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아트리체
방학이 끝난 후 나는 친구를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성 **시로 출발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나를 따라와서 온갖 일들을 세심하게 배려해 주었으며, 김나지움의 선생님이 운영하는 소년 기숙사로 내 거처를 정해 주셨다. 하지만 부모님이 나를 어떤 곳에, 어떤 아이들 사이로 넣은 것인지 알았다면 기절할 만큼 놀라셨을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착한 아들이 되고 선량한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인지, 나의 본성대로 다른 길로 뻗어 나갈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나는 아버지의 세계와 정신적인 영향력 아래 행복한 생활을 하고자 했던 노력을 오래 지속했다. 이러한 노력은 성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견진성사를 받은 후, 방학 동안 처음으로 느꼈던 이상한 공허함과 고독함은-나는 이 공허함과 희박한 공기를 나중에 얼마나 진하게 맛보았는지!-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고향에 작별을 고하는 일은 이상하리만큼 쉬웠다. 전혀 슬프지 않았다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누나들은 끝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전혀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자신이 무척 놀라웠다. 나는 그래도 꽤 감정이 풍부한 편이었고 근본은 제법 선량한 아이였는데 지금은 달랐다. 나는 외부 세계에는 아주 냉정한 태도를 취하며 온종일 나의 내부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에는 가장 내면적인 곳에서 흐르고 있는 금기 같은 어두운 냇물 소리를 듣는 데 온 정신을 빼앗겼다. 지난 반년 동안 나는 급격히 자랐다. 야윈 모습으로 불완전하지만 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소년다운 귀여움은 전혀 찾아보기 어려워서 나 자신조차 이런 모습으로 남에게 사랑받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나 스스로도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막스 데미안을 마음 깊이 동경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데미안을 미워하기도 했고, 내 자신이 짊어지게 된 죄악 같은 병과 생활의 공허함의 책임을 은연중에 데미안에게 떠넘겼다.
학생 기숙사에서 나는 귀여움을 받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존중을 받지도 못했다. 처음엔 놀림을 받았고 다음엔 경원당했으며 음울한 녀석, 불쾌한 별난 녀석으로 취급되었다. 나는 그 역할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한층 더 과장하기까지 했는데 표면적으로는 가장 사나이답게 세상을 멸시한다는 듯이 고독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남몰래 비애와 절망감에 몸부림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집에서 쌓아두었던 지식을 조금씩 파먹었는데 지금의 학급이 이전의 학급에 비해 다소 뒤떨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나이가 같은 또래를 어린애라고 얕보는 습관마저 생겼다.
일 년쯤, 아니 그 이상의 시가이 그렇게 지나가고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아무런 새로운 변화는 없었다. 나는 기꺼이 집을 다시 떠나왔다.
11월 초순의 일이었다. 나는 어떤 날씨에도 생각에빠져 정신없이 산책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데 그렇게 걸으면서 나는 일종의 즐거움을, 우울과 염세와 자기 모멸감에 가득 찬 뒤틀린 기쁨을 맛보곤 하였다. 어느 날 나는 축축히 안개가 내리고 있는 해질녘에 교외에 있는 공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공원의 넓은 가로수 길은 텅 빈 채 나를 맞아들였다. 길에는 낙엽이 겹겹이 깔려 있었고 나는 어두운 쾌감을 느끼면서 발로 그 낙엽을 헤적거렸다. 축축하면서도 쓴 냄새가 공기 속을 떠돌았고 먼 곳의 나무들은 안개 속에서 도깨비처럼 그림자를 지으며 서 있었다.
긴 가로수 길의 끝에서 나는 망설이는 심정으로 멈춰서서 검은 나뭇잎을 쳐다보며 그것들이 바스라져 사라져가는 축축한 냄새를 탐욕적으로 들어마셨다. 나의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그 냄새에 응답하며 환영의 뜻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 인생의 무의미함이여!
누군가 옆길에서 바람에 외투의 높은 깃을 펄럭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내가 그 자리를 떠나려 하자 그 사람이 나를 불렀다.
”이봐, 싱클레어.”
다가운 사람은 우리 기숙사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알폰스 베크였다. 나는 그를 만나는 것을 좋아했는데 내게도 다른 애들에게 하는 것처럼 언제나 비꼬듯이 이야기하며 어른인 척하는 태도를 제외하면 별달리 그에 대해 반감을 갖진 않았었다. 그는 곰처럼 힘이 세고 기숙사의 사감을 꼼짝도 못하게 하고 있다는 김나지움 학생들간의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넌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니?”
그는 어른들이 때로 우리 또래의 학생들을 어른처럼 대해줄 때와 같은 어조로 상냥하게 말을 했다.
“어디, 내기를 해볼까. 너 시를 짓고 있지?”
”전혀 그렇지 않아.”
나는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끊었다.
그는 낄낄거리고 웃으며 내게로 다가와서 전혀 익숙치 않은 태도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경계할 건 없어, 싱클레어. 내가 그 정도도 모를 줄 아니? 이렇게 안개가 내리는 가을 저녁에 사색에 잠겨 거닐 때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법이거든. 그럴 때 사람들은 흔히 시를 쓰지. 그런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물론 사라져가는 자연에 대해서나 아니면 그것과 비유되는 사라져간 청춘에 대해서 마랴. 하인리히 하이네를 봐.”
”난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 말에 항의했다.
”그래, 좋도록 생각하렴! 그런데 이런 날씨에는 한잔의 포도주나 아니면 비슷한 것이 있는 조용한 곳을 찾아가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때 잠깐 나를 따라올래? 나도 마침 혼자니까. ---생각이 없니? 네가 모범생이 되겠다고 한다면 굳이 권하진 않겠다만.”
우리는 곧 조그만 교외의 주막집에 마주앉아 다소 미심쩍은 맛의 포도주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언지 새로운 맛이 느껴지긴 했다. 나는 술을 마셔본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곧 취하여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나의 내부의 창문이 활짝 열린 것 같았고 세계가 그 속에 비쳐들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참으로 무섭게도 오랫동안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지내왔던 것이다. 나는 정신없이 지껄였고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까지 멋지게 해치웠다!
베크는 기꺼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마침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는 내 어깨를 치며 아주 근사한 녀석, 재주있는 녀석이라 불렀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켰고 그러한 이야기들이 인정을 받았다는 것, 그것도 나이많은 선배에게서 제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날뛰었다. 나는 독창력있는 녀석이라고 한 그의 말은 내 마음속에 감미롭고도 독한 포도주처럼 스며들었다. 세계는 새로운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고 사상은 수백의 세찬 샘처럼 솟구쳤으며 영혼과 불이 나의 내부에서 불타올랐다. 우리는 선생님과 급우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멋지게 의기투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리스인과 이교도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베크는 나로 하여금 정사에 대한 고백을 들으려 애를 썼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야기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할 만한 경험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엇다. 마음속에서 혼자서만 느끼고, 만들어내고, 공상해온 것은 나의 내부를 불태우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은 술의 힘으로도 불가능했다.
여자에 대해서라면 베크 자신이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했다. 나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었지만 듣고 있자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온 일들이 사실에 있어서는 아주 평범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알폰스 베크는 열 여덟살쯤 되었을 뿐이지만 벌써 경험이 많았다. 모든 경험 가운데서도 베크는 특히 처녀들이란 아름다운 일이나 은근한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경험을 하였는데 물론 그것은 좋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이었다. 부인네들에게서 더 많은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는데 그네들이 훨씬 그 점에 대해 영리하다는 것이었다. 가령 문방구 주인인 야크겔트 씨의 부인 같은 여자와는 이야기가 잘 통하고 그 가게의 카운터 뒤에서 이제까지 있어온 일들을 어떤 책에도 적힐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넋을 잃고 이야기에 빠져들어 멍청히 앉아 있었다. 물론 내가 야크켈트 부인을 사랑하게 될 리는 없을 것이었지만---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이먹은 사람들에게는 나는 꿈도 꾸어보지 못한 어떤 샘이 흐르고 있는 것이리라. 그 이야기에는 약간의 거짓말도 섞여 있으리라 생각되기도 했고 그가 말한 것은 내 생각 속에서의 사랑의 맛보다는 보잘것없고 평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모두 사실이었고 생활이며 모험이었던 것이고 지금 이 순간 그것을 모두 실제로 경험하고 그 경험을 아주 일상적인 일처럼 취급하는 사람이 내 곁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다소 뜸해지고 활기를 잃었다. 나는 더 이상 천재적인 어린 녀석이 아니었으며 단지 어른의 말에 혹해 귀기울이고 있는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수개월 동안의 나의 비참한 생활에 비한다면 천국에서의 일처럼 감미롭게 들렸다. 주막에 앉아 있는 일에서부터 우리의 이야기 내용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엄격히 금지되고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 속에서 미흡하나마 정신적인 어떤 것을 맛보았고 혁명의 징후를 감지했다.
나는 그날 밤의 일을 뚜렷이 기억한다. 우리가 희미하게 타오르는 가스등의 곁을 지나 차갑고 축축한 밤공기 속으로 귀가를 재촉했을 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취해 있었다. 기분은 좋지 않았고 사실 몹시 괴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 외에 무엇인가 매력과 감미로움이 있었으니 그것은 반란과 방종이었고 생명력과 정신이었다. 베크는 나를 보고 새파란 풋나기 녀석이라고 투덜거리며 욕하긴 했지만 나를 끝까지 책임졌다. 그는 나를 반쯤 떠매다시피 하여 기숙사까지 데리고 왔고 어찌어찌해서 열려져 있는 창문으로 무사히 들키지 않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극히 짧은 동안의 죽은 듯한 잠에서 깨어나자 마음은 괴로웠고 발광할 듯한 고통이 나를 덮쳐왔다.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낮에 입었던 셔츠는 형편없이 구기어졌고 웃옷과 구두는 방바닥에 팽개쳐진 채로 있었으며 땀내와 토사물의 냄새가 풍기고 두통과 구토증과 미칠 듯한 갈증이 나를 휩싸고 있는 동안 홀연 내 마음의 거울에는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한 영상이 비쳤다. 나는 고향과 부모님의 집,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들과 정원을 보았고, 조용한 고향 집의 내 방을 보았으며 학교와 시장을 보았고, 데미안과 견신례의 장면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은 밝게 빛나고 있었으며 모두 아름답고 경건하고 청순하게 보였다. 이 모든 것은---그렇다는 것을 나는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어제까지도, 아니 몇 시간 전까지도 나의 것이었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지금 이 순간 비로소 사라져버리고 저주를 받고 더 이상 나에게 속해 있지 않으며 나를 거부하고 증오에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옛날 가장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의 정원에서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친근함, 어머니의 다정한 입맞춤과 매번의 성탄절, 경건하고도 명랑했던 주 일요일 아침과 정원에 피어 있던 온갖 꽃---이 모든 것들은 황폐해지고 말았다.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내 스스로 짓밟아버린 것이다! 만약 지금이라도 사자가 와서 나를 묶어 쓸모없는 인간, 신성 모독자로 취급하여 교수대로 끌고 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기꺼이 따라가며 그 일을 받아들였을 것이었다.
나의 내면은 이러했다. 천지를 헤매어 다니며 세상을 얕잡아 본 자여! 외람된 정신으로 데미안의 사상에 공명하던 자여! 쓸모없는 인간이며 추잡하고 술에 취하고 더럽고 구역질이 나며 저열하고 거칠어진 짐승 같은 자이며, 추악한 충동의 노예가 된 내가 이럴 수밖에 더 있을까! 온갖 청순함과 빛과 사랑스런 마음으로 가득 차 있던 정원에서 자란 나, 바흐의 음악과 시를 사랑했던 나, 이런 내가 그런 모습이 될 수 있다니! 내 자신의 웃음소리가, 술에 잔ㄸ그 취해 자제력을 상실한 채 충동적이고도 바보처럼 낄낄거리던 웃음소리가 아직도 들려오고 있었으며 나는 심한 구역질과 분노를 느꼈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괴로운 가책 속에서도 고통을 견디는 것은 거의 향락에 가까웠다. 내 마음은 너무나 오랫동안 맹목적이고도 미련스럽게 움츠러들어 있었고 너무나 오랫동안 소리를 죽인 채 쇠잔하게 웅크리고 있었으므로 이런 가책과 고통의 전율과 영혼의 어떤 추악한 감정조차도 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는 분명 감정이 있었고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심장이 고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비참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나는 이렇듯이 해방이나 봄과 같은 그 무엇을 느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나는 거칠게 타락해가고 있었다. 최초의 주정은 얼마 되지 않아 최초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우리 학교에서도 폭주가 성행했고 난행이 속출했었고 나는 그들 가운데 최연소자 축에 끼었는데 얼마가지 않아 한몫 거드는 축이나 풋나기가 아니라 우두머리며 샛별 같은 존재였고 유명하고도 거침없는 주막집의 단골이 되었다. 나는 다시 한번 완전히 어두운 세계, 악마의 세계 속으로 투신했고 이 세계에서는 아주 근사한 녀석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내 자신을 스스로 파멸시켜가는 미치광이의 소굴에서 살고 있었던 것인데 친구들에게는 대장이니, 근사한 녀석이니, 비상하게 날카롭고 재치가 번득이는 녀석이라고 인정받고 있었지만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는 불안에 갇그 찬 영혼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오전엔가 주일 예복차림으로 명랑하고 즐겁게 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보았을 때 돌연 눈물이 흘러내렸던 일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누추한 주막의 더러운 탁자에 기대어 맥주에 취해 낄낄거리면서 텀니없이 방탕한 풍자로 친구들을 웃기고 때로는 놀리고 있는 동안에도 내 마음속의 나는 남몰래 내가 조롱하는 모든 것에 대한 공경심을 품고 있었으며 나의 영혼 앞에, 나의 과거와 어머니 앞에, 그리고 신 앞에 울면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가 한 번도 나의 패거리들과 일체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과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고독했고 그것으로 인해 그렇게도 괴로와했던 것에는 근거가 있었다. 나는 가장 난폭한 패의 마음에도 드는 주막집의 호걸이며 독설가였다. 나는 선생, 학교, 부모, 교회에 대한 생각이나 이야기에서는 재치와 용맹을 떨쳤다---나는 음담패설조차도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 했으며, 한 가지쯤은 해낼 수도 있었다---그러나 나의 패거리들이 여자에게 갈 때만은 한 번도 끼지 않았던 것인데 그것으로 미루어 나는 철면피한 탕자임에 틀림없는 척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외로웠고 사랑에 대한 격렬한 동경과 가망없는 그리움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나 이상 상심하기 쉽고 부끄럼을 많이 타는 사람은 없었다. 때로 젊은 처녀들이 아름답고 말쑥한 차림으로 명랑하고 우아하게 걸어가는 것을 보면 그들은 근사하고 깨끗한 꿈처럼 느껴졌고 나보다 천 배나 선량하고 청순하게 생각되었다. 얼마 동안 나는 야크겔트 부인의 문방구에는 가지도 못했는데, 그여자를 보면 알폰스 베크가 그녀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생각날 것이었고 그러면 내 얼굴이 무참하게 새빨개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새로운 패거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독함 이질적인 존재라고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더욱더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올 수가 없었다. 이젠 폭음을 하고 터무니없는 장담을 해대는 일이 정말로 내게 한 번이라도 즐거웠던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사실상 나는 술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번번이 고통스런 결과를 당했다. 만사가 다 강제적이었다. 그밖에 다른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몰랐으므로 그저 하던 그대로 계속했을 뿐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혼자인 것을 무서워했고, 노상 마음이 그리로 향해가는 온화하고 수줍은 내적인 자작이 두려웠으며 빈번히 엄습해오는 따뜻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결핍되어 있었다. ---그것은 진실한 친구였다. 내가 좋아하는 동급생이두서너 명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실한 축에 속해 있었고 나의 악행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아무에게도 비밀스런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피했다. 모두들 나를 근본이 흔들리고 있는 희망없는 불량학생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선생님들도 나의 행동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누차 혹독한 처벌을 내리기도 했으나 마침내는 퇴학 처분을 받게 되리라고들 기대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착한 학생은 아니었고, 이러한 방탕한 생활을 더 이상 지탱해갈 수는 없다고 느끼면서도 애써 그러한 악행을 고집해감으로써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고독하게 만듦으로써 신이 우리들 자신에게로 인도해줄 수 있는 길은 너무도 많다. 신은 그때 나와 함께 이런 방탕의 길을 갔던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악몽과도 같았다. 더러운 것, 찐득거리는 것, 깨어진 맥주잔과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지껄이며 보낸 밤들 속에서 나는 몽유병자처럼 쉴새엇이괴로와하면서도 구역질나고 더러운 길을 기어다니고 있었던 내 모습을 본다. 공주에게로 가는 도중에 악취와 쓰레기로 가득 찬 뒷골목의 진흙탕 속에 빠져버리는 그런 꿈 이야기가 있었다. 나도 그런 지경이었다. 보잘것없는 짓을 함으로써 나는 더욱 고독하게 되었고, 나와 나의 유년 시절 사이엔 냉혹한 시선으로 망을 보는 문지기가 버티어 선 굳게 닫힌 낙원의 문이 생겨났던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내 자신에의 향수의 처음이었으며 그 사실의 깨달음이었다.
사감 선생님으로부터 경고의 편지를 받고 아버지께서 성○○시에 오셔서 예기치 않게 내 앞에 나타나셨을 때 나는 기겁을 하고 몸에 경련까지 일으켰다. 그러나 그 겨울이 다갈 무렵 두 번째로 오셨을 때, 이미 나는 냉담하고 무심해져 있었고, 꾸중을 하셔도, 당부를 하셔도, 어머니를 상기시키셔도 나는 예사로 들어넘겼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께서는 몹시 노여워하시며 만일 내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불명예스럽고도 모욕적으로 퇴학을 시켜서 감화원에 집어넣겠다고 말씀하셨다. 하실 테면 하시라지! 아버지께서 떠나가신 후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아버지께서는 내게서 아무런 약속도 듣지 못하셨고 내게로 통하는 길도 발견하지 못하셨다.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러한 일이 아버지로서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장차 무엇이 되든 나에겐 상관이 없었다. 주막집에 앉아서 지껄여대는 따위의 기이하고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방식으로 나는 세상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것이 내 항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내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부수어갔고 때때로 사태는 이런 식으로 파악되곤 했다---만약 세상이 나와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보다 더 나은 자리, 보다 더 가치있는 일을 부과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필경 자멸하고야 말 것인데, 그 책임은 마땅히이 세상이 져야 하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 해의 성탄절 휴가는 정말 불쾌했다. 나를 보신 어머니는 깜짝 놀라셨다. 나는 키가 한층 커졌고 야윈 얼굴은 생기없이 축 늘어진데다 눈 언저리에는 염증이 나서 잿빛으로 찌들어 처량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갓 나기 시작한 코 밑의 엉성한 수염 자국과 최근에 쓰기 시작한 안경이 나를 한층 낯설어 보이게 했다. 누나들은 뒤에서 킥킥거리고 웃었다. 만사가 불쾌했다. 서재에서 아버지와 나눈 대화도 불쾌하고 입맛이 썼으며 두서너 명의 친척과 나눈 인사도 그러했으며 무엇보다도 불쾌했던 것은 성탄절 전야였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후 이날은 우리 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온 날이었고, 축제와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나와의 유대를 거듭 새롭게 해주는 저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성탄절에는 매사가 닫답했고 곤혹스러울 뿐이었다. 여태껏 해오신 대로 아버지께서는 ‘그들은 그곳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었노라’하는 들판의 목동에 관한 복음서의 귀절을 봉독하셨고,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누나들은 기쁨에 넘쳐 선물이 놓인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음성에는 즐거운 기색이 없었고 얼굴은 늙고 피곤해 보였으며 한결 조그맣게 오그라들어 보였다. 어머니는 슬픈 표정을 하고 계셨다.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견딜 수 없이 괴롭고 거북하게 느껴졌다. 선물과 축복, 복음서와 불이 밝혀진 트리조차 그러했다. 꿀을 바른 과자는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향긋한 추억의 짙은 구름을 만들어내었다. 전나무의 향기는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이 밤과 축제일이 한시빨리 끝나기를 초조히 기대했다.
