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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개발 경제 일반상식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수업 365 2.

by 비사벌 2024.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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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라스코 동굴 벽화

발견 : 1940년 프랑스 중부의 마을 몽티냑 인근 동굴에서 소년 4명에 의해서 발견
시기 : 1만 5000년에서 1만 7000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 대략 150점 동물 그림
인류가 그린 최초의 회화는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프랑스 중부의 조그만 마을 몽 띠냑 Montignac 남쪽 언덕에 자리잡은 라스코 동굴을 꼽는데, 수렵생활을 하던 구석기 시대 에 풀을 찾아 이동하던 초식 동물들을 뒤쫒아 따라다니며, 변변한 무기도 없이 사냥에 나서는 인류들은 어떤 주술적 염원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선사시대 생활을 엿 볼 수 있는 라스코 동굴!!!
라스코 벽화를 왜 그렸을까?
구석기인들에게 사냥은 생명과 종족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을 터인데, 사냥도구 가 발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돌칼을 들고 동물에게 덤벼드는 사냥은 늘 두려움과 공포가 존재 하였으리라.....

1963년에 폐쇄되었다가 1983년 대중들의 요구에 따라 라스코 동굴 200m 떨어진 곳에 실제 크기로 복제된 동물이 만들어졌다.

004. 복제

복제(複製)란 자연 상태의 생물 개체가 자신과 동일한 개체를 생산하는 것(무성 생식)을 뜻 한다. 생물 공학에서 말하는 클로닝이란 DNA 조각이나 세포, 유기체를 복제하는 과정을 의 미하며, 생물 복제, 생명 복제는 특별히 후자를 이른다. Clone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줄기, 가지를 뜻하는 κλῶνος에서 유래했는데, 잔가지를 이용해 꺾꽂이를 하는 전통적인 복제 방법을 뜻한다. 원예학에서는 20세기까지도 clone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한편 '클로닝'은 복 제 분기의 의미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나 소프트웨어에서도 종종 쓰이는 단어.

생물 복제 또는 생명 복제란 체세포 핵이식 또는 수정란 분할 등의 방법으로 유전 정보가 같 은 생명체를 복제하는 것이다. 생명 복제는 1996년 말 영국의 월머트 박사가 체세포 복제술 을 이용해 양 '돌리'를 탄생시킨 이후 국내에서도 1999년 2월 세계 5번째로 서울대 황우석교 수가 젖소 복제에 성공하였다. 2000년 8월에는 황우석 교수가 인간 체세포를 이용한 복제 실 험에서 배반포 단계까지 배양하는 데 세계 처음으로 성공

 

005. 음악의 기본 요소

음악 소리를 분석할 때 사용하는 기본 요소

  1. 음높이pitch:귀에들리는소리의높낮이정도.실제로음파의주파수즉파동이반복되는 빈도의 측정한다. 레샵과 미플랫은 음높이. 악보에 표시한 음높이를 가리켜 ‘음’.
  2. 음계 scale : 도-레-미-파-솔-라-시-도처럼 음높이 차례로 음을 배열한 층계를 음계라고 하며 대개 멜로디의 기본을 이룬다. 장음계 ‘밝고 쾌활하고 긍정적인 느낌’와 단음계 ‘어둡거나 슬프거나 부정적인’ 음악을 묘사.
  3. 조key:장음계나단음계중하나를바탕으로한음배열또는음체계로서,멜로디를만드는 기준점이자 이끄는 힘으로 작용한다. 마장조

악곡의 운율 분할을 표시하기 위해 소절로 나누고 음높이를 확인하기 위한 기준점으로 음자 리표를 오선의 시작부분에 표시.

곡이 기본 조에서 벗어나는 것을 조바꿈.

 

006. 겉모습과 실체

겉모습과 실체를 구별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한 철학적 주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겉모습과 실체를 구별하는 것을 사상의 중심에 두었고,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겉모습과 실체는 다르다고 믿었다.

  1. 탈레스는 만물의 근본은 물, 헤라클레이토스는 불로 이루어졌다고 했으며 만물이 끊임없이 운동한다고 생각.
  2. 파르메니데스는 실제로 움직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

겉모습과 실체의 구별은 회의주의라고 알려진 유서 깊은 철학 전통에서도 중요한 주제

임마누엘 칸트 역시 겉모습과 실체의 차이에 대해 그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이른바 ‘물자체 (thing-in-itself)를 구별

007. 토라

토라 Torah : 히브리 성경의 첫 다섯 편. 모세 5경. 구전으로 전해지기도 하고 여러 문서를 아 우르는 유대교 율법 전체를 뜻함.
구약성경 : 토라와 다른 유대교 문서.
모세 5경은 유대교를 다스리는 613조 율법의 기초가 되며, 세계 3대 일신교 신앙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기본 경전.

  1. 창세기 : 천지 창조와 이스라엘 민족,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그들의 가족의 역사
  2. 출애굽기 : 모세가 십계명을 받는 것을 포함해 이집트에서 가나안 지방으로 탈출하는 이야기
  3. 레위기:예배의식과규칙
  4. 민수기 : 이스라엘 민족이 겪은 황야에서의 생활 이야기
  5. 신명기 : 모세가 말년에 설파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윤리적 가르침으로 구성

탈무드 : 유대교 랍비들은 토라와 구전 내용을 계속 논의하고 토론하여 그 과정에서 그들의 주장을 집대성해 만든 것.

 

 

008. 함무라비 법전

함무라비 : 이란에 세워진 고대 바빌로니아의 왕. 기원전 1792년부터 기원전 1750년까지 통치하면 서 여러 경쟁 국가를 정복. 역사 최초의 법률가.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전으로, 아카드어가 사용되어 설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우르남무 법전 등 100여년 이상 앞선 수메르 법전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으로 알려져 있었 다.

1901년프랑스이란의 합동 발굴팀이 이란의 서남부, 걸프 지역 북쪽에 있는 고대 도시 수사에 서 발굴하였다. 높이 2.25m의 검은 현무암의 돌기둥으로 윗부분은 부조가 새겨져 있고, 아랫부분
아카드어 쐐기문자가 새겨져 있다. 설형문자의 고전기(古典期)의 것으로서, 메소포타미아 지방 에서 1000년에 걸쳐서 시행되었다. 법전은 서문, 본문 282개조, 맺음말로 되어 있다. 고대 법전으로 서는 희귀하게 사법(私法)의 영역에서 종교를 떠나 법기술적인 규정을 발달시켰으며, 특히 채권법 은 내용적으로 진보된 것이었다. 형법에서는 ‘눈에는 눈으로’의 탈리오의 원칙이 지배하고 있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거의 원형대로 발견되었으며, 돌기둥에 설형문자로 씌어져 있어 “설형문자법계”의 연구를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12표법이나 헤브라이 법 등 여러 고대법의 비교법사적(比較法史 的) 연구를 발달시켰다.

함무라비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몇 가지 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땅에 있는 나무를 베었다면 그에 대해 변상해 주어야 한다.
  • 어떤사람이자신의을대려고하다가부주의한사고로다른사람의이차게 만들었다면 그는 자신이 망가뜨린 곡식에 대해 변상해 주어야 한다.
  • 어떤사람이자신의아들을쫓아내고싶다면먼저재판관앞에가서"더이상내아들과함에서 살 수 없습니다."하고 말해야 한다. 재판관은 그 이유를 살펴보고 합당하지 않으면 아들을 내쫓을 수 없다.
  • 아들이 아버지에게 못된 짓을 했다면 처음에는 아버지가 용서해 주지만 두 번째로 나쁜짓을 하면 아들을 내쫓을 수 있다.
  • 도둑이,당나귀,돼지,염소중하나라도훔쳤더라도그값의열배로보상해주어야 한다. 도둑이 보상해 줄 이 없다면 사형당할 것이다.
  • 에는눈,에는이.어떤사람이다른사람의을멀게했다면그자신의눈알을뺄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이빨을 부러뜨렸다면 그의 이도 부러뜨릴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를 부러뜨렸다면 그의 도 부러뜨릴 것이다.
  • 의사환자수술하다가 환자가 죽게 되었다면 의사은 잘릴 것이다.
  • 건축가을 지었는데 그 이 무너져 주인이 죽음을 당하면 건축가사형에 처한다. 만약 집주인의 일가족이 죽었을 경우에는 목수의 가족중 해당되는 이가 죽어야 한다.
  • 강도가어떤에구멍을뚫고들어가물건을훔쳤다면그구멍앞에서죽음을당할것이다.
  • 만약 어떤 사람을 사형에 처할 만하다고 하여 고소하고도 이것을 입증할 수 없다면, 고소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 궁중의남녀노예혹은자유민의남녀노예를성문밖으로도주시킨자는사형에처한다.
  • 만약 새로이 아내를 들이고도 그에대한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인에 대한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
  • 어느노예라도그가주인에게"이자는나의주인이아니다"라고말한다면,주인은자기소유의 노예임을 입증하고 그 귀를 자를 권리를 가진다.
  •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면 두 손을 자른다.

009.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년)

미국 육군 상사 예편한 미국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헤밍웨이의 실속 있고 절제된 표현 방식 은 20세기 소설에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모험적인 삶과 대중적인 이미지 역시 후대에 영향을 크게 끼쳤다. 헤밍웨이는 대다수의 작품을 192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발표하였고,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헤밍웨이는 7개의 소설, 6개의 단편소설 모음집, 그리고 2개 의 논픽션 작품들을 출판하였다. 3개의 소설, 4개의 단편소설 모음집, 그리고 3개의 논픽션 작품들 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헤밍웨이의 대다수의 작품들은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다. 헤밍웨이는 일리노이주 오크 파크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헤밍웨이는 고등학교를 마친 이후 이탈리 아의 전방 군대에 입대하여 구급차 운전사가 되기 전에 《캔자스 시티 스타》에서 몇 달 동안 기사 를 썼다. 1918년에 심하게 부상을 입은 헤밍웨이는 집으로 되돌아왔다. 헤밍웨이가 겪은 전쟁 경험 은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1921년, 헤밍웨이는 그의 4명의 아내 중 첫 번째 아내인 해들리 리처드슨과 결혼하였다. 부부는 헤 밍웨이가 해외 특파원으로 근무한 곳인 파리로 이사를 가게 된다. 헤밍웨이는 파리에서 소위 ‘잃어 버린 세대’라고 불리는 1920년대 근대주의적 작가들과 미술가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26년에는 그의 첫 소설인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출판한다. 1927년 해들리 리처드슨과 이혼한 뒤, 헤밍 웨이는 폴린 파이퍼와 재혼을 한다. 둘은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해외 특파원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후 이혼하게 되고, 헤밍웨이는 내전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를 쓴 다. 1940년, 헤밍웨이는 세 번째 아내인 마사 겔혼을 만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런던에서 메리 웰시를 만난 후에 이혼을 했다. 헤밍웨이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파리 해방 전투에 참여한다. 1952년에 《노인과 바다》를 출판하고 난 이후에, 헤밍웨이는 아프리카의 사파리로 떠난다. 그 곳 에서 두 차례의 비행기 사고를 당한 그는 남은 생의 대부분을 병과 함께 지낸다. 헤밍웨이는 1930년 도에는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 거주했고,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는 쿠바에서 거주한다. 1959 년에는 아이다호주 케첨에 위치한 집을 구입하였고, 1961년 여름, 헤밍웨이는 그 곳에서 자살로 삶 을 마감한다.

겁을 먹는 것과 까닭없이 불안한 두려움은 확실히 구별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단지 상상 력의 기능을 한때 중단시키는 능력의 결여로 보면 된다. -헤밍웨이

그것을 하러 나는 왔다. 그것만을 생각하면 된다. -헤밍웨이

기회는 자기를 웃게 만들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미소를 보내는 숙녀다. 쇠가 달아 있을 때에 두드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보다 좋은 것은 쇠를 두들겨서 달구는 것이다. -헤밍웨이

나는 이제까지 땅을 사랑해 왔다. 땅은 언제나 인간보다 좋은 것이다. 인간은 일시적으로 겨우 소수 의 사람들밖에 관심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헤밍웨이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조심성이 많아질 뿐이다. -헤밍웨이

도덕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좋게 느끼는 것이요, 부도덕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나쁘게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도덕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이다. -헤밍웨이

만일 우리가 여기서 승리한다면 어느 곳에서도 승리할 것이다. 이 세상은 멋진 것이며, 싸워 볼 만 한 가치가 있기에 나는 이 세상에서 떠나기를 대단히 싫어한다. -헤밍웨이

사람은 모든 길을 갈 수는 없다. 성공은 한 분야에서 얻어야 하며, 우리 직업은 오직 하나의 인생 목 표로 삼아야 하며, 다른 모든 것은 이것에 종속되어야 한다. 나는 일을 어중간하게 하는 것을 싫어 한다. 그것이 옳으면 대담하게 하여라. 그것이 그르면 하지 말고 버려라. 이상을 가지고 산다는 것 은 성공적인 삶이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다. -헤밍웨이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 헤밍웨이

성공에 불가결하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인격이다. 인격이란 순화된 습성, 훈련의 결과 및 신념을 말한다. 모든 인격은 유전, 환경 및 교육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지니고, 모든 사 람이 자신의 인격을 개척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숙명론자, 즉 환경에 예속된 무책임한 존재가 되 고 말 것이다. -헤밍웨이

아담 클라크는 성서 주해를 쓰기 위해 40년을 보냈다. 조지 반크로프트는 미국 역사를 쓰기 위해 26 년을 보냈다. 아이작 뉴턴은 새벽 2시전에는 절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으며,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 다'의 원고를 80번이나 되풀이해 읽어보았다.

인간은 죽을지는 모르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 -헤밍웨이

자기 불신은 우리들이 실패하는 대부분의 원인이다. -헤밍웨이

잘못 통치된 국가를 위해 첫째의 만능약은 통화 팽창이다. 둘째는 전쟁이다. 두 가지 모두 일시적 번영을 가져오기도 하며, 영원한 파멸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정치적, 경제적 기 회주의자들의 피신처가 된다. -헤밍웨이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 태양이 저녁이 되면 석양이 물든 지평선으로 지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떠 오른다. 태양은 결코 이 세상을 어둠이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태양은 밝음을 주고 생명을 주고 따스함을 준다. 태양이 있는 한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희망이 곧 태양이다.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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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네페르티티 흉상

네페르티티(Nefertiti、NeFeRTiTi, 기원전 1370년경 - 기원전 1330년경)는 이집트 제18왕조파 라오 아크나톤(아멘호텝 4세-태양의 신 아톤을 섬기는 자)의 왕비이자, 투탕카멘의 이모이다. 이집 트 귀족 출신으로 왕과 같이 태양신 아톤을 찬미했다. '미녀가 왔다'라는 의미의 이름대로 1914년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석회석 채색 흉상(베를린 알테스 박물관 소장)은 사실의 화려함을 잘 나타 낸 당대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미완성의 두상(이집트 박물관 소장) 또한 그의 화려한 미모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아크나톤의 치세 말기에 왕의 총애를 잃고 왕궁에서 물러났지만, 기원 전 1334년아크나톤이 사망하고, 투탕카멘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대신하여 약 2년간 나라를 다 스렸다.

