나고 안전한 중서부로 돌아간다.

 

080.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最後晚餐)또는 마지막 만찬, 주의 만찬은 기독교신약성서에 기술된 장면 가운데 하나 로,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기 전날 밤(성력 1월14일 저녁), 열두 제자들과 함께 가진 저녁 식사 또는 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어났던 일을 말한다.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교회에 있는 벽화이다. 당시 이스카리옷 유다를 포함하여 모두가 이 만찬 장소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 라는 예수의 말을 전해듣는다. 또 베드로는 닭이 3번(마르코 복음서) 울기 전에 세 번 그리스도를 부인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그는 이에 대해 강하게 부인하였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찬미를 기원하기 위해 포도주를 들어서 각각 이를 ‘자신의 몸’과 ‘자신의 피’라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어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적혀있다. 성체성사 또는 성만찬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
성체와 보혈을 모시는 성사 또는 성례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이 저녁 식사를
유대교의 신앙전통 가운데 하나인 과월절(유월절) 날의 식사라고 적고 있지만,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하느님의 어린양임을 강조하여 과월절(유월절) '전 날'의 사건으로 적고 있다. 이로 인해 동서 교회간에, 이 때의 빵이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인지, 아니면 누룩을 넣은 빵인지에 대해 서 논의가 있었는데, 지금도 동방교회 즉, 동방정교회에서는 서방교회에서 성체성사라고 부르는 성체성혈 성사 집전 시 누룩을 넣은 을 사용한다.

081. 태양 흑점과 플레어

태양플레어는 태양 대기에서 발생하는, 수소폭탄 수천만 개에 해당하는 격렬한 폭발이다. 태양플레어는 태양 코로나채층에서 발생하며, 플라스마를 수천만 켈빈까지 가열하며, 전자, 양성자 및 무거운 이온 광속에 가깝게 가속한다. 긴 파장의 라디오 주파수로부터 짧은 파장의 감마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파장 전자기스펙트럼을 넘나드는 전자기복사를 만들어 낸다. 일반적으로 태양플레어는 자기에너지자기 재결합을 통해서 입자의 운동에너지 및 복사에너지로 전환되는 현상으로 생각된다. 대부분의 태양플레어 는 밀집된 자기장이 태양 표면으로부터 코로나로 빠져나오는 곳인 태양흑점 주변에서 일어난다. 태양플레 어의 에너지는 수 시간 혹은 여러 날에 걸쳐서 형성되지만, 수 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방출된다.

태양플레어는 1859년 영국천문학자 리처드 캐링턴이 처음 관측했다. 항성플레어 역시 여러 다른 별에 서 관측되었다.

태양플레어는, 태양의 활동기에는 하루에 몇 번도 일어나기도 하며, 태양의 비활동기에는 주 당 한 번도 일 어나지 않기도 한다. 태양 활동은 11년을 주기로 변하며, 이를 태양주기라고 한다. 주기의 최고점에서는 더 많은 수의 태양흑점이 존재하고, 이는 더 많은 태양플레어를 야기한다.

태양플레어는 지구근처의 GOES 위성에서 측정한 1-8 옹스트롬 X선의 최대 플럭스(즉, 단위 면적당 와 트, W/m2)에 따라 A, B, C, M, X 등급으로 구분짓는다. 각 등급은 이전 등급에 비해 최대 플럭스가 10배 정도 차이나며, 최고 등급인 X 등급의 경우 최대 플럭스가 10-4 W/m2 단위이다. 하나의 등급에는 선형 단 위로 1에서 9까지의 세부 등급이 존재한다. 즉, X2 태양플레어는 X1에 비해 2배가 강하며, M5에 비해 4 배가 강하다. 상대적으로 강한 M 및 X 등급의 경우는 지구 근처의 우주기상에 영향을 준다.

GOES 분류에 따르는 두 개의 큰 태양플레어는 1989년 8월 16일2001년 4월 2일 발생한 X20 (2 mW/ m2) 등급이다. 하지만, 이 기록은 2003년 11월 4일 역사상 최대로 기록된 X선 방출에 의해 뒤집어지게 되 었다. 이 때의 태양플레어는 원래는 X28 (2.8 mW/m2) 등급으로 분류되었었다. 하지만, 이 기록은 GOES 위성의 검출기가 판독할 수 있는 최대 수치였으며, 현재는 X40 (4.0 mW/m2)과 X45 (4.5 mW/m2) 사이 쯤이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다. 이 근거는 지구 대기의 여러 영향에 기반한 것이다(여기를 참조하기 바란 다). 이 거대한 태양플레어는 플레어 발생 며칠 전부터 관측되었던 태양흑점 10486에서 발생하였다.

지난 500년 동안 가장 강력했던 태양플레어는 1859년 9월에 발생한 것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이는 영 국천문학자 리처드 캐링턴에 의해 관측되었으며, 그린란드 빙하에서 질산염 베릴륨-10의 자국을 남 겼는데, 이러한 자국은 현재 그 당시의 강렬함을 짐작하게 해준다.

 

082.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1]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개신교회의 교회 음악가이다.
바흐는 사후
고전주의 음악사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혔으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바 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을 몰고 오게 하였으며 또한 사후 바흐에 대 한 재평가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브란테부르크 협주곡, 마태 수난곡 등

083. 중세 철학

중세철학 (中世哲學)은 중세, 구체적으로는 5세기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나서 16세기르네상스가 일 어날 때까지의 시기의 철학이다. 논자에 의해 편의적으로 4세기 이전의 교부학을 포함해 말하는 일이 있다. 독립한 철학의 연구의 계획으로서 이해되는 중세 철학은 8세기 중순의 바그다드 및, 8세기 최후 4반세기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을 돌아 다니며 프랑스에서 시작했다. 중세 철학은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발전 한 고대 문화의 재발견의 과정에 의해서 정의되기도 하고, 신학적 문제를 취급해 성스러운 교의와 속계의 학문을 통합할 필요에 따라 정의되기도 한다.

중세 철학의 역사는 전통적으로 둘의 주된 시기, 즉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연구가 보존되어 발전된 12 세기까지의 초기 중세와 아랍계의 비평가들의 반응을 받아 종교철학, 논리학, 형이상학의 주목해야 할 발전 과 함께, 고대 철학의 재발견의 극치를 기록한 12, 13, 14세기의 '황금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서 방 라틴 세계에 적용된다. 본 기사에서는 중세 이슬람 철학은 산발적으로 취급에 그쳐 중세의 동방 그리스 세계의 철학에 관해서는 이를 취급하지 않는다 (각각 이슬람 철학, 비잔틴 철학을 참조).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유럽으로의 발전, 특히 12세기 이후의 그것은 특히 이슬람 세계에서의 철학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어 20세기에 들어가고 나서의 연구로는 그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로, 이븐 루시 드, 마이모니데스 기독교 사상에 직접 영향을 준 논자의 연구는 일반적으로 중세 철학의 연구 대상으로 도 보이고 있다.