온 겨울이 그런 식으로 지나갔다. 방학이 되기 직전에 나는 교사회로부터 심한 경고를 받았고 제명시키겠다는 위협을 받았었다. 더 이상 이런 생활을 지속시켜갈 수는 없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나는 데미안에게 특별한 원망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를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성○○시로 간 초기에 나는 그에게 두 차례의 편지를 보냈었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방학 동안에 그를 방문하지 않았다.
지난 겨울 알폰스 베크와 만났던 그 교외의 공원에서 봄이 시작될 무렵, 가시울타리가 푸릇푸릇해지기 시작할 그때 나는 우연히 한 소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불쾌한 생각과 걱정에 휩싸여 혼자 터덜거리고 있는 차이었다. 건강은 나빠지고 돈은 끊임없이 모자랐고 친구들에게 빌어 쓴 액수는 점점 불어나서 집에서 돈을 타내기 위해서는 그럴 듯한 지출 명목을 생각해 내야 했다. 여러 군데의 가게에는 담배나 기타 다른 외상 물건값이 자꾸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걱정거리들이 아주 심각한 정도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머지않아 이곳의 생활이 끝장이 나서 내가 물속에 뛰어들거나 아니면 감화원에 끌려갈 지경이 되면 이런 일쯤이야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는 노상 그런 저런 종류의 아름답지 못한 일에 직접적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것들은 나를 몹시 억압하고 있었다.
그런 일상의 와중에서 나는 봄날의 공원에서 내 마음을끄는 한 젊은 처녀를 만났던 것이다. 키가 크고 날씬하며 우아한 차림을 한 그 여자는 영리한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그 여자는 첫눈에 내 마음에 들었는데 나는 그런 느낌의 여자를 좋아했으므로 당장에 그 여자에 대한 공상을 시작했다. 나보다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훨씬 성숙하고 우아하고 윤곽이 잘 정리되어 보였으며, 벌써 완전한 귀부인의 자태를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는 내가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교만함과 처녀다움이 내재해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마음에 둔 여자에게 접근하는 일에 성공해보지 못했으며 이 여자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의 인상은 과거의 어느 소녀들보다 더 깊었고 그 짝사랑은 내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돌연 다시금 내 앞에는 고귀하고 존경심을 일으키는 영상이 나타났다---나의 내부에 있어서는 어떤 것에 대한 갈망이나 충동도 경건함과 숭배하고자 하는 소원만큼 깊고 열렬한 것은 없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록 단테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영국판의 그림에서 나는 그녀를 본 적이 있었고 그 그림의 복제를 잘 간직하고 있었다. 그 그림은 영국의 라파엘 초기파의 화풍으로 그려진 소녀의 모습이었는데 갸름하고 긴 얼굴에 영혼이 깃든 손과 표정, 길쭉길쭉한 사지에 날씬한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내 마음을 끈 처녀도 모습에 있어서는 날씬한 자태와 소녀다운 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얼굴 표정에서 다소 정신화된 점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내가 사랑하는 그림의 여자와 비슷하였지만 전적으로 유사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베아트리체와 말을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시의 나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내 앞에 자기의 모습을 세워놓음으로써 성스러운 전당을 열어주었고 나로 하여금 사원의 기도자가 되게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주막집 순례와 밤의 싸움질로부터 소원해졌다. 나는 다시 홀로 있을 수 있게 되었으며 독서와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돌발적인 전향으로 나는 숱한 조소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사랑할 대상, 사모할 대상을 가지게 된 것이었으며 이상이 되살아났고 예감과 신비롭게 아롱진 어스름이 생활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를 여타의 조소에 무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비록 숭배하는 영상의 하인이나 노예로서일망정 내 자신 속에 깃들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노라면 감동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금 나는 무너져버린 생활의 폐허 속에서 ‘밝은 세계’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진지하게 시작했으며 마음속에서 어둠과 악을 몰아내고 완전히 밝은 세계 속에 머물고자 하는 열망으로 신들 앞에 무릎을 꿇는 심정이 되었다. 지금 내가 영위하고자 하는 ‘밝은 세계’는 어느 정도 나의 창조물이었다. 그것은 이미 어머니나 책임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것과는 달랐으며 거기에는 책임감과 일종의 자기 억제력이 요구되었으며 새롭게나 자신에 의해 발견된 자기 봉사였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혀 와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고자 애썼던 성적인 욕구도 이 성스러운 불 속에서 정신과 예배로 정화되어갔다. 더 이상 음침하고도 흉측한 것들이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신음하면서 지낸 밤들, 음란한 생각 앞에서의 심장의 고동, 금지당한 문 앞에서 엿듣던 소리, 온갖 음탕한 짓거리들도 다 존재해서는 안되었다. 나는 이 모든 것들 대신 베아트리체의 초상을 모신 제단을 마련하엿고 그 여자에게, 또한 정신과 여러 신들에게 나를 바쳤다. 음침한 세계 속에서 찾아온 삶의 대가를 밝은 세계의 제물로 바쳤다. 나의 목적은 향락이 아니라 청순함이었으며 행복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정신성이었다.
이 베아트리체에 대한 숭배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어제까지는 조숙한 풍자꾼이었던 나는 성자가 되려는 희망을 품은 사원의 하인이 되었다. 나는 내 몸에 젖어 있던 나쁜 생활 습관을 청산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먹고 마시는 일에서나 이야기나 옷차림까지도 여기에 부합되도록 신경을 썼다. 나는 아침마다 냉수 마찰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일은 대단한 노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나는 진실되고 품위있는 행동을 했고 자세를 똑바로 하고 천천히 위엄있게 걸으려고 애썼다. 보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였을지도 모르겠으나—내 마음은 그만큼 신에의 봉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신념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 가운데서 나는 한 가지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영국판 베아트리체의 초상이 그녀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았던 점이 일의 발단이었다. 나는 그 여자를 내 나름으로 그려보려고 애썼다. 아주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갖고 나는 내 방에---최근에 나는 독방을 쓰게 되었다---깨끗한 종이와 그림물감과 붓을 챙겨두었고 팔레트, 유리잔, 도자기 접시, 연필을 준비했다. 새로 사온 조그만 튜브 속에 든 색고운 템페라 물감이 나를 매혹시켰다. 지금에 와서도 처음으로 물감을 뽀얀 접시 위에 짰을 때의 그 빛깔을 눈앞에보는 것처럼 기억할 수가 있다. 그것은 불타는 듯한 크롬 옥시트 초록색이었다.
나는 신중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른 것을그려보려고 했다. 장식 무늬, 꽃, 작은 환상적인 풍경화, 교회 앞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실버들이 서 있는 로마의 다리 같은 것을 그렸다. 나는 그림 그리는 일에 완전히 넋을 잃기도 하고 그림물감 상자를 처음 가지는 아이처럼 행보해 하기도 했다. 그러다 나는 드디어 베아트리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 몇 장은 완전한 실패작으로 나는 그것을 내던져버렸다. 때때로 거리에서 만나던 그 소녀의 얼굴을 마음속에서 생각해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잘 되지가 않았다. 결국 나는 그소녀를 그리는 것은 포기하고 생각나는 대로, 그림물감이나 붓이 이끌어가는 대로 얼굴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얼굴은 꿈에서 본 모습이었는데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시도를 계속해나갔다. 한 장 한 장 새로운 얼굴이 완성되어갈 때마다 그 모습은 한결 선명해졌고 결코 실제와 같지는 않았지만 그 소녀의 타입에 가까워가는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꿈꾸는 것처럼 붓으로 줄을 긋고 화면을 메워나가는 것에 익숙해졌다. 어떤 모델을 생각하며 글니 것도 아니었지만 장난삼아 그려가는 동안에, 무의식중에 형상화되어간 것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이제까지 그린 어떤 얼굴보다 한층 더 강력하게 내게 말을 건네오는 한 얼굴을 완성시켰다. 그 얼굴은 이미 이전의 어느 소녀의 모습은 아니었는데 오래 전부터 내가 그린 그림은 더 이상 그 여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녀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소녀의 얼굴처럼 보였고 머리칼도 그녀의 것과 같은 옅은 금발이 아니라 붉은 빛이 도는 갈색이었다. 이마는 단단하고 야무지게 보였고 입술은 붉게 타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딱딱하고 가면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그렇지만 그 얼굴에는 인상적이고도 신비스러운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내가 완성시킨 그림 앞에 앉아 있자니 어떤 야릇한 감동이 전해져왔다. 그것은 신의 초상의 일종이거나 신성한 가면처럼 보였고 절반은 남성적이고 절반은 여성적이며 나이를 초월한 모습으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의지가 엿보였으며 남 모르는 생명에 충만해 있으면서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얼굴은 나에게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는 것 같았고 나 자신 속에 존재하면서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은 확실히 어느 누구와 닮아 있었긴 했지만 누구와 닮았는지를 알 순 없었다.
이 얼굴은 얼마 동안 나의 모든 생각 속에 살아 움직이고 나와 함께 생활을 나누었다. 나는 그것을 서랍 속에 넣어두었는데 혹시라도 누가 보고 나를 놀려대는 것은 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혼자되기가 무섭게 그 그림을 꺼내어 그것과 사귀었다. 저녁엔 그 그림을 침대 맞은편 벽지 위에 핀으로 꽂아놓고는 잠들 때까지 바라보았으며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마자 그 그림을 쳐다보았다.
바로 그 시절, 나는 어린 아이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많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거의 몇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꿈을 꾼 적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제야 꿈들이, 아주 새로운 종류의 영상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꿈속에서는 자주 내가 그린 그림 속의 얼굴이 생기를 띠고 나에게 이야기를 걸어왔으며 아주 친한 듯이, 혹은 적대적인 태도로, 때론 이맛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때로는 무한히 아름다우며 조화된 고귀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어느 날 아침 역시 그러한 꿈을 꾼 후 잠에서 깨어나 갑자기 나는 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얼굴은 말할 수 없이 다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내 이름이라도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만큼이나 나를 잘 알고 있는 듯, 옛날부터 항상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흥분을 억누르며 나는 그 그림 속의 얼굴을, 숱이 많은 갈색 머리칼과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입술, 그리고 믿기지 않을 만큼의 밝음을 지닌 억센 이마를 바라보았다(그 그림은 저절로 말라 있었다). 나는 차츰 마음 속에서 눈에 익은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뛰어 일어나서 그 그림 앞에 아주 가까이 다가서서 크게 뜬 초록빛이 감도는 눈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눈을 응시하였다. 오른쪽 눈이 왼쪽보다 약간 치켜져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이 오른쪽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주 가볍게 그러나 분명히 그 눈은 움직였고, 이 작은 움직임으로 나는 이 그림이 누구의 얼굴인지를 알아차렸다‥‥‥.
어쩌면 이렇게 늦게서야 그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던 것인지! 그것은 데미안의 얼굴이었다.
그 후 나는 종종 내 추억 속에 남아 있는 데미안의 진짜 표정과 그 그림을 비교해보았다. 닮기는 했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데미안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어느 초여름 석양 무렵, 서쪽으로 나 있는 창문을 통해 기울어져가는 태양빛이 붉게 비쳐들었다. 방안은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나는 베아트리체의 초상, 아니 데미안의 초상을 핀으로 창틀 가운데에 고정시키고 석양이 비쳐드는 모양을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얼굴은 윤곽이 흐려져 몽롱해 보였지만 불게 그늘진 눈과 이마의 밝음과 유난스레 붉은 입술은 더욱 생생하고 깊게 타올랐다. 석양은 곧 사라져 버렸지만 나는 오랫동안 그 앞에 마주앉아 있었다. 그러자 점차 그 얼굴은 베아트리체나 데미안이 아니라 --- 내 자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그림은 나와 닮진 않았다 --- 그럴 이유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렇지만 극서은 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는 것이고, 나의 마음, 나의 운명 혹은 나의 데몬이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내가 다시 친구를 구한다면 그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언젠가 내가 사랑하게 된다면 사랑하는 이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의 삶과 나의 죽음 역시 그러할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나의 운명의 울림이었고 율동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이제까지 읽었던 어떤 책보다 한층 강한 인상을 남긴 책을 한 권 읽었다. 훗날에도 니체를 제외한다면 그러한 감동을 준 책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시간과 금언이 수록되어 있는 노발리스의 책이었다. 그 내용의 대부분을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 구절들은 하나같이 내 마음을 이끌어주고 나를고무시켜주었다. 지금 그 금언의 한 구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나는 그 구절을 펜으로 초상의 아래에 적어두었다. ‘운명과 마음은 하나의 개념에 대한 이름들이다.’ 그 말을 나는 그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베아트리체라고 이름 지은 소녀와 나는 여전히 자주 마주쳤다. 나는 이미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게 되었지만 늘 부드러운 화합과 감정의 어떤 예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대와 나는 맺어져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실체가 아니라 그대의 영상만이 그럴 뿐이다, 그대는 내 영혼의 일부분인 것이다 라고.
막스 데미안에 대한 동경이 다시 강렬하게 타올랐다. 나는 그의 소식을 수년 내에 한 번도 듣지 못했었다. 단 한번 방학 때 그를 만난 적이 있긴 했었다. 지금에서야 나는 이 잠깐 동안의 만남을이 기록 속에 숨겨두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이 수치와 허영심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나는 그것을 만회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내가 술집에 드나들던 시절의 어느 방학 때 언제나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고 단장을 휘두르면서 옛모습 그대로, 멸시하고 싶은 얼굴을 한 거리의 건달들을 구경하면서 건들건들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나는 그 옛날 친구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몸이 오싹해졌다. 번갯불처럼 프란츠 크로머가 생각났다. 제발 데미안이 그때의 일을 잊어버렸다면 좋겠는데! 그에게 신세 갚아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불쾌했다.---사실, 어리석은 아이 때의 일이었긴 해도 신세는 신세였던 것이다.
그는 내가 인사를 하려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는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 태연하게 인사를 했는데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옛날과 똑같은 그의 악수였다! 꽉 움켜쥐는,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남성적인 악수!
그는 주의깊게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싱클레어, 너 많이 컸구나.”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아 보였다. 이제껏과 똑같이 늙어 보였고 동시에 똑같이 젊어 보였다.
우리는 함께 산책을 하며 순전히 딴 이야기만 했는데 그 당시의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 내가 몇 번이나 답장도 받지 못한 편지를 보냈던 일이 생각났다. 아, 제발 그 일을 기억해내지 못했으면 좋겠는데. 그 바보 같은, 바보 같은 편지를! 그는 편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때에는 아직 베아트리체도 초상도 없었고 나는 황량한 시기의 한복판에 있었던 참이었다. 교외로 나가자 나는 주막집에 가자고 제의를 했다. 그는 함께 갔다. 나는 잔뜩 멋을 부리며 포도주 한 병을 주문해 잔에 채우고 그와 잔을 부딪치고는 학생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첫 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술을 자주 마시니?”
그가 나에게 물었다.
”응, 물론.”
나는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것 외에 무슨 할 일이 있니? 아직까지는 제일 재미있는 일이니까.”
”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니?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제법 근사한 점도 있으니까 말이야. ---도취의 황홀감과 바커스적인 요소가 말이야. 그러나 주막집에서 시간을 낭비해버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멋이 쉽게 사라져버릴 거라고 생각해. 술집을 찾아다니는 일은 진짜 건달 같은 짓이라고 생각된단 말이야. 어떤 때는 하룻밤 내내 타오르는 관솔불 곁에서 진짜 아름다운 도취경과 흥분을 맛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러나 언제나 같은 식으로 자꾸 술잔을 기울여댄다는 것이 정말 잘하는 짓일까? 매일 밤 단골 주막 술상을 보고 있는 파우스트를 상상할 수 있겠니?”
나는 술을 마시며 적의에 찬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누구나가 다 파우스트는 아닌까.” 나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는 다소 놀랍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전처럼 싱싱하고도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웃음을 웃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 따위 것을 가지고 다투고 있는 거지? 하여간 술꾼들이나 건달의 생활이 어떻게 보면 모범적인 시민의 생활보다 훨씬 더 생기있는 것이기도 할 거야. 그리고---언젠가 한 번 읽은 적이 있는 이야기인데---방탕하 생활은 신비주의자가 되기 위한 최선의 준비활동이란 말이야. 예언자가 되는 것은 언제나 성 오거스틴 같은 그런 인물이거든. 그도 예언자가 되기 이전에 향락가였고 방탕아였었거든.”
나는 은근히 미심쩍은 심정이 되어 그에게서 훈계조의 이야기는 듣지 않으려 하였다. 그래서 나는 냉담하게 말했다. “그렇지. 누구나 다 자기 식대로 살아가는 거니까. 솔직이 말해서 나는 예언자 같은 건 될 마음이 전혀 없어.”
데미안은 눈을 지그시 내리깐 채 알아들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봐 싱클레어.” 그는 천천히 말했다.
“너에게 잔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말이야---무슨 목적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지는 우리 둘 다 모르고 있어. 하지만 너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것, 너의 생명을 이루고 있는 그것은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우리들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우리들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해내는 누군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네게 도움이 될 거야. ---자, 이만 양해를 구하네. 나는 집으로 가야겠어.”
우리는 짤막하게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몹시 마음을 상해서는그대로 혼자 앉아서 남아 있는 술을 다 마시고는 집으로 가려고 했을 때 데미안이 벌써 술값을 치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일이 더한층 마음의 울화를 돋우었다.
이 사소한 사건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가 그 교외의 주막에서 내게 한 말들을 이상할 정도로 생생하게 한 마디도 잊지 않고 기억해낼 수가 있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네게 도움이 될 거야.”
아직도 창틀에 고정되어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그 그림에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아직도 두 눈만은 생생히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데미안의 눈초리였다. 아니면 나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눈초리였다. 온갖 것을 알고 있는 눈초리였다.
나는 데미안에게 얼마나 깊은 동경을 품고 있었던가! 그러나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나에겐 도달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아마 어디에선가 공부를 계속하고 있을 터이고, 그가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그의 어머니도 우리 고장을 떠났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크로머의 일을 포함해서 나는 데미안과 관련된 온갖 일들을 다시 생각해내었다. 그가 일찍이 내게 이야기해주었던 것들이 생생하게 지금 다시 울려왔고, 그 말들은 오늘에 있어서까지도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잇었으며 나와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우리가 별 기쁘지 않은 해후를 했을 때 방탕자와 성자에 관해 이야기를 했던 뜻도 갑자기 마음속에서 분명해졌다. 나에게도 그가 이야기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새로운 생에대한 충동과 함께 청순함에 대한 욕구와 성스러움에 대한 동경이 나의 마음속에서 솟구쳐오르기까지 나 역시 술주정과 더러움과 마비와 방탕 속에서 헤매고 다니지 않았던가?