네페르티티의 부모가 누구였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녀의 부모에 관한 내용은 두 개의 설이 있는 데, 하나는 후에 파라오가 되는 대신관 아이(Ay)와 그 아내 테이(Tey) 사이에 낳은 딸이라는 설과 미 탄니 왕녀 타두키파(Tadukhipa)가 그녀라는 설이다.

제19 왕조에 들어서면서, 아크나톤의 종교혁명은 부정되어 파라오 아크나톤의 존재 그 자체가 기록 에서 삭제되었다. 그녀의 남편인 아크나톤은 후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장인이다. 또 일설에는 투탕카 멘 대신 그가 섭정을 했던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녀의 딸 중 메리타톤스멘크카레왕의 정비였고, 안케세나멘은 아버지인 아케나톤과 결혼했다 가 다시 이복동생인 투탕카멘의 왕비가 되었다.

011. 에라토스테네스(기원전 276~194년)

고대 그리스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헬레니즘 시대 이집트에서 활약했으며, 문헌학 지리학 을 비롯해 헬레니즘 시대 학문 다방면에 걸쳐 업적을 남겼지만, 특히 수학천문학의 분야에서 후 세에 남는 큰 업적을 남겼다.

지구의 크기를 처음으로 계산해 냈으며, 또 소수를 걸러내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를 고안한 것으로 도 알려져 있다. 이런 업적으로 제2의 플라톤이라고도 불렸다. “베타”(β)란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 다. "그를 시기하고 경쟁의 상대로 여겼던 어떤 사람은 그를 '베타'라고 불렀다고 한다. 베타는 알다 시피 그리스 어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무슨 일을 하든 그 분야에서 여지없 이 세계 둘째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베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라토스테네스가 손을 댄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는 '베타'가 아니라 아주 확실한 '알파'(α)였다."

그리스인들은 지역에 따라 북극성의 높이가 다른 사실 등을 근거로 지구가 공처럼 둥글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시에네(현재의 아스완)에서는 하지날에 태양빛이 우물의 바닥까지 닿 는다는 것을 전해 듣고, 즉 해가 가장 높이 떴을 때의 고도가 90도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 고 이로부터 지구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하지날의 남중 고도는 82.8도이며, 이 차이가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의 위도의 차에 따른 것이며, 이를 이용하여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었다.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의 거리는 5000 스타디아(미터법으로 925킬로미터)이며, 비율까지 계산하여 지구의 둘레는 250000 스타디아 차이(46,250킬로미터)라고 구했다. 그러나 당시 스타디아의 길이 가 엄밀하게 정해져 있던 것도 아니고, 측정 자체도 걸음수를 이용한 대략적인 것으로, 그가 실제로 어느 정도의 정확도로 지구의 둘레를 구한 것인지를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문헌에 따라서 종 종 스타디아와 미터의 변환시에 자의적인 수치를 이용하여, 매우 정확히 측정한 것처럼 언급되는 경 우도 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5가지의 가정을 하였다.

  1.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와 시에네(Syene, 현재의 아스완)의 거리는 5000 스타디아(미터법으로 925km).
  2. 알렉산드리아는 시에네의 정북쪽에 있다.
  3. 시에네는 북회귀선에 있다.(시에네의 하짓날 정오에 햇빛이 지면에 수직으로 비춘다.)
  4. 지구는 완전한 구형이다.
  5. 지구로 들어오는 태양광선은 평행하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 크기 측정이 정확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지구는 완전한 구형이 아니라 적도쪽이 조금 더 부푼 타원체 이다..
  2.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는 동일 경도 상에 위치하지 않는다.
  3. 3. 두지점사이의거리를구한값에오차가있었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는 에라토스테네스가 고안했다고 여겨지는 소수 판정 방법으로, 자연수를 순서 대로 늘어놓은 표에서 합성수를 차례로 지워나가면서 소수 목록을 얻는 것을 말한다. 알고리즘의 예 제로도 유명하다. 어떤 수가 소수인지 판별하는 방법들 중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방법이 바로 에라 토스테네스의 체이다. 고대에 고안한 이 방법이 현재까지 수학자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 는 생각을 해보면 그의 수학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위도, 경도, 음계, 소수 등 오늘날 사용하는 많은 개념들이 에라토스테네스가 고안.

에라토스테네스의 체 / 알고리즘

  1. 2부터 소수를 구하고자 하는 구간의 모든 수를 나열한다. 그림에서 회색 사각형으로 두른 수 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2. 2는 소수이므로 오른쪽에 2를 쓴다. (빨간색)
  3. 자기 자신을 제외한 2의 배수를 모두 지운다.
  4. 남아있는 수 가운데 3은 소수이므로 오른쪽에 3을 쓴다. (초록색)
  5. 자기 자신을 제외한 3의 배수를 모두 지운다.
  6. 남아있는 수 가운데 5는 소수이므로 오른쪽에 5를 쓴다. (파란색)
  7. 자기 자신을 제외한 5의 배수를 모두 지운다.
  8. 남아있는 수 가운데 7은 소수이므로 오른쪽에 7을 쓴다. (노란색)
  9. 자기 자신을 제외한 7의 배수를 모두 지운다.
  10. 위의과정을반복하면구하는구간의모든소수가남는다.

012. 멜로디

선율이라고도 부르며, 화음과 리듬과 더불어 음악의 3대 기본 요소인 멜로디는 한 가지 악기나 여러 악기로 연주할 수 있다. 음악적인 소리를 낼 수 있는 순서로 음이 연속적으로 배열한 것

선율(旋律)은 음이 리듬을 가지고 연속적으로 울리는 것.
중세 시대의 많은 작곡가들은 15세기 프랑스 곡 ‘무장한 남자’ 같은 기본 멜로디를 공유하고 작품의

중심 테마로 사용했다.

 

013.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년)

고대 그리스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등 에 의해 '신성 모독죄' 와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 로 기소당하고 기원전 399년에 69세의 나이로 사약 을 마셔 사형을 당했다.

흔히 공자,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불린다. 실존철학의 거장인 카를 야스퍼스의 저서 위 대한 사상가들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 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 이라 평하였는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이다. 플라톤이 20대인 시절,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에 의해 끝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했으며, 이는 그의 귀족주의(철인정치) 지지의 큰 계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크라 테스의 증손 제자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 과 달리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소크라테스 문제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글을 쓴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 자신과 생애, 철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 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톤의 기록이며, 그 밖에도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런 저작들은 정 확한 사실이 아닌 철학 또는 극적인 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소크라테스를 알기는 어렵다. 당대 고대 그리스에서 투퀴디데스(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나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한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업적에 대하여 정확하고 일관성있는 역사를 쓰기 위해 당 대 인물들이 쓴 여러 사료들을 일치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다만 일관성을 갖추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 학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하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일부 저작에서 플라 톤은 자신이 저작속에서 구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실제 소크라테스의 언행보다 더욱 미화시키 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저작이나 유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단지 플라톤이 날조한 인물은 아님이 드러난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
구름'은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일반 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소크라테스 생애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해산술을 업으로 하던 파이나레 테를 어머니로 하여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철학·기하학·천문학 등을 배웠고, 중장보병에 편입되어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한 일이 있고,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개인주의적·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 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 고 하였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 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 표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 피오스에게 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사상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 없는 소크라테스의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 네스, 라이르티우스, 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피의 신탁인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 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하던
소피스트상대주의회의주의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장인이 아레테(ἀρετή, 훌륭함, 탁월함이라는 뜻)를 발휘하려면 자신의 기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듯, 인간으로서의 아레테, 즉 덕을 발휘하려면 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방법으로
제논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 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다이몬 은 일종의 귀신에 포함됨)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 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는 대화를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고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 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 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도덕론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테네 민주주의가 부패하던 시기였고, 이로 인한 개인윤리 타락이 극심한 시대였다. 그는 여러 악덕을 '무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덕은 이성적 사고의 기초 하에 생겨난다. 또한, 덕의 확대는 사회를 더 이성적인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점이다. 또한, 이성의 냉소로 인한 부덕함이란 개념 자체를 비판했다. 그는 악덕한 자는 필연적으로 앎이 부족한 무지한 상태에 있다고 봤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냉소적 이성'은 성립할 수 없 다고 봤다. 그의 이러한 지행합일론은 그가 윤리·도덕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실제 로 그는 일상 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했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청년들을 무료로 가르쳤 다. 그리고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사후 '스 토아학파'에 의해 계승됐으며, 기독교의 윤리관에도 큰 영향을 줬다. 그러나 이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 다. 왜냐하면 그리스 철학이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기독교 윤리관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영혼 중심적 사고
소크라테스는 육체-영혼 이원론자였다. 그는 육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그저 껍데기일 뿐이고, 만 지식은 영혼 안에 내재된 개념이라고 봤으며, 영혼은 불멸한다고 봤다. 인간은 영혼을 소유한 존재 이지만, 육체의 감각적 요소에 의해 영혼에 내재된 진리를 통찰하는 것을 계속 방해 당한다고 봤으며, 그는 이를 극복하면 만 지식을 얻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극복 방법은 바로 이성적 사고에 기 초한 산파술로 감각으로 인해 얻은 여러 '오류'를 하나씩 잡는 것에 있다고 봤다. 이러한 신념에 기초 하여 그는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봤기 때문에 '죽음'을 긍정하기도 했다.


변론과 크리톤
'
악법도 법이다'(라틴어: Dura lex, sed lex)라는 말이 회자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런 말을 했다 는 증거가 없다. 이 경구가 처음 등장한 것은 로마시대이며 말한 사람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로 기 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 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법 이상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했던 몇 가지 사례들이 있다. 반면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국외 추방을 제의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동의한 절차적 정당성을 뒤늦게 훼손할 수 없다고 친구 인 크리톤에게 밝힌다. 그러나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평소의 냉정한 변증법적·이성적 논법을 구사하지 않고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모습으로 크리톤을 설득하고 있기에 이는 진의를 모두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변론》과 《크리톤》의 이런 모순적인 모습 중 《크리톤》에 실린 모습이 과장되어 《변론》에 담 긴 법령 불복종자로서의 모습을 누르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는데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삶과 철학에 비 추어 볼 때 이런 말은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진리조차도 회의하고 가짜로 드 러나는 순간 바로 폐기시키는 엄중함이 있는데, 기껏해야 인위적인 실정법을 무조건 옹호할 수는 없 는 것이다. 이는 철학과 법의 기본 성격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다.


산파술
소크라테스는 구두언어 - 흔히 당대에 로고스(Logos)라 불리던 - 의 형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 자 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구두언어는 지(
)의 매개인 정신을 다른 상대방에게 전하는 유일한 운 송 수단으로 봤다. 즉, 그에게 있어서 구두언어는 현대의 관점에서 말하는 단순한 규칙적인 음파의 개 념이 아닌, 발화자의 사유 자체를 어떠한 오류도 없이 밖으로 내보내서, 듣는 이의 사유에 영향을 주 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했는데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즉각적 인 답을 주는 것보단 거꾸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선호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의견이 무지에 기인 한 의견 또는 그에 준하는 단견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만 지식을 알지 않는 한 단견으 로 토론을 중지시켜서 '앎의 변증'을 멈추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질문에 서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끝 없이 질문했으며,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진리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미적 범주
소크라테스는 미학적인 범주를 적어도 세 가지로 나누었다. 그 세 범주는 부분의 조립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미', 시선을 통해 영혼을 표현하는 '정신적인 미', 그리고 '유용한(혹은 기능적인) 미’ 이다.


영향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키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 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수도원 운동에 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직접 책을 쓴 일이 없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으나 그가 철학의 방 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을 낳았다. 또한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 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소재가 되었다.

014. 노아(구약성서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에 나오는 놀라운 인물)

노아(Noah)는 이스라엘아랍의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자 성경 구약성서창세기의 홍수이야기 (창세기 6:5-17)에 나오는 인물이다. 구약 창세기 4장과 5장에 따르면, 노아는 아담과 하와의 셋째 아 들인 의 후손이다. 성경의 창세기 5장에 따르면, 노아의 아들은 · · 야벳의 3명이다. 아담─셋─에노스─게난(카이난)─마할랄렐─야렛─에녹-므두셀라─ 라멕(아버지)으로 이어지는 데, 구약성경 창세기 5장에 의하면 그는 아담의 9대손이다.

우상숭배와 죄악, 타락이 만연하자 야훼는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 경고하였으나 듣지 않자, 홍수로 심 판할 것을 계획하고 경고하였다. 야훼는 노아에게 홍수심판계획을 알리며 방주를 만들라고 하였다. 또 한 노아에게 대홍수와 재앙이 다가올 것을 사람들에게 예언하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아 가 말하는 대 재앙의 예언을 모두 무시하고 흥청망청 세월을 보냈다.

언제 홍수가 닥칠 것인지 정확히 예언할 수 없었으나 노아는 100여 년 이상 방주를 만들고 동물들과 자신들의 가족들을 태워서 백오십일간의 홍수에서 구원받았으나, 그의 말을 무시하던 사람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때 노아의 내외와 아들 · · 야벳의 3명의 내외을 비롯한 딸들과 사위 들 등이었다.

40일 째에 비둘기 한마리를 밖에 내보내니 바로 돌아왔고, 그로부터 며칠 시간이 흐른 뒤에 비둘기를 내보내니 시간이 경과한 뒤에 되돌아왔고, 백일 또는 백오십 일이 경과한 뒤에 비둘기를 내보내자 돌 아오지 않았다. 방주의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 노아는 홍수가 물러갔음을 확인하고 방주에서 가족들 과 동물들을 데리고 나왔다. 다른 전승으로는 노아와 일가족과 동물들을 각 한쌍~여러 쌍을 실은 방 주를 타고 높은 산 지대의 동굴에서 피난하며 홍수가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나왔다고도 한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노아가 방주를 만든 기간이 나타나있지는 않으나, 유대와 아랍의 전승과 유대교 의 랍비들에 의하면 노아는 100년에서 120년의 기간 동안 방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세 아들 중 · · 야벳 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함 족의 시조이고, 그의 장남은 함 족이 되었 으며, 의 다른 아들 가나안은 가나안 족의 시조로, 은 함 족과 가나안 족, 두 부족의 선조가 된다.

그런데 농사철 중 술에 취해 벌거벗은 그를 발견한 함이 형제들에게 알려서 헝겊을 가져다가 부친의 하체를 가렸으나, 이를 부끄러워 한 노아가 역으로 자신을 최초로 발견한 아들을 찾아내 저주를 했다 고 한다. 이는 구약 성경에도 등장한다.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설에 의하면 홍수 후에 그는 300여년 이상을 더 살았고, 사망할 때의 나이는 향 년 900세 설과 950세 설, 1천 세 정도 까지 살다가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창세기 6장에는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다고 하고, 이슬람교의 코란에 의하면 1천 세라 한다.