중세는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에게 업신여겨 다루어져 그리스·로마의 고전 시대와 고전 문화의 '재생' 즉 '르네상스'의 사이의 야만스러운 '중'세로 간주해졌다. 근대의 역사가는 중세를 기독교 신학에 강하게 영향 을 받고는 있지만 철학적 발전이 일어났던 시기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의 가장 주목해야 할 사상가 의 한 명은 토마스 아퀴나스이지만, 그는 자신을 철학자로 간주하지 않았고, 항상 철학자들을 '그리스도의 계시에 찾아내지는 진정한, 엄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로서 비판하고 있었다.

이 시기를 통해서 논의된 문제로서는 신앙이성에 대한 관계, 신의 존재 증명신의 유일성 (분할 불가능 성), 신학 및 형이상학의 목적, 그리고 보편 논쟁이나 개별화의 원리에서의 지식의 문제가 있었다.

중세 철학은 특징으로서 '신학적'이다. 이븐 시나이븐 루시드는 제외할 수 있든지, 중세의 사상가들은 아 무도 자신을 철학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 영역도 신학적이었다. 그들에게 철학자는 플라톤 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의 이교의 저술가의 일로였다. 그렇지만, 중세의 저술가들의 신학적 연구 는 고대의 철학자의 생각이나 논리적인 기법을 이용해 난해한 신학적 문제나 교의의 요점에 착수했다. 토마 스 아퀴나스페트르스 다미아니에 추종해 철학은 신학의 비 ('ancilla theologiae')라고 주장했다.

중세의 철학자들의 연구에 통저하는 세 개의 원리로서 'ratio'로서 알려진,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논리학, 변 증법, 분석을 이용하는 것, 'auctoritas', 즉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나 그 외의 권위 있는 고대의 철학자에게의 식견에의 경의, 'concordia', 즉 철학의 식견과 신학적인 가르침·계시를 조화시킨다는 의무가 있다.

이 시기 가장 자주 논의된 화제의 하나에 신앙과 이성의 대립이 있다. 이븐 시나와 이븐 루시드는 어느 쪽이 나 이성의 측에 서서 연구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철학적 탐구에 신의 권위의 범위를 넘게 하는 것 은 결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안셀무스는 그가 부분적으로 신앙에의 공격으로 간주한 것에 대해서, 신앙 과 이성의 양쪽 모두를 고려에 넣은 접근에 의해서 신앙을 옹호하려고 했다. 신앙 / 이성의 문제에 아우구스 티누스가 낸 결론은 (1) 신앙해, 그리고 (2)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084. 탈무드

탈무드(히브리어: תלמוד, 영어: Talmud)는 모세가 전하였다는 또 다른 율법 또는 아브라함 시대에 이미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구전들 중에서 율법을 담은 문서집인 미슈나(Mishnah)를 약 c.e 2-3세기에 랍비 유다 하나시Judah ha-Nasi가 집대성 하였고, 그것에 대하여 ‘종합’이라는 뜻의 후대 의견들인 게마라 (Gemara)가 교차 편집된 것을 통칭하는 용어로서 전 육부 육십삼 편 또는 육십사편으로 구성되었다. 탈무 드는 크게 바빌로니아 지방에서 전수된 바빌로니아 탈무드와 팔레스타인에서 편집된 예루살렘 탈무드로 분류된다. 유대인들에게 성서와 ‘동일하게’ 중요시여겨지는 탈무드는 랍비의 교시를 중심으로 한 현대 유 대교의 주요 교파의 다수의 기본 경전으로서 인정하고 이해되며,, 종교적 유대인의 생활과 신앙의 기반이 지만, 어디까지나 히브리어, 아람어, 랍비 히브리어로 작성된 문서집만 경전으로서 인정될 뿐이며, 여타 언 어 번역본에서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그 자체의 해석에 대하여 유효한 것 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탈무드를 인용하여 논증할 경우에 번역된 탈무드를 인용하는 것은 가능 하나 그것이 어떠한 율법적 효력이 없다는 의미에서 이다. 한국에 번역된 탈무드 이야기들은 탈무드에 들 어있는 이야기(아가다)파트이며 실제 탈무드 상에서는 보다 심도 있는 성경 해석법과 통칭 거의 모든 인간 사회 전반의. 철학적 수학적 인문학적 역사적 질문들과 담론들을 진행한다. 때로는 후대 랍비들의 상충되 는 견해를 그대로 여과없이 모두 서술한다.그래서 탈무드는 때로는 해석이 없이 볼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공부하기 위하여 하브루타를 하는 것이다. 한국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하브루타 교수법은 이방식을 채용 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모세 오경을 ‘고대 히브리어 문법으로’ 외우거나 읽지 않는 아이에게 탈무드 수업 은 진행될 수 없는 사실을 배워온 하브루타 선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랍비 유대교의 세상과 성경에 대 한 해석이 탈무드라 볼 수 있다.

유대교의 전승을 보면, 신은 모세로 말미암아 기록된 토라와 다른, 구전으로써 구전할 율법을 내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것이 구전된 율법이다. 이후 2세기 말경 당시 이스라엘 유대인 공동체이었던 유다 하나 시가 랍비들을 수차 소집하여 구전된 율법을 책으로서 체계로 작성하는 작업에 착수한 결과 완성된 문서집 이 미슈나이다. 본래 구전으로써 구전된 내용이다. 일설에는 제일차 유대 전쟁을 체험하고 유대교 존폐에 위기를 느껴서 구전된 율법을 책으로 편찬하였다고 전한다. 이 미슈나에 주석이 첨부되는 과정에서 현재 판이한 내용인 두 탈무드 팔레스타인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존재하게 되었다. 현대에 인정되는 탈 무드는 바빌로니아 탈무드로서 6세기경에 현재 형태가 되었다. 당초 탈무드는 미슈나에 덧붙여진 방대한 주석이었지만, 이 주석부는 후에 게마라라고 불리게 되어 결국 탈무드라는 말은 미슈나와 게마라를 한데 아울러서 칭하는 용어로서 사용되었다.