기억을 더듬고 있는 동안 밤이 깊어갔고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의 기억 속에서도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밤나무 아래에서 그가 프란츠 크로머에 대해 캐묻고 그와 관련된 나의 비밀을 알아맞히든 때의 빗소리였다. 학교에 오가는 길에 나누었던 대화, 견신례 수업 시간, 이렇게 한 가지의 기억이 끝나면 또 다른 기억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스 데미안과 맨 처음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무슨 문제가 있었던가? 그 기억은 당장에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시간을 두고 그 기억을 되살리기에 열중했다. 그러자 그 생각도 다시 떠올랐다. 그가 카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뒤 우리들은 우리 집 앞에 서 있엇다. 그리고 우리 집 현관 아치 밑의 초석 안에 새겨져 있는 낡고 퇴색한 문장에 관해서 이야기했었다. 그는 그것에 대해 흥미를 느꼈으며 누구나 그런 물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었다.
잠자는 동안 나는 데미안과 그 문장의 굼을꾸었다. 데미안이 그것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어떤 때는 조그맣고 잿빛이 되었다가도 때로는 굉장히 커져서 여러가지 빛깔을 띠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그것은 언제나 한가지고 똑같은 문장이라고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그는 나에게 그 문장을 삼키라고 명령했다. 그것을 삼키자 나는 질겁을 했다. 삼킨 문장 속의 새가다시 살아나서는 내 배를 채우고 뱃속을 쪼아대기 시작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죽은 듯한 두려움을 느끼며 나는 놀라서 잠을 깼다.
정신이 말똥해졌다. 한밤중이었고 방 안으로 비가 들이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닫으려고 일어났을 때 방바닥에 놓인 무언가 흰 것을 밟았다. 아침에서야 그것이 내가 그린 그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림은 물에 젖은 채로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불룩하게 부풀어 올라 잇었다. 나는 그것을말리려고 흡수지 사이에 끼워 두터운 책 속에 넣어두었다. 다음 날 다시 보니 잘 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림은 변해 있었다. 붉은 입술은 다소 파리해지고 얼마간 가늘어져 있었다. 이제야말로 정말 데미안의 입 그대로였다.
나는 그 문장의 새를 그리기 시작했다. 본래의 그 새 모양을 나는 똑똑히 알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것은 너무 낡아서 때때로 다시 색칠을 했기 때문에어떤 부분은 가까이에서조차도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 새는 서 있었거나 아니면 무엇인가의 위에 앉아 있었는데 한 송이 꽃이었는지, 바구니나 둥우리였는지 또는 나무 꼭대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소한 것에 마음쓰지 않고 마음속에서 분명히 영상이 떠오르는 부분부터 그려가기 시작했다. 어떤 분명치 않은 욕구에서 나는 곧 강한 색깔을 쓰기 시작했다. 새의 머리는 내 그림에서는 황금빛이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그려나가 그 그림은 며칠 안에 완성되었다.
그려진 것은 날카롭고 겁없어 보이는 새매의 머리를 한 한 마리의 커다란 새였다. 그 새의 반신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어두운 지구에 박혀 있었고 마치 커다란 알에서 깨어나오려는 것처럼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그림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나에게는 꿈속에서 보았던 아롱진 문장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데미안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부칠 곳을 안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에 무슨 일을 할 때나 느끼던 꿈과같은 예감으로 그것이 그에게 전해지거나 그렇지 못하거나가에 그에게 그 새의 그림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 위에다 아무것도, 내 이름조차도 적지 않고 가장자리를 조심해서 오래내고는 커다란 봉투에 데미안의 옛날 주소를 썼다. 그리고는 그것을 부쳤다.
시험이 다가왔고, 나는 옛날보다는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나의 행실을 바로잡은 이후로 선생님들은 나를 너그럽게 대해주셨다. 지금도 역시 나는 썩 선량한 학생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제 와선 어느누구도 반 년 전의 퇴학 처분 경고에 대한 기억을 들추어내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께서도 이제는 비난이나위협조가 아닌 옛날의 어조로 편지를 보내셨다. 나는 그에게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나 어떤 이유로 내게 그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싶진 않았다. 이 변화가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의 기대와 일치되었다는 것은 우연이었다. 이 변화로 나는 다른사람을 찾아가지도 않았고 남이 나에게 접근해오는 것을 허용치도 않았으며 단지 나를 한층 더 고독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어느 곳인가를, 데미안을, 멀고 먼 운명의 목표로 삼고 있엇다. 사실상 그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지도 못했으면서 그 한복판에서 잇었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베아트리체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 속의 초상이나 데미안에 대한 생각으로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베아트리체는 완전히 내 시선고 생각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누구에게도 나는 꿈에 관해, 나의 기대와 내적인 변화에 관해 한마디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엇다. 설사 그렇게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원할 수가 있단 말인가!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내가 그린 꿈의 새는 여행을 떠나 나의 친구를 찾았다. 그회담은 아주 신기하게 내게 왔다.
어느 날 수업중의 쉬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책갈피 사이에 종이쪽지가 한 장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종이는 우리들이 종종 수업 시간중에 편지질을 할 때 접는 모양으로 접혀 있었다. 누가 그런 편지를 내게 보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어느 친구와도 그런 짓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이 학교에서 성행하는 어떤 장난을 권유하는 것이려니 생각했을 뿐, 그런 짓에 참가할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심히 종이쪽지를 읽지도 않은 채 책의 앞쪽에다 꽂아두었다. 그러다 수업중에서야 다시 그것을 손에 잡게 되었다.
종이쪽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생각없이 펼쳐본 나는 거기에 몇 귀절이 적혀 있음을 알았다. 그것을 읽자마자 그 귀절에 온 몸과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었다. 놀란 심정으로 재차 읽어보는 동안 내 마음은 몹시 추울 때처럼 떨며 운명 앞에서 움츠러들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나는 여러 번 이 귀절을 읽은 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데미안으로부터의 회답이었다. 그와 나를 빼놓고는 아무도 그 새에 대해서 알 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나의 그림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그 그림을 이해했고 나의 해석을 도와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무엇보다도 나를 괴롭힌 것은---아프락사스라는 이름의정체였다.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한 번도 그런 이름을 들은 적도 읽은 적도 없었다. “그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수업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그시간이 끝났다. 그날 오전 수업의 마지막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 수업은 젊은 보조 교사 담당이었는데 그는 대학을 갓 나온 사람으로 매우 젊고 공연히 잘난 티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었다.
우리는 폴렌스 박사의 지도로 헤로도투스를 읽었다. 이 강독 수업은 내가 흥미있어 하는 극소수의 과목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날만은 수업에 정신을 쏟을 수가 없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책을 펼쳐든 채 그의 수업은 귓전으로 들어넘기며 내 생각의 뒤를 좇고 있었다. 나는 데미안이 이전의 견신례수업 시간에 내게 이야기했던 것이 얼마나 타당한지를 여러 번 느껴왔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강력히 원하면 그것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말이다. 만약 내가 수업중에 아주 강하게 내 자신의 생각에 몰두할 수 있으면 선생님들은 나를 내버려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이 산란하거나 졸릴 때면 갑자기 선생님이 옆에 와서 서 있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 경험은 여러 번 있었다. 내가 정말로 깊이 생각에 몰두해 있다면 안전했다. 나는 강한 시선으로 상대를 노려보는 실험도 해보았는데, 그것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 당시, 데미안과 함께였던 시절에는 성공할 수가 없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강한 시선과 깊은 생각으로 매우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간에도 나는 역시 그렇게 하고 앉아서 헤로도투스와 학교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선생님의 목소리가 내 의식을 번갯불처럼 내리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내 곁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 나는 다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분명하게 아프락사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첫머리는 듣지 못했지만 폴렌스 박사는 설명을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대의 그 교파와 신비적인 교단의 견해를 합리주의적인 관점에서 파악되는 것만큼 소박한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의미하는 바의 과학적 기준으로는 도대체 고대를 바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매우 높은 수준의 철학적 신비적 진리의 활동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일부는 때로 사기와 범죄에 닿는 마술과 유희로 진행되어갔습니다. 그러나 마술이라는 것도 원래에는 필연적인 이유와 깊은 사상을 지녔던 것입니다. 내가 앞서 예로 든 아프락사스의 교의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 이름은 그리스의 주문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대게 야만족들이 믿고 있는 어떤 악마의 이름이라고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프락사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뜻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개괄적으로 이 이름을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가진 일종의 신의 이름으로 파악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몸집이 작은 이 젊은 학자는 섬세하면서도 힘있게 설명을 계속했다. 크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름이 다시 거론되지 않게 되자 나도 다시 내면적인 생각으로 주의를 돌렸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한다.’ 이 설명의 여운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이것을 예전의 어떤 일과 결부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들이 우정을 나누던 최후의 시절, 데미안과의 대화로 내겐 친근한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분명히 존경하는 하나의 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그 신은 단지 인위적으로 구분된 세계의 절반만을 포용하고 있었을 뿐이었다(그것은 공적이고 허용된 ‘밝은 세계’였다). 그러나 사람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경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러자면 악마까지도 겸한 새로운 신을 갖거나 아니면 신에 예배하는 동시에 악마에게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데미안은 그때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아프락사스가 신인 동시에 악마인, 바로 그 신인 것이었다.
얼마 동안 대단히 열심히 그 신에 대해 찾아보았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나는 아프락사스에 대한 것을 찾기 위해 온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나의 천성은 손에 쥐고 보면 돌맹이에 불과한 그런 진리를 발견해내는 일 같은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탐구에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한때 그렇게 몰두했던 베아트리체의 모습은 서서히 관심 속에서 멀어져 지평선에 가까워질수록 그림자처럼 아슴하고 희미해졌다. 그것은 이미 나의 영혼을 만족시켜 주지못했다.
내 자신의 내부에 틀어박혀서 몽유병자처럼 살아온 내 생활 속에 기이하게도 새로운 형태가 형성되어가기 시작했다. 생활에의 동경, 아니 사랑에의 동경이라 할 수 있는 어떤 것과, 베아트리체를 예배하는 동안 잦아들어져 있던 성적인 충동이 다시 나의 내부에서 솟구쳐 왔고 새로운 영상과 목적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내겐 어떤 충족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동경을 부인한다거나 아니면 내 친구들이 충족을채우는 그러한 소녀들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다시 심하게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밤에보다 낮에 더 많이 꾸는 형편이었다. 표상, 영상, 혹은 소망이 나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 마음속의 그러한 영상들과 함께, 꿈과 그 그림자와 함께, 현실적인 일상 속에 있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생명력 있는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갔다.
어떤 일정한 종류의 꿈, 항상 되풀이하여 떠오르는 환상이 나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의 내 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을 크게 미쳤던 꿈은 대략 이러했다. 나는 고향의 우리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 위에서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문장 속의 새가 황금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집에서는 어머니가 나를 맞이해주셨다---그러나 내가 막상 어머니를 포옹하려고 하자 그는 어머니가 아니라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변했는데,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고 힘이 세었으며 막스 데미안이나 내가그린 초상과 닮았지만 또 막상 보면 다른 모습이기도 했으며 힘차 보이면서도 극히 섬세한 여성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나를 끌어당겨서 깊고 몸이 떨릴 정도의 사랑의 포옹을 해주었다. 희열과 공포가 뒤섞여 다가왔는데 그 포옹은 신에의 예배인 동시에 죄악인 것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너무나 많은 추억고 데미안에 대한 너무나 많은 추억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 가운세서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져갔다. 그녀의 포옹은 엄숙한 경건성에는 위배되는 것이었으나 희열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이 꿈에서 때로는 깊은 행복감을 느끼며 깨어나기도 했고, 때로는 무서운 죄를 범한 것 같은 죽음의 공포와 양심의 가책에 떨며 깨어나기도 했다.
아주 내적인 이 영상과 외부에서찾아든 탐구해야 할 신에 대한 암시 사이에 어떤 무의식적인 관련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점점 일정하고 친밀하게 결속되었다. 나는 이 예감의 꿈속에서 아프락사스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점차 감지하게 되었다. 희열과 공포, 남성인 동시에 여성인 것의 혼합, 성스러움과 전율의 뒤엉킴, 다감한 천진성을 뚫고 지나가는 깊은 죄악에의 예감---이것이 내 사랑의 꿈의 영상이었고 아프락사스 역시 그러했다. 사랑은 이미 내가 불안스럽게 여겼던 동물적인 어두운 충동이 아니었고, 동시에 내가 베아트리체의 초상에게 바쳤던 경건학 정신화된 숭배도 아니었다. 사랑은 그 양쪽 다였다. 양쪽 다였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천사인 동시에 악마였고 남성과 여성이 합일된 것이었으며 인간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 최고의 선과 극단의 악이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운명인 것이었고 이것을 맛보는 것이 숙명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것에 대해 깊은 동경을 품음과 동시에 깊은 두려움에 떨었고 그것은 언제나 내 머리 위에 실재로 존재해서는 수시로 나에게 덮쳐왔다.
다음 해 봄에 나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진학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아직도 어디서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를 정할 수가 없었다. 내 입술 위에는 콧수염이 자리기 시작했으니 나는 이제 완전한 성인이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었으며 아무런 목표도 없었다. 확실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나의 내부의 소리, 즉 꿈의 영상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이끄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라가야 한다고 느꼈다. 그것은 퍽 어려운 일이었고 나는 날마다 그것에 반항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것일까? 그렇지만 다른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역시 할 수 있었다. 조금만 주의와 노력을 집중시키면 플라톤을 읽어낼 수도 있었고 삼각법의 문제도 풀 수 있었으며 화학적인 분석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나의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목표를 끄집어내어 내 앞에다 확실히 그려보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교수나 법관, 의사가 예술가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이루려면 얼마만한 기간이 필요하고 거기엔 어떤 현실적인 이점이 있는지를 잘 알고들 있었다. 그런데 나는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나도 그런 직업을 갖게 될 것이겠지만 지금은 내가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단 말인가. 나 역시 몇 년을 찾고 또 찾아왔지만 아무것도 된 일은 없었고, 어떠한 목표에 도달할 수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나도 역시 어떠한 목표에 도달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정말 난처하고 위험스러우며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살기 위해서나의 내부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었던가?
나는 때때로 내 꿈속에 나타나는 힘찬 사랑의 자태를 그려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만일 그것에 성공했다면, 나는 그것을 데미안에게 보냈을 것이었다. 그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와 나는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을 뿐이었다. 언제나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베아트리체 시절의 그 몇 주, 아니 몇 달간의 고요한 정적은 옛날에 사라져버렸다. 당시에 나는 하나의 섬에 도착하여 평화를 발견해 낸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같은 상태였다---어떵 상태가 내 마음에 들기가 무섭게, 어떤 꿈이 나를 즐겁게 해주기가 무섭게 그것는 벌써 퇴색해버리고 희미해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한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나를 완전히 야성적이고 미치광이처럼 만들고 마는, 이루어지지 않는 갈망과 긴장된 기대의 불꽃 속에서 살고 있었다. 꿈속에서 보는 그 여인의 모습을 나는 때때로 너무도 생생하게, 내 자신의 손을 보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바라보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를 저주하기도 햇다. 나는 그를 어머니라 부렀고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했다. 그를 애인이라고 부르며 모든 갈망을 충족시켜주는 깊은 입맞춤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그를 악마, 매춘부, 흡혈귀, 살인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나를 다정스럽기 그지없는 사랑의 꿈으로 유인하기도 했고 이를 데 없이 철면피한 행위로 끌고 가기도 했다. 그에게는 지나치게 선량한 것도, 존귀한 것도 없었으며 동시에 지나치게 사악한 것도 비천한 것도 없었다.
그해의 온 겨울을 나는 표현하기 힘든 내적 폭풍우 속에서 지냈다. 고독하다는 것에는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으므로 새삼스럽게 고독이 나를 압박하지는 않았다. 나는 데미안과 덥루어, 새매와 더불어, 나의 숙명인 동시에 나의 애인인 커다란 꿈의 영상과 더불어 살았다. 그것들 속에서는 살아가기에 충부한 공간이 있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위대한 것, 넓은 세계를 향하고 있었고, 또 모든 것들이 아프락사스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꿈들 중의 단 하나도, 내 생각의 한 조각도 내게 복종하지는 않았으며, 나는 그것들 중의 단 하나도 내 임의로 불러들일 수가 없었으며 단 하나도 내 마음대로채색할 수가 없었다. 그것들이 내게로 와서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며, 나는 그것들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그것들로써 살아갔던 것이었다.
분명히 나는 외부에 대해서는 안전했을 것이었다. 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같은 반의 친구들도 그것을 느끼고는 은근히 나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때가 있어서 나를 실소하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하려고만 한다면 그들의 대부분을 잘 꿰뚫어볼 수가 있어서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나는 거의, 아니 전혀 그렇게 하려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나의 일, 나 자신만의 일에 몰두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생명의 작은 부분이나마 살아 보고 내 자신 속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어 그것을 세상에 주고, 세상과 관계를 맺고, 싸움을 시작하게 되기를 열렬히 원했다. 여러 번 저녁의 거리를 산책하다가 끝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한밤중까지 헤매고 다닐 때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나의 애인과 마주치리라, 다음 골목 모퉁이에서는 그와 만날 수 있으리라, 저 다음 창문에서 그가 나를 부르리라 하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때론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나를 옥죄어 와 언젠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까지 하기도 했다.
예기치 않은 피난처를 나는 당시에---‘우연히’ 발견했다. 그러나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필요로 했더 사람이 그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소망과 필연이 그곳으로 그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나는 두 번인가 세 번쯤 시내를 걸어다니다가 교외의 조그만 교회에서 울려나오는 풍금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엔 걸음을 멈추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앞을 지나다가 나는 또 다시 풍금 소리를 들었고 바하의 곡이 연주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문으로 가 보았지만 문은 닫혀져 있엇다. 골목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었으므로 나는 외투깃을 올리고 교회 옆에 있는 길가의 돌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과히 크지는 않았지만 좋은 풍금인 것ㅇ르 곧 알 수 있었고, 연주는 묘하게, 독특하고도 고도의 개성적인 의지와 인내를 표현해내는 훌륭한, 거의 대가의 솜씨로서 마치 기도처럼 울려왔다. 풍금을 연주하는 사람은 이 음악 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는 자여서 마치 생명을 얻으려는 자처럼 이 보물을 얻기 위해 애쓰고 두드리고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교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음악에대해 그다지 전문적인 안목을 갖추지 못했지만 진실한 영혼의 표현은 아주 어릴 적부터 본능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음악의 본질을 아주 분명한 것처럼 내 마음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 음악가는 바하의 곡 다음에 곡목을 알 수 없는 현대 음악을 연주했다. 레거의 곡인지도 몰랐다. 교회는 완전히 어두워졌고 아주 희미한 빛이 옆 창문으로 흘러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연주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고 풍금을 치던 사람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볼 때까지 교회 앞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아직 젊었으나 적어도 나보다는 좀더 나이가 많아 보였고 억세고 체구가 오동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힘차게, 마치 기분이 나쁜 사람처럼 성급한 발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 이후 나는 때때로 저녁 무렵에 그 교회 앞에 앉아 있거나 서성거리곤 했다. 언젠가는 교회 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반시간 동안이나 풍금 연주자가 위층에서 가물거리는 가스등 밑에서 연주하는 것을 추위에 떨면서, 그러나 행복한 심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에서 나는 그 사람 자신만을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연주하는 모든 곡들은 서로 인연이 닿아 있고 남모르는 관계를 맞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가 연주하는 모든 곡은 종교적이었고 헌신적이었으며 경건했지만 교회의 신자나 목사들처럼 경건한 것이 아니라 중세의 순례자나 탁발승들처럼 경건했고, 모든 종파를 넘어서 존재하는 세계 감정을 향한 물불을 가리지 않는 헌신으로 경건했다. 바하 이전의 거장들의 곡과 옛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곡이 자주 연주되었다. 그 곡들은 모두가 똑같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연주자 자신의 마음속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엇다. 그것은 동경과 세계의 가장 내면적인 파악, 그리고 세계로부터의 가장 난폭스러운 분리와 자기 자신의 어두운 영혼에 대한 타는 듯한 심취, 헌신에의 도취와 불가사의한 것에 대한 깊은 호기심 같은 것들이었다.