성경속의 노아
구약 성경에 따르면, 야훼는 죄악이 만연한 세상을 한탄하며, 물로 심판하고자 올바른 사람인 노아에 게 홍수심판계획을 알려 방주를 만들라고 하였다. 노아는 100년 이상 방주를 만들고 동물들과 자신들 의 가족들을 태워서 364일간의 홍수에서 구원받았으나, 밖에 있던 모든 창조물들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방주는 물이 빠지는날 아라라트 산 등마루에 머물렀다. 노아는 물이 얼마나 빠졌는지 알기 위해서 까 마귀비둘기를 보내서 확인했는데, 올리브 이파리를 물고 있는 것을 보고 뭍에 나왔다. 가족과 동물 들이 방주에서 나온 후, 노아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제사를 받은 하느님은 복을 주면서 번성하 라고 하였다. 그리고 무지개를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의 징표로 주었다.

후에 그리스도는 임박한 종말을 설교하면서 노아때의 일을 생각하라고 하였다.(마태오 24:37) "옛날 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베드로 의 첫째 편지 3:20)처럼 종말의 때에도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하였다.

기독교의 노아

누가복음서 17장 26절에서는 노아의 홍수를 다가오는 심판의 날과 동등하게 다루고 있다 - "노아의 날과 같이, 인자가 올 날도 올것이라". 베드로후서 2장 5절에서는 노아를 "정직함의 설교자"로 불렀 고,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는 방주와 함께 생명을 건짐을 세례의 힘을 구함과 동등하게 다루었다. 후 기의 기독교인들은 방주는 교회를 예표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 구원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복 음 안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노아 때는 방주 안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유대교의 노아

노아의 정직은 랍비들 사이에 의논이 되는 사항이다. 노아를 "그 세대에서의 도덕적인 올바름"이라 하 는 묘사는 그의 완벽함이 단지 상대적이라는 것을 함축하였다 - 그 예로 그들은 아브라함소돔고 모라를 위하여 빌었던 것과 비교하여, 노아는 홍수가 터지기 전에 야훼께 기도드리지 않았다는 걸 지 적하였다. 노아는 야훼께 말씀을 드리지 않고, 단지 야훼의 말씀을 듣고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이 사항은 이웃을 무시하고 자신의 편함을 지킨 노아의 제사를 "모피 옷을 입은 남자"로 주석하고 있 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중세의 주석자 라시(Rashi)는 방주를 짓는 데 12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으며, 신중히 악인들에게 후회하는 시간을 주었다고 반대하고 있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서술문에 나온 노아 의 이름을 "이것은 야훼가 저주내린 땅으로부터 우리 일과 우리 손의 쓰라림에서 편하게 해줄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슬람교의 노아

코란에서는 총 28개의 수라("장")에서 노아를 총 43회 언급하고 있다. 주로 수라 11(후드의 장)과 수라 71(누의 장)에 언급되어 있다. 수라 11은 대체적으로 홍수 이야기를 담고 있다. 28개의 절로 이루어진 수라 71에는, 사람들에게 큰 벌이 내려지기 전에 먼저 경고하라고 알라가 노아에게 명하였고, 이에 노 아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던 동시대인들에게 알라일신교에 대해 밤낮으로 설교했으나 사람들은 노 아의 설교를 비웃을 뿐이었으며, 그러자 노아는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어 회개하려고 하지 않는다 고 알라에게 어려움을 토로하였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코란에 따르면 노아는 총 1,000년을 살았고, 홍수가 일어났을 때에는 그의 나이는 950세였다. 그러나 노아가 만취한 것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다.

시아파 교도들은 노아가 이라크 나자프에 있는 이맘 알리 모스크 안에 알리의 옆에 안장되었다고 믿 고 있다.

 

015. 스파르타 대 아테네 : 고대 사회 패권 다툼(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스파르타: 소수의 도리아인 다수의 본토박이 인을 노예로 만들고 지배함. 학문/예술은 몰라도 힘에선 아테네에 뒤지지 않음. bc6기에 남부 펠로폰네소스반도 도시문맹과 동맹을 맺음.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

아테네: 그리스의 원주민-이오니아인(메소포타미아문명을 갖은 황인종)
스파르타: 10c전후 북쪽 에서 밀고 들어온 세력.(동유럽의 러시아 남부 초원의 지대에서 서진해 내려 온 백인계열-백인 스키타이)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공통점

1. 기원전 8세기경에 성장한 도시국가(폴리스)의 대표였다. 2. 약간씩은 민주주의를 함
3. 민족의식이 강해 올림피아 제전을 개최했다
4. 신분사회였다.(귀족, 시민, 노예, 외국인 등)

5. 맺은 동맹이 있었고 동맹의 맹주였다(전쟁이 일어났음)
6. 아크로 폴리스(신전-군사적, 종교적 중점),아고라 로 이루어짐
7. 그리스 본토에 위치하였다.
8. 험난한 지형인 산지로 인하여 교류가 별로 없었음
9. 나중에 서로 대립하여 마케도니아의 정복당해 그리스의 쇠퇴를 불러일으킴 10. 지중해 패권이 거의 모든 전쟁의 원인이 되어서 싸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차이점.
1 . 아테네는 해상 무역과 상공업의 발달로 인해 생겨난 강력한 민주정으로 정치했으나

반면에 스파르타는 혼합(군국, 민주)의 정치를 했다
2. 아테네는 민주국가였으나 스파르타는 엄격한 훈련아래 만들어진 군사국가.
3. 아테네의(그리스)문화는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중심적 문화인데 반해 스파르타는 군사 양성에 중심을 두었으므로 이렇다 저렇다 할 문화가 없었다고 한다
4. 아테네는 이오니아인이었으나 스파르타는 도리아인이었습니다.
5. 아테네는 해상국가였으나 스파르타는 육지 쪽에 있던 국가였습니다.
6. 아테네의 산업은 해상무역이었으나 스파르타는 농업위주였습니다.
7. 아테네의 군사는 해군이었으나 스파르타는 육군 이었습니다.
8. 아테네는 민주정치로 인해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창의적 문화가 발달했으나 스파르타는 보수적이 고 폐쇄적이어서 군사적 문화밖에 없었슴다.
9. 아테네는 피정복민 들이 많지 않았으나 스파르타는 대부분이 피정복민 위주였다고 함.
10.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11. 아테네의 노예는 개인소유였고 시민보다 소수였으나 스파르타의 노예는 국가 소유였고 시민보 다 다수였다.
12.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는 지고 스파르타는 이김.
13. 아테네의 대표적 전쟁은 페르시아 전쟁이고, 스파르타의 대표적 전쟁은 펠로폰네소스전쟁이다.

 

016. 할렘 르네상스 Harlem Renaissance

1920년대 미국 뉴욕의 흑인지구 할렘에서 퍼진 민족적 각성과 흑인예술문화의 부흥을 가리킨다. 니 그로 르네상스라고도 한다. 이는 흑인의 목소리가 집단으로 표출되고 백인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하 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흑인 인구의 '대이동'(Great Migration)은 할렘 르네상스의 중요한 배경을 이루 고 있다. 당시
미국 흑인의 총 인구 천여 만 명 중에서 20%에 달하는 200만 명이 남부에서 북부 또는 중서부로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이는 북부 도시로의 흑인 인구의 이동이 이민 규제의 강 화와 함께(1924년에는 강력한 이민법이 제정됨) 노동력이 감소하고,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산업 팽창으로 노동시장이 확대됨으로써 싼 노동력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이러한 배경 은 농촌의 단순하고 동질적인 삶에서 도시의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흑인 인구의 대이동과 관련하여 할렘같은 대도시에서 이루어진 게토의 공동체 생활은 할렘 르네상스 를 가속시킨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과거의 남부 농촌생활에서는 흑인들 간의 유대의식이 같은 조 건 밑에서 같은 문제로 고통 받고 있다는 비교적 단순하고 추상적 차원의 것이었던 반면, 도시 게토의 공동생활에서의 유대의식은 현실적이고 복합적이었다.

1920년대의 흑인 작가들은 전보다 더 낙관적으로 흑인들이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추구 할 수 있는 환경이 곧 조성될 것으로 믿었다. 이와 같은 낙관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카터 G. 우드 슨(Carter G. Woodson), 알레인 로크(Alain Locke) 등과 같은 흑인 지식인들의 노력과 더불어, 백인 들이 갖기 시작한 흑인 문화에의 관심 때문이었다. 로크는 젊은 흑인 작가들에게 예술적 소재 및 형태 를 흑인의 역사, 문화, 경험에서 찾으라고 강력히 권고하였다. 반면, 제1차 세계대전을 성공적으로 끝 낸 결과로 생긴 인도주의적인 관심, 혹은 자유분방한 이국적 원시인의 살아 있는 본보기를 흑인이라 고 생각한 백인들은 흑인 문화, 특히 흑인 음악과 뮤지컬을 찾아 즐겼다. 이러한 흑인의 노력과 백인 의 관심에 고무되어 많은 젊은 흑인 작가들이 전례 없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이들의 활동이 주로 뉴욕의 할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할렘이 흑인 예술 활동의 중심지로 자 리 잡게 되었고, 이 때문에 1920년대를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로 부르기도 한다.

할렘 르네상스 시기의 흑인 작가 및 지성인들 모두가 낙관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흑인들에게 있어 서 1920년대는 사회적, 정치적 암흑기였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는 미 국에서는 아무런 꿈도 실현할 수 없으니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빈민층 흑인들에게 막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반면에 진 투머(Jean Toomer)는 그가 남긴 유일한 작품이면서 할렘 르네 상스 시대 최고의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사탕수수』(Cane, 1923)에서 소멸되어 가는 남부 흑인의 삶에 어린 고통을 시적인 언어로 그려내는데 정성을 쏟았고, 제시 포셋(Jessie Fauset)은 『혼란』 (There Is Confusion, 1924)이나 『건포도 빵』(Plum Bun, 1929) 같은 소설에서 환상과 자기기만에 희생되는 흑인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많은 미국 역사가들이 1920년대를 어니스트 헤밍웨이T. S. 엘리어트 또는 싱클레어 루이스 가 그려낸 혼돈과 무력으로 얼룩진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시대로 보다는 F. 스코트 피츠 제럴드가 그려낸 흥분과 환락이 뒤엉킨 ‘재즈의 시대’로 기억하길 좋아하듯이, 이 시기의 흑인 작가들 은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의 주장에 따라 흑인이 본연의 모습만 잃지 않고 있으면 백인들에 의해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작품을 썼다. 휴즈는 그의 첫 시집인 『피곤 의 블루스』(The Weary Blues, 1926)에서 현재의 편견과 차별을 의연하게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자 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 흑인을 그려내었다.

한편, 1930년 대 할렘 르네상스의 낙관적인 분위기는 경제 대공황의 첫 희생물이 되었다. 경제적 고 통으로 얼룩진 1930년대에는 미국 작가들 대부분이 아메리칸 드림의 허구성에 대해 환멸을 느꼈 다. 백인 작가 클리포드 오뎃존 스타인벡은 각각 『좌익을 기다리며』와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39)같은 작품에서 서민의 희생을 토대로 하고 있는 미국 경제 체제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대표적 흑인 작가들도 아메리칸 드림의 기본 전제들에 대한 강한 회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가 쓴 소설 『동향인』(Native Son, 1940)의 주인공인 비거 토마스 에게 있어서 아메리칸 드림이란 백인에게나 가능한 이야기일 뿐이다. 미국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 되고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비거와 그의 친구들이 아메리칸 드림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부유한 백인들의 생활을 담은 영화를 볼 때 뿐이다. 가난과 술과 범죄 로 뒤범벅된 자신의 미래를 직감하고 있는 비거는 절망과 분노에 찬 목소리로 “우린 흑인이고 저들 은 백인이야. 저들은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질 수 있지. 저들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지. 마치 지옥에 살고 있는 느낌이야”라고 울부 짖는다. 흑인에게만 아메리칸 드림을 거부하는 미 국 사회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비거와 같은 괴물의 탄생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이 라이 트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앤 페트리(Ann Petry)의 첫 소설 『거리』(The Street, 1946)도 자신이 하녀로 일하 는 부유한 백인 부부의 삶이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흑인 여성 루티 존슨을 통 해 아메리칸 드림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다. 루티는 백인 부부가 이룩한 물질적 성공 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아들은 범죄 세계에 잃게 되며, 결국 그녀 자 신마저 살인자가 되고 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루티는 비거를 파멸시킨 도시인 시카고로 도망간다. 이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시골』(Country Place, 1947)이나 『내로우스 해협』(The Narrows, 1949)과 같은 작품에서도 페트리는 아메리칸 드림이 파괴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 시켰다.

어느 흑인 작가보다도 많은 작품을 쓴 프랭크 여비(Frank Yerby)도 그의 첫 소설 『해로우의 여우 들』(The Foxes of Harrow, 1946)에서부터 거듭하여 무자비하고 교활하기 때문에 성공하는 백인 주인공들을 제시함으로써 냉소적으로 선량함과 덕성은 성공에 장애물이 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덕과 선의 희생을 요구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과연 추구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의문 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미국 사회가 흑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흑인에게는 그러한 아메 리칸 드림마저도 추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적으로 비난하였다.

먼저 백인의 관점은, 1920년대 미국은 전후 경제적 풍요와 더불어 물질 및 소비주의 사회로 변화하 자 그 시기 개인적 소외감, 물질주의, 청교도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낀 지식인 계층 즉, '상실세대 '(Lost generation)가 새로운 대안으로서 흑인의 원초적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지고 할렘 르네상스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흑인들의 관점은 이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백인과의 결합, 경제적 안정과 이를 통한 흑 인 인텔리 계급의 형성과 흑인사회 내부의 자의식 성숙으로, New negro로 대변되는 흑인 지식인 공동체의 출현이 할렘 르네상스로 이어졌다고 본다.

017. 파르테논 신전

고대 아테나이의 수호자로 여겨지던 아테나 여신에 봉헌된 그리스 아테네의 신전이다. 기원전 5세기 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건설되었다. 현존하는 고전기 그리스 건축물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도 리스식 기둥 양식 발전의 정점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 신전의 장식 조각도 그리스 예술의 정 수로 여겨진다.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아테네의 민주정의 오랜 상징이자 세계적으로 위대 한 기념물로 인정받는다. 현재는 그리스 문화부에서 복원 및 개축 계획을 시행하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이 건설된 자리에는 원래 아테나 여신의 옛 신전으로 역사가들은 이를 옛 파르테논 신 전(Pre-Parthenon)이라 칭하는 건물이 있었으나,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여타 그리스의 신전과 마찬가지로 파르테논 신전도 국가 금고로 쓰였으며, 특히 이곳은 한때 델로스 동맹의 금고로 쓰였다. 기원후 6세기에 파르테논 신전은 성모 마리아에 봉헌된 기독교 교회로 쓰였 다.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뒤에 1460년대 초에 모스크로 쓰였고 첨탑이 건설되었다. 1687년 9월 26일 파르테논 신전 안에 쌓아놓은 오스만 투르크의 화약 더미가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불이 붙었 다. 화약이 폭발하면서 신전과 그 조각물이 크게 훼손되었다. 1806년 엘긴의 7대 백작, 토머스 브루 스(엘긴 경)이 오스만 제국의 허가를 얻어 파르테논에 남은 일부 조각을 떼어냈다. 이 조각물은 오늘 날 엘긴 대리석 조각군 또는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군으로 불리는데, 1816년 런던대영 박물관에 매각되어 지금까지 그 곳에서 전시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엘긴 대리석 조각군을 다시 그리스로 반 환해 주도록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는 상황이다.