"탈무드는 유대교의 경전이다."라는 설명이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는 횡행하지만, 실제로 탈무드의 권위 는 랍비의 권위이기도 해서 랍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처지에서 탈무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

종파도 많이 존재한다. 그 대표 유대교인 카라이테 유대교(히브리어: יהדות קראית)에서는 모세토라만 을 경전으로서 인정하고 랍비 문서인 탈무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유대교인 삽바티안(히브리

: שבתיאן)의 맥을 잇는 많은 유대교 종파에서는 탈무드를 오히려 부정한다.
유대교에서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습관과 율법이 기록된 탈무드는 구전되던 내용을 3세기경에 글로써 엮은 미슈나와 이 내용을 주석한 여러 글을 모은 게마라로서 구성되었다. 특히 게마라에는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율법과 관습을 주제로 하여 랍비들이 벌인 다양한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 유대 학자들은 논쟁에 서 드러난 사유하는 과정을 결론만큼 중시하나 논쟁한 내용이 아주 복잡하므로 후대 학자들은 랍비들이 사 용하던 언어인 아람어를 이용하여 원전을 읽고서 하는 주석에 난항을 겪어 왔다. 학계에서는 Rabbi Even Israel Adin steinsaltz스타인잘츠가 아람어를 유대인이 사용하는 언어인 히브리어로 번역한 덕에 후속하 는 연구에 탄력이 더 붙으리라고 전망한다. 또 스타인잘츠는 탈무드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불어, 러시아어, 스페인어어, 영어로도 번역하였다. 게마라는 미슈나와 기타
타나크를 다룬 주석과 논의를 500년경에 정리 한 문적이다. 탈무드와 게마라는 가끔 혼용되기도 한다. 게마라는 랍비 율법의 기반이고 여타 랍비 문서에 도 자주 인용된다. 이런 탈무드를 전통상 통칭하는 말인 샤스(히브리어: ש"ס)는 히브리어 시샤 세다림 (shisha sedarim)의 약자로서 미슈나의 여섯 부()를 뜻한다.

085. 잔 다르크

잔 다르크(프랑스어: Jeanne d'Arc, 1412년 1월 6일 ~ 1431년 5월 30일) 또는 성녀 요안나 아르켄시스(라 틴어: Sancta Ioanna Arcensis)는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성인이다. 오를레앙의 성 처녀(la Pucelle d’Orlans)라고도 불린다.

프랑스 북동부 지방 동레미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 아 백년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왕세자였던 샤를 7세가 프랑스의 국왕으로서 대 관식을 치를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나중에 부르고뉴 시민들에게 사로잡혀 현상금과 맞바꾸어 잉글랜 드 측에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잉글랜드는 잔 다르크를 재판장에 세워 반역이단의 혐의 를 씌운 후 에 말뚝에 묶어 화형에 처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9 세(만 17 세)였다.

그로부터 25년 후에 교황 갈리스토 3세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종교재판소는 잔 다르크에 대한 심사를 재 개하여 그녀에게 내린 혐의는 모두 무혐의이며 따라서 무죄라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를 순교 자로 선언하였다. 잔 다르크는 1909년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1920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잔 다르크는 투 르의 성 마르티노, 성왕 루이,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등과 더불어 프랑스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오늘날 잔 다르크는 서구 문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특히 잔 다르크는 프랑스 에서 애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프로파간다에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소재로 자 주 쓰였으며, 군인들은 잔 다르크의 탄생지인 동레미라퓌셀(라퓌셀은 처녀라는 뜻으로, 잔 다르크를 기려 본래의 지명 동레미에 추가되었다)을 순례하기도 했다. 그리고 잔 다르크를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와 만화, 소설, 회화 등의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잔 다르크는 흔히 깃발을 들고 백마 위에 올라탄 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086. 존 스타인벡

존 언스트 스타인벡 (John Ernst Steinbeck, Jr. 1902년 2월 27일 ~ 1968년 12월 20일) 은 미국의 소설가 이며, 미국 경제구조의 모순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가난한 삶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작품활동을 하였 다. 윌리엄 포크너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뒤를 이은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히며, 그의 작품은 따뜻 한 인간미가 넘치는 문체에 특징이 있다.

대학교를 중퇴한 그는 <뉴욕 타임스>지의 기자로 일했으며, 1929년 해적 소설 《황금의 잔》으로 문단에 등장하였고 <생쥐와 인간>으로 유명해졌다. 1936년 스타인벡은 미국 공산주의 운동을 소재로 한《의심스 러운 싸움》(영어: In Dubious Battle)을 발표하였다. 《의심스러운 싸움》은 1936년 미국 출판계의 베스 트셀러가 되었다. 공산주의자가 착취받는 과수원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조직한다는 소설의 내용은 당연 히 이념논쟁을 불러와서, 당시 우파들은 공산주의자들의 동정을 끌어 모으려 했다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노동운동이 활발하던 미국 사회의 모습을 소재로 한 즉, 시대상황에 적절한 것이었다. 실제 로 1935년부터 1937년까지의 2년 동안 노조 조직률은 10%에서 20%로 두 배 이상 뛰어 올랐으며, 노동운 동의 성격도 숙련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에서 산업별 노동조합 결성으로 바뀌고 있었다.

1939년에는 노동자들과 같이 일한 경험을 소재로 한《분노의 포도》를 발표하였다. 스타인벡은 이 작품에 토지 소유주인 은행에 의해 농장을 빼앗긴 조드 일가를 등장시켜,지주, 은행, 경찰노동자들에 대한 탄압 을 고발하였다. 그래서 오클라호마주등의 여러 주에서는 금서로 지정되고, 이 불태워졌다. 미국 연방 수 사국(FBI)에선 스타인벡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고, 《분노의 포도》가 반미선전에 이용될 것을 우려하였 다. 스타인벡은 당시 FBI의 수사국장이자 우파인 에드거 후버의 감시에 분노하여 “에드거의 똘마니들이 내 뒤를 밟지 않게 해줄 수 있겠소? 짜증이 나는군요.”라는 편지법무장관에 보냈다. 이 작품은 후에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

그외 작품으로는 《불만의 겨울》과 《달은 지다》《에덴의 동쪽》등이 있다.

087. 모나리자

모나리자(영어: Mona Lisa) 또는 라 조콘다(이탈리아어: La Gioconda, 프랑스어: La Joconde)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초상화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모나"(mona)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 경칭이고, "리자"(Lisa)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다. 즉, 한국어로 하면 "리자 여사"라는 뜻이 된다. 모나리자의 다른 명칭인 "라 조콘다"는 한국어로 " 조콘도(Giocondo)의 부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 작품은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는 여인을 그린 초상으로,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 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고 있다. 구도는 당시에 가장 기본적인 초상화 구도였던 피라미드의 형태를 띠고 있 다. 또한 인물을 배경보다 높게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날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르네상스 시대 에는 드문 방식을 사용하였다.[1]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2년에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조르조 바사리의 말에 의하면 미완성작으 로 남겨둔지 4년이 지난 후에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란 정신적인 것이 라고 늘 말해왔고 모나리자에는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

1503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 작품의 의뢰를 수락한 것은 돈이 필요해서였다. 그런데 몇 달 뒤 베키오 궁 을 장식할 프레스코 주문이 들어와서 이 그림은 주문자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에게 전달될 일이 없어졌고, 레오나르도가 평생 동안 자신이 갖고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이 초상화를 완성을 했고, 사 람이 흔적이 보이지 않는 태곳적 풍경은 훨씬 뒤에 천천히 구상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등받이 없는 1인용 안락의자에 독특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나리자와 이 풍경이 맺고 있는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088. 밀그램의 복종에 관한 실험

