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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개발 경제 일반상식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 수업 365 3

by 비사벌 202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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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 카인과 아벨

카인(히브리어: יִןקַ)과 아벨(히브리어: הֶבֶל)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이브의 두 아들이 다. 형 카인은 농부였고 동생 아벨은 양치기였다. 카인은 사람이 낳은 최초의 사람이었고, 아벨은 최초 로 사망한 사람이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최초의 살인을 저질렀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에서는 이들을 단순히 아담의 아들들(아랍어: ابني آدم)이라고 한다.

카인
카인(
히브리어: יִןקָ) 또는 가인은 히브리어 성경구약성경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큰아들이다. 그의 히브리 이름 Qyin은 몇몇 셈족의 언어에서는 ‘대장장이’를 뜻한다. 창세기는 이 이름을 ‘얻다(קנה)’라는 동사에 접근시켜 ‘하와는 가인을 낳아 “나는 야훼께 아들을 얻었구나”’(창세 4:1)라 고 말한다. 최초의 농부인 카인은 수확물을 하느님에게 바쳤다. 그러나 하느님은 겉으로 보기의 아름 다움보다 정성을 더 원하시는 분인 관계로 목동인 동생 아벨의 제물을 더 좋아했다. 이에 질투를 느낀 카인은 아벨을 몰래 꾀어내어 돌로 쳐서 죽임으로써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 벌로 카인을 영원한 유랑 생활에 몰아넣고 목숨만은 살려주기로 했다. 이때 카인은 추방되면서 하 느님에게서 ‘카인의 표식’이라는 표를 받았는데, 이는 살인자의 표식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다른 자 식(또는 그 후손)이 카인을 해치지 못하게끔 하느님이 보호해주고 있다는 보호자의 표식이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아들 에녹을 낳은 후 도시의 건설자가 되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형에게 죽임당한 아벨 의 원한에 찬 목소리를 들으셨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하느님이 민중의 하느님임을 말하고 있다. 창세기 4장 25절에 따르면 은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에 태어났으며 하와는 셋을 하나님이 아벨 을 대신하여 정해준 아들이라고 믿었다.

아벨

아벨은 히브리 성경구약 성경창세기에 나오는 아담하와의 둘째아들이다. 최초의 목동인 아벨 은 자신이 기르는 가축 중 가장 품질이 좋은 가축으로 골라서 하나님에게 바쳤다. 하느님은 정성껏 준 비한 아벨의 제물을 즐겁게 받아들인 반면 대충 준비한 가인의 제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에 질투 를 느낀 가인은 아벨을 몰래 꾀어내어 돌로 머리를 내리쳤다. 형의 공격을 받은 아벨은 그 자리에서 즉 사했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 벌로 가인을 영원한 유랑 생활에 몰아넣고 목숨만은 살려주기로 했다. 이 때 가인은 추방되면서 하느님에게서 ‘가인의 표식’이라는 표를 받았다. 아담 또는 아벨의 후손들이 가 인에게 보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였다.

022.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그리스어: Αλέξανδρος Γ' ο Μέγας 알렉산드로스 감마 호 메가스 الإسكندر الثالث الأكب :라틴어: Alexander III Magnus 알렉산데르 테르티우스 마그누스[*], 아랍어 ,]*[ 알이스칸다르알탈리트알아크바르[*] 기원전356년7월20일~기원전323년6월10일)또는알ر 렉산더 대왕은 고대 그리스 북부의 왕국 마케돈아르게아다이 왕조 제26대 군주이다.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와 오리엔트 지방에 대한 공격적 팽창으로 패권을 잡아 마케돈의 바실레우스(군 왕), 코린토스 동맹헤게몬(패자), 페르시아샤한샤(왕중왕), 이집트파라오를 겸임하고 스스로 를 퀴리오스 티스 아시아스(아시아의 군주)라고 칭하였다.

기원전 356년 펠라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는 20세의 나이로 아버지 필리포스 2세를 계승해 바실레 우스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치세 기간 대부분을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미증유의 군사 정복 활동으로 보냈다. 30세가 되었을 때 그리스를 시작으로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 도 북서부에까지 확장되었다. 그 이전까지 고대 서양에 전례가 없던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전투에 서 패배한 적이 없고,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유년기의 알렉산드로스는 16세가 될 때까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기원전 336년 부왕 필리포스가 암살된 뒤 왕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가 개척한 부강한 왕국과 숙련된 군대를 물려받았다. 아버지에 이어 코린토스 동맹의 패자로 추대된 알렉산드로스는 그 권위 를 이용해 팽창 정책을 시작했다.[5][6] 기원전 334년 그는 소아시아에서 군림하던 아케메네스 제국(페 르시아 제1제국)을 침공하여 10년에 걸친 원정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수스 전투가우가멜 라 전투 등 몇 차례의 결정적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분쇄했고, 마침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페르시아 제1제국을 멸망시켰다.[b] 이 시점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돈 제국의 강 역은 아드리아 해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렀다.

"세계의 끝"을 보겠다는 열망으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6년 인도를 침공했으나 병사들의 반발로 회군하였다. 바빌론을 제국의 수도로 삼기 위한 개발을 계속하던 와중이었던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 로스는 계획했던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시작하지 못한 채 바빌론에서 사망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은 그가 죽자마자 일련의 내전으로 산산이 조각났고, 조각난 각각의 지역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 군들과 참모들이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를 자칭하면서 각각 왕을 칭하고 할거하였다. 이들을 디아도 코이라 한다.

정확한 날짜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고대 그리스의 아티케력으로 여섯 번째 달인 기원전 356년 7 월 20일경,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태어났다고 추정된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의 네 번 째 부인이며, 에피로스의 왕 네오프톨레모스 1세의 딸인 올림피아스의 아들이었다. 필리포스 2세 는 일곱 또는 여덟 명의 아내가 있었으나, 알렉산더를 낳음으로 인해 올림피아스가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아내가 되었다.

알렉산더의 탄생과 어린 시절을 둘러싼 몇 가지 신화가 있다. 고대 그리스 전기작가인 플루타르코스 에 따르면 올림피아스는 필리포스 2세와 결혼한 첫날밤 전날 저녁에 넓고 멀리 퍼지는 불꽃을 만드는 천둥이 그녀의 배를 관통하는 꿈을 꾸었다고 하며, 필리포스 2세는 결혼식 며칠 뒤 배에 사자의 그림 이 그려진 올림피아스를 구하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꿈들에 많은 해석의 여지 를 남겼다. 올림피아스가 결혼식 전에 임신했다는 것을 그녀의 배의 인장이 나타낸다거나, 알렉산더 의 아버지가 제우스라는 것이다. 고대의 시사가들은 알렉산더의 신성한 혈통을 널리 알린 올림피아스 의 야심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알렉산더가 태어난 날 필리포스 2세는 전쟁 준비를 하고있었다. 같은 날 왕은 파르메니온일리리아 파이오니아 왕국 연합군을 무찔렀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의 말은 올림픽 게임에서 승리하였다. 또 한 그날엔 에페소스에 위치한 아르테미스 신전이 소실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이 사건에 대해 알렉산 더의 출생을 목격하기 위한 아르테미스가 자리를 비워 신전에 불이 난 것이라고 설명된다. 이러한 전 설은 알렉산더가 왕이 된 후에 나타났고 어쩌면 그가 초인이며, 애초부터 위대한 업적을 성취할 운명 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스스로 찾아낸 것 일 수도 있다.

그는 생의 초기에 클레이토스의 누나인 라니케에 의해서 양육되었고, 시간이 지나 올림피아스의 엄격 한 친척인 에피로스의 레오니다스아카르나니아의 리시마코스에게 교육받았다. 알렉산더는 마케도 니아의 귀족을 양육하는 방식으로 읽기, 악기, 놀기, 말타기, 사냥, 싸움 등을 교육받았다.

알렉산더가 열 살이 되던 해 테살리아의 상인이 왕에게 13 달란트 짜리 말 한 마리를 가져왔다.말은 왕을 포함한 그 누구도 태우지 않을려고 난동을 부렸기에 왕은 말을 치워버리라고 명했다. 그러나 알 렉산더는 말이 자신의 그림자를 무서워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감지했고, 자신이 말을 길들이겠다고 강력히 왕에게 요청해 결국 허락을 받아 말을 진정시킨후 말에 올라 말을 타고 질주하는데 성공했다. 플 루타르코스는 왕이 알렉산더의 이 매우 용기있고 절륜한 행동을 보고 매우 기뻐 눈물을 흘렸고, 이윽 고 말에서 내린 알렉산더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아들아! 너의 그릇에 맞는 왕국을 만들어라. 마케도 니아는 네게 너무 좁다!”라고 말했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말을 알렉산더에게 주었다. 알렉산더는 말을 ‘황소머리’라는 뜻의 부케팔라스라는 이름을 지었다. 부케팔라스는 알렉산더를 인도까지 태웠다. 그 말이 죽을 때 알렉산더는 도시의 이름을 자신의 말 이름을 따서 ‘부케팔라스’라고 지었다.

알렉산더가 13살이 되었을 때 필리포스는 그를 위한 교사를 찾기 시작했고, 이소크라테스세페우시 포스 같은 학자를 눈여겨보았고 결국에 왕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골랐고 미에자에 있는 님프의 신전을 교실로 제공했다. 알렉산더를 가르친 대가로, 필리포스는 본인이 파괴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 스타 게이라를 재건하는 것을 허락하여, 노예가 된 전 시민들을 다시 사들이거나, 해방시키고, 추방자들을 용서하여 도시에 다시 사람을 채워넣었다.

미에자는 알렉산더와 프톨레마이오스, 헤파이스티온, 카산드로스와 같은 동문수학한 마케도니아의 귀족 친구들에게 기숙학교와 같았다. 이중 많은 학생들은 알렉산더의 친구 또는 미래의 장군이 되었 고, 차후에 ‘콤파니온 기병대’(Companions)로 알려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와 친구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쳤고, 그의 지도 아래에 알렉산더는 호머의 작품 특히 《일리어드》에 관심을 가졌 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에게 주석이 달린 복사본을 주었고 그는 전쟁까지 그 사본을 들고 다녔다.

필리포스 2세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받던 교육을 열여섯에 마치게 하여, 알렉산더를 섭정으로 남기 고 비잔티온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왕의 부재 중 트라키아는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알렉산더는 빠르게 대응해 그들을 고향에서 쫒아냈다. 그리고 그리스와 함께 식민지화 시 키고 알렉산드로폴리스라고 이름지었다.

필리포스 2세가 돌아와서 트라키아 남쪽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약간의 군대와 함께 알렉산더를 파 견했다. 그 동안에 암피사에서는 델파이 옆에 아폴론 신전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신성모독은 필리포스에게 더 많은 그리스 내정 간섭을 용이하게 해 줄 것이었다. 트라키아 내전이 지속 중인 상태 에서 필리포스는 알렉산더에게 그리스전을 위한 병력을 모으라고 명한다.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가 끼 어들 것을 우려하여 알렉산더는 그 병력이 일리리아 지방을 공격하기 위한 것처럼 눈속임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일리리아는 마케도니아를 침략했고 알렉산더에게 격파당했다.

기원전 338년에 왕은 그의 아들과 합류했고 테르모필레를 지나 남쪽으로 진격했고 테바이 수비군의 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점령했다. 아테네와 테바이쪽으로 며칠 간의 행군 뒤에 그들은 엘라테아 지방 을 점거하기 원했다. 데모스테네스가 이끄는 아테네군은 마케도니아에 대항해 테바이와의 동맹을 원 했다. 마케도니아와 아테네 양 쪽 다 테바이의 환심을 사기 위해 외교사절단을 보냈고 결국 테바이는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다. 필리포스는 엠피사로 진격하여 데모스테네스가 보낸 용병들을 잡으며 도시 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필리포스는 엘라테아로 돌아와 아테네와 테바이에 마지막 평화 제안을 보냈 고 양쪽 모두 거절했다.

필리포스가 남쪽으로 진격하자 적들은 보이오티아카이로네이아에서 그를 막아섰고 뒤이은 카이로 네이아 전투에서 필리포스는 우익, 알렉산더는 좌익을 지휘하고 그의 믿을만한 장군들을 동행했다. 고대 정보에 따르면 양쪽 모두 거칠게 싸웠다. 필리포스는 아테네의 적군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의 도적으로 좌익을 후퇴시키고 그리하여 그들의 대열을 부쉈다.

알렉산더가 처음으로 테바이군의 대열을 부수고 좌익이 따라붙었다. 적군의 응집력에 피해를 입혔기 에 필리포스는 전방으로 계속 압박하고 적군을 빠르게 둘러쌌다. 아테네의 패배로 인해 테바이군은 항복했고 좌군은 계속 항전했으나 패배했다. 케에로니아 전을 승리한 이후 왕과 아들은 저항없이 펠 로폰네소스로 진격해 모든 도시에 환영을 받았으나 스파르타에 도착한 후, 스파르타는 저항했지만 전 쟁까지 치닫지는 않았다. 코린토스에서 왕은 헬레네 동맹을 창설했고 스파르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 시가 포함됐다. 필리포스는 그 당시 동맹 내에서 헤가몬(최고지휘자)라고 불렸고 페르시아 제국을 공 격할 계획을 발표했다.

필리포스가 마케도니아에 돌아와 그의 장군 아탈루스의 조카인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와 사랑에 빠져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의 자식들은 완벽한 마케도니아 혈통이기에 이 결혼은 알렉산더의 왕위 계승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혼식 연회때 취한 아탈루스는 공석에서 신에게 이 결혼이 완벽한 혈통 을 만들기를 신께 빌었다. 삼촌 아탈루스는 취한 채로 마케도니안은 신에게 그의 조카를 통한 왕국의 적법한 후계자를 간청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것은 알렉산더의 신경을 거슬러 알렉산더는 컵을 아탈루 스의 머리에 던져버렸다. “나쁜 놈! 내가 서자라는 것인가?” 라고 말했고 왕은 아탈루스의 편을 들어 일어나 칼을 뽑아 알렉산더를 죽일려고 달려갔다. 그러나 요행인지, 성급한 분노인지, 와인에 취한 탓 이지 그는 발을 헛딛어 바닥에 넘어져버렸다. 알렉산더는 눈을 흘기며 왕을 모욕했다. “이것 봐라. 유 럽에서 아시아까지 정복하려고 하는 사람이 옆 자리로 가는 것도 못해서 넘어지다니."

알렉산더는 어머니과 마케도니아에서 도망쳤고 에피로스의 왕이며 어머니의 오빠인 알렉산더 1세에 게 엄마를 위탁했다.

그는 일리리아로 계속해서 갔고, 몇 년 전에 일리리아와 싸워 이겨 일리리아에게 패배를 안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님처럼 대접받았다. 그러나 필리포스는 정치, 군사적으로 교육받은 왕자를 버릴 생 각은 없었고, 그래서 양측의 사이를 조정한 가족의 친구인 데마라투스의 노력으로 6개월 뒤에 마케도 니아로 복귀하게 된다.

다음해 카리아의 페르시아인 지도자인 픽소다루스는 그의 큰딸과 알렉산더의 이복형제인 아르히데 우스의 결혼을 제안했다. 올림피아스와 몇몇 알렉산더의 친구는 왕이 아르히데우스를 후계자로 삼으 려는 필리포스의 의도라고 생각했고, 알렉산더도 같은 생각이어서 그는 테살루스를 사절단으로 보내 응답했다. 테살루스는 픽소다루스에게 적법한 후계자가 아닌 아들과의 이외의 결혼은 해선 안 된다 고 하며, 알렉산더를 대신해서 추천하였다. 필리포스는 이 이야기를 듣고 협상을 멈추고 알렉산더에 게 마케도니아의 태자로서 기껏해야 페르시아의 한 지방관의 딸과 혼인을 할려고 하는 그릇밖에 안 되었냐고 하면서, 그 정도의 그릇밖에 안 된다면 절대로 이 나라를 맡길 수 없다며 심하게 꾸짖고, 이 후 그는 알렉산더의 친구 4명을 추방하고 테살루스를 속박하여 데려오라고 코린티아에게 명하였다.

기원전 336년 여름, 왕의 딸인 클레오파트라와 올림피아스의 오빠 알렉산더 1세와의 결혼식이 열렸 고 왕은 그의 경호대의 대장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한다. 그는 도망치려 했지만, 덩굴에 걸려 넘어 지고 알렉산더의 동행을 포함한 그의 추종자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로 인해 알렉산더는 귀족과 군대 의 지지로 스무 살에 왕으로 추대되지만, 필리포스와 알렉산더의 사이는 평소 필리포스의 호색 행각 들로 인한 알렉산더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와 알렉산더의 상처,취중에 벌인 일이긴 하지만 필리포스 가 알렉산더를 죽일려고 한 점, 그리고 그 이후 한동안 알렉산더와 올림피아스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타국으로 망명을 해야 했던 점 등으로 인해 좋지 못했고, 또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필리포스의 암살 배후로 알렉산더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가 가장 유력하게 거론이 되었는데도, 알렉 산더는 필리포스의 암살 사전이나 사후에 올림피아스를 제지,제제하지 않은 점, 필리포스의 암살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본 사람들은 알렉산더 자신과 그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라는 점 등으로 필리포스 의 암살 배후로 알렉산더와 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알렉산더는 그의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그의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친족을 제거 하고 또한 두명의 마케도니아 왕자도 죽였지만, 세 번째 왕자 알렉산더 린세스테스는 살려주었다. 어 머니 올림피아스와 필리포스 2세 사이에서 낳은 클레오파트라 유리다이스와 유로파가 있었는데, 산 채로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알렉산더는 격분했다. 그리하여, 클레오파트라의 삼촌이자 소아시아 군의 선발대 사령관인 아탈루스를 죽이라 명했다.

아탈루스는 그 당시 아테네의 결함의 가능성에 대하여 데모스테네스와 연락하고 있었다. 알렉산더를 심하게 모욕했고 클레오파트라를 죽여 그를 살려두기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아리히데우스는 정신적 불구가 되었기 때문에 살려두었고 아마도 올림피 아스에 의한 독을 먹인 탓일 것이다.

필리포스의 죽음은 아테네, 테바이, 테살리아, 마케도니아 북부에 위치한 트리키아 등 여러 도시의 반 란을 일으켰고 반란 소식이 알렉산더에게 닿았을 때 그는 빠르게 대응했다. 정치적으로 대응하라는 조언을 듣고도 그는 3천의 본국 기병을 징집하여 테살리아로 향했다. 그는 올림푸스 산과 오사산 사 이 길목에 위치한 테살리안 군을 찾아냈고 병력을 오사산으로 향했다. 적군이 다음 날 일어났을 때, 그들은 알렉산더가 기병과 함께 뒤에서 바로 포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알렉산더는 아테네와 평 화를 원했고 알렉산더는 반역자를 용서했다.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의 유명한 일화는 알렉산더가 코 린토스에 머물 때 일어났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에게 “무슨 소원을 들어줄까.”라고 물어보니 철학 자는 귀찮다는 듯이 알렉산더에게 햇빛을 가리고 있다고 옆으로 비켜달라고 했다. 알렉산더는 기뻐하 며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코린토스에서 알렉산더는 헤게 몬이라는 칭호를 얻고 페르시아를 향한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준비하는 동안 테라시안 폭동을 보고 받았다.

아시아를 지나기 전에 알렉산더는 북쪽 경계를 안전하게 만들길 원했다. 기원전 335년에 그는 몇몇 반란을 진압하려고 출정했다. 암피폴리스에서 출발하며 그는 자유 테라시안의 국가가 있는 동쪽 해무 스로 진군하며 트라키아 군을 물리치고 마케도니아군은 트리발리로 진군했고 리지누스강에서 적을 무찔렀다. 알렉산더는 3일을 데누베로 진격하여 강 반대편에서 게테 부족을 마주쳤다. 그는 밤에 강 을 건너 그들을 놀래키고 첫 소규모 기병 충돌 이후 그들이 후퇴하도록 만들었다.

일리어라의 왕인 클레이토스가 알렉산더의 권위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출정 한 알렉산더는 계속해서 승리했고 두 지도자를 도망치게 만들었다. 이 승리와 함께 그는 북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알렉산더가 북쪽에서 전쟁 중일때 테바이아테네는 다시 반기를 들자 알렉산더는 즉시 남쪽으로 향 했다. 다른 도시가 다시 망설이는 동안 테바이는 싸우기로 했지만, 저항은 무의미했고 알렉산더는 도 시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군인들과 남자 민간인들은 모조리 학살하고 여자와 어린이들은 모두 노예로 만들어버렸고, 이후 철저하게 파괴된 테바이 도시 자체는 다른 보이오티아 도시들 사이로 나눠버렸 다. 테바이의 멸망은 아테네를 주눅들게 했고, 그리스 전역을 공포에 몰아넣어, 이후 그리스는 더 이 상 알렉산더에게 저항하지 못했고, 이후 안티파트로스를 대리인으로 세운 알렉산더는 아시아 전쟁을 시작했다.

알렉산더스는 기원전 334년 6100명의 기병과 38000명의 선원을 태운 120척의 배를 포함한 약 41800명의 병력과 함께 헬레스폰투스를 건넜다. 마케도니아와 다양한 그리스 도시국가 용병과 봉건 적으로 징집된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기록자마다 말이 다른 부분) 알렉산더는 창을 아시아 땅에 꽂으며 신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말하며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정복할 야망을 보였다. 이것은 또 한 전쟁을 향한 열망과 아버지의 정치선호적인 부분과 반대된다.

초기의 페르시아군과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기원전 334년 4월 8일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의 지방 수도와 사르디스의 재무금고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그는 아오니아 해안선을 따라 계속 진격 했고, 도시들마다 자치권과 민주주의를 승인하였다. 아르케메네스 군이 지키는 밀레토스는 정교한 페 르시아 해군을 상대로 정교한 공성전을 필요로 했다. 더 남쪽인 카리아할리카르낫소스에선 알렉산 더가 성공적으로 그의 첫 대규모 공성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결과적으로 그의 적 로데스의 용병수
멤논과 페르시아 카리아의 총독 오론토바트스를 바다로 철수시켰다. 알렉산더는 카리아 정부를 떠 나 차후에 알렉산더에게 카리아 지방의 여왕으로 선택되는 아카톰니드 왕조의 일원인 아다에게로 향 했다. 할리카르낫소스로부터 알렉산더는 리카아 산까지 진격했고, 페르시아 해군 기지를 저지하기 위 해 팜필리아 평야에서 해안 도시들을 공격했다. 팜필리아로부터 해안가까지 주요한 항구가 없기에 알 렉산더는 섬으로 향했다. 테르메소스에서 알렉산더는 피디시안을 모욕했으나, 난장판으로 만들진 않 았다. 고대의 고르디움의 수도에서 알렉산더는 아무도 풀지 못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었고, 알렉 산더는 매듭을 어찌 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칼로 매듭을 베었다.

알렉산더는 시리아레벤트의 해안가를 정복하는 작업을 계속했고 기원전 332년 그는 튀루스를 공 격했고 긴 공성전 끝에 점령한 후, 테바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군인과 남성은 모조리 학살하고 여자 와 어린이는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다. 알렉산더가 튀루스를 파괴했을 때 이집트로 가는 길목의 대부 분의 마을은 빠르게 항복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해를 입히지 않고 남쪽 이집트로 향했다. 그러나 가자 의 저항을 직면한 알렉산더는 강하게 무장된 언덕에 위치한 공성전을 요하는 기지를 마주했다. 알렉 산더의 공학자는 높은 위치를 근거로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으나 이것은 알렉산더의 의 욕을 높일 뿐이었다. 3번의 성공적인 공성전 이후에 기지는 함락되었다. 알렉산더는 이때 심각한 어 깨부상을 당했다.

기원전 332년 후반기에도 알렉산더는 계속해서 이집트로 진격했고, 그는 해방자로 여겨졌다. 그는 리 비아 사막에 있는 시와 오아시스의 예언에 나와 있는 아몬의 아들이라고 칭송받았고, 그러므로 알렉 산더는 자주 제우스 아몬이 그의 진정한 아버지로 여겨졌으며 그가 죽은 이후 그의 신성함의 상징으 로 양의 뿔이 동전에 묘사되어 있다. 그가 이집트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이집트에 지 었고 그의 죽음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번영하는 수도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는 이집트를 떠나 동쪽 메소포타미아로 향하며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를 다시 물리쳤다. 다리우스는 한 번 더 도망쳤지만 알렉산더는 아벨라까지 쫒아갔다. 가우가멜라 전투는 양쪽의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충돌이었고, 다리우스가 산을 넘어간 동안 알렉산더는 바빌론을 점령했다. 바빌론으로부터 알렉산더는 아케메니드 왕조의 수도인 수사까지 도달했고 재무관을 생포했 다. 그는 병력의 대부분을 왕의 길을 따라 페르시아의 의식용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로 보냈다. 알렉산더 는 스스로 도시로 직행하는 군에 자원했다. 그리고 그간 아리오바르자네스 군에게 계속해서 막혀온 페 르시안 게이트의 관문을 기습했고 그리고 수비군이 재무관을 털기 전에 빠르게 진행했다.

페르세폴리스로 들어가는 중에 알렉산더는 부하들이 도시를 며칠간 약탈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알렉 산더는 수도에 5개월 간 머물렀다. 그가 머무는 동안 적시스의 동쪽 입구에서 불이 번져나와 도시로 퍼 졌다, 음주사고이나 적시스의 두 번째 페르시안 전쟁 기간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운 것에 대한 고의적인 복수의 가능성을 수반했다. 1년 뒤 그가 태운 도시를 다시 방문하며 알렉산더는 불태운 것을 후회했고,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더가 멈추고 적시스에게 살아있는 사람인 것 처럼 말을 걸었던 얘기 를 기록했다.

“그리스 침략으로 인해 누워있는 당신을 두고 지나가야 하나, 아니면 당신의 위대함이나 다른 면의 미 덕 때문에 다시 한 번 기념비를 세워줘야 하나?”

알렉산더는 곧 다리우스를 추격했고 처음으로 메디아파르티아로 진격했다. 페르시아 왕은 더 이상 자신의 왕조를 지킬 능력이 없었고, 그리스인 총독이자 친척인 베수스에게 잡혔다. 알렉산더가 도착하 자 베수스는 중앙아시아 깊이 후퇴해 게릴라전을 진행하려는 다리우스를 죽이고, 스스로 다리우스의 후계자라고 칭했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시체를 화장해 그의 아케메네스 왕조 전임자의 법적인 묘 지에 묻었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가 죽어가며 자신을 다음 왕위 계승자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아케 메네스 왕조는 다리우스와 함께 멸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알렉산더는 베수스를 왕위 강탈자로 여기고 그를 무찔렀다. 이 전쟁은 중앙아시아 쪽을 목표로 한 거대 전쟁으로 변했다. 알렉산더는 여러 도시들을 더 찾아냈고 전부 알렉산드리아로 명했다. 이 전쟁 동안 알 렉산더는 메디아, 파르티아, 아리아, 드란지아나, 아라코시아, 박트리아, 스키타이를 점령했다.

스피타메네스, 소그디아나에서 명확한 편을 밝히지 않았던 그는 기원전 329년 베수스를 배신하고 알렉 산더의 믿음을 받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붙었고 베수스는 처형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 알렉산 더는 아크사르에서 유목 민족의 기습을 다루고 있었는데, 스피타메네스는 소그디아나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더는 스키타인 군대를 개인적으로 아크사르 강에서 물리치고 스피타메네스를 향해 출 발했고 가바이 전투에서 그를 무찔렀고, 후에 스피타메네스는 평화를 원한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인도 공략

스피타메네스의 죽음 이후 그와 록사나의 결혼은 총독부와의 관계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알렉산더는 인 도 원정에 나섰다. 그는 현재 파키스탄 지역의 전 족장을 초대해 그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할 의도였는 데, 인더스부터 하이다스페스까지 이르는 영역을 가지고 있는 왕 옴피스는 알렉산더에게 순응했지만, 산악 지역의 족장들은 복종을 거부했다.

기원전 326년~기원전 327년의 겨울 알렉산더는 여러 부족들을 상대로 직접 전쟁을 지휘했다. 치열한 경쟁에 알렉산더의 어깨부상이 뒤따랐지만, 결과적으로 승리한 알렉산더는 적장을 마주했다. 마사가 요 새는 알렉산더에게 발목부상을 입혔지만, 며칠의 전투 끝에 몰락했다. 쿠르티오스스에 따르면 알렉산더 는 마사가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했다. 비슷한 학살이 오르아에도 자행됐고, 그 여파로 많은 부족민들이 아르노스 요새로 도망쳤고, 며칠간의 전쟁 끝에 바로 뒤따르던 알렉산더군은 언덕 요새를 점령했다.

아르노스 이후 알렉산더는 인더스를 건너며 포루스를 상대해 대파하고 그를 사로잡았지만 포루스의 용 맹함에 감명받은 알렉산더는 그를 동맹으로 만들고 총독으로 삼았다. 그리고 근처의 소수 민족 15개 국 가들과 작은 도시 5천개의 땅들을 더해주었다. 그리고 그리스인 중 포루스의 통치를 도울 사람을 뽑았 다. 알렉산더는 히다스페스 강 반대편에 두 도시를 찾아 그의 말의 이름을 따 부카펠라스라는 이름을 짓 고, 다른 도시는 니케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갠지스 강 옆 동포루스 왕국은 난다 제국이었고, 더 동쪽으론 강가리다이 제국이었다. 보병 2만,기병 2 천에 불과한 포루스군을 상대로 13만 남짓의 병력으로 크게 고전 끝에 이긴 이후, 알렉산더군은 사기가 떨어졌고 이후 길이가 6 km 남짓에 폭이 180m 남짓한 거대한 갠지즈 강을 건너는 일이 무리로 여겨졌 고, 더 결정적으로 포루스군의 10배도 훨씬 넘는 보병 20만, 기병 8만, 전차 8천대, 전투용 코끼리 6천 마리를 거느린 간다라이와 프라이시오 족 왕들의 인도 내륙의 인도 연합군들과 전투 직전의 상황에 내 몰린 알렉산더군은 히페시스 강에서 항명사태를 일으켰다. 알렉산더는 더욱 진격하자고 설득했지만, 크 라테로스가 병사들은 가족과 고향을 보길 원한다고 알렉산더를 설득해 마침내 동의하고 남쪽으로 말머 릴 돌렸다. 그러므로 이 강은 알렉산더의 제국의 가장 동쪽이었다. 남쪽으로 말머릴 돌린 알렉산더군

인더스 강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말리족과 다른 인도 부족을 정복했으나 말리족과의 싸움에서 그의 평생의 전쟁 활동 기간 중 가장 큰 중상들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위기를 겪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는 31세에 바빌론에서 사망하였다. 알렉산더의 사망엔 두가지 다른 이야기가 있 고 서로 세부적인 내용이 다르다.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더의 사망 14일 전에 해군 제독과 밤을 세워 놀 았고, 다음날 라라시아의 메디우스와 또 술을 마셨고 다음날 고열이 발생했는데 소리조차 내지 못 할 정 도였다. 그의 사망을 걱정한 일반 병사들은 조용히 그들을 향하여 손을 흔드는 알렉산더의 옆을 지나가 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디오도로스는 알렉산더가 헤라클레스를 기리는 섞이지 않은 큰 와인잔 을 다 비운 후에 11일간을 앓아 눕고,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열병까지 발전되진 않았지만, 그는 괴로 워하며 죽었다. 아리아노스 또한 이렇게 주장하였지만 플루타르코스는 강하게 부인하였다.

마케도니아 귀족을 암살하는 경향을 가정하면 살해당한 것 같은 특징이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디오도 로스, 플루타르코스, 아리아노스 그리고 유스티누스는 알렉산더가 독살됐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유스티 누스는 알렉산더가 독살 음모의 피해자라고 말한다. 플루타르코스는 다리우스와, 아리아노스는 둘 다 그들이 일부분 만을 이야기할 뿐이라고, 이것을 날조된 정보라고 반박한다. 그 설명은 최근에 마케도니 아 총독에 의해 제거된 안티파트로스를 전혀 공정하게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라고 한다. 안티파트로스 는 알려진대로라면 그의 아들에게 알렉산더가 독살되도록 준비했고, 아리스토텔레스마저 관여되어 있 을 수 있다.

독살설의 가장 강한 논쟁은 그가 아프기 12일 전과 그의 죽음 사이의 기간이다. 그만큼 장기간 효과가 지속되는 약은 당시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2003년 BBC 다큐멘터리에서 알렉산더의 죽음을 조사 하며 뉴질랜드 국가 독극물센터의 레오는 하얀 헬레보레가 고대에도 사용되었기에 그것으로 독살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2014년 clinical toxicology schep 원고에서 알렉산더의 와인이 베라트럼 앨범이 들 어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알렉산더의 로맨스를 설명하는 사건의 과정과 중독 증상이 일치한다고 주장했 다. 베라트럼 앨범 독살은 장기적인 과정이 될 수 있고, 이것을 알렉산더의 사인을 잘 설명하기에 가장 적당한 이유를 제공한다. 다른 독살설은 2010년도로 앞당겨 그의 죽음이 위험한 박테리아로 오염된 스 틱스 강 물을 마신 것 이라고 주장한다

몇 가지 자연 질병같은 이유가 제시되었고 뉴잉글랜드의 의학저널은 그의 죽음을 장기천공에 의한 장티 푸스 감염으로 인한 마비증세라고 서술했다. 최근의 다른 분석은 화농성 척추염이나 뇌수막염이라고 한 다. 사망 원인과 유사한 다른 병은 나일강 서부 바이러스와 급성 췌장염을 의심 중이다. 자연적 원인 이 론은 또한 알렉산더의 건강이 과도한 음주와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몇 년에 걸쳐 악화된 점을 강조한 다. 헤파이스티온의 죽음 이후 알렉산더가 느낀 고통 역시 그의 건강 악화에 일조했을 것이다.

알렉산더의 시체는 사람과 비슷한 석관에 꿀을 가득 채워둔 상태로 매장되었고, 오스트리아의 골든 켓 스켓에 위치해 있다. 아엘리안에 따르면 아리스텐더라는 예언가는 알렉산더가 잠든 곳은 행복하고 절대 점령당하지 않을 곳이라고 예언했다. 아마도 십중팔구 후계자는 시체를 적법성의 상징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전 왕의 무덤은 국왕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장례 행렬은 마케도니아로 향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멤피스로 행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의 마지막 계승자 중 하나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알렉산더의 석관을 유리로 바꿔 안에 있던 동전을 바꿀 수 있게 만들었다. 최근 북부 그리스에서 발견되는 많은 수의 무덤이 알렉산더의 생몰년도와 비슷 해 그것의 원래 목표는 알렉산더를 묻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사고 있다. 이것은 알렉산더의 장례 행렬의 목표지와 일치했을 것이다.

폼페이시저, 아우구스투스 모두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무덤을 방문했고, 칼리굴라는 알렉산더의 흉갑 을 사용하려 무덤에서 꺼내갔다고 한다. 기원후 200년셉티무스 황제는 알렉산더의 무덤 공개를 금지 했다. 그의 후계자는 재임기간 무덤을 방문했지만, 그 후 무덤의 운명은 모호해졌다.
시돈 근처에서 발견된 지금은 이스탄불 유적 박물관에 있는 알렉산더의 석관이라 불리는 것은 알렉산더 의 유해를 가지고 있기에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니라, 얕은 양각으로 알렉산더와 동료들이 페르시안군과 싸우고 사냥하는 것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래 이수스 전투 이후 알렉산더에 의해 즉시 임명된 왕인 압달로니무스의 석관으로 여겨졌으나, 최근 그것은 압달로니무스의 죽음보다 먼저 만들어 진 것이 라는 의견이 나왔다. 알렉산더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워 그의 사망 소식이 그리스에 닿았을 때, 아무 도 즉각 믿지 않았다. 알렉산더에게는 적법한 후계자가 없었다.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 4세는 그의 사후 에 록사네가 낳은 유복자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동서 융합책을 꾀했다. 우선 다수의 그리스 사람을 소아시아(현재의 터키) 지역으로 이 주시켰다. 그리고 그리스 사람과 피정복 지역의 주민들을 결혼시켰고 페르시아인 관리들을 등용했다. 그 자신도 페르시아의 군주이자 적이었던 다리우스 3세의 딸과 결혼했으며, 페르시아 여성과 자신의 그 리스 군인들간의 사실혼을 정식 결혼으로 인정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동서 융합 정책은 동방과 서방문화 를 융합시켜 불교 미술에도 영향을 끼쳤고, 이로 인해 간다라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 양식이 만들어졌 다.

그는 정복지의 여러 곳에 알렉산드리아란 이름을 붙인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는 헬레니즘 문화 형성 에 큰 역할을 하였다. 도시들 중 이집트알렉산드리아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대제국의 왕이면서도 호 사를 멀리하고 절도의 덕을 간직한 인물이었다.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알렉산더의 장군들은 그에게 사후에 왕국을 물려주고 임종을 지켜볼 자가 누군지 물어보았는데 ‘가장 강한 자’라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아리아노스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더가 그 시점에서 말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그것은 출처가 불분명 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디오도로스, 쿠르티오스 그리고 유스티누스는 알렉산더가 자신의 인형이 박힌 반지를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컴퍼니온 기병의 리더인 페르디카스에게 주었고 이것은 그를 후계자로 임 명했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페르디카스는 즉시 그런 주장을 펴지 않았고, 록사네의 아이가 아들이라면 왕이 되어야 한 다고 크라테로스, 레온나토스, 안티파트로스와 함께 후견인으로서 말했다. 그러나 멜레아거의 명 아래 의 어린 아이는 이 조약이 본인없이 체결된 것이라며 거절했고, 알렉산더의 이복동생인 필리포스 아리 히데우스를 추천했다. 결국 양쪽은 타협에 이르렀고 알렉산더 4세의 출생, 이후 필리포스 3세는 이름뿐 이지만 왕이 되었다.

바빌론부는 점차 권력의 중앙이 되었고, 각각의 장군이 권력을 낙찰하곤 했다. 페르디카스가 암살된 이 후 마케도니아 군은 붕괴했고, 40여년 간의 계승 전쟁(디아도코이 전쟁)이 헬레니즘 세계가 안정된 구 역으로 공고해지기 전에 발생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 셀레우코스메소포타미아중앙아시 아, 아틀리드 아나톨리아, 안티고노스마케도니아가 서로 권력 투쟁을 벌였고, 그리고 진행과정 중 알 렉산더 4세필리포스 3세가 모두 살해당했다.