이 신전의 '파르테논'이란 이름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제프리 M. 허윗(Jeffrey M. Hurwit)에 따르면, '파르테논'은 '처녀의 장소'를 뜻하며, 원래 파르테논 신전의 어느 방 한 곳을 일컫 는 말이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어느 방인지 그리고 그 방에 어떻게 이 이름이 붙었는지는 논 란의 대상이다. 일설에서는 '파르테논'이 범아테네 축제 때 아테나에게 바치는 페플로스(고대 그리스 의 여성 겉옷)를 아레포로이(해마다 아테나 여신을 위해 일하는 네 소녀)가 짜는 방이라고 한다. 크 리스토퍼 펠링(Christopher Pelling)은 아테나 파르테노스가 아테나 폴리아스("도시의 아테나")와 관 련되어 있긴 하지만 같지는 않은 개별적인 아테나 숭배 의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 이론 에 따르면, '파르테논'이란 이름은 "처녀 여신의 신전"을 뜻하며, 아테나 파르테노스 숭배 의식이 이 신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역시 그 기원이 불명확한 '파르테노스'(παρθένος)란 별칭은 "처 녀,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뜻하며, 특히 야생 동물과 사냥, 식물의 여신인 아르테미스, 전쟁, 수공예 그리고 실용적인 것의 여신인 아테나를 이를 때 쓰는 말이다. 또 이 신전의 이름은 처녀들('파르테노 이')를 암시하는데, 처녀들의 최고위 희생 의식은 도시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파르테논'이란 이름이 신전 건축물군 전체를 분명히 일컫는 첫 사례는 기원전 4세기의 웅변가 데모 스테네스의 말에서 나온다. 5세기에 건축 기록에서 이 건축물은 그저 '호 나오스'("신전")으로 불렀다. 건축가 므네시클레스와 칼리크라테스는 현존하지는 않지만 아테나이 건축에 대해 이들이 쓴 기록에 서 이 건물을 '헤카톰페도스'("100피트의 키다리")라고 불렀다고 하며, 4세기와 나중에도 '파르테논' 이란 이름 뿐 아니라 '헤카톰페도스' 또는 '헤카톰페돈'으로 불렸으며, 기원후 1세기의 저자 플루타르 코스는 이 건물을 '헤카톰페돈 파르테논'이라고 칭하였다.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488년경) 직후 지금의 자리에 아테나 파르테노스에 바치는 성소를 짓고자 처음으로 시도하여, 튼튼한 석회암 기반을 깔고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의 남쪽 부분을 편평하게 골라 넓혔다. 이 건물은 '헤카톰페돈'으로 대체되었으며, 아테나 폴리아스에 봉헌된 옛날 신전 옆에 서 있 었을 것이다. 옛 파르테논 신전페르시아군이 기원전 480년에 아테나이를 약탈하고 아크로폴리스 를 파괴할 때에도 아직 건설 중이었다.

기원전 5세기 중반, 아테나이의 아크로폴리스가 델로스 동맹의 중심지가 되고, 아테나이가 당대 문화 중 심지가 되면서 페리클레스는 야심찬 건설 계획을 세워 5세기 후반기까지 이어졌다. 오늘날 아크로폴리스 에서 보이는 가장 유명한 건축물인 파르테논 신전, 프로퓔라이아, 에렉테이온, 아테나 니케 신전은 이 시 기에 세운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건축은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총 감독을 맡았으며, 조각 장식도 그가 맡았다. 건축가인 익티노스칼리크라테스는 기원전 447년에 작업에 착수하여, 건물은 432년에 사실상 완공되었으나 장식 작업은 431년까지 이어졌다. 파르테논에 관한 일부 재정 기록이 남아있어 아테나이에 서 16 km 떨어진 펜텔리코스 산에서 캐온 대리석을 아크로폴리스로 운반하는데 단일 항목으로 가장 많 은 비용이 들었음을 보여준다. 건축 자금의 일부는 델로스 동맹의 금고에서 끌어다 썼는데, 이 곳 금고는 기원전 454년에 델로스 섬의 범그리스 성소에서 아크로폴리스로 옮긴 바 있었다.

근처의 헤파이스토스 신전도리스식 기둥 양식을 써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건축물이지만, 당대에는 파르테논 신전이 가장 훌륭한 것으로 여겨졌다. 존 줄리어스 쿠퍼(John Julius Cooper)는 파르테논 신전 에 대해 "지금까지 가장 완벽한 도리스식 신전이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고대에도 파르테논의 건축미는 전설적이었는데 스타일로베이트(stylobate, 기둥을 받치는 토대 최상단 부분.)와 나오스(naos, 성상 안치 소) 벽과 기둥의 엔타시스(entasis, 배흘림 기둥)의 미묘한 조화가 특히 그러하였다." 엔타시스란 기둥의 중심부로 갈수록 약간 굵어지는 배흘림 기둥을 말하는데, 궐련 모양으로 유명한 이전의 신전보다 파르테 논의 엔타시스가 시각적으로 훨씬 미묘한 효과를 낸다. 스타일로베이트는 기둥이 서는 토대를 일컫는다. 여러 다른 그리스 고전기 신전처럼, 파르테논의 스타일로베이트도 위쪽으로 포물선 모양으로 약간 휘어 져서 빗물이 밖으로 흐르도록 처리하였다. 토대가 휘어져 있으므로 기둥은 바깥 방향으로 기울게 되는데, 실제로 기둥은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 있으며, 기둥의 높이는 모두 같으므로 위쪽의 처마도리(architrave, 평방)와 지붕 위도 휘어진다. 거햄 스티븐스(Gorham Stevens)는 "미묘하게 휘어지도록 설계한 규칙이 모 든 데 적용된다"라고 지적하면서 더 나아가 서쪽 면이 동쪽 면보다 약간 지반이 높다는 점도 알아냈다. 이 러한 "시각적 정교함"이 의도된 효과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종종 그러한 설계가 만곡 이 없을 경우 건축물의 경우 건물이 둔중하게 보이는 것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개념상 직선적인 신전보다는 파르테논보다 훨씬 더욱 휘어진 구조의 이전 건축물과 비교가 필요하다.

파르테논을 비롯한 이곳 아크로폴리스에 대한 일부 연구에서 건축물의 비율 상당 부분이 황금비에 근접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파르테논의 정면부와 정면부의 여러 건축 요소나 다른 곳도 황금 사각형의 모양으 로 볼 수 있다. 황금비가 건축 설계에 쓰였다는 주장은 최근 연구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맨 위쪽 단에서 측정했을 때 파르테논의 기단 면적은 69.5m x 30.9m의 사각형이다. 구조상 지붕을 받치 기 위해 필요한 두 줄로 된 내부 주랑을 비롯하여 성소 안치실(cella 또는 naos)은 길이는 29.8m이고, 폭 은 19.2m이다. 바깥의 도리스식 열주는 직경이 1.9m이고, 높이는 10.4m이다. 각 모퉁이의 기둥은 직경 이 약간 더 크다. 파르테논 신전은 외부에 46개의 기둥이 있고, 안에는 23개의 기둥이 있다.스타일로베이 트는 가운데 부분으로 갈수록 높아져, 가운데 부분은 동쪽과 서쪽 끝 부분보다 60mm 높아지며, 측면보 다 110mm 높다. 지붕은 임브렉스와 테굴라(imbrex, tegula, 지붕에 덮는 기와)라는 큰 대리석 기와로 덮혀 있었다.

018. 태양계

태양계(太陽系)는 항성인 태양과 그 중력에 이끌려 있는 주변 천체가 이루는 체계를 말한다.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행성소행성대를 기준으로 안쪽에 있는 네 개의 고체 행성인 수성, 금성, 지 구, 화성, 즉 지구형 행성과, 바깥쪽에 있는 네 개의 유체 행성인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즉 목성형 행성으로 알려져 있다.

행성 외에도 태양계의 구성 천체로는 소천체로 이루어진 띠도 있다.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는 소행성대 의 천체 무리는 대부분 지구형 행성과 비슷한 성분을 지니고 있다. 카이퍼 대와 그 소집단 산란 분포대 는 해왕성 궤도 너머에 있으며, 이곳의 천체는 대부분 , 암모니아, 메탄 등이 얼어 있는 형태로 구성 되어 있다. 소행성대와 카이퍼 대, 산란분포대 천체 세레스, 명왕성, 하우메아, 마케마케, 에리스행 성만한 힘은 별로 없지만 자체 중력으로 구형을 유지할 만큼 크다고 인정되어 왜행성이라고 불린다. 장 주기 혜성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는 오르트 구름은 지금까지의 구역의 대략 천 배의 거리에 걸쳐 있다.

태양계 내에서 혜성, 센타우루스족, 우주 먼지 같은 소천체는 이런 구역을 자유롭게 떠다닌다. 또한 태 양으로부터 나오는 플라스마 흐름인 태양풍태양권 내에서 항성풍 거품을 만들어 낸다.

행성 여섯 개(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와 왜행성 네 개(명왕성, 에리스, 하우메아, 마케 마케)는 위성을 가지고 있으며, 목성형 행성은 자체적인 고리를 가지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인류는 (몇몇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지만) 태양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고 움직이지 않으며, 하늘에서 움직이는 다른 천체와는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 라고 믿었다. 인도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아리아바타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사모스의 아리스타 르코스태양 중심의 우주론을 추측하기도 했지만, 태양중심설을 최초로 수학적으로 예측한 사람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다. 17세기에는 그 계승자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물리학에 대한 이해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움직이고, 행성은 지구를 제어하는 힘과 같은 힘으로 제어된다는 생각을 수용하였다. 좀 더 최근에는, 망원경 기술이 발달하고 무인 우주선을 사용할 수 있 게 됨으로써, 다른 행성의 산맥이나 크레이터 등과 같은 지질학적 현상과 구름, 모래폭풍, 만년설 같은 기상학적 현상을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태양계의 중요 구성 요소인 G형 주계열성 태양은 현재까지 알려진 태양계 전체 질량의 99.86 퍼센트 를 차지하며, 중력으로 태양계의 천체를 지배한다. 태양 주위 궤도를 선회하는 두 개의 거대 가스 행성 과 두 개의 거대 얼음 행성 은 태양을 제외한 태양계 질량의 99퍼센트를 차지하며, 그 중 90퍼센트를 목성과 토성이 차지한다.

태양 주위를 궤도 선회하는 대부분의 큰 천체의 궤도는 지구 궤도, 황도와 거의 평행하다. 행성이 황도 와 매우 가까운 데 비해 혜성이나 카이퍼 대 천체는 그 각도가 두드러지게 크다.

모든 행성과 대부분의 다른 천체는 태양의 자전 방향(태양의 북극에서 보았을 때 시계 반대 방향)으로 공전한다. 하지만 핼리 혜성 같은 예외도 있다.

태양 주위 천체의 궤도를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으로 묘사할 수 있다. 케플러의 법칙에 따르면, 개개의 천체는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의 궤도를 따라 운동한다. 태양에 가깝고 작은 반장축을 가지고 있는 천체는 1이 보다 짧다. 태양에서 천체가 가장 가까울 때의 점을 〈근일점〉, 태양에서 천체가 가장 멀 때의 점을 〈원일점〉이라고 한다. 천체는 근일점에서 가장 빠르게 운동하고, 원일점에서 가장 느리게 운동한다. 행성의 궤도는 원형에 가까운 타원이지만, 혜성이나 카이퍼 대 천체 등의 궤도는 길 쭉한 타원형이다. 특히, 세드나는 엄청나게 찌그러진 타원형 궤도를 가지고 있다.

많은 태양계 모형에서는 행성 간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그 거리를 왜곡하여 행성간의 거리를 거 의 같게 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몇몇 예외를 빼면, 태양에서 더 먼 행성이나 대()일 수록 안쪽의 궤도와의 간격이 더 넓다. 예를 들어, 금성은 수성보다 대략 0.33 천문단위(AU) 더 바깥에 있지만, 토성은 목성보다 4.3 AU 바깥에 있고, 해왕성은 천왕성보다 10.5 AU 바깥에 있다. 궤도 간 거 리의 상호 관계의 규칙을 명확히 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티티우스-보데의 법칙 참조), 아직까지 인정 된 이론은 없다.

태양계의 행성 대부분은 그 자신의 천체 체계를 가지고 있다. 행성 주위를 공전하는 천체는 자연 위성, 혹은 그냥 단순히 위성이라고 하는데, 그 중 몇은 행성보다도 크다. 대표적인 예로 가니메데가 있다. 대 형 위성은 대부분 조석고정을 하며, 모행성을 향해 영구히 한쪽 면만 보인다. 또한, 네 개의 거대한 행 성 목성형 행성은 행성 주위를 선회하는 작은 입자의 얇은 띠인 행성 고리를 가지고 있다.

 

비공식적으로 태양계는 종종 여러 부분으로 나뉜다. 내행성에는 네 개의 암석 행성과 소행성대가 포함 된다. 소행성대 너머 외행성에는 네 개의 가스 행성이 포함된다. 카이퍼 대의 발견으로 태양계의 규모는 해왕성 너머 천체까지 미치게 되었다.

물리적, 동역학적 관점에서 태양 주위를 도는 천체는 행성, 왜행성, 태양계 소천체(small Solar System bodies)의 세 종류로 분류된다. 행성은 구형의 몸체를 이룰 정도로 충분한 질량을 가지면서, 공전 궤도 상에 있던 자신보다 작은 모든 천체를 ‘빨아먹은’ 천체를 일컫는다. 이 정의에 따르면, 태양계에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8개의 행성이 있다. 명왕성은 궤도 근처에 있는 카이퍼 대 물질을 빨아들여 커지지 못하여 위의 정의를 만족하지 못한다. 왜행성은 구형의 몸체를 이룰 정도로 충 분한 질량을 가지면서 태양을 공전하고 있으나, 행성과는 달리 궤도 근처의 자신보다 작은 천체를 청소 하지 못한 천체를 일컫는다. 이 정의에 따르면, 태양계에는 1 세레스, 명왕성, 하우메아, 마케마케, 에리 스 5개의 왜행성이 있다. 90377 세드나, 90482 오르쿠스, 50000 콰오아 등 다른 천체는 장래에 왜행성 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있다. 해왕성 횡단 영역 내를 돌고 있는 왜행성을 명왕성형 천체 또는 플루토이드 로 부른다.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나머지 천체를 태양계 소천체로 부른다.