밀그램 실험(영어: Milgram Experiment)은 1961년 예일 대학교심리학과 조교수 스탠리 밀그램 (Stanley Milgram)이 실시한, 권위에 대한 복종에 대한 실험이다. 밀그램은 권위에 대한 복종을 연구하던 중, 사람들이 파괴적인 권위에 굴복하는 이유가 성격보다 상황에 있다고 믿고, 굉장히 설득력 있는 상황이 생기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윤리적, 도덕적인 규칙을 무시하고 명령에 따라 잔혹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밀그램은 "징벌에 의한 학습 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집하고 피실 험자들을 선생과 학생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선생 역할과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를 각각 1명씩 그룹을 지어 실험을 실시했다.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를 의자에 묶고 양쪽에 전기 충격 장치를 연결했다. 그리고 선생이 학생에게 문제를 내고 학생이 틀리면 선생이 학생에게 전기 충격을 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사실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는 배우였으며, 전기 충격 장치도 가짜였다.
실험을 시작하기 전 밀그램은 4.50달러의 대가로 피실험자들이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릴 것이라고 생각하 지 않았다. 밀그램은 0.1% 정도의 사람들이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험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65%의 피실험자가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렸다. 이 실험은 1971년
필립 짐바르도 스탠퍼드 감옥 실험까지 확대되었다. 밀그램의 실험은 피실험자들에게 심리적 외상을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미리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윤리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고, 결국 대학에서 해임되었다.

089. 바흐의 브란데부르크 협주곡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randenburg concerti, BWV 1046–1051)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작곡한 여섯 기악곡의 모음으로, 1718년부터 1721년까지 작곡되었다. 1721년 3월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 브란덴 부르크-슈베트 변경백(邊境伯)인 크리스티안 루트비히에 헌정하였다. 이탈리아의 비발디 등이 확립한 협주곡의 형식을 사용하고 있으나, 작곡마다에 악기 편성을 사용하고 대위법적으로도 이탈리아의 음악보 다 한층 정교하게 작곡되어 있다. 다양한 구성으로 된 독주악기와 합주군()이 교묘하게 대비된 밝고 즐 거운 음악이다. 바로크 협주곡의 정점을 이루는 명작이다.

 

090. 신의 존재에 관한 논증

()의 존재(存在)와 신의 부존재에 대한 주장은 철학자, 신학자, 과학자 등 매우 많은 사람들이 제기해 왔다. 신의 존재 여부는 철학대중문화 모두에서 활발한 논쟁 거리이다. 또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 신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 그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입장이 있다.

  1. 1. 자연신학적증명-이세계가아름답고또한합리적이며완전한질서를지니고있는이상,이세계 를 창조했던 현명한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
  2. 2. 우주론적 증명 - 자연계의 인과관계(因果關係)를 거쳐 계속하여 원인을 규명해 나간다면 최초의 제1원인으로서의 신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3. 3. 존재론적(본체론적) 증명 - 인간은 불완전하고 상호간에 관련이 있으므로 완전무결하다고 생각되 는 것, 즉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
  4. 4. 목적론적증명-자연이어디까지나목적에적응한질서를지니고있는이상,자연전체의설계자 로서의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
  5. 5. 도덕적증명-우리에게그실행을강력히요구하는도덕법칙의원천으로서신을생각할수있다.
  6. 6. 미학적증명-미술의진리가될수있으며미를통하여신의존재를증명하는방법이다.
  7. 7. 믿음의 유추 - 오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8. 믿게 되는 방식이다.

불가지론

신의 존재에 대한 진위는 알려져있지 않거나 알 수 없다는 관점이다.

 

091. 카빌라

카발라(히브리어: ָלָהבּקַ 캅발라, Kabbalah[1])는 유대 신비교의(또는 유대교 신비주의)를 말한다. 히브리 어 '키벨'에서 온 말로, '전래된 지혜와 믿음[≒전통]'을 가리킨다. 세계의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 전 통과 일맥상통한다. 카발라는 신비주의의 양식을 그대로 좇고 여타 신비주의처럼 특정한 카발라 교의(敎 義)의 독선주의도 배제된다.

많은 유대인은 카발라를 토라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토라에 내재된 깊은 의미를 연구하는 것으로 간 주한다. 토라의 연구는 전통으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뉜다.

  • 페샤트(Peshat): 겉으로 나타난 뜻
  • 레메즈(Remez): 비유하거나 은유성을 띤 뜻
  • 데라쉬(Derash): 랍비나 미드라슈답게 재해석
  • 소드(Sod): 토라에 내재한 비밀을 신비스럽게 해석

토라에 내재한 비밀 연구[소드]를 카발라라고 한다.
카발라의 중심이 되는 옹래된 책은
바히르(Bahir)와 헤이카롯(Heichalot)이 있고 나중에는 13세기경의 조 하르(Zohar)가 있다.
카발라는 말 그대로 신비주의이고 내재해서, 백과사전을 포함해, 일반으로 통용되는 완전하고 정확한 설 명이 없으나 학자인
게르솜 숄렘, 아서 그린, 다니엘 마트, 모셰 이델은 카발라 여러 문서를 명확하게 했 다. 학자인 게르솜 숄렘마틴 부버는 유대교를 카발라 대중화로 간주했다.

092. 이탈리아 르네상스

14세기~16세기까지 이탈리아 도시들이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웠다. 피렌체, 베네치아, 피사, 밀라노 같 은 도시에서는 이러한 경제력으로 자치권을 사들여, 영주나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났고 인간에 대한 관심 을 갖기 시작했다. 신도 인간처럼 표현하던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다시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 다. 예술과 문학에 나타난 이러한 새로운 기운을 르네상스라 한다. 특히 르네상스 미술은 이탈리아 피렌체 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전성기를 맞은 후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인문주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인문주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생각이 바뀌는 지적 흐름과 이탈 리아 중북부가 도시주 형태의 자치상태에 놓여있었다는 점과 관계가 깊다. 당시 피렌체는 지중해 무역으 로 번영하여 토스카나지방의 중심지였고 14세기경부터 교회, 이슬람 세계, 동로마 제국 등의 고전문화에 영향받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다.

건축 이탈리아에는 고대 유물이 많았고 따라서 조각가, 건축가 등이 고대 로마의 것을 공부하는 것이 가능 했다. 건축에서는 브루넬레스키가 르네상스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당시 건축에 애를 먹고 있
피렌체 대성당의 큰 돔을 올리는 데 성공하여 명성을 얻었다. 이후 건축가 브라만테 등이 나타나 르네 상스 건축을 이어나간다.

회화에서는 마사초가 그 서막을 열었다. 그의 자연주의적 태도는 이후 프란체스카, 베로키오등의 원근법, 해부학 등으로 이어진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인간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는 말로 유명한데 그는 건축, 회화를 넘나드는 방대한 저술로 인문주의자의 한 전형이 되었다. 이후 미켈 란젤로, 다빈치, 라파엘로 등의 박식가들이 뒤이어 회화, 건축, 조각 등에서 다방면의 재능을 드러내었다.