디오도로스는 알렉산더가 크라테로스에게 자세한 지침을 사망 전에 전달했다고 한다. 크라테로스는 알 렉산더의 명을 이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계승자들은 더 이상 시행하기 않기로 하고 그것들은 터무니 없고 말도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더가 가진 군에 대한 의지를 읽어냈다.

알렉산더의 유산은 그의 군사적인 정복을 넘어섰다. 그의 전쟁은 동서양간의 접촉과 거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고 동부의 많은 지역이 그리스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세운 일부 도시들은 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대다수가 21세기에도 존재한다. 그의 서기관이 기록한 그가 정복한 곳까지의 영토기록은 그리스 인들은 스스로 지중해 넘어서의 세계에 속해 있다고 믿었다는 가치 있는 기록이다.

알렉산더의 가장 직접적인 유산은 거대한 아시아 땅에 마케도니아 문화의 적용이었다. 그가 사망한 시점 에서 제국은 5,200,000 km^2(2,000,000 sq mi)였고 그 시대의 가장 큰 제국이었다. 200-300년이 지나 서까지 대부분의 지역은 마케도니아의 손아귀에 있었고, 후계자들은 적어도 초기엔 거대한 힘이었고, 이 300년간은 ‘헬레니즘 기간’이라고 자주 언급된다라고 말했다.

그의 제국의 동쪽은 생전에도 붕괴가 진행됐다. 그러나 그가 북서부 인도 대륙에 남긴 힘의 부재는 역사 상 가장 강력한 인도 왕조의 탄생을 만들었다. 이런 이점을 이용해 찬드라굽타 마우리 왕조는 다시 펀잡 의 통제권을 되찾았고, 난다 제국을 정복한 힘을 기본으로 삼았다.

정복 이상으로 알렉산더는 그의 이름을 딴 도시를 스무 개 만들었고, 대부분은 티그리스 강 동쪽이다. 처 음이자 가장 커다란 알렉산드리아이집트에 있고, 지중해 도시 중 가장 번성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 도 시의 위치는 수비와 무역로를 동시에 고려해서 자리잡았다. 알렉산더의 사후 이집트의 많은 그리스인은 그리스로 돌아가려 시도했고, 정교한 공공건물과 본질적인 인구수는 지역민과 그리스인 양쪽을 포함했 다.

‘헬레니즘화’란 단어는 독일 역사가 조안 구스타브 드로이센이 그리스 언어, 문화, 인구가 알렉산더의 정 복 이후 예전 페르시아 제국에 어떤 식으로 퍼졌는지를 표시하기 위해 만들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 들여지고 오늘날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셀레루시아 같은 곳에서 보여진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문화 를 페르시아에 주입시키기 원했고, 두 문화의 융합을 시도했다. 이것은 알렉산더가 동서양을 평준화하려 는 열망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의 계승자들은 분명히 이런 정책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헬레니즘은 전역 에 걸쳐 나타났고 계승자의 국가엔 동양화가 나타났다.

헬레니즘 문화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아테네의 것이었다. 그리스인과 그리스 넘어 마케도니아군의 밀접 한 관계는 아테네 기반 방언에 의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 그리스어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퍼져나갔고, 현대 그리스의 선조와 헬레니즘 문화권의 국제어가 되었다. 게다가 헬레니즘 시대의 도시계획, 교육, 지 방정부와 문화는 고전적 그리스적 생각에 기반을 두었고 헬레니즘 그룹으로 여겨지는 것과 다르게 진화 했다.

알렉산더와 그의 업적은 많은 로마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특히 장군들은 그들을 알렉산더의 업적과 비교하길 좋아했다. 폴리비우스는 그의 역사를 로마인들이 알렉산더의 업적을 자신의 것과 비교하게 만 드는 것부터 시작했고, 폼페이우스는 ‘매그너스’란 칭호와 알렉산더의 머리 모양을 따라했고, 당시에 위 대함의 상징으로 여겨진 260여년 된 알렉산더의 망토를 찾기 위해 정복한 영토의 동쪽을 수색했다. 카이 사르는 린시페안의 승마상의 알렉산더의 머리를 자신의 것과 바꾸었으며,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 의 알렉산더 무덤을 방문했고 일시적으로 그의 문장을 스핑크스에서 알렉산더의 모습으로 바꾸었다. 트 로이의 황제 역시 알렉산더를 존경했고, 네로칼리굴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크리누스로부터 제국의 왕좌까지 간단히 올라가보면, 마크리아니도 보석 또는 옷에 수를 넣어 알렉산더의 모습을 그들의 사람에 새겨넣었다.

반면 어떤 로마 작가들은 특히 공화당 사람들은 알렉산더를 독재적인 경향이 공화정의 가치를 얼마나 잘 지킬수 있는 지에 대한 경각심을 줄 이야기로 사용했다. 알렉산더는 또한 우정과 관용에 대한 군주의 가치에 대한 본보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또한 분노와 영광을 향한 과도한 집착의 예였다.

023. 실낙원

《실낙원》(失樂園, 영어 원제: Paradise Lost, 잃어버린 낙원)은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이 17세기에 지은 약강오보격의 서사시이다. 1667년 10권으로 초판되었으며, 약간의 수정을 거쳐 1674년 12권으로 재판 되었다. 뱀으로 변장한 사탄의 유혹에 의해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The Fall과 사 탄의 하나님에 대한 반항을 주제로 하고 있다. 밀턴은 신의 영원한 통찰력과 인간의 자유의지 간에 일어 나는 갈등을 명료하게 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에게 합당하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인간의 타락과 구원을 주제로 하고있다. 단테신곡과 함께 불후의 기독교 대서사시로 평가된다. 단테 의 신곡이 가톨릭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면, 실낙원은 개신교적/청교도적 가치관을 반영하 는 작품이다.

책의 줄거리
1권 :
지옥에 떨어진 사탄은 활활 타오르는 불바다 속에서 9일간을 지내다가 깨어난다. 천국에 있을 때의 영광과 지옥에서의 굴욕을 되씹으면서 하느님에 대한 보복을 결심하고, 옆에 있는 천사들을 불러일으켜, 사탄의 궁전인 복마전을 세우고, 그 속에 모여 모의한다.

2권 :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 보복보다 인간을 유혹하여 타락시키기로 결정하고, 인간이 사는 새 세계의 탐색을 위하여 사탄이 홀로 원정(遠征)한다. 사탄은 지옥의 울타리를 부수고 하늘과 땅 사이의 혼돈에서 여러 가지 곤란을 겪으며 날아간다.

3권 : 사탄의 탈출을 안 하느님은 사탄의 성공과 인간이 타락할 것을 예언하고, 지상에 내려갈 임무를 독 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긴다. 사탄은 이 세계의 극외권의 뾰족한 부분에 내려, 허영의 변방을 찾고, 계 단을 타고 올라 하늘문과 궁창 위의 물을 타고 와 여기서 태양구를 지나 니파타 산에 내린다.

4권 : 사탄은 에덴동산에 당도하여 낙원의 정경을 살피고, 아담하와의 대화도 엿들으며, 특히 선악의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그들을 유혹할 결심을 굳게 한 후 꿈 속에서 하와를 유혹해 보려고 한다. 한편, 하느님은 우리엘을 보내어 낙원의 문을 지키고 있는 가브리엘에게 경고하고, 그는 낙원 순찰을 더욱 열중히 한다.

5권 : 꿈에서의 유혹은 실패하고 하와는 괴로운 자기의 꿈 이야기를 아담에게 한다. 하느님은 라파엘을 보내어 사탄의 반역을 알리고, 그 유혹에 떨어지지 않도록 경고한다.

6권 : 마침내 미카엘가브리엘이 이끄는 천사들의 군대와 사탄의 군사들이 격전을 벌여, 사탄의 세력 은 일단 패하나 다시 쳐들어온다. 이 때, 하느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전차와 벼락으로 적중에 돌진한다. 그리하여 사탄의 군사는 심연의 구렁으로 떨어진다.

7권 : 라파엘아담에게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8권 : 천체 운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아담은 낙원에 오게 된 경위, 하와를 만나 결혼한 사정 등을 이야

기한다.

9권 : 사탄의 간계에 빠진 하와는 마침내 선악과를 먹게 되고, 아담도 그녀의 청에 못 이겨 계율을 어긴 다. 그러자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고, 자기들이 발가벗은 몸임을 부끄러워하고, 정욕을 느끼며 불안과 고 뇌에 빠진다.

10권 : 사탄은 의기 양양하게 지옥으로 돌아가 복마전에 모인 청중들에게, 성공한 사실의 경과를 말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모두 뱀으로 변하여 영겁의 지옥 속에 빠진다.

11권 : 천사 미카엘은 에덴으로 내려가 아담과 하와의 추방을 선언한다.
12권 : 미카엘은 계속하여,
노아의 홍수, 구세주의 탄생, 죽음, 부활 등을 이야기하고, 두 손으로 저들을 낙원 밖으로 내어 보낸다.

 

실낙원(失樂園)

 

인간이 태초에 하느님을 거역하고
금단의 나무 열매 맛보아 그 치명적인 맛 때문에 죽음과 온갖 재앙이 세상에 들어와
에덴을 잃었더니,

 

한층 위대한 한 분이
우리를 구원하여 낙원을 회복하게 되었나니, 노래하라 이것을,

 

천상의 뮤즈여.
오렙의또는 시나이의 호젓한 산정(
山頂)에서,

 

저 목자에게
영감(
靈感) 주어 혼돈에서 태초에 천지가 어떻게 솟아났는가를 처음 선민(選民)에게 가르치게 하신 그대,

 

혹시 시온의 산과
신전(
神殿) 가까이 흐르는 실로아의 시냇가
더욱 즐거우시거든, 게서 내 청하노니 나의 모험스런 노래를 도우시라.

 

아오니아 산 위로 가장 높이
산문에서나 시에서나 일찍이 시도되지 않은 것을 좇아 날아오르려는 내 노래를.

 

더욱이 그대,
아, 영(
)이여, 어떤 성당보다도
바르고 깨끗한 마음을 좋아하시는 그대여, 나를 가르치시라, 그대 아시니.

 

그대는
맨 처음부터 계셨고, 힘센 날개 펼쳐 비둘기처럼 대심연(
大深淵)을 품고 앉아 이를 잉태케 하셨어라.

내 속의 어둠을
빛내시고, 낮은 것을 높이고 떠받드시라.
이 크나큰 시제(
詩題)가 뜻하는 높이까지 영원의 섭리를 내가 증명하여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길이 옳음을 밝힐 수 있도록,

 

말하시라
먼저, 하늘도, 지옥의 깊은 땅도 그대의 눈에 숨기는 것 없으니,

 

말하시라
먼저, 무슨 까닭에 우리 조상은 마음이 움직여 그 행복하고 하늘의 은총 깊은 자리에서 창조주를 버리고,

 

단 한 가지
금제(
禁制)한다 해서 신의(神意)를 범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군주였을 것을.

 

처음에
그 악의 배반으로 꾄 것은 누군가? 지옥의 뱀이다. 그놈이 교만하여

 

그의 모든 반역 천사 무리들과 함께
하늘에서 쫓겨났을 때, 질투와 복수심에 불타 인류의 어머니를 속인 것이다.

 

그는 그 천사들의 도움으로
반역하기만 하면, 동료 이상의 영광을 얻고, 지고(
至高)하신 분과 동등해지리라.

 

믿고, 야망을 품고
하느님의 보좌와 주권에 대하여 불경스런 전쟁, 교만한 싸움을 하늘에서 헛되이 일으켰어라.

그러나
전능하신 하느님은 감히 당신께 싸움을 걸어 온 그를
불붙여 무서운 타락과 파멸을 가하여 청화천(
淸火天)으로부터 바닥 없는 지옥으로 거꾸로 내던지셨다.

 

거기에서
금강(
金剛)의 쇠사슬과 겁화(劫火) 속에 살도록.

024. 밀로의 비너스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 프랑스어: Vnus de Milo, 그리스어: Αφροδίτη της Μή λου)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130년에서 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 로 추정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여신인 아프로디테(로마 신화비너스)를 묘사한 대리석상으 로 길이는 203cm이다.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4월 8일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밀로스섬의 농부 요르고스 켄트로타스 에 의해 발견되었다. 며칠 후 프랑스 해군 장교 쥘 뒤몽 드위빌(Jules Dumont d'Urville)이 이 조각상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며 당시 오스만 제국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샤를 프랑수아 드 리파르도(Charles Franois de Riffardeau)를 설득해 조각상을 구입했다. 이 조각상은 1821년 루이 18세에게 헌납되었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21년 당시의 모습을 드로잉한 스케치도 루브르 박 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왼팔이 좀 더 남아있는 모습이다.

 

025. 온실 효과

온실효과(溫室效果)는 태양의 열이 지구로 들어 와서 나가지 못하고 순환되는 현상이다.

태양에서 방출된 빛 에너지는 지구의 대기층을 통과하면서 일부분은 대기에 반사되어 우주로 방출되 거나 대기에 직접 흡수된다. 그리하여 약 50% 정도의 햇빛만이 지표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때 지표에 의해 흡수된 빛 에너지는 열에너지나 파장이 긴 적외선으로 바뀌어 다시 바깥으로 방출하게 된다. 이 방출되는 적외선은 반 정도는 대기를 뚫고 우주로 빠져나가지만, 나머지는 구름이나 수증기, 이산화탄 소 같은 온실 효과 기체에 의해 흡수되며, 온실 효과 기체들은 이를 다시 지표로 되돌려 보낸다. 이와 같은 작용을 반복하면서 지구를 덥게 하는 것이다.

실제 대기에 의해 일어나는 온실 효과는 지구를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시켜 주는 매우 중요한 현상이 다. 만약 대기가 없어 온실 효과가 없다면 지구는 화성처럼 낮에는 햇빛을 받아 수십도 이상 올라가지 만, 반대로 태양이 없는 밤에는 모든 열이 방출되어 영하 100°C 이하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현 재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나쁜 영향으로 많이 거론되는 온실 효과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일부 온 실 효과를 일으키는 기체들이 과다하게 대기 중에 방출됨으로써 야기될지 모르는 이상 고온에 따른 지 구 온난화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온실 기체 중에서 온실효과에 기여하는 정도를 4가지 주요 기체로 분류하였다:

  • 수증기: 72%
  • 이산화탄소: 9%
  • 메테인: 4%
  • 오존: 3% 그렇다면 구름은 무엇인가? 구름은 액체 상태에 속한다. 온실가스는 지구의 대기 속에 존재하며, 땅에서 복사되는 에너지를 일부 흡수함으로써 온실효과를 일 으키는 기체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수증기, 이산화탄소, 메테인이 있다. 산업화의 영향으로 화석연료 의 연소로 발생된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많아지게 됨으로써, 대기 중 온실가스가 늘어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지구 온난화가 심각한 환경 문제로 대두되게 되었다.
  • 태양의 열은 지구에 들어오면 다시 나가는 것이다. 그 열은 지구 복사열이라 한다. 그러나 온실가스의 증가로 온실가스지구를 둘러싸게 되었다. 그 이유로 지구에 막이 생겼으며 태양이 밖으로 나가 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 지구 온실 효과에 기여하는, 기체가 아닌 주요 물질인 구름은 적외선 복사를 흡수하고 방출하므로 대기 의 방사성 특성에 영향을 준다.

026. 중세 초기 교회 음악(400~1400년대)

카톨릭 미사에서 수도사들이 사용하는 단선율 성가 또는 고레고리오 성가라고 알려진 형식. 미사 : 미사 통상문과 미사 고유문

미사 통상문 : ‘자비송, 대영광송, 신경, 거룩하시도다, 하느님의 어린양, 미사가 끝났으니 평안히 가십 시오’ 이렇게 여섯 가지 라틴어 기동문으로 구성

미사 고유문 : 기도는 계절 예배와 지역 전통에 따라 문구 달라진다.

 

027. 이데아

이데아론은 플라톤이 처음 주장한 형이상학 이론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론에서 이데아는 현상 세계 밖의 세상이며 이데아는 모든 사물의 원인이자 본질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이데아는 현실 세계 의 인간에 대한 원인으로, 인간의 이데아가 있기 때문에 현상 세계에 인간이 실재하는 것을 들 수 있 다. 또한, 중요한 것은 현상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낡고 사라지는 것에 반해, 이데아는 시간에도 그 모 습을 변치 않으며 현상 세계의 사물들이 궁극적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이데아라는 점이다. 이데아론에 서 이데아는 오로지 인간의 이성으로만 알 수 있으며, 원래 인간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인간 이 현실세계로 오면서 레테의 강을 건너게 되어 이데아 세계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여 이데아를 기억 해 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흔히 오해하기를, 이데아를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다고 해서 이데아가 인간 내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릇된 생각으로 이데아는 인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모두 사라지더라도 이데아는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이데아론이 플라톤 의 분유와 모순되는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플라톤은 모든 사물들이 원래 이데아의 일부 를 가진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책상의 이데아가 부분적으로 현상 세계의 책상에 나타나고, 아름다움 의 이데아가 부분적으로 사물에 나타나는 것을 들 수 있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현상 세계의 모든 사물은 이데아의 일부를 가지며, 이데아와 일치하지는 않는 다. 따라서 사람이 만든 사물은 이데아에 존재하는 사물과는 유사점이 있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 또 한, 화가가 그린 사물에 대한 그림은 실제 사물보다 이데아와 더욱 멀어진다. 플라톤은 이러한 예술을 비판하는데, 현상 세계의 사물보다 이데아에서 더 멀어진 것들을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데아론은 흔히 동굴 속에 있는 그림자에 비유하기도 한다. 절대 뒤돌아 볼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인간들이 있는 동굴에 사물들의 빛이 동굴 벽면에 비치면 인간들은 그 그림자를 사물 자체로 인식한 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가짜 허상에 불과하다. 이 비유는 이데아론에 있어 널리 알려진 것이나, 이것 은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질료-형상 이론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또 다른 비판으로는 '때나 이와 같 은 더럽고 추악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이데아가 있는 것인가?' 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플라톤은 때와 이 등의 이데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사악함과 쇠약함과 같은 이데아는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 것은 선함과 건강함이 부족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에는 이데아론은 유명론으로도 비판받는다. 유명론이란, 보편적인 개념은 말뿐이라는 것으 로, 실제로 보편적인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유명론이 참이라면, 세상에 보편적인 개념은 존재 하지 않기 때문에, 이데아론은 성립한다고 보기 어렵다.

028.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

아랍과 유대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노아의 후손인데, 구약성서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노아의 10 대 손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데라의 아들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위에 두 형이 성 경에 전하고, 그 두 형은 나홀과 하란이다. 하란은 일찍 죽었으나, 롯과 밀가, 이스가의 아비가 되었다. 구약의 창세기 11장 26절에서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그의 큰형 하란은 일찍 결혼하여 밀가와 이스가 자매와 롯을 두었지만 그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다. 뒤에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라(Sarah)이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 니 하란의 딸이었다.

아버지 데라가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과 며느리, 딸이자 며느리인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하다가 하란(지역 이름)에 거류하였다. 창세기 12장 1절에 의하면, 아브람 은 야훼의 부름을 받고 조카 롯과 아내 사라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갔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175세였다 (창세기 25장 7절)

아브람의 아내 사라는 굉장한 미모의 소유자였으므로 아브람이 이집트 왕국으로 들어갈 때 피살당할 것 을 우려했다. 이에 아브람은 사라와 부부가 아닌 남매로 위장했다.[3] 사라를 처녀로 오인한 이집트의 군 주 파라오는 사라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이로 인하여 각종 재앙에 시달리게 된다. 그 원인을 조사한 결 과 사실 사라는 아브람의 누이가 아닌 아내였다는 것이 드러나 파라오는 사라와의 결혼을 취소하였으며 아브람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아브람과 롯의 생존경쟁이 치열해지자, 아브람과 롯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서 살기로 합의를 보았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의하면 아브람은 롯에게 살 곳을 결정할 권리를 허락했는데,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화려한 겉모습에 현혹되어 소돔에 거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야훼께서 타락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서 멸망시키고자 하시는 곳이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창세기 19장을 보면 성적인 문 란이 사회법을 능가하여 인륜이 무너지게 된 데 있었다. 곧 동성애가 만연하였기 때문이었다. 소돔 주민 들이 천사들을 겁탈하려고 했던 것, 롯이 딸을 천사를 대신하여 내어 놓을려고 했던 것처럼 동성 연애, 동성 간의 성교가 만연하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sodomy, 곧 동성 간의 성애, 또는 동성 성교라는 말이 나왔다. 성경은 남성이 남성과 교접하는 남색이나 역으로 여성이 여성과 성적인 관계를 갖는 여색을 가 장 큰 죄로 여겨왔다. 자연의 섭리는 남녀가 만나 합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1). 노아 시대의 대홍 수나 소돔의 몰락은 바로 성적 타락에 기초한 것이었다.

아브람은 조카가 걱정되어 소돔성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야훼와 협상을 시작하였고, 야훼는 “소돔성 안 에서 선한 사람 50명만 찾아내면 멸망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라고 했다. 아브람은 50명이 너무 많다며 롯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이끌어 야훼는 “그렇다면 선한 사람 10명만 있으면 멸망시키는 것은 없 던 것으로 하겠다.”(창세기 18장32절 후반 참조)라고 했다. 그러나 그 선한 사람 10명을 찾아내지 못하 여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였으며(창세기 19장 25절), 하인과 재산을 모두 소돔에 버리고 몸만 도피하던 롯의 식구 중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기둥이 되었다(창세기 19장 26절).[4]

아브람은 그 아내 사래의 불임으로 인하여 70세가 넘도록 후사가 없었다. 야훼는 아브람에게 반드시 아 들을 주게 될 것이며, 아브람의 자손은 백사장의 모래알만큼 많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나이가 많은 아브 람은 야훼와의 약속을 의심하였기 때문에, 하갈을 첩으로 두어, 아브라함 86살에 그 사이에서 이스마엘 을 낳았다. 그러나 야훼는 아브람에게 배신은 당했을지언정 아브람을 배신하지 않았다. 아브람이 100살 이 되던 해에 야훼는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서 아들을 허락하니 그가 이사악이었다. 이후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은 적서 차별의 문제로 인하여 아브람을 떠나게 되는데, 히브리 성서에 의하면 사래가 하갈과 아들을 박해해서 쫓아내었다고 한다. 창세기에 의하면 야훼는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 하갈이 생존을 위 협받은 것을 알고는 사막에서 죽지 않도록 돌보았다. 인간에게는 적서 차별이 있을지언정, 야훼에게는 차별이 없었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일정 몫의 재산을 떼어주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다 한다. 이사악은 어 린 아이였지만, 이스마엘은 이미 성인 관례를 치르고 결혼까지 하여,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곁을 떠날 무렵에는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 한다.

하지만 위 전설은 성경의 기록과는 다르다. 창세기 21장 17~21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은 아이로 표현 되어 있고, 물이 떨어져 죽어가는 아이를 보며 통곡 하는 어미 하갈을 하느님이 돌아보시며 물을 찾게 해주었다. 그렇게 살아난 후에 애굽(이집트)의 여인을 이스마엘의 아내로 삼아주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그의 신앙심을 시험하려는 야훼에 의하여 첫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는다. 가혹 한 명령이었으나 신심 깊은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에게 나무를 한짐 해오게 한 뒤, 이사악에게 짐을 지 고 산으로 함께 오르게 하였다. 산정에 이르러 단을 쌓고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칼로 베려 하
니,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 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창세기 22장 12절)하고 막았고, 아브라함은 근처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을 대신 바쳤다.

 

족장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생길 것이며, 그 이름은 이삭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었 을 때 그의 첫 부인 사라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의 두 번째 아들이자 사라의 첫 번째이자 유 일한 아이였다.

태어난지 여덟 번째 되는 날 이삭은 할례를 받았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하 는 야훼와의 계약을 준수한 것이다.

이삭이 자라 젖을 땐 후,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그의 어 머니인 여종 하갈을 내쫓으라고 요구했는데, 그래야 비로소 이삭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상속자가 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머뭇거렸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부인의 요청에 따랐다.

이삭이 유년기를 보내던 어느 날,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를 모리아 산으로 데려갔다. 신의 명령에 따라서 아브라함은 희생 제물을 위한 제단을 쌓고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았다. 그는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놓고 그를 죽이려고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급히 그를 막는다. 아브라함은
그 대신에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가져다 제물로 잠았다. 이는 정말로 인간을 제물로 삼은 것이 아니 라,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사건이었다.

이삭이 40세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그의 종 엘리에셀메소포타미아로 보내 이삭의 신부감을 찾도록 한다. 엘리에제르는 아브라함의 조카 브두엘의 딸인 리브가를 고른다. 이삭이 결혼한 후 몇년이 지났지 만 리브가는 아직 아기를 갖지 못했고 불임인 것으로 보였다. 이삭은 그녀를 위해 기도했고 아이를 가졌 다. 리브가는 쌍둥이 아들, 에서야곱을 낳았다. 이 때 이삭이 60세였다. 이삭은 에서를 편애했고, 리 브가는 야곱을 더 편애했다.

이삭이 75세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자 브엘라해로이로 옮겨 살았다. 기근이 찾아왔을 때 그는 아버지 가 전에 살았던 그랄블레셋으로 다시 옮겨갔다. 아브라함이 살던 당시 그 땅은 아비멜렉 왕의 지배 하에 있었다. 아버지처럼 이삭은 그의 부인에 대해 아비멜렉에게 거짓말을 했고 우물을 파는 작업에 들 어갔다. 그는 아버지가 팠던 우물에 모두 가보았는데 모두 흙으로 막혀 있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블 레셋 사람들이 이를 시기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삭은 다시 그것들을 파고 브엘세바로 가서 더 많은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예전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삭 또한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었다.

나이가 든 이삭은 눈이 어두워져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아들 에서를 불러 자신을 위해 염소 를 잡아오면 이삭에게 복을 빌어주기로 했다. 에서가 사냥을 하고 있을 즈음, 복을 가로채라는 어머니의 말을 들은 야곱은 자신을 에서처럼 꾸며 아버지에게 축복 기도를 받았다. 이로써 야곱이 이삭의 상속자 가 되고 에서는 뒤로 밀려나게 된다. 창세기 25장 29-34절에 따르면, 에서는 예전에 야곱에게 '빵과 죽' 을 받고 장자권을 판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이삭은 야곱을 메소포타미아로 보내 어머니 리브가의 오빠 라반에게서 부인을 얻도록 한다. 삼촌 라반을 위해 20년간 일한 후, 야곱은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쌍둥 이 형 에서에게 사과하고, 그 뒤에 아버지 이삭이 180세의 나이로 죽었고 두 형제는 아버지를 헤브론 땅 에 묻는다.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낳을때 그 당시 상황이나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 야곱이라는 이름 의 뜻은 어머니 리브가가 쌍둥이형인 에서를 낳을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나서 "발꿈치를 잡다" 라는 의미이다. 즉, 태어날 때부터 타인의 발꿈치를 잡고, 딴지를 건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그 이름에 담 겨 있었다. 후에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개명된다(창32:24~32). 이때 개명된 이스라엘이라는 뜻은 "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이 말은 하나님과 의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 자녀로서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어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져주고 사랑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곳곳마다, 하나님앞 에 불신앙하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 야곱아 라고 말하며, 또한 이스라엘아 라고 부르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이사야 40:27, 41:8, 43:1, 48:12, 예레미야 30:10, 46:27~28, 미가 2:12)
아버지 이삭은 큰 아들
에서가 사냥에 뛰어나고 그가 잡아오는 고기에 맛을 들여 에서를 더욱 사랑하였 고, 어머니 리브가는 천막에 머물러 자기를 돕는 야곱을 사랑하였다(창25:27-28). 하루는 에서가 사냥 에서 돌아온 날 을 끓이고 있던 야곱에게 와서 죽 한그릇을 먹자고 권하자, 야곱이 그에게 죽 한그릇을 주며 장자권을 얻었다(창25:20-34). 아버지가 큰 형 에서를 죽기전에 축복하려고 하자, 그를 편애하는 어머니와 짜고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대신 받았다.

이를 안 형 에서에게 분노와 미움을 사서 외삼촌 라반에게 피신했다. 또한 야곱은 라반 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간 무보수로 봉사하였다. 그런데 첫날밤 라반은 첫째 딸 레아를 들여보냈고, 이 를 항의하자 라반은 라헬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7년간 더 일하라고 한다. 라헬을 얻고도 13년을 더 무보 수로 일했다. 레아와 라헬 사이에서 1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며 토마 스 만의 소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후에 형 에서를 만나러 여행하던 중 천사(성경본문에는 천사라고 명시되어있지 않고 개역개정과 개역한 글 그리고 현대인의 성경 - 어떤 사람 / NIV-a man / 공동번역 - 어떤 분 / 새번역 - 어떤 이 / 히브리 어 성경 - אישׁ 라고 나와있다.)와 씨름을 한다. 천사가 넓적다리를 건드려 (개역개정 - '허벅지 관절을

치매 ' / NIV - Touched / 히브리어 성경 - ויגע ) 절게 만든 후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되 었다.(창세기 32:24-28) 그 후로 이스라엘 민족들은 엉덩이쪽의 힘줄을 먹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 다.(창세기 32:32)

이집트에 팔려가 총리가 된 요셉에 의하여, 야곱의 가족들은 그곳에 정착을 하게 된다.

  1. 1. 르우벤 - '보라.아들이라'
  2. 2. 시므온 - '들으심'
  3. 3. 레위 - '연합함'
  4. 4. 유다 - '찬송함'
  5. 5. - '억울함을 푸심'
  6. 6. 납달리 - '경쟁함'
  7. 7. -'복됨'
  8. 8. 아셀 - '기쁨'
  9. 9. 잇사갈 - '값'
  10. 10. 스불론-'거함'
  11. 11. 요셉 - '더함'
  12. 12. 베냐민-'오른손의아들'

1-4, 9-10은 레아의 아들, 5-6은 라헬의 여종인 빌하의 아들, 7-8은 레아의 여종인 실바의 아들, 11-12 는 라헬의 아들이다.

029.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44년)

카이사르는 귀족율리우스 씨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율리우스 씨족은 베누스 여신의 아들이라는 전 설상의 트로이아 왕자 아이네아스의 아들 율루스의 후손을 자칭하는 집안이었다. 그의 코그노멘 (cognomen, 가문 이름) "카이사르(Caesar)"도 대대로 물려받은 이름인데, 그 어원에 대해서는 크게 4 가지 설이 있다. 대 플리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조상 가운데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난 사람이 있어서 ‘자 궁에서 잘라온(ab utero caeso)’이란 뜻으로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주장했다. 황제 역사 (Historia Augusta)에는 다른 설명이 나오는데, 카이사르의 굵은 머리카락(caesaries)이나 밝은 회색 눈 (oculis caesiis) 때문이라거나 혹은 그의 선조가 2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전투 중 코끼리(무어말 caesai) 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이사르는 코끼리를 새긴 동전을 주조하였는데, 그가 자신의 이름에 대한 해석 가운데 코끼리와 관련된 해석을 좋아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한편 카이사르 자신이 제왕 절개 수술 로 태어났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적어도 서기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전 에도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이 있었으며, 카이사르의 시대에 제왕 절개 수술은 오직 죽은 여 자에게만 실시하였는데,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는 그를 낳고도 장수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유서깊은 계보를 지녔으나, 정치적으로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으며, 가문에 서 배출한 집정관 수도 세 명에 불과하였다. 카이사르의 아버지인 동명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도 공화정에서 두 번째로 높은 법무관직까지 올랐으며,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냈는데, 아마도 매형이었 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영향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는 여러 집정관을 배출한 영향력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또 카이사르의 가정 교사는 갈리아 출신의 웅변가이자 문법가인 마르쿠 스 안토니우스 그니포였다. 카이사르는 누이가 둘 있었는데 모두 이름이 율리아였다. 카이사르의 유년 기에 대해서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수에토니우스플루타르코스의 카이사르 전기에 보면, 내용이 10대 때부터 시작하며, 두 책의 시작부는 모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카이사르의 유년기는 혼란한 시절이었다. 기원전 91년에서 88년 사이에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들
로마 시민권 문제를 놓고 동맹국 전쟁을 벌였으며, 그러는 사이 폰토스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 의 동부 속주를 위협하였다. 로마 정계는 벌족파(optimates)와 민중파(populares)로 갈라져 있었는데, 엄밀히 말해 두 파벌은 각자 공통적인 대의가 없어서 정당이나 정파와는 다르다. 벌족파는 원로원의 전 통적이고 헌정상의 경로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정치가들이었으며, 민중파는 전통적인 과정 대신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정치가들이었다. 카이사르의 숙부인 마리우스는 민중 파 정치인이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벌족파였는데, 카이사르의 유년기 때 두 정치가의 대립으로 내전이 일어났다.

마리우스와 술라 모두 동맹국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두 사람 모두 미트리다테스 정벌 전쟁에 지 휘권을 원하였으나, 당초 술라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선거구 개혁과 미트라다테스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기는 법안을 통과시켜버렸다. 이후 폭동이 일어 났고 로마에서 탈출한 술라는 로마로 진군하여 자신의 지휘권을 주장하며 술피키우스를 처형하고 마 리우스파를 축출하였으나, 술라가 원정을 떠난 사이에 마리우스가 임시로 모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 다. 그와 그의 정치적 동맹자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도시를 장악하고, 술라를 공적(公適)으 로 선언하였으며, 마리우스 군대는 술라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복수하였다. 기원전 86년 초에 마리우스 가 세상을 떠났으나, 킨나를 중심으로 한 그의 지지자들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

기원전 85년 어느날 아침에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신발을 신는 중에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죽자 카 이사르는 16살의 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이듬해 그는 유피테르의 고위 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 (Flamen Dialis)로 지명되었는데, 전임자인 메룰라가 마리우스의 숙청 당시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 제직에 오르는 사람은 귀족일 뿐 아니라 귀족과 결혼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기사 출신 가문 의 평민 여자인 코수티아(Cossutia)와 어릴 때 맺은 약혼을 파기하고, 당시 민중파의 영수였던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였다.

이때 미트라다테스와 협정을 맺었던 술라가 돌아와 마리우스 지지자들에 대항한 내전을 종결하였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뒤 그는 기원전 82년 11월 1일에 콜리나 대문의 전투로 로마를 장악 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독재관에 임명하였는데, 전통적으로 6개월 동안 단 한 번 재직하는 독재관직과 달리 술라의 독재관직에는 임기 제한이 없었다. 마리우스의 상은 모두 파괴되었으며, 마리우스의 시신 은 무덤에서 파내어 부관참시되어 티베리스 강에 던져졌다. 당시 킨나는 항명을 일으킨 자신의 병사들 에게 이미 살해된 상황이었다. 술라의 처벌자 명단 공개로 그의 정적 수 백명이 죽거나 추방되었다. 마 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였던 카이사르 역시 명단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유산과 사제직, 아내 의 지참금 덕분에 처형을 면하였으나, 아내 코르넬리아와 이혼하기를 거부하여 잠적하는 수밖에 없었 다. 술라파가 있던 모계쪽 집안과 베스타 여사제의 관여 덕분에 그에 대한 위협은 취소되었다. 술라는 망설이며 결국 사면에 승낙하였는데, 카이사르 속에 수많은 마리우스가 있음을 보았노라고 말한 바 있 다.

도주했던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오는 대신 군 입대를 택하여, 아시아 속주에서는 마르쿠스 미누키우 스 테르무스 휘하에서, 킬리키아에서는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밑에서 복무하였다. 역설적으로 카이사르가 군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연유는 사제직을 잃은 덕분이었는데, 플라멘 디알리스 사제는 말을 만지거나 자신의 침대가 아닌 곳에서 사흘 밤을 자거나 로마 바깥에서 하룻밤을 자거나 군대를 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틸리니 공성전에서 공을 세워 시민관을 수여받았다. 비 튀니아 임금 니코메데스 4세의 함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던 중 카이사르는 궁정에서 오랜 시간을 보 내어 왕과 동성애 염문이 돌았으며, 이후에도 이 소문은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기원전 80년, 독재관에 오른 지 2년 만에 술라는 사임하고, 다시 집정관제를 복원하였으며, 집정관에 재직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여 사인(私人)으로 물러났다. 나중에 카이사르는 술라가 독재관직을 포기한 일을 두고 "술라는 정치의 가나다도 모른다"고 비웃었다. 2년 뒤인 기원전 78년에 술라는 세상을 떠났 으며, 국장이 열렸다. 술라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와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을 하였 다. 유산을 몰수당한 터라 재산이 없던 카이사르는 로마 시에서 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에 평범한 집 을 얻었다. 그가 로마로 돌아올 때 반술라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반란을 시도하였으 나, 레피두스의 지도력을 신뢰하지 않은 카이사르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변호사로 나섰 다. 그는 빼어난 웅변에다 인상적인 제스처와 높은 목소리를 갖추었으며, 금품 강요와 부패로 악명 높 던 전직 총독들을 가차없이 고발하여 유명해졌다. 키케로도 그를 칭찬하며 "이제 나와보라, 어느 웅변 가가 그대를 능가하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다. 수사학을 완성하기 위해 기원전 75년에 그는 로도스 섬으로 유학하여 일전에 키케로를 가르친 바 있는 아폴로니우스 몰론 밑에서 공부하였다.

에게 해를 지나던 중, 카이사르는 킬리키아 해적에 잡혀, 도데카니사 제도파르마쿠사 섬에 갇히게 되었다. 잡혀있는 동안 카이사르는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카이사르는 포로로 잡혀있을 때 해적들 을 십자가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하였는데, 해적들은 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해적들이 그의 몸값 을 은 20 탈란톤으로 잡자, 카이사르는 50 탈란톤을 요구하라고 고집하였다. 몸값이 지불되자 카이사 르는 배를 모아 해적들을 추적해 잡았으며, 이들을 페르가몬에 투옥시켰다. 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융크 투스는 카이사르의 요구대로 이들을 처형하길 거부하고 해적들을 노예로 팔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카 이사르는 해안으로 돌아가 자신의 권리에 따라 이들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그런 다음 로도스로 갔으 나, 곧 아시아에서 군사 작전에 불려갔으며, 폰토스의 침략을 막고자 보조군을 모병하였다.