행성과학자들은 태양계 전역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종류의 물질을 가스(기체), 얼음, 암석 등의 용어로 표현한다. ‘암석’은 원시 행성계 성운 내 거의 모든 상황에서 고체로 남아 있을 수 있는, 녹는점이 높은 혼합물을 말한다. 암석 물질은 보편적으로 규소와, 이나 니켈과 같은 금속을 포함한다. 암석 물질은 내 행성 지대에 흔하게 존재하며, 암석 행성과 소행성의 몸체를 구성하는 주요 물질이 된다. ‘가스’는 분자 수소, 헬륨, 네온 등 녹는점이 극도로 낮으며, 높은 증기압을 갖는 물질을 말한다. 이들은 성운 내에서 언 제나 기체 상태를 유지한다. 가스 물질은 목성과 토성 등 ‘중간 지대’를 돌고 있는 행성의 대부분을 구성 한다. ‘얼음’은 , 메탄, 암모니아, 황화 수소, 이산화 탄소와 같은 물질로서, 녹는점은 수백 켈빈 정도이 며, 환경상 압력과 온도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는 물질이다. 이들 물질은 태양계 내에 얼음, 액체, 기체 등의 다양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성운 내에서는 고체 또는 기체 상태로 존재한다. 얼음 물질은 가스 행성의 위성 몸체 대부분, 천왕성과 해왕성(일명 ‘얼음 가스행성’)의 내부 구성물 대부분, 해왕성 궤도 너머 수많은 작은 천체의 몸체 대부분을 구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스와 얼음을 ‘휘발성 물질’로도 부른다.

 

태양은 과 함께 대전된 입자, 즉 플라스마의 지속적인 흐름인 태양풍을 발산한다. 이 입자의 흐름은 시 속 15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퍼져나가, 희박한 태양권을 만드는 데 최소한 100 AU까지 퍼져나간다. 이 것이 행성간 매질이다. 태양 표면에서 일어나는 태양 플레어코로나 질량 방출과 같은 지자기 폭풍은 태양권을 어지럽히고 우주 기후를 만들어 낸다. 태양권 내에서 가장 거대한 구조물은 태양의 회전 자기 장으로 인해 행성간 매질에 생성되는 나선형의 태양권 전류편이다.

지구 자기장은 태양풍이 지구의 대기를 벗기는 것을 막아 준다. 금성과 화성은 자기장을 가지고 있지 않 기 때문에 태양풍이 대기를 우주 공간으로 차츰 새어 나가게 하고 있다. 태양풍과 지구 자기장의 상호 작 용은 대전된 입자를 지구의 초고층 대기에 직각으로 흐르게 하는데, 이 상호 작용으로 자기극 근처에서 오 로라가 만들어진다.

우주선은 태양계 외부가 그 기원이다. 태양권이 태양계를 부분적으로 보호하고, 행성의 자기장(자기장이 있는 행성의 경우에만) 또한 행성을 다소 보호해 준다. 성간물질 안에 있는 우주선의 밀도와 태양 자기장 의 세기는 매우 긴 시간에 걸쳐 변화하고, 이에 따라 태양계 안의 우주 방사선의 수준도 변화한다. 그러 나 얼마나 변화하는지는 알 수 없다.

태양계의 안쪽인 내행성계는 지구형 행성과 수많은 소행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규산염과 금속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양에 매우 근접해 있다. 안쪽 태양계 전체의 반지름은 목성과 토성 사이의 거리보다도 짧다.

네 개의 지구형 행성은 암석으로 조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위성이 적거나 없고 고리도 없다. 이러한 행 성을 구성하는 광물은 대부분 높은 녹는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예로 지각맨틀을 구성하는 규산염, 을 구성하는 , 니켈과 같은 금속이 있다. 지구형 행성 중 금성, 지구, 화성은 대기충돌 크레이터, 열 곡, 지구대, 화산과 같은 구조 지질학적인 표면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구형 행성”이라는 용어는 “내 행성”이라는 용어와 헷갈리면 안 된다. 내행성은 지구와 태양 사이에 있는 행성, 즉 수성과 금성을 가리 킨다.

수성(태양에서의 거리 0.4 AU)은 태양에 가장 가까운 행성이며, 가장 작은 행성이다(질량이 지구의 0.055 배). 수성은 위성이 없으며, 수많은 충돌 크레이터와 쭈글쭈글한 거대한 절벽 등의 지질학적 특징으로만 알려져 있다. 이 절벽은 태양계 역사의 초기에 수성이 수축해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수성의 대기는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그 두께가 얇다. 수성의 커다란 핵과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얇은 맨틀은 그 성분이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수성에 대한 탐사는 아주 미미하여, 1950년 이래로 현재까지 수성 탐사선 은 매리너 10호메신저뿐이다.

금성(태양에서의 거리 0.7 AU)은 지구 질량 81.5퍼센트 크기의 천체로, 가장 바깥쪽에 대기가 있고, 내 부적 지질 활동의 증거가 발견되며, 규산염의 맨틀 속에 철질의 핵이 있는 등 외관상 지구와 비슷한 행 성이다. 그러나 금성은 지구보다 훨씬 건조하며, 대기의 밀도는 지구의 90배나 된다. 금성에는 자연 위 성이 없다. 금성은 태양계 행성 중 가장 뜨거운데, 표면 온도는 섭씨 400도 이상으로, 이처럼 고온이 된 주요 원인은 대기 중 온실 가스 때문이다. 금성의 표면 온도에 플라스틱 안전모를 잠깐 노출시키면 바로 녹아 액체가 되어 버린다. 금성 표면에서 현재도 지질학적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으 나, 대기가 쓸려 나가는 것을 막아 주는 자기장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금성의 대기는 화산 폭발로 분 출되는 가스를 규칙적으로 공급받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금성 사진(회전하는 갈색 구름 사진)은 자외선으로 찍은 다음 가시광선 스펙트럼으로 전환한 것으로, 금성을 그냥 가시광선으로 보면 완전히 노란 황산 구름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구(태양에서의 거리 1 AU)는 내행성 중 가장 질량이 크며, 나머지 내 행성 3개를 합친것보다도 크다. 현재도 지질학적 활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알려진 유일한 천체이며, 우주에서 생명체가 살고 있음이 증 명된 유일한 천체이다. 태양계 내 암석 행성 중 유일하게 바다가 있으며, 지각판 이동이 일어나는 유일 한 천체이다. 지구의 대기 또한 식물의 존재로 자유 산소의 함량이 21퍼센트나 된다는 점에서 다른 암 석 행성과 판이하게 다르다. 지구는 자연 위성으로 을 거느리고 있는데, 달은 태양계의 암석 행성 중 유일한 거대 위성이다. 또한 달은 모행성의 크기에 비해 가장 큰 행성이다.

화성(태양에서의 거리 1.5 AU)은 수성보다는 크나 지구와 금성보다는 질량이 작은 행성이다(지구 질량 의 0.107배). 화성은 대부분 이산화 탄소로 이루어진 얇은 대기가 있다. 화성 표면은 올림포스 산 등 거 대한 화산, 매리너 계곡과 같은 단층 계곡 등, 가장 최근까지 지질학적 활동이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 여 러 흔적이 있다. 화성의 붉은 색은 토양 내 산화 철 때문이다. 또한 이 때문에 화성의 하늘은 분홍색을 띤다. 화성은 조그만 자연 위성 둘을 거느리고 있다(데이모스, 포보스). 이들은 원래 소행성이었는데, 화 성의 중력에 포획된 것으로 보인다. 포보스는 약 3천만~5천만 년 안에 화성의 조석력으로 산산조각 나 버릴 것이다. 화성은 지구와 비슷하여 생명의 존재에 대한 탐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바이킹, 마스 글로 벌 서베이어, 마스 오디세이, 마스 패스파인더, 스피릿, 오퍼튜니티 등 많은 탐사선이 여러 가지 탐사를 진행하였다.

소행성은 태양계의 소천체로, 대부분 암석과 금속과 같은 휘발성 없는 광물로 구성되어 있다.

주() 소행성대는 화성과 목성 궤도 사이에 형성되어 있으며, 그 거리는 태양으로부터 2.3 ~ 3.3 천문 단위이다. 이들은 태양계 생성 초기 목성의 중력 때문에 서로 뭉치지 못하여, 행성이 되는 데 실패한 존 재로 여겨진다.

소행성의 크기는 수백 킬로미터에서 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정도의 크기까지 다양하다. 가장 거대한 1 세레스를 제외한 모든 소행성은 태양계 소천체로 분류되나, 4 베스타10 히기에이아 등은 유체정역학 적 균형 상태에 있음이 증명될 경우 왜행성으로 재분류될 수 있다.

소행성대에는 지름 200미터 이상의 천체가 수개 혹은 수 개 있다. 이렇게 숫자는 많지만, 소행성대 천 체의 질량을 모두 합쳐도 지구의 1천 분의 1을 넘지 못한다. 주 소행성대의 천체는 매우 산발적으로 흩 어져 태양을 돌고 있어서, 우주 탐사선이 이 지역을 주기적으로 통과해도 충돌 사고는 발생하지 않는 다. 지름이 10 ~ 104 미터 사이인 소행성을 유성체라고 부른다. 가끔 이곳에서 태양으로 돌진하는 소 행성이 있다.

세레스(태양에서의 거리 2.77 AU)는 소행성대에서 가장 거대한 천체로, 왜행성으로 취급된다. 직경은 거의 1000 km에 달해, 자체 중력만으로 형태를 구형으로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 세레스는 19세기에 발견될 당시 ‘행성’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1850년대 들어 다른 소행성이 발견되면서 ‘소행성’으로 재 분류되었다. 그 뒤 2006년에는 ‘왜행성’으로 재분류되었다.

주 소행성대에 있는 소행성은 공전 궤도의 특성에 따라 소행성군소행성족으로 분류된다. 소행성 위 성은 자기보다 큰 소행성을 도는 소행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종 위성과 주인 소행성의 크기는 평범한 위성과 행성만큼 차이가 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종과 주인의 크기가 거의 같을 경우도 있다(이 는 행성-위성의 관계보다는 쌍성계와 더 비슷하다). 소행성대에는 지구에 물을 공급한 원천일 가능성 이 있는, 주띠 혜성이 있다.

트로이 소행성군은 목성의 L4 또는 L5 (공전 궤도상에서 행성을 이끄는 동시에 끌려가는 양상이 중력 적으로 안정을 이루는 지점)에 있다. ‘트로이’는 다른 행성 또는 위성의 라그랑주점에 있는 작은 천체를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 힐다 족은 목성과 2:3 궤도 공명을 하는데, 이는 목성이 태양을 두 번 돌 때 힐다 족은 세 번 돈다는 뜻이다.

내행성 지대에도 떠돌이 소행성으로 불리는 천체가 많다. 이들의 궤도는 내행성의 궤도와 교차하고 있 으며, 따라서 행성과 충돌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태양계의 바깥쪽 지대는 거대한 가스 행성과 행성급 덩치를 지닌 위성이 존재하는 곳이다. 센타우루스 족을 포함한 많은 단주기 혜성도 이 지역에 공전궤도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태양에서 매우 멀리 떨 어져 있기 때문에, 을 비롯한 암모니아, 메탄 등의 휘발성 물질이 천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구형 행성에 비해 크다. 그 이유는 낮은 온도에서 이들 휘발성 물질은 고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계의 바깥쪽을 도는 네 개의 거대한 행성은 보통 목성형 행성, 가스 행성, 외행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의 질량은 태양을 도는 8개 행성의 99퍼센트를 차지하며, 암석 행성에 비해 무거워 지구질 량의 14 ~ 318배 정도이다. 그러나 밀도는 상대적으로 낮아 암석 행성의 20퍼센트 수준이다. 목성과 토 성은 대부분 수소헬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네 행성은 모두 고리를 갖고 있으나, 토성을 제외한 나머지는 지구에서 고리를 관측하기가 쉽지 않다.

목성(태양에서의 거리 5.2 AU)은 태양계의 8행성 중 가장 거대하고 무거운 천체로, 그 질량은 지구의 318배로 목성을 뺀 다른 행성을 다 합친 것보다 2.5배나 더 무겁다. 목성은 대부분 수소헬륨으로 이 루어져 있다. 목성은 내부열이 강력하게 발생하고 있어, 표면에 자전 방향과 평행한 줄무늬 모양의 띠 와 대적반과 같은, 반영구적인 대기 구조를 만든다. 목성은 많은 위성을 거느리고 있으며, 알려진 숫자 만 79개이다. 그중 가장 질량이 큰 가니메데, 칼리스토, 이오, 유로파, 네 개는 내부열이나 화산 활동이 일어나는 등 암석 행성과 비슷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 중 가니메데는 태양계 위성 중 부피와 질량이 가 장 크며, 심지어 수성보다도 부피가 크다(다만 질량은 작다).

토성(태양에서의 거리 9.5 AU)은 질량, 조성 물질, 내부 구조, 자기권 등 모든 면에서 목성보다 조금씩 작은 가스 행성이다. 토성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한 고리를 들 수 있다. 토성의 부피는 목성의 60퍼센트 이지만, 질량은 3분의 1이 채 되지 않는다(지구질량의 95배). 따라서 토성의 밀도는 태양계 행성 중 가 장 작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토성 역시 목성 다음으로 많은 위성을 거느리고 있다. 그중 타이탄엔 켈라두스, 둘은 지질학적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구와는 달리 이들 천체의 화산에서는 얼음 물질이 뿜어져 나온다. 타이탄은 부피만 따질 경우 수성보다 크며, 태양계 위성 중 유일하게 짙은 대기에 둘러싸여 있다.

천왕성해왕성은 얼음 물질의 비중이 목성 및 토성보다 크다. 이들의 가스 성분은 질량의 약 10% 밖 에 되지 않는다. 질량의 대부분은 얼음(메탄, 물 ,암모니아)이 주성분이다. 거대 얼음 행성이라고도 한다.

천왕성(태양에서의 거리 19.2 AU)은 외행성 중 가장 가벼운 가스 행성이다(지구의 14배). 천왕성의 자 전축은 황도면에 대해 97.9도 기울어져 있어 태양을 마치 누운 상태로 도는 것처럼 보인다. 천왕성의 중 심핵은 다른 가스 행성에 비해 훨씬 차가우며, 방출하는 열의 양도 매우 작다. 천왕성은 여러 위성을 거 느리고 있다. 이 중 티타니아, 오베론, 움브리엘, 아리엘, 미란다가 큰 위성이다. 이 다섯 개의 큰 위성은 모두 단층, 능선, 절벽, 산맥, 화구, 범람의 흔적 등 혼란한 지형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미란다의 표면은 실제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불연속적이다.