조각 15세기 초엽, 그 때까지 그 본질에 있어서 중세적 양식을 답습하고 있던 이탈리아 조각은 종래에 볼 수 없었던 두 개념, 즉 고전 형식의 재현과 적극적인 사실(寫實) 표현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고전 예술 에 대한 관심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이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서 중시하는 고대 사상과 그 유연성을 가지 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 반면에 휴머니즘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을 불러일으켜, 북방에 있어서 중세 예술의 말기를 장식하는 자연주의로 나아갔다. 같은 자연주의라 할지라도 15세기에 있어서 자연에의 접근은 중세와 달라서 직관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이었고, 종합적이기보다 분석적이며, 신의 질서 를 상징하는 것보다 자연 바로 그것을 위하고, 세계의 기존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나체상이 또다시 주제로 채용된 것은 그 표현이다.

음악은 르네상스 시기의 강력한 교황들의 후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데 시스티나 성당의 성가대는 전 유 럽의 음악가, 성악가들로 이루어졌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프레팔레스트리나 등이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만개한 곳은 피렌체,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 등의 도시가 있다. 학술과 예술가들을 키웠던 후원자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 등이 알려져 있다. 특히, 피렌체의 르네 상스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 덕분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13세기 피렌체에서 상업과 은행업으로 성공해 교황청 재산을 관리하면서 재력가문이 되었다. 15세기부터 300여년 간 르네상스 사 상 예술 과학 등을 폭넓게 후원했다. 그 중 미켈란젤로는 15세 때부터 2년 간 메디치 가문의 궁전에서 지 내면서 많은 미술작품들을 감상하며 자랐다. 하지만 15세기 사보나롤라의 개혁에 의해 피렌체의 예술이 쇠퇴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의해 밀라노의 스포르차가도 추방당했으나 로마에서는 교황에 의해 성 베드 로 대성당의 건설(1515년)이 추진되어 많은 예술가가 모여들었다. 1527년 로마 약탈 이후 로마가 일시적 으로 황폐해지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토스카나 대공국등에서 미술은 계속 꽃필 수 있었다.

혼란의 시대, 르네상스 시대는 밝은 시대가 아니라 흑사병이 유행하거나 정치적 싸움, 전쟁이 계속된 시대 였다.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은 궁정과 교황청 등 극히 일부에서 뿐이었고 일반적으로는 미신과 마술 이 믿어지던 시대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유럽의 근대를 이끈 역할을 했지만 그 시기 이탈리아 국내 정 치는 엉망이었다. 교황령을 비롯한 여러 소국들로 갈라지고 외국으로부터 간섭받아 국가의 통일이 늦어 져 정치, 사회적 근대화가 지연되는 결과가 초래된 시기였다.

1600년에 우주의 무한성을 말했던 조르다노 브루노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고 갈릴레이지동설종 교재판을 받은 것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이탈리아에서 자유로운 과학연구를 진행하기는 어려워졌다. 이 미 16세기 후반, 미술에서도 형식주의의 매너리즘(manierismo)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그 창조력은 북유럽 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17세기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중심이 된 바로크 미술의 시대 가 되었으니 문화적 불모의 시대라고 말할 수는 없다.

093. 돈키호테

《라만차의 돈 키호테》(스페인어: Don Quijote de La Mancha[1], [doŋkiˈxoteð̞elaˈmantʃa], 문화
: 돈 끼호떼)는 스페인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지은 소설로, 세계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된다. 제목은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1605년 《라만차의 비범한 이달고 돈 키호테》(El ingenioso hidalgo Don Quixote de la Mancha)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발표되자마자 큰 인기를 얻어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는 길가에서 책을 들고 울고 웃는 사람을 보고 “저 자는 미친 게 아니라면 돈 키호테를 읽고 있는 게 틀림없다.”라고 말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속편은 1615년 《속편: 라만차의 비범한 기사 돈 키호테》(Segunda parte del ingenioso caballero don Quixote de la Mancha)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스페인 황금기의 대표적인 문학일 뿐 아니라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주인공 알론소 키하노(Alonso Quijano) 는 시골에 있는
신사(이달고)이다. 그는 기사에 대한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점차 상상 속에 빠져들게 되며 그가 편력 기사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스스로를 "돈 키호테 데 라 만차"라 칭하며, 그의 하인(원래는 농부) 산초 판사와 함께 모험을 떠나게 된다. 기사로서 마땅히 기사도를 발휘해야 할 연인은 둘시네아 델 토보소인데 사실은 이웃에 있는 농부의 딸로 이름은 알론사 로렌소이다. 이후 그는 스페인을 돌아다니며 많은 모험을 만난다. 특히 전편에서는 위에서 열거한 마을의 신부, 이발 사, 여러 귀인들과 청년, 처녀들과 함께 머무는 주막에서 유명한 모험을 펼치며, 후편에서는 바로셀로나까 지 갔다가 기사로 분장한 마을의 학사에게 패하여 돌아와 사망할 때까지 전편보다 많으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모험을 펼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알론소 키하노로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돈 키호테
책을 많이 읽어 잘난척을 잘한다. 사색을 많이 한 끝에 이 세상의 문제가 기사도의 결여에 있다고 판단하 여 자신이 직접 방랑기사로 나서 원정을 나간다. 풍차를 “모닝스타를 든 거인”으로 오해하여 공격하기도 하는 등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인다. 본명은 알론소 키하노이며 고향은 라만차이다.
산초 판사(Sancho Panza)
원래는 농부였지만 나중에 착하고 충성스러운 돈 키호테의 하인이 되었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질주 할 때 소리질러 말리는 모습으로 보아 자신의 주인보다 현실적이다.
둘시네아 델 토보소(Dulcinea del Toboso)
델 토보소 마을에 사는 농부의 딸. 돈키호테가 마음속에 두고 있는 애인으로 돈키호테는 둘시네아를 악당 들에게 잡혀간 공주로 인식한다. 돈키호테는 그녀를 ‘엘 또보소의 둘시네아’라고 칭한다. 본명은 알돈사 로렌소. 둘시네아는 돈 키호테의 감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
전편 조연들
페로 페레스 신부
돈 키호테의 친구로서 돈 키호테를 정신 이상에서 구하려고 애쓴다.
이발사 니콜라스
역시 돈 키호테의 친구로서 페로 페레스 신부와 함께 돈 키호테를 정신 이상에서 구하려고 애쓴다.
후편 조연들
삼손 카르라스코
돈 키호테가 살던 마을의 학사로서 페로 페레스 신부와 이발사 니콜라스와 함께 돈 키호테를 정신 이상에 서 구하려고 애쓴다.
공작과 공작 부인
사라고사로 가던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도중에 유숙한 성의 주인으로 그들을 위해 여러 가지 장난을 벌 인다.
기타 인물

  • 바실리오: 키테리아의 연인. 계략으로 키테리아와 결혼.
  • 키테리아: 바실리오의 연인. 바실리오의 계략으로 바실리오와 결혼.
  • 후안나 판사: 산초 판사의 부인.
  • 산치카: 산초 판사의 딸.
  • 여관 주인: 여관주인이 돈키호테를 정식 기사로 임명함.
  • 농부들: 돈키호테를 이상하게 생각함, 돈키호테를 때리기도 함.