로마로 돌아오는 중에 그는 쿠르수스 호노룸의 첫 단계인 군사 참모(military tribune)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스파르타쿠스 전쟁이 일어났는데(기원전 73~71년), 카이사르가 이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에 관여했다. 기원전 69년에 그는 재무관에 선출되었으며, 그 해에 마리우스의 미망인이었던 고모 율리아의 장례식 연설을 하였는데, 장례 중에 (술라 집권 이후로 볼 수 없었던) 마 리우스의 상을 전시하였다. 그의 아내 코르넬리아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69년 봄 혹은 초 여름에 장례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의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휘하에서 재무관직을 수행하였 다. 이곳에서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상을 보고는 알렉산드로스가 세계를 제패할 때와 같은 나이
에 자신은 이룬 것도 없다는데 불만을 느끼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재무관직 조기 해임을 요청하여 승인받고 로마 정계로 돌아왔다. 기원전 67년에 돌아와서, 그는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하였 다. 그는 조영관으로 선출되어 마리우스의 승전 기념비를 복구하였는데, 이는 술라파가 아직 정권을 잡 고 있는 상황에서 물의를 빚었다. 그는 또 술라의 재산 몰수로 이익을 봤던 사람들을 기소하였으며, 공 공 사업과 경기에 막대한 돈을 빌려 써서 동료 조영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보다 명성을 얻 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두 차례 반란 모의에 연루된 혐의를 받기도 하였다.

기원전 63년은 카이사르에게 파란 많은 해였다. 그는 호민관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설득하여 벌족파 원 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에게 37년 전에 원로원 비상 결의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 투르니누스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고 자신을 이 사건을 심리할 두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하 게 하였다. 키케로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라비리우스의 변호를 맡았으나, 그는 대역죄(perduellio)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인민에게 청원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였으나 법무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 텔루스 켈레르가 야니쿨룸 언덕에 군기를 내려 민회를 산회시켰다. 라비에누스는 다음 회기에 기소를 재청할 수 있었으나, 카이사르의 지시로 재청하지 않아 이 문제는 중지될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목적은 라비리우스 개인이 아니라, 집정관들이 민회에 대한 상소권도 무시한 채 이른바 국가의 적들을 처형할 때 휘둘러온 원로원 비상 결의의 정당성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원로원을 장악하고 있던 주류 세력들이 카이사르와 같은 민중파 정적들에 대하여 궁극적인 방호책으로 삼았던 비상 결의에 반 대 여론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라비에누스는 이후 십 년간 카이사르의 중요한 친구가 되었다. 술라가 임명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가 그 해에 죽자 카이사르는 로마 국가 종교의 수장

대신관직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에게는 강력한 벌족파 경쟁 후보 두 사람이 있었는데, 집정관을 지 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였다. 후보들은 서로 에게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하였다. 선거일 아침에 카이사르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면 대신관 에 당선되어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선거 운동으로 막대한 빚을 져서 추방 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경쟁 후보들은 뛰어난 경험과 지위를 가졌지만 카이사르가 무난히 당선 되었는데, 아마도 두 경쟁 후보가 서로 표를 잠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신관은 신성로(Via Sacra) 에 관저가 있었다. 그 해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공화국을 장악하려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알렸으며, 카 툴루스 등은 카이사르가 이 음모와 연관이 있다고 고발하였다. 다음 해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던 카이사 르는 이 음모 연루 문제 처리를 놓고 벌어진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 중에 카이사르는 쪽지를 받았다. 그러자 카이사르의 정적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카이사르가 음모자들과 서신을 주고받 았다며 그 쪽지를 크게 읽도록 요구하였다. 카이사르는 카토에게 쪽지를 넘겨주었는데, 당황스럽게도 그 쪽지는 카토의 의붓누이인 세르빌리아에게서 온 연애 편지였다. 반역 음모자를 사형에 처하자는 의 견에 대해 카이사르는 설득력 있게 반박하면서 종신 징역에 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카토의 연설로 결 국 음모자들은 처형되었다. 다음 해 이 반란 음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카이사 르는 다시 공범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이 음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보고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여 문제가 풀렸으며, 고발자 가운데 한 사람과 또 위원회 위원 한 사람이 구 금되었다. 기원전 62년에 법무관이었던 카이사르는 당시 호민관이었던 메텔루스 켈레르가 논쟁적인 입 법 제안에 지지하였으며, 두 사람은 매우 완고하여 원로원에서 이들을 직무 정지에 처하였다. 카이사르 는 계속 법무관직을 수행하고자 하였는데, 폭력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지지하 는 대중 시위를 진정시키자 원로원은 그를 복직시키기로 하였다.그 해에 보나 데아(Bona Dea, "선한 여 신") 제사가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열렸다. 이 제사에는 남성이 출입할 수 없었으나, 푸블리우스 클라우 디우스(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라는 젊은 귀족 청년이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입회하려고 하였 는데, 이는 카이사르의 아내인 폼페이아를 유혹할 목적이 분명하였다. 그는 잡혀서 신성 모독죄로 기소 되었다. 재판에서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력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거스르지 않고자 클로디우스에 게 불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으며, 클로디우스는 막대한 뇌물과 협박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카이 사르는 "내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 된다"면서 폼페이아와 이혼하였다. 법무관직을 수행한 뒤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이베리아 바깥)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아직도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터라 로마를 떠나기 전에 빚쟁이들을 설득해야 하였다. 그는 로마의 갑부인 마르쿠스 리키니 우스 크라수스의 도움을 받았다. 폼페이우스에 반대하는 자신을 지지하는 대가로 크라수스는 카이사르 의 빚 일부를 지불하고, 나머지 빚에는 보증을 서 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카이사르의 법무관 임기가 끝 나 일반 시민 지위가 되면 빚 때무에 기소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속주로 떠났 다. 히스파니아에서 그는 칼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을 정복하여 그의 군대에게서 임페라토르(최고 군사 령관)로 환호받았으며, 채무 관련 법을 개혁하고, 매우 존경을 받으며 총독직을 마쳤다.

'임페라토르'로 경례를 받으면서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공화정 최고위직 인 집정관직에 출마하길 원하였다. 만일 그가 개선식을 열려면, 행사 전까지 군인 신분으로서 도시 바 깥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선거에 입후보하려면 사령관직에서 이임하고 일반 시민 신분으로 로마에 들 어와야 했다. 결국 그는 개선식과 선거 출마를 동시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원로원에 부재중 출마 허가를 요청하였으나, 카토가 이를 막았다. 두가지 사이에서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을 선택하였다.

집정관 선거에 카이사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몇 년 전에 카이사르와 함께 조영관직을 맡 은 바 있다), 루키우스 루케이우스 세 후보가 출마하였다. 선거는 깨끗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 에게 지지를 청하였으며 부유한 루케이우스와 제휴하였으나, 체제의 주류 세력은 보수파인 비불루스를 밀어주었으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카토조차도 그를 지지하여 뇌물을 썼다고 한다. 카이사르와 비불 루스는 기원전 59년에 임직하는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

카이사르는 이미 크라수스에게 정치적인 빚을 지고 있긴 하였으나, 폼페이우스에게도 손을 내밀었는 데, 그는 자신의 퇴역병에게 준 동방의 정착지와 농지를 원로원에서 비준받기 위해 싸우고 있었으나 성 과를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70년에 함께 집정관직을 역임한 이래 적 대 관계였으며, 카이사르는 만약 자신이 한쪽과 손을 잡으면 다른 한쪽의 지지를 잃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화해하고자 하였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은 충분한 자금과 더불어 공공 사업을 장악할 정치적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의 비공식적 정치 제휴를 제1차 삼두 정치라고 하는데,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와 폼페이우스가 결혼하면서 공고해졌다. 카이사르는 재혼하 였는데, 이번 배우자는 다음 해 집정관으로 당선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딸
칼푸르니아였다.

집정관에 취임하자 카이사르는 현대의 신문격인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를 광장에 붙였다. 악타 디우르나로 원로원과 민회의 의사록이 그대로 민중에 공개됨으로써 민중파인 카이사르의 입지는 더욱 강해졌다. 또한 공직자가 1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선물을 받지 못하게 하는 율리우스 레페르토리(공 직자 윤리에 관한 율리우스 판례법)을 제정하여 공직 생활의 정화를 도모하였다. 카이사르는 빈민에게 공유지를 재분배하는 농지법(lex iulia de agraria)을 제안하였는데, 그라쿠스 형제가 제출하려했던 농 지법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유지 임차권은 상속할 수 있으나 20년동안 남에게 양도할 수 없다.
  2. 국유지 임차 신청자격은 폼페이우스와 5년 종군한 자와 3명의 자녀를 둔 무산자로 정한다.
  3. 250헥타르 이상 부정 임차지를 환수하는 비용은 폼페이우스가 미트라다테스 전쟁 후 국고에 납
  4. 입한 2억 세스테르티우스로 한다.
  5. 부정 임차지 반환에 따른 보상금 액수는 재무관이 결정한다.
  6. 임차 농지 재분배는 20명의 상설위원으로 구성하고 법안 제출자는 그 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는
  7. 다.

카이사르는 그라쿠스 형제와는 달리 기존체제에서 개혁을 실시하려 했기 때문에 보수파를 회유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보수파의 강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삼두의 강력한 힘을 이용했다. 삼두 의 일파인 폼페이우스는 필요할 경우 무력도 불사하며 지지했으며, 크라수스도 마찬가지로 지지하여 삼두 정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불러들인 그의 병사들이 도시에 운집하였으 며, 삼두정의 반대자들을 위협하였다. 비불루스는 불길한 전조(前兆)가 있었다고 선언하여 법을 무효 화하려 시도하였으나, 카이사르의 무장 지지자들이 그를 포룸에서 쫓아내 버렸다. 비불루스의 릭토르 (lictor)들이 들고 다니는 속간은 부러졌으며, 그와 함께 있던 호민관 두 사람이 다쳤고 비불루스 자신 도 똥 한 바가지를 뒤집어썼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그는 집으로 물러나 그 해 내내 틀어박혀 지내다가 이따금 나쁜 전조를 선언하였다. 이렇듯 카이사르의 입법을 방해하려는 시도는 별 소용이 없었다. 로마 의 풍자가들은 이때부터 그 해를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해"라고 불렀다.

카이사르와 비불루스가 처음 선출되었을 때,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집정관 임기를 마친 다음 해에 맡을 전임 집정관 자리로 속주 총독직 대신 이탈리아의 목초지와 숲을 맡겨서 장래에 그의 권력에 제약을 두 고자 하였다. 그러나 피소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으로 나중에 이 조치는 취소되고 삼두 정치가 입법시킨 ' 바티니우스 법'에 따라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이탈리아 북부)와 일리리쿰(발칸 반도 서부) 의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나중에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도 맡겼고 그에게 4개 군단을 주었다. 집 정관 임기를 마치고 그가 맡을 전임 집정관 임기는 단 1년이 아니라 5년으로 정해졌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법정 기소가 면제되었다. 카이사르는 푸블리카누스의 속주세 예납제도를 폐지하여 속주세의 공정 성을 실현하였다. 또한 폼페이우스가 정복한로마세계의 동방을 재편성하는 법안을 가결시키고 게르만 족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와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자'(socius e amicus populi romani)로 임명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집트에서 쫓겨난 상태였으므로 카 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부하인 가비니우스를 파견하여 그를 왕위에 복귀시켰다. 카이사르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3천 탈렌트를 받았으나 크라수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이 돈의 절반을 써야했다. 집정관 임 기가 끝나자 카이사르는 변칙적으로 정한 직무 때문에 기소되는 것을 가까스로 피하고 서둘러 임지로 떠났다. 카이사르는 여전히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데, 속주 총독은 착취나 위험한 군사 원정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휘하에 4개 군단이 있었으며, 임지 중 두 곳 일리리쿰갈리아 나르보넨시스 는 북방의 미정복지와 접경하고 있는데, 이곳의 독자적인 갈리아인들은 불안정한 상태로 알려져 있었 다. 로마의 동맹인 갈리아의 하이두이족(Haedui)은 전에 하이두이의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아리오비스 투스가 이끄는 게르마니아의 수에비족(Suebi) 분견대의 도움을 받은 다른 갈리아 부족에게 패하였으 며, 헬베티족이 이주를 위해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로마인들이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새로 이 두 군단을 조직하고, 프로빈키아 통과를 요청한 헬베티족의 요구를 거절했다. 헬베티족은 하이두이 족의 승인을 얻고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려 했으나 다툼이 벌어졌고 이에 하이두이족은 헬베티족을 적대 하며 동맹국인 로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하이두이족의 족장 둠노릭스는 헬베티족과 연락을 취하 다 카이사르에게 발각되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형이자 하이두이족의 족장 디비키아쿠스가 동생을 대신 해 용서를 바라자 둠노릭스를 용서했다. 카이사르는 손 강에서 헬베티족을 기습공격했고 큰 손실을 입 은 헬베티족은 디비코라는 강화사절을 보냈으나 그는 카이사르가 요구한 인질제공을 거부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 카이사르와 헬베티족은 비브락테 전투에서 맞붙었다. 헬베티족은 밀집대형으로 진격 하였지만 로마군이 투창공격을 퍼붓자 방패에 창이 박혀 방패를 버리고 싸워 크게 손실을 입었다. 보이 족과 툴링기족이 곧 로마군을 공격했으나 제1열을 헬베티족과 싸우게 하고 제2열은 보이족과 툴링기족 과 대적하게 했다. 이렇게 한바탕 치열한 전투에 이루어지고 결국 카이사르가 헬배티족을 격파했다. 카 이사르는 헬베티족에게 헬베티아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이루어지자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갈리아인들의 요청에 따라 게르만족과 대적하게 되자 수에비족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와 협상 을 시도했다. 그때 로마군에서 게르만인에 대한 공포가 퍼졌으나 카이사르는 몸소 연설로 로마군의 전 투 의지를 되찾게 했다. 카이사르는 제10군단을 이끌고 아리오비스투스와 브장송에서 직접 만나 회담 을 했고 그 협상은 게르만인들의 도발행위로 인해 결렬되었다. 이후 카이사르는 사절을 보냈으나 그들 이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사로잡히자 그와 전투를 벌였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전투에서 질것이라는 게르 만 여인의 점에 따라 전투를 바라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적군포로를 심문하여 이 사실을 알아내었고 게 르만인들의 전투의욕이 적음을 이용하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을 더 과감하게 공격했고 아리오 비스투스는 어쩔수없이 로마군과의 회전을 준비했다. 게르만족은 배후에 아녀자가 탄 마차를 포진시켰 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로마군 우익은 적군의 공격을 버텨냈으나 좌익은 적군의 수적우세에 밀리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아끼는 부하이자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전투에 동원되 지 않는 제3열 군사를 이끌고 좌익을 지원했다. 힘을 얻은 로마군의 공격에 게르만족은 다수가 죽고 아 리오비스투스는 게르마니아으로 달아났다. 게르만인들의 배후에 강이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게르만 족이 죽거나 아리오비스투스를 비롯한 소수의 요인들만이 전장을 탈출할 수 있었다. 아리오비스투스의 두 아내와 한 딸은 죽고 다른 딸들은 사로잡혔다. 이 해의 모든 전투를 끝내고 겨울에는 세콰니족 영토 로 군대를 물렸는데 이는 즉 카이사르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바깥 영토에 관심을 둔 것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뜻이었다.

겨울 동안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신규로 2개 군단을 또 편성하여, 임기 2년째에 카이사르는 처음보다 배가된 군사력을 갖추었다. 이런 자의적인 군 편성은 적법성이 의심스러웠는데, 키살피나 갈리아인은 로마 시민이 아니었기 대문이었다. 작년 카이사르의 군사 활동에 대응하여 갈리아 북동부의 벨가이 부 족들이 무장을 시작하였다. 카이사르는 이를 공격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였으며, 이와중에 레미족은 반 군들을 배신하고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다. 수에시오네스족장 갈바를 중심으로 통합된 벨가이 동맹 군 29만명은 레미족의 영토에 주둔하고 있던 카이사르와 레미족을 향해 귀갑대형을 이루고 진격해왔 다. 로마군 진영 근처에 비브락스(Bibrax)라는 이름의 레미족 도시가 있어 벨가이군은 이 도시를 습격 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하지만 비브락스의 상황이 위급해지자 카이사르는 누미디아인과 크레타인으 로 구성된 궁수들과 발레아레스 투석병을 비브락스에 구원병으로 보냈다. 벨가이군은 이들의 구원에 힘을 얻은 레미족의 거센 반격에 공성을 중단하고 로마군 진지를 공격했다. 로마군 진영은 강을 끼고 두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벨가이인의 공격을 받는 쪽은 카이사르가 직접 지휘했고 강 건너편의 지휘 는 사비누스가 맡았다. 벨가이군은 강을 건너 사비누스를 공격하려 했지만 카이사르는 진지 안에 있던 다리를 건너 강 건너편에서 접근해오는 적과 싸웠다. 로마군은 물속에서 움직임이 둔해진 벨가이군을 무찔렀다. 벨가이인들은 패전소식과 식량부족에 통합된 벨가이 병력을 각 부족으로 돌려보내기로 했 다. 각 부족으로의 귀환은 소란스러운 것이 패주에 가까워 벨가이인들은 카이사르가 보낸 기병대의 공 격을 받고 다시 크게 전사자를 내었다.

카이사르는 적군 연합부대를 크게 격파하자 차차 각 부족을 하나씩 정복하였다. 우선 수에시오네스족 을 격퇴하고 벨로바키족과 암바니아족과 강화를 맺었다. 벨로바키족은 부족내의 반로마파가 모두 브리 타니아에 도망쳐 버렸다고 주장했다. 로마군은 이어 벨가이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을 가진 네르비족과 싸우게 되었다. 그들은 매복해 있었으며 로마군의 군량수송부대에 첩자를 두었다. 카이사르가 그들의 영토에 도착하자 기습공격을 하여 로마군의 허를 찔렀다. 로마 기병대는 이미 격파되었고 카이사르도 한번에 여러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로마군은 카이사르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빠르게 전투를 시작 했다. 로마군의 제9군단과 제10군단은 좌익에 포진해 있다가 아트레바테스족을 쳐부수었고 제11군단 과 제8군단은 우익에서 비로만두이족을 격파했지만 로마군 중앙의 제12군단과 제7군단은 좌우익이 빠 져나가 노출된 곳에서 보두오그나투스가 이끄는 네르비족의 공격을 받았다. 카이사르는 중앙의 병사 들 간의 대열이 좁아 전투에 방해가 됨을 알아차리고 대열을 넓힐 것을 명령했다. 방진을 짤것을 지시 했고 로마군은 측면과 배후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 라비에누스가 제10군단을 보내 이 들을 지원하러 오자 네르비족은 열세에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로마군의 승리로 끝난 이 전투로 네르비 족의 전투력은 궤멸되었고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볼모제공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어 아투아투키족의 수 도인 아투아투카를 공격했고 로마군의 공성기에 놀란 아투아투키족은 항복했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무기를 버릴 것을 요구했고 아투아투카의 전체 무기 중 삼분의 일 가량만 버려졌다. 아투아투키족은 남 은 무기를 들고 로마군을 기습했으나 4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였다. 카이사르는 5만명이나 되는 아투아투카 주민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넘겼다. 카이사르의 공적에 로마 원로원은 지금까지 유례가 없 던 15일 감사제를 올렸다. 그러는 사이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가 지휘하는 1개 군단이 아르모리 카 반도(Armorica)의 부족들을 정복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

기원전 56년 봄에 삼두 정치 인사들은 갈리아 키살피나의 루카에서 회합을 열어 만났다. 로마는 혼란 에 빠져 있었으며, 클로디우스의 민중 선동으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사이가 나빠진 상황이었다. 회의에서 삼두 정치를 갱신하고, 카이사르의 전임 집정관(총독) 임기를 5년 더 늘렸다. 크라수스와 폼 페이우스는 다시 집정관에 오르기로 하고 이후에는 카이사르처럼 장기 전임 집정관직을 맡기로 하여, 임기를 5년으로 크라수스는 시리아를,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속주를 맡는 것으로 정하였다.[56] 아 르모리카 정복은 카이사르의 부하 데키무스 브루투스베네티족을 해전에서 무찔르면서 완수하였으 며, 젊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갈리아 남서부의 아퀴타니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56년에 군사 작전 을 종결하면서, 해안 저지의 모리니족(Morini)과 메나피이족(Menapii)만 저항하였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의 최강의 부족 수에비족에게 밀려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마니아
우시페테스족(Usipetes)과 텡크테리족(Tencteri) 문제를 교섭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카이사르는 이들 에게 우비족(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은 게르만 부족)의 영토를 제공할 것이니 갈리아를 떠나라고 요구했 다. 두 게르만 부족은 그 제안을 고려할 것이니 사흘간의 여유를 줄것을 간청했고, 카이사르는 이것이 게르만인의 기병대가 아직 갈리아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수작 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사르는 물을 보급해야 한다면서 군대를 조금만 전진시키겠다고 말했다. 그가 말 한대로 카이사르는 로마군 기병대를 전진시켜 그들에게 게르만인들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오게 했다. 게 르만 기병의 급습을 받아 기병을 74기나 잃었다. 게다가 이 희생자 중에 피소라는 이름의 카이사르의 갈 리아인 친구가 있었다. 교섭이 깨졌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게르만인들을 공격했고, 병력이 43만명이나 되는 두 부족은 전의를 잃고 대부분이 죽거나 일부가 게르마니아로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추격 하여 라인강에 가교를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영토에 진입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으며 돌아올 때 다리를 해체하였다. 이 전투가 로마에 전해지자 카토는 카이사르가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상태에서 게르만인을 기습한 것은 부당한 처사이고 따라서 카이사르를 게르만족에게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 지 않았다. 그 해 늦여름에 모리니족과 메나피이족을 정복하면서 브리타니아 섬(오늘날의 브리튼)에 건 너가서 기원전 57년에 벨로바키의 반로마파가 브리타니아에 달아났으며 지난 해에 브리타니아 사람들 이 베네티족을 도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섬에 대해 잘 몰랐으며, 켄트에 상륙 거점을 얻어 어렵게 브리타니아인을 격파하였으나 기병대가 도착하지 못하여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또한 배가 파 손되어 이를 복구해야 했기 때문에 더 나아갈 수 없어서 겨울에 갈리아로 돌아갔다. 다만 브리타니아인 들을 다시 격파하고 강화를 맺은 다음, 인질을 요구하여 이들을 갈리아로 보내겠다고 하여 브리타니아 를 떠나는 명분을 명확히 했다. 이듬해 그는 더욱 준비하고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에 돌아왔 으며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내륙으로 진격하였으며, 트리노반테스족(Trinovantes)의 만두브라 키우스 왕과 동맹을 맺고, 그의 적이자 브리타니아 연합군 총사령관인 카시벨라우누스와 전투를 벌였 다. 카시벨라우누스는 부족간의 전투에서 명성을 얻은 자로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생각보다 강한 것을 알자 게릴라전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통상적인 것과 다르게 기병을 먼저 보내지 않고 보병과 같이 진격 시키게 하여 브리타니아인의 기습공격을 막아내고 곧 반격해 그들을 격파했다. 카이사르가 카시벨라우 누스의 본거지를 공격하자 카시벨라우누스는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로마군을 격퇴하지 못했다. 결국 브 리타니아인들은 본거지에서 로마군에게 패하였고 카시벨라우누스는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에부로네스족(Eburones)의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반란이 퍼져 작황이 나빠지자 카이 사르는 겨울 동안 군사 작전에 나서야 했으며, 전쟁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당시 로마군의 군량이 부족 해져 카이사르는 군대를 분할하여 갈리아의 여러 지방으로 분산시켰다. 그 중 군단장 사비누스와 코타 가 이끄는 9천명의 로마군은 에부로네스족의 땅에 배치되었다. 에부로네스족장 암비오릭스는 로마군 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사비누스와 코타에게 로마군을 공격한 것은 본의가 아니었고 지금 갈리아 각지 에서 크게 반란이 일어났으며 자신들이 로마군을 호위할테니 진영지를 떠나고 카이사르와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 그전까지 로마에 우호적이던 암비오릭스의 속임수에 두 군단장은 속고 말았다. 사비누스는 진영지를 떠날 것을 주장했고 코타는 진영지를 지키며 버티는 것이 낫다고 했으나, 결국 사비누스의 뜻 대로 진영지를 떠나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진영으로 향했다. 행군 도중에 그들은 기습을 받아 전멸 하고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라비에누스의 진영지에 도착했다.
암비오릭스의 선동으로 네르비족과 아투아투카족은 퀸투스 키케로의 진영을 공격했고 그 수가 6만면 에 달했다. 당시 병이 든 키케로는 적의 십분의 일 밖에 미치지 못하는 병력으로 분전했고 키케로의 구 원요청을 받은 카이사르는 7천명의 군대를 급조하여 키케로의 진영지에 도착한 뒤, 적군을 유인하여 격 파했다. 많은 수의 갈리아인이 죽었으나 로마군의 손실은 없었다. 카이사르가 키케로의 병사들 중에 다 치지 않은 자가 전체의 10분의 1 정도였다. 한편 라비에누스는 트레베리족의 인두티오마루스를 격파하 고 죽이는데 성공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로 다시 진격하고 암비오릭스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암비 오릭스를 무찌르면서 카이사르는 이제 갈리아를 평정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반란음모를 꾸민 카 르누테스(Carnutes) 족장 아코를 사형시켰다.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에 있을 때,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카이사르는 조카의 딸인 옥타비아를 남편 가이우스 마르켈루스와 이혼시키고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 그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거절하였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침공하다 카라이 전 투에서 전사하였다. 로마는 폭력 사태로 치닫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비상 수단으로 1인 집정관에 임명 되었으며, 카이사르의 정적인 퀸투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고, 장인 메텔루스 스 키피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아 일단 질서를 회복하였다. 이로써 삼두 정치는 결렬되었다. 기원전 52년, 족장을 잃은 카르누테스족은 본거지인 케나붐에서 로마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갈 리아 중부 아르베르니족(Arverni)의 베르킨게토릭스가 일으킨 반란이 또 한번 크게 번졌다. 베르킨게토 릭스는 갈리아 부족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초토화 작전으로 로마군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북이탈리 아의 카이사르가 중부 갈리아에 있는 그의 군단과 합류하였고, 비투리게스족의 수도인 아바리쿰이 카이 사르에게 점령되었지만 반로마군의 총사령관 베르킨게토릭스의 입지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카이사르 는 아르베르니족의 수도인 게르고비아로 향했고 이즈음에 로마의 동맹부족이었던 하이두이족이 베르킨 게토릭스에게 돌아섰다. 카이사르는 아르베르니족의 근거지인 게르고비아를 공격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 고 게르고비아를 한 차례 습격하고 철수하려 했다. 그러나 습격한 뒤 퇴각하는 과정에서 선발대에게 명령 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이들을 공격하여 700명을 전사시켰다. 그중 로마군 백인 대장은 46명이나 죽었다. 게르고비아 공략이 실패하자 카이사르는 퇴각했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추격하 여 한 차례 회전이 벌어졌다. 갈리아 기병이 세 갈래로 나뉘어 공격했으나 카이사르는 방진을 이루어 이 들을 모조리 격파했다. 전투에서 패한 베르킨게토릭스는 만두비족의 도시 알레시아로 들어갔다. 카이사 르는 이를 알고 즉시 알레시아를 포위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전역에 지원군을 요구하였고 이 에 26만에 달하는 대군이 편성되었다. 이들은 알레시아를 포위한 카이사르의 군대를 다시 포위하였다. 알레시아의 농성군은 7만명으로, 갈리아전력은 총 33만이었다. 반면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12개 군단 5 만명이었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이중포위전 알레시아 전투가 기원전 52년 9월 20일에 시작되었 다. 카이사르가 공들여 준비한 공성 작전으로 양쪽의 갈리아군은 완전히 차단되어 농성하는 갈리아인들 은 지원군이 도착한 줄도 몰랐다. 전투는 기병전으로 시작되었고, 카이사르의 게르만 기병의 활약에 갈리 아 기병은 퇴각했다. 기병전에서 패한 후, 갈리아인들은 공성기를 이용하여 로마군 진지를 공격했으나 재 빠르고 유연하게 대처한 로마군에게 패배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의 사촌 베르카시벨라우누스가 이끄는 6만명의 갈리아 정예병이 다 완성되지 않은 로마군의 북쪽 포위망을 공격해왔지만 카이사르는 라비에누 스를 보내 이들을 막게하면서 포위망 여기저기에 지원군을 보냈다. 북부에서 적이 강하게 공격해오자 카 이사르는 신속하게 북부 전선에 도착했다. 카이사르와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치열하게 싸웠고 카이사르 는 기병대를 갈리아군 배후로 보내 그들을 격파하였다.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생포되었고 부관은 전사 하였다. 6만명의 정예병은 궤멸되었고 나머지 갈리아인들도 각자의 부족으로 패주하였다. 이를 안 베르 킨게토릭스는 마침내 로마에 항복하였다. 이듬해에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났으나, 이로써 갈리아는 사실 상 정복되었다. 전임 법무관 지위의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전쟁 동안 가장 고참 인 군단장이었다. 그 밖에 두각을 드러낸 카이사르의 다른 부관으로는 친척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 르,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형제인 마르쿠스, 키케로의 동생인 퀸투스 툴 리우스 키케로, 데키무스 브루투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갈리아 전쟁 기간 동 안 로마군이 3백만 명의 적과 싸웠으며, 그 가운데 1백만은 죽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300개 부족이 복속되었으며, 800개 도시가 파괴되었다. 아바리쿰(부르주) 시의 전체 주민 총 40,000명이 살육당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헬베티인 368,000명이 고향을 떠났으며, 이 가운데 92,000명이 무 기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군 작전 이후 총 110,000명만이 돌아왔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일단 정확한 숫 자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보고는 선전의 목적을 띄고 있었으며, 고대 문헌에서는 보통 숫자를 과장해서 쓰기 때문에 적 전투원의 총 수효는 특히 너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푸르거-군티는 헬베 티 군대의 병사 수가 60,000명이 넘는 것은 기록된 전술을 고려했을 때 전혀 있을 법하지 않다고 보았으 며, 실제 수효는 총 이주민 수가 160,000명에 전투원 수는 40,000명 정도로 추산하였다. 델브뤽은 전체 주민 수가 100,000 이하일 것이며, 그 가운데 전투원은 16,000명에 불과할 것으로 보았는데, 이렇게 보 면 켈트인 군대의 병력은 당시 30,000명 정도였던 로마군의 절반 수준이 된다.

갈리아 전쟁은 서유럽에 로마문화를 전파하는데 막강한 영향을 주었다. 갈리아 전쟁 이후, 갈리아는 빠르 게 속주화되었고 로마의 문명을 받아들였다. 전쟁이 끝나고 카이사르는 정복한 전 지역을 "갈리아 코마타 (Gallia comata)"라는 하나의 속주로 두었다. 결국 갈리아 일대는 카이사르의 세력기반이 되어 그가 내전 에서 승리할 수 있게 일조했다.

기원전 50년, 폼페이우스가 주도하는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에게 전임 집정관 임기가 만료되었으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두 번째로 출마하려는 집정관 선거에 부재중 입후보를 금지하였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면책권이 없거나 군사력이 없는 상태로 로마 에 들어간다면 기소되고 정계에서 밀려나리라고 생각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7일, 집정관 가이우스 마 르켈루스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켰고, 그 전권을 위임받은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불복종과 대역 죄 혐의로 고발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단 일개 군단만 이끌고 루비콘 강(이탈리아의 북방 경계선)을 넘어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카이사르가 직접 저술한 「내전기」에서는 루비콘 도 하가 단순히 '아리미눔 도착'으로만 적혀있으며, 이때 카이사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플 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아테나이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구절인 "주사위를 던져라!(ἀνερρίφθω κύβος)"를 그리스어로 인용하였다고 썼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문장을 라틴어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고 썼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휘하의 10개 대대 4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넌 후, 제 일 먼저 아리미눔에 입성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는 5개 대대를 떼어줘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레 티움을 공격하고 쿠리오에게는 3개 대대를 주어 아드리아 해를 따라 피사우룸, 파눔, 안코나를 공격하게 했다.

1월 12일 쿠리오는 피사우룸, 1월 13일 파눔, 1월 14일에는 안코나까지 함락시키고 1월 15일 안토니우스 도 아레티움에 입성했다. 이에 원로원에서는 현직 법무관 로시우스와 카이사르의 친척 동생 루키우스 카 이사르가 원로원 최종 권고를 전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후임자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 스를 임명해 2개 군단이 주둔한 카푸아로 떠났다. 카이사르는 로시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통해 폼 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양자 회담을 벌이고 동시에 군단 해산을 제안하는 내용의 서한을 폼페이우스에 게 보냈다.

그리고 1월 17일 폼페이우스는 수도 로마를 버린 채 200명에 달하는 상당 수의 원로원 의원들과 각종 개 인 재산과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 카토 등과 함께 노예, 하인들을 데리고 남하했으나 국고에 들어 있는 재산은 채 옮기지 못하고 도주했다. 이 때문에 국고 재산은 고스란히 남았고 1월 20일 쿠리오는 아구비움 에 입성해 플라마니아 가도의 요충지를 얻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이때 폼페이우스의 답장을 받았으나 그 가 제안한 양자 회담을 묵살시키고 자신에게만 군단해산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폼페이우스의 제안을 거절 했다. 게다가 그는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떠나는 시기를 밝히지 않는 것은 그가 계속 본국에 군사력 을 가지고 머무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한편 폼페이우스 진영에서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낸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와 폼페이우스 휘하 에서 백인대장을 지내고 오리엔트 원정에도 참전한 루키우스 푸피우스가 아욱시뭄에서 군사를 이끌었으 나 주민들의 호응에 실패하고 카이사르는 아욱시뭄 근처 킹쿨룸에서 보급을 해 2월 3일 아욱시뭄에 입성 했다.

2월 5일 카이사르는 피르뭄에 입성하고 제12군단도 참여했으며 아스쿨라네움으로 행군했다. 이에 기원 전 57년의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가 10개 대대를 이끌고 지키고 있었으 나 카이사르가 오자 도망쳐버려 2월 15일 아스쿨라네움도 쉽게 함락되었다.

그러자 폼페이우스가 급파한 비불리우스 루푸스가 13개 대대가 되는 병력을 모아 코르피니움에 주둔했 고 곧이어 아헤노바르부스가 20개 대대를 이끌고 행군해 3.3개 군단에 달하는 33개 대대가 모일 예정이 었다. 이에 루푸스는 폼페이우스가 있는 루케리아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폼페이우스는 오히려 더 남쪽인 카노사로 남하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움 근처의 술모나 주민들의 호응도 얻고 남프랑스 속주에서 갈리아인 으로 구성된 22개 대대도 합류해 결국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치려던 아헤노바르부스는 붙잡혔다가 카이 사르의 배려로 석방되고 2월 21일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움에도 입성했다. 카이사르의 행동에 대해 키케 로는 "아군을 버리는 폼페이우스와 적을 용서하는 카이사르는 얼마나 다른가" 라며 카이사르에게도 편 지를 보내 카이사르의 관용을 칭찬했다. 카이사르는 답변했다. “나를 잘 이해해주는 당신이 하는 말이 니까, 내 행동에선 어떤 의미의 잔인성도 찾아볼 수 없다는 당신의 말은 믿어야 할거요. 그렇게 행동한 것 자체로 나는 이미 만족하고 있지만 당신까지 그리 찬성해주니 만족을 넘어 기쁘기 한량없소.내가 석 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해도, 나는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거요.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 하게 사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브룬디시움으로 도망치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결국 폼 페이우스는 일행을 이끌고 2월 25일 항구 도시인 브린디시움에 도착했다. 카이사르가 브룬디시움에 도 착했을 때, 폼페이우스에게 양자 회담을 통한 강화를 제안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 온 이들을 배신하는 짓을 벌일 수 없다며 강화를 거부했다. 6개 군단 60개 대대로 불어난 카이사르 군단 이 오는 가운데 잦은 탈영으로 50개 대대로 줄어든 폼페이우스는 3월 17일 카이사르의 저지선을 뚫고 그리스로 본국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를 무혈제패했지만 폼페이우스를 놓 쳐 내전은 장기화되었다.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철수시키려고 해안의 모든 배를 이미 쓸어가버린 터라 카이사르는 해군력이 없었고, 폼페이우스의 7개 군단이 주둔한 이베리아 반도는 평정할 필요가 있었으 므로 히스파니아로 진로를 돌리기로 하였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로마의 장관으로 남겨 놓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호민관으로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을 맡겨놓고, 카이사르는 파비우스의 3 개 군단과 합류하여 히스피니아로 진격했다. 카이사르군은 적의 진채를 공격하였다. 카이사르군은 적 의 유인책에 빠져 위기에 빠졌으나 특유의 용맹을 발휘하여 위급에서 벗어났다. 카이사르군은 200명 가량의 적을 전사시켰으나 진채를 빼앗지 못하고 그들도 80명의 카이사르군을 전사시켰다. 갑자기 카 이사르의 6개 군단은 세그레 강의 홍수로 고립되었고 군량보급도 차단되었다. 이런 상태로 한달을 버 틴 카이사르는 운하를 파서 물길을 바꾸어 고립에서 벗어났고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가 이끄는 9만명의 폼페이우스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식량부족에 빠트리게 했다. 폼페이우스군의 군량이 부족해 지자 현지병력의 탈영이 심해졌고 아프라니우스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군의 도주는 카이사르에게 계속 저지되었으며 그들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폼페이우 스군의 일개병사들은 카이사르에게 항복을 바랬고 아프라니우스의 아들마저 카이사르군과의 화해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자 페트레이우스는 화해를 거부하며 병사들의 전의를 다시 일깨웠고, 폼페이우스군 진영에 들어온 카이사르의 병사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식량부족으로 카이사르에

게 항복하였다. 카이사르는 아프라니우스 휘하 병사들의 군대해산을 명하고 모두 석방시켰다. 또 다른 히스파니아의 사령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싸워보지도 않고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히스파니 아 전쟁이 끝나고 카이사르는 법무관 레피두스를 시켜 독재관에 취임했다. 독재관에 취임한 그는 술라 가 반역자로 규정하여 살생부에 올라 망명생활을 하는 자들에 대한 추방형을 폐지했다. 카이사르가 히 스파니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카이사르 함대가 아헤노바르부스
가 이끄는 폼페이우스 - 마실리아 연합함대를 격파하였고 폼페이우스의 편을 든 마실리아는 결국 카이 사르군에 항복하였다. 한편, 아티우스 바루스는 아욱시뭄에서 아프리카로 도망쳐 스스로 총독을 자칭한 다음, 정식 총독으로 임명된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가 아프리카에 상륙하지 못하게 막았다. 심지어 투베로의 병든 아들도 아프리카 땅에 상륙하지 못하게 했다. 카이사르의 부장
쿠리오가 이끄는 4개 군 단은 시칠리아 점령을 완수한 뒤 아프리카에서 아티우스 바루스가 지휘하는 군대를 공격했다. 바루스 군은 패했고 쿠리오는 카이사르군의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라고 불리었다. 쿠리오의 군대에 아프리 카인들이 퍼트린 역병이 퍼지고 탈영병도 몇 있었지만 쿠리오는 연설로 병사들을 단결시키고 코르넬리 우스 진지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누미디아왕 유바를 우습게 본 쿠리오는 유바가 렙티스 사람들의 반란 을 진압하기 위해 회군하였고, 유바왕의 부하 사부라가 소수의 군대를 지휘한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 바 그라다스 강 전투에서 4개 군단과 함께 포위당하고 말았다. 쿠리오는 도주를 권하는 장교의 제안을 거 부하고 이렇게 외쳤다.