해왕성(태양에서의 거리 30 AU)은 천왕성보다 지름은 약간 작으나, 좀 더 무거운(지구의 17배) 가스 행 성이다. 따라서 해왕성의 밀도는 천왕성보다 조금 더 크다. 해왕성은 천왕성보다 많은 내부열을 발산하 나, 그 양은 목성이나 토성에 비하면 작다. 해왕성 역시 13개의 위성이 주위를 돌고 있다. 그중 가장 거 대한 트리톤액체 질소간헐천이 표면 곳곳에 있는 등 지질학적으로 살아있다. 트리톤은 태양계 위 성 중 유일하게 역방향으로 어머니 행성을 공전하는 거대 위성이다. 다수의 소행성이 해왕성과 같은 궤 도를 돌고 있는데, 이들을 해왕성 트로이족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해왕성과 1:1로 궤도 공명을 한다.

 

혜성은 수 킬로미터 정도 크기의 휘발성 얼음 혼합물로 이루어진 태양계 천체이다. 혜성의 궤도는 매우 이심률이 큰데, 태양에 가장 가까워질 때는 내행성 궤도까지 들어왔다가 멀어질 경우 명왕성 바깥까지 물러나는 경우가 많다. 혜성 중에는 궤도경사각 값이 큰 개체가 많은데, 그중 공전 주기가 백 년이 되지 않는 단주기 혜성의 경사각은 중간 정도이다. 혜성이 내행성 궤도에 진입하면, 태양에 가까워지면서 일 사량이 증가하기 때문에 얼음 상태로 존재하던 휘발성 물질이 증발하여 이온화, ‘코마’라는 이름의 꼬리 처럼 생긴 구조를 형성한다. 코마는 맨눈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대부터 인류가 혜성을 묘사할 때 사용된 강렬한 특징이었다.

단주기 혜성은 태양을 1회 도는 데 2백 년이 걸리지 않는다. 반면 장주기 혜성은 1회 공전에 걸리는 시 간이 보통 수천 년은 된다. 단주기 혜성은 카이퍼 대에서 태어나며, 헤일-밥 혜성과 같은 장주기 혜성 은 오르트 구름에서 태어난다고 여겨진다. 크로이츠 선그레이저스와 같은 혜성군()은, 하나의 덩어리 였던 천체가 쪼개져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공전궤도가 타원형인 일부 혜성은 태양계 바깥에서 태어나 태양계를 찾아온 경우도 있는데, 이들의 정확한 궤도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태양 주위를 많이 돌면서 휘발성 물질이 거의 다 증발한 늙은 혜성은 종종 소행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센타우루스족궤도 장반경이 목성(5.5 AU)보다 크고 해왕성(30 AU)보다 작은, 혜성 비슷한, 얼음으 로 이루어진 천체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거대한 센타우루스족 10199 카리클로의 지름은 약 250킬 로미터이다. 최초로 발견된 센타우루스족 2060 키론혜성으로도 분류되어 왔는데(“95P/키론”이라는 명칭이 추가되었다), 이는 2060 키론이 여타 혜성과 마찬가지로 태양에 접근하면서 코마가 커지기 때문 이다.

해왕성 궤도 너머에 있는 해왕성 바깥 천체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다. 이 천체는 대부분 매우 작으며(가 장 큰 것이 지구 직경의 5분의 1이고, 질량은 달보다도 작다), 암석과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혹자는 이 구역을 “외태양계”(Outer Solar System)라고도 하는데,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용어를 소행성대 너머 의 구역(외행성계)을 가리킬 때 사용해, 혼동이 있다.

카이퍼 대는 소행성대와 비슷한, 파편 조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고리로, 주요 구성 물질이 얼음이라는 점이 소행성대와 다르다. 카이퍼 대는 태양으로부터 30 ~ 50 천문단위 지역에 형성되어 있다. 카이퍼 대의 천체는 대부분 태양계 소천체이나, 50000 콰오아, 20000 바루나, 90482 오르쿠스 등 덩치가 큰 천 체는 왜행성으로 재분류될 가능성이 있다. 지름 50킬로미터 이상의 카이퍼 대 천체는 대략 10만 개 이 상일 것으로 여겨지나, 이들의 질량은 모두 합쳐 보았자 지구 질량의 1,000분의 1 ~ 100분의 1에 불과 하다. 적지 않은 카이퍼 대 천체는 자신만의 위성을 여럿 거느리고 있다. 카이퍼 대 천체 대부분은 행성 의 공전궤도면과 어긋난 궤도를 그리면서 태양을 돌고 있다.

 

명왕성(태양에서의 평균 거리 39 AU)은 왜행성이며, 카이퍼 대 안에서 가장 거대한 천체로 알려져 있 다. 1930년 발견되었을 때는 9번째 행성으로 간주되었으나, 2006년 국제천문연맹에서 새로운 행성의 정의가 발표된 뒤 자격 요건 3가지를 만족하지 못해 행성에서 탈락했다.

그 후로 이름도 "134340" 으로 바뀌었다. 명왕성의 궤도는 다른 행성에 비해 이심률이 크며, 황도면에 대해 17도 기울어져 있다. 태양으로부터의 평균 거리는 39 천문단위이나, 가까울 때는 29.7, 멀어질 때 는 49.5 천문단위로 그 격차가 크다.

명왕성의 가장 거대한 위성 카론이 앞으로도 그 자체만으로 왜행성으로 분류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명왕성과 카론의 질량 중심은 어느 한쪽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닌, 두 천체 중간의 우주 공간에 형성되어 있어 종과 주인의 관계라기보다는 차라리 쌍성계와 비슷하다. 이들보다 훨씬 더 작은 닉스 히드라는 명왕성-카론을 돌고 있다.

명왕성은 공명 해왕성 바깥 천체 궤도에 놓여 있으며, 해왕성과 3:2의 궤도 공명을 보인다. 이는 해왕 성이 태양을 3번 돌 때 명왕성은 2번 돈다는 뜻이다. 이 궤도 공명비를 보이는 카이퍼 대 천체를 플루 토이드로 부른다.

하우메아(태양에서의 평균 거리 43.34 AU)와 마케마케(평균 거리 45.79 AU)는 고전적 카이퍼 대 내 에서 가장 덩치가 큰 천체이다. 하우메아는 달걀 모양으로 생겼으며, 위성 둘을 거느리고 있다. 마케마 케는 명왕성 다음으로 카이퍼 대 천체 중 밝다. 둘의 이름은 원래 2003 EL61과 2005 FY9였으나, 2008 년 왜행성으로 분류되면서 애칭을 얻었다. 이들의 궤도경사각(각각 28°, 29°)은 명왕성보다 더 크게 기울어져 있으며, 명왕성과는 달리 해왕성의 중력에 구속되어 있지 않아 고전적 개념의 카이퍼 대 천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산란 분포대는 카이퍼 대와 겹치나 훨씬 더 멀리 퍼져 있다. 이 지역은 단주기 혜성의 고향인 것으로 여 겨진다. 산란 분포대 천체는 태양계 초기 역사 때 해왕성이 현재 위치로 물러나면서 중력적인 영향을 받아 지금의 혼란스러운 궤도를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산란 분포대 천체(SDO)는 태양 과 가장 가까울 때는 카이퍼 대와 비슷한 곳을 도나, 멀어질 때는 150 천문단위까지 물러난다. 산란 분 포대 천체의 궤도는 황도면에 대해 크게 기울어져 있으며, 심지어 거의 수직에 가까운 부류도 있다. 일 부 천문학자는 이 산란 분포대가 단지 카이퍼 대의 다른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하기도 하며, 이 런 취지에서 산란 분포대 천체를 ‘산란 카이퍼 대 천체’로 부른다. 일부는 센타우루스 족을 산란 분포대 의 바깥쪽 천체와 구별하여 ‘안쪽 산란 카이퍼 대 천체’로 부르기도 한다.

에리스(태양에서의 평균 거리 68 AU)는 산란 분포대 천체 중 가장 질량이 큰 존재이며, 지름은 2,400 킬로미터로 명왕성보다 최소 5퍼센트 더 덩치가 커서, 행성의 개념에 대해 논란을 불러 온 장본인이기 도 하다. 지금까지 발견된 왜행성 중 가장 지름이 큰 천체이다. 디스노미아를 위성으로 거느리고 있다. 명왕성처럼 에리스의 궤도도 이심률이 크기 때문에 태양에 가까워질 때는 38.2 천문단위(대략 명왕성이 태양으로부터 떨어진 평균 거리와 비슷함), 멀어질 때는 97.6 천문단위까지 물러난다. 에리스의 궤도는 황도면에 대해 크게 기울어져 있다.

태양계가 끝나고 성간 공간이 시작되는 경계선이 어디인지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태양계의 경계면을 두 가지 다른 힘인 태양풍과 태양 중력이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풍의 영향이 미치는 곳은 대략 태양-명왕성 간 거리의 네 배 되는 곳으로, 이 태양권 계면성간매질이 시작되는 곳 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태양의 힐 구(태양의 중력이 미치는 범위)는 이보다 천 배는 더 먼 곳까지 이르는 것으로 여겨진다.

태양권 계면은 두 개의 별개 영역으로 나뉜다. 태양풍은 초속 400킬로미터 정도 속도로 우주를 여행하 다가 성간매질 영역에서 플라스마의 흐름과 충돌한다. 이 충돌은 말단충격에서 일어나는데, 말단 충격 은 태양풍이 부는 방향으로 태양으로부터 80 ~ 100 천문단위, 반대 방향으로는 태양으로부터 200 천문 단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태양풍은 급격하게 느려지며, 응축되고 요동쳐서 ‘헬리오시스’ 로 알려진, 마치 혜성의 꼬리와 비슷하게 생긴 거대한 타원형 구조를 형성한다. 헬리오시스는 태양풍이 부는 쪽으로는 40 천문단위 범위에 걸쳐 뻗어 있고, 반대쪽으로는 그 몇 배 길이로 형성되어 있다. 태양 권의 바깥 경계인 태양권 계면은 태양풍이 더 이상 불지 않고 성간(星間) 공간이 시작되는 경계이다.

태양권 바깥 경계의 모양은 유체동역학에 따른 성간매질과 태양풍의 상호 작용 결과로 보이는데, 이는 태양의 자기장이 북반구 쪽이 남반구보다 9 천문단위 더 멀리 뻗어 있는 모양과 비슷하다. 태양권 너머 약 230 천문단위 부근에는 태양풍이 항성 간 공간에서 성간매질과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뱃머리 충격 파 구조가 있다.

태양권이 태양계를 우주선으로부터 얼마나 잘 보호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 항공우주국으로부터 연구자금을 지원받은 한 팀이 ‘비전 미션’이라는 이름의, 태양권 너머로 탐사선을 보내는 계획을 추진해 오고 있다.

오르트 구름은 무수한 얼음 천체로 이루어진 이론적인 구역으로 구형의 구름과 같은 형상이다. 이 오르트 구름은 장주기 혜성의 원천으로 추측되며, 태양에서 거의 5만 AU(대략 1광년(ly)이 조금 못 됨) 거리 까지 둘러싸고 있으며, 멀게는 10만 AU(1.87 ly)까지 퍼져 있다. 이 구역은 목성형 행성의 중력적 상호 작용으로 말미암아 태양계 안쪽에서 튕겨져 나간 혜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오르트 구름의 천체 는 매우 천천히 움직이며, 때에 따라서는 지나가는 다른 항성의 충돌이나 중력 작용, 우리 은하은하 계 조력 등의 드문 현상으로 말미암은 섭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세드나(태양에서의 평균거리[주 4] 525.86 AU)는 거대하고 불그스름한, 명왕성과 비슷한 천체로, 괴상하 게 길쭉한 타원형의 궤도를 가지고 있다. 궤도가 너무 길어서 근일점에 도달했을 때의 거리가 76 AU인 데 반해 원일점에서는 928 AU에 달하고, 궤도를 한 바퀴 다 도는 데에는 1만2050년이 걸린다. 2003년 에 이 천체를 발견한 마이클 브라운은 세드나가 해왕성의 영향을 받기에는 근일점이 너무 멀기 때문

산란 분포대카이퍼 대에 속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브라운과 다른 천문학자들은 세드나가 근일점 이 45 AU이고 원일점이 415 AU, 공전 주기가 3420년인 (148209) 2000 CR105와 함께 새로운 집단에 포함된다고 간주한다[83]. 브라운은 이 새로운 집단을 ‘안쪽 오르트 구름’이라고 이름지었다[84]. 세드나 는 그 생김새가 확실히 밝혀져야 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왜행성으로 추측되고 있다.

우리 태양계 대부분의 영역은 아직 미지의 세계이다. 태양의 중력장은 약 2광년(12만 5천 천문단위) 범 위에 걸쳐 근처의 별들의 중력장을 압도한다. 반대로 오르트 구름의 반지름을 낮게 잡는 학설에 따르면, 태양계의 범위는 5만 천문단위를 넘지 않는다. 세드나 같은 천체의 발견에도 불구하고 카이퍼 대와 오 르트 구름 사이에 펼쳐진 수천 ~ 수만 천문단위의 광활한 영역은 아직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외부 영역 외에도, 그동안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던 태양과 수성 사이 공간에 대한 연구가 현재 진행 중이다.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지대에서 새로운 천체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 은하계는 약 2천억 개의 별이 모여 있으며, 폭이 약 10만 광년인 막대 나선 은하우리 은하 내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 태양은 오리온 팔로 불리는, 은하 바깥쪽 나선팔 내에 있다. 태양은 은하핵으로부 터 25,000 ~ 28,000 광년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놓여 있으며, 초당 220킬로미터 속도로 공전하고 있 다. 이 속도에 따르면, 태양이 은하 중심핵을 1회 도는 데에는 2억 2,500만 ~ 2억 5,000만 년이 걸린다. 이처럼 은하 중심을 1회 도는 시간을 ‘태양계의 은하년’이라고 한다. 태양향점(태양이 성간 우주를 거 쳐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허큘리스자리 근처로, 밝은 별 베가의 현재 위치 방향이다.

은하 내 태양계의 위치는 지구에서 생명체가 태어나 진화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은하핵 을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의 궤도 모양은 원에 가까우며, 나선팔과 비슷한 속도로 중심부를 돌고 있다. 이는 태양계가 위험스러운 초신성 폭발이 잦은 나선팔을 잘 통과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지구는 오랜 시 간 동안 생명체의 진화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태양계는 항성이 우글거 리는 은하 중심부로부터 넉넉히 떨어져 있다. 은하 중심부는 근처 항성이 중력적으로 서로를 당기기 쉽 기 때문에, 오르트 구름과 같은 작은 천체의 궤도를 흔들어, 그들이 내행성을 향해 낙하하여, 지구 생명 체의 전멸을 가져올 수 있는 파멸적인 충돌 사건을 일으킬 확률을 높일 것이다. 또한 은하 중심부에서 나오는 강렬한 복사 에너지는 복잡한 형태의 생명체가 진화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심지어 일 부 과학자는 지구의 현재 위치는 안전한 곳이 아니며, 태양계 근처에서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에 초 신성이 폭발하여 방사능이 함유된 먼지 입자와 그보다 좀 더 큰 혜성 비슷한 물질이 지구를 향해 분출 되었고, 이 물질은 지난 3만 5천 년 동안 지구 생명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는 가설을 주장하기 도 한다.