094. 알브레히트 뒤러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rer, 1471년 5월 21일 - 1528년 4월 6일)는 독일화가, 판화가, 조각가 다.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이며, 특히 목판화, 동판화 수채화 에서 독창적 재질을 보였다.
그는 르네상스 최성기에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그 영향을 받았으나, 뒤에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하고, 북유 럽적·독일적인 미의 전통을 쌓은 화가이다. 이론적 연구에도 뛰어나 <인체 비례론> 및 <원근법에 관한 고 찰> 등의 저서도 내고, 또 이상미(
理想美)에 관하여도 논하였다. 수채화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으며, 인 문주의종교 개혁에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주로 종교화·초상화·풍경화 등을 제재로 하였으며, 동판· 목판 등 판화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 <아담과 이브> <동방 세 박사의 예배> <자화상> <요 한 묵시록> 등이 있다.

동판화 3대걸작 - 기사, 죽음, 악마
뒤러는 동판화 ‘아담과 이브’에 인간의 네 가지 기질인 당즙질(고양이), 우울질(염소), 다혈질(토끼), 점액 질(소)을 상징하는 동물 네 마리를 포함시켰다.

 

095.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는 이탈리아철학자, 과학자, 물 리학자, 천문학자이다. 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지방의 피사에서 태어났으며 7남매 중 장남이었다. 아버 지 빈센초 갈릴레이는 유명한 류트 연주가로, 음악 이론에 관해 중요한 연구를 일부 남겼다. 과학 혁명의 주도자로 요하네스 케플러와 동시대 인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했고 교황청을 비롯한 종교 계와 대립했다. 업적으로는 망원경을 개량하여 관찰한 것, 운동 법칙을 확립한 것 등이 있으며, 코페르니 쿠스의 이론을 옹호하여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임을 믿었다.(그 당시에는 지구가 중심이라 는 것이 진리였다)

그의 연구 성과에 대하여 많은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자진하여 로마 교황청을 방문, 변명했으나 종교 재판 에 회부되어 지동설의 포기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황금 측량자〉를 저술하여 지동설을 고집하였으며, 〈천문학 대화〉를 검열을 받고 출판했으나 문제가 생겨 로마에 감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갈릴레오는 결국 그의 지동설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고, 그의 마지막 생애를 로마교황청의 명령에 따라 가택에서 구 류되어 보냈다.

그는 실험적인 검증에 의한 물리를 추구했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미의 물리학의 시작을 대개 갈릴레오의 것으로 본다. 또한, 진리의 추구를 위해 종교와 맞선 과학자의 상징적인 존재로 대중들에게 인식되고 있 다. 하지만 그는 종교계와의 대립과는 상관없이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런 대립도 자신의 의도 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물리학 입문 과정에서 배우는 등가속 물체의 운동은 운동학으로서 갈릴레오에 의해 연구되었다. 그의 관 측적 천문학의 업적은 금성의 위상과, 그를 기리기 위해 갈릴레이 위성이라 불리는 목성의 가장 큰 네 개 위성의 발견, 태양 흑점의 관측과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갈릴레오는 또한 나침반 디자인의 개량 등 과학과 기술에 기여하였다. 그의 최대 공적은 과학적 연구 방법으로써 보편적 수학적 법칙과 경험적 사실의 수량 적 분석을 확립한 점에 있다고 평가되며, '근대 관측천문학의 아버지',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또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096.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독일어: Georg Friedrich Hndel, 영어: George Frideric Handel 조지 프리더릭 핸들[*], 1685년 2월 23일 ~ 1759년 4월 14일)은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바로크 시대작곡가 이다. 헨델은 46곡의 오페라와 우수한 오라토리오를 비롯하여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쳄발로, 오르간 분야 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명쾌하고 호탕하며 신선하여 생생한 리듬에 성악적이라고 평가된다. 독실한 개신교(루터교) 신자인 헨델의 대표적인 교회음악은 《메시아(Messiah)》로서 당시 영어 번역 성경인 킹 제임스판 성경[1] 의 구절에 곡을 붙인 오라토리오이다.

헨델은 그 명성을 거의 그의 극적 작품에서 얻었지만 통주저음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바로크적 협주양식에 기초를 두고 유려한 벨칸토의 성악적 멜로디와 결부하여 항상 간결·명쾌하며 밝은 표현을 나타냈다. 그의 멜로디에서 벨칸토 양식은 독일의 내면적인 힘찬 표현과 결부되어 호모포니의 방향으로 향한다. 또한 바로 크 특유의 일정한 악형(樂型)의 반복이 사라반드, 쿠랑트, 가보트 등의 리듬에 지탱되면서 단조롭게 고수(固 守)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바흐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의 길이라든가 다양성은 없으나 그 대신 알기 쉽고 명쾌한 표정을 보여준다. 그는 합창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097. 회의주의

회의주의(懷疑主義)는 회의론(懷疑論)이라고도 부르며, 크게 철학적 회의주의와 종교적·과학적 회의주의 로 나뉜다.

회의주의는 인간이 이 세계에 관해서 확실한 지식(진리)을 갖는다는 가능성에 회의를 느끼는 이론 및 그러 한 입장이다. 고대에는 정치와 사상의 혼란 속에서 고대 회의주의 철학이 성립했다. 근세에 와서는 중세적 인 의 권위에 대한 회의가 실증적인 자연 연구의 발전과 결부해서 성장하였고, 절대적 진리는 인식 불가 능이라는 사상이 특히 데이비드 흄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러나 고대 회의주의가 회의를 수행한 결과 "판 단중지"에 도달한 데 대하여 근세 데카르트의 경우에는 인간의 의식에 있어서 회의의 작용 그 자체의 확실 성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근세의 합리론 철학(合理論哲學)을 탄생시켰다. 회의는 소극적인 태도이지만 절대 적 진리를 분별없이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인 의의를 가질 수도 있다.

보통의 용법에서 회의주의(그리스어: 'σκέπτομαι' skeptomai; 생각하다, 둘러보다, 인식하다라는 뜻)는 다음을 말한다.

  1. 일반적으로 또는 특정한 주제에 대하여 확실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태도
  2. 진정한 지식 또는 특정한 지식은 불확실하다는 교리
  3. 보류된 판단, 체계화된 의심 또는 비판의 방법 (Merriam–Webster)

철학에서 회의주의란 더 구체적으로 몇 가지 문제 중에서 하나를 말한다. 이들은 다음에 대한 문제를 포함 한다.

  1. (어떤 지식을 얻기 위한) 의문
  2. 체계적인 의문 또는 지속적인 시험을 통하여 지식을 얻는 방법
  3. 윤리적 가치의 독단성, 상대성, 주관성
  4. 지식의 한계
  5. 지적인 주의(注意), 보류된 판단의 방법

098. 하시디즘

하시디안(Hasideans, Hassideans, Hasidæans 또는 Assideans; 히브리어: חסידים הראשונים, 하시딤 ha- Rishonim, "고대 경건주의", 그리스 Ἀσιδαῖοι)은 마카비 전쟁시대에 정치적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 던 유대 종교 단체이다. 하시디안은 마카비서에 3번만 언급되었다. 그들은 여러학자들의 연구대상이다. 하시 디안이 바리새인들 이나 에센파의 조상인지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다.