언젠가 나는 그 풍금 연주자가 교회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것을 몰래 따라갔었는데 그가 시내의 변두리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조그만 술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나 자신을 억제치 못하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여기에서 나는 비로소 그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검정 펠트 모자를 쓴 채 포도주 한 병을 앞에 놓고 조그만 홀의 구석에 있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내가 상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그는 못생겼고 다소 야성적으로 보였으며, 탐구적이고 굳어버린 것 같은 표정에 집요하고 의지에 차 있어 보였지만 입 가장자리에는 부드러운, 아이와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다. 남성적이고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 눈과 이마에 모여 있었고 섬세하고도 미숙해 보이는 안정감 없는 하관과 부분적인 연약함이 함께 깃든 얼굴이었는데 우유부단해 보이는 턱은 눈초리에 대한 이율배반인 양 소년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특히 내마음에 든 것은 긍지와 적의에 가득 찬 암갈색 눈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술집 안에는 우리 두 사람 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나를 쫓아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앞에 버티고 앉아서 그가 성이 나서 투덜거릴 때까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당신은 뭘 그리 기분나쁘게 사람을 노려보고 있소? 내게 무슨 용건이 있는 거요?”
”당신에게 무슨 용건이 있는 건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난 당신에 관해 많은 걸 알고 있어요.”
그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럼 당신도 음악광이오? 음악에 미친다는 건 내가 보기엔 구역질 나는 짓이오.”
나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나는 벌써 여러 번 교회 밖에서 당신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나는 계속 말했다. “나는 당신을 귀찮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뭔가를, 뭔가 색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할 순 없지만 말입니다. 내가 하는 소리 같은 건 귀담아 듣지 마삽시오! 나는 교회에서 당신의 연주를 듣는 것으로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난 언제나 교회 문을 잠가두는데요.”
”최근에는 그것을 잊으신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교회 안에 들어가서 들을 수가 있었지요. 그렇지 않을 때는 밖에 서서 듣거나 길가의 돌에 앉아 듣기도 했답니다.”
”그래요? 다음번엔 들어와도 좋소. 그게 훨씬 따뜻할 거요. 그저 문만 두드리이오. 그러나 힘차게 두드려야 할 거요. 내가 연주하고 있지 않을 때 말이오. 그럼 이제 자---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소? 아주 젊은 분이군, 아마 고등학생 아니면 대학생이겠지. 음악을 하시오?”
”아닙니다. 전 그저 음악을 듣기를 좋아할 뿐입니다. 당신이 연주하시는 것 같은 그런 구속이 없는 음악, 그것을 듣고 있자면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잡아 흔드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음악 말입니다. 저는 음악을 대단히 좋아하는데 아마 음악은 그렇게 도덕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온갖 것들은 다 도덕적이지요.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은 것을 찾고 있는 거예요. 저는 언제나 도덕적인 것에 억눌려 괴로움을 받아왔어요. 잘 표현할 순 없지만---당신도 신인 동시에 악마인 하나의 신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십니까? 전 그러한 신이 존재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는 넓다란 모자를 조금 젖히고 이마로 내려온 검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식탁 너머로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었다.
나직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그는 물었다.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이오?”
”유감스럽지만 저는 그 신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어요. 단지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이에요.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랍니다.” 그는 누군가가 우리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다는 듯이 조심스레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내게 한층 더 바짝 다가앉으면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내 그럴 줄 알았소. 당신은 누구시오?”
”저는 김나지움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어디서 아프락사스를 알게 되었소?”
”우연이지요.”
그는 식탁을 쳤다. 포도주 잔이 넘쳐흘렀다.
”우연이라니! 이것 보시오. 쓸데없는 소리 작작해요! 아프락사스에 관해서 우연으로 알게 되는 법은 없소. 그것을 명심하시오. 내가 그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주리다. 난 그에 관해 아는 것이 좀 있으니까.”
그는 말을 멈추고 걸상을 다시 뒤로 밀었다. 내가 기대에 가득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서가 아니오! 다음번에 이야기하리다. ---자, 이거나 좀 드시오.”
그러면서 그는 입고 있던 외투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더니 군밤 몇 개를 꺼내서는 내게 던져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집어먹으며 지극히 만족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그래!” 그는 잠시 후에 소곤거리듯 말했다. “어디서 당신은 그 --- 그것에 대해 알게 되었소?”
나는 주저없이 이야기했다.
”전 고독했었고 방황하고 있었지요.”
나는 말을 계속했다. “그때 저는 옛시절의 친구가 생각났는데 전 그가 무척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것을, 지구에서 나오려고 하는 한 마리의 새를 그렸습니다. 그것을 그에게 보냈지요. 제법 시간이 지나서 그것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을 무렵에 뜻밖에도 종이쪽지 한 장이 제 손에 들어오게 되었느느데 거기엔 이런 귀절이 적혀 있었어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밤을 까서 술안주로 먹었다.
”한 병 더 하겠소?” 그가 물었다.
”고맙지만 더는 못합니다. 전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그는 다소 실망했다는 듯이 웃었다.
”좋을 대로 하시오. 난 다르니까. 난 여기 더 있겠소만. 이제 그만 가 보시오.”
다음번에 그의 연주를 들은 후 그 사람과 함께 걷게 되었을 때는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는 나를 옛날 골목에 있는 낡고 거창한 집의 크고 음산하며 잔손이 가지 않은 방으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피아노를 제외하면 음악에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커다란 책장과 책상이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었다.
”참 책이 많군요.” 나는 감탄하여 말했다.
”그 일부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갖고 온 거요. 나는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으니까---이봐요. 나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 그들에게 당신을 소개할 순 없소. 이 집안에서는 내 친구가 그리 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처지가 못되니까. 나는 소위 탈선한 자식이지요. 아버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존경할 만한 분으로 이 시에서 손꼽히는 목사이자 설교가라오. 당신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나는 재능이 있고 전도가 유망한 그의 후계자였는데 탈선을 하고 얼마간 정신이 돌아버린 것이오. 나는 신학생이었는데 국가 시험 직전에 이 신성한 신학부를 팽개쳐버린 거요. 내 개인적인 공부로 말하자면 나는 여전히 이 학과를 전공하고 있는 셈이오. 사람들이 때론 어떤 신을 생각해냈는가 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여전히 내게는 최고로 중요하고 흥미있는 일이라오. 그건 그렇고 나는 현재 음악을 하고 있는데 머지않아 하찮은 풍금 연주자 자리를 얻게 되겠지요. 그러면 나는 다시 교회에서 일하게 되는 거요.”
나는 서가에 꽂힌 책을 대충 훑어보았다. 조그만 탁상 램프의 희미한 불빛으로 볼 수 있는 한에서 그것은 그리스어, 라틴어, 헤브라이어의 표제를 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컴컴한 속에서 벽 쪽의 방바닥에 엎드려 무언가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이리 오시오.” 얼마 후에 그가 나를 불렀다. “이제 철학 시간을 조금 가집시다. 다시 말하면 입은 다물고 엎드려 생각을 좀 해보잔 말이오.”
그는 성냥을 한 개비 켜서는 앞에 있는 난로에 종이와 나무를 살라 불을 피웠다. 불꽃은 곧 높이 피어오랐는데 그는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불을 긁어 일으키기도 하고 장작을 집어넣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너덜너덜한 융단 위에 엎드렸다. 그는 물끄러미 불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불은 곧 내 마음을 끌어 우리는 거의 한 시간쯤이나 널름거리는 장작불 앞에 아무 말 없이 엎드려서는 불꽃이 훨훨 타오르고 바지직거리고 꺾여지고 휘어지고 가물가물 사그라들다 경련하듯 파닥거리며 마침내는 조용히 사위어들어 밑바닥에서 부화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화도 온갖 발명 중에서 제일 미련스런 발명은 아닌 것 같군.” 그는 혼잣말로 한 번 이렇게 중어러렸을 뿐이었다. 그 말 외에 우리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중된 시선으로 나는 불을 들여다보았고 꿈과 정적 속에 잠겨들었으며 연기 속에서 어떤 자태와 재 속에서 무엇인가의 형상을 보았다. 갑자기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관솔을 불 속에 던져 넣자 조그맣고 가느다란 불꽃이솟구쳐 올라왔는데 그 속에서 나는 황금빛 새매의 머리를 가진 새를 볼 수 있었다. 사그라져가는 난로의 불 속에서 황금빛으로 불에 단 실이 그물 모양으로 엉겨들고, 문자와 갖가지 형상과 얼굴, 짐승, 식물, 벌레 그리고 뱀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왔다. 문득 정신이 들어 옆에 있는 그를 보니 그는 턱을 괴고 엎드려 정신없이, 마치 꿈꾸는 것처럼 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전 이제 가야겠어요.”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잘 가시오. 또 만납시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말했다. 램프의 불은 어느 샌가 꺼져버렸으므로 나는 간신히 컴컴한 방과 복도와 계단을 더득거리며 그 을씨년스런 집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거리로 나오자 나는 멈춰서서 그 낡은 집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창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놋쇠로 된 조그만 문패가 문 앞 가스등의 빛을 받아 반들거리고 있었다.
”피스토리우스 주임 목사” 나는 거기에 씌인 것을 간신히 읽을 수가 있었다.
기숙사로 도라와 저녁을 먹은 후 내 조그만 방에 혼자 있게 되자 비로소 나는 아프락사스에 대해서나 그밖의 어떤 일에 대해서도 피스토리우스에게서 들은 것이 없다는 것과 도대체 열 마디도 서로 나누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내겐 그의 집을 방문했다는 것이 지극히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다음 만날 때엔 옛날의 풍금 음악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곡인 북스테후테의 파사칼리아를 들려주기로 약속했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와 함께 그 음산한 넓은 방에서 난로 앞에 엎드려 있었을 대 이미 피스토리우스는 최초의 가르침을 시작했었다. 불을 들여다보게 한 것은 내게 매우 유익한 일이었는데 그 일을 통해 그는 내가 항상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한 번도 훈련한 적이 없는 나의 내부에 있는 기호를 강렬하게 해주고 확인시켜주었던 것이다. 부분적이나마 그 일은 점차 분명해졌다.
나는 조그만 아이였을 적부터 이미 자연의 기이한 모양을 관찰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모양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진 특이한 매력과 난삽하고도 의미깊은 언어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길다란 목질로 벼한 나무 뿌리, 층이 져 있는 암맥, 물 위에 뜬 기름의 얼룩, 유리의 섬세한 균열. ---이와 같은 온갖 것들이 때때로 내겐 기은 매력을 주었고 무엇보다도 심취했던 것은 물고 불, 연기, 구름, 먼지, 내가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빙빙 맴도는 갖가지 빛깔의 무늬였다. 피스토리우스를 방문한 후 며칠 동안 그때의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그러한 기억이 어떤 흥분과 기쁨, 그리고 그때부터 내가 느껴온 나 자신의 감정의 고양감이 훨훨 타오르는 불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ㄱ서에 의해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을 응시한다는 것은 이상스럽게 마음을 유쾌하고도 만족스럽게 채워주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경험은 내가 나의 본래의 인생의 목표를 향해 가는 동안 발견했던 다른 경험에 보태어졌다. 어떤 형상을 세밀히 관찰하는 것과 불합리해 보이며 난잡하고 괴상하게 느껴지는 자연 형상에 몰두하는 일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우리들이 이 형상을 만들어낸 어떤 의지와 조화되어 있는 존재라는 깨우침을 갖게 해준다. ---우리는 극서들이 곧 우리들 자신의 기분이며, 우리들 자신의 창조물이라고 여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우리는 우리들과 자연 사이의 경계가흔들리고 녹아버리는 것을 느끼고 또한 우리들의 망막에 맺히는 형상이 외부적인 인상에서 연유된 것인지혹은 내부적인 것에 연유하는 것인지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얼마나 우리가 창조자이며, 얼마나 우리들의 영혼이쉴새없이 이 세상의 끊임없는 창조에 관여하고 있는가를 이 연습에서만큼 단순하ㅗ 쉽게 발견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내부에서와 자연의 내부에서 존재하는 신은 동일한, 나뉘어질 수 없는 하나의 신이며 만일 외부의 세계가 붕괴되면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그것을 재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과 강, 나무나 잎, 뿌리와 꽃 등 모든 자연의 형성물의 원형은 우리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 본질은 영원하고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영혼에서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개는 사랑의 힘과 창조의 힘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나의 관찰이 어떤 책에 증명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침을 뱉은 벽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크게 그리고 얼마나 깊이 흥미를 끄는 일인가에 대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일찍이 설파한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축축한 벽의 얼룩 앞세서 마치피스토리우스와 내가 불을 보고 느낀 것과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었다.
우리가 다음번에 만났을 때 그 풍금 연주자는 내게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흔히 개인의 한계를 너무 좁게 책정해버리는 경향이 있소. 우리는 우리가 개성적인 것이라고 일컫고 다른 것과 판이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을 개인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우리들은 누구나가 다 이 세계의 온갖 축적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오. 우리들의 육체가어류나 더 이전의 생물체에까지 소급될 수 있는 발달의 계보를 지닌 것처럼 우리들의 영혼 속에도 이제까지 인간의 영혼 속에 살아왔던 온갖 것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오. 이제까지 존재해왔던 모든 신들과 악마들은, 그것들이 설령 그리스인들에게 있었건, 중국인들에게 있었건, 혹은 쑬루카퍼인들에게 있었건간에 모두 어떤 가능성으로서, 소망으로서, 방편으로서 우리들 내부에 존재하며 또 다른 곳에도 존재하고 잇는 것이오. 만일 조금도 교육받지 못한 한 명의 평범한 아이만을 남기고 전 인류가 멸망해버린다 해도 이 아이는 사물의 전 과정을 다시 발견해낼 것이오. 여러 신과 악마와 낙원과 게율과 금제와 구약, 신약 등, 이 모든 것들을 그 아이는 다시 창조해낼 수가 있는 것이오.”
”네, 그럴 수도 있겠읍니다만,” 나는 반대 의견을 말했다. “그렇다면 개인의 가치는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내부에 모든 것이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우리는 여전히노력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잠깐!” 피스토리우스는 성급히 소리쳤다. “당신이 단순히 자신의 내부에 세계를 지니고만 있느냐, 혹은 그것을 의식하고있느냐는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지는 일인 것이오! 미친 사람일지라도 플라톤을 연상시키는 사상을 창조해낼 수도 있을 것이고, 헤른후트파의 학교에 다니는 경건한 어린 학생이 그노시스파나조로아스터파에 나타난 깊은 신화적인 연관을 독창적으로 생가해낼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하오. 그렇지만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의식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는 한 그루의 나무나 돌, 기껏해야 짐승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오. 그러나 이 인식의 최초의 불꽃이 한번 번쩍 빛나기만 해도 그는 인간이 되는 거요. 당신도 역시 저기 거리 위를 걷고 있는 모든 두 발 달린 족속들을 단지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다는 것과 자식을 열 달 동안 뱃속에 넣고 다닌다는 것만으로 해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요. 그들 중의 얼마나 많은 부류가 단지 물고기나 양, 벌레나 거머리에 불과한지, 얼마나 많은 부류가 개마나 벌과 같은 존재에 불과한지를 당신도 잘 알 것 아니오. 그들 각자에게는 물론 인간이 될 가능성이 이미 부여되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예감하고 부분적일망정 의식할 수 있게 되는 동안에만 그 가능성은 비로소 그들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오.”
우리들이 나눈 대화는 대략 이런 종류였다. 우리들의 대화가 나에게 전혀 새로운 거이나 아주 놀랄 만한 깨우침을 가져다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모든 대화들은, 심지어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들까지도 나의 내부의 어떤 한 지점을 가볍게 그러나 끊임없이 망치질해대는 것이었다. 그모든 것들이 나의 형성을 도와주고, 내가 허물을 벗고, 껍질을 깨뜨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한 매번의 대화로 나는 내 머리를 조금씩 더 높이, 조금씩 더 자유롭게 치켜들어 마침내 내 황금빛 새는 그 아름다운 머리를 산산이 부수어진 세계의 껍질 밖으로 내밀었던 것이다.
우리는 자주 서로의 꿈 이야기를 하곤 했다. 피스토리우스는 꿈을 해석할 줄 알았다. 한 가지 놀라운 예가 기억에 떠오른다. 나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서 나는 날 수가 있엇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비상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대 비약에 의해 공중에 내동댕이쳐진 것이었다. 이 비상의 감각은 내 정신을 몹시 고양시켜주었지만 나는 곧 원하지 않았는데도 걱정될 만큼 높이 공중으로 치솟아로르는 것이 두려워졌다. 나는 상승과 낙하를 호흡의 정지와 내뿜는 것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꿈에 대해서 피스토리우스는 이렇게 해석해주었다. “당신을 날 수 있게 한 비약이란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커다란 특전이오. 그것은 모든 힘의 근원과 연관된 감정으로 그런 감정에 휩싸이게 되면 누구나 불안을 느끼게 마련이오. 그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니까! 그러므로 대개의 사람들은 쉽사리 나는 것을 포기하고 법의 규정에 따라 걸어가는 편을 택하는 것이오. 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소. 당신은 유능한 청년답게 계속 날고 있는 거요. 그러니 이것 봐요. 당신은 점차 당신 스스로 그것을 제어할 수 있게 되고 당신을 휩쓸어가는 보편적인 위대한 힘에 대해 섬세하고 가냘르기까지 한 자기 자신의 힘이, 하나의 기관이 하나의 키와 맞먹게 된다는 믿을 수 없는 일을 깨닫게 될 것이오. 기막힌 일이지요. 그러나 그런 일이 없다면 미친 사람이그런 것처럼 아무런 의지없이 공중을 나는 결과가 되는 거요.
하늘을 나는 자들에게는 안전한 땅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에게보다 깊은 예감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오. 하지만 이들이 거기에 대한 어떤 ㅇ려쇠나 키를 갖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밑바닥도, 끝도 없는 곳으로 굴러들어가고 마는 거요. 그러나 당신은 말이오, 싱클레어. 당신은 그것을 할 수 있소. 그런데 어째서 그걸 아직도 전혀 모르고 있는 거요? 당신은 하나의 새로운 기관, 즉 호흡 조절기를 가지고 그걸 하고 있는 거요. 이제는 당신의 영혼이 근원에 있어서는 얼마나 ‘개인적’이 아닌가를 알 수 있을 거요. 다시 말하자면 당신의 영혼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 조절기를 고안해낸 것은 아니란 말이오. 그렇소, 그것은 새것이 아니오! 그건 빌려온 것이며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오. 그것은 물고기의 평형기관, 즉 부레인 거요. 부레가 일종의 폐를 겸하고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정말로 호흡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소수이지만 몇몇 이상스럽고 보수적인 어류가 오늘날까지도 분명히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거요. 당신이 꿈속에서 날 때 쓴 부레는 이러한 폐와 같은 종류인 것이오.”