우리 태양계와 바로 닿아 있는 이웃을 국부 성간 구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곳은 국부 거품으로 알려진, 짙거나 또는 성긴 성간 구름이 펼쳐진 영역이다. 국부 성간 구름의 폭은 약 300광년이며, 허리가 잘록 한 모래시계처럼 생겼다. 거품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 초신성 여러 개가 폭발했었다는 증거가 되 는, 높은 온도의 플라스마로 가득 차 있다.

태양으로부터 10광년 이내 범위에는 이웃 별이 몇 개 없다. 가장 가까운 이웃 별은 센타우루스자리 프 록시마로 태양으로부터 4.2광년 떨어져 있으며, 중력으로 프록시마와 연결되어 있으리라고 추측되
센타우루스자리 알파 A, B 항성계가 4.4광년 거리에 있다(이런 이유로 프록시마를 센타우루스자리 알파 C로 부르기도 한다). A와 B는 가까이 연결되어 있는 쌍성으로 태양과 비슷하며, 프록시마는 적색 왜성으로 매우 어둡다. 그 다음으로 태양과 가까운 항성은 적색왜성 바너드 별(5.9광년), 울프 359(7.8 광년), 랄랑드 21185(8.3광년)이다. 10광년 이내에서 가장 밝고 무거운 이웃 별은 8.6광년 떨어진 시리 우스로, 질량이 태양의 2배 가까운 주성 A와 짝별 백색왜성 B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 10광년 내 나머 지 별로는 적색왜성 쌍성으로 구성된 루이텐 726-8(8.7광년), 홀로 있는 적색왜성 로스 154(9.7광년) 가 있다. 태양처럼 홀로 있으면서 비슷한 G형 주계열성 중 가장 가까운 별은 고래자리 타우로 11.9광 년 떨어져 있다. 이 별의 질량은 태양의 80퍼센트이며, 밝기는 60퍼센트 정도이다. 태양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외계 행성은 태양보다 어둡고 가벼운 K형 항성 에리다누스자리 엡실론을 돌고 있으며 10.5광 년 떨어져 있다. 엡실론 주위에는 한 개의 행성 에리다누스자리 엡실론 b의 존재가 확인되어 있는데, b 의 질량은 목성의 1.5배에 어머니 항성을 6.9년에 한 바퀴 돈다.

 

우리 태양계와 마찬가지로 다른 항성 주위에도 행성계가 형성되어 있다. 이들 행성계를 구성하는 외계 행성(外系行星, 태양계 밖에 존재하는 행성)은 1990년대부터 발견되기 시작하여, 2013년 4월 기준으 로 880개가 넘는 행성이 발견되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대부분의 외계 행성은 목성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질량을 지니고 있다. 게자리 55는 최소 5개의 행성을 거느리고 있으며, 이외에도 많은 항성이 2 개 이상의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 지구형 행성은 질량이 작기 때문에 발견된 사례가 드물지만, 관측 기 술이 정교해지면서 지속적으로 발견될 것으로 여겨진다.

태양계 기원설

성운설 : 데카르트칸트, 라플라스(1796년)의 이론과 관찰에 바탕을 둔 과학적 첫 이론이 제시되었 다. 이 이론에 따르면, 느리게 회전하는 가스와 먼지의 구름덩어리가 냉각되고 중력으로 말미암아 수축 하였고, 수축함에 따라 이는 더 빠르게 회전하게 되었고, 회전축을 따라 평평해졌다. 이는 결국 질량중 심 주변을 자유궤도로 도는 적도 물질로 구성된 렌즈형의 모양이 된다. 그 후 물질들은 여러 고리에 응 집된다. 응집된 덩어리들은 각각 조금씩 다른 비율로 궤도를 돌면서 각각의 고리에서 초기 행성을 형성 하게 된다. 초기 행성의 수축에 기초를 둔 축소판 과정을 통해 위성이 형성되며, 최초의 먼지와 가스 덩 어리의 중심 덩어리가 수축하여 태양이 형성된다.

행성과 태양이 하나의 과정에서 함께 형성되는, 이 일원론적인 이론은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 이 이론은 태양계의 대부분의 각운동량이 태양 안에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 태양계 질 량의 99.86%의 질량을 가진 태양은 태양계 형성 시의 각운동량의 오직 0.5%만을 가진다. 그 외 나머지 각운동량은 행성의 궤도에 포함된다. 이로 인해 19세기의 모든 이론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비록 과학 적 원리에 바탕을 한 이론일지라도 관찰된 내용과 일치하지 않았고, 결국 폐기되어야 했다.

조우설 : 성운설 이후 제임스 진스(1917년)가 태양과 행성이 다른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이원론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르면, 태양을 지나쳐간 한 무거운 항성이 태양으로부터 주기적으로 변동하는 가는 실을 뽑아내게 된다. 중력적으로 불안정한 필라멘트는 부서져 각각의 압축물이 초기 행성을 형성한다. 이 초기 행성은 태양 주변을 지나쳐 멀어져가는 항성에 의해 끌어당겨져, 태양을 중심으로 한 궤도에 남게 된다. 최초의 근일점을 지날 때에 위의 축소판 과정이 일어나 초기 위성을 형성하게 된다.

이 이론은 처음에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곧 문제가 발견되었다. 해럴드 제프리(1929년)는 순환의 개념 에 대한 수학적인 논의에 근거해서, 태양과 비슷한 실질 밀도를 가진 목성의 경우 비슷한 회전 주기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헨리 노리스 러셀(1935년)은 태양으로부터 빠져나온 물질이 태양 반지 름의 4배 거리(=수성 궤도 안) 이상 가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이것은 각운동량에 관한 또 다른 문제였다. 그 뒤 라이먼 스피처(1939년)는 태양에서 나온 물질이 목성의 질량을 가지게 된다면, 이는 106K의 온도를 가지게 되며, 이 경우 행성으로 수축하기보다는 폭발한다는 것을 계산해 냈다. 이후 태 양의 핵반응으로 즉각 소모되었을 리튬과 베릴륨, 붕소가 지구의 지각에서 발견된다는 것과 관련한 반 대 주장이 등장하였다. 항성과 항성 사이 공간은 매우 넓기 때문에 원시 태양과 다른 별이 만날 확률이 극히 희박하다는 것도 문제점 중 하나이다.

라플라스와 진스의 이론은 과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결국 과학적 비판에 굴복되었다. 비록 다른 종류 이기는 하지만, 두 이론 모두 각운동량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이론이 제시한 새 로운 생각은 현대 이론의 기반이 된다.

현대 이론

부가 이론

1944년에, 소련 유성기어장치 과학자 오토 슈미트와 유리 등은 새로운 종류의 이원적인 이론을 제안하 였다. 그는 망원경을 통한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저온 고밀도의 구름덩어리가 은하에서 형성된다고 주 장했다. 이때, 포획된 물질은 처음에는 태양 주위를 타원 궤도를 그리며 회전하다가 차츰 원 궤도로 전 환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입자 간의 충돌의 횟수가 증가하게 되면서 입자의 크기도 커지고 서로의 인력도 커지게 되어 점점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원시 태양이 이 구름덩어리를 지나가면서 이 먼지-가스 덩어리를 포획한다고 주장하였다. 슈미트는 에너지를 고려할 때에, 두 개의 고립된 천체가 있으면, 한 천체의 구성 물질은 다른 천체에게 포획되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또한 일부 에너지를 제거하기 위해서 3번째 천체, 즉 다른 별을 도입했 다. 세 번째 천체의 필요로 말미암아 이 이론은 다소 타당성을 잃었지만, 슈미트의 주장은 구름덩어리 가 광범위한 지역에 있었고, ‘구름덩어리+별’이 다체형 시스템(Many-body system)처럼 행동한다는 것에서부터 타당성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솜뭉치/ 초기 행성이론

1960년에, 윌리엄 맥크레아(William McCrea)는 행성의 형성이 성단의 형성과 연결된다는, 또한 태양 의 느린 회전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제안한다. 맥크레아의 이론은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는 가스와 먼지의 구름덩어리에서 시작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난류로 말미암아 가스의 흐름끼리 충돌이 생기면, 평균 이상의 밀도 지역을 형성하게 되는데, 솜뭉치로 지시된 이 고밀도 지역은 구름덩어리를 통과해 움 직이면서 충돌할 때마다 합쳐진다. 그 뒤 거대한 집합체가 형성되면, 이는 다른 솜뭉치를 끌어들여서 초기 항성을 형성하게 된다. 무작위로 어느 방향에서나 초기 항성으로 솜뭉치가 합쳐져 들어가면서, 초 기 항성의 최종 각운동량은 작아지게 된다.

이 이론의 기본 전제조건에서는, 각 솜뭉치는 지구의 약 3배의 질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목성과 같은 거대한 행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솜뭉치가 결합해야 했었다. 행성을 형성 할 이 집합 체는 현재의 행성의 각운동량보다 훨씬 큰 각운동량을 가지고 있었다. 맥크레아는 이 명백한 한계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변화시켰다. 초기 행성이 수축하면서 이는 회전적으로 불안정해졌을 것이며, 이 상태 에서 초기 행성은 아마도 질량비 8:1의 두 개의 부분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질량중심과 관련하여 더 빨 리 움직이는,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이 대부분의 각운동량을 가지고 태양계로부터 탈출했을 것이다. 분 리된 두 부분의 연결부에서 작은 응축 덩어리가 형성되고, 이것이 큰 부분에 의해 위성 중 하나로 남게(유 지) 되었을 것이다. 맥크레아는 지구형 행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위와 같은 분열 과정이 초기 행성의 고 밀도 핵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야 했다. 그래서 태양계 안쪽 부분에서는 큰 탈출 속도를 가진, 두 부분 모두 태양계 안에 남아서 지구-화성 쌍과 금성-수성 쌍을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몇몇 매개변수를 현재의 태양의 수치에서 가져왔고, 다른 매개변수는 태양-행성-위성 시스 템을 이 이론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게끔 선택한 값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은 심각한 문제 점을 가지고 있다. 솜뭉치 모양의 먼지-가스 덩어리는 불안정하며, 솜뭉치의 충돌과 다음 충돌 사이의 시간보다 짧은 수명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솜뭉치의 충돌과 행성의 형성이 이 이론대로 진행되지 않 는다는 것이다.

현대 성운설
최근 가장 이상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태양계 기원설로서, 라플라스의 이론에 근간을 두고 있는 이론이
다. 그 시작은 가스와 먼지로 된 불균질한 성운이다.

현대 성운설에 따르면, 태초의 이 성운은 난류 현상으로 자전 운동을 하게 되고, 각운동량을 가지게 된 다. 각운동량은 그 값이 물체의 질량과 그것의 분포도, 회전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물체의 질 량이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분포하거나 회전 속도가 빠른 경우에 그 값이 커진다. 만약에 회전하는 물 체의 크기가 작아지면, 분포도가 감소하여 각운동량의 값도 감소할 수밖에 없지만, 동일한 각운동량의 값을 보존하기 위해서 물체는 더 빨리 돌게 된다.

성운은 자체의 인력으로 말미암아 수축하게 되고, 이러한 수축이 진행되면, 성운은 자전 때문에 타원 형을 이루면서 각운동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자전 속도가 빨라지게 된다. 그 결과 성운 중심부의 밀도 는 급속히 증가되어 질량이 큰 덩어리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원시 태양이다. 원시 태양은 중력 수축을 함으로써 막대한 열을 방출하게 된다. 동시에 수축한 성운은 밀도가 증가함에 따라 수많은 먼지입자 와 얼음조각, 이산화탄소, 암모니아, 메탄 등과 함께 섞여서 큰 입자를 형성하게 되고, 이들 입자가 수 십 억 개 모여서 소행성 크기의 미행성이 형성된다. 미행성은 서로의 강한 중력으로 끌어당겨져 충돌 함으로써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원시 행성이 형성된다.

물론 현대 성운설이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이라 평가는 받고 있지만, 이 역시 한계를 드러내 는 점이 있다. 우선, 최초의 성운에서 난류 현상이 강하게 일어남으로써 자전 운동이 일어나게 되지만, 이러한 난류가 강하게 일어날 경우, 입자가 모여들어 거대한 미행성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성운의 가스 덩어리의 소실 과정, 행성의 위치, 혜성과 소행성 등에 대한 명확한 해결이 이루 어지지 못한다.

태양계의 탄생과 진화

여러 가지 태양계의 기원설이 제기되어 왔으며, 그중 앞의 현대 성운설에 따르면, 우리 태양계는 46억 년 전 거대한 분자운이 중력적으로 붕괴하면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분자운의 폭은 수 광년 정도였으 며, 아마 태양 외에도 같이 태어난 형제 별이 여럿 있었을 것이다.

훗날 태양계 부분이 될 태양 성운 지역이 붕괴되면서 각운동량 보존 법칙에 따라 물질이 뭉치는 부분 은 점점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질량이 모인 중심부 부분은 주변 원반 지대보다 훨씬 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수축하는 성운이 회전하면서, 성운을 구성하는 물질은 약 200 천문단위 지름에 이르는 크기의 원시 행성계 원반으로 납작하게 공전면에 몰렸고, 뜨겁고 밀도 높은 원시별이 원반 중 심에 자리 잡았다. 이 항성 진화 단계에서 태양은 황소자리 T형 항성의 상태에 이르렀으리라 여겨진 다. 최근 여러 황소자리 T 항성을 연구한 결과 이들 주위에는 태양질량의 0.001~0.1배에 이르는 양의 물질이 원반 형태로 둘려 있으며, 물질 질량의 절대 다수는 중심부 항성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 다. 행성은 이 원반의 물질이 뭉쳐서 태어났다.

5천만 년 후 항성 중심부의 수소 밀도가 막대해져서 핵융합을 할 수 있을 수준이 되었다. 항성의 표면 온도, 반응 속도, 압력, 밀도는 태양이 유체 정역학적 균형 상태에 이를 때까지 계속 상승했다. 균형을 찾는 시점에서 태양은 성장이 막 끝난 젊은 주계열성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계는 태양이 색등급도 위 주계열 띠를 떠나기 직전까지는 지금과 별 다를 바 없이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태양이 죽음을 향해 진화하기 시작하면서 이 안정 상태는 깨진다. 태양이 중심핵 에 있던 수소를 모두 핵융합 연료로 써 버리면, 중심핵을 지탱하는 에너지 산출량은 줄어들어 중심핵이 스스로 붕괴하게 만든다. 붕괴하면서 증가하는 압력은 중심핵을 뜨겁게 하여 연료는 더욱 빠르게 탄다. 이 결과 태양은 11억 년마다 10퍼센트 정도씩 밝아진다.

지금으로부터 약 54억 년 뒤 태양의 핵에 있던 수소는 완전히 헬륨으로 바뀌며, 주계열성으로서의 태양 의 일생은 끝난다. 이 시점에서 태양의 반지름은 지금의 260배까지 부풀어 올라 적색 거성 단계에 돌입 한다. 표면적이 막대하게 늘어나기 때문에 표면 온도는 크게 낮아져 2,600 켈빈 수준까지 내려가 붉게 보이게 된다.