이 말은 헤브라이어의 하시드, 즉 '경건한' 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광의로는 유대 종교사에 나타난, 율법(律 法)의 내면성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킨다. 이 운동은 정통파로부터는 이단시되고, 또 지식계층으 로부터는 미신적이라고 경시되어 왔으나, M.부버가 다시 깊은 종교적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재평가되고 있 다. 그러나 그의 하시디즘에 대한 이해는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하시 디즘과 선()과의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것인데,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다.

 

099. 레콩키스타

레콩키스타(스페인어: Reconquista, 포르투갈어: Reconquista 헤콩키스타[*], 아랍어: الاسترداد 알 이스티라 다드[*])는 718년부터 1492년까지, 약 7세기 반에 걸쳐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 리아 반도 남부의 이슬람 국가[주해 1] 를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레콩키스타는 에스파냐어포르투갈어로 ‘재정복’을 뜻하며 한국어로는 '국토 회복 운동'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는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으로 잃어버린 가톨릭 국가의 영토를 회복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레콩키스타는 보통 722년 코바동가 전투에서부터 시작한 것으로 본다. 포르투갈의 헤콩키스타는 1249년아폰수 3세알가르브(포르투갈어: Algarve, 아랍어: الـــغرب)를 점령하였을 때 완료되었다. 아폰수 3세는 ‘포르투갈과 알가르브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쓴 최초의 포르투갈 군주였다. 1492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21세의 에스파냐 연합왕국이 마지막 남은 이슬람 점령지인 그라나다를 정복하여 레카스티야의 이사벨 콩키스타는 마무리된다.

  •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이 시작됨.
  • 718년: 우마이야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거의 대부분과 프랑스 일부 지역까지 판도를 넓힘.
  • 722년: 코바동가 전투(Battle of Covadonga)가 벌어짐.
  • 778년: 카롤루스 대제가 이베리아를 침공하나 론세스바예스 전투에서 크게 패배함.
  • 800년: 프랑크 왕국피레네 산맥 이북 지역의 영토에서 우마이야 왕조를 축출함.
  • 801년: 프랑크 왕국바르셀로나를 점령함.
  • 914년: 이베리아 반도 서북부 지역이 재정복됨. 한편, 바르셀로나는 이슬람 국가에게 다시 점령됨.
  • 1130년: 이베리아 반도의 절반에 해당하는 북부가 재정복됨.
  • 1249년: 아폰수 3세알가르브를 점령하여 포르투갈 영토의 레콩키스타가 완료됨.
  • 1492년: 아라곤 왕국카스티야 왕국의 연합왕국인 에스파냐 왕국이 그라나다를 정복함.

100. 캔터베리 이야기

《캔터베리 이야기》(중세 영어: Tales of Caunterbury)는 영국의 이야기 문학으로, 제프리 초서의 걸작이 다. 중세에 한창 성행되었던 말하자면 이야기집으로, 이 같은 종류로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 있다.
이 이야기에선 당시 영국 사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모조리 등장하는데, 여관에서 모인 30여명의 길손 중 귀 족기사와 그의 시자인 아들 뿐이다. 나머지는 가톨릭교회의 탁발수도자, 수도자, 소환리, 면벌부 판매인, 방앗간 주인, 법조인, 직업 길드원들 등의 중산층이거나 농부나 시종 등의 일반 하류계층이었다. 그 당시 영 국 사회를 구성하던 귀족-가톨릭교회-평민의 세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무리가 이들 순례객들이다.

순례라는 큰 틀 하나에 자잘하지만 간결한 이야기들을 풀어놓는게 이색적인 특징인데, 구성 면에선 데카메 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이야기들 중에는 칭기즈 칸이나 테세우스가 등장하는 등 역사나 신화를 소재로 한 이야기도 있다. 또한 설화 문학의 개척자로 평가받기도 하는데, 말을 타고가며 대화도 나누고, 비판도 하 고, 칭찬도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등의 개성있는 개인이 등장하며, 동시에 각각의 계층을 대표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그 주장의 근거. 또 이런 순례자들 간의 상호작용이 각 이야기들을 더욱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주 기도 한다.

앞서 여관 주인의 내기에 따라 총 30명에게 4개씩의 이야기를 시켜 120개의 이야기를 만들려던 대작의 의 도는 초서의 사망으로 흐지부지되고, 결국 22개의 완성된 이야기와 2개의 미완성 이야기로 총 24개의 이야 기만이 남았다. 당시 르네상스 부흥에서 뒤쳐져 있던 영국의 발전 양상과는 다르게 초서의 경우 이탈리아 프랑스외교관으로 돌아다니며 쌓은 경험을 캔터베리 이야기에 넣어 상당히 생생한 묘사로 인물들을 써넣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식자의 글과 달리 지배적 담론에 종속되지 않고 음담패설이 난무하는 통속적인 이야기를 하는 데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초서가 쓴 여러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초서가 집필 도중 죽음으로써 제대로 된 구조를 갖추지 못했다. 사후 그의 친지들이 이야기들을 일관된 구조의 판본으로 엮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여러 개의 단장(Fragment) 으로 이야기들이 묶이게 되었다. 판본에 따라 이 이야기 또는 단장의 순서가 바뀔 수 있다.
런던에서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가는 30여명의 길손이 있는데, 우연히 한 일행이 되어 서더크(Southwark)의 타바드(Tabard) 여관에 모이게 된다. 거기서 여관 주인이 "여행길에 적적할 테니 가는 길에 2번, 오는 길에 2번으로 한 사람당 총 4번의 이야기를 하여 가장 훌륭한 이야기를 한 이에게 공짜 저녁 식사를 제공하자"는 내기를 제안하고, 순례자들은 이에 응해 이야기 시합을 벌이게 된다.

가장 높은 계급인 기사의 일행이 먼저 소개되고, 그 다음으로 수녀 일행, 그 뒤엔 평민들이 소개된다. 대부분 서시에서 소개되나, 성당 참사회원의 향사의 경우 순례길에서 만나게 된다.