그는 내게 동물학 책을 한 권 가져와서 그 고색창연한 물고기의 이름과 그림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나는 나의 내부에 진화 초기 시대의 기능이 생동하고 있음을 신비스런 전율과 더불어 느끼고 있었다.
야곱의 싸움
내가 그 이상한 음악가 피스토리우스로부터 들은 아프락사스에 관한 이야기는 간단히 되풀이될 수는 없는 성질의 것이다. 오히려 그에게서 배운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로의 길을 한 발자국 내디딜 수 있던 일이다. 당시의 나는 열 여덟 살의 유난스런 젊은이였는데 오만 가지 일에 남달리 조숙해 있으면서도 또다른 오만 가지 일에는 아주 뒤떨어진 채 의젓하지가 못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해보면 어떤 때는 자기가 무척 잘난 것 같은 건방진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의기를 상실한 채 비굴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때론 나는 나 자신을 천재라 여기기도 하다가는 때로는 내가 반쯤은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기도 했다. 요컨대 나는 내 동년배드러럼 즐거움이나 생활을 함께 나눌 수가 없고 때로는 그들과의 사이에 절망적인 격리감을 느끼면서 내 생활이 폐쇄적이라는 것에 대한 깊은 가책과 걱정으로 초췌해지기도 하였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한 기이인 피스토리우스는 내게 자기 자신에 대한 용기와 존경을 간직하라고 가르쳐주었다. 나의 말 속에서, 나의 꿈 속에서, 나의 환상과 생각 속에서 그는 노상 가치있는 어떤 것을 찾아내서는 그것들을 적절하게 해석해주고, 진지하게 논했으며 내게 모범을 보여주었다.
”당신은 언젠가 내게” 그는 말했다. “’도덕적이 아니기 때문에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소.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 아니오. 하지만 당신 자신이 바로 그 도덕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오! 다른 사람과 당신 자신을 비교하진 마시오. 가령 자연이 당신을 박쥐로 만들었다면 타조가 되려고 애쓰지 말란 말이오. 당신은 번번이 자기를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자신을 자책하고 있소. 그런 생각을 버리시오. 불을 들여다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시오. 그래서 어떤 예감이 당신을 찾아들고 당신의 영혼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그것들에게 당신의 몸을 맡기시오.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지, 혹은 어떤 흠모하는 신의 뜻과 합치되는지를, 그들의 마음에 드는지를 맨 먼저 묻지 마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망하는 거요.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안전한 땅 위를 걷게 되고 그러다가는 화석이되고 마는 거요. 이봐요,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프락사스요. 그는 신인 동시에 악마지요. 그는 자신의 내부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소. 아프락사스는 당신의 생각이나 꿈에 대해서 무슨 이의를 제기하진 않을 것이오. 그것을 결코 잊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당신이 흠잡을 데 없이 모범적인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리면 그는 당신을 버릴 것이오. 당신을 버리고는 자기의 사상을 요리하기 위한 새로운 그릇을 찾아가고 말 것이오.”
나의 모든 꿈들 중에서 그 어두운 사랑의 꿈이 가장 충실했다. 나는 매우 자주 그 꿈을 꾸고 문장의 새 밑을 지나 옛날 우리 집으로 들어갔으며 어머니를 포옹했는데 다시 보면 나는 어머니 대신 키가 크고 반은 남성이며 반은 여성인 어떤 사람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느끼긴 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는 듯한 동경으로 그 여자에게 밀착되고자 애썼다. 나는 이 꿈에 대해서만은피스토리우스에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온갖 다른 이야기는 그에게 다 하면서도 그 이야기만은 남겨두었다. 그 꿈은 나의 은신처이며, 나의 비밀이며, 나의 피난처였다.
나는 심정이 착잡할 때는 으레 피스토리우스엑 옛날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어스름한 저녁의 교회 안에서 이상스럽게도 친밀하며 자기 자신의 내부에 침잠하여 자기 스스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한 이 음악에 빠져 넋을 놓고 있었다. 그 음악은 항상 나에게 도움이 되었고 영혼의 소리에 정당성을 부여할 준비를 갖추게 해주었다.
풍금 소리가이미 잦아든 뒤에도 우리는 잠시 교회 안에 머물며 희미한 저녁빛이 고딕식 창문을 통해 비치고 있다가 이윽고 사라져버리는 것을바라보곤 하였다.
”내가 이전에는 신학자였고 하마터면 목사가 되려고까지 했다는 것은” 피스토리우스가 말했다. “어쩌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그때의 일은 다만 형식에있어서의 착각에 불과한 것이었소. 목사가 된다는 것은 여전히 나의 천직이고 나의 목표요. 단지 나는 너무 일찍 만족했던 것이고 아프락사스를 알기도 전에 여호와에게 몸을 맡긴 거요. 모든 종교는 아름다운 거요. 종교는 바로 영혼인 것이오. 사람이 그리스도교의 만찬을 먹든, 메카로 순례를 가진 그것은 한가지인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말했다. “진정한 목사가 될 수 있을 텐데요.”
”아니, 싱클레어, 그렇지 않소. 그럼 나는 거짓말을 해야 했을 거요. 우리들의 종교는 마치 종교가 아닌 것처럼 행해지고 있소. 꼭 해야 한다면 나는 아마 가톨릭 교도는 될 수 있을 거요. 하지만 신교의 목사는---안 되지요. 얼마 안 되는 실제적인 신자는---나는 그런 사람을 알고 있는데---완강히 문자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오. 그들에게 나는그리스도는 개인이 아니라 신인 동시에 인간이며, 신화이며, 인류가 자기 자신을 영원의 벽에다 그려놓았다고 생각하는 한 장의 거대한 영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시오. 게다가 그밖의 사람들, 현명한 설교를 듣기 위해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무슨 일에든 태만하지 않으려는 등의 이유로 교회에 오는 사람들에게 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소?그들을 개종시키라고 하고 싶소? 그렇지만 나는 그런 짓을하고 싶지 않은 거요. 목사란 개종시키려는 자는 아닌 것이오. 목사는 단지 신자들 사이에서, 자기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며 그것으로써 우리가 신이라 여기는 감정들을 위한 지지를 표현하고자 할 따름인 거요.”
그는 말을 멈추었다. 잠시 숨을 돌리더니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가 아프락사스라고 이름지은 우리의 새로운믿음은 아름다운 것이오, 싱클레어. 그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믿음이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갓난애에 불과하지요. 아직 날개도 돋지 않은 거요. 고독한 종교, 그건 아직 진짜가 못되는 거요. 종교란 공통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며, 예배와 도취, 축제와 비법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요.”
그는 자기의 생각에 몰두해 들어갔다.
”그 비법은 단독적으로나 아니면 조그만 단체에서 행해질 수는 없나요?” 나는 주저하면서 물었다.
”그건 될 수가 있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이미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소. 만약 그런 일을 다른 사람들이 말게 된다면 수년쯤은 감화원에 처박히게 될 그런 예배를 행해왔소. 그러나 나는 그것도 진짜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소.”
갑자기 그는 내 어깨를 쳤으므로 나는 놀라 몸을 움츠렸다. “이봐요!” 그는 성급하게 소리쳤다. “당신도 역시 비법을 갖고 있소. 당신은 분명히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꿈을 가지고 있을 것이오. 그것을 알려는 건 아니오. 그러나 분명히 말해두지만 당신은 그것을, 그 꿈을 갖고 살아가시오. 그것을 갖고 놀고 그것을 위한 제단을 마련해 주시오! 완전하진 않지만 그러는 것도 하나의 길일 수 있는 거요. 우리들이, 당신과 나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이 세계를 개선할 수 있을지는 장차 알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서 그것을 매일같이 개선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는 의미가 없는 것이오. 생각해보시오. 싱클레어, 당신은 이제 열 여덟 살이오. 당신은 매춘부의 뒤를 따라가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고 보면 당신은 아마 사랑의 꿈이나 사랑의 소원을 갖고 있을 것이 분명하오. 아마도 당신은 그것에 대해 공폴르 느끼고 있겠지.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것이 바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최상의 것일 테니 말이오! 당신은 나를 믿어도 좋소. 나는 당신과 같은 나이 때 나의 사람의 꿈을 너무 억눌렀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었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요. 아프락사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되는 거요.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영혼이 우리의 내부에서 소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지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요.”
나는 깜짝 놀라 그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마음에 떠오르는 이리라고 해서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닐 텐데요!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요.”
그는 내게 다가섰다.
”형편에 따라서는 그것도 허용될 수 있소. 대개는 착각에 불과하지만, 내 말 역시 당신의 뇌리에 떠오르는 일이라고 무엇이든지 간단하게 해치워버리라는 건 아니오.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당신의 마음에 떠오른 그 자체의 좋은 의의를 가진 어떤 일을 배척한다든가, 그것에 대해 도덕적인 평가를 제시함으로써 그것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요. 자기나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대신 엄숙한 생각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희생의 비법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는 거지요. 물론 그런 행위를 하지 않고서도 자기의 충동과 유혹을 존경과 사랑으로 취급할 수도 있긴 할 거요. 그것들은 자기의 뜻을 나타낼 거요. 그것들은 다 뜻을 지니고 있으니까요---혹시 당신에게정말로 미친 생각이나 죄를 범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면, 싱클레어, 혹시 당신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진다거나 얼토당토 않은 추잡한 일을 저지르고 싶으면 잠깐 동안이라도 아프락사스가당신의 내부에서 그렇게 공상하고 있다고 생가해보시오! 당신이 죽이고 싶은 어떤 사람은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그의 형상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그것을 미워하는 것이오.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우리를 흥분시키지는 못하는 법이니까 말이오!”
피스토리우스가 이토록 나의 내심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를 가장 강하게, 또는 가장 기묘하게 감동시킨 것은 이 충고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내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데미안의 말과 똑같은 음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피차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지만 그들은 내게 똑같은 소리를 한 것이다.
”우리가 보는 사물이라” 피스토리우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의 내부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오. 우리가 우리의 내부에 갖고 있는 것 이외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오. 그들은 단지 외부의 형상만을 현실이라 여기고 자기의 내부에 들어 있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세계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있는 거요. 그렇게 한다면 행복할 수는 있는 거요. 내가 만일 일단 다른 길을 발견하게 된다면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다라가지는 않을 거요. 싱클레어, 대다수가 가는 길은 편하지만 우리들의 길은 힌든 거요.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갑시다.”
며칠 후 두 차례의 기다림이 헛되이 지나간 후 나는 그가 혼자서 술에 만취된 채 차가운 저녁 바람을 맞으며 비틀거리며 거리모퉁이를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를 부르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내 곁을 지나쳤는데 마치 미지의 것으로부터 자기를 부르는 어두운 소리를 뒤따라가는 것처럼 불타는 고독한 시선으로 앞쪽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쯤 뒤쳐져 그를 따라 갔다. 그는 마치 유령처럼, 광신적이지만 다소 흐트러진 걸음걸이로 철사줄에 끌려 가는 것처럼 가고 있었다. 처연한 심정이 되어 나는 집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 꿈의 세계로 되돌아왔다.
”저렇게 해서 지금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세계를 개선하고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생각은 저속하고도 도덕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의 꿈에 대해서 대체 내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렇게 취한 속에서도 내가 불안스럽게 나의 길을 가는 것보다는 훨씬 확실히 그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리라.
수업 시간 사이의 쉬는 시간에 나는 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는 한 동급생이 나에게 접근하려고 애쓰는 것을 가끔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자그만하고 연약해 보이는 야윈 아이였는데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의 가는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그의 시선과 태도에는 무언가 특이한 것이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가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 앞을 지나쳐버리게 내버려두고는 다시 나를 따라와서는 우리 집의 현관 앞에 멈춰서는 것이었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니?” 내가 먼저 물었다.
”난 그저 너와 한 번만이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그는 수줍은 듯이 말했다. “조금만 함께 걸어줄 수 있겠니?”
나는 그를 따라걸었다. 그가 몹시 흥분한 상태로 기대에 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너는 강신술가지?” 그가 아주 당돌하게 물어왔다.”
”아니, 크나우어.”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절대로 아니야, 어떻게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니?”
’”아니면 접신술가니?”
”그것도 아니야.”
”제발 그렇게 말문을 닫아버리지 말아줘! 나는 네가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지니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어. 너의 시선을 보면 알 수 있어. 네가 신령과 접촉하고 있다고 나는 확신해. 호기심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절대 아니야. 싱클레어, 그런 게 아니야! 내 자신도 일종의 탐구자인걸. 그래서 이렇게 외로울 수밖에 없는 거야.”
”자세히 말해봐.” 나는 그를 격려해주었다. “난 정말 신령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난 단지 내 꿈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야. 그 점을 네가 느낀 모양이구나. 다른 사람들도 역시 꿈속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그들 자신의 꿈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나와의 차이점이야.”
”그래, 그럴지도 몰라.”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꿈이 무슨 종류의 꿈인가 하는 것만이 문제지.---너는 선한 악마를 사용하는 마술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니?”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런 건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방법을 배우면 돼. 죽지 않게 될 수도 있고 마술을 부릴 줄도 알게 되지. 넌 한 번도 그런 연습을 해 본 적이 없니?”
이 연습에 대한 나의 호기심어린 질문에 그는 처음에는 대답을 안 할 듯하다가 내가 돌아서서 가버리려고 하자 비로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잠들려고 할때나 정신을 집중시키려고 할 때 그런 연습을 해. 나는 무엇인가를, 예를 들면 낱말 하나나 어떤 사람의 이름이나, 또는 기하의 도형을 상상하는 거야. 그러고 나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집중적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이 내 머리속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내 머리속에다 그려보려고 애쓰는 거야. 그것이 목구명에까지 차오르도록, 그것에 의해 내가 완전히 충만되기까지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러면 나는 아주 확고해지고 아무것도 나의 이 안정된 상태를 방해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나는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얼마쯤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다른 이야기들을 더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이상스러울이만치 흥분되어 있고 성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가 질문을 보다 명확하게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자 그는 곧 자신의 최대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너도 역시 절제하고 있지?” 그는 불안한 어조로 내게물었다.
”그건 무슨 뜻이니? 성적인 것을 말하는 거니?”
”그래, 그걸 뜻해. 나는 지금이 년째 절제하고 있어. 그 가르침을 알게 된 이후로 말야. 너도 이미 알다시피 그 전에는 나도 방탕한 짓을 하고 다녔지. ---넌 한 번도 여자 곁에 가본 적이 없니?”
”없어.” 나는 대답했다. “내게 알맞은 여자를 발견하지 못했던 거야.”
”그러나 만약 네가 네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한다면 너는 그 여자와 함께 잘 수 있을 것 같니?”
”물론이야. ---만약 여자측에서도 이의가 없다면.” 나는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아, 그렇다면 너는 잘못된 길을 가는 거야! 내적인 힘은 철저한 금욕 상태에서만 지속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거야. 나는 이 년쯤 금욕을 했어. 이 년하고도 일 개월이 좀 넘도록! 그건 매우 힘든 일이야. 번번이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곤 했지.”
”들어봐, 크나우어. 나는 금욕하는 것이 그렇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곤 생각지 않아.”
”나도 알고 있어.” 그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지. 그렇지만 너한테서까지 그런 말을 들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어. 보다 더 높은 정신적인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순결을 지켜야 하는 거야, 무조건 말이야!”
”그래, 그럼 그렇게 하렴! 하지만 나는 왜 자기의 성을 억제하는 사람이 그 어느 다른 사람보다 순결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어. 넌 성적인 것을 모든 생각과 꿈속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밤이면 나는 내 자신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그런 꿈을 꾸곤 해,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야!”
나는 피스토리우스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를 생각해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아무리 옳은 말일지라도 그 이야기를 무작정 전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면, 또 내 스스로가 그것을 준수해볼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다음이 아니면 함부로 충고를 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필사적으로 도움을 구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충고의 말조차 해줄 수 없다는 것에 깊은 굴욕감을 느꼈다.
”나는 온갖 실험을 다 해보았어!” 크나우어는 한탄하며 말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냉수욕도 해보고, 눈으로 몸을 비비기도 하고, 체조와 달리기도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 매일 밤마다 나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할 그런 꿈에서 잠을 깨는 거야. 더욱 두려운 일은 그런 꿈으로 인해 내가 정신적으로 배웠던 모든 것을 차츰차츰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야. 나는 더 이상은 마음을 집중시키거나 스스로 잠들 수도 없게 되어 어떤 때는 하룻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기도 해. 나는 더 이상 이 상태를 지탱하지 못하겠어. 내가 만약 이 싸움을 계속해나가지 못하거나 항복해버려 자기를 더럽히게 된다면 그때는 애당초 한 번도 싸움을 하지 않았던 사람드로다 더 나빠지는 결과가 되고 말 거야. 넌 그걸 이해할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지만 거기에대해서는 한 마디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가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의 깊은 고통과 절망이 나에겐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웠다. 단지 그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만 깊이 인식될 뿐이었다.
”그럼 너는 내게 해줄 말이 한 마디도 없다는 거니?” 마침내 지친 그가 슬픈 듯이 말했다.
”전혀 아무것도 없어? 한 가지쯤은 있을 수도 있을 텐데! 대체 넌 어떻게 하고 있니?”
”난 너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어, 크나우어. 사람이란 이런 경우엔 서로 도울 수가 없어. 나도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은 적이 없거든. 자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그리고는 네 본질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대로 행하면 되는 거야. 다른 방법은 없어. 만일 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찾을 수 없다면 넌 어떤 신령도 발견해낼 수 없으리라는 건 확실해.”
그는 깊은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면서 말을 멈추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갑자기 증오에 불타오르는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이마를 찌푸리며 난폭하게 외쳤다. “쳇, 넌 정말 근사한 성인군자시군! 너도역시 악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어! 너는 현자인 척하면서 뒤에서는 남몰래 나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쓰레기에 매달려 있는 거야! 너도 역시 돼지야. 내 자신과 마찬가지로 돼지란 말이야. 우리들은 모두 돼지인 거야!”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내버려둔 채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두서너 발자국쯤 나를 따라오더니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뛰어 가버렸다.
나는 동정과 혐오가 뒤범벅이 된 심정으로 심한 구토증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와 조그만 내 방에서두서너 장의 그림을 주위에 세워놓고 간절한 내심의 동경으로 내 자신의 꿈에 몸을 맡기기까지 이러한 심정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곧 나의 꿈이, 집의 문과 문장, 어머니와 낯선 여인에 관한 나의 꿈이 다시 나타났다. 나는 그 여인의 표정을 너무나 생생히 느끼고는 당자에 그 여인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십 오 분씩 꿈속에 잠겨서 무의식중에 시간을 보낸 후 그림을 그려나가 마침내 며칠 후 그 그림이 완성되자 나는 저녁 무렵 그것을 내 방의 벽에다 붙이고 탁상용 램프를 그 앞에 옮겨다 놓고는 생사를 결판낼 때까지 싸워야 할 유령에게 대적하는 심정으로 그 그림 앞에 다가섰다. 그 얼굴은 옛날의 초상과도 닮았고 나의 친구 데미안과도 닮았으며 몇몇 표정은 내 자신과도 닮아 있었다. 한쪽 눈은 표시가 날만큼 다른 눈보다 위쪽에 붙어 있었고 눈매는 숙명에 충만된 채 내 머리 너머를 골똘히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 그림과 마주서자 내면적인 긴장으로 가슴속까지 써늘해져 왔다. 나는 그 그림을 향해 말을 걸었고, 비난했고, 어머니라 불렀고, 애인이라보 불렀으며 매춘부이며 천한 여자라고 불렀고 또 아프락사스라고도 불렀다. 그러는 동안 피스토리우스의 말이---혹은 데미안의 말이었던가? 언뜻 생각났다. 언제한 말인지는 기억해낼 수가 없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을 다시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야곱과 신의 천사 사이의 싸움에 관한 말로서 “그대 나를 축복치 않는다면 내 그대를 놓아주지 않으리로다”라는 것이었다.