이후 태양의 외곽층은 우주로 떨어져 나가고 중심부에 극도로 빽빽하게 압축된 백색왜성만이 남는다. 이 천체 부피는 지구와 거의 비슷하지만, 질량은 태양의 절반이나 될 것이다. 떨어져 나간 외곽층은 우리 가 행성상성운이라고 부르는 구조를 형성할 것이며, 태양을 구성하고 있었던 물질 중 일부를 우주 공간 으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

 

019. 화음 harmonia

화음 : 음악에 색을 입히는 것. 서로 다른 높이의 음이 한꺼번에 들리는 것. 악곡에 입을 입히다. 음정 : 두 음 사이 간격. 숫자로 표현. 3화음.

기원전 6세기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가장 순수한’ 화음은 2:1이나 3:2 또는 4:3 같은 수학적 비율에 기 반을 둔다고 주장. 대장장이들이 다양한 크기의 망치를 동시에 내리칠 때 소리를 듣고 만든 이론.

협화음 불협화음

020. 플라톤(기원전 427~347년)

플라톤(고대 그리스어: Πλάτων, Pltn, "넓은, 어깨 폭이 넓은";[1], 영어: Plato /ˈpleɪtoʊ/[2]; 기원 전 428년/기원전 427년 또는 기원전 424년/기원전 424년 [a] ~ 기원전 348년/기원전 347년)은 다양한 서양 학문에 영향력 있는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며, 아리스토텔레 스의 스승이었고, 현대 대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인 ‘아카데메이아’를 아테네에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에서 폭넓은 주제를 강의하였으며, 특히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등 많 은 철학적 논점에 관해 저술하였다. 플라톤 저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 그의 《대화편》이다. 비록 일 부 편지는 단지 그의 이름을 붙여서 전해지지만, 플라톤이 쓴 진짜 《대화편》은 모두 온전하게 전해진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현재 학자들 합의에 따라, 그리스인들이 플라톤의 것으로 생각하는 ‘알키비아데 스 I과 ‘클레이토폰’ 등과 같은 《대화편》은 의심스러우며 ‘데모도코스’와 ‘알키비아데스 II’ 등과 같은 대화편은 대개 위조되었다고 판단한다. 대개 편지는 거의 모두 위조되었다고 여기며, 예외로 일곱 번째 편지만 위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대화편》 에 있는 내용과 주장 가운데 무엇이 소크라테스의 것이고 플라톤의 것인지에 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남긴 저술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종종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른다. 그러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게 확실하다. 따라서 수많은 플라톤의 아이디어, 적어도 그의 초기 연구는 소크라테스에게서 가져오거나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가 이성 우위의 전통을 가진 서양 철학에 미친 영향은 더할 수 없이 크다. 영국 철학자인 화이트헤드 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 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라고 평했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소크라테스에게 배우고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는 데, 그의 저서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된 변증론에 관한 《대화편》이어서 그와 스승과의 학 설을 구별하기 힘들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정의 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키레네 학파로부터 이데아와 변증법의 기초를 얻었 고, 피타고라스 학파를 접하며 실천적 정신과 실생활에의 흥미를 얻어 그의 독자적인 사상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 사이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라케스〉 등을 쓰고, 40세에 귀국하여 〈고르기아스〉, 〈대()히피아스〉, 〈소() 히피아스〉를 썼다.

그는 그의 이상 국가를 실현해 보고자 친구인 디온의 권고로 시켈리아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의 초청 에 응하였으나, 그의 과두 정치를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얻어 노예로 팔리기까지 하였다. 후에 그의 저작 을 본 퀴레네 사람 덕분에 구출되어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아카데메이아 학원을 건립하고 제자 양성에 전력하면서 저작에 몰두하였다. 〈향연〉, 〈파이 돈〉, 〈국가〉, 〈파이드로스〉 등 주요 저술이 여기서 이루어졌고, 이 학원은 529년까지 계속되었 다. 대학교의 초기 형태인 ‘아카데미’(Academy)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기원전 357년 디오니시오스 2세의 간청을 받자 망설이던 끝에 다시 시켈리아로 가서 이상 정치를 펴보 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년 만에 귀국하여 〈법률〉 등 몇 개의 저서를 더 쓴 뒤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데아론

플라톤은 파이돈부터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상에서 독립하여 이데아론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학설 을 제창하였다. 우리가 삼각형을 생각할 경우에 현실적으로 삼각형을 아무리 정확하게 그린다고 해도 어느 하나도 완전하게 그려 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한 변의 직선마저 완전하게 긋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한 직선, 완전한 삼각형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 존재를 인정하고 계산도 하여 해답한다. 결국 현실에 있어서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현 실의 삼각형은 이 이데아를 인정하는 까닭에 삼각형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고 하겠다.

수학의 대상뿐만 아니라 선()의, 미()의, 용기의 이데아라는 것도 거기에서 생각해 낼 수 있다. 현 실적으로는 완전한 선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겠으나 완전한 선의 이데아는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만 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보다 이것이 낫다고 하는 비교는 할 수 없게 된다. 아름다운 꽃은 조락(凋落)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폐허가 되어도 아름다움 자체는 그것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미의 이데아이 다. 이 미의 이데아에 현실의 개체가 의탁될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개체가 된다. 즉 미의 이데아는 아름 다운 개체의 원인이다.

사람의 영혼은 원래 이러한 이데아계()에 있었는데 육체를 갖추고 이데아를 망각하여 지상으로 내려 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진·선·미를 인식하는 것은 영혼이 원래 살던 이데아계를 상기하는 것과 같다는 상기설을 주장하였다.

‘플라톤의 교육관’ 목적

그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된 충동적이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정욕과, 육체와 결합되지 않으 며 불사적인 순수한 이성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성'은 매우 순수한 것이지만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완전 지성 실체계인 이데아를 직관할 수 없으며 세상에 탄생하여 육체 속에 듦으로써 이데아를 잊고 있 다. 이 잊었던 이데아를 동경하는 마음이 에로스이며, 현상을 보고 그 원형인 이데아를 '상기'하여(상기 설), 인식하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적 부분의 덕이 지혜이며, 정욕적 부분의 덕을 절제,이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정욕을 억압하는 기개의 덕을 용기라고 하는 것이다. '올바름(dikaiosyne, 또는 '정의')란 여러 덕이 알맞게 그 기능을 발휘할 때의 상태를 말한다.' 그는 이러한 덕론을 통하여 인 간 개인의 윤리학을 논하였다. 그러나 정의의 실현은 개인의 덕을 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 하여 사회 전체의 윤리설을 주장하였다. 그것이 그의 '국가(Politeia)'다.

플라톤의 교육방법

그는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욕의 부분이 농·공·상업의 서민이며, 기개의 부분은 군인·관리, 이성의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성은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유명한 철인 정치론을 전개했다. 이러한 통치자 의 교육 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 있다.

플라톤은 교육을 5단계로 나누었다. 첫째 단계는 출생부터 17세까지로서, 이 시기는 기초적인 도야(陶 冶)의 단계로 보아, 문예·음악·조형미술 등 비교적 수준이 낮은 지적 도야 및 일반적으로 정서적 방면에 해당되는 학예와 체육을 주로 하였다. 체육도 단지 육체의 단련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정신 적 도야를 위한 것이었다. 이들 과목은 유희적인 방법으로 가르치게 하였고, 이런 자유로운 학습활동을 하는 가운데 각자의 개성이 발견되게 하였다. 둘째 단계는 17세부터 20세까지로, 이 시기의 교육은 군 사훈련의 기초가 되게 하며, 어떤 곤경에도 참아낼 수 있는 강인한 심신을 기르기 위하여 체육만을 전 수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성적이 불량한 자는 생산자 계급으로 남게 했다. 셋째 단계는 20세에서 30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철학의 예비교과로써 수학·기하·천문·음악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우 게 했다.

 

이 시기에 성적이 불량한 자는 군인으로 남게 했다. 넷째 단계는 30세에서 36세까지로서, 이때에는 전 적으로 협의(狹義)의 변증법을 배웠다. 이 시기에는 감각적인 것을 떠나 순수하게 관념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취급하는 시기로 설정하였다. 다섯째 단계는 35세에서 50세까지로서, 이 시기를 플라톤은 '동 굴에 들어가는 시기'로 비유하였다. 이때가 되면 인간은 속세에 나와 군사와 정치를 실습·연구하고, 풍 부한 경험과 견문을 쌓는다. 50세 이후에는 평생토록 변증법의 초보적인 대상인 선()의 이데아를 연 구하고, 교대로 정치를 맡으며 후진을 교육한다. 플라톤이 주장했고 또한 '아카데미아'에서 실행한 교 육방법은 소크라테스적 방법이었다. 그것은 소피스트들의 논쟁술·궤변술에 빠지는 대화법이 아닌, 자 기 성찰과 진리탐구를 위한 방법이며, 생명이 없고 또 문자에 의한 교육이 아닌 살아 있는 말을 존중하 는 대화법이었다.

아동발달 연구
플라톤은 [국가(the Republic)]에서 인간발달에는 세 가지 국면이 있는데, 그것은 욕망, 정신, 그리고 신성이라고 하였다. 가장 낮은 수준의 욕망(desire)은 오늘날 본능, 욕구, 충동으로도 표현되며, Freud 의 정신분석이론에서 말하는 원초아의 개념과도 비슷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욕망은 주로 신체적 욕구 만족과 관련되어 있다. 그 다음 수준인 정신은 용기, 확신, 절제, 인내, 대담과 같은 개념이며, 최고의 수준인 신성은 초자연적이고 영원하며 우주의 본질을 이룬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정신으로서 오늘 날 이성으로 표현된다. 플라톤은 이미 그 시대에 인간이 성장함에 따라 낮은 수준이 높은 수준으로 대 체되는 과정이 발달이라는 생각을 했다.
플라톤에 의하면 3세까지 유아는 공포나 고통, 슬픔의 감정을 경험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유아기는 그 어느 시기보다도 습관에 의해 성격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Platon, 1953)면서 유아에게 쾌락을 제 공하는 것은 아이를 버려놓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플라톤은 성격형성에 있어서 초기경험의 중요성 을 강조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경험에 의해 인간의 성격이 수정될 수 있다는 점 또한 인정하 였다. 아동기에는 이성이 성숙되지 않기 때문에 아동교육은 주로 음악이나 스포츠 등에 중점을 두고 같은 또래와 어울림으로써 사회성발달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플라톤은 6세가 되면 “남자아이들 은 남자아이들끼리 놀게 하고, 여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끼리 놀게 하라”고 하면서 성의 분리를 주장하 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전통 아동교육에서의 ‘남녀칠세부동석’ 개념과 유사하다.
청년기가 되면 최고의 국면인 이성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때는 이성적,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교육과정을 과학이나 수학으로 대체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교육철 학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교육을 환경의 영향을 받는 정신의 발달이라고 해석하였다. 플라톤은 이 미 그 때 개인차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우리 인간은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므로, 각기 적성에 알맞은 일에 종사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Muuss, 1996).
철인 정치
철인 정치론을 전개한 플라톤은 기본적으로 엘리트에 의한 지배를 옹호한다. 일반적으로 귀족정은 평 등사회가 아닌 신분사회를 옹호하는 데, 플라톤 또한 신분사회를 옹호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귀족정 의 궁극적인 목적과 그 실현 양태는 일반적인 귀족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귀족정에서의 왕은 ‘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높은 신분으로서 도덕적 의무를 중시해야 하는데, 그 실현은 한가지 예를 들면 왕의 사유재산의 형태로 나타난다. 플라톤은 왕의 사유재산은 오직 공익을 위해서만 쓰여야 한다(공유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 밑의 귀족들까지도 사유재산을 공유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 장 높은 신분의 상징인 왕이라면 그만큼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해야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정 치 일선을 담당한 일선 ‘귀족’들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무사 계급에 기반한 귀족 또는 세습에 의한 귀족이 아니라, 철학 지식이 충만한 철학자들을 가리킨다. 그는 ‘지식인에 의한 독재’를 줄곧 주장해왔 으며, 시민 계급에 의한 토론 정치인 아테네의 민주정을 ‘우민 정치’라고 비판해 왔다.
뿐만 아니라 그의 ‘네가지 주된 덕’(cardinal virtues)에서는 ‘조화’라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데, ‘네가지 주된 덕’에 맞는 각각의 신분이 각자 맡은 일만을 해야하며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 로 다른 일을 한다거나 서민이 전쟁을 한다는 것과 같은 용기를 보이는 것은 플라톤의 관점에선 ‘사회 적 부조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초기 사회주의

오늘날 사회주의라고 하면 일컬어지는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전제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만, 인간은 정치·사회적으로 독립될 수 없는 개인이며, 더 나은 정치·, 사회 체제를 만들려는 것이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진리라고 설파했다. 또한 인간은 더 나은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이성적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의무'가 부여된 존재라는 목적론적 인간관이란 개념을 만들었기 때문에 초기 관념적 사회주의 기 조의 창시자라고 알려졌다.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으로 계승이 되기도 했다.

저작
현존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대화편》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주요 해설자로 한다.

35편의 《대화편》과 13편의 서간은 전통적으로 플라톤의 것으로 여겨졌으나 현대 학자들은 최소한 일부 저작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를 의심하고 있다. 플라톤의 저작은 여러 방식으로 간행된 바 있는데, 그에 따라 플라톤의 글을 명명하고 배열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가 되었다.

플라톤의 글을 분류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16세기 앙리 에티엔(헨리쿠스 스테파누스)의 플라톤 판본에 서 비롯되었다.

또 플라톤의 글을 배열하는 방식으로 4부극에 따르는 전통이 있었는데,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이 방식이 고대의 학자이자 티베리우스 황제의 궁정 점성가였던 트라쉬불로스의 것이라고 여겼다.

아래 플라톤의 저작 목록에서 학자간에 플라톤이 쓴 글인지 합의가 되어 있지 않은 책은 (1) 표시를, 그리고 일반적으로 플라톤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책은 (2) 표시를 달았다. 표시가 없는 저작 은 플라톤이 쓴 것으로 여겨진다.

I. 에우튀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II. 크라튈로스,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트, 정치가
III. 파르메니데스, 필레보스, 향연, 파이드로스
IV. 알키비아데스 1 (1), 알키비아데스 2 (2), 히파르코스 (2), 에라스타이 (2) V. 테아게스 (2), 카르미데스, 라케스, 뤼시스

VI. 에우튀데모스,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메논 VII. 대 히피아스 (1), 소 히피아스, 이온, 메넥세노스 VIII. 클레이토폰 (1), 국가,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IX. 미노스 (2), 법률, 에피노미스 (2), 편지들 (1)

그 밖에 저작은 플라톤의 이름을 빌었으나 상당수는 고대에 이미 위작으로 여겨졌으며, 트라쉴로스는 자신의 4부극식 저작 배열에서 이런 류를 넣지 않았다. 아래 작품은 "위작"(Notheuomenoi) 또는 "위 서"(Apocrypha)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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