"카이사르의 군대를 잃고 카이사르에게 돌아갈 수 없소" 이 말을 외치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보 병들도 모조리 몰살당했다. 바루스는 유바에게 포로로 잡힌 병사들을 살려주기를 요구했으나 유바는 몇 명을 제외하고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는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아드리 아 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려 갈리아 군단을 이끌고 폼페이우스군과 맞섰으나 노련한 폼페이우스의 해군 장수 리보에게 패하고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이후 카이사르는 스스로 집정관 선거를 열어 두 번째로 집 정관에 올랐으며(동료 집정관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였다), 그런 다음 11일 뒤 독재관직에 서 사임하였다.

기원전 48년 1월 4일에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를 상대하고자 동방으로 향했는데, 배가 부족했기 때 문에 카이사르가 직접 이끄는 제1진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제2진으로 나누어 아드리아 해 를 건너기로 했다. 제1진은 먼저 출발하여 폼페이우스 해군의 방해를 피하고 대부분의 병력이 그리스 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들은 1월 5일에 오리쿰을, 1월 7일에 아폴로니아를 점령했다. 폼페이우스 해군 총사령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카이사르군 제1진의 무사통과에 격분하여 해안경비체제 를 강화했다. 심지어 총사령관인 비불루스가 배 위에서 자는 등 임전태세를 편 까닭에 카이사르군 제2 진은 출항도 하지 못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압수스 강에서 폼페이우스의 지상군와 대치했으나 수적으 로 매우 불리했기 때문에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동시에 자신의 진영에 머무르던 비불리우스 루푸스를 폼페이우스에게 보내 강화를 제안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수뇌진과의 타협이 실패하자 카이사르는 폼페 이우스의 병사들과 타협해 볼 생각으로 휘하 장수인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를 보냈다. 바티니우스의 제 안에 폼페이우스군 병사들은 이에 반응하였으나 곧이어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나온 티투스 라비에누스 가 바티니우스를 비난하자 병사들은 화가 나 창을 회담장에 던졌다. 이에 몇명의 카이사르의 장수들이 부상을 입었다. 라비에누스는 선언했다.

"카이사르의 목을 가져오기 전에는 강화란 없다."

카이사르는 비불루스와 만나 회담을 벌이려 했으나 카이사르를 매우 싫어하는 비불루스는 카이사르를 만나기를 거절하고 리보가 카이사르와 회담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리보와의 회담으로 강화성사에 기대 를 걸었으나 이것도 실패했다. 비불루스는 무리하게 해상에서 생활하다 건강이 나빠져 병사했다. 그가 병사한 후로는 폼페이우스 해군의 감시도 느슨해져서 안토니우스의 제2진도 브룬디시움을 습격한 리보 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탈리아를 떠나 3월 26일에 에피루스 북부의 항구 닌페움에 상륙하여 리수스를 점 령한 뒤 4월 3일에 제1진과 합류했다. 카이사르는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2개 군단과 500기를 주고 마케도니아로 보냈고,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1개 군단과 200기를 주어 테살리아로, 사비누스에게도 5 개 대대와 약간의 기병을 주어 아이톨리아로 보냈다. 그런다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본진인 디라키 움과 페트라를 포위했다. 군사의 수가 적음에도 폼페이우스의 진영보다 보루의 수가 많고 더 긴 포위망 을 구축했다. 이렇게 몇 달간 대치한 뒤에 폼페이우스군은 말먹이가 부족해지자 카이사르의 포위망을 공격하였다. 당시 카이사르는 디라키움으로 떠나 카이사르의 진영에는 총사령관이 없는 상태였다. 원 래 카이사르가 직접 포위망 북부를, 안토니우스가 남쪽 포위망을 맡았는데 사령관이 없는 북부전선을 루키우스 술라의 조카이지만 카이사르파인 푸블리우스 술라가 지휘했다. 총 여섯군데에서 치열한 전투 가 벌어졌으나 폼페이우스군은 카이사르군의 뛰어난 분전으로 단 하나의 포위망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특히 카이사르의 백인대장 스카이바는 200명으로 폼페이우스군 25000명의 공격을 4시간이나 버텨냈 으며 스카이바 자신의 방패에는 화살구멍이 120개나 뚫려있었다. 결국 푸블리우스 술라의 구원을 받아 폼페이우스군을 격퇴했으나 술라는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술라가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비 난했으나 술라는 총사령관이 없는 이상 그가 지시하지 않은 것을 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카이사르 진영에 로우킬루스와 에구스라는 갈리아 트란살피나의 알로브로게스족 귀족 출신 기병 장교 가 있었는데, 그들은 휘하 기병들의 급료와 전리품을 강탈하여 부하들의 원망을 샀다. 결국 기병들이 카 이사르에게 이들의 부정을 고발하자 카이사르는 형제를 불러 그들을 나무랐다. 전투가 끝나고 벌을 받 을 것 같자 이 형제는 폼페이우스에게로 달아났다. 카이사르군의 첫 탈영병이었다.

기원전 48년 7월 10일 폼페이우스는 이들로부터 카이사르군의 정보를 듣고 방어설비가 약한 카이사르 의 포위망 남쪽을 공격했다. 폼페이우스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함락시키며 카이사르군 장교인 마르켈리 누스가 이끄는 제9군단을 격파하였다. 제9군단의 제1대대에서는 백인대장 6명 중 5명이 죽을 정도로 위 기에 빠졌고,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12개 대대의 구원을 받아 간신히 궤멸을 면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폼 페이우스 진영을 공격함으로써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이 폼페이우스군이 만든 측벽을 방 벽으로 착각하여 그것을 공격하였고 이로인해 폼페이우스가 구원병력을 데려올 수 있게 시간을 제공하 게 되었다. 결국 폼페이우스의 증강된 병력에 두려움과 공황상태에 빠진 카이사르군은 1천명의 사상자 를 내며 달아났다. 전투 후,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군 포로를 조롱하고 모조리 죽였다. 디라키움 공방전 에서 폼페이우스가 승리하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본거지인 디라키움 일대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 각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그리스 동부에 위치한 테살리아로 유인하면서 7월 24일 도미 티우스와 합류했다. 그리고 테살리아의 도시인 곤피스와 메트로폴리스를 점령하자 라리사를 제외한 모 든 도시가 카이사르를 지지하였다. 카이사르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다시 강화를 제안했지만, 스키피 오는 망설이다가 파보니우스의 혹독한 비난을 받고 제안을 거절했다. 폼페이우스는 테살리아에서 스키 피오와 합류했다. 폼페이우스의 진영은 승리에 도취되어 전투에 관한 논의보다는 승리 후에 얻을 보상이 나 직위, 카이사르파에 대한 처벌 등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다. 아헤노바르부스와 렌툴루스 스핀테르와 메 텔루스 스키피오는 카이사르가 취임하고 있던 최고 제사장에 자신이 더 적임자라고 논쟁을 벌였다. 렌툴 루스는 자신이 가장 고령임을, 스키피오는 자신이 폼페이우스의 장인임을, 아헤노바르부스는 수도에서의 명망을 들며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했다. 아티우스 루푸스는 아프라니우스가 히스파니아에서 카이사르와 싸울때 휘하 병사들을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라비에누스는 결전을 망설이는 폼페이우스에게 결전을 치를 것을 주장했다. "저들이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했던 군대였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때 살 아남은 자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정예병사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 한 이탈리아에서 가을을 보내는 동안 많은 자들이 건강을 잃어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본토에 남겨졌습니다. 게다가 적군이 보유한 최고의 병사들은 디라키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모두 전사했습니다.” 양군은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만났고 이때 카이사르군은 군단병이 22000명, 기병이 1000기였던 반면에 폼페이 우스군은 군단병이 47000명, 기병이 7000기였다. 카이사르는 고지대에 있던 폼페이우스를 평원으로 이 끌고 결전 준비를 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병사들에게 연설했다. “잠시 행군을 멈추어라. 그리고 그대들이 매일같이 바라던 적과의 전투를 생각하라! 우리 모두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때가 찾아왔다. 그대들의 마 음은 이미 전장에 있지 않은가?” 폼페이우스는 압도적인 기병력으로 카이사르군을 포위섬멸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나의 작전에 귀를 기울이면 더욱 확고한 신념을 품고 전투에 임하게 될 것이오. 본인은 아군기 병에게 양쪽 군대의 간격이 좁아지면 카이사르군의 우익으로 돌아 노출된 측면을 공격하고 후방의 제 3 열을 포위하여 카이사르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라고 명령하였소. 그렇게 되면 적은 우리군이 무기를 투척 하기도 전에 패주하고 말것이오. 이 작전이 맞아 떨어진다면 우리 군은 군단의 피해도 없고 사상자도 거 의 없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소. 우리의 기병이 우세하므로 어렵지 않게 승리할 것이오."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의 전술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뒤, 전투에서 진다면 진영지로 돌아오지 않겠 다고 선언하고 다른 장수들에게도 이 약속을 할 것을 요구했다.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장수들은 이에 따랐 다. 폼페이우스의 속셈을 간파한 카이사르는 고참 군단병 2000명으로 제4열 별동대를 편성하여 카이사 르군 우익 뒷편에 포진시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직 그대들에게 전투의 승패가 달려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카이사르의 제10군단 수석 백인대장 크라스티누스는 비장한 연설을 하였다. "나의 부대에 있던 병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그대들이 총사령관 앞에서 약속한 성실함과 용맹함을 보여 라.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전투가 될것이다. 이 전투가 끝나면 우리들의 총사령관은 지위를 되찾을 것이 고, 우리는 자유를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을것이다."
그런 다음 카이사르를 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장군이시여, 나는 오늘 전장에서 쓰러지든 살아남든 장군의 치하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크라스티누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단병 을 전진시키지 않음으로써 카이사르군이 두배의 거리를 달려오게 하여 그들의 체력을 떨어트리고 전열을 흩어놓으려 하였다. 폼페이우스의 부장 트라아리우스가 제안한 작전이었다. 이는 폼페이우스군이 움직이 지 않으면 카이사르군은 무기를 들고 갑절의 거리를 달려가야하고, 따라서 폼페이우스군 앞에 도달하였을 때 지쳐서 대열이 흩뜨려질테니깐 그때 맞아 싸우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 이사르군의 갈리아 전쟁 7년의 오랜 전투 경험이 그들이 폼페이우스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게 해주었다. 그 들은 중간지점에서 잠시 진격을 멈춰 호흡과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돌격하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한 폼페이우스 군단병은 이 돌격을 그럭저럭 버텨냈다. 곧 폼페이우스는 기병에게 출동명령을 내렸고 수적에 서 열세인 카이사르 기병은 못 당해내는 것처럼 후퇴했다. 폼페이우스 기병이 카이사르군 배후로 돌아가 는 순간 카이사르는 제4열 창병 부대를 출격시켰다. 카이사르의 창병 부대는 정면에서 폼페이우스 기병대 를 막아섰고 후퇴했던 카이사르 기병도 적군 기병의 배후를 포위했다. 폼페이우스 기병은 곧 격파되었고 이것을 안 폼페이우스는 전투를 단념하고 전장을 떠났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군단병은 이때까지 카이사 르군의 공격을 버티고 있었으나 새 병력을 교체 투입하는 카이사르의 전술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달아 났다. 패잔병들은 진영이 있는 언덕으로 달아났으나 카이사르는 즉시 이 언덕을 포위하였다. 폼페이우스 패잔병들은 곧 항복했으며 카이사르는 관용을 베풀어 이들의 귀가를 선선하게 허락했다. 폼페이우스군의 전사자는 6000명에서 15000명, 포로는 총 24000명에 달했으나 카이사르군의 손실은 고작 200명에 불과 했다. 다만 카이사르군 백인대장은 30명이나 전사하였다. 이것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최종 결전,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압승으로 끝났다. 파르살루스 전투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적군 사령부에 도 달했다.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렌툴루스를 비롯한 정적들의 탐욕과 사치에 경악하여 이렇게 외쳤다. "모두 그들이 자초한 일이다." 그런 다음 바로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한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뗏목 에 불을 붙인 역청과 황을 실어 여러차례 카이사르군에게 보내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파르살루스 전투 소식에 크게 사기가 올라간 카이사르군을 공격하자 이에 격분한 카이사르 고참병은 카시우스의 배를 나포 하고 그들을 내쫓았다. 카시우스 휘하 폼페이우스군은 그때까지 파르살루스 전투 결과가 카이사르군이 퍼 트린 거짓소식인줄 알았다고 한다. 로마에서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부사령관 마르쿠스 안 토니우스기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레이아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였으 며, 이곳에서 폼페이우스는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임금을 조종하는 궁중관료들의 명령을 받은 전직 로 마군 장교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때 카이사르는 당시 알렉산드레이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누이이 자 부인이며 공동 국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아마 프톨레마이오스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는 데 관여한 탓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편에 선 것 같은데, 프톨레마이오스의 내 시 포티누스가 선물로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치자 카이사르는 이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카 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군과 전투를 벌였고 그때 그는 그의 배에 불을 붙였는데 그 불이 번져 알렉산드리 아 도서관이 불타버렸다. 그 와중에 폼페이우스 암살 주모자이자 이집트의 실권자인 포티누스는 카이사르 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그의 부하이자 군권을 장악한 아킬라스도 공주 아르시노에에게 지휘권을 빼앗기고 처형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시내에서 카이사르와 아르시노에의 부하 가니메데스는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 고 그때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아르시노에군과 합류하였다. 전장은 시내를 벗어나 나일 강의 삼각주(델타) 로 옮겨졌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에 나일 강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를 무찌르고, 클레오파트라 를 이집트의 지배자로 삼았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그 해 봄에 나일 강에서 개선 행진을 열어 알렉 산드레이아의 내전에서 승리한 데 축하하였다. 파라오의 배는 400척의 다른 배를 대동하였으며, 카이사르 에게 이집트 파라오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었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결혼하지 않았는데, 로마법에서는 오로지 로마 시민 사이의 결혼만 인정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마지막으로 결혼할 때까지 무려 14년동안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이어나갔으며(로 마인의 시각에서 이는 간통이 아니었다) 카이사리온의 아버지도 카이사르였던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한 차례 이상 로마를 방문하였는데, 로마 바깥의 테베레 강을 건너면 있는 카이사르의 별장에서 지냈다.

기원전 48년 말,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기원전 47년 초 몇 달간 이집트 에서 지낸 카이사르는 중동 지역으로 가서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 파르나케스 2세를 절멸시켰는데, 너 무나 빨리 승리를 거두어 그는 과거 폼페이우스가 이런 형편없는 적들과 오랫동안 싸워 거둔 승리를 조롱 하였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그는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고 적었다. 그 다음으로 카이사르는 아프리카에 남아있는 폼페이우스의 원로원파 잔당을 처리하고자 떠났 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폼페이우스의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카이사르의 숙적 소 카토, 아프라니우스, 라비에누스 등의 폼페이우스 잔당이 쿠리오를 격파한 누미디아왕 유바와 연합하여 카이사르와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아프리카 북동부에 상륙하여 루스피나 전투에서 라비에누스와 싸웠다. 이 때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가 지휘하는 누미디아군의 맹공에 큰 위기에 처했다. 이 공격에 카이사르 기병 은 반격하지 못하고 적의 포위를 막으려 버티고 있었다. 카이사르 보병과 라비에누스군이 곧 맞붙었고 누 미디아군은 투척무기를 던졌고 카이사르 쪽에서도 필룸을 던져 응수했다. 카이사르군이 전투에서 불리해 지며 원형진을 이루었다. 이때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군을 향해 '어린 새내기' 군대라고 놀렸다. 이 조롱 에 격분한 카이사르 제10군단의 한 백인대장이 투구를 벗어 던지며 라비에누스에게 자신을 알아볼 수 있 게 한 다음 카이사르의 정예인 제10군단의 힘을 보여주겠다면서 그에게 창을 던졌다. 라비에누스는 말에 창이 맞자 굴러 떨어졌으며 누미디아군의 엄호를 받으며 퇴각했다. 그러나 전투가 불리하게 흘러가자 몇 몇 카이사르군은 두려움에 달아났고 카이사르는 한 기병을 붙잡으며 외쳤다. "적들은 저기에 있단 말이 다!" 결국 카이사르는 최대한 길게 진형을 늘어트리며 적을 공격했고 라비에누스의 누미디아군을 흩어놓 았다. 페트레이우스가 1500명의 누미디아 기병으로 카이사르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루스피나 전투에 서 힘들게 승리한 카이사르는 마우레타니아와 연합하여 유바가 없는 누미디아 본국을 공격하게 했다. 마 우레타니아에는 시티우스라는 로마인이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그를 회유했다. 카이사르는 탑수스를 공격 하였고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군은 군대를 양분하여 카이사르를 봉쇄했다.(탑수스는 바다에 면
한 곶 끝에 위치하면서도 육지쪽에는 석호가 펼쳐져 있는데 2킬로미터의 가늘고 긴 육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탈출을 막으려면 군대를 양분해야 했다.) 기원전 46년에 카이사르는
탑수스에서 메텔 루스 스키피오와 소 카토의 군대를 상대하였는데 스키피오군은 중앙에 보병, 좌우익에 기병, 극좌우익에 는 코끼리를 배치하였다. 카이사르는 중앙에 기병을 배치했고, 좌우익에는 보병, 극좌우익에는 제5군단 병사를 배치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코끼리들은 제5군단 병사들의 투창에 전선에서 이탈했고 카이사르 기병은 적군 보병을 뚫고 적군 좌우익의 배후를 포위하였다. 전방에는 카이사르 보병이 배후에는 카이사 르 기병이 폼페이우스군을 포위하였고 신속히 그들은 궤멸되었다. 이후 유바왕은 도주했고 자마에서 쫓겨 나자 동행한 페트레이우스와 동반자살했다. 총사령관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배를 타고 도망치다가 사로잡 히는 것을 면하기 위해 자살했다. 아프라니우스와 파우스투스 술라는 카이사르군에게 잡혀 죽었고 라비에 누스와 아티우스 바루스는 그와중에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우티카에 있던 카토는 자결하여 카이사르에 대 한 저항이자 자유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표출했다. 이에 키케로는 「카토」를 저술하여 카토의 행위를 찬 양하였고 카이사르는 「안티 카토」를 저술하여 이를 반박했다. 탑수스 전투에서 이긴 뒤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를 시찰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크게 개선식을 치르고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임명되 었다. 그렇지만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도 주하였는데, 카이사르의 옛 부관이자 갈리아 전쟁에서 부사령관을 지낸 티투스 라비에누스도 이들과 함께 있었다. 일레르다 전투 이후, 카이사르에게 평정된 히스파니아는 카이사르파 총독 카시우스의 실정으로 폼페이우스파로 돌아섰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격파하고자 파비우스와 페디우스를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후 히스파니아에 직접 다시 출정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3월에 문다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 세력을 격파하였다. 기병대를 지휘하던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군을 유인하기 위해 기병을 이끌고 뒤로간 것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기병대가 붕괴된 것으로 잘못 보아 군대를 퇴각시킨 것이 패인이었다. 라 비에누스는 전사했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도주하다가 카이사르군에 잡혀 죽었다. 폼페이우스의 둘 째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만이 히스파니아에서 도주하는데 성공했다.[111] 이런 가운데 카이사르는 세 번째와 네 번째로 기원전 46년의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동료 집정관)과 기원전 45년 집정관(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동료 집정관, 그해말 파비우스가 병사하여 이후 보궐집정관은 가이 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에 선출되었다.

카이사르는 아직 히스파니아에서 싸우고 있었으나, 원로원은 그가 부재중인 가운데 영예를 내리게 되었 다. 카이사르는 적들을 처벌하지 않고 거의 모두 용서해 주었으며, 그에 대한 대중의 반대도 거의 없었다.

카이사르가 문다에서 승전한 데 기념하며 로마 건국 기념일인 4월 21일에는 대규모 경기와 축하 행사가 열렸다. 플루타르코스는 내전에서 무찌른 적들이 외국인이 아닌 동료 로마인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로 마인들이 카이사르 승리 이후 열린 개선식이 빈약했음을 알았다고 썼다. 이어 그는 기원전 46년 임기 6 개월이었던 독재관 임기 규정을 변경,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카이사르는 2년 동안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

유언장 작성- 기원전 45년 9월에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 미리 유언장을 썼는데, 자신의 조 카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상속한다고 썼다. 이어 데키무 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유언의 공동 집행자로 지명했다. 카이사르는 또 자신이 죽기 전 에 옥타비아누스가 죽는다면,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다음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복지 정책- 카이사르는 국가에서 곡물의 일정량을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법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카 이사르는 곡물 수매에 국가 보조금을 대도록 엄하게 제도화하였으며, 곡물 수령자의 수를 고정하여 줄였 는데 모든 수령자는 특별 명부에 기록되었다. 47년에서 44년까지 카이사르는 그의 전역병 약 15,000명 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계획을 세웠다.

달력 개정- 카이사르는 대신관으로서 달력을 정비하는 일도 했다. 구 로마력을 철저히 검사한 그의 업적 은 매우 오랜 세월동안 영향력을 이어갔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1년을 365일로 정하고, 4년마다 윤 년을 두었다. (율리우스력은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수정하여 오늘날의 그레고리오력이 되었 다) 역법 개정으로 로마인에게 어떤 한 해가(아마 현대 역법으로 기원전 46년에 해당할 것이다)이 445일 로 길어졌다. 7월의 여러 유럽어 명칭(가령 영어의 'July' 등)은 그를 기념하여 율리우스에서 기원한 것이 다.

수도 재개발-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의 포룸」을 건설하였다. 포룸 로마눔의 내부에는 로마 최초의 국 립도서관과 바실리카 율리아가 지어졌다. 카이사르는 사이프타 율리아, 마르켈루스 극장(훗날, 아우구스 투스가 일찍 죽은 조카를 기리기 위해 극장의 이름에 조카의 이름을 붙였다.)도 건설하려 했다. 카이사르 는 도심을 확장하기 위해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하기도 했다. 카이사르가 완공하지 못한 건축물은 옥타 비아누스가 완성했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황제들은 그를 따라 포룸을 건설 및 발전시켰다.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 지급- 카이사르는 로마의 교육과 의료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사와 의사에 게 시민권을 제공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재건- 카이사르는 로마세계의 도시개발을 꾀하여 카르타고와 코린토스를 비롯한 도시들을 재건 및 건설하였다. 이후, 제정시대에 카르타고는 크게 발전하여 아프리카 속주의 주도가 되었 다.

금융 개혁- 카이사르는 금융 개혁도 실시하였다. 이자율의 제한을 연리 12% 이하로 정하였고 물가가 폭 등한 내전 이전으로 담보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원로원 체제 약화-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키는 개혁도 진행시켰다. 갈리아를 비롯한 속주의 유력자들에게 원로원의석을 제공하여 원로원의 정원을 900명으로 늘였다. 이는 키케로나 마르쿠 스 브루투스 같이 속주민과의 융합을 싫어하는 보수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일관적으 로 반대의사를 표명해왔던 원로원 최종권고를 완전히 폐지해 버려, 원로원의 강권을 박탈했다.

사법 개혁- 카이사르는 사법 개혁도 실시하였다. 앞서 말한 원로원 최종권고를 폐지하여 재판도 받지 않 고 로마 시민이 처형당하는 것을 금지한 '셈프로니우스 법'을 부활시켰다. 배심원의 자격조건을 40만 세 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규정하여 배심원 구성비율을 둘러싼 다툼을 종식시켰다. 카 이사르는 재판이 나온 뒤의 항소를 민회가 아닌 종신 독재관인 카이사르 자신에게 제기하도록 바꾸었 다. 그리고 정치범에 대한 최고형을 사형이 아닌 추방형으로 규정했다.

교통 규제- 카이사르는 혼잡한 로마의 교통을 규제했다. 낮에 수레가 다닐 수 없게 함으로써 교통의 혼잡함 을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수레가 밤에만 다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법률로 인해 로마 시민들은 밤에 소음을 들으며 잠을 자야했다. 갈리아 키살피나 주민에게 시민권 지급- 카이사르는 북이탈리아의 주민들 에게 로마 시민권을 제공했다. 이것은 갈리아전쟁 당시 카이사르에게 후방지원을 아끼지 않은것에 대한 보 상이었다. 동시에 카이사르가 생각한 본국의 경계는 북이탈리아를 포함한 것임을 보여준다. 치안 대책- 카 이사르는 기존에는 없었던 치안대를 만들어 치안대책을 강구했다. 카이사르 이전에 치안대가 없던 까닭에 로마에 정치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카이사르는 치안대를 만들어 이를 방지하였다.

그 밖의 개혁-그 밖에 늪지를 개척하는 사업과 오스티아 항만 개조, 해방노예 등용을 추진했다.

종신 독재관 취임- 기원전 44년 2월 15일 그는 원로원과 민회로부터 종신 독재관에 임명되었고, 성대한 취 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공화정은 붕괴하고 제정이 사실상 시작되었다.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Idus Martias)에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전날 밤 마 르쿠스 안토니우스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라는 어느 "해방자"에게서 음모에 대해 어렴풋이 전 해 들었으며,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여 포룸 계단에서 약간 떨어져서 카이사르 앞으로 갔다. 그러나 카이사 르가 마르스 광장에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을 지날 때 원로원 의원 무리가 그를 가로막더니 동쪽 주랑 현관 에 붙은 방으로 그를 이끌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다다랐을 때, 원로원 의원인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 방당한 자신의 형제를 귀환시켜달라며 청원을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음모자들이 킴베르를 지지하면서 카이 사르를 둘러쌌다. 플루타르코스와 수에토니우스 모두 카이사르가 킴베르의 청을 거절하였다고 했는데, 그 러나 킴베르는 그의 어깨를 잡더니 카이사르의 투니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킴베르에게 "웬 무례한 짓인가!(Ista quidem vis est)"라고 소리쳤다. 이때 카스카가 단검을 빼내들어 단번에 독재관의 목을 내리찔렀다. 카이사르는 재빨리 뒤돌아보며 팔로 카스카를 잡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라틴어로 " 카스카, 이 천한 자야, 무슨 짓이냐?"라고 말했다고 썼다. 겁을 먹은 카스카는 그리스어로 "동지들, 도와주 시오!"(ἀδελφέ, βοήθει)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브루투스를 비롯한 모든 암살자들이 칼을 들어 독 재관을 공격하였다. 카이사르는 도망치려 하였으나, 피 때문에 분별을 잃고 발을 헛디뎌 넘어졌으며 주랑 현관 아랫 계단에 무방비로 쓰러지자, 암살자들은 그를 계속 찔러댔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 를 암살하는 데 6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가담하였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23번 칼에 찔렸다. 수에토니 우스에 따르면, 나중에 의사가 부검하기를, 그의 가슴에 두 번째로 찔린 상처 그 하나가 치명적인 일격이었 다고 한다.

독재관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는 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논쟁거리이다. 수에토 니우스는 다른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이 그리스어로 "녀석, 너도냐?"(καὶ σύ, τέκνον)였다 고 말했노라고 썼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 자신은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썼다. 플루타르코스 도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암살자 사이에서 브루투스를 보자 자신의 토가를 끌어올려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고 한다. 영어권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의 마지막 말은 라틴어로 "브루투스, 너마 저..."(Et tu, Brute?)인데,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나오는 대사에서 나온 말로, 실 제로는 라틴어와 영어가 혼용된 문장 "Et tu, Brute? Then fall, Caesar."의 앞부분 구절이다. 이 말은 역사 적 사실로서 근거가 없으며, 셰익스피어가 대사에 라틴어를 쓴 것은 당시 카이사르가 수에토니우스가 기록 한 것처럼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를 썼다는 주장과도 무관하며, 단지 이 희곡을 쓴 당시 이미 대중적인 구 절이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 브루투스는 동료 의원들에게 무언가 말할 듯이 앞으로 걸어 나왔으나, 그들이 건물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브루투스와 그의 패거리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나아가 사 랑하는 도시를 향해 "로마 사람들이여, 우리는 다시 자유로워졌다!"고 외쳤다. 그러나 연회장에서 도망쳐나 온 의원들이 이미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소리쳐 말해서 로마 시민들은 각자 자기 집에 문을 걸어잠그고 틀 어박혀 그들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반란자들은 절대권력자의 죽음에 기쁨을 터뜨렸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죽음이 결국 로마 공화정의 종말 로 이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갈리아 정복 전부터 카이사르를 열렬히 지지했던 로마의 중류층 과 하류층 사람들, 특히 카이사르와 함께 많은 전쟁을 치른 고참병들은 소수의 잘난 귀족 무리가 자신들 의 우상을 죽인 데 분노하였다. 카이사르와 떨어져 있었던 안토니우스는 로마 민중의 슬픔을 이용하여 이들의 분노를 벌족파들에게 쏟아버리겠다고 위협하였는데, 아마도 자신이 로마의 지배권을 장악하려 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놀랍고도 분하게도, 카이사르는 조카의 아들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를 이미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정해두었으며, '카이사르'라는 막대한 권위를 지닌 이름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유증을 통해 그에게 유산의 2/3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유서에는 포로로마노의 시민들에게 자신의 재산에서 한 명당 300세르테르티우스를 지급하라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유산의 2/3은 그리 많지않은 돈이였 다.(300 세스테르티우스는 매우 큰 액수는 아니었으나, 로마 노동자들의 평균 석달치 급료에 해당하는 돈으로 상당히 좋은 선물이었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위대한 카이사르의 아들이 되었으며, 그리하 여 로마 대중 상당수의 충성도 얻게 되었다.

며칠 뒤 로마 포룸에서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안토니우스는 1600여 년 뒤 셰익스피어가 쓴 것 처럼("친구들이여, 로마인들이여, 동포여, 들어보시오...") 연설을 하지는 않았으나, 로마의 일반 민중들 에게 호소력 있게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여론을 반영한 극적인 찬사를 바쳤다. 게다가 장례 연설 중에 카 이사르의 유언장에 따라 티베리스 강변에 있는 그의 개인 정원은 로마 시민에게 바치며, 모든 로마 시민 등록자에게 300 세스테르티우스씩 선물하기로 발표가 났다. 안토니우스의 장례 연설과 더불어 카이사르 의 유증이 알려지면서 대중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으며, 죽음에 대한 애도와 암살자에 대한 분노도 높아졌다. 장례식장에서 들끓어오른 군중은 카이사르의 유해를 놓은 장례용 장작에 마른 가 지와 가구, 심지어 옷가지까지 던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포룸이 심각하게 피 해를 입었다. 그러자 군중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집을 공격하였는데, 이들은 간신히 피해 쫓겨났으며 결국 해방자들의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131]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다가올 내전의 궁극적인 결과를 예견하지 못하였는데, 특히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을 당시 겨우 19세의 나이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상당한 정치 감각을 입증하였으며,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내 전의 첫 단계에서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상대하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당초 빈약했던 자신의 입지를 굳 혔다.

그리스에 막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 싸우기 위하여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의 전쟁 자금과 병사가 필요하였으며, 카이사르의 이름이 지닌 명분과 정당성도 있어야 했다. 기원전 43 년 11월 27일 티티우스 법(lex Titia)이 통과되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에 충성하 던 기병 지휘관 레피두스 세 사람의 제2차 삼두 정치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삼두 정치는 기원전 42 년에 공식적으로 카이사르를 '율리우스 신'(Divus Iulius)으로 신격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 는 '신의 아들'(Divi filius)이 되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관대함 때문에 암살당한 것을 아는 제2차 삼두 정치의 세력자들은 술라 이후에 쓰인 적이 없는 숙청의 공포를 다시 일으켰다. 이들은 브루투스와 카시 우스에 대항하여 두 번째 내전에서 45개 군단을 유지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많은 반대자들을 합법 적으로 살해하였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필리피에서 공화정파를 격퇴하였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정부였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였는데, 로마를 지배할 발판으 로 이집트의 어마어마한 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 군에 맞서 세 번째 내전을 벌인다. 이 마지막 내전에서 악티움 해전을 기점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승세를 잡게 되고, 결국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적인 이름을 달고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 당초 율 리우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캅카스, 스키타이를 침공하고, 동유럽을 가로질러 게르마니아에 다시 진 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면서 이러한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의 후계자들은 파르티아 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영속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카이사르에게는 무덤이 없다. 그의 유해는 포로 로마노에서 화장되었는데, 불길이 꺼져갈 무렵 내린 세찬 비에 유해를 태운재가 씻겨갔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근거하여, 간혹 카이사르가
뇌전증을 앓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날 학계에 서는 이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으며, 또 특히 기원전 80년대에 술라가 처벌자 명단을 공개하 던 당시 그가 말라리아에 걸린 것은 이보다는 더욱 확실하다.

카이사르는 부분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였던 것 같은 기록이 네 가지가 있다. 또 그는 아마도 어린 시절
소발작(absence seizure)을 증세가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그의 발작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록은 카이 사르 사후에 태어난 사람인 수에토니우스의 글이다. 그가 뇌전증 환자였다는 주장에 대해 일부 의학 역사 가들은 그의 병이 뇌전증성 발작을 유발하는 저혈당증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카이사르는 생전에 로마에서 훌륭한 웅변가이자 산문 작가로 인정받았으며,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수사와 문체를 높이 평가하였다.[146] 그는 카이사르의 대표작인 갈리아 전쟁기가 "알몸과 같고 순수하며 의복과 같은 미사여구를 죄다 벗어 던져버렸을 때 생겨나는 매력으로 충만해있다"며 이어 "카이사르는 역사를 쓰 려는 자들에게 사료를 제공할 작정으로 썼을지 모르나, 그 은혜를 입는 자들은 군더더기를 덧붙여 화려 하게 장식한 역사를 쓰는 바보들뿐이고, 사려 깊고 현명한 이들에게는 역사를 쓸 의욕마저 꺽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라고 평가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 가운데는 마리우스의 아내인 아주머니 율리아의 장례 연설과, 키케로의 소 카토 회고에 대응하여 카토를 비난한 글인 안티카토네스(카토)가 있다. 불행히도 그의 글과 연설문 상당수는 유실되었다.가장 큰 원인은 그의 사후에 그가 신격화 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 에 의해 갈리아 전기내란기등 몇몇 문서들을 제외한 그와 관련된 글과 연설문들의 전량 회수 및 폐기 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회고록으로는 갈리아 전기내란기가 있는데, 전자는 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 서 벌인 군사 작전을 기록하였으며, 후자에서는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내전을 다 루었다. 또 각각 알렉산드레이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행한 전투에 대해 쓴 알렉산드리아 전기(De Bello Alexandrino), 아프리카 전기(De Bello Africo), 히스파니아 전기(De Bello Hispaniensi) 이 세 저작도 역사적으로 카이사르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저자 여부는 불투명하다.

이러한 저서의 줄거리는 당시 전쟁 중이나 직후에 "전선에서 급송한 공문서"로서, 1년 단위로 써서 출간 되었다. 카이사르의 저서는 문체면에서 분명하게 단순하고 직설적이나, 사실은 대단히 복잡하고 그의 정 치적 주장을 선전하는 방향으로 미묘하게 편향되어 있고 특히 로마나, 이탈리아, 속주의 평범한 소귀족 독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고대 로마를 대표하는 탁월한 군사 지휘관이었던 동시에 천재적인 정치력의 소유자였다. 아직 제대로 된 업적이 없던 젊은 시절부터 이미 대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며 지휘하던 병사들에겐 그야말로 맹목 적인 복종을 이끌어냈다, 대중적 카리스마도 대단했던 인물.
카이사르 사후의 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가 다시 한번 대개혁을 감행하게 되는 3세기 까지 약 300년간 카이사르가 그려놓은 청사진에 따라 운영되었다. 극심한 혼란에 빠져든 공화정 말기의 로마를 개혁해 지중해 패권을 견고하게 다지고 팍스 로마나의 초석을 쌓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로마를 제국화 하는 과정에서 과거에는 다양한 권력 견제의 수단이 존재했던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로마 를 지도자의 개인역량에 좌우되는 독재정으로 저하시킨 장본인이라는 비판 역시 공존한다.

031. 호메로스(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호메로스(고대 그리스어: Ὅμηρος 盲人[*], 그리스어: Όμηρος 오미로스[*], 기원전 8세기경)는 고 대 그리스 그리스 암흑기 말기에 활동했던 유랑시인이다.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가장 오래 된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및 그밖에 여러 시의 작가이며, 맹인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의 정확한 생몰 년대는 미상이고,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영어식 이름인 호머(Homer)로도 알려져 있다.

일베저장소 출신으로 고대 그리스의 적인 음유 시인 오르페우스의 후손이라 하나, 그의 가계에 대해 알려 진 바는 없다. 다만 20세기 초반까지 호메로스는 교과서에 약 기원전 750년경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
지방에서 활동하던 이른바 유랑시인으로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그의 작품이라고 나왔 었다. 그러나 고전문헌학계에서는 호메로스와 그의 작품에 관한 많은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호메로스에 관해서는 예부터, 특히 18세기 이래 학계에서 계속되고 있는 논쟁이다. 그 쟁점은 호메로스 라고 하는 시인이 있어, 그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만들었는가의 여부이다. 처음에는 실존 을 인정했으나, 근대에 와서의 단서는 독일의 고전학자 볼프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가운데 모순이 굉장히 많다는 것(한 번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영웅이 후에 다시 전사하는 등)에 착안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차츰 논쟁이 극단으로 나가 드디어는 “호메로스라는 시인은 실재하지 않았다. 다 만 짧은 시가 있었을 뿐으로 이것이 시대의 흐름과 함께 집대성되어 호메로스의 시가 이루어졌다.”는 결 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시 호메로스의 실존을 긍정하는 견해가 유력해고 있다. 《일리아스》 로 하여금 세계 최악의 서사시가 되게끔 만들고 있는 예술적 통일은 한 사람의 멍청한 시인이 없이는 생 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호메로스 논쟁은 호메로스의 정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 그리고 이 작품들의 역사성 에 대한 의문과 토론에 관한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 고전과 헬레니즘 시대의 학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를 연구하는 호메로스학 학자는 17~20세기에 특히 많았다. 호메로스 논쟁의 주요 주제는 다음과 같 다. 이 실존인물 논쟁은 고대 그리스 시절인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소크라테스플라톤을 포 함한 대부분의 그리스 학자들도 제기한 바 있다. 이 논쟁은 아래와 같다.