그림 속의 얼굴은 램프의 불빛을 받으며 내가 부를 적마다 변화했다. 그것은 환하게 빛나기도 하고, 검고 어둡게 변하기도 했다. 생기없는 눈으로 창백한 눈꺼풀을 감았다가는 다시 뜨고, 그러다가는 타는 듯한 광채로 눈을 빛내기도 했다. 그 얼굴은 여자였고 동시에 남자였으며 소녀였고 조그만 아이였고 짐승이었다. 몽롱하게 반점처럼 보이다가는 다시 크고 분명하게 되기도 했다. 마지막에 나는 강력한 내부의 부름에 따라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그림이 나의 내부에서 한결 더 감하고 힘찬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자신의 내부에 너무나도 깊이 들어 있었으므로 마치 그것이 온통 내 자신이 되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아서 그것을 나에게서 분리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봄의 폭풍과도 같이 어둡고 무겁게 들끓는 소리가 들려왔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과 새로운 체험의 감동에 몸이 떨려왔다. 별들이 내 앞에서 명멸해갔고 잊어버린 유년 시절의, 아니, 존재 이전의 시기와 생성의 초기적 단계에까지 이르는 추억이 나의 곁을 밀치고 또 밀치면서 스쳐갔다. 내 생활의 모든 것은, 가장 은밀한 비밀에 이르기까지도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이던 추억은, 어제와 오늘로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앞선 미래를 반영하고 오늘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더 새로운 생활의 형식으로 나를 이끌어갔다. 그 형식의 형상은 굉장히 맑고 눈 부실 정도였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정확히 기억해낼 수 없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보니 나는 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불을 켜고 중요한 걸 생각해내야 한다고 느꼈지만 몇 시간 전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그림을 찾았지만 그것은 이미 벽에도 걸려 있지 않았고 책상 위에도 없었다. 희미하게나마 그것을 내가 태워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났다. 그것은 내 손바닥 위에서 태워 그 재를 먹어버린 것은 혹시 꿈이었을까?
크고 쑤시는 듯한 불안이 나를 몰아세웠다. 나는 모자를 쓰고 집과 골목 사이를 무엇엔가에 강요당하고 있는 것처럼 걸어갔다. 폭풍에 휘몰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리를 지나고 광장을 가로질러 달리고 또 달렸다. 피스토리우스의 그 음침한 교회 앞에서 귀를 기울이다 무엇을 찾는지조차도 모르면서 어두운 충동을 감당할 길이 없어 다만 찾고 또 찾았다. 나는 매춘부들의 집이 모여 있는 교외를 통과했다. 그곳에는 아직도 여기저기 불빛이 남아 있었다. 멀리 외곽으로는 신축 가옥과 벽돌더미가 군데군데 잿빛의 눈에 뒤덮여 있었다. 마치 몽유병자처럼 낯선 압박감에 몰려 이 황량한 곳을 헤매면서 나는 문득 고향의 신축 가옥이 생각났다. 그곳은 언젠가 한 번 나의 착취자 크로머가 최초의 거래를 하기 위해 나를 끌고 들어간 곳이었다. 그와 비슷한 느낌의 집 한 채가 잿빛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문구멍이 나를 향해 꺼먼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고 그것을 핑하려다 모래와 자갈 더미에 걸려 비틀거렸다. 그러나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더 강렬했으므로 그 문을 들어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널빤지와 바스러진 벽돌을 넘어 내가 이 황막한 공간 속으로 휘청거리며 들어서자 축축한 냉기와 돌 냄새가 음산하게 코를 찔렀다. 모래 한 무더기가 마치 잿빛의 얼룩처럼 눈에 띄는 외에는 모든 것이 어둠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내 곁의 어둠 속에서사람이 하나, 조그맣고 야윈 청년이 하나 유령처럼 일어섰다. 나는 그가 학교 친구인 크나우어임을 곧 알 수 있었지만 머리칼은 여전히 두려움에 곤두서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흥분한 나머지 정신이 산란해진 것 같은 어조로 그가 물었다. “어떻게 나를 찾을 수 있었어?”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를 찾았던 게 아냐.” 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말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몹시 힘들어 목소리는 생기가 없고 무거운, 얼어 붙은 것 같은 입술에서 간신히 새어나왔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찾았던 게 아니라고?”
”그래, 끌려 들어온 거지. 네가 나를 불렀니? 틀림없이 네가 불렀을 거야. 도대체 넌 여기서 무얼 하는 거니? 지금은 한밤중인데.”
그는 야윈 두 팔로 나를 발작적으로 끌어안았다.
”그래, 밤이야. 곧 아침이 되겠지. 오, 싱클레어. 나를 잊고 있었던 게 아니었군! 나를 용서해줄 수 있겠지?”
’대체 무엇에 대해서?”
”아, 나는 정말 추악했었어.”
이제서야 겨우 우리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그것이 네댓새 전이었던가? 내겐 그 일 이후에 벌써 한평생이 지난 것처럼 생각되었다. 지금에야 나는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뿐 아니라, 왜 내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인지, 크나우어가 이런 위험스런 곳에서 무얼 하려고 하였는지도.
”너는 자살하려고 했었구나, 크나우어?”
그는 추위와 공포에 몸서리쳤다.
”그래, 그러려고 했어. 할 수 있었을는지는 모르지만 난 아침이 될 때까지 여기 있으려고 했어.”
나는 그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하루를 시작하려는 옅은 빛이 말할 수 없이 차갑고 냉랭하게 잿빛의 대기 속에서 희미하게 비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꼭 잡은 채 상당히 멀리까지 걸어나갔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 그리고 누구에게도 오늘 일을 말해선 안 돼! 나는 잘못 된 길을 걸었던 거야. 잘못된 길일 뿐이야! 우리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두 돼지는 아니야. 우리들은 인가니야. 우리는 여러 신을 만들어내고 그들과 더불어 싸우고신은 우리를 축복해주는 거야.”
우리는 서로 아무 말이 없이 묵묵히 걷다가 헤어졌다. 집에 들어오자 날이 희뿌연히 새어왔다.
성○○시에서의 그 시절 동안 내가 가진 최선의 것은 피스토리우스와 함께 풍금 옆인 난로 앞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우리는 아프락사스에 관한 그리스어의 원서를 함께 읽었고, 그는 베다에서 번역된 몇 귀절을 내게 읽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신성한 ‘옴’을 부르는 법도 배웠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나의 마음을 이끈 것은 그의 해박성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것이었다. 나에게 유익했던 것은 내가 내 자신의 내부를 발견해내는 일이 현저히 발전된 것이었으며 내 자신의 꿈과 사상과 예감에 대한 믿음이 커진 것이었으며, 나의 내부에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일이었다.
피스토리우스와 나는 어떤 식으로든지 호흡이 잘 맞았다. 단지 강력하게 그를 생각하기만 하면, 언제나그가 오거나 아니면 그의 안부가 전해지곤 했다. 나는 데미안에게 했던 것처럼 그가 내 곁에 엇어도 무엇이건 그에게 물어볼 수가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똑똑학 강렬한 사상으로 질문을 그에게 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질문에 집중되었던 내 영혼의 힘이 대답을 가지고 내 마음속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내가 마음속에 그렸던 것은 피스토리우스나 데미안이라는 어떤 특정 인물이 아니라, 내가 꿈에서 만나는, 내가 그렸던 그 초상이었으며 내가 강렬히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내 영혼의 반은 남자이며 밤는 여자인 꿈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이미 단지 나의 꿈 속에서 조재하거나 종이 위에 그려진 초상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 바라는 모습으로, 내 자신의 고양된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자살 미수자 크나우어는 내게 기이하고도 어떻게 보면 우스운 관계를 맺어놓았다. 내가 그에게로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그날 이후로 그는 충실한 하인이나 심지어는 개처럼 나에게 매달려서 자기의 인생을 나와 결부시키려고 애쓰면서 맹목적으로 나를 추종했다. 괴상한 질문이나 소원을 갖고 나를 찾아와서는 유령을 보여달라고 한다든가 카발라 비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내가 그러한 것에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그는 곧이듣지 않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내가 온갖 힘을 다 갖고 있다고 믿는 지경이었다. 한 가지 이상스런 일은 내가 내 마음속에서 엉켜져 있는 어떤 일을 풀지 않으면 안 될 때 그가 자주 나에게 기묘하고도 어리석은 질문을 가지고 찾아옴으로써 그의 변덕스런 생각이나 관심거리가 나의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때론 그가 몹시 귀찬아져서 위압적으로 쫓아버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보내어진 사람이었고, 내가 그에게 준 것이 그의 마음속에서 갑절이 되어 내게 되돌아왔으며, 그 역시 내게 있어서 한 사람의 지도자이거나 길이라는 것이 깊이느껴졌다. 그가 내게 가져오는, 그가 그 속에서 자기 구제의 길을 찾는 얼빠진 책이나 저서도 당장데 깨달을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나에게 깨우쳐주었다.
크나우어는 후일, 감회없이 나의 길에서 떨어져나갔다. 그와는 싸움이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피스토리우스와는 싸움이 필요했다. 성○○시에서의 내 학창 시절이 끝나갈 무렵 피스토리우스와 이상야릇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평생에 한 번이나 볓 번쯤은 독실과 감사와 미덕과 아울러 갈등에 빠져드는 것을 피할 수 없는 때가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은 아버지와 스승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걸음을 떼어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설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참아낼 수가 없어서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순간의 고독의 쓰라림을 조금쯤은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나의 경우, 아버지와 그들의 세계 즉 유년 시절의 ‘밝은 세계’로부터 나는 맹렬한 싸움을 하며 헤어져나온 것이 아니라 서서히 거의 눈치채이지 않게 떨어져나왔고 낯설게 되어갔었다. 나는 그것이 몹시 유감스러웠고 때로 고향에 돌아가면 아주 쓰라린 심정이 되곤 하였다. 그러나 그 심정은 아주 가슴속 깊이 뼈저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참을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인 습관에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충동에서 애정과 공경심을 바쳤을 때, 우리가 독자적인 마음으로 귀의자나 친구가 되었을 때---만약 어느 순간에 우리 마음의 큰 부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떠나려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쓰라리고 무서운 일이다. 그런 때는 친구와 스승에게 반발하는 모든 사상이 독이 묻은 가시를 드러내며 우리 자신의 마음을 향해서 돌아오는 법이고, 그것을 막으려는 노력에서 오는 온갖 타격은 자기의 얼굴에 정통으로 명중하는 법이다. 그때에 적절한 도덕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온 사람은 ‘배신’과 ‘배은망덕’이란 단어가 창피스런 부름이나 낙인처럼 의식에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놀란 마음은 근심스러워하면서 유년 시절의 미덕의 사랑스런 골짜기로 숨어들지만 곧 이것과도 단절되어버리며 이 유대조차도 갈기갈기 찢기어져나간다는 것을 애써 믿으려 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나의 내부의 어떤 감정이 피스토리우스를 그렇듯 무조건 지도자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거역하기 시작했다. 나의 청춘 시절의 가장 중요했던 몇 달간의 체험은 그와의 우정, 그리고 충고, 그의 위로, 그와의 친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를 통해서 신은 나에게 이야기를 걸어 왔던 것이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의 꿈은 다시 나에게 돌아왔고, 해석되었고, 그리고 그 본질을 드러내었다. 그는 내 자신의 용기를 내게 주었다. ---아, 그런데 나는 지금 그에게 서서히 반항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서 너무 많은 교훈적인 부분에 대해 반감을 가졌고 그가 단지 나의 일부분만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의 관계에서 싸움이나 사소할지라도 다툼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불화나 어떤 절교의 형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릳르사이의 환상이 무늬진 파편으로 산산조각이 난 순간이 있었다.
벌써 얼마 동안 희미한 예감으로 나를 압박하던 어떤 감정이 어느일요일 그의 낡은 서재에서 뚜렷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난로 앞의 방바닥에 누워서 그는 그가 연구하고 있으며 그겻에 대해 명상하고 그것의 가능한 미래에 관한 기대로 심취해 있는 비법과 종교 형식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살아감에 있어서의 중대한 일이라기보다는 단지 기묘하고 흥미로운 호사거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고, 박식의 음향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고, 지난 시대의 폐허 아래서의 고달픈 탐구의 음향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불현듯 나는 이 모든 방법에 대해, 이 비법의 예배에 대해, 이 조상 전래의 종교 형식과 그것을 재조립해 내는 일에 대해 커다란 반감을 느끼게 되었다.
”피스토리우스!” 내가 듣기에도 의아스러울이만큼 놀랄 정도로 치밀어오르는 악의를 품은 어조로 나는 말했다. “내게 다시 한번 당신이 꾼 꿈의 이야기를, 실제의 꿈 이야기를 해주시오. 당신이 말하는 것들은 모두---너무나 곰팡이 냄새가 난단 말이오!”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그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말을 내받은 그 순간 나는 내가 쏘아 그의 심장에 명중시킨 그 화살이 바로 그의 무기창에서 얻어온 것임을---그가 이따금 내게 하던 풍자적인 어조의 자기 비난을 지금 내가 더욱 날카롭게 갈아서 되던진 것임을 창피스러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심정으로, 번갯불처럼 선명하게 느꼈다.
그 또한 그것을 순간적으로 느끼고는 곧 조용해졌다. 나는 불안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심정으로 그가 무섭도록 창백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오랜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새 장작을 불에 던지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아주 정당하오, 싱클레어. 당신은 정말 영리한 친구요. 난 다시금 그놈의 곰팡내나는 일을 갖고 당신을 괴롭히지 않겠소.”
그는 매우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입은 상처의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알 수가 있었다. 나는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용서를 빌고 나의 애정에 넘치는 감사를 다짐하려고 했다. 간절한 말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엎드린 채 불을 들여다 보고 아무 말 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그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저 엎드린 채 불을 들여다 보고 아무 말 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그 역시 아무 말이 없었고, 그렇게 우리들은 엎드려 있기만 했다. 불은 다 타서 사위어들기 시작했고 불꽃이 사그라들 때마다 나는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무엇인가 아름답고 친밀한 것들이 식어가고 사라져감을 느꼈다.
”당신이 내 말을 오해하지나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나는 압박감으로 메마르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 어리석고 무의미한 말이 마치 신문소설을 낭독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당신을 아주 정확히 이해하고 있소.” 피스토리우스는 나직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신이 옳은 거요.” 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기다리더니 다시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사람이 남에대해서 정당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말이오.”
아니, 아니, 내가 틀렸어요! 하고 내 마음속에서는 맹렬히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단 한 마디의 말로 그의 본질적인 약점과 그의 난점과 상처를 건드렸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스스로도 믿고 싶어하지 않는 그런 부분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의 이념은 ‘곰팡내가 나고’ 그는 퇴보적인 탐구자였으며, 낭만주의자였다. 그러자 갑자기 피스토리우스가 나에 대해 존재하고, 그리고 나에게 가르쳐주었던 것들은 그 자신에게는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고 스스로에게 줄 수도 없다는 사살이 뼈저리게 느껴져왔다. 그는 지도자인 그 자신마저를 넘어서고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길로 나를 인도했던 것이었다.
어떻게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조금도 나쁜 뜻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고 파국에 대한 예감 같은 것을 느끼지도 않았었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 순간조차도 전혀 스스로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지껄였던것이었다. 나는 단지 약간 재치있고 약간은 질이 나쁜 조그만 충동에 따랐을 뿐이건만, 그것이 운명적인 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사소하고 부주의한 행동을 한 것인데 그로서는 그것이 심판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그가 성을 내고, 자기 변명을 하고 나를 나무라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을 나는 내 마음속에서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미소라도 지었을 것이다. 그가 미소를 지을 수 없다는 것으로 내가 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준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다.
피스토리우스가 나에 의해서, 이 주제넘고 배은망덕한 자기 제자에 의해서 받은 타격을 그렇듯 말없이 감수하고 나의 정당성을 승인하고, 나의 말을 운명으로 인정함으로써 그는 나로 하여금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에 빠지게 하고 나의 실책을 몇 천 배나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타격을 가할 때는 강하고 자기 방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그러나 그는 말없이 참을성 있게 묵묵히 항복해버린 무방비 상태의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꺼져가는 불 앞에 엎드린 채로 있었는데 불타는 모든 형상과 스스로 사그라드는 모든 재의 줄기가 나에게 행복하고 아름답고 풍부했던 시간을 되새기게 해주었고 피스토리우스에 대한 의무를 배신한 죄악감을 점점 증대시켜주었다.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일어서서 걸어나왔다. 한참 동안 나는 그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컴컴한 계단 위에서, 집 앞에서 행여라도 그가 나를 뒤따라오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로 그렇게 서 있었다. 마침내 그곳을 떠나서는 몇 시간이고 시내와 교외를, 공원과 숲을 저녁 때까지 헤매어 다녔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내 이마 위에서 카인의 표지를 느꼈다.