  • 기사 Knight
  • 진실, 명예, 관용, 예의 등 기사도의 본분을 추구하는 기사로, 왕에 대한 의무를 다하며, 세계 곳곳의 원정에 참가하여 전투를 치루고, 마상시합에 참여해 승리하며 명성을 쌓았다. 이렇게 높은 명성을 가 짐과 동시에, 매우 사려깊고 겸손한 성격으로, 한 번도 남을 욕해 본 적이 없을 지경이라고 한다. 막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성지순례에 참여하게 되었기에 의복도 두꺼운 천옷 위에 사슬갑옷을 입고 있다. 
    • 종사 Squire
    • 기사가 데리고 다니는 아들. 20살 쯤 되는 혈기왕성한 젊은이로,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다. 키는 작지도 크지도 않으며, 민첩하고 힘 또한 좋다. 아버지처럼 원정에도 몇 번 참여했으며, 기 마술은 물론이고 노래와 춤, 그림과 글에도 능하다. 나이는 어리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잘 보이 기 위해 예의 바르고 올바르게 처신하고 다니며, 이 애인 때문에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 할 정 도다. 붉고 흰 꽃무늬로 수놓아진 옷을 입고 있다.
    • 향사 Yeoman
    • 기사의 시종. 소박한 성격의 기사라 시종도 이 사람뿐이다. 짧게 깎은 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다. 향사는 이러한 여행을 즐기는 사람으로, 에서 사냥하는 법을 잘 알고 있는 데다가 숲의 수호성인인 크리스토퍼 성인의 은 브로치를 하고 있어, 초서는 향사를 산지기로 본다. 초록색 조끼와 두건을 쓰고 있으며, 활과 화살, 칼과 버클러, 사냥용 뿔나팔, 단검을 가지고 있다.

수녀원장 Prioress
궁정식 예절과 품위를 지키려 노력하는 원장 수녀로, 영국프랑스 방언을 유창하게 구사한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마음 이 여린 사람이라, 덫에 걸려 죽거나 피를 흘리는 쥐만 봐도 눈물을 흘리고, 키우던 개가 한 마리 죽으면 울곤 했다. "사랑 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는 문구가 새겨진 금 브로치를 달고 있다. 3명의 사제와 1명의 동료 수녀를 대동하고 다닌다.

  • 2번째 수녀 Second Nun
  • 수녀원 지도신부 Nun's Priest 무역상 Merchant
    언제나 이야기가 돈벌이 쪽으로 흐르는 상인. 갈퀴 모양의 수염을 하고 있다. 환전에 능하며, 그가 돈을 빌려줄 때는 너 무 당당하고 근엄해서 사람들은 그가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한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의 옷을 입고, 플랑드르 산 비버 털가죽 모자를 썼다.
    서생 Clerk
    논리학을 전공하는 옥스퍼드 대학의 대학생. 여윈 몸에 헤진 외투를 걸치고 있다. 모든 신경을 공부를 하는데 쏟아, 돈이 생기는 대로 책을 사거나 공부를 하는데 써 버렸다. 신중하게 말하는 성격으로, 언제나 도덕적이고 깊은 의미를 가진 말 을 한다. 지주 Franklin
    혈색이 좋고 하얀 수염을 기르고 있다. 창고에 먹을 거리가 다양하고 풍부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며, 본인도 한 가닥하는 식도락가다. 치안판사의 재판에서 의장직을 맡거나, 지역을 대표하여 회의에 참가하거나, 지역 보안관 및 회계 감사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 요리사 Cook
    • 조합원들이 데리고 온 요리사. 맥주를 감별하는 재주가 뛰어나며, 요리 솜씨가 일품이다. 선장 Shipman 의사 Physician
      바쓰의 여장부 Wife of Bath
      방앗간 주인 Miller
      허풍쟁이에 음담패설가로, 건장한 체격과 큼직한 골격을 지닌 근육질의 남자이며, 씨름대회에 출전해 상금을 타오기도 했다. 방앗간에 맡긴 곡식을 몰래 훔치거나 삯에 바가지를 씌우는 데 능통하다. 하얀 코트에 파란 모자를 쓰고 있다. 소환리 Summoner
      면벌부 판매자 Pardoner 여관주인 Host
      성당 참사회원 Canon
    • 조달인 Manciple
      청지기 Reeve
      마르고 병에 걸린 듯한 신체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서시를 보면 소작농들을 감시하는 직책답게 농업의 대한 능력은 꽤나 출중했던 것 같고, 소작농들도 그를 무서워하고 감히 속히지 못했던 듯하다. 흥미로운 점은 하층민인 중세 청지기 의 특성상 부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주인에게 돈을 빌려줄 정도로 부유하다는 것이다. 주인의 재산을 몰래 훔쳐서 그럴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서시에선 그러한 점을 조금씩 암시하고있다.
    • 주임신부 Parson
      농부 Plowman
      주임 사제의 동생.
    • 다트머스 출신의 선장.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의 피부를 가지고 있다. 무역상들의 포도주를 빼돌려 마시거나, 싸움에서 상대를 바다에 던졌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등, 바다 사나이다운 호걸이며, 그와 동시에 조수와 조류, 항구와 해로에도 빠삭해 능히 따를 사람이 없다.
  • 조합원들 Guildsmen
    잡화상, 염색공, 목수, 직조공, 양탄자공으로 교구 조합원들이다. 조합의 높은 자리에 위치한 부유한 시민들이다. 모두 조 합의 제복을 입고 있으며, 순은으로 만든 칼집에 아름다운 수가 놓인 지갑과 허리띠를 차고 있다.
  • 법률가 Man of Law
    그 지혜로 명성이 높은 최고 변호사. 1066년 이래 있었던 모든 판례를 꿰고 있으며, 서류를 작성하는 재주가 뛰어나다. 순회재판 등에서 판사 역을 하여 보수를 많이 받았으며, 부동산을 사 모으는데 일가견이 있다. '실제로도 바쁜 몸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더 바빠 보인다'라고 묘사되는 걸 보면 은근히 자신의 직무에 자부심을 가지고 이를 티내는 듯 하 다. 염색한 외투를 입고 금속 장식이 박힌 비단 허리띠를 차고 있다.
  • 수사 Monk
    수도원의 관리인. 풍채 좋게 살찐 체형에 준수한 외모, 번들거리는 머리를 가지고 있다. 수도원의 옛 회칙이 시대에 뒤떨 어지고 엄격하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회칙을 따르고 있다. 말을 타고 사냥하는 것을 즐겨 돈을 아끼지 않으며, 날쌘 사냥 개도 기르고 있다.
    탁발수사 Friar
    이름은 휴버트(Hubert). 자기 이익과 부를 쫓는 탁발수도자로, 자신이 교황에게서 죄를 사해주는 특권을 받았다고 말하 고 다닌다. 부유한 향사나 부인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고해성사에선 '가난한 교회에 재산을 내놓는 건 죄를 깊이 뉘우친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재산이 많은 이들은 더 쉽게 죄를 사면해준다. 체면도 안 서고 돈도 안 되기에 문둥이나 거지들을 멀리하고, 여관 주인이나 작부들과 어울려 다닌다. 돈이 될 것 같은 곳엔 어김없이 기어 들어가 봉사했으며, 해마다 권리 금을 내 독점적인 탁발 활동을 하고 다닌다. 합법적으로 얻는 수익보단 탁발로 돈을 더 벌며, 차림새는 수도자라기 보단 박사나 교황과 비슷하다.

성당 참사회원의 향사 Canon's Yeoman 초서 Chau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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