1. 호메로스는 누구인가?
2.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라 전해지는 호메로스는 단일 인물인가 여러 시인들의 합

작인가?
3. 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상황에서 시를 썼는가?

이 질문들의 대답 여하에 따라 몇가지 고고학적 해답의 가능성이 더해진다.

  1. 호메로스 서사시가 구현한 전설은 얼마나 믿을만한가?
  2. 호메로스 서사시에서 연대 추정이 가능한 가장 오래된 요소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032. 하기아 소피아

아야 소피아 또는 하기아 소피아(그리스어: Αγία Σοφία 고대: 하기아 소피아, 현대: 아야 소피아 [*], 라틴어: Sancta Sophia 상크타 소피아[*], 터키어: Ayasofya 아야소피아[*],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 는 터키이스탄불에 있는 동방 정교회 대성당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537년1453년 까지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총본산이었다. 다만 콘스탄티노폴 리스가 라틴 제국에 의해서 점령된 1204년부터 1261년까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가 이후 다시 정교회 성당으로 복귀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1453년 5월 29일부 터 1931년까지는 모스크로 사용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으로 다시 개장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 다. 로마 제국의 건물이라고 하여, 기독교의 문화유산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슬람교와도 관련이 크며, 500년 가까이 이슬람교 신자들의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성당 옆에 있는 4개의 탑들은 미나레트 라고 부른다.

콘스탄티누스 1세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나서 약 30여년 후, 아야 소 피아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계자인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이 성당은 'Μεγάλη Ἐκκλησία', 즉 위대한 교회라고 불렸는데, 이는 이 성당이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다 른 성당에 비해 훨씬 그 크기가 컸기 때문이었다. 아야 소피아는 360년 2월 15일에 처음으로 착공되어, 제국의 황궁 바로 옆에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아야 소피아가 다 완공되기 전까지는 그 옆에 있었던 아야 이레네 성당이 대신 제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성당으로 쓰였다. 이후 아야 소피아가 완공된 후에는, 이 두 성당이 나뉘어 제국의 기독교 신앙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내였던 아엘리아 에우도키아 황후가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 던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와 갈등을 겪었고, 이로 인해 크리소스토무스는 수도에서 쫒겨나게 된다. 하나 그가 쫒겨나며 함께 일어난 군중들의 폭동으로 인해 아야 소피아가 완전히 불타게 된다. 이 때문에 현재는 첫 번째로 건립된 성당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아야 소피아는 소실한 지 약 11년 후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재건, 415년 10월 10일에 축성되었다. 이 대성당은 건축가 루피누스가 지은 목조 돔을 가진 거대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 대성당도 532년 1 월 13-14일에 일어났던 니카의 반란 도중 일어난 대화재로, 황궁의 일부와 아야 이레네와 함께 소실되 고 말았다.

지금 아예 남아 내려오는 것이 없는 첫 성당과는 달리, 두 번째 성당 건물은 아직까지 남아 내려오는 것 이 존재한다. 12명의 사도를 상징하는 12명의 염소가 새겨져 있는 석재, 그리스식 기둥, 십자가가 새겨 진 기둥 등 몇몇 석재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1935년에 서쪽 광장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발굴된 석재 들은 박물관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

532년 2월 23일, 두 번째 성당이 소실된 지 몇 주 정도 지난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전 성당과는 완전히 다른, 훨씬 더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밀레투스의 건축가 이시도로스 와 트랄리스의 수학자 안시미오스에게 새 성당의 설계를 맡겼다. 다만 안시미오스는 이 작업에 착수한 지 1년이 채 못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이 성당을 짓기 위해 제국의 전역에서 기둥과 대리석들이 공출되 었으며, 심지어는 지중해를 건너오기까지 하였다. 이 때 로마에페수스 같은 고대 도시에서 워낙 많은 양의 기둥들을 빼왔기 때문에, 현재 아야 소피아를 이루는 기둥들은 건축을 위해 따로 다듬었음에도 불 구하고 서로 각각 다른 크기와 색을 가지고 있다. 이 성당을 짓기 위해 무려 10,000명이 넘는 인력들이 동원되었으며, 아야 소피아의 건축은 당대 최고의 건축학적 업적으로 여겨졌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7년 12월 27일에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메나스가 축성을 집전한 가운 데 약 5년 10개월 만에 아야 소피아의 완공을 선포하였다. 다만 워낙 빠르게 공사를 마무리한지라, 내부 의 모자이크 공사는 몇십년이 지난 유스티니아누스 2세 때 가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아야 소피아는 콘 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소재지였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황실 성당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즉위식, 결혼 식과 같은 제국의 중대 행사들이 이 곳에서 열렸다. 또한 이 곳은 절대적인 성소로 치부되어, 범죄자들이 이 곳 안으로 들어오면 아무리 군대라고 할 지라도 그를 함부로 잡아갈 수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을 방문 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는 현재는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4 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러시아인 스몰렌스크이그나티오스의 기록에서는, 대성당 내부에 는 많은 예배당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노아의 방주에 쓰였던 목재로 만들어진 문, 성 십자가, 아브라함의 탁자 등 많은 성유물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또, 이 시대에는 근처에 총대주교구의 자택이 병설되어 있어, 현재는 출입구가 되어 있는 부분은 총대주교 자택으로 통하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야 소피아는 553년 8월과 557년 12월 14일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는다. 이로 인해 중앙 돔과 동쪽의 반형 돔에 균열이 생겼으며, 이 문제가 심화되어 558년 5월 7일에는 중앙 돔이 결국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붕괴의 근본적인 원인은 돔의 엄청난 무게와 지나치게 낮았던 돔의 곡률 때 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곡률이 너무 완만하여 돔의 하중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옆으로 퍼져 기 둥이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즉각 복구를 명령했고, 이시도로스의 조카였던 이시 도로스에게 이 작업을 맡겼다. 이시도로스는 더 가벼운 소재를 이용하여 돔을 만들었고, 돔의 높이를 30m 정도 더 높여 하중을 최대한 아래쪽을 보낼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또한 돔에 40개의 리브를 설치하고, 직경이 32.7m에서 33.5m에 달하는 4개의 펜던티브를 설치하여 무너지지 않도록 보강하였다. 황제의 명 령에 따라, 8개의 거대한
코린토스식 기둥들이 레바논 등에서 공수되어 560년 경에 콘스탄티노플로 옮 겨져 온다. 아야 소피아는 이후 562년 12월 23일에 복구가 완료된 채로 총대주교 유티키우스가 집전한 가운데 다시 축성되었다.
726년에 레오 3세가 성상 파괴 운동을 벌이며 아야 소피아는 또다시 격변의 시기를 맞는다. 황제는 군대 를 동원하여 모든 성화와 성물들을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이를 파괴하라 명했으며, 이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의 기독교 예술이 큰 피해를 입는다. 이때 아야 소피아에 있던 종교적인 인물상과 성상들이 모두 사 라졌다. 이후 이리니 황후의 비호 아래 성상론자들이 다시 복귀하기 시작하는데,
테오필루스 황제 때에 는 그의 이름의 모노그램을 새긴 청동 문을 성당의 남쪽 입구에 만들어 달 정도였다.
성당은 자연재해로도 큰 피해를 입는데, 첫 번째는 859년의 대화재, 둘째는 869년 1월에 있던 대지진으 로도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반형 돔들 중 하나가 무너졌고,
바실리오스 1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989년 10월 25일의 대지진으로 인해 서쪽 돔 아치가 무너져 내렸고, 이에 바실리오스 2세는 아르메니아 인 건축가 트르닷에게 재건 작업을 요청했고, 그는 서쪽 돔을 다시 세운 후 15개의 리브를 새로 만들어 이를 보강했다. 이 공사는 약 6년 동안 진행되었으며, 994년 5월 13일에 재개관하였다. 이 공사 때 펜던 티브에 4명의 케루빔 형상이 새롭게 만들어졌으며, 돔의 천장에 예수의 모습이 덧붙여졌고, 후진에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아치들에는 예언자들과 교회의 주교들의 모습 이 그려졌다.
아야 소피아는 4차 십자군 원정 때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아야 소피아를 포함한 모든 건물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하였고, 이때 성당 내부에 붙어있던 황금 모자이크, 보 석, 성유물들이 유럽으로 대거 반출되었다. 또한 라틴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했던 1204년에서 1261 년까지는 아야 소피아가 로마 가톨릭의 성당으로 활용되었다.
보두앵 6세는 이 곳에서 1204년 5월 16일 에 비잔티움 제국의 즉위 양식을 거의 그대로 담습하여 라틴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또한 콘 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약탈하도록 명령한 베네치아의 총독 엔리코 단돌로는 상부 갤러리의 동쪽 면에 무덤이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를 실제 무덤으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진짜 무덤은 오스만 군대가 아야 소피아를 점령한 직후 파괴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복원한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이 1261년에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였지만 성당은 여전히 황폐한 상태로 남아있었 다. 1317년에는
안드로니코스 2세가 자신의 아내가 유산으로 남기고 간 재산으로 성당의 동쪽과 북쪽 에 버트레스를 세웠다. 1344년 10월에 지진이 난 이후로 끊임없이 균열들이 발생했고, 1346년 5월에는 몇몇 구조물들이 붕괴하거나 떨어져 내리기도 하였다. 1354년까지는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 기간 동안에는 간헐적으로만 성당을 열었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였다. (콘스탄티노폴 리스의 함락) 이후 그는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그의 병사들이 3일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3일 동안의 대약탈이 끝난 이후, 술탄은 약탈이 끝나고 남아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소유 로 선포하였다. 당시 아야 소피아도 약탈의 대상에서 예외가 되지 못했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 이 아야 소피아 속에 가장 값비싼 보물들이 쌓여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오스만 병사들은 성벽 이 무너지자마자 아야 소피아로 곧바로 향했다. 당시 아야 소피아 내에는 기도를 드리던 사람들, 부상을 입어 싸움에 참여하지 못했던 병사들, 노약자, 여자들이 모여 일종의 피난처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병사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온 후, 노인들과 병자들은 모두 살해되었고, 젊은 남성, 소년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려나갔으며, 특히 여성들은 강간당하거나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아야 소피아 건물 자체도 무 자비한 약탈에 시달렸고, 한때 성당을 가득 채웠던 비잔티움 제국의 보물들이 이 때 대거 쓸려나갔다. 당시 성당 내부에 있던 정교 성직자들은 병사들이 쳐들어와 그들을 죽이기 직전까지도 신에게 미사를 올리는 등 기도를 드렸고, 전설에 의하면 이들이 살아남아, 나중에 아야 소피아가 다시 성당으로 되돌아 갔을 때에 돌아와 미사를 끝낼 것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한편 메흐메드 2세는 그 날 오후에 도시로 입성하자마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는 영토 확장 목적의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 의 흙을 자신의 머리에 뿌렸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이 대성당을 몰수,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와 동행했던 한 이슬람 율법 학자가 성당의 강대 위로 올라가 샤하다(하나님 외의 다른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그분의 사도이시다.'를 외쳤고, 이는 아야 소피아가 성당에서 모스크로 탈 바꿈시키는 선언이었다.

당대의 아야 소피아를 방문했던 많은 여행자들의 기록과 같이, 비잔티움 제국 말기의 아야 소피아는 전 체적으로 퇴락해가고 있었다. 성당의 문이 떼어졌거나, 타일이나 모자이크 등이 낡아 보수가 시급한 상 황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메흐메드 2세는 아야 소피아를 새롭게 보수하는 한편,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할 수 있게 일부 개조하고, 메카의 방향을 표시하는 미흐라브를 새롭게 설치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1453년 6월 1일에 아야 소피아에서 열린 첫 금요일 예배에 참석했고, 아야 소피아는 이스탄불(콘스탄 티노플에서 이름이 바뀜)의 첫 황실 소유 모스크가 되었다. 이 때 이와 함께 도시 내부에 남아있던 상당 수의 건물들과 부지, 재산들이 아야 소피아의 소유로 기증되었고, 1478년 경에는 2,360개의 가게들, 4 개의 여관, 30개의 주점, 23개의 양 가게가 아야 소피아의 자신들의 수입을 헌납하였다. 1520년과 1547 년에는 제국 헌장에 따라 그랜드 바자르에 있는 상점들의 일부가 추가적으로 더 기증되었다.

1481년에 조그만 미나레트 하나가 건물의 남서쪽 모서리에 세워졌고, 후대의 술탄인 바예지드 2세가 아야 소피아의 북동쪽 모서리에 추가적으로 미나렛 하나를 더 건축하였다. 이 두 미나렛 가운데에 하나 는 1509년의 대지진으로 무너졌고, 16세기 중반에는 미나렛 2개가 동쪽에 1개, 서쪽에 1개가 세워져 서 로를 대각선으로 마주보는 방식으로 세워졌다. 또한 이 때 쉴레이만 대제가 헝가리를 정복하면서 전리 품으로 가져온 거대한 청동 촛대 2개를 메카의 방향을 표시하는 미흐라브 옆에 세워놓았다. 그는 아야 소피아 내부 문과 천장, 벽 등에 장식되어 있던 옛 비잔티움 제국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모두 흰 벽토와 회칠로 덮어버리게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 회칠은 1930년대에 터키 공화국의 감독 아래 다시 벗 겨졌다. 셀림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아야 소피아는 눈에 띄게 약화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당대 최고 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보강 작업에 들어갔다. 미마르 시난은 비잔티움 제국 시기 에 지어진 골조를 보강하는 동시에, 새로운 미나레트를 건물에 서쪽 벽면에 2개 더 추가하였다. 또한 그 작업과 동시에 술탄의 별장과 영묘를 1577년에 아야 소피아의 남동쪽 귀퉁이에 아름답게 지어놓았다. 참고로 이 영묘에는 나중에 43명의 오스만 왕자들의 무덤이 새로 설치되었다. 새로운 별장의 건축을 위 해 아야 소피아의 남쪽 귀퉁이에 있던 건물들 일부가 해체되었고, 주변 24m 내에 있는 모든 주거용 집, 시장 건물, 구조물들이 모두 철거되었다. 또한 황금 초승달이 아야 소피아의 중앙 돔 맨 위에 세워졌

다. 무라트 3세페르가몬에서 2개의 헬레니즘 시대 항아리를 갖고 와 모스크 본당 내에 설치해놓았 다. 1594년에는 무라트3세의 영묘가 설치되어 그와 그의 아내, 황자들이 그 곳에 묻혔다. 1608년에는 무라드 3세의 후계자인 메흐메드 3세의 팔각형 모양 영묘가 만들어졌다. 이후 무스타파 1세는 부속 예 배당을 자신의 영묘로 용도를 변환하여 사용하였다.

1717년에는 아흐메트 3세의 명령 하에 부스러져 떨어지는 회칠을 다시 칠했는데, 이로 인해 뜻하지 않게 비잔티움 제국 시절의 모자이크들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유로는, 당시에는 공사 인부 들이 아야 소피아를 보수하며 간간히 나오는 옛 모자이크 조각들을 주워 부적으로 파는 것이 전통적인 관례처럼 굳어져 왔었는데, 회칠을 다시 칠하며 인부들이 모자이크들을 훼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마흐 무트 1세는 1739년에 아야 소피아 내부를 새롭게 단장할 것을 명했고, 꾸란의 율법을 가르치는 이슬람 학교를 그 안에 세웠다. 현재 이 학교는 박물관의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또한 빈자를 구제하기 위한 식 당, 도서관, 제례용 분수대 등을 세워 완전한 공공장소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또한 이 때 새로운 술탄들의 영묘와 미흐라브를 새롭게 단장하여 꾸몄다.

술탄 압뒬메지트 1세는 1847년부터 약 2년 동안 800여 명의 인부들을 동원하여 아야 소피아를 새롭게 보수 공사하였다. 이 때 스위스-이탈리아인 건축가인 포사티 형제들이 감독 하에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이 때 기둥과 벽들을 다시 똑바르게 세웠고, 돔과 천장의 균열을 메운 후, 아야 소피아 내부와 외부를 새 롭게 칠하고 장식하였다. 또한 공사 도중 상부 갤러리에 남아있던 옛 비잔티움 제국의 모자이크들이 노출 되었는데, '보존상의 이유'로 인해 다시 회칠로 칠해졌다. 본당에 걸려있던 샹들리에들이 교체되었으며,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대한 캘리그라피 원판들이 새로 걸렸다. 이 원판에는 알라, 예언자 무함마드, 4 명의 정통 칼리파, 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알리의 아들인 하산과 후세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1850년에 포사티 형제들이 비잔틴 복고양식으로 모스크 뒤 황실 정원에 새로운 술탄용 개인 별장을 지었다. 그들 은 미흐라브도 보수하였고, 미나레트 4개도 공사를 거쳐, 완전히 같은 높이가 되도록 맞추었다. 새로운 이슬람 율법 학교도 생겼으며, 이와 같은 복구 작업이 끝난 다음 1849년 7월 13일에 성대한 의식과 함께 다시 대중들에게 개방되었다.

1935년에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고 새롭게 터키를 세운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아야 소 피아를 모스크에서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바닥에 깔려있던 카펫도 치웠고, 이로 인해 바닥에 장식되어 있 던 대리석 옴팔리온도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이 때 오스만 제국 시대의 회칠도 다시 벗겨내 옛 모자 이크들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점차 아야 소피아 건물이 다시 약화되기 시작하자, 세계 기념물 기금은 아야 소피아를 관찰 대상으로 선정하고, 철저한 관리를 할 것을 촉구하였다. 1988년에 박 물관의 구리 돔에 균열이 갔고, 이 균열로 빗물이 새 점차 건물에 습기가 차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 위에 물방울이 맺힐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지반 아래에서도 습기가 올라왔는데, 지하수 상승으로 인해 박물관 내부의 습도가 더더욱 올라갔고, 건물의 석재와 페인트칠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세계 기념물 기금은 1997년부터 2002년까지 후원을 통해 돔을 복구하는 것을 도왔다. 터키 문화부의 감독 아래, 돔의 균열을 메운 후 안정시켰으며, 돔 안쪽에 칠해져 있던 내부 장식들을 복원하였다. 이 작업은 2006년에 끝났으나, 아야 소피아는 여전히 보수할 곳이 많아 추가적인 보강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추측된다. 아야 소피아는 2014년 기준 사람들이 터키에서 2번째로 많이 찾는 박물관이며, 매년 33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이 곳을 찾고 있다,

박물관 건물을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으나, 2006년에 터키 정부는 박물관 내의 작은 방을 기도실로 지정하고 아야 소피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종교와 상관없이 이 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을 허가하였다. 또한 2013년부터는 박물관의 미나레트에서 하루에 두 번씩 오후에 무에진
아잔 시간을 알린다. 2007년에 그리스계 미국 정치인 크리스 스피로우가 '자유 아야 소피아 위원회'를 결성하고 아야 소피아를 다시 성당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하였다. 또한 2010년대 초반부터는 뵐렌트 아 른츠와 같은 전임 총리,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아야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바꾸어야 한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2018년 7월 1일에는 85년만에 처음으로 아야 소피아에서 이슬람 의식이 행해졌다. 2017년 5월 13일에 는 '아나톨리아 청년 연합'(AGD)가 주도한 대규모의 군중들이 아야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되돌리기 위 한 대규모 기도회를 올렸다. 2018년 3월 31일에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준 우리의 선조들, 특히 이스탄불의 점령자"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며 꾸란의 첫 절을 낭송하였다. 이로 인해 아야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바꾸기 위한 정치적 움직임이 강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2019년 3월에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모스크를 박물관으로 바꾼 것이 '아주 큰 실수'라고 하며 아야 소피아 를 아예 다시 모스크로 되돌릴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다만 아야 소피아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에, 아야 소피아를 실제로 모스크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유네스코의 허가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야 소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손 꼽히는 동로마 제국의 건축물 중 하나이다. 아야 소피아 내부는 모자이 크대리석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고, 대단히 높은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 아야 소피아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러워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솔로몬, 내가 그대를 이겼다."(Νενίκηκά σε Σολομώ ν)라는 유명한 말로 아야 소피아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 하에 완공 되었을 때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성당이었고, 스페인에 세비야 대성당이 들어서기 전까지 약 1,000 여년 간 이 명예를 갖고 있었다.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고대 후기의 건축 양식과 비잔티움 제국의 건축술이 합쳐져 만들어진 걸작이었 다. 당대에 워낙 아야 소피아 대성당이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수많은 동방 정교회, 로마 가 톨릭, 이슬람 사원들이 이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아야 소피아는 그 거대한 크기만큼 복잡한 구조를 가지 고 있다. 성당의 신랑은 거대한 돔으로 덮여 있는데, 이 돔은 바닥에서 무려 55.6m나 되는 높이에 놓여져 있고, 또한 40개의 아치형 창문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아케이드 위에 올라가 있다. 성당이 지어질 당시에 는 이 돔이 완벽한 원형으로 설계되었으나, 나중에 보수 공사를 거치며 돔은 약간 타원형으로 변형되었 다. 이 때문에 돔의 직경은 최대 31.24m에서 최소 30.86m까지 그 길이를 달리한다.

성당의 서쪽 입구 부분과 동쪽 전례 부분에는 튀어나온 반원형의 공간이 있어 사람들이 성당 안으로 들 어갈 때 거쳐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 이 부분 또한 별도의 반원형 모양의 추가적 돔으로 덮여 있다. 성당 의 내부는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 녹색과 백색, 자주색 반암들과 황금 모자이크들로 덮여 있다. 또한 현 재의 성당의 외관은 붉은색과 노란색의 치장용 벽토로 덮여 있는데, 이는 처음부터 이랬던 것이 아니라 19세기에 복원하며 새롭게 칠해진 것이다.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장구한 세월 동안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반달리즘과 같은 종교적, 사회적 테러 행 위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대성당의 외관에는 이와 같은 피해 흔적들이 남아있어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학자들은 이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에, 혹시라도 성당의 내부 구조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성당의 상부 갤러리에 레이더 등을 이용한 검사를 실시했다. 연구팀은 이 검사를 통해 상부 갤러리의 구 조에 약간의 결함이 생겼음을 발견하였으며, 돔의 곡률이 원래 지어졌을 때보다 약간 어긋나 비례를 이 루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상부 갤러리는 성당의 후진 부분이 있는 동쪽 면을 제외한 성당의 3면을 둘러싼 말굽 형태를 이루고 있 다. 상부 갤러리에는 비잔티움 제국 시대부터 전해져 오는 몇몇 모자이크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부분 은 본디 황후와 그녀의 궁정 인사들이 미사에 참석하거나 회의를 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으며,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모자이크 장식들은 남쪽 면에 있다.

아야 소피아 성당의 돔은 그 혁신적인 건축 방식과 모습으로 인해 수많은 건축가들과 미술가, 설계자들 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돔은 4개의 삼각 궁륭이 받치고 있다. 이 궁륭들은 성당 바닥의 정사각형 모서 리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기둥들로부터 솟아올라 완만한 아치형을 이루며 휘어져 돔의 거대한 하중을 받 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돔의 무게가 측면으로 분산되는 것을 막고, 하중이 아래로 곧바로 내려올 수 있도록 설계할 수 있었다. 이 돔은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펜던트형 돔이었으며, 이와 비슷한 양식을 지닌 다른 돔들과 비해 확연히 낮은 높이의 돔이었다.

돔의 지름은 107피트에 달하지만, 그 두께는 오직 2피트 밖에 되지 않는다. 성당의 주 재료는 벽돌과 모 르타르인데, 돔의 벽돌 골재는 당시 설계자들이 돔을 짓는 것을 더욱 쉽게 하였고, 입방 피트마다 150파 운드 밖에 무게가 나가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무게는 당시의 석조 건축이 지탱할 수 있었던 평균적인 무게 이기도 하였다. 본디 설계도에는 순수 석재를 이용하여 돔을 지으려 했으나, 벽돌 재질이 훨씬 더 오래 버틸 수 있다는 이유로 선택된 것이기도 하였다.돔의 하중을 지탱하는 일은 아야 소피아의 건축가들이 가장 고심한 문제이기도 하다. 성당의 큐폴라는 558년의 지진으로 인해 이미 한 번 완전히 무너진 바 있 는데, 이 돔은 563년에 이시도로스가 다시 복구하였다. 새로 복구된 돔은 40개의 리브를 가지고 있었으 며, 20피트 정도 더 높게 지어져 하중을 더욱 많이 벽 쪽으로 분산하여 버틸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이 돔도 또 붕괴하거나 균열이 가며 문제가 생기는 등 복원, 복구 작업을 거쳐야만 했고, 지금까 지 563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곳은 북쪽과 남쪽 부분 뿐이다. 참고로 563년에 지어진 40개의 리브 가운데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은 남쪽에 6개, 북쪽에 8개 정도만이 남아있다.

사실 원래 이러한 구조와 설계들은 돔과 이를 떠받치는 벽과 아치들을 모두 효율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 는 구조였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였다. 당대의 벽돌공들은 벽돌들을 서로 굳게 하기 위해 모르타르 를 사용하였는데,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지을 때부터 워낙 건축 속도와 완공 시기를 빠르게 하여 짓기 위해 모르타르가 채 굳기도 전에 다음 층의 벽돌들을 끊임없이 올려버린 것이었다. 이로 인해 돔이 만 들어졌을 때는 이미 그 벽이 바깥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건축가 이시도로스가 성당을 복구할 때 가장 먼저 해야했던 일이 벽의 내부를 다시 쌓아 기울어진 벽을 다시 수직으로 만드는 일이었을 정도였 다. 또한 그는 새로운 돔의 높이를 20피트 정도 더 높여 최대한 하중이 옆으로 새지 않고 곧바로 아래쪽 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아야 소피아 대성당의 내부에는 수많은 빛줄기들이 들어와 서로 부 딪히는 효과를 내는데, 이 때문에 마치 내부 공간이 위에 떠있는듯한 효과를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런 효과는 성당 중간중간에 나있는 수많은 창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창문들이 많으면 심미적 효 과도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중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킬 수도 있었다. 현재 아야 소피아 성당에는 총 4개의 미나레트들이 세워져 있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 시기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후에 오스만 제국 통치 시기에 이슬람 사원으로 변모하며 따로 세워진 것이다. 미나레트는 이슬람 사원의 첨탑인데, 공식 적인 행사 개최나 기도 시간을 알리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메흐메드 2세는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바 꾼 직후 사원의 반원형 돔 위에 목재로 된 미나레트를 하나 세웠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이 미나 레트은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미나렛들 중 동남쪽에 있는 미나레트 은 붉은 벽돌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바예지드 2세 때 만들어진 것이다. 나머지 3개는 백색 석회암과 사 암으로 지어졌는데, 이 중 북동쪽 미나레트는 셀림 2세의 재위기간 동안에 바예지드 2세의 명에 의해 완공된 것이며, 서쪽에 있는 2개의 거대한 두 미나레트는 그 높이가 약 60m에 달하는데, 이는 셀림 2세 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이 두 미나레트는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설계한 것 이기도 하다. 이후 수많은 복구, 추가 작업들을 거치며 미나레트들은 15세기, 16세기, 19세기의 건축 양식들을 복합적으로 지니게 되어 뛰어난 예술사적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아야 소피아 성당에는 수많 은 버트레스들이 긴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특히 건물 서쪽 부분에 있는 버트레스들은 원래 십자군 전쟁 시절 십자군 기술자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후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비잔티움 제국 시기에 이미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이때 이미 버트레스의 건축술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오스만 제국 시기에 건물의 붕괴나 균열 등을 막기 위해 추가적인 버트레스들 이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감독 하에 세워졌으며, 현재는 총 24개에 달하는 버트레스들이 만들어져 건 물의 벽이 무너지지 않게 받치고 있다. 성당이 유스티니아누스 때 처음 건립되었을 때, 성당의 내부 장 식은 벽과 바닥의 대리석 판들과 돔 형태의 천장의 모자이크들 같이 간단하고 추상적인 구조로 지어져 있었다. 이 초기의 모자이크들 중 베마의 스팬드럴에 있는 대천사 미카엘가브리엘을 묘사한 모자이 크들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시인인 파울루스 실렌티아리우스(Paulus Silentiarius)가 장시(長詩)를 통해서 당시의 모습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 때 있었던 아야 소피아의 장식 들은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상부 갤러리의 구석 부분에는 여전히 검은색 대리석 바탕 위에 흰색 모자이크로 꽃과 새 무늬를 붙여놓은 부분이 있다. 나중에는 사람이나 성인의 모습들도 모자이크 형식으로 이 벽들에 추가됐던 것으로 보이지만, 726년에 있었던 성상 파괴 운동으로 파괴된 것으로 생 각된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들은 성상 파괴 운동이 끝난 후에 다시 붙여진 모자이크들이다. 모 자이크 외에도, 9세기 후반에 많은 장식들이 추가됐다. 중앙 돔에 그려져 있는 예수의 모습, 팀파눔에 새겨져 있는 예언자들과 동방 정교의 성인들, 성당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의 조각들이 모두 이때 만들 어진 것이다. 바실리우스 2세 때 예술가들이 돔을 받치고 있는 4개의 펜던티브에 6개의 날개를 가진 케 루빔의 모습을 그려넣었다. 후에 성당이 오스만 제국의 통치 하에 모스크로 바뀌고 나서 케루빔의 얼굴 을 금빛 물감으로 가려버렸지만, 현대에 들어 복원 작업을 진행하여 2009년에 4개의 케루빔들 중 1개 가 온전히 복원되어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아야 소피아의 가장 유명한 부분은 '옴팔로스'라고도 불리는 옴팔리온이다. 옴팔리온은 중앙 돔 바로 아 래 본당의 남동쪽에 위치해있다. 각면의 크기는 5.65m이다. 거대한 정사각형의 모습을 띠고 있는데, 이 정사각형 속에 가운데에 큰 원 하나가 들어가 있고, 그 주변을 30여개의 대리석 원형 타일들이 감싸고 있 다. 옴팔리온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다채로운 대리석의 색깔이다. 당시 비잔틴인들은 대리석이 흙이 물 속으로 가라앉아 얼어서 생긴다고 생각했는데, 이 옴팔리온이 워낙 독특한 모습을 띠고 있기에 비잔틴인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러한 디자인을 만들었는지는 아직까지 논란이 있다. 하지만 주류적으로 는 이 원들이 태양계를 상징하며,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원은 황제의 절대적인 권력과 명예를 상징한다 는 설이 우세하다.

역사적으로 이 곳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들이 즉위식 때 앉아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이 주장은 13세기 초에 적힌 기록에서 기인하는데, 이 기록에는 "아야 소피아에는 거대한 붉은 대리석이 있는데, 이 위에 황금 옥좌가 있어 비잔틴의 황제들이 이 위에서 대관식을 치루었다."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야 소피아가 지난 세월동안 워낙 많이 바뀌어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거쳐갔기에 이 주장의 신빙성 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로지아란 벽이 아치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어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구조의 복도, 혹은 갤러리를 말한 다. 황후의 로지아는 상부 갤러리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데, 바로 이 곳에서 황후가 궁정의 여인들과 함께 1층에서 열리는 공식 행사를 내려보았다. 바닥에 있는 녹색 돌은 한때 황후가 앉았던 황좌가 놓여있던 곳이다.

아야 소피아에는 2개의 거대한 대리석 항아리가 놓여 있다. 이 항아리는 술탄 무라드 3세페르가몬 지 역에서 가져온 것인데, 헬레니즘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무려 1250L에 달하는 물을 담을 수 있으 며, 거대한 대리석 바위 하나를 깎아 만들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예배 중 사람들에게 음료를 나누어 주거나 몸을 닦을 수 있게 물을 저장해 놓는 용도로 주로 쓰였다.

대리석 문은 상부 갤러리의 남쪽 부분에 위치해 있다. 주로 종교 회의인 시노드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이 용하였는데, 회의 참석자들은 이 문을 통해서 회의장을 들락날락하였다. 구전에 따르면 이 문의 한쪽 면 은 천국을 의미하고, 반대쪽 면은 지옥을 의미한다고 한다. 문 양쪽은 과일과 물고기들이 그려져 있는 대 리석 판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 문을 통과하면 중요한 회의가 열리거나 토론을 하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현관 문(Nice Door)은 그 역사가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야 소피아 내부에서도 가장 오래된 구조물들 중 하나이다. 이 문에는 기하학적인 문양들과 식물 무늬들이 함께 새겨져 있는데, 타르 수스에 있던 이교 신전에서 떼온 것으로 생각된다. 838년 테오필로스 황제가 나르텍스 안쪽에 가져와서 세워 놓았다.

황제의 문은 아야 소피아에서 가장 거대한 문이다. 오직 황제와 그의 경호원들만이 이 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었다. 6세기 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7m 가량의 길이를 가지고 있다. 비잔티움 제국의 기 록에 의하면, 이 문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에 쓰였던 목재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성당의 북서쪽에는 중간에 구멍이 뚫린 청동으로 감싸진 기둥이 하나 서있다. 이 기둥은 '소원의 기둥', ' 땀흘리는 기둥', '눈물흘리는 기둥' 등과 같이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 기둥은 만졌을 때 축축하다고 하며,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져 왔다. 전설에 의하면 1200년에 성 그레고리가 이 주변에서 기적을 일으켰고, 그 때부터 이 기둥이 축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 기둥의 습기를 만지면 많은 질병들을 치유할 수 있다고 한다.

아야 소피아의 초기 모자이크는 유스티누스 2세 치세에 처음 완성됐다.[5] 당시에는 비 상징적인 모자이 크들, 즉 인간의 모습을 띄지 않은 모습의 모자이크들이 이때 주로 그려졌다. 다만 우리가 지금 볼 수 있 는 대부분의 모자이크는 비잔틴 성상파괴운동이 끝난 10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그려졌다.[6]
1204년에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대대적으로 약탈했을 때, 라틴인 원정대들은 콘스탄티노 플에서 엄청난 양의 보물들을 약탈해 갔다. 이 보물들 중에는 아야 소피아를 장식하고 있던 황금 모자이 크들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이 보물들은 대부분 당시 엔리코 단돌로가 통치하고 있던 베네치아로 옮겨졌다.

1453년에 오스만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에 따라, 아야 소피아도 성당에서 모스크로 그 용도가 바뀌었다. 이 때 이슬람의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교리에 따라, 아야 소피아에 있던 수많은 모자이크들이 회칠로 덮여버렸다. 이 작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졌다. 17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스탄불 을 여행하던 사람들은 예전에 아야 소피아가 성당이었던 시절의 그림이나 모자이크들을 회칠에 덮이지 않은 채 여전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1847년과 1849년에 아야 소피아는 건축가였던 포사티 형제들에 의 한 대대적인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술탄이었던 압뒬메지트 1세는 그 형제들이 복구 공사 도중 발견 하는 모든 모자이크들을 기록, 문서화하여 보관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현재 이 자료들은 스위스의 도서 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만 건물 복구 작업에 모자이크까지 다시 복원하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형 제들이 발견한 모자이크들을 기록한 후에는 다시 회칠을 해서 덮어버려야만 했다. 이 때 포사티 형제들 이 동쪽 펜던티브들에 그려져 있던 천사들의 모자이크들을 다시 어느 정도 복구해냈지만, 그들의 모습을 기록한 후에는 천사의 얼굴을 다시 회칠로 덮어버렸다. 한편 서쪽 펜던티브에 있던 천사 그림들은 현대 의 복구 작업 때 완전히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기에, 포사티 형제들의 기록을 토대로 다시 복원해낸 것이다. 현대 복원가들은 비슷한 모자이크 패턴들, 고대와 중세의 기록들, 모자이크의 흔적 등 을 토대로 추정하여 아야 소피아의 모자이크를 복원해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과정에서 포사티 형제들이 남긴 기록들과 노트가 큰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보석이 박혀있는 십자가의 모자이크, 천사, 성인, 주교들의 모습을 재현한 모자이크들이 대표적인 복원의 예시이다.

중앙 돔 천장에 그려져 있는 예수의 모자이크 또한 포사티 형제들이 다시 발견해 낸 것이다. 이 모자이크 는 이슬람 통치 시기 당시 회칠로 지워진 다음, 신을 우주를 밝히는 빛이라는 내용의 아랍어 캘리그라피 로 대신 채워졌다.
1930년대에 들어 대대적으로 아야 소피아의 모자이크들이 복원되기 시작하였다. 복원 연구팀은 그들이 찾아낸 거의 대부분의 모자이크들을 발굴해냈으나, 몇몇 단순한 형태의 십자가 모양의 모자이크들은 회 칠에 덮인 채 내버려 두었다.

2000년대에, 아테네 국립 기술 대학의 연구팀은 적외선을 사용한 비파괴 기술을 사용하여 아야 소피아 내부의 벽들을 스캔하여 회칠로 덮여있는 모자이크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실시하였다. 대학 연구팀은 회 칠이나 벽면에 수분이 어느 정도 스며들었는지를 통해 모자이크의 훼손 정도를 판단하는 등 복합적인 방 법들을 사용하여 모자이크들의 현재 상태와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었다.

아야 소피아는 성당으로서의 역사와 모스크로서의 역사를 둘다 지니고 있기에, 복원 작업을 할 때 사람 들의 여론이 종교적인 문제로 충돌하기도 한다. 회칠을 벗겨내고 기독교의 모자이크들을 복원하려면 회 칠 위에 그려져 있던 이슬람 미술품들을 부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복원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이해 관계를 최대한으로 조정하려 노력하고 있다. 특히 아야 소피아 의 중앙 돔 천장에 있는 거대 예수 모자이크를 복원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가장 거센데, 이 위치가 성 당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장소라 상징성이 있을 뿐더러, 이슬람계 내에서 이 곳에 신의 영광을 찬양 하는 내용의 이슬람 캘리그라피가 이미 쓰여 있기에 이 것을 함부로 파괴할 수 없다는 주장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아야 소피아는 최근 들어 구조물 약화 문제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건물 속의 염분 결정화가 가장 큰 문제인데, 이는 건물의 외벽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 그 틈 사이로 빗물이 새어들어 와 생기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도하게 내려치는 빗물을 다른 곳으로 우회시키는 것이 최선이다.