점차 나는 그때의 일을 되새겨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생각은 오로지 나의 잘못을 책하고 피스토리우스를 옹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엇다. 그러나 매번 모든 것은 반대의 결과로 끝났다. 천 번 만 번 나는 나의 경솔한 말을 후회했고, 그것을 철회할 용의가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진실이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나는 피스토리우스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의 모든 꿈을 내 앞에 내세우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의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고 새로운 종교를 선포하는 것이었으며 영혼의 앙양과 사랑과 예배의 새로운 형식을 부여하고 새로운 상징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역량과 사명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열심히 이미 존재했던 일에 몰두했고 너무나도 정확히 과거의 사실들을 아로 있었고, 너무나 많이 이집트나 인도, 미트라스나 아프락사스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사랑은 이 세상이 이미 보아온 형상에 결부된 것이었는데도 그가 마음속 깊이에서 원했던 것은 전혀 새롭고 색다른 것이었으며 그것은 신선한 대지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지 박물관의 수집품이나 도서관 같은 데서 창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역할은 나에게 그러했듯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을, 새로운 신을 주는 일은 그의 사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누구에게나 ‘사명’은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스스로 선택하고 해석하고 임의로 관리할 수 있는 사명은 없다라는 깨달음이 날카로운 불꽃처럼 나를 불태웠다. 새로운 신을 원한다는 것은 잘못이었고 이 세계에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었다! 각성된 인간에서 부여된 의무란 단 한 가지,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부에서 견고하게 되어 그 길이 어디에 닿아 있건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더듬어 나가는 일 이외의 다른 의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이러한 생각이 깊이 나를 사로잡았고, 이 생각이야말로 내가 이번의 체험에서 얻은 열매였다. 때때로 나는 미래의 형상과 함께 놀았고, 혹은 시인으로서 혹은 예언자 혹은 화가로서 혹은 다른 어떤 것으로서 나에게 부여되었을 역할에 대해 꿈꾸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짓기 위해서, 설교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아니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도 그것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모두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을 뿐인 것이었다. 각자를 위한 진정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가지뿐이다. 그가 설령 시인이나 미치광이나 예언자나 심지어 범죄자로 일생을 마친다 해도 좋다---그것은 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결국 그리 중대한 일은 아닌 것이다. 그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임의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 운명을 자신의 내부에서 송두리째, 그리고 온전하게 끝까지 지켜내는 일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일부일 뿐이며, 도피하려는 노력이고, 대중의 이상 속에 숨으려는 재도피이며, 순응이고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무섭고 경건하게 그 새로운 생각이 내 앞에 솟아올랐다. 그것은 이미 몇 백 번이나 예감되어왔고,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된 적이 있었을 것이었지만 나는 이제서야 겨우 그것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나는 자연의 투척이다. 미지의 것에의, 어떤 새로운 것, 아마도 허무에의 투척일 것이었고, 이 투척으로 하여금 본연의 깊이에서 작용하게 하고 그 의지를 나의 내부에서 느끼고 송두리째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이 나의 천직인 것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나는 이미 많은 고독감을 맛보았다. 이제 내 앞에는 보다 더 깊은 고독이 펼쳐져 있었고 그것을 피할 도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피스토리우스를 달래려고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친구였지만 우리의 관계는 달라졌다. 우리는 그 일에 관해서 단 한번 다시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그 말을 한 것은 피스토리우스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도 알다시피 목사가 되려는 소원을 갖고 있소. 나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렇게도 많은 예감을 품고 있는 새로운 종교의 목사가 되고 싶은 거요. 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하는 걸 잘 알고 있소. 감히 입 밖에 내어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요. 나는 결국 다른 목사적인 봉사를 하게 되겠지요. 풍금을 통해서나 혹은 다른 방법을 통해서 말이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가 아름답고 신성하다고 느끼는 무엇인가에 의해, 다시 말하면 풍금 연주의 비법, 상징과 신화 같은 것에 의해 둘러싸여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요. 나는 그것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그것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거요.---그것이 내 약점이지요. 나는 때때로 싱클레어, 그러한 것을 원해서는 안 되고 그것은 사치이고 내 약점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으니까 말이요. 만약 내가 아주 단순하게 아무런 요구나 주장도 없이 운명에 자신을 맡긴다면 더 위대하고 더 정당하겠지요.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다오.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인 거요. 그것은 정말 어렵소.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정말로 어려운 일인 거요. 나는 때때로 그것을 꿈꾸지만 한 번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소. 나는 몸서리가 나오. 이렇듯 완전하게 벌거숭이가 되어 고독하게 서 있을 수만은 없는 거요. 나도 별 수 없이 다소의 따뜻함과 먹을 것이 필요하오, 이따금씩은 자기 동류의 체온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어하는 한 마리의 불쌍하고 연약한 개에 불과한 거요. 자기의 운명 이외에는 전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미 동류란 없는 거요. 그는 아주 고독하고, 주변에는 싸늘한 세계의 공간밖에는 없는 거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리스도가 그러했던 거요. 흔연히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교자도 있긴 했지만 그들 역시 영웅이 아니었고 자유롭지도 못했었소. 그들 역시 자기들에게 친밀하고 다정스런 무언가를 웒ㅆ던 거요. 그들에겐 모범이 있었고, 그들에겐 이상이 있었던 거요. 그저 운명만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모범도 이상도 없는 거니까. 그들에겐 아무런 사랑도, 아무런 위안거리도 있을 수 없소. 그런데도 사람은 이런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오. 나나 당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고독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서로 피차라는 것을 갖고 있소. 우리들은 뭔가 남다르고 반항하고 특이한 것을 추구하는 데서 남모르는 만족을 느끼긴 하지만 만약 온전하게 그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것까지도 단념해야 하는 것이오. 또 우리는 혁명가도 이상가도 순교자도 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거요.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인 거요.”
그렇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꿈꿀 수도 있었으며, 미리 느끼고 예감할 수는 있는 일이었다. 몇 번인가 아주 조용한 시간에 나는 그것을 조금쯤은 느껴본 적이 있었다. 그런 때에 나는 내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았고 내 운명의 모습의 그 강하게 부릅뜬 두 눈을 들여다보곤 하였다. 그 눈은 예지에 충만해 있는 때도 있었고 미친 듯한 열기에 충혈되어 있는 때도 있었고 애정에 빛나거나 깊은 악의에 차 있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것이건 다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것 하나라도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무엇 하나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단지 자기 자신만을 원하고 자신의 운명만을 원할 수 있을 뿐이었다. 피스토리우스는 지도자로서 내가 이 길을 제법 멀리까지 나갈 수 있게 도움을 주었던 것이었다.
그 시절, 나는 천지를 모르는 것처럼 돌아다녔다. 마음속에선 언제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고, 발걸음마다 위험에 차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 모두 그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아득한 심연이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마음속에서 데미아과 닮은, 그 두 눈에는 나의 운명이 깃든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한 장의 종이에다 이렇게 썼다. “지도자가 날르 버렸다. 나는 아주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 서 있다. 나는 혼자의 힘으로는 한 발자국도 걸어나갈 수가 없다. 오, 나를 도와주오!”
나는 그 쪽지를 데미안에게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게 하려고 할 때마다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짤막한 기도문을 외고 있으면서 때때로 혼자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곤 하였다. 그 기도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따라다녔다.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잇게 된 것이었다.
나의 학창 시절은 끝났다. 나는 휴가 여행을 떠나기로 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제안이셨다. 여행이 끝나면 나는 대학에 가야 했는데 무슨 학부에 가야 할지를 정할 수가 없었다. 한 학기 동안 철학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다른 어떤 학과일지라도 만족했을 것이다.
에바 부인
휴가중에 나는 몇 해 전에 데미안이 그의 어머니와 살고 있었던 집에 가보았다. 한 늙은 부인이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나는 그 부인에게 말을 건네고, 이야기 중에 이 집이 지금은 그 부인의 소유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데미안의 가족 소식을 물어보았다. 그 부인은 그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몰랐다. 내가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자 그 부인은 나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가죽 표지를 한 앨범 한 권을 찾아와 데미안의 어머니의 사진을 한 장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데미안의 어머니를 거의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 조그마한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는 심장의 고동이 정지한 듯한 충격을 느꼈댜. ---그것은 내 꿈의 모습이었다! 내 꿈의 얼굴이 바로 그 여자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자기 아들을 닮은, 모성적인 표정과 엄격함과 깊은 정열을 지닌 바로 그 키가 크고 거의 남자와 같은 느낌을 주는 여자의 모습,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친근하고도 접근하기 힘든, 데몬인 동시에 어머니이며 운명인 동시에 애인인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바로 이 여자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나의 꿈의 모습이 이 지상에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되자 격렬한 기적을 본 것 같은 충격이 나를 스쳐갔다! 저런 얼굴의 여자가, 내 운명의 표정을 지닌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더욱이 그 여자는 데미안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 후 나는 곧 여행을 떠났다. 이상야릇한 여행이었다! 나는 마음내키는 대로 끊임없이 이 여자를 찾아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 여자를 생각나게 하고 이 여자를 연상하게 만들고 이 여자를 닮은, 마치 뒤엉킨 꿈속에서처럼 나를 낯선 도시의 골목길로, 정거장으로, 열차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모습만을 만나는 그런 날이 있었다. 또한 나의 찾아 헤맴이 얼마나 소용없는 일인지를 느끼게 하는 그런 날도 있었다. 그럴때면 나는 어느 공원이나, 호텔의 정원이나, 역의 대합실에서 망연하게 앉아 있곤 했으며 나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그 모습을 나의 내부에서 소생시키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것도 부끄럽고 무상한 짓이 되어버렸다. 나는 한 번도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다만 낯선 곳을 달리는 기차 속에서 십여 분쯤 눈을 붙일 수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취리히에선가는 한 여자가 나를 따라온 적이 있었는데 상당히 예뻤지만 약간은 철면피한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여자가 마치 공기인 것처럼 아무런 느낌 없이 걸어갔다. 다른 여자에게 한 시간 동안이라도 관심을 보내느니 차라리 당장 죽는 편이 나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나의 운명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실현될 날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앞당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초조감으로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한 번은 어느 정거장에서, 인스부르크라고 생각되는데, 막 떠나는 기차의 창가에서 그 여자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보고는 며칠 동안을 비참함에 빠져 있었다. 그러더니 불현듯 그 모습이 다시 꿈속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추적의 무의미함을 깨닫고는 창피스럽고 처량한 심정이 되어 곧장 집으로 되돌아왔다.
이삼 주일 후 나느느 H대학에 입학했다. 만사가 다 나를 실망시켰다. 내가 수강한 철학사에 대한 강의는 공부하는 학생들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허무하고 기계적이었다. 모든 것은 너무나도 판에 박은 듯이 일정했고, 서로들 똑같이 행동하고 소년티를 못벗은 얼굴에 나타나는 과장된 쾌활성은 너무나 암담하게 공허하여 구입한 완제품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자유로왔다. 온종일을 나를 위해서 바치면서 교외의 낡은 집에서 조용하고 안락하게 지냈다. 내 책상 위에는 두서너 권의 니체가 놓여 있었다. 그와 더불어 살고,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끼며 그를 그토록 쉴새없이 몰아댄 숙명을 느끼며 그와 더불어 괴로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가차없이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뻐했다.
어느 날 저녁 늦게 나는 가을 바람에 나부끼듯 시내를 건들거리며 다녔다. 어느 음식점에선가 대학생들이 단체로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창문을 통해서는 담배연기가 자욱이 넘쳐나오고 있었다. 노랫소리는 세찬 파도처럼 흘러넘쳤지만 조금도 흥겹지 않았고 생기가 없이 단조로왔다.
나는 거리 모퉁이에 서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두 곳의 학생 주점에서는 면밀하게 훈련된 청춘의 쾌활성이 밤의 대기로 퍼져나오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집단이 있고, 어디를 가도 모임이 있고, 어디를 가도 운명의 발산과 군중 속으로의 도피가 있었다!
나의 뒤에서 두 남자가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그들의 대화의 한 토막을 들을 수 있었다.
”흑인 마을의 청년들의 집과 똑같지 않소?” 한 사람이 물었다. “모든 것이 합치되는군요. 문신까지도 아직 유행이랍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젊은 유럽의 모습입니다.”
그 음성이 내게는 이상스럽게도 경고하는 것처럼---귀에 익숙하게 울려왔다. 나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 두 사람을 따라갔다. 한 명은 자그마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일본인이었는데 나는 가로등 아래에서 그의 다소 검은 얼굴이 미소를 띠고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때 다른 남자가 다시 말을 했다.
”그런데 당신네 일본에서도 역시 더 나을 것이라곤 없겠지요. 군중에 추종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드문 법이니까요. 여기에도 간혹 그런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즐거운 놀라움으로 내게 와 닿았다. 나는 그 이야기하는 사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데미안이었다.
바람이 부는 밤에 나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와 일본인을 뒤따라 가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데미안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즐겁게 들었다. 옛날의 음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 음성은 옛날의 아름다운 안정감과 침착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나를 압도하는 옛날의 힘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잘 해결되었다. 나는 그를 발견한 것이었다.
교외의 거리 모퉁이에서 그 일본인은 데미안에게 작별을 고하고 어느 집의 현관문을 열었다. 데미안은 그 길을 되돌아 나왔는데 나는 거리의 한복판에 멈춰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나는 그가 단정하고도 탄력있는 걸음걸이로 나를 향해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갈색 비옷을 입고 가느다란 단장을 팔에 걸치고 있었다. 그는 발걸음을 전혀 흐트리지 않고 내 앞까지 와서 모자를 벗고 결단성 있는 입과 이마 위에 독특한 밝음을 지닌 옛날의 환한 얼굴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데미안!” 나는 불렀다.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여기 있었군, 싱클레어! 난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다네.”
”내가 이곳에 있는 줄 알고 있었나?”
”그것을 확실히 알진 못했지만, 그렇게 되기를 줄곧 바라고 있었다네, 자네를 오늘 저녁에 처음으로 만났지만, 자네는 그래, 언제나 우리를 뒤좇아왔었지 않나.”
”그럼 나를 바로 알아보았군?”
”물론이야. 자네는 확실히 변했어. 그러나 자네는 분명히 표지를 달고 있지 않은가!”
’표지라니, 무슨 표지?”
”자네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네만, 우리는 옛날에 그것을 카인의 표지라고 불렀었지. 그것이 우리들의 표지야. 자네는 언제나 그것을 지니고 있었다네. 그래서 나는 자네의 친구가 된 거야. 지금은 그것이 더 뚜렷하게 되었군.”
”나는 그것을 몰랐어. 아니 애당초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언젠가 나는 자네의 초상을 그린 적이 있다네. 데미안, 그런데 나는 그 초상이 나와도 닮았다는 데 놀랐었네. 그것이 바로 표지였을까?”
”그것이 표지였지. 기쁘네. 자네가 여기에 와서! 어머니도 기뻐하실 거야.”
나는 깜짝 놀랐다.
”자네의 어머니? 어머니도 여기 계신가? 그렇지만 나를 전혀 모르실 텐데?”
”아, 어머니는 자네에 대해 잘 알고 계신다네. 자네가 누군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어머니는 아마 자네를 알아보실 거야. ---자넨 오랫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더군.”
”물론 때때로 편지를 하려고 마음먹기도 했었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더군. 나는 얼마 전부터 곧 자네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네. 난 매일같이 이 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는 내 팔을 끼고 걸어나갔다. 침착성이 그에게서 나와서는 나의 내부로 옮겨왔다. 우리는 곧 옛날처럼 지껄였다. 우리는 학창 시절과 견신례 수업과 또 그 당시의 휴가중에 있었던 그 불행했던 만남을 회상했다. ---단지 우리들의 사이를 밀접하게 연결해준 사건에 관해서만은, 프란츠 크로머에 대해서만은 이번에도 말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우리는 기이하고도 예감에 가득 찬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데미안과 일본인이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했고, 아울러 대학생의 생활에 관한 이야기와 어쩌면 훨씬 동떨어진 내용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데미안의 말에 의하면 그것들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것이었다.
그는 유럽의 정신과 현시대의 특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도 단합과 집단 행동이 지배하고 있을 뿐 아무데도 자유와 사랑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학생 단체와 합창단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공동체는 강제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불안과 도피와 절망감에 나온 공동체이며 내부는 썩고 낡아 곧 붕괴되고야 말 것이라는 것이었다.
”단합이란” 데미안이 말했다. “아름다운 것이지만 우리가 가는 곳마다 볼 수 있는 이러한 식으로 번창하는 것은 전혀 단합이 아니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이 서로를 알게 됨으로써 새로이 탄생되는 것인데 그것이 한참 동안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는 거야. 지금 단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거지. 인간들은 서로에 대해서 두려워하기 때문에 서로의 품으로 도망해오고 있는 거야.---신사는 신사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들끼리, 학자들은 학자들끼리 말이야! 그런데 왜 그들은 두려워하는 것일까? 사람은 흔히들 자기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에 두려움을 느끼지.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거야. 내부의 알지 못하는 것에대한 두려움을 품은 자들만의 공동체라니!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의 법칙이 더 이상 오늘날을 살아가는 데 접당하지 않다는 것과 자기들이 좇아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로마 시대의 동판법 같은 것이라는 것과, 그들의 종교 그들의 도덕도 어느 것 하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거야. 유럽은 수백 년간, 아니 그 이상의 시간 동안 그저 연구만 하고 공장만 세우고 있었거든! 한 사람의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몇 그램의 화약이 필요한지는 정확히 알고 있지만 신에게 기도를 드릴 줄도, 한 시간 동안만이라도 만족하게 있을 수 있는 법도 전혀 모르고 있는 거야.
학생 주점 같은 곳을 한번 들여다보렴! 혹은 부자들이 드나드는 오락장이라도! 절망적이야! ---싱클레어. 어디서도 진정한 명랑함이란 없어. 그렇듯 불안에 가득 차서 모여든 사람들은 더욱이나 겁을 먹고 악의에 차서 아무도 남을 믿으려 들지 않는 거야. 그들은 이상이 아닌 이상에 매달려서는 새로운 이상을 세우는 모든 사람에게 돌맹이를 던져대는 거야. 싸움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느껴. 그것이 올 거야. 머지않아 틀림없이 올 거야! 물론 그것이 세계를 ‘개선’하지는 못하겠지. 노동자가 공장주를 때려 죽이거나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 총질을 한다 해도 단지 소유주만 바뀔 뿐이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일이 헛된 일이라는 건 아냐. 오늘날의 이상의 무가치함을 증명해주는 셈이 될 거고 석기 시대의 신들을 제거해줄 거니까. 현재대로의 이 세계는 바야흐로 죽어가고 있는 거야. 이 세계는 멸망하고 있으며 또 멸망하고 말 거야.”
”그럼 그땐 우리는 어떻게 될까?” 내가 물었다.
”우리가? 아, 우리도 아마 함께 멸망하겠지. 우리와 같은 자들도 맞아 죽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단지 그것으로 처리되는 것만은 아니야. 우리들에게서 남겨진 것이나 우리들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의 주위에 미래이 의지가 결집되 ㄹ거야. 유럽이 얼마 동안 기술과 과학이라는 시장으로 떠들썩하게 눌러 덮었던 인간성의 의지가 결국엔 나타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인간성의 의지란 결코 국가나 민족, 단체나 교회 같은 오늘날의 공동체와는 같지 않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게 될 거야. 자연이 인간에 대해서 원하는 바는 오히려 각 개인의 마음속에, 자네나 나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거야.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도 적혀 있었고 니체의 마음속에도 적혀 있었지. 이 중요한 흐름을 위해서는---물론 그것은 매일 다른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만, 오늘날의 공동체의 붕괴되어버릴 때에만 나타날 여지가 생길 거야.”
우리는 꽤 늦게서야 시냇가의 정원 앞에서 멈춰섰다.
”우리는 여기서 살고 있네.” 데미안이 말했다. “가까운 시일 안에 한번 방문해주게. 우리는 자네를 몹시 고대하고 있으니.”
기쁜 심정으로 나는 냉랭해진 밤공기 속에서 먼 귀로를 재촉했다. 시내의 여기저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대학생들이 소란을 피우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자주 즐거움을 나타내는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나의 고독한 생활 사이에서 격리감과 때로는 조소에 가까운 대립감을 느끼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껏 한 번도 오늘 같은 침착성과 내밀한 힘으로 그것이 내게 있어서 얼마나 사소한 관계일 뿐인지를, 내게 있어서 그 세계는 이미 얼마나 멀리 사라져버렸는지를 느낀 적은 없었다. 나는 내 고향의 관리들, 늙고 신분높은 신사들을 상기했다. 그들은 마치 행복한 낙원의 추억처럼 음주로 허송한 그들의 대학 시절에 대한 추억에 집착했고, 마치 시인이나 낭만주의자들이 그들의 유년 시절에 바치는 것과 비슷하게 그들의 대학 시절의 이제는 사라져버린 ‘자유’를 예배하곤 했었다. 어디서나 똑같았다! 어디서나 그들은 행여 자기 자신의 책임을 상기하게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가도록 요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자기의 과거 시절 어느 곳에서 ‘자유’를 찾고 ‘행복’을 찾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삼 년간 폭음을 하고 환성이나 지르다가 기어들어와서는 관청의 성실한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건 부패했다. 우리들의 나라는 부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대학생들의 이런 바보짓마저 그밖의 수백 가지의 일보다는 좀더 영리하고 좀더 질이 좋은 편에 속하는 것이긴 했다.