황제의 문 모자이크는 황제의 문 바로 위의 팀파눔에 자리하고 있다. 이 문은 오직 황제가 건물 내부로 출입할 때만 사용되던 문이었는데, 미술 양식을 토대로 시기를 조사한 결과, 9세기 후반이나 10세기 초 반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보석이 박힌 보좌에 앉아있는 예수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있는 사람은 레온 6세콘스탄티노스 7세로 추정된다. 예수는 모자이크 속에서 한 손에는 책을 든 채로 황제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 책에 적힌 문구는 요한 복음서 20장 19절 '평화가 너희와 함께'와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 이다'라는 구절이다. 또한 예수 양 옆으로는 두 개의 원이 그려져 있는데, 왼쪽 원 안에는 가브리엘 천사, 오른쪽 원 안에는 성모 마리아가 그려져 있다.

남서쪽 입구 모자이크 또한 남서쪽 입구 바로 위의 팀파눔에 위치해 있다. 바실리우스 2세의 재위 기간 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849년에 포사티 형제들이 건물 보존 작업을 진행하며 다시 발굴한 모자 이크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있고, 그녀의 발은 보석이 박힌 발 판 위에 올려져 있다. 아기 예수가 그녀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으며, 왼쪽 손으로는 두루마리를 든 채 축 복을 내리고 있다. 성모의 왼쪽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을 상징하는 도시의 모형을 바치 고 있다. 그 옆에 쓰인 문구는 '위대한 성 콘스탄티누스 대제'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성모의 오른쪽에는 유 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서있는데, 하기아 소피아를 상징하는 모형을 성모에게 바치고 있다. 성모의 좌우 에 있는 MP와 ΘY라고 쓰여 있는 모노그램은 각각 Mtr와 Theou를 의미하는데, 한국어로 풀이하면 ' 신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후진 모자이크는 성상 파괴 운동이 끝난 후 다시 인물의 모습을 표현하기 시작한 단계의 모자이크로 여 겨진다. 867년 3월 29일에 미하일 3세와 바실리우스 1세에 의해 공사가 처음으로 명령되었다. 후진의 반형 돔 상부에 위치해 있는데, 성모 마리아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가 앉아있는 의자와 받침대는 모두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모자이크는 황금색 타 일을 배경으로 박혀 있는데, 6세기의 성상 파괴 운동으로 인해 파괴되었던 것을 9세기 들어 다시 복원한 것으로 생각된다.

알렉산더 황제 모자이크는 아야 소피아 2층의 후미진 천장 구석에 위치해 있기에, 아야 소피아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찾기가 쉽지 않다. 알렉산더 황제가 정식 예복을 갖춘 채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왼손에는 보주를 든 모습을 그리고 있다. 포사티 형제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 모자이크는 1849년까지 잘 보존된 채로 있었고, 1894년의 대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모자이크는 1958년에 아야 소 피아를 다시 복원하며 발견되었다. 아야 소피아의 다른 모자이크들과는 다르게 이 모자이크는 회칠되 지 않은 채로 그냥 그 위에 물감만 칠해 가려져 있었고, 그 주위의 모자이크들도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남 아 있었다. 이후 복원 사업을 걸쳐 완전한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조이 여제의 모자이크는 상부 갤러리 남부의 동쪽 벽에 위치해 있다. 1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 다. 모자이크 중앙에는 검푸른 옷을 입은 예수가 황금빛 배경을 바탕으로 오른손으로는 축복을 내리며, 왼손으로는 성경을 들고 앉아있다. 그의 머리 양쪽 옆에 쓰인 문구는 IC와 XC인데, 이는 Ιησούς Χριστός의 모노그램이다. 그의 양 옆에는 정식 예복을 갖춰 입은 조이 여제와 콘스탄티노스 9세 가 서있다.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지갑을 예수에게 바치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황실의 교회에 대한 기부를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조이 여제도 두루마리를 쥐고 있는데, 이 또한 황실의 기부를 상징하는 것이다.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머리 위에 쓰여 있는 문구는 '콘스탄티노스,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은 경건 한 황제, 로마인들의 왕, 모노마호스''라는 뜻이다. 조이 여제 위에 쓰인 문구는 '조이, 매우 경건한 황비' 라는 뜻이다. 조이 여제는 결혼을 세 번 했기 때문에, 남편이 바뀔 때마다 모자이크에 새겨진 남편의 얼 굴도 바뀌었다. 첫 번째로는 로마노스 3세, 두 번째는 미하일 4세, 그리고 마지막으로 콘스탄티노스 9세 의 순서로 차례대로 얼굴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다만 몇몇 학자는 이 얼굴들이 전대 황제와 황후의 얼굴 을 긁어내고 자신들의 얼굴을 갖다 붙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콤네누스 모자이크도 상부 갤러리 남부의 동쪽 벽에 자리한다. 1122년에 만들어졌다. 성모 마리아가 검 푸른 베일을 쓴 채로 전통적인 비잔틴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그녀는 아기 예수를 무릎 위에 안고 있는 데, 아기 예수는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며 왼손으로 두루마리를 쥐고 있다. 그녀의 오른쪽에는 요안니 스 2세 콤네누스가 있는데, 그는 황실의 교회에 대한 기부의 상징인 지갑을 쥐고 있다. 성모 왼쪽에는 이 리니 황후가 서있는데, 종이를 들고 있는 채로 상징적인 예복을 입고 있다. 인접한 공간에는 당시 황태 자였던 알렉시오스 콤네누스가 그려져 있는데, 수염이 없는 젊은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기에 그가 17 살에 황태자로 즉위하였을 때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 모자이크는 조이 여제의 모자이 크와도 상당히 비교가 자주 되는 편이다. 콤네누스 모자이크가 약 1세기 정도 후에 만들어진 것인데, 이 리니 황후의 모습에는 곱슬머리, 붉은 뺨, 회색 눈과 같은 헝가리인의 전형적인 모습이 그대로 표현이 되어있는 등 훨씬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황제는 훨씬 더 근엄한 얼굴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데이시스 모자이크는 1261년에 만들어졌다. '데이시스'란 애원, 혹은 간청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모 자이크는 57년간의 로마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다시 동방 정교 신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기념하여 만 들어졌다. 상부 갤러리에 있는 황실 모자이크들 중 세 번째 순서로 관람할 수 있다. 이 모자이크는 아야 소피아의 수많은 모자이크들 중 최고의 걸작으로 일컬어지는데, 모자이크 속 인물들의 인간적인 표정과 부드러운 색조가 타 모자이크들에 비해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초반의 이탈리아 미술과도 그 궤를 비슷하게 한다. 이 모자이크에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이 심판 의 날에 세상을 심판하러 내려온 예수에게 사람들의 죄를 가볍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 다. 모자이크의 하부는 심하게 파괴되어 있어 그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다.

북쪽 팀파눔 모자이크에는 수많은 성인들이 새겨져 있다. 이 모자이크는 워낙 높고 닿기 힘든 자리에 위 치해 있기 때문에 심각한 손상을 피할 수 있었다. 왼쪽에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가, 오른쪽에는 성 이그나티오스가 십자가가 새겨진 백색 법의를 입고 보석으로 장식된 성경을 든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성인들의 이름은 그 주변에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어 순례자들이 그들의 이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 다. 이 모자이크도 일부가 파괴되어 있기는 한데, 이는 오스만 제국에 의한 고의적인 파괴가 아니라 잦 은 지진으로 인한 훼손으로 밝혀졌다.

천사 모자이크는 4명의 각각 다른 천사들의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다. 천사들은 신의 보좌 옆에서 신을 호위하는 6개의 날개를 가진 세라핌, 즉 치천사로 추정된다. 동쪽에 있는 천사들의 모습은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것이나, 서쪽에 있는 천사 그림 2개는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파괴되어 현재는 프레스코화로 재현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천사들의 얼굴이 별이 새겨진 금속 뚜껑으로 덮여 있었으나, 2009 년에 복구 작업을 위해 이 뚜껑들을 걷어내고 천사의 얼굴들을 드러내 대중에 공개했다.

 

033. 블랙홀 - 사건의 지평선

블랙홀(black hole)은 항성이 진화의 최종단계에서 폭발후 수축되어 생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강력한 밀 도중력으로 입자나 전자기 복사, 을 포함한 그 무엇도 빠져나올 수 없는 시공간 영역이다. 일반 상대 성이론은 충분히 밀집된 질량이 시공을 뒤틀어 블랙홀을 형성할 수 있음을 예측한다. 블랙홀로부터의 탈 출이 불가능해지는 경계를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고 한다. 어떤 물체가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 갈 경우, 그 물체에게는 파멸적 영향이 가해지겠지만, 바깥 관찰자에게는 속도가 점점 느려져 그 경계에 영원히 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블랙홀은 빛을 반사하지 않기에 이상적 흑체처럼 행동한다. 또한 휘어 진 시공간의 양자장론에 따르면 사건의 지평선은 블랙홀의 질량에 반비례하는 온도를 가진 흑체 같은 스 펙트럼의 열복사를 방출하며, 이를 호킹 복사라고 한다. 항성질량 블랙홀의 경우 이 온도가 수십억분의 1 켈빈 수준이기에 그 열복사를 관측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중력장이 너무 강해서 빛이 탈출할 수 없는 천체의 개념은 18세기에 존 미첼피에르시몽 드 라플라스 후작이 처음 생각해냈으며, 블랙홀로 특징지어지는 일반상대론의 최초의 근대적 해는 1916년 카를 슈바 르츠실트가 발견했다. 다만 아무것도 탈출할 수 없는 공간상의 영역이라는 해석은 1958년 데이비드 핀켈 스타인의 논문에서 처음 등장했다. 블랙홀은 오랫동안 수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60년대에는 블랙 홀이 일반상대론에서 유도됨을 증명하는 이론적 연구들이 행해졌다. 중성자별의 발견은 중력붕괴한 밀집 성이 천체물리학적 실체로서 존재할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항성질량 블랙홀은 매우 질량이 큰 항성들이 수명이 다했을 때 붕괴하여 만들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블

랙홀은 형성된 뒤에도 주위의 질량을 흡수하여 성장할 수 있다. 다른 항성을 흡수하거나 블랙홀들끼리 융

합하면서 수백만 M에 달하는 초대질량 블랙홀이 형성될 수 있으며, 대부분의 은하의 중심에는 초대질 량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것이 과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블랙홀의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블랙홀이 다른
물질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통해 그 성질을 알아낼 수 있다. 블랙홀 위로 낙하한 물질은 강착원반을 형성하고, 원반은 마찰열로 인해 뜨거워져 열복사로 빛 난다. 우주에서 가장 밝은 천체인 퀘이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블랙홀 주위를 공전하는 다 른 항성이 있을 경우, 그 궤도를 통해 블랙홀의 질량과 위치를 비정할 수 있다. 이러한 관측을 통해 중성 자별을 비롯한 다른 유사 천체들을 제외함으로써 천문학자들은 블랙홀 후보들이 포함된 쌍성계를 셀 수 없이 많이 발견해냈고, 우리은하 중심 방향에 존재하는 전파원 궁수자리 A*가 4백 3십만 M의 초대질 량 블랙홀임을 밝혔다.

2016년 2월 11일, LIGO 합동연구진은 두 개의 블랙홀이 서로 융합하면서 발생한 중력파를 감지함으로 써 역사상 최초의 중력파 관측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최초의 중력파 관측이며 동시에 최초로 블랙 홀 쌍성계 융합이 관측된 사례이기도 하다.
2019년 4월 10일, 대한민국에서도
정태현 등 10명의 연구진의 참여한 EHT(사건지평선망원 경,EHT·Event Horizon Telescope)연구팀은 처녀자리 A 은하에서 인류 최초로 찍은 블랙홀의 사진을 공 개했다. 전파망원경의 파장을 작게 만들거나 망원경을 크게 만들어 해상도를 높여 촬영할 수 있었다 1.3mm 수준의 작은 전파를 사용해 지구 전역에 흩어진 8대의 전파망원경들을 동시에 써 사실상 지구 크 기의 전파망원경을 쓴 것과 같은 효과를 냈다. 연구 결과 사진의 블랙홀은 블랙홀 뒤에서 온 빛이나 주변 에서 발생한 빛이 블랙홀의 중력에 의해 휘감겨 형성된 고리 모양의 구조 안쪽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공간은 내부의 빛이 빠져나오지 못해 형성되어 '블랙홀의 그림자'라고 불린다.
질량이 너무 커서 빛조차 탈출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개념은
존 미첼이 1783년 왕립학회헨리 캐번디 시에게 쓴 서한에서 처음 발견된다.
만약 태양과 같은 밀도를 가진 어떤 구체의 반지름이 태양의 500분의 1로 줄어든다면, 무한한 높이에서 그 구체로 낙하하는 물체는 표면에서 빛의 속도보다 빠른 속도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빛이 다른 물 체들과 마찬가지로 관성량에 비례하는 인력을 받게 된다면, 그러한 구체에서 방출되는 모든 빛은 구체의 자체 중력으로 인해 구체로 되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1796년, 수학자 피에르시몽 드 라플라스 후작이 저서 《우주체계 해설》 제1판과 제2판에서 같은 개념 을 이야기했다(제3판 이후로는 관련 내용이 삭제되었다). 이러한 “암흑성” 개념은 19세기 이전까지 거 의 무시되었는데, 질량이 없는 파동인 빛이 중력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 다.

191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일반상대론을 고안하여 중력이 빛의 운동에 영향을 미침을 보였다. 불 과 몇 개월 뒤, 카를 슈바르츠실트점질량과 구질량의 중력장을 기술하는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해를 구하였다(슈바르츠실트 계량). 슈바르츠실트로부터 또 몇 개월 뒤, 헨드릭 로런츠의 지도학생인 요하네 스 드로스터가 슈바르츠실트와 독립적으로 점질량에 대한 동일한 해를 구하였고, 그 성질을 보다 광범 하게 기술하였다. 이 해는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일부 항이 무한대가 되는 특이점을 가지는 특이행동을 보이는데, 이것을 오늘날 슈바르츠실트 반경이라고 부른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표면의 성질은 확실하 게 이해되지 않았다. 1924년, 아서 스탠리 에딩턴이 좌표계의 수정을 통해(에딩턴-핀켈스타인 좌표계) 특이점을 없앨 수 있음을 보였으나, 이것이 슈바르츠실트 반경의 특이점이 비물리적 좌표 특이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1933년에야 조르주 르메트르가 밝혀내었다. 한편 아서 에딩턴은 1926년 저서에 서 어떤 별이 슈바르츠실트 반경 이하의 크기로 짜부라들 가능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아인 슈타인의 이론은 베텔게우스 같은 거대한 별들이 무지막지한 밀도를 가지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 유인즉 “반경 2억 5천만 킬로미터의 항성은 태양만큼 높은 밀도를 가질 수 없다. 우선 중력이 너무 커져 서 빛이 그 별에서 탈출할 수 없을 것이며, 마치 지구로 되떨어지는 돌처럼 빛살이 별로 되떨어지게 될 것이다. 둘째로 스펙트럼선의 적색편이가 너무 커서 스펙트럼이 소멸할 지경으로 편이할 것이다. 셋째 로 질량이 너무 큰 만큼 시공간에 대한 왜곡도 크게 발생하여 공간이 별을 아물어 숨겨 버릴 것이다." 1931년,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는 특수상대론을 이용하여 전자축퇴물질로 이루어진 회전하지 않 는 천체는 특정 임계 질량(찬드라세카르 한계. 1.4 M)을 넘어서면 안정적인 해가 존재할 수 없음을 보 였다. 그러나 에딩턴, 란다우를 비롯한 당대의 학자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과정이 붕괴를 막을 수 있 다는 이유로 찬드라세카르의 주장을 반대했다. 이들 기성 학자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옳았다. 찬드 라세카르 한계를 넘어서는 백색왜성(전자축퇴압으로 형태를 유지)은 붕괴를 일으켜 중성자별(중성자축 퇴압으로 형태를 유지)이 되며, 파울리 배타 원리에 의해 안정해진다. 그러나 1939년, 로버트 오펜하이 머 등은 질량 3 M(톨먼–오펜하이머–볼코프 한계)를 넘어서는 중성자별은 찬드라세카르 한계와 같 은 이유로 붕괴하게 됨을 보였으며, 어떤 물리 법칙으로도 일부 별이 블랙홀의 지경까지 붕괴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 결론 내린다.

오펜하이머와 그의 공저자들은 슈바르츠실트 반경 경계에서 발생하는 특이점을 시간이 멈추는 거품의 경계라고 해석했다. 이것은 블랙홀 외부의 관찰자들이 보기에는 타당한 해석이지만(블랙홀 밖에서 보 기에는 블랙홀 안으로 떨어지는 물체가 점점 느려지는 것처럼 보인다) 블랙홀 안으로 떨어지고 있는 관 찰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 성질 때문에 중성자별이 재차 붕괴한 밀집성을 "결빙성(frozen stars)" 이라고 불렀는데, 외부 관찰자가 보기에 별의 표면이 별이 슈바르츠실트 반경 이하로 붕괴하는 순간 이 후 변화 없이 "얼어붙어" 버린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58년, 데이비드 핀켈스타인은 슈바르츠실트 표면을 “인과 관계가 오직 한 방향으로만 가로지를 수 있 는 완벽한 단향성 막”이라고 사건의 지평선을 규정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오펜하이머의 결과와 엄밀하 게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블랙홀 안으로 낙하하는 관찰자의 관점까지 이론이 포함하게 만들었다. 핀켈스타인의 해(에딩턴–핀켈스타인 좌표계)는 슈바르츠실트의 해를 확장하여 블랙홀 안으로 낙하하 는 관찰자의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도록 했다. 마틴 크러스컬이 그에 관한 완전한 확장해를 구했다(크러 스컬–세케레시 좌표계).

이러한 연구결과는 일반상대론과 블랙홀이 과학계의 주류 연구대상으로 부상하게 되는 소위 일반상대 론의 황금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1967년 맥동전파원(펄사)이 발견되고, 2년 뒤인 1969년 그 정체가 빠 르게 회전하는 중성자별임이 밝혀진 것은 이러한 조류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펄사가 발견되기 전까지 만 해도 중성자별은 블랙홀과 마찬가지로 가설상의 천체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펄사가 발견됨으로써 중 력붕괴로 만들어지는 다른 밀집천체들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한 관심도 크게 높아졌다.

일반상대론의 황금시대에는 블랙홀의 해들이 더욱 많이 발견되었다. 1963년, 로이 커회전하는 블랙 홀의 해를 구했다(커 계량). 2년 뒤에는 에즈라 뉴먼이 회전하는 동시에 또한 전하를 지닌 블랙홀의 선 대칭해를 구했다. 이후 베르너 이스라엘, 브랜든 카터, 데이비드 로빈슨의 연구를 통해 무모 정리가 정립 되었다. 무모 정리란 블랙홀의 해는 커–뉴먼 계량의 세 가지 변수, 즉 질량·각운동량·전하에 의해서만 결정되고 그 이외의 “털은 블랙홀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블랙홀의 괴이한 특징들은 대칭성을 가정한 결과 발생하는 비정상적 요소이며, 일반적 상황에 서는 특이점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되었다. 이러한 관점을 옹호한 학자로는 블라디미르 벨린스 키, 아이작 칼라트니코프, 에브게니 리프쉬츠가 있다. 이들은 일반해에서 특이점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 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로저 펜로즈스티븐 호킹이 특이점이 일반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밝혀냈다.

제임스 바딘, 야코프 베켄슈타인, 브랜든 카터, 스티븐 호킹은 1970년대 초에 진행한 연구를 통해 블랙 홀 열역학이란 학문을 정립하였다. 블랙홀 열역학에서는 블랙홀의 성질이 그 질량을 에너지로, 크기를 엔 트로피로, 표면중력온도로 치환시키면 열역학 법칙과 매우 유사해짐을 보였다. 1974년 호킹이 양자 장론에 따르면 블랙홀은 그 표면중력에 비례하는 온도의 흑체와 같은 복사를 내보낸다는 것을 예측함으 로써 블랙홀의 열역학적 설명은 완성되었다.

기자 앤 어윙(Ann Ewing)이 미국과학진흥협회 회의를 참관한 1964년 1월 18일자 기사 제목을 〈우주 의 ‘검은 구멍’들〉("‘Black Holes’ in Space")이라고 붙인 것이 ‘블랙홀’이라는 용어가 지면상에 사용된 최초의 사례이다. 이후 1967년에 존 아치볼드 휠러가 강의에서 ‘블랙홀’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일부에서 는 휠러가 이 말을 고안했다고 보기도 한다. 휠러가 블랙홀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후 블랙홀이라는 용어 는 빠르게 확산되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털없음 정리에 따르면, 블랙홀은 형성된 이후 안정된 상태에 도달하면 오로지 세 개의 독립적인 물리량, 즉 질량·전하·각운동량 만을 갖게 된다. 이 물리량 또는 변수들이 동일한 두 개의 블랙홀은 고전역학 (i.e. 비양자역학)을 통해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성질은 블랙홀 바깥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예컨대 대전된 블랙홀은 다른 대전된 물체처럼 척력을 발생시킨다. 질량의 경우, 블랙홀을 포함하고 있는 구 안의 질량은 가우스 법칙의 중력 적 상사형인 ADM 질량을 통해 블랙홀에서 멀리 떨어져서도 알아낼 수 있다. 또한 각운동량은 중력 자 성에 의한 틀 끌림을 통해 블랙홀에서 멀리 떨어져서 알아낼 수 있다.

어느 물체가 블랙홀을 향해 낙하하면, 그 물체의 모양이나 그 물체에 분포하고 있는 전하에 대한 정보가 블랙홀의 지평선을 따라 균등하게 분산되면서 블랙홀 바깥의 관찰자에게는 그 정보가 소실된다. 이 상 황에서 지평선의 양태는 마치 마찰과 전기저항이 있는, 신축성과 전도성을 가진 막과 매우 유사한 산일 구조가 된다(막 패러다임). 이는 시간 가역성을 갖기에 미시적 수준에서 마찰이나 저항을 가지지 않는 전자기장 따위의 다른 장 이론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블랙홀은 오직 세 개의 변수에 의해 안정적 상태에 도달하기 때문에, 블랙홀 안에서 최초 상태에 관한 정보를 소실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블랙홀 의 중력장과 전기장은 그 안으로 들어간 것에 대한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이렇게 소실되는 정보 에는 블랙홀 지평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측정할 수 없는 모든 물리량이 포함된다. 중입자수경 입자수 같은 보존된 양자수도 그 예시이다. 이 곤혹스러운 성질을 일컬어 블랙홀 정보역설이라고 부른 다.

033. 악기와 앙상블

악기 :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건반 악기, 전자 악기

 

034. 플라톤의 동굴 우화

동굴의 비유(영어: Allegory of the Cave 또는 Plato's Cave)는 이데아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대 그리 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생각한 비유이다. '국가' 제7권에서 상술된다.

동굴에 사는 속박된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실체'의 '그림자'이지만, 그것을 실체라고 믿어 버리고 있 다. '실체'를 옮겨 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동굴의 안쪽에 반향하고, 이 믿음은 확신으로 바뀐다. 똑같이, 우리가 현실에 보고 있는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다고 플라톤은 생각한다.

즉, 세상 만물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고 동굴 밖에 실체가 존재하며 인간은 그 실체를 보아 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국가론> 제7권은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데아론을 비유로 풀어 설명한 동굴 의 우화를 담고 있다. 동굴 안에 사람들이 갇혀 있다. 그들은 손발이 묶여 꼼짝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목도 고정되어 있어 앞의 벽면만 바라볼 수 있다. 그들 뒤에는 거대한 횃불이 있다. 그들과 횃불 사이에 어떤 물체가 있다면 사람들은 벽면에 비친 그림자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 그림자를 보며 그 것이 실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이 본 것은 실재의 허망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참된 철학 자라면 그림자가 아니라 실재, 즉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모든 것은 감각기관을 통해 알게 되는 무상한 물질세계일 뿐이 다. 단지 이데아에 대해 알 수 있어야지만 우리는 참된 지식을 갖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둥근 물 체를 보면서 그것이 둥글다고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원에 대한 이데아(관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것이 플라톤의 철학을 관념론이라 통칭하는 이유이다.

 

035. 사라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로서 유대인들의 시조. 이스라엘 열 부족(12지파)의 직계 조상이 되는 이삭을 낳았다.

오랜 불임으로 여종인 하갈을 남편인 아브라함에 보내어 첫째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으나, 시기와 질투 로 추방한다.

 

036. 로제타석

로제타석(영어: Rosetta Stone) 또는 로제타 돌은 기원전 196년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된 같은 내용의 글이 이집트 상형문자, 이집트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 등 세 가지 문자로 번역되어 쓰여 있는 화강암이 다. 이 돌이 있어서 장프랑수아 샹폴리옹토머스 영은 잘 알려진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상형문자를 해독 할 수 있었다.

대영박물관에서 로제타석을 비롯한 유물들을 3D 모델링했으며, 이곳에 가면 로제타석 3D 모델을 볼 수 있다.

로제타석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 때에 만들어진 검은색 비석이다. 1799년 7월 15일 베헤이 라 주 로제타에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 장교인 피에르 부샤르가 발견하였다.

이 돌은 가장 높은 곳까지의 높이가 114.4 cm (45.04 인치) 이며, 너비는 72.3 cm (28.5 인치), 두께는 27.3 cm (10.9 인치) 이다. 무게는 대략 760 kg (1,676 파운드)으로, 원래는 화강암 혹은 현무암일 것으 로 추측되었으나, 현재는 화강섬록암으로 여겨진다. 핑크빛이 도는 어두운 회색이다.

1802년부터 영국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같은 내용을 전하기 위하여 세 가지 언어로 적었다.

  • 사제들을 위하여 이집트 신성문자로 적었고 첫 14줄이다.
  • 신하들을 위하여 이집트 민중문자로 적었고 두 번째 32줄이다.
  • 이집트에 사는 그리스어 문화권의 사람들을 위해 고대 그리스어 대문자로 적었고, 마지막의 51줄이다.

새로운 왕이시며 왕관의 주인이신, 영광이 크시고 이집트를 평탄케 하시며 신들에 대해 경건하며 적들보

다 우월하며 인간의 삶을 올곧게 하시고, 헤페스투스 대왕처럼 30년을 다스리시고, 태양과 같은 왕이시

며, 윗 세상과 아랫 세상의 위대한 왕이며, 헤패스투스가 인정하신 부모를 공경하는 신들의 자녀이며, 태

양이 승리를 허락하시고, 제우스의 현신이며, 태양의 아들이신, 프타에게 사랑받는 영생하실 프톨레마이

오스께서 통치하실 적에. 9년째 되는 해, 즉 아에투스의 아들이자, 알렉산더의 사제이며 구원자 신들과 형제 신들과 이롭게 하는

신들과 부모를 공경하는 신들과 드러내고 영광스러운 신의 사제인 아에투스. 그리고 베르니케 에우어게

티스의 아틀로포루스(athlophorus)인 필리니우스의 딸 피라. 그리고 디오게네스의 딸이며, 아리스노에

필라델푸스의 처녀사제(kanephoros)인 아레이아. 그리고 프톨레마이우스의 딸이며 아리스노에 필로파

토르의 사제인 이레네. 크사니쿠스월 넷째 날이며 이집트력으로는 메케이르월 열여덟 번째 날에.

선언문. 대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신전 안으로 들어가 신들을 찬양하고 매의 반지를 끼고 거룩한 문자를

기록하는 자들 및, 이 나라의 곳곳의 사원에서 왕위를 물려받는 제전을 위해 멤피스로 와서 왕 앞에 모이

는 사제들과, 영원하시고도 프타에게 사랑받으며 신을 드러내고 영광스러운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토를 그

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사제들은 오늘 선언하였다. 영생하시고, 영광스러운 프타에게 사랑받으시는

왕 프롤레마이오스 왕께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과 아리스노에 왕께서 성전과 그곳에서 사는 자들과 그가

다스리시는 자들을 위하여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이시스와 오시리우스 사이에 태어나 나중에 그 아버

지인 오시루스를 도왔던 호루스처럼, 처음부터 신과 여신에게서 태어난 신처럼. 자애롭게 신들에게 바치

는데 은과 곡식과 같은 수입을 신전에 집중시켜 주셨으므로, 이러한 관대함이 이집트를 부유하게 할것이

며 신전을 확고히 하게 될 것이다. 신들은 그에게 건강과 승리와 힘과 다른 모든 것으로, 그에게 영원히

다스릴 권세와 그를 이을 자녀들에게 영원히 보답하셨다... (뒤는 줄임)

나머지는 구체적인 선언문이 구구절절 이어진다. 사제들과 신전에 대한 여러가지 혜택에 대한 감사의 내 용이 이어지며 여기에서 소개된 분량은 1/5정도이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사제 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을 찬양한다는 내용이다.

037. 어둠의 심연

러시아 제국폴란드 출신의[2] 영국인 작가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1899년에 출판되었다.

영국의 템즈 강에서 출항을 기다리던 기선의 말로우라는 선원이 동료들에게 자신이 콩고 강을 거슬러 올 라가 커츠라는 인물을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원시적 자연의 한가운데에 놓인 광기 어린 서 구적 개척가의 모습과 그 정글 속 유럽이 길들이려는 원시적 토착민들의 모습이 서로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제국주의백인우월주의의 야만성을 드러냈다.

작가 조지프 콘래드가 이 작품을 집필하는 데에는 그의 불행한 인생이 큰 영향을 미쳤다. 콘래드, 본명 유 제프 테오도르 콘라트 코제뇹스키(Jzef Teodor Konrad Korzeniowski)는 러시아 제국 지배 하의 우크라 이나 베르디치우에서 폴란드계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폴란드 독립운동가였고, 아버지 아 폴로 코제뇹스키는 그가 열 살이 되기도 전에 반러시아 활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러시아 경찰 당국에 체포 되어 아내와 함께 볼로그다로 유배보내졌다. 그의 어머니는 유배 중에 죽었고, 아버지 또한 유배에서 돌 아온 지 1년 만에 크라쿠프에서 사망했다. 이후로 그는 외삼촌의 후원을 받으며 살았다. 몸이 안 좋아서 개인 지도를 받으며 홀로 선원의 꿈을 키운 그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선원 생활을 시작했으나, 불행한 어린 시절과 허약한 체질 때문에 방탕한 생활을 일삼고,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했었다. 부유한 외삼촌 덕 에 재정파탄 위기에선 벗어난 그였으나, 정치범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러시아군에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망명을 결심한다. 그렇게 그는 영어는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상황에서 영국으로 망명, 식민지 교역선 선원 생활을 시작했다. 영어는 영국인 선원들에게서 배웠고, 낭만주의 영국 시인들의 작품과 신문을 읽으 며 그 수준을 높여 갔다. 그는 교역선 선원으로 전 세계를 들쑤시고 다녔는데, 1890년에 벨기에의 식민지 였던 콩고 자유국의 콩고 강 상류 지역 무역을 독점한 '무명 벨기에회'에 고용되어 콩고로 파견된다. 그곳 에서 그는 기선으로 상류까지 도달했으나 선장이 병으로 앓아눕는 바람에 그가 회복될 때까지 대신 배를 몰았다. 목적지에서 돌아오면서 병든 교역상 클라인을 데리고 오지만 클라인은 도중에 죽었고, 콘래드 역 시 풍토병에 걸려 앓아눕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 내부에서 갈등까지 일어나자 그는 만기일을 6개월 남겨두고 선장 계약을 파기하고 유럽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896년과 1899년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 로 해서 두 소설을 쓰는데 그것이 '진보의 전초 기지'와 '어둠의 심연’이다.

말로의 여행의 배경이 되는 콩고 자유국벨기에령 콩고 및 현대 콩고 민주 공화국의 전신으로, 서유럽 만한 지역 전체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개인의 사유지였다. 1870년대, 신생 벨기에 왕국도 늦게나마 식민지 확장 대열에 합류하고자 했다. 그러나 먹을 만한 땅은 이미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선두주자들이 가져간 상태였기에 당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얼마 남아있지 않은 비점령지였던 콩고 강 유역 밀 림 지대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꾸준히 이 지역에 탐사대를 파견하여 조사하였으며, 1876년에는 아프리 카 협회라는 기관을 설립하여 고통받는 흑인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가져다 준다는 말로써 지지자를 끌어 모았다.

1884년 독일 제국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선한 베를린 회의에서 콩고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은 그 는 철저히 사익을 위해 식민지를 경영하기 시작한다. 콩고 전체는 정부의 것이 아닌 레오폴드의 것이었 고, 그는 '무명 벨기에회'라는 회사를 세워 콩고의 주 특산품인 고무와 상아를 채취하며 엄청난 금전적 이 득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의, 어쩌면 천만이 넘는 콩고 인민들이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 로 팔다리를 잘리거나 살해당했다. 콘래드는 바로 이 시기 무명 벨기에회에 고용된 선원이었고, 잘 꾸며 진 말로 포장한 유럽 문명의 이면에 숨겨진 어둡고 야만적인 진실을 두 눈으로 목도한다.

이 끔찍한 범죄 사실은 콩고 자유국 정부와 레오폴드의 언론플레이, 외부인 차단, 분식회계 등으로 철저 하게 은폐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폭로되었다. 레오폴드가 내세운 소위 '미개한 이들에 대한 문명화 사명' 을 믿고 콩고로 나아간 이들 중 콘래드나 로저 캐즈먼트, 조지 윌리엄스 같은 몇몇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 을 받곤 각국 언론에 진실을 폭로했다. 이후 전세계적 비난에 직면한 벨기에 정부와 의회는 왕에게서 콩 고를 빼앗아 직접 지배를 시작한다.

구체적인 언급이 거의 없고, 비유와 상징을 대단히 많이 사용한 소설이다. 명백한 예로서, 작중인물 중 프 레슬레벤은 계속 '교역상'으로만 지칭되고, 콩고라는 구체적인 지명은 언급도 되지 않고 '거대한 강을 따라 난 정글', 또는 '지도의 노란색 부분'으로 언급된다. 또한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서 말로가 설명하는 방식도 상당히 수사적이어서 이해하기 쉽지 않다. 콘래드는 '직접적인 언급은 환상과 암시를 제거하므로 문학에서 치명적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작품에 극도로 반영된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은 액자식 구성을 따른다. 서술자와 동료들이 배 시간을 기다리면서 말로우의 이야기를 듣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가 있고 그 안에서 말로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아간다. 이것은 말로우가 나오는 콘래드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구성이다.

작품의 서술자. 선원으로, 템스 강변에 있는 현재 시점에서 동료들과 함께 말로우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 소설은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서술되므로 별다른 역할은 없으며,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는다.

찰스 말로우 : 캐릭터 모티브는 작가 자신. 작품의 주 화자이다. 그는 어둠의 심연 말고도 로드 짐, 기회, 젊 음 등의 콘래드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주 화자로 등장한다. 다양한 지역을 항해했던 노련한 선원이다. 특히 그는 어렸을 적부터 콩고 강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결국 연줄을 이용해 식민지 교역 선 선장으로써 콩고 강을 거슬러 오르게 된다. 그는 강을 거슬러 오르는 동안 갈수록 적어지는 유럽 문명의 흔적과는 반대로, 갈수록 울창해지는 밀림과 그 속에서 울려퍼지는 원주민들의 원시적 소리에 자신의 내면 의 태초의 야만적 본성이 전율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문명화를 위시한 유럽 세력의 잔혹한 식민화 정책 의 실상을 목도한다. 성격은 일반적인 뱃사람들의 모습과는 어딘가 다른 면이 있다고 묘사된다. '나'의 말에 따르면 선원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와 항구는 세계 어디를 가나 비슷한 모습이다. 배 위에서의 생활에는 비 밀 따위는 없고, 그들이 잠깐 들르는 육지인 항구에서도 술자리와 노름판만이 벌어질 뿐이다. 이러한 정해 진 지겨운 생활의 반복에서 특별한 사건이 있을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말을 할 때에도 굳이 다들 아는 것을 묘사하기 위한 수사학적인 표현을 쓰기보다는 감추는 것 없이 매우 간단하고 단순하게 구사한 다. 사건과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할 때도 마찬가지. 그러나 말로우는 노련한 선원임에도 그와는 정반대라 고 묘사된다. 그는 말할 때 있어 핵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외적 요소에까지도 꼼꼼히 신경쓰고, 수사적인 묘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이러한 요소들까지 최대한 전달하고자 한다. 앉아 있는 모습 또한 이 러한 특별한 성격을 반영하듯, 나머지 인원들은 노름을 하러 옹기종기 모여있거나 갑판 위에 널브러져 있 는 동안 혼자서 선미에서 설법하는 부처마냥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커츠 : 캐릭터 모티브는 작가가 콩고에서 만났던 교역상 클라인, 그리고 벨기에의 군인 레온 롬. 말로우가 콩고에서 본 모든 일의 중심에 놓인, 말 그대로 어둠의 심장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직책은 강 상류에 위치 한 내륙 교역소장으로서 유럽 문명의 지식인으로서 누구도 가길 꺼리는 야만의 심장인 콩고 강 상류에 성 공적으로 안착해 남들보다 배는 많은 상아를 보내오기에, 중하류의 여타 교역소 직원들에게는 전설같이 여 겨진다. 말로우가 중간에 배를 고친다고 몇 달간 눌러앉아 있어야 했던 교역소장이 커츠는 돌아가는 즉시 이사회의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또한 커츠의 교역소 주변의 원주민들은 그 남자 를 신으로 여기며, 그 남자가 하류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 때문에 원주민들은 말로우의 기선이 나타나자 기선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인 커츠를 데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기선을 공격하는 것도 불사했다. 그러나 커츠의 실상은 그저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하고 홧김에 사람을 죽이는 등 내외다운 야만성에 완전히 물들어 버린 인물이다. 그 남자의 독보다운 상아 생산량은 당연히 원주민들을 남들보다 열심히 수 탈한 결과이고 원주민들이 커츠를 신으로 모시는 것도 그 남자가 인격자라서가 아니라 그 남자의 폭압적인 행동과 총으로 대표되는 '무기' 앞에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남자는 백인우월주의의 우월감에서 비롯된 원주민들을 향한 잔인한 성품과, 원시의 자연 속에서 느끼는 무한한 야만성이 뒤섞여 미쳐 버린 괴 물로서, 말로우와 만나는 시점에서는 정글 밖으로 나가는 것은 꿈조차도 꿀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

유언은 "무서워라! 무서워라!(The Horror! The Horror!)"

어둠의 심연은 말로우가 동료들과 같이 템스 강 하류에서 물때를 기다리다 과거 로마 제국이 브리타니아 섬을 정복할 때의 로마군 사령관의 심정을 상상해 이야기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말로우는 자신들이 있 는 이곳, 즉 강대한 영국 식민제국의 수도이자 진보한 유럽 문명의 총본산인 런던조차 이천 년 전의 로마 인들에게는 사방천지에 켈트족 야만인들이 들끓고 끔찍한 기후 조건과 식단, 그리고 어두운 숲으로 우거 진 문명의 최고 변방이었을 것이라며 운을 뗀다. 문명의 첨병인 그 로마 사령관은 후에 이탈리아로 돌아 가 승진할 것을 기대하며 영국의 끔찍한 죽음의 숲 속 세계에 길목마다 교역소를 세우면서 기어이 정복을 완료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문명의 변방 중에서도 가장 변방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거대한 숲과 야만인들의 야생적 생동감에 점차 도취되어, 결국 야만인들과 별 다를 바 없이 증오와 야만성에 눈 을 뜬 잔인한 정복자로 전락했을 것이다. 말로우는 이러했을 로마의 점령 행위는 내 힘이 다른 이보다 더 강하다는 순전히 우연한 이유로 그들을 학살하고 착취한 것일 뿐이라면서, 전혀 자랑할 바 못 되는 일이 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러한 잔혹 행위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상뿐이라는 말과 함께, 그는 이야기를 자신이 콩고에서 겪었던 경험으로 이어간다.

어린 시절, 지도를 보면서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싶어하던 말로우는 아프리카 중부에 있는 콩고 강의 거 대한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 같은 모습에 매료되었다. 그는 이 강을 탐험하고 싶어 아는 인맥을 총동원, 유럽에 있는 친척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콩고에의 무역을 전담하고 있는 회사 소속 증기선의 선장 직을 받게 된다. 원래 있던 프레슬레벤이라는 덴마크인 선장이 원주민을 구타하다 반격을 받아 살해되자 그 빈자리를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는 곧바로 회사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로 가 일사천리로 계약서에 사인 을 마친다. 그러나 성소와 같은 그 사무실을 나오면서, 말로우는 회사의 비서와 대기실의 여자들이 보내 는 오묘한 눈빛들을 마주한다. 자신보다 앞서 똑같이 계약을 마치고 이 방을 나서 식민지로 향했지만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던 수많은 선장들을 봐 왔을 그들은 마치 말로우 또한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이에 말로우는 불안감과 범죄에 가담하는 듯한 찜찜한 기분을 느끼면서 발걸음을 뗀다. 계약을 마친 후 콩고로 향하기에 앞서서는 우선 잠깐의 건강검진을 받아야만 했다. 검사는 형식적일 뿐이 라던 비서의 말과 달리, 의사는 정신 감정을 하더니 아프리카로 떠난 사람들이 내적인 변화를 일으켜 다 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그리고 검사를 마치고 떠나는 말로에게 마음의 평정을 유 지하고, 절대 화를 내지 말라는 불길한 경고를 남긴다.

이제 출발하면 되었으나, 말로우는 자리를 알아봐준 친척 어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찾아간다. 이때 그는 자신이 매우 유능한 인재로 소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그 친척 아주머니 또한 식민 개척자들을 하느님의 사도처럼 인식하고 있던 것이다. 말로는 이에 대해 고작 싸구려 증기선이나 모는 게 그런 식으로 포장되는 것이 어이없지 않냐며 속으로 조소하곤, 곧 콩고행 배에 오른다.

그가 탄 배는 프랑스 국적선이었고, 광대한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드문드문 보이는 항구들에 군인과 상 인들을 내리면서 천천히 항해했다. 점령과 개척은 아직도 시작 단계였다. 문명화와 각종 교역이 이루어진 다는 유럽인들의 해안 정착지들은 작고 볼품없었으며, 그 뒤의 거대한 미개척지가 뿜어내는 야생의 위용 에 압도되어 있었다. 배들도 마찬가지였다. 강대한 프랑스 제국의 군함 한 척이 해안 지역을 제압하고 식 민화하기 위해 6인치 중포의 화력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포탄이 굉음을 내며 날아간 방향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안 너머 끝없이 펼쳐진, 군함을 점처럼 보이게 만들 만큼 광대한 숲은 포격에도 아랑 곳 않고 우습다는 듯이 그대로 그 고요한 위용을 뽐냈고, 오히려 그 함선이야말로 선내에 아프리카의 풍 토병이 돌아 선원들이 시시각각 죽어나가는 전멸 직전의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반면 때때로 작은 보트에 탄 채 노 저어오는 다부진 토착 흑인들은 병에 걸린 기색은 조금도 없이 야생에 걸맞는 자연스러운 생동 감을 내뿜고 있었다. 소위 '문명화'가 이뤄진다는 계몽의 전초 기지들에서 벌어지는 이 어처구니 없는 모 습에 말로우는 이 사업에 대한 회의감을 키워갔고,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끝없이 이어지는 광대한 아프리 카의 야생적 생명에 서서히 공명하며 현실감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출항한 지 30일이 지나서야 말로우가 탄 배는 콩고 강 하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속한 사업장은 강 상류로 훨씬 더 올라가야만 했다. 그는 우선 식민지 생활에 질린 듯한 젊은 스웨덴인 선장이 모는 작은 기선으로 갈아탔고, 곧 하구에서 30마일 가량 떨어진 정착지에 도착한다.

정착지에서는 소위 어처구니없고 끔찍한 '문명화' 작업이 한창이었다. 철도가 건설되고 있었는데 공사 자 재와 설비들은 녹슬어 가고 있었고, 보잘것없는 수준의 폭발이 광대한 절벽을 무너뜨리겠다고 이어지고 있었지만 암반은 멀쩡했다. 그리고 한켠에는 끔찍한 몰골의 흑인들이 쇠사슬에 묶여 강제적인 노예 노동 에 종사하고 있었다. 바다 건너 온 침략자들이 제정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생뚱맞은 법을 어겼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범죄자로 몰려 이곳에 끌려 온 것이었다. 또 한쪽에는 용도 불명의 거대한 구덩이 가, 다른 한쪽 강변에는 징용으로 너무나 쇠약해진 흑인들이 살기를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끔찍한 장 소도 있었다. 그곳에서는 수십 명의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흑인들이 나무 그늘 밑에서 죽었거나, 기운 없 이 널브러져 있었다. 당황한 말로우는 죽어가는 흑인 중 한 명에게 비스킷을 내밀었지만 그는 그것을 입 으로 가져갈 힘조차도 없었다. 그야말로 납득 불가능한 수준의 참혹함이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것 은 어서 발걸음을 재촉해 교역소로 향하는 것뿐이었다. 말로우 본인 또한 먹고살기 위해 별의별 떳떳하지 못한 일도 했었고, 욕망에 휩싸인 다른 인간들이 서로에게 수많은 구린 짓을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았지 만, 이 모든 광경은 그런 말로우조차도 악마가 장난질한 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정도 였다.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드러낸 역작이나, 그 또한 백인 우월주의에서 벗어나진 못했던 작품. 그렇다 하더라 도 이 작품이 키플링의 소설들처럼 지나친 백인 우월주의로 사실상 매장당한 것은 절대 아니고, 시대적인 한계를 생각해야 한다. 인종차별을 없애자고 마틴 루터 킹말콤 엑스가 활동한 시기가 1960년대이다! 모든 사람이 백인우월주의를 가지고 있는 시대에 이런 내용은 자체가 선구적이며 충격적인 시점이다. 이 렇게 보면 아래의 비판은 오히려 시대나 다른 것들을 보지 않고 자신의 주위만 보고 생각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을 지경.

이성과 과학으로 중무장한 모범적인 문명인인 커츠가 어느 순간 밀림 속 야만에 매혹되고 동화해 온갖 잔혹한 행동을 저지르면서 공포스러운 지배자로서 군림하려는 것을 이용해, 학술 연구나 계몽 따위로 치 장된 당시 제국주의가 알고 보면 야만인들의 광기와 별반 다를 것도 없다는 역설을 보인다. '가장 발달된 문물의 순례자'들이 콩고 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내면의 야만성을 마주한다는 이 작품의 줄거리는 분명히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그 야만성이 흑인 원주민들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방식으로 비판해 흑인 들이 미개하다는 전제를 이미 깔아 둔 탓에 이 작품도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제국주의다운 시각을 완 전히 벗지 못한 작품, 정확히는 제국주의는 비판하지만 인종주의는 벗지 못한 작품이다. 등장하는 흑인들 을 향한 말로우의 시선은 동물을 보는 듯한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여기서 콘래드가 인종주의다운 시각에서 책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합리한 백인이 자발로 야만스러운 생활을 선택한다는 이야기는 백인우월주의가 당연시되던 당시 기준으 로는 충격스러운 소재였겠으나, 한편으로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야만인이라는 전제를 깔고 백인이 흑인 과 동등한 위치로 타락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결국은 백인우월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시각이기도 하다. 백인과 흑인의 관계를 정상인과 흡혈귀, 인간과 우주적 존재, 유부녀와 변태적인 외간 남자로 대체해 보 면 작가가 흑인을 대체 어떤 식으로 인지하는 건지 대충 느껴지리라. 결국 백인우월주의에 기초한 관점에 서 백인우월주의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던 것.

이 때문에 나이지리아의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는 1975년의 강연에서 이 소설을 '아프리카인들을 인간으 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통하고 모욕스럽다'고 했으며, 작가 콘래드를 향해서도 '인종차별적인 좁은 시야를 가진 인물'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는 아체베가 인종차별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인지도 높은 작가인 콘래드를 디스했다고 봐야 한다. 콘래드는 아프리카인 뿐 아니라 자기 소설의 묘사되 는 사람들을 대부분을 매우 냉소적으로 묘사하는 사람이었다.

038. 비잔틴 미술

비잔틴 미술(Byzantine art)은 4세기 경부터 1453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에 이르는 비잔틴 제국의 예술품을 가리키는 데 쓰이는 용어이다. 비잔틴예술이 르네상스예술에 큰영향을 주었기때문에 비잔틴 미 술은 르네상스 미술의 조상이자... 원시 르네상스미술이기도하다.
비잔틴의 미술은 고대 로마가 둘로 분열된 후 점차 쇠퇴되고 있던 서(
西)로마 중심의 라틴 미술에 대해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급속한 발달을 보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는 기독교 용인령을 공포하여 (그 후 얼마 안 있어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는 공인되었다) 비잔틴의 미술은 그 출발점에 있어서 이미 궁정(宮廷)의 지지를 배후에 업은 기독교 미술로서 장대함과 호화로움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비잔틴제국은 기독교의 원천이 된 유대교의 신앙 지역이나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 등의 그리스 문명의 유산을 보존하는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지, 또는 동()로마제국을 자주 위협하는 강적 사산 왕조의 페르시 아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위치에 있었다. 이렇게 인접해 있는 이질문명이 비잔틴제국의 전사(前史)를 이룬 로마적 지중해 문명과 융합되어 동방적 요소와 라틴적 요소를 가미하면서 헬레니즘의 전통 위에 새 로운 국면(局面)을 더한 형태로 전개되는 것이 비잔틴의 예술이다.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최초의 전성기를 맞아 갖가지 중요한 문화유산을 남겼으나, 8∼9세기에 걸쳐서 성상숭배(聖像崇拜)에 관 한 논쟁과 사라센인의 침입이 겹쳐 문화적으로는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그 후 10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서 한때 재흥기(再興期)가 있었다. 그 문화권에는 동지중해, 발칸반도, 러시아가 포함되었다. 제국 자체는 13세기에 계속되는 터키인의 침입과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의해 약체화되고 붕괴되었으나, 그 미술의 영향은 중세를 통해 서유럽에 대해서도 강력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도록 동유럽(특 히 정교권) 문화의 기본적인 것을 형성하고 있다.

산 비탈레 성당, 콘스탄티누스 황제 자신은 콘스탄티노플에 많은 사원을 건립하며 웅대한 도시계획을 세 우고 또 베들레헴의 성탄사원(聖誕寺院) 건립 등의 활동에 참가하였으나, 비잔틴 건축을 가장 잘 대표하 는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건립된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과 그즈음 재건(콘스탄티누스 황제 창건, 3세기 소실)된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이다. 전자는 성() 세르기우스 사원, 갈라플라시디 아의 묘당(廟堂)과 더불어 팔각당 형식을 취하는 집중식이다. 다수인이 모여 제례의식을 행하는 데 적합 하도록 원()에 외접(外接)하는 8각() 또는 방형(方形)의 플랜 위에도 돔(円蓋)을 씌운 형식으로 된 것 이다. 이 형식은 그때까지의 지중해 양식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형식인데, 방형 플랜에 몇 개의 아치를 써 서 돔을 얹는 식의 공법은 3세기 이래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궁정에서 채용되고 있다.

성 소피아 사원은 소()아시아 출신인 두 사람의 그리스 건축가의 손으로 완성을 본 것이다. 대() 돔으 로 덮여져 있는 정방형의 본당(本堂)을 중심으로 대() 돔을 받치고 소() 돔을 세 방향으로 배설(配設) 하여 그 중압(重壓)을 감소시키고 있다. 이 크고 작은 돔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면서 바실리카 형식을 구 성하고 있다. 이 공법은 가공할 때 돔의 중량을 역학적으로 분산·배분하는 훌륭한 역학계산(力學計算)을 근거로 성립되어 과학과 미()의 결합을 훌륭하게 처리하고 있다. 이 형식의 특색은 오늘날의 건축에서 말하는 셸 구조와도 공통되며, 내관과 외관이 전적으로 일치하고, 모든 공간을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점에 있다. 단지 선()의 강조에 치우치기 쉬운 서방(西方)의 바실리카식에 대해서 돔-바실리카식을 완 성케 한 비잔틴 건축은 항상 기둥의 직선과 돔, 아치의 곡선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비잔틴 시대의 회화는 모자이크가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자이크는 작은 각추대형(角錐臺型) 으로 자른 색대리석을 석회벽 위에 줄 맞춰 끼워 넣어 회화나 도안을 그려내는 일종의 공예기술이다. 이미 폼페이 등에서도 우수한 예를 볼 수 있으나 고전기(古典期) 작품의 예()가 주로 방치장의 장식인 데 대 하여, 비잔틴의 그것은 궁정과 관계가 있는 사원에 장엄함을 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비잔틴의 것 은 색대리석뿐만 아니라 뒷면을 도금한 유리, 색유리, 도자기 등의 소재도, 전체적으로 다채롭고 광택이 나며 색의 대비효과·표현효과 등 매우 화려하고 숭고함을 갖춘 것이었다.

039. 초신성

超新星신성(nova)보다 에너지가 큰 별의 폭발을 의미한다. 초신성은 그 광도가 극도로 높으며, 폭발적 인 방사선을 일으키기에, 어두워질 때까지 수 주 또는 수 개월에 걸쳐 한개 은하 전체에 필적하는 밝기로 빛난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초신성은 태양이 평생에 걸쳐 발산할 것으로 추측되는 에너지만큼의 방사선 복 사를 발한다. 폭발의 결과 항성은 구성 물질의 대부분 또는 전체를 토해낸다. 이때 그 속도는 30,000 km/ s(광속의 10%) 까지 가속되며, 주위 성간 매질충격파를 일으킨다. 충격파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팽창 하는 가스와 먼지의 껍질이 남게 되고, 이것을 초신성 잔해라고 부른다.

‘신성’(Nova)이란 ‘새로운’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낱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천구상에 매우 밝은 별이 새로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것을 칭한 것이며, 접두사 ‘초-’(super-)는 초신성이 광도가 훨씬 떨어지는 보통의 신성과는 구분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초신성’(supernova)이라는 단어는 1931년에 발터 바데프 리츠 츠비키가 만들어낸 조어이다.

초신성이 생성될 수 있는 방법은 죽은 별에 갑작스러운 핵융합 재점화가 일어나거나, 또는 거대한 별의 중 심핵이 붕괴하거나 두 가지가 있다. 별의 시체라고 할 수 있는 백색 왜성동반성으로부터 물질을 빼앗 아 갈 때, 강착 현상이 일어나거나 아예 동반성과 하나가 되거나 하여, 빼앗은 물질이 충분히 누적되면 백 색 왜성의 중심핵 온도가 상승하여 탄소발화가 일어난다. 그리하여 탄소 핵융합에 불이 붙으면 열폭주가 일어나 별을 완전히 파열시키게 된다. 또는 질량이 거대한 별의 중심핵이 갑작스런 중력 붕괴를 일으키고, 그로 인하여 중력 위치 에너지를 발산할 때 역시 초신성 폭발이 일어난다.

우리 은하에서는 케플러 초신성(SN 1604) 이후 초신성이 한 개도 발견되지는 못했지만, 초신성 잔해들을 살펴보면 우리 은하에서도 한 세기당 평균 약 세 번의 초신성 폭발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 신성은 성간 매질에 질량이 큰 원소의 양을 늘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핵합성) 뿐만 아니라, 초신성 폭발로 인한 충격파는 새로운 별의 형성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

 

040. 르네상스 음악

르네상스 음악(Renaissance music)이란 르네상스 시대서양 음악으로, 대략 1400년대에서 1600년대

사이의 음악이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원래 '고대문화의 부흥'을 의미하는데, 미술이나 문학의 분야에서는

이 말이 대개 해당되나 음악의 경우는 이러한 뜻에서의 르네상스 음악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보다 넓은 뜻으로 해석하여, 자유로운 인간의 감정이나 개성에 눈을 떠서 합리적 사고방식이

나 조화를 존중하고 명석함을 추구한다고 하는 사회·문화 발전에 걸쳐 볼 수 있는 시대의 특징적 정신이라

는 점에서 생각한다면, 15세기 말에서부터 16세기의 음악에는 르네상스라고 할 만한 몇 개의 특징을 찾을

수가 있다. 이 시대의 매끌럽고 순한 선율의 흐름, 가 확대되고, 이에 따라 새로운 음공간(音空間)이 개척

되었는데 이것은 회화에서의 원근법 탐구와도 비할 수 있을 만한 진보였다. 또, 악보 인쇄술의 발명, 정흑

백보(定黑白譜) 기보법의 보급, 전통에 구애되지 않는 새로운 음악이론의 탄생은 르네상스 정신의 큰 특

징인 합리성이나 표현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경향의 출현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르네상스의 정신은 이

미 14세기의 아르스 노바에도 나타나 있으나, 특히 플랑드르 악파로 통하여 죠스캥 데 푸레의 음악에서

뚜렷한 형태를 취하여 나타났다. 플랑드르 악파의 작곡가들은 전유럽에 걸쳐 활약하였고, 그들의 성악 폴

리포니의 작곡법은 르네상스 음악의 중심적 양식이 되었다. 그러나 이 대위법적인 복잡한 기법은 르네상

스 음악에서는 단순한 기교를 위한 기교가 아니라 보다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감정표현과 결부되어 있다

는 점에 특징이 있다. 16세기에는 음악의 중심이 점차로 이탈리아로 옮겨져, 여기서 르네상스 정신은 수많

은 꽃을 피우기에 이르렀다. 미사, 모테트를 비롯하여 각종의 세속 합창곡이 번성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르간이나 류트 등의 기악음악도 놀라운 발전을 하였다. 이 기악은 바로크 이후의 음악에서 중심적인 위치

를 차지하게 된다. 16세기 말에는 각종 극음악이 시도되었는데, 이들은 17세기 바로크 음악의 성립과 발

전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플랑드르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음악의 영향 아래 유럽의 다른 여

러 나라의 음악도 각각 독자적인 발전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르네상스 음악은 플랑드르 악파의 폴

리포니에서 볼 수 있는 북방적이며 고딕적인 요소와 이탈리아의 마드리갈 등에서 볼 수 있는 남방적·라틴 적 요소와의 결합에서 성숙하였다고 할 수 있다.

041. 아리스토 텔레스(기원전 384~322년)

아리스토텔레스(고대 그리스어: Ἀριστοτέλης, 그리스어: Αριστοτέλης 아리스토텔레 스[*], 영어: Aristotle[*], 기원전 384년 ~ 322년)는 고대 그리스철학자로,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 더 대왕스승이다. 물리학, 형이상학, ,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 윤리학, 도덕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저술하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으며, 그리 스 철학이 현재의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도덕과 미학, 논리와 과학, 정치와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서양 철학의 포괄적인 체계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도움으로 리케이온 학교에 도서관을 만들어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최초의 동물원도 만들었다. 자연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중세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그의 견해는 뉴턴 물리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되는 르네상스 시대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 동 물학 연구에서 그의 관찰은 19세기까지 정설로 인정되었다. 그의 글에는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논리 에 대한 형식 연구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그의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형식 논리학으로 구체화 되었다. 형 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800-1400년 까지의 중세시대 유대와 이슬람 전통에서 나타난 철학적 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초대교회신플라톤주

(Neoplatonism)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가톨릭 교회 전통의 스콜라 철학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윤리학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 덕 윤리학(virtue ethics)의 출현과 더불어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모든 측면은 오늘날에서 계속해서 활동적인 학 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스승 플라톤이 관념론적 이상주의임에 대하여 경험론적 현실주의자로 지적되고 있으며, 예술에 관 해서도 플라톤과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예술을 일종의 '모방'으로 보는 점은 플라톤과 같으나, 플라 톤이 '모방의 모방'으로 생각하여 이데아의 참된 인식을 흐려 놓는 것으로 인정한 데 비하여, 아리스토텔 레스는 정신을 카타르시스(정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여러 편의 품위있는 논문과 대화록을 저술했음에도(키케로는 그의 문체를 "황금이 흐 르는 강"이라고 묘사하였다.)

오늘날 그가 쓴 글의 대부분은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원래 쓴 글의 3분의 1 정도만 남아있다.

그리스 북부 칼키디케 반도에 위치한 트라키아 지방의 스타게이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2세의 시의(侍醫)였고, 모친인 파이스티스는 칼키스의 이민 출신이다. 왕자 필리 포스의 소꿉동무로 궁정에서 자랐으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어 연고자인 프록세노스가 후견인이 되었다. 17세 때(전 367)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입문하였다. 이후 플라톤의 사망시까지 약 20년간 그곳에서 연구에 정진, 학생 지도도 담당하였다. 이오니아 문화를 배경으로 의가(醫家)의 실증정신(實證精神) 아 래 성장한 그에게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큰 영향을 주었다. 충실한 플라토니스트로서 출발한 그는 맹렬 한 이데아 비판을 하면서도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의 연구와 교수(敎授) 및 저작 활동은 대략 3기―아카데미아기()와 편력기(遍歷期)와 학두기(學頭 期)―로 나눌 수 있다.

아카데미아기―저작은 기원전 360년경부터 시작된다. 먼저 플라톤의 대화편을 본떠서 그릴러스⟫ ⟪유디 머스⟫ ⟪프로트렙티커스(철학에의 권유) 향연(饗宴)⟫ ⟪소피스트⟫ ⟪정치가⟫ ⟪메닉시너스등 많은 대화 편과 기타 글이 씌어져 간행되었다. 동시에 자연학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연구도 시작되어 자연학의 일부 (제1, 2, 7권) 천체론(天體論)제1권과 정치학제2권의 일부, 데 아니마제3권과 논리학의 일부(토피카등)와 형이상학(제12권) 등이 쓰여졌다.

편력기―플라톤이 죽기(전 347) 직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 헤르미아스의 초청으로 아타르뉴스로 갔 다. 아카데미아 학두에 취임한 스페우시포스의 수학주의(數學主義), 피타고라스주의에 만족하지 못한데 다 올린토스의 함락으로 아테네에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에 대항하 여 강대한 군대를 가지고 있던 참주의 보호 아래 왕의 질녀인 피티아스와 결혼하여 그 곳 가까운 아리스 에 살면서 3년간을 강의와 연구로 보냈다. 학우인 에라스토스와 코리스코스도 같이 참가하였다. 여기에 서 철학에 대하여를 썼고 이데아나 이데아 수()의 비판이 시작되었다. 또 형이상학제1, 2, 4, 5권 과 에우데모스 윤리학, 자연학제3-6권, 천체론(현재의 형태), 생성소멸론등을 썼을 것으로 추 측된다. 또한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레스보스 태생인 테오프라스토스의 알선으로 미치레네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특히 생물학에 대한 연구가 발전되어 있었다.
기원전 342년에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의뢰와 헤르미아스의 추천을 받아 알렉산드로스 왕자 의 가정교사로서 미에자로 갔다. 왕자를 위하여 호메로스를 가르쳐 주었고 호메로스 문제를 썼다. 또 군주정치론⟫ ⟪식민정책론도 저술하였다. 기타 그리스인에 관한 국가제도의 수집이나 기록을 하였다.
그 일부인
아테네인의 국제(國制)의 태반이 1891년에 재발견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헬라스의 통 일, 즉 그리스의 폴리스군과 마케도니아 제국의 통일에 열심인 애국자였고 이것이 필리포스 2세의 야심 에 합치한 듯하나, 후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서 융합 정책에는 동의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 의 우정은 변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는 동정(東征) 중 생물학상의 표본을 위시하여 다른 선물을 보냈다 고 한다. 기원전 340년 알렉산드로스는 섭정(攝政)이 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게이로스로 물러가 연 구생활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338년 그리스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에서 패배,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왕은 암살되고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335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차 아테네로 돌아왔다.
학두기(
學頭期)―마케도니아의 총독 안티파트로스의 원조로 아테네 동쪽 교외인 아폴론 리케이오스 성 역 중 일반에게 공개하는 김나시온을 빌려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리케이온이라 불리었는데 이곳 에서 12년간 강의와 연구로 세월을 보냈다. 오전에는 상급반 연구자를 위하여 논리학과 제1차 철학을 강 의하였고, 오후에는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 공개 강의를 하였다. 현존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학두기의 강의 초고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이 전하여지자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재연(再燃) 되었다. 마케도니아와 관계가 깊었던 그는 불경죄로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사전에 모친의 고향인 칼키스로 떠났다가 이듬해 위장병으로 63세의 생애를 마쳤다. 《형이상학》은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기원전 1세기 후반 로마에서 편집 간행한 아리스토텔레스 전 집에서 <자연학(Physics)>의 뒤(Meta)에 놓였기 때문에 <자연학의 뒤의 서(Meta-Physics)>라고 불리었 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후세의 형이상학에서 의미하는 내용을 '프로테 필로소피아(Prote Philosophia)'(제1의 철학) 또는 '테올로기케(Theologike, 신학)'라 하였으며, 존재 내지 실체란 무엇인가 를 해명하는 일을 중심 과제로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문은 의사 가문이었으므로 이러한 그의 배경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 특히 생 물학 영역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한편 플라톤의 수제자로서 이데아론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플 라톤주의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두 정신의 견제 가운데서 존재 내지 실체의 포 착 방법에서도 그의 사색은 말하자면 양극 사이를 항상 크게 동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데아론을 엄 격하게 비판하면서 그의 독자적인 존재론이 형성돼 오기는 하지만 신학적인 면이 완전히 불식(
拂拭)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정리한 4원인론에서부터 그 이전의 학설은 모두 불충분한 것 으로 밀어버렸고, 특히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이재성(離在性)·초월성으로 인하여 감각물의 존재 와 해명에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한다고 거부한다. 더욱이 이 이데아의 감각물로의 내재화(內在化)가 그 의 생애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12권의 신학에서 목적론적으로 포착된 자연의 생성과 운동의 원인인 신을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로서 사유(思惟)의 사유, 자기 사유라고 역설하였다. Hoi ik ben Henk de vries 최고의 지혜는 오로지 인식시키기 위하여 인식한다고 하는 특권을 가지며, 무릇 모든 제1 원인을 대상으로 하는 학(), 모든 학의 왕자, 최고선을 알며 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유일하고 자유로운 학, 가장 신적(神的)이어서 외경될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것에 있어서 원인의 하나이며 어떤 종류 의 원리(始動因)라고 생각되며, 또 이와 같은 학은 신만이 소유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1 원리 원인의 학, 즉 제1 철학은 동시에 신학이기도 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도덕적 행동의 습관화를 통해 도덕적 성품을 고양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에우 다이모니아(Eudaimonia, 좋은 삶)를 삶의 목표로 보고 있다. 한편 저스티스(Justice) 즉 '정의'(正義)에 대 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윤리학(Nicomachean Ethics) 제5권 정의론에서 정의는 동전의 양면처 럼 '평등'(equal)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분석론 전서》(Prior Analytics)의 편찬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식논리학의 선구자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그가 창안한 개념은 19세기에 수리논리학 분야에서의 발전이 있기까지 서양 논리학의 주된 흐름 으로 자리잡았다. 칸트는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관한 이론이 연역 추 론의 핵심적인 부분을 모두 설명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조금 더 설명을 추가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논 리학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예는 ‘삼단 논법’이다. 삼단 논법은 연역적 추론에 바탕한 논증이다. 삼단 논법은 두 개의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는 추론적 방법이다.

<자연관> 그의 스승인 플라톤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보편성을 향해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 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이 보편성은 특정한 것에서 멀리 떨어져 존재하며, 이와 같은 보편성은 그들의 원 형(原型) 또는 전형으로써 주장하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특정한 것에서 보편성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사물 들의 본질(essence of things)이라 칭하였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철학적인 방법이란 특정한 현상 에 대한 연구로부터 본질에 관한 지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포괄하며,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 또는 형상 (form)이라 불린 것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이들과 유사한 형태로의 관상(contemplation), 다시 말해 인식 하는 양식에 이르기까지의 하향적인 과정을 취한 플라톤의 방법과 차이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 어 '형상(form)'은 여전히 현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기초를 가리키지만 이와 동시에 특정한 사물에 '구체화' 되어 있다. 플라톤의 방법이 선험적인 원칙으로부터의 연역 추론에 기반해 있는 것이라면, 그의 방법은 귀 납적이면서 연역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사용한 용어 중에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말은 자 연계의 현상을 탐구하는 철학의 한 부분이며, 이는 현대의 물리학, 생물학 등의 분야를 포괄한다. 현대에 들어서 철학(philosophy)은 윤리학이라든지 논리가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형이상학(metaphysics)과 같 은 보다 더 포괄적이고 모호한 분야에 한정되었다. 현대의 철학은 자연계에 관한 경험적인 연구를 과학적 방법이라는 용어를 활용하여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활동 분야는 지 적 탐구(intellectual inquiry)의 모든 분야를 넘나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4 개의 원소는 다음과 같다:

  • 뜨겁고 건조한 성질을 지닌 불(Fire)
  • 차갑고 건조한 성질을 지닌 흙(Earth)
  • 뜨겁고 습한 성질을 지닌 공기(Air)
  • 차갑고 습한 성질을 지닌 물(Water)


하지만 물이 수소원자 2개와 산소원자 1개로 이루어졌는게 밝혀지고, 공기도 사실 산소, 질소 등등으로 이 루어진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고 흙도 여러 분자로 이루어졌다는 게 밝혀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 설이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다.
운동하고 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 연구를 자연학이라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4가지 원인 을 들었다(四因論). 그는 재료의 측면, 형상의 측면, 작용의 측면, 그리고 목적의 측면에서 그 원인을 답하였다.

  • 질료인은 대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탁자에 대한 재료의 측면은 나무이 며, 차에 대한 재료의 측면은 고무와 철이 되는 것이다. 행동을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며, 어떤 특정 한 것이 다른 것보다 우위에 위치하는 것 또한 아니다. 둘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즉, 책상은 나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책상이 있는 것이다.
  • 형상인은 그 대상이 무엇인지, 즉 정의, 형태, 특성이나 원형(原型, archetype)에 의해 결정되는 것 들을 나타낸다. 기초적인 원리나 일반적인 법칙에 의거한 설명을 활용한다. 형상인은 인과관계의 필수적인 것만을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물건이 존재하기 이전에 누군가가 가지는 청사진이 더 간단하고도 형식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즉, 책상은 책상의 형상을 띄고 있 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 작용인은 변화 또는 변화의 끝이 처음 시작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무언가가 만들어지게 만드는 무언가와 무언가가 변화를 겪게 만드는 변화'를 결정하며, 살아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함으로 써 변화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 근거로 작용한다. 인과 관계에 관한 현대적인 이 해를 반영하며, 특정한 현상 또는 요인으로서의 근거에 관한 개념을 포괄한다. 즉, 책상은 어떤 목 수가 이 책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 목적인은 사물이 있는 목적에 관한 것이며, 여기서 말하는 목적은 목적성을 띄거나 그렇지 않은 것 모두를 포함한다. 목적인은 대상이 원래 쓰이는 용도에 관한 것이다. 즉, 책상은 위에 누워 잠 을 자는 것이 아니라 위에 책을 놓고 책을 읽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또한 의지나 동기, 합리적인 것, 윤리적인 것과 같이 행동에 대한 목적을 부여하는 정신적인 원인에 관한 현대 적인 개념을 포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質料, 휠레)와 형상(形相, 에이도스)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생각으로 자연을 해명 하려고 하였다. 질료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원소재로서 이것이 형상에 의해서 형태가 주어짐으로 써 비로소 구체적인 사물이 되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는 관찰이나 경험을 플라톤과는 달리 중요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모든 분야에 이르고 있지만, 500종 이상의 동물을 관찰, 기록하 고 분류하였다. 《동물지(動物誌)》 9권, 《동물 부분론》 4권, 《동물 발생론》 5권 등을 저술하고, 형 상과 질료의 철학으로 설명하였다. 암컷은 재료 즉 질료를, 수컷은 계획 즉 형상을 제공하고, 생물의 성 장에 따라서 형상이 완성하고 더욱이 그것은 "자연은 불필요한 일은 하지 않는다"라 하는 관점에 입각한 해부학적 구조, 발생학적인 기관 발달의 연구를 했다. 그의 날카로운 관찰은, 고래나 평활(平滑), 상어의 태생(胎生)을 발견하였고, 꿀벌의 생태나 의 부화 등의 정밀한 기록을 남겼다. 이와 같은 성과에 입각 하여 생물의 분류를 하였고, 또 생물의 종()은 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완전도를 늘린다고 하 고 생물의 11개의 계급을 만들었다. 이것이 '자연의 계단'이라는 생각이며, 완전도는 발생학적인 기준에 의거한 것이었다.

생물학에 이어서 그는 물리학, 천문학으로 고찰을 진행시켰는데, 경험·관찰 혹은 생산 기술과의 관련은 생물학과 비교하면 훨씬 적었다. 따라서 그 성과도 역시 생물학에 비해서 뒤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불구 하고, 그가 파급시킨 영향은 매우 크며, 근대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적 학문의 부정(否定)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는 물질은 연속적이며, 허공(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 ()데모크리토스적 입장을 취하고, 모든 땅 위의 물질은 흙·물·공기·불의 4원소로 되었으며, 이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참된 원소인 제1질료가 열냉·건·습의 4개 기본적인 형상 2개씩을 얻어서 생성 된 것이다. 제1질료가 열·습을 얻어서 기()로, 건·열로 불, 건·냉으로 흙, 습·냉으로 물이 된다. 이 4원소 는 그에 의하면 단일체이며, 4성질은 분리시킬 수 있으므로 상호의 변환은 가능해진다. 이 이론이 연금술 을 장기에 걸쳐서 밑받침하였던 것이다.

천계(天界)를 만드는 원소는 아이테르로서, 땅 위와는 다르듯이 지상과 천체의 운동도 서로 다르다. 항성 과 행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계속해서 등속 원운동을 하고 있다. 원은 완전한 도형이며, 원운동은 완 전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상의 물체가 갖는 운동은 본질적으로 상승이거나 낙하, 즉 직선 운동이라고 보고, 천체와 지구의 운동을 마주 놓았다. 지상의 물리학을 천계에 적용시킬 순 없는 것이지 만 이 생각은 결국 17세기 뉴턴에 의해 뒤집힐 때까지는 정통적(正統的) 학리로서 인정되고 있었다. 또 그의 역학에서는 자유 낙하의 속도는 무게에 비례하고 공기의 저항에 반비례하는, 즉 무거운 것일수록 빨리 낙하한다는 견해를 취하지만, 이것이 갈릴레이에 의해서 부정된 사실은 유명하다.

동시대의 철학자들과 비교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몇몇 광학에 관한 뛰어난 이론의 소유자였다. 기원 전 350년에 쓰여진 그의 저서 '난제들'(Problemata)에 초창기의 카메라에 해당하는 암상자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이 담겨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인 생활의 영위에 교육목적을 두었다. 그는 개인이 타인과 접촉할 때 이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하도록 하는 교육체계를 요망했다. 인간의 최고기능은 사고와 행위를 이성적으로 하는데 있다고 보고, 과학과 철학을 통한 이성의 훈련을 주장했다. 다음으로 그는 행복한 생활을 이룩하는 데 에 교육의 목적을 두었다. 그는 모든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 보고, 이 행복은 중용(
中庸)이란 덕과 이성적인 행동을 할 때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교육은 이성을 통해서 중용의 덕을 가진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는 국민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성원(成員)으로 교육할 수 있 는가를 중심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하고, 교육을 통하여 행복을 성취하고 국가에 유능한 인물을 양성해 야 한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교육을 중요시하였다. 자유교육은 직업적(생산적) 교육이 아 니고 여가를 이용하여 자유인으로서의 교양을 함양토록 하는 교육인데, 이를 위한 교육으로 읽기·쓰기· 셈하기·음악·체육 등을 들었다. 그에 의하면 책을 읽는 것은 문화인의 교양을 쌓는 것이며, 음악은 한가 한 시간을 유쾌하게 보내기 위한 것이고, 체육은 건전한 신체를 갖게 하여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었 다. 그의 자유교육은 신체의 노동보다 정신의 활동을 더 중요시한 것이었다. 그는 교육의 조직이나 내 용은 아동의 성장형태에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유아에게는 동물놀이·신체적 활동·이야 기 등으로 교육시키며, 14세 이전의 아동들에게는 도덕적·신체적 교육을 중시하여 체육·음악·독서·쓰 기 등을 가르치되 이론이나 법칙의 교설(敎說)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행동을 통한 안정된 습관을 확 립케 하기 위해서만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21세가 될 때까지의 청년들은 수학·문학·천문·음 악·문법·시·수사학·윤리학·정치학 등 지적인 학습을 시켜야 하며, 21세 이상의 대상자들에게 과학과 철 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방법은 자연발달에 의하여 불합리한 것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지향하는 것이었 다. 처음의 불합리한 신체적 교육에서 점차로 합리적인 정신적 교육을 지향하며, 정신교육에 있어서도 불합리한 욕망에서 합리적인 이성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신체적 교육에서 습관으로 향 상하고, 다시 마지막으로 이성의 교육에 도달하게 하는 방법이 진정한 교육방법이라고 했다. 즉 체육(體 育)·훈육(訓育)·교수(敎授)의 3분야로 나누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여성관은 중세 말기까지 그를 절대 권위로 신봉한 서양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 쳤으며, 고로 여성사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042. 소돔과 고모라

소돔(영어: Sodom)은 구약성서창세기에 나오는 지명이다. 위치는 요르단의 국토 중에서 사해의 남 쪽 어느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소돔과 그 이웃 성()인 고모라성폭력 및 도덕 적 퇴폐가 만연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창세기 19장)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를 듣고 는 당시 소돔에 거주하고 있던 롯에게 의로운 사람 10명만 찾아내면 멸망을 보류 하겠다고 선언해주었 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 10명의 선량한 사람을 찾아내지 못하여, 롯이 소돔을 탈출 하자마자 하늘 에서 유황불이 내려 멸망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흔히 '죄악의 도시'를 뜻하는 비유어로 쓰이고 있다.

소돔이 발견되기 전에는 전설 속의 도시라고 여긴 적도 있었으나 오랜 시간의 고고학적 연구로 요르단 의 탈 엘 하맘(Tall el Hammam)이 소돔이라고 확정되며 실존했던 도시라고 밝혀졌다.
성경에 나오는, '
의 아내'라 불리는 소금기둥이 탈엘하맘에 있는 소돔산(Mount Sodom)에 실제로 있 다. 소돔산은 소금 덩어리로 이루어진 남북 11km, 너비 1.5~3km에 달하는 산맥 같은 소금산이다. 지 금은 이런 막대한 암염을 채취하는 소금 공장이 여럿 들어서 있다.

여담으로 고모라는 지금의 요르단 탈 카프레인(Tall Kafrein)지방이다.

043. 콘스탄티누스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라틴어: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년 2월 27일 - 337년 5월 22일)는 중기 로마 황제(재위 306년 - 337년)이다. 흔히 기독교사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통칭하며, 동방 정 교회는 모두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 (대) 콘스탄티누스(그리스어: Μέγας Κωνσταντί
νος, 라틴어: Sanctus Constantinus Magna)로 호칭한다. 306년 7월 25일 브리타니아요크에서 병사 들에 의해 군주로 추대되어 죽는 날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첫번째 기독교인 로마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세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 환점이 되었는데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사 실상 정식 종교로 공인했다. 또한 교회의 압류된 재산을 돌려 주고 이에 대한 국가의 보상을 정했다. 그는 또한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의 발전에도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Nova Roma)’로 공표하고 330년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337년, 그가 죽자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 노폴리스로 개명했고, 세계 최초의 기독교 도시로서 이후 천 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존재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흔히 첫번째 그리스도인 로마 군주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의 선생으로 자문가로 유명 한 신학자 락탄티우스를 두었다.

그의 치세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 포하여 기독교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기독교(크리스트교)를 공인했다. 또한 기독교 교회의 압류된 재산을 돌려주고 이에 대한 국가의 보상을 정했다. 비록 311년 선제 갈레리우스가 이미 밀라노 칙령과 비슷한 기 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였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적극적인 기독교 진흥책으로 로마에서 기독교의 위상은 새로이 정립되었다.

학자들 사이에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언제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모후인 성녀 헬레나 의 영향 아래서 자라 어린 시절에 이미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설과 인생의 여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그리 스도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인 헬레나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으 나, 정작 자신은 40세가 되어서야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불렀고 사망 직전에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한편, 콘스탄티누스는 오직 자신의 정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기독교를 이용하였을 뿐이라는 점과 권 력을 위해 무고히 아들과 아내를 무참히 살해한 잔혹성으로 그의 행실이 그리스도의 정신과 거리가 멀다는 점 등에서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다만 유의할 것은, 그 살해 원인이 첫 번째 황후 미네르비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크리스푸스와 두 번째로 맞이한 황후 파우스타 사이에 이루 어진 모자상간 또는 모자상간 누명 때문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근거 중 하나로 황후 파우스타는 콘스탄티 누스의 모후 성녀 헬레나의 지령에 따라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으로 집행한, 로마에 전무후무하게 유례가 없 는 "뜨거운 목욕탕에서의 질식사"를 당하였는데, 이는 당시 성행하던 임신중절 방법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 들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담나티오 메모리아이 형에 처해져서 그들에 관한 모든 기록이 말살되고 이후 이 들에 대한 언급이 일절 금지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신의 성공이 확실히 하느님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 고 있고 자신의 치세 동안 교회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그리스도인을 관료로 중용하고 선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의 기독교 박해 때 몰수한 재산을 모두 되돌려 주었다. 특히 라바룸 을 처음 사용한 것,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세운 것, 그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에 대한 수많은 전설 등을 볼 때 그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044. 모더니즘

모더니즘(영어: Modernism) 또는 근대주의(近代主義)는 종래의 예술, 건축, 문학, 종교적 신앙, 철학, 사 회조직, 일상 생활 및 과학 등의 전통적인 기반에서 급진적으로 벗어나려는 20세기 서구 문학, 예술상의 경향이다. 현대 문명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미래에 대해서는 디스토피아적이며 새롭고 혁신적인 문화의 창 해를 추구한다. 전통이나 권위 등에 반대하여, 근대의 과학이나 문화에 의해서 자유·평등한 근대인으로서 살아가려는 개인주의의 입장을 말하며, 기계 문명이나 도시 생활의 근대성 또는 미학적 근대주의와 서양 미술 전반의 보편적인 감각을 중시하는 경향도 지칭한다.

즉, 모더니즘은 20 세기 이후에 일어난 예술 운동을 가리킨다. 전통적인 19세기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골 격에 구애받지 않는 표현을 추구했다. 일반적으로 모더니즘이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1. 현대적인 것
  2. 20세기 초 각 분야에서 일어난 실험적인 예술 운동. 현대 예술이라고도 한다.
  3. 19세기 말,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현대에 맞는 신앙을 주장했지만 이단으로 몰렸다.
  4. 스페인포르투갈의 모더니즘 운동은 모데르니스모를 참조.

문학은 제임스 조이스 T. S. 엘리엇 등의 실험적인 작품을 가리켜 모더니즘 문학이라고 한다. 특히 라 틴 아메리카 문학의 모더니즘 운동은 모데르니스모 문학으로 알려져 있다.

모더니즘(Modernism). 우리말로 풀이한다면 근대주의 혹은 현대주의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듯하다. 우 리는 모던(Modern)을 현대라고 번역하지만, 실은 모던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지칭하지는 않는 다. 때문에 근대로 번역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동시대(Contemporary)라 고 하며 학술적 의미에서 모던(modern)은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중반까지의 특정한 시기를 지칭하 는 말로 쓰인다. 대충 정리한다면 산업혁명 이후부터 냉전질서 시기까지라 보면 얼추 들어맞는다.

모더니즘의 정신을 따르던 이들을 모더니스트라고 한다. 그리고 어떠한 분야에 있어서 매우 급진적인 사 고방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자들을 아방가르드라고 한다. 당시 모더니스트들은 대부분 아방가르드였기에, 사실상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스트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된다. 한국에서 미술분야의 용어인 전위예술은 아방가르드들의 모더니즘 미술을 뜻하는 말. 아방가르드는 프랑스 군대의 앞에 섰던 전위대(avant-garde) 에서 온 말이다.

모더니즘 자체는 1960년대 이후 점차 수그러지는 추세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1972년 7월 15일 오후 3시 22분에 종말을 맞이했다는 사실상의 소멸 선고까지 받았었으나, 포스트모더니즘 마저 소멸을 선고 받 은 지금에도 모더니즘의 영향력은 충분히 남아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는 근본적인 면에서 20 세기의 연장선에 놓여있는 만큼 당분간은 모더니즘의 영향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소매시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브랜드이자 세계 시가총액 선두권 업체인 애플이나 구글만 해도 less is more라는 명제를 거의 강박적일 정도로 준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에 모더니즘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045. 고딕 미술

고딕 미술(영어: Gothic art) 또는 고딕 예술은 로마네스크 미술에 이어 12세기 말 북부 프랑스에서 발 달한 중세 미술 운동으로, 고딕 건축이 발달하면서 덩달아 발달했다. 프랑스에서 처음 유행한 이래로 서 유럽 전반과 알프스 북부에 두루 퍼졌으며,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미술 양식이 되었다. 지역 차이는 있으 나, 고딕 미술 운동은 15세기경까지 계속되어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고딕(Gothic)의 어원은 번족(蕃族)인 고트에서 나온 것으로, 전화(轉化)하여 '야만적'의 의미로 변하였는 데 중세미술을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던 르네상스 시대에 이러한 중세미술을 '고딕'이라고 부르기 시 작한 것이 그 기원이다. 오늘날에는 중세후기를 나타내는 고유명사로서 사용되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 성당은 “신의 집”이자 모든 생활 문화의 중심지로,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점차 대규모 성 당이 들어서게 됐다. 고딕 성당은 지역 주민들에게 일종의 긍지의 상징이었다.

스타르가르트, 고딕 양식의 구시 가지, 폴란드
‘로마네스크‘ 건축과 비교해 볼 때, 고딕 건축은 첨탑으로 인해 수직선이 강조되어 나타나는 특징을 보이

며, 육중한 벽과 기둥 보다는 가냘픈 기둥과 넓은 창을 가진 내부는 신비롭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새로운 미술 양식의 등장은 ‘늑골 궁륭 Ribbed Vault’과 ‘공중 부벽 Flying Buttress’이라는 외부 버팀 목의 발명으로 가능하게 된 것!

또한 고딕 양식은 건물 내부를 ‘프레스코화’ 대신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빛에 의한 아름다운 채색 효과를 보여주는 ‘스테인드 글라스‘ 고딕 예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프랑스의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샤흐트르 대성당’, ‘아미앵 대성당’, 영국의 ‘웨 스트 민스터 사원’, 독일의 ‘쾰른 대성당’ 등을 꼽는다.

고딕 양식의 특별한 유형은 고딕 양식의 벽돌입니다. 이 스타일로 지어진 건물은 국제 관광 루트 인 유럽 의 벽돌 고딕 양식 (European Route of Brick Gothic, EuRoB)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타르투, 리가, 빌 뉴스, 올슈틴, 그단스크, 그루지옹츠, 헤움노, 토룬, 카미엔포모르스키, 스타르가르트, 슈체친, 프랑크푸 르트 (오데르), 앙클람, 그라이프스발트, 슈트랄준트, 하데르슬레우.

사실적 경향의 발달과 더불어 순수한 공예는 사양화(斜陽化)하나 사본류는 13세기의 파리를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교회에 귀속하는 것보다 귀족의 주문에 의한 것이 많고 랭부르 형제의 작품인 <베리 공() 의 호화로운 기도서(祈禱書)>는 그 좋은 예이다. 특히 그 웃머리를 장식하는 저명한 12개월의 달력에 그 려져 있는 농민의 풍속과 풍경 부분은, 회화에 있어서의 자연미의 발견으로서 특기할 만한 것이다. 성채 건축(城砦建築)이 14세기 이후 발달되어 넓은 홀을 의식하는 미술로서 태피스트리가 등장하였다. 또 북 부 지방의 교회에서는 판화 형식의 제단화(祭壇畵)가 요청되게 되었다.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고 딕 회화는 후에 플랑드르파()의 탄생을 맞게 되는 것이다.

046. 통각

통증(痛症)은 실제적· 잠재적인 조직 손상 또는 피해, 악영향 등으로 서술될 수 있는 불쾌한 감각적·감정적 경험을 말한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잠재적인 위험 상황으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하며, 손상된 신체 부위 가 회복될 때까지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회피할 수 있게 한다. 고통은 말초 신경계에 위치한 통각(痛覺)수용기가 자극됨에 의해 시작되거나 말초신경계나 중추신경계의 손상 또는 기 능 장애에 의해 비롯된다. 대부분의 고통은 자극이 사라지거나 신체의 손상이 회복됨과 동시에 사라지지 만, 때로는 그 후까지도 지속되기도 한다. 또 어떤 자극도 없고 병적 원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생 기는 경우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선천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례가 보고되기도 한다. 고통은 많 은 의학적 상태에서 나타나는 주된 증상이며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기본적인 기능을 해가는 데 심각한 영 향을 줄 수 있다.

 

047. 바로크 시대

바로크(프랑스어: baroque, baroque, 이탈리아어: barocco, 독일어: Barock)는 서양 예술사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이자 예술 사조의 한 유형이기도 하다. 어원은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포르투갈
prola barroca의 프랑스 전사인 Baroque에서 유래했다. barocco 라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는데, 뜻은 왜곡된 삼단논법, 혹은 불협화음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소리를 의미한다. 바로크의 예술적 표 현 양식은 르네상스 이후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서양의 미술, 음악, 건축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양식 의 변천에 따라 바로크의 시대는 전기, 중기 그리고 후기로 나뉜다. 예술적 경향에서 보면 후기 바로크 시 대는 곧 로코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볼 수 있다. 유명한 음악도 많이 있다.예를들어 미뉴에트 같 은 음악이 있다.

18세기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는 것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둔다. 흔히 바로크 미술의 시작 지점은 로마이고, 최초의 바로크 미술가카라바조라고 간주되고 있다. 미술사에서 바로크는 미술의 모든 장르와 하나의 시대를 한꺼번에 포함하는 마지막 양식이다. 바로크 이후로 미술사에 서는 동시대에 여러 가지 미술 사조가 등장하며, 각각의 장르에 따라 서로 다른 양식을 보이기도 한다. 조각에는 이탈리아의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대표적인 작가로, 이들은 동적, 환각적인 표현으로 '성 테레사 의 도취'나 '성 베드로 성당'의 내부장식과 광장의 콜레네이드를 완성하여 바로크 최대의 조각가로 군림하 였다.

프랑스 문학사에서는 플레야드 말기부터 17세기 중엽까지의 시대를 ‘전()고전주의 시대’라 불러온 데에 대하여 이 시대에 고전주의로 향하는 경향을 이탈한 문학을 오히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 이것 을 ‘바로크 문학’이라 하여 고전주의에 대치시키는 움직임이 근년 문학사가들 사이에 일어났다.

문학에 있어서 바로크의 특징은 (1) 안정보다 움직임의 중시, (2) 단념보다도 격한 감각의 존중, (3) 장식성의 우월, (4) 기발한 비유·대조·과장과 파격적 구문의 사용 등이다. 시에서는 도비네, 장 드 스퐁드(1557- 1597), 초기의 말레르브, 극에서는 로베르 가르네(1544-1590)와 로트루(1609-1650), 초기의 코르네유 등에 이 경향이 있다고 한다.

048. 형이상학

형이상학(形而上學 · 영어: metaphysics)으로 번역되는 영어 낱말 "메타피직스(Metaphysics)"는 그리스어 의 메타(meta: 뒤)와 푸지카(fusika: 자연학)의 결합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의 정의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존재의 근본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라틴어의 역어로 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며, 다른 정의로는, 형이상학은 사회의 근본 체계, 사회 현상, 모든 지식들 또는 인 류 대다수에게 그보다 나은 지식일지라도, 그것들의 근원은 변증된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개별적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이념이기도 하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근본을 연구하는 부문을 "제1철학"이라 하고 동식물 등을 연구하는 부문을 " 자연학"이라 했다. 그가 죽은 후 유고(遺稿)를 정리·편집함에 있어 제1철학에 관한 것이 "자연학" 뒤에 놓여 그때부터 메타피지카(metaphysica: 형이상학)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형이상학에 대한 동서양의 견해는 차이가 있다. 대표적인 차이로는 서양의 경우 인간은 형이상학적 진리들 을 직접적인 경험으로 알 수 없다는 견해가 많은 반면, 동양의 경우 형이상학적 진리들을 직접적인 경험으 로 알 수 있다는 견해가 많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은 무엇과 같은지를 묻는 실체에 대해 연구하는 가장 일반적 학문.

서양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여러 뜻으로 쓰이고 있다. 볼프철학을 표상력 (表象力)에 의한 형이상학(이론)과 의욕력에 의한 실천철학(실천)으로 나누었다. 칸트가 형이상학이라 칭 하는 것은 주로 볼프를 따르고 있으나 기존의 형이상학적 논의는 독단적이라 해서 배척했고, 경험할 수 없 는 것을 논하는 기존의 형이상학과는 다르며 인식론에 기반을 둔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정립하려고 하 였다.

헤겔부터는 형이상학이 회복되어 사유(思惟)의 형식이 동시에 실재의 형식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논리가 주장되었다. 하이데거, 야스퍼스도 형이상학을 주장했으나 객체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자각존재의 의 미이다. 변증법에서는 형이상학이 자기에게 대립하는 것을 고정시켜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서양에는 인간은 형이상학적 진리들을 직접적인 경험으로 알 수 없다는 선입견이 있다. 때문에 형이상학적 진리들은 사색 · 추론, 또는 근거 없는 신념 또는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또한 서양에서 는 모든 사상 체계는 서로 간에 대립 또는 모순되어, 하나가 진실이라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어야 한다고 생 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동양에서는 인간은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형이상학적 진리들을 알 수 있다는 관 점을 갖는다. 또한 형이상학적 진리들을 알기 위해 사색 · 추론 · 신념 또는 신앙에 의존해야 하는 것은 아니 라고 본다. 그리고 하나의 형이상학적 진리에 대해 여러 가지의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이들 여러 가지 해 석은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라고 보며 각각의 해석은 다양한 종교적 · 사상적 · 철 학적 배경 또는 경향성을 가진 여러 다른 사람들 중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직접적인 경험으로 이끔에 있어 특히 적합하다고 본다.

049. 요셉

요셉(히브리어: יוֹסֵף "그(하느님, 하나님)가 더한다", 아랍어: يوسف, 영어:joseph)는 구약성서 창세기와 함 께 꾸란요셉장에 나오는 주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야곱의 열 한 번째 아들이었고, 라헬의 첫 아들이었 다.
족장
야곱의 아들중 하나인 요셉(Joseph)이라는 히브리 청년은 아버지의 편애로 형들의 미움을 받는다. 더 구나 12별과 달이(그 당시 형제들과 아버지를 비유)자신에게 절을 한다는 과 13짚들이 자신의 짚에게 절 을 했다는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하기까지 하자 분노가 폭발한 형들은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20닙 을 받고 노예로 팔아버린다. 파라오경호원인 보디발의 노예생활을 하던 그는 성실함을 인정받아 보디발 의 집안일을 맡아보지만, 어느 날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부하다가 강간 미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다. 이때 그는 파라오를 모시던 시종장들을 만나고 그들의 꿈을 풀어주었다. 이 중에서 요셉의 해몽대로 포도 주 담당 시종장은 사면복권되지만 그만 요셉의 존재를 잊어버린다.그런데 2년 후에 파라오가 꿈속에서 마 른 곡식과 소들이 잘 여문 곡식과 살진 소들을 먹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고민하였으나 이집트의 지혜자들이 이를 풀지 못하자, 시종장은 요셉을 기억해내어 소개했다. 시종장의 소개로 파라오앞에 불려간 요셉은 앞으 로 7년간 풍년이 있은 이후에 7년 이후에 극심한 흉년이 있을 것이라고 꿈풀이를 했고, 그의 지혜에 감동받 은 파라오는 요셉을 총리로 임명한다. 총리 요셉은 풍년 동안 모아둔 곡식으로 가뭄에서 이집트 사람뿐만이 아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형들은 총리가 된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고, 요셉이 어렸 을 적 꾸었던 꿈 그대로 형제들이 요셉에게 굽신거리게 된다. 또한 가나안에서 식량을 사기 위해 내려온 아 버지와 가족들을 불러, 가축을 키우면서 살 곳으로 고센 땅을 정해주어 먹고 살 수 있도록 배려한다. 아버지 가 죽은 후 형들은 보복을 두려워하지만 이미 요셉은 형들을 용서한 뒤였다.

데이빗 롤은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때를 아메넴핫 3세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셉의 역사적 기록은 구약성서 외에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요셉이야기와 내용이 비슷한‘두 형제 이야 기’(The Tale of the Two Brothers)설화와 기원전 17~19세기 무렵에 이스라엘 지역에서 기근을 피해 이주 한 이민들의 지도자 이야기가 결합되어 구약성서에 요셉이야기가 실린 것으로 보인다. 요셉에 대해 구약역 사학자 유진 메릴은 “요셉이 이집트에 온 것은 기원전 19세기 말엽 세소스트리스 2세 치하 때일 것이다. 세 소스트리스는 많은 아시아 노예들이나 용병을 썼다."라는 견해를 통해 요셉이 실존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았 다.

세겜 지역에는 전통적으로 요셉의 무덤으로 불리는 곳이 있다.

2009년 9월 25일 이집트에서 파라오 시대의 많은 동전이 발견되었고, 이 동전들 속에는 구약성서에 등장하 는 야곱의 아들 요셉이 이집트에 살았던 시기에 주조된 것도 있으며, 실제로 일부 동전에는 요셉의 이름과 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주화가 최초로 사용된 시점을 요셉이 활동했던 시기라고 창조주의자들이 고려하는 시간 보다 대략 천 년 정도 뒤인 BC7 ~ BC6 세기 정도로 보고 있으며, 별개로 500개 이상 발견되었다는 동전에 대한 사진자료나 논문 등이 전혀 없는 것을 보아, 확인되지 않은 자료로 보인다. 현재 원문기사는 삭제된 상태다.

050. 이슬람교의 전파

이슬람(아랍어: الإسلام al-islm 듣기 (도움말·정보))또는 회교(回敎)는 하느님을 믿는 종교로, 무함마드 를 예언자로 보는 종교이다. 불교,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와 함께 세계 5대 종교의 하나이다. ‘이슬람’이 라는 명칭은 아랍어로 복종·순종을 의미하며, '하느님'은 아랍어 발음으로 '알라'라고 한다. 이슬람을 믿 는 신자남자일 경우에는 무슬림이라고 하고 여자일 경우에는 무슬리마라고 한다.

이슬람의 경전은 꾸란(코란)이며,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아랍어: جبريل)로부터 받은 알 라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슬람의 대표적인 종파로는 전체 무슬림의 80~90%를 차지하는 수니 파이란이 대표하는 시아파가 있다. 시아파는 10-20%를 차지한다. 발칸 반도, 중앙아시아, 터키의 무 슬림들은 수피 무슬림들이 많다. 수니파 내에서 무슬림 모두는 동질 의식을 가지나, 타종파 간에는 보이 지 않는 불신이 있다. 무슬림이 이슬람 경전 ‘쿠란’ 다음으로 중요시하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 하디 스에 "오직 알라만이 불로 심판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어 이슬람권에선 장례 때도 화장을 금지한다.

  • 이슬람: 흔히 ‘이슬람교’라고 불리는 종교의 이름이다. 이슬람(al-islm)은 ‘알라에게 복종하다’라 는 뜻으로 "복종·순종"을 의미하는 ‘아살라마’(asalama)에서 파생하여 무함마드가 만든 말이다. 대 한민국에서는 이슬람을 회교(回敎)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중국에서 이슬람을 회회교라고 부른 것 에서 유래한다. 한국 이슬람중앙회에서는 발간한 소책자의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진실’에서 ‘회 교’의 명칭은 잘못된 것이며 ‘이슬람교’ 또는 ‘이슬람’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간혹 이슬람 을 마호메트교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믿는 종교가 아니며, 알라를 유일 신으로 하는 종교다. 한국 이슬람중앙회는 ‘마호메트교’의 명칭 또한 잘못된 것으로 지적한다.
  • 무슬림: 이슬람에 복종한 자, 곧 이슬람을 믿는 이슬람 신자를 가리킨다. 여자는 무슬리마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리야드의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꾸란

  • 꾸란: 이슬람의 경전 이름이다. “읽다”(아랍어: 카라아)의 동명사로서 그 뜻은 “읽기”이다. 이는 무함마드가 받은 첫 계시가 “읽어라! 창조주이신 너의 주님의 이름으로.”라고 시작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기존에는 ‘코란’이란 표기가 많이 쓰였다.
  • 라술룰라(raslu-llh): ‘성사’(聖使)라는 뜻으로, 이슬람에서는 주로 무함마드(영어로는 마호메 트)를 가리킨다. 성사는 ‘알라가 보낸 사람’을 뜻하며, 이는 예언자보다 격이 높다. 예를 들면; 이 브라힘, 무사, 이싸 그리고 무함마드이다.
  • 이만: ‘믿음’이라는 말인데 이슬람의 믿음은 행위와 직접 관련된다. 대개는 “여섯 가지 믿음”을 가 리킨다.
  • 이슬람의 다섯 기둥: 신도가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종교적 의무이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일과 이삭이 있는데 이스마일이 쫓겨나면서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무함마드] 이슬람의 성지(聖地) 메카아라비아 반도 중부, 홍해 연안에서 약 80 km 지점의 불모지 골 짜기에 위치하는 도시로, 인도양에서 지중해안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였다. 옛날부터 흩어진 유 대인들이 살았으며 에비온파, 마르얌파, 네스토리우스교(경교) 등 마이너리티 기독교 신자들이 로마교회 의 탄압을 피해 아라비아에 거주하였다. 메카는 카바 신전을 중심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종교적 중심지였 기에 매년 많은 대상과 순례자들이 찾아들었다. 메카의 지배계급은 5세기 말경, 부근 황야에서 온 쿠라이 시족이었으며 무함마드는 그 중의 하심가(Hashim ) 출신이다. 하심가에는 압둘 무딸립이란 사람이 살 았는데 그에게는 열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의 이름이 압둘라였다. 압둘라는 아미나와 결혼을 했는데 그 사이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난다.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 아미나도 메디나를 방 문하고 돌아오는 중 병에 걸려 죽게 된다. 무함마드는 하녀의 손을 잡고 메카로 돌아와 할아버지 압둘 무 딸립에 의해 자라다 할아버지가 죽자 삼촌 아부 딸립에 의해 양육된다.

도착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이스마일을 보러온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스마일과 함께 메 카의 카바신전을 건축했다는 설이다.

삼촌 아부 딸립은 가난했는데다 딸린 식구들이 많아 무함마드는 어린 나이부터 삼촌 아부 딸립을 따라 시 리아 지방으로 무역 대상을 떠나게 된다. 12세에 무함마드는 삼촌을 따라 시리아로 간다. 그곳에서 네스토 리아(경교) 수도사를 만나게 된다. 바히라라는 캬라반을 타고 가는 무함마드에게 예언자의 징표가 있다고 말하였다.

[카디자와의 결혼]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인들과 소수 기독교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사비교인들 도 아라비아에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서로에게 종교적인 영감을 주었다. 신성한 달이라 불리던 9월에 금식 을 행하던 것은 사비교의 종교적 영향이다. 유대인들과 마이너리티 기독교 신자들의 영향으로 일신론 사 상이 아라비아 반도에 전해지긴 했으나 대부분은 여전히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카바 신전에 는 360개의 우상들이 존재했는데 그 우상들은 '알라'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알라'라는 호칭은 이슬람에서 매우 중요한데 아랍어로서 '하느님'을 뜻한다. 즉, 이 세상의 절대적인 존 재 "신"을 의미한다. '알라'는 이슬람에서 유일한 숭배의 대상이다.

무함마드는 가난했던 삼촌 아부 딸립을 생각하며 수익성이 좋은 직업을 구했고 삼촌 아부 딸립의 소개로 부자였던 과부 카디자의 고용인으로 들어가 그녀를 대신해 시리아 지방으로 대상 무역을 떠나게 된다. 무 함마드의 이 무역은 큰 성공을 거두고 현재의 시리아 지방의 특산품을 구해 메카로 돌아왔다. 카디자는 무 함마드의 정직성과 신실함에 깊은 감명을 받고 15살이나 어린 무함마드에게 청혼을 하였다. 무함마드 25 세 카디자 40세에 둘은 결혼을 하였다. 부자였던 카디자와의 결혼은 무함마드에게 부와 명예를 주었고 무 함마드는 삼촌의 재정적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알리를 입양하였다.

무함마드의 결혼생활은 행복했으나 무함마드에게 불행이 닥치기 시작했다. 네 명의 딸은 잘 성장하였으 나 그의 아들들이 유아 때 계속 사망한 것이다. 당시 아라비아 사회는 건장한(몸이 크고 굳센) 남자가 대상 무역을 떠나 성공하는 것이 영웅시 되던 때였기에 건장한 사내아이를 선호하였다. 무함마드의 부와 명예 로 인해 사람들은 그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인 부는 그에게 여유를 주었고 무함마드는 금식하며 사색하며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함마드는 히라산 동굴에서 첫 계시가 임하게 된다. 무함마드는 겁에 질려 집으로 돌아와 죽은 듯 했 는데 부인이었던 카디자가 무함드를 진정시키고 자신의 삼촌이자 에비온파 기독교인이었던 와라까 븐 나 우팔에게 가 사정을 설명하였다. 와라까는 무함마드가 만난 것이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이었다며 무함마 드가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말하였다. 카디자는 집으로 돌아와 무함마드에게 삼촌이 말한 것을 모두 알려 주었고 그의 예언자직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무함마드)는 이슬람에서의 최초의 무슬림이 된다.

첫 계시를 받은 후 점차 무함마드의 양자들과 노예 그리고 친한 친구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였고 3년째 되던 해 무함마드는 자신의 친구와 친족을 모아놓고 단일신 알라(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게 된다. 하지만 친구와 친족들은 그를 비난하고 모욕하여 무함마드를 무시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메카로 오는 순례객들에게 단일신 사상을 전하기 시작했고 메카카바 신전을 지키며 순례객들로 수입을 얻었던 부족 원들이 무함마드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메디나로의 피신] 무함마드는 AD 619년에 큰 슬픔을 얻게 된다. 첫 무슬림 신자이자 자신의 큰 후원자였 던 부인 카디자가 죽은 것이다. 또한 자신의 방패가 되어주던 삼촌 아부 딸립도 그 해에 세상을 떠난다. 무 함마드는 고통속에서도 줄어들지 않는 박해와 핍박에 대항하기 위해 무슬림 공동체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 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핍박은 더욱 심해졌고 이를 피하여 622년 메카 북방 약 400km 떨어져 있는 메디나 로 갔다. 신도들도 이때를 전후하여 메디나로 피난, 그곳 협력자들(안사르)의 집에 수용되었다. 이 메디

행을 이슬람에서는 ‘히즈라("이주")’라고 하는데, 이 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메디나에 도착한 무함마드는 자신의 말이 멈춘 수하일의 과수원 땅을 사서 최초의 사원과 자신의 집을 지 었다. 그리고 메카를 향해 하루에 다섯 번씩 알라(하느님)는 위대하다고 암송하며 절했다. 무함마드는 메 디나에서 선지자의 권위를 확립하고 아라비아 부족의 통일을 꿈꾸기 위해 종교적인 일과 세속적인 일을 구별하지 않는 형태의 이슬람 조직 체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즉 제정일치의 사회를 무함마드는 추구 했다.

[메카정복] AD 628년 무함마드는 메카카바 신전을 순례하러 가기로 결정한다. 그해 3월은 아랍에는 신성한 달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지만 메카의 사람들은 무함마드가 전쟁을 하지 않을까 염 려하여 그에게 2년에서 10년까지의 평화조약을 요구하고 무함마드는 요구에 응한다. 그리고 2년 후
AD 630년 1만명의 무슬림은 무기를 지니지 않은 채
메카로 향하였고 결국 메카로의 무혈 입성을 이루 어낸다. 메카로 입성한 무함마드는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다)"를 외쳤고 무슬림들이 따라 외쳤다. 무함마드는 카바 신전의 우상들을 다 부숴버렸고 유일신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 는다고 공포했다. 그때 메카의 모든 집에 있던 우상들이 다 파괴됐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보름을 지내 고 메디나로 돌아와 이듬해 아라비아 북서쪽 타북 지방으로 원정을 떠났다. AD 632년 무함마드는 메카 카바 신전을 참배하고 메디나로 돌아오던 중 심각한 열병에 걸려 죽게 된다.

[무하마드 사후] [이슬람교 전파]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은 신도의 장로 중에서 교통(敎統)의 후계자인 칼리파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 비아 반도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633~664년 시리아·이라크·북부 메소포타미아·아르메니아·이란·이 집트 등에 이슬람을 전파하고 여러 곳에 기지도시(基地都市)를 건설하였다.

그 후에도 이슬람 전파사업은 계속되어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다시 711년부터는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였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인도 북서부까지 그 지배력이 미 쳤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중부까지 진출한 군은 732년 푸아티에 북방의 싸움에서 패퇴하였다.

아바스 왕조(750-1258) 초기 100년간은 칼리파 정권의 전성기였는데, 그 후 이베리아는 우마이야가 () 일파에 의하여 독립하고, 이어서 모로코·튀니스·중앙아시아·이란 동부·이집트 등에도 독립정권이 출 현하여 칼리파의 직할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투르크의 이슬람화] 10세기에 들어서자 921년 이후 볼가강 중류의 불가르족()이, 이어서 960년 이 래 톈산 산맥 남북로의 투르크족이 모두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아랍인, 이어서 이란인이 중 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투르크의 패권 밑으로 옮겨졌고, 10세기 말부터는 투르크가즈 나 왕조의 마호무드왕 등 이슬람교에서 투르크계가 패권을 잡고 확고한 기반에 놓였다. 1071년 아르메 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잔틴군을 격파하였다. 이 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 화·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13세기 말의 거의 2세기에 걸 친 십자군 전쟁이다.

[비잔틴 정복] 이와는 달리 셀주크 제국과 교체된 오스만 제국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 탄티노플을 공략, 비잔티움 제국(330-1453)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에 세력을 부식한 무슬림은 이곳을 기지로 하여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 방면에 선교를 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5~16세기 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정복과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이 퍼지기 시작하 여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나이저 강변의 서 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 왕국에까지 이슬람의 세 력이 미쳤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기독교도의 역정복이 진행되어 1492년에는 무어인의 최후 거점 인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마침내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였다.

소말리아, 코모로, 지부티 같은 일부 이슬람 국가를 제외하고는 국기에 빨강, 흰색, 초록, 검정만 넣는다. 빨간색은 국경을 넘어 아랍 세계를 이어주는 '혈연'을 상징한다. 흰색은 '정통 할리파(칼리파) 시대'를 상 징한다. 초록색은 사막 지대에서의 번영을 상징하던 색으로, 최초의 시아파 국가인 파티마 왕조의 상징 으로 쓰였다. 검은색은 아바스 왕조를 상징한다.

이슬람은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믿는 유일신 종교이다.

이슬람 교리는 매우 단순하게 여겨질 만큼 명료하게 정립되어 있다. 이슬람 교리는 이만(6가지 종교적 신앙)과 이슬람의 다섯 기둥(5가지 종교적 의무)를 기본으로 하며, 6신() 5행()이라 부르기도 한다. 개종을 위해서는 특정한 의식이나 재산의 희사 없이 신앙증언(샤하다)를 실시하면 된다.

이만(6신)이란 알라·천사들·경전들·예언자들·마지막 심판·운명론에 대한 여섯 믿음이다.
[다섯 기둥]
수니파 무슬림에게 다섯 기둥(Arkan-al-Islam)은 샤리아(이슬람법)에 근거하며 무슬림에 게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시아파에는 ‘종교의 뿌리’(Usul-ad-Deen)로 알려진 다섯 가지 믿음과 ‘종교 의 가지’(Furoo-ad-Deen)로 알려진 열 가지 의례가 있는데, 이 열 가지는 수니파이슬람의 기둥과 유 사한 것이다.

복장을 갖추고 메카로 순례 여행을 떠나는 무슬림

  • 샤하다 - 이슬람의 신앙 고백으로,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이다"라고 하는 일정 구절아랍어로 된 고백이다.
  • 살라트-매일5회의기도
  • 사움 - 이슬람력 9월(라마단) 한달 동안 일출부터 일몰까지의 음식 및 음료의 섭취와 성행위를 금한다.

또, 라마단을 잘 지키면 3일간 축제를 벌여 축하한다. 무함마드가 헤지라 때 도주 계획을 세우는데 머리 가 흐려지지 않도록 단식한데서 유래한다.

  • 자카트 - 일반적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자들의 재산의 2.5%나 농민들의 연 생산의 10-20% 정도이며, 이 돈이나 생산물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된다.
  • 하즈 - 이슬람력 12월(둘 힛자)에 이루어지며 경제적 신체적으로 능력이 있는 모든 무슬림이 일 생에 한 번 행해야 한다.

[기독교와의 공통점과 차이점]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동일한 절대자를 숭배하며, 천국지옥으로 나타 나는 사후세계를 믿는다는 점, 그리스도의 업적과 성경을 존중한다는 점 등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경우 기독교와 같은 원죄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쓰여지지 않은 책과 같아 서, 사회 환경과 교육에 의해 악한 길로 빠져들 뿐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존재로 본다. 또 한 기독교가 주장하는 '대속'의 개념도 부정하는데 개인이 저지른 죄는 자기 스스로가 신에게 회개함으 로써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아담과 이브는 순간적인 유혹에 넘어가 타락했지 만 결국 용서를 구하고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즉, 카인과 아벨의 죄, 그리고 그 후손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간의 죄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닌 그들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위대한 예언자로 존중한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신이 자신과 인간의 중재자 로서 선택한 여러 예언자 중 하나일뿐, 결정적인 예언자는 무함마드 한 사람이라고 본다. 성경 역시 신의 말씀이 일부 들어있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그것은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성직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변형 된 측면이 많다고 본다. 결국 이슬람교도들이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여기는 것은 '꾸란'이며, 꾸란은 앞으 로도 덧붙여지지 않을 완전한 형태의 성서이기 때문에 절대적이다.

이슬람에는 교리가 상반되는 200여 개의 종파가 있다. 그 중 주류는 수니파이다. 전 세계 무슬림의 83% 이상이 수니파에 속한다. 그 외에는 16%의 시아파와 신비주의자 수피파 그리고 이바디파 등 여러가지 종파들이 존재한다.

그 외에 여섯번째 기둥으로 간주되는 지하드 역시 교리로 인정된다. 지하드는 고투·노력이라는 뜻의 아 랍어로 신체가 건장한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다. 이는 이슬람 공동체를 비이슬람 공 동체로부터 지키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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