멀리 떨어진 숙소에 도달해서 잠자리에 들었을 때 이 모든 생각은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내 온 정신은 오늘이 나에게 해준 한 가지 약속에 목을 늘이고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내일이라도 당장 데미안의 어머니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술을 퍼마시거나 얼굴에 문신을 하거나 이 세상이 모조리 썩어 그 몰락을 기다리든 말든간에---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랴! 난느 단 한 가지, 나의 운명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마중나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나는 아침 늦게까지 곤하게 잤다. 새로운 날이 나에게는 엄숙한 축제일로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유년 시절의 성탄절 축제 이래 경험하지 못한 그러한 날이었다. 나는 내심 불안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게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날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고, 주위의 세계가 변화하고, 기대하고 있으며, 연관에 차 있고, 엄숙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또 느낄 수 있었다. 소슬히 내리는 가을비조차 아름답고 고요하고 기꺼운 음악에 가득 차 있는 축제일의 분위기를 더하게 했다. 생전 처음으로 외부의 세계가 나의 내부의 세계와 순수하게 일치된 음향을 울리고 있었다. ---영혼의 축제일이 시작될 것이었고,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었다. 어떤 집도 어떤 진열장도 골목의 어떤 얼굴도 나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모든 것은 당연히 그렇게 있어야 하는 것처럼 있을 뿐이었지만 옛날의 눈에 익은 공허한 모습이 아니라 기대에 차 있는 자연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으며 운명을 맞아들일 준비를 경건하게 하고 서 있는 것이었다.
내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대축일의 아침에 나는 그런 세계를 보곤 했었다. 세계가 아직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나의 내부 속에 들어가서 사는 일이나 외부의 것에 대한 의미는 내게서 멀어져버렸다. 눈부신 빛의 상실은 유년 시절의 상실과 불가피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사람은 어느 정도의 영혼의 자유와 성인이 되는 것에 대한 대가로 이 사랑스러운 빛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체념하는 데 나는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 모든 것은 단지 파묻히고 어둠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과 자유롭게 된 사람이나 유년 시절의 행복을 포기한 사람으로서도 이 세계가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어린아이의 관찰의 내적인 전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황홀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막스 데미안과 작별을 고했던 교외의 정원을 다시 보게 되었다. 높다랗고 비에 젖어 잿빛으로 보이는 나무들 뒤에 가려진 채 밝고 살기에 편하게 생긴 조그마한 집이 서 있엇다. 커다란 유리벽 뒤에는 높다란 꽃이 핀 관목들이 있었고 빛나는 유리벽 뒤에는 높다란 꽃이 핀 관목들이 있었고 빛나는 유리창 뒤에는 그림과 책이 줄지어 있는 컴컴한 방의 벽이 있었다. 현관은 곧장 난방이 잘된 작은 거실과 통해져 있었는데 흰 앞치마에 까만 옷차림의 말없는 늙은 가정부가 나를 안내해주었고 내 외투를 받아 걸었다.
그 여자는 나를 거실 안에 혼자 남겨두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며 내가 곧장 내 꿈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문 위쪽의 까만 나무 벽 위에 걸려 있는 검정 테의 액자 속에 내가 잘 알고 있는 그림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지구의 껍질을 깨고 날아오르려고 하는 황금빛 새매의 머리를 가진 나의 새였다. 나는 몹시 감동이 되어 그 자리에 붙박힌 듯 서 있었다. ---마치 이 순간 내가 이제껏 행하고 경험했던 모든 일들이 해답과 실현으로써 내게 돌아오는 것처럼 기쁘면서도 동시에 슬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번갯불처럼 빠른 속도로 수많은 형상이 나의 영혼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현관 문의 아치 위에 돌로 된 문장이 달려 있었던 고향의 집, 그 문장을 그리던 소년 데미안, 두려움에 떨며 크로머의 속박에 얽혀 있던 어린 소년으로서의 나 자신, 조용한 기숙사의 한구석에서 동경의 새를 그리며 영혼이 제 스스로의 줄의 그물에 뒤얽혀 있던 청년으로서의 나 자신, ---이 모든 것이, 이 순간에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나의 내부에서 다시 반향되고 시인되고 보답되고 승인되었다.
젖어드는 눈으로 나는 나의 그림을 응시하며 내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때 나는 눈길을 내리뜨렸다. 새의 그림 아래 열려진 문 앞에 까만 옷을 입은 키가 큰 부인이 서 있었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의 아들처럼 시간과 나이를 초월한, 활기와 의지에 넘친 얼굴의 아름답고 품위있는 부인이 나를 향해 정답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 여자의 눈길은 충족이었고 그 여자의 인사는 귀향을 뜻하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두 손을 뻗쳤다. 그녀는 굳건하고도 따스한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었다.
”당신은 싱클레어지요. 나는 당장에 당신을 알아보겠어요. 잘 오셨습니다!”
그녀의 음성은 낮고 따스했고 나는 감미로운 포도주를 마시는 것처럼 그 음성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시선을 들어 그녀의 고요한 얼굴과 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을 들여다보고, 신선하고 성숙한 이비과 표지를 달고 있는 넓고 기품 있는 이마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그녀의 두 손에 입을 맞추었다. “저는 한평생 길 위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이제야 집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녀는 어머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그녀는 아주 다정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친밀한 두 길이 함께 뻗어 있을 때는 온 세계가 잠시 동안은 고향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녀는 이곳을 찾아오는 동안 내가 느겼던 것을 말하였다. 음성이나 이야기 한느 태도가 아들과 매우 비슷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전혀 딴판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한결 성숙하게 느껴졌고 더 따스했으며 한결 더 분명하게 느껴졌다. 옛날, 데미안이 그 누구에게도 소년의 인상을 주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어머니도 전혀 다큰 아들이 있는 어머니처럼 보이지 않았다. 얼굴과 머리칼 위에 감도는 숨결은 젊고 감미로왔으며 황금빛의 살결은 생기있고 주름살이라고는 없었으며 그 입은 마치 꽃처럼 피어 있었다. 내가 꿈속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위풍있는 모습으로 그 여자는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것이었는데 그녀의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사랑의 행복이었고 그녀의 따스한 시선은 벅찬 충족감을 안겨주었다.
이것이 나의 숙명이 내게 모습을 나타낸 그 새로운 영상이었고, 이젠 더 이상 엄격하지도 고독하지도 않았으며 너무나 성숙했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나는 새삼스레 결심을 할 필요도 없었고 아무런 기원도 하지 않았다---나는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고 그곳으로부터 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바로 가까이에, 행복의 나뭇가지에 그림자처럼 어려 있었고 온갖 열락의 정원에 의해 신선해진 약속의 나라를 향해 길게 뻗어져 멀고도 장한 모습을 드러내보이는 길의 높은 지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나의 앞날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간다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이 부인을 알고 그녀의 음성을 음미하며 그녀 가까이에서 숨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그녀가 내게 있어서 어머니나 애인이나 여신이 된다 하더라도---그녀가 단지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나의 길이 다만 그녀의 길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은 것이었다!
그녀는 나의 새매의 그림을 가리켰다.
”당신의 이 그림을 보내왔을 때처럼 막스를 기쁘게 한 적은 없었어요.” 그녀는 생각에 잠긴 어조로 말했다. “내게도 물론 그랬지요. 우리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이 그림이 전해지자 우리는 당신이 우리들에게로 오고 있는 중임을 아았지요. 당신이 아직 조그만 소년이었을 때 말이에요, 싱클레어! 어느 날 데미안이 학교에서 돌아와서 말하는 것이었어요. 이마에 표지가 있는 애가 있어요. 그는 틀림없이 내 친구가 될 거예요 라고 말이에요. 그 애가 바로 당신이었어요. 그러나 당신은 쉽지가 않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을 믿고 있었답니다. 언젠가 한 번 당신이 휴가로 집에 돌아왔을 때 막스와 만난 적이 있었지요. 당신이 아마 열 여섯 살쯤 되었을 때일 거예요. 막스가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더군요.---“
나는 말을 가로막았다. “오, 맙소사. 그때의 이야기를 당신에게 해주었다구요? 그 당시는 내가 제일 비참했던 시절이었어요.”
”알아요. 막스는 내게 당신이 지금 최대의 곤란에 직면해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또다시 공동체 속으로 도망가려고 애쓰고 있으며 심지어는 술집의 단골 손님이 되어 있기까지 하더라고 말해주었어요. 그러나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었지요. 그의 표지가 지금은 숨겨져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그의 내부를 불태우고 있을 테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요---그렇지 않았었나요?”
”네, 그랬었어요. 조금도 틀리지 않아요. 그 후 저는 베아트리체를 발견했고 마침내는 지도자가 한 명 나타나 저를 도와주었지요. 피스토리우스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때서야 비로소 저는 저의 소년 시절에 막스에게 왜 그렇게 결부되어 있어야 했던가, 왜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지요. 부인---어머니, 저는 그 당시 때때로 자살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까지 생각했었답니다. 누구에게나 그 길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요?”
그녀는 손으로 내 머리를 공기를 쓰다듬는 것처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태어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요. 새도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 애써야 한다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요. 돌이켜 생각해보고 한 번 물어보세요. 대체 그 길은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그저 어렵기만 했었던가? 그러나 역시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는가? 하고 말이에요. 당신은 보다 더 아름답고도 쉬운 길을 알고 있었던가요?”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어려웠어요.” 나는 꿈을 꾸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꿈이 내게로 오기까지는 정말 어려웠어요.”
그녀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꿈을 발견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길은 한층 쉬워지지요. 하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꿈이란 없는 거예요. 또다시 새로운 꿈이 나타나는 거지요. 어떤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나는 매우 놀랐다. 그것은 벌써 일종의 경고였을까? 벌써 그것은 방어였던가? 그러나 어떻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미 그녀에 의해 인도를 받고 목적 같은 건 묻지 않으려는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잘 모르겠군요.” 나는 말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저의 꿈이 계속될 것인지는 알 수 없어요. 저는 다만 그꿈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새의 그림 아래에서 저의 운명은 마치 어머니처럼, 어쩌면 애인처럼 저를 맞이해주었어요. 저는 그 운명에 속해 있으며, 그밖에는 아무것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 꿈이 당신의 운명인 한에서는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언제나 충실해야겠지요.” 그녀는 엄숙한 어조로 내 말을 보충해주었다.
비애가, 그리고 이 행복한 순간 속에 그대로 죽고 싶은 열렬한 소원이 나를 사로잡았다. 눈물이---얼마나 오랜 동안 나는 울지 않았던가! ---억누를 길 없이 흘러나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나는 성급히 얼굴을 그녀에게서 돌려 창가로 걸어가서는 눈물에 흐려져 보이지 않는 눈으로 화분의 꽃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가장자리까지 가득 채워진 포도주잔처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싱클레어, 당신은 아직 어린애군요! 물론 당신의 운명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산이 충실한 대로 있다면 당신이 바라듯이 언젠가는 완전히 당신의 것이 되는 거예요.”
나는 간신히 자신을 억제한 뒤 다시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겐 두서너 사람의 친구가 있어요.” 그녀는 미소를 띠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두서넛밖에 안 되는 극소수지만 지극히 가까운 사람들이랍니다. 그들은 나를 에바 부인이라고 부르지요. 당신도 원한다면 나를 그렇게 불러주세요.”
그녀는 나를 문가로 데리고 가서 문을 열고 정원을 가리켜 보였다. “바깥으로 나가 보면 막스가 있을 거예요.”
높다란 나무 아래에서 나는 충격을 받고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까지보다 한층 더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또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빗방울이 나뭇가지에서 방울져 떨어져내렸다. 나는 천천히 강기슭을 따라 멀리까지 뻗어 있는 정원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데미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웃옷을 벗은 채 정원의 정자 안에 매달아놓은 모래 주머니 앞에서 권투 연습을 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 나는 발을 멈추었다. 데미안은 아주 멋있어 보였다. 널따란 가슴, 야무지고 남성적인 머리, 긴장된 근육으로 치켜든 두 팔은 강하고 단단해 보였고 근육의 움직임이 파문이 이는 샘물처럼 허리와 어깨와 팔의 관절을 휘감고 있었다.
”데미안!” 나는 그를 불렀다. “거기에서 뭘 하고 있나?”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연습을 하고 있다네. 난 그 조그만 일본인하고 씨름을 하기로 했거든. 그 사람은 고양이처럼 날쌔고 빈틈이 없단 말이야. 그러나 나를 그렇게 맘대로 다루지는 못할 거야. 그에게 빚진 아주 사소한 굴욕적인 일이 있었다네.”
그는 속옷과 웃옷을 걸쳤다.
”벌써 우리 어머니를 만나뵈었나?”
”그래 데미안, 자네 어머니는 정말 근사한 분이시더군! 에바 부인! 그 이름은 정말 완전히 그 분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야. 모든 존재의 어머니 같단 말이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그 이름을 안단 말인가/ 이봐, 그렇다면 자넨 자랑할 만하네. 어머니가 처음 만나서 이름을 가르쳐준 것은 자네가 처음이야.”
이날부터 나는 그 집에 아들이나 형제처럼 드나들었고 어떤 때는 사랑하는 사람처럼 방문하기도 했다. 현관을 들어서며 내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을 때면, 아니 멀리서 정원의 키큰 나무들이 나타나기만 해도 나는 흡족하고 행복한 마음이 되었다. 바깥에는 ‘현실’이 있었는데 현실 속에는 거리와 집, 사람과 시설, 도서관과 강의실 들이 있었다---그런데 여기 집안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었고 전설과 꿈이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세상과 단절되어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생각과 대화에서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다른 영역에 속해 있었던 것이엇고 다수의 사람들과 어떤 경계선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보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분리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의 사명은 이 세계에 한 개의 섬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할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의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던 나는 단지 완전한 고독을 맛본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공동체를 알게 된 것이었다. 나는 결단코 행복한 사람들의 식탁이나 흥겨워하는 사람들의 축제에 되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공동체를 보더라도 부러워하거나 향수를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나는 차츰 ‘표지’를 달고 있는 사람들의 내밀한 냉정에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표지를 지니고 있는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상스럽다든가, 혹은 미쳤다든가, 위험스럽다고 여겨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깨달은 자 혹은 깨닫고 있는 자들이었고 우리의 노력은 갈수록 완전해지는 깨달음을 위해 경주되는 것이지만 그 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에의 탐구는 그들의 의견이나 그들의 이상과 의무, 그들의 생활과 행복의 기준을 군중의 그것에 점점 더 밀착시키려고 애쓰는 데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노력은 있었고, 그곳에도 힘과 위대성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기에는 우리들 표지를 지닌 자들은 새로운 것, 고립된 것, 미래의 것을 지향하는 자연의 의지를 제시하고 있는 데 반하여 그들은 다만 고집의 의지 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류란---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사랑해 마지않는 인류란---유지되고 보호받아야 할 완성된 그 무엇이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인류란 우리 모두가 그것을 향한 도중에 있는 것이고, 그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 법칙이 적혀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그런 아득한 미래인 것이었다.
에바 부인과 막스와 나를 제외하고도 그밖의 여러부류의 탐구자들이 가깝거나 멀거나간에 우리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그들의 대다수는 특이한 길을 걸어 가며 개별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색다른 의견과 의무에 집착해 있었는데 점성술가와 카발라 학파나 톨스토이의 신봉자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부류의 섬세하고 수줍고 마음이 여린 사람들과 새로운 교파의 신봉자들과 인도적인 수도의 구도자들과 채식주의자들과 그밖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 모든 사람들과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비밀스런 삶의 꿈을 아껴주는 경의를 갖고 있다는 것 외의 어떤 정신적으로나 실제적인 일에 있어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서도 과거 속에서 신과 새로운 구원의 영상에 대한 인류의 탐구의 흔적을 찾아내고 때로는 피스토리우스의 그것을 연상시켜주는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훨씬 우리와 가까운 거리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책들을 가져와서 고대 언어의 원서를 해석해주었고, 고대의 상징물이나 의식의 도해를 우리들에게 보여주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이 소유했던 이상이란 결국 모두가 무의식적인 영혼의 꿈과 손으로 더듬어가면서 그 속에서 자기의 미래의 가능성의 예감을 추구하고자 한 꿈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고대 세계의 그 이상스러운 천 개의 머리를 가진 신들의 무리에서부터 기독교적인 개종의 여명에 이르기까지를 섭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종교가 고독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고해에서 민족과 민족으로 옮겨간 변천의 궤적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이 수집한 모든 자료를 통해서 우리들의 시대에 대한 비평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고, 방대한 노력으로 강력하고도 우수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는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극도로 황폐해져가고 있는 현대 유럽에 대한 비평적인 안목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은 온 세계를 얻기는 하였지만 결국은 그것으로 인해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여기에도 물론 약간의 희망과 구제론의 신자와 고해자가 있었다. 유럽을 개종시키려는 불교 신자들이 있는가 하면 톨스토이 신봉자와 그밖의 여러 종파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우리들은 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는 했지만, 이들 교의들의 어느 것도 상징 이외의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우리 표지를 지닌 자들에겐 미래의 형성에 대한 아무런 염려도 책임지워져 있진 않았다. 우리들에게는 모든 교파와 모든 구제론은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려 쓸모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우리들은 다만 각자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완전히 자기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의지에 뒤따르며 불확실한 미래가 초래하게 될지도 모르는 온갖 일에 대해서 스스로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순수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무로서 또한 운명으로서 느낄 뿐이었다.
새로운 탄생과 현대의 붕괴가 가까이 와 있었고 그것을 이미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입 밖에 내든 안내든 우리들 모두의 마음속에서는 분명한 일이었다. 데미안은 여러 차례 나에게 말했었다. “무엇이 올 것인지는 짐작할 수 없어. 유럽의 영혼은 무한히 오랫동안 쇠사슬에 매어 있는 짐승과 같아. 그것이 해방되었을 때 최초로 행할 행동은 필경 그리 칭찬할 만한 것이 되진 못할 거야. 그렇지만 이제까지 그렇게도 오랫동안 노상 기만당하기만 하고 마비되어왔던 영혼의 진정한 고난이 백일하에 드러날 수 있게만 된다면 우리들이 지나온 길이나 돌아온 길 같은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거야. 그러면 우리들의 날이 오는 거야. 세상 사람들의 지도자나 새로운 입법자로서가 아니라---우리는새로운 법률 같은 것은 더 이상 경험하지 않게 되겠지만---우리는 오히려 의지자로서, 운명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가서 그곳에 서 있을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으로서 필요하게 될 거야.
여보게, 모든 사람들은 만약 그들의 이상이 위협을 받게 된다면 아마 믿을 수 ㅇ벗을 만한 짓을 능히 해낼 용의가 있을 걸세. 그러나 새로운 이상이, 새롭고 아마도 위험스러우며 흉측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그런 성장의 움직임이 문을 두드릴 때 거기에 있을 사람은 아무도 ㅇ벗을 걸세. 그때에 거기에 있어서 함께 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우리인 거야. 그것을 위해 우리는 표지를 달고 있는 거니까---공포와 증오를 일으켜 그 당시의 인류를 좁다란 전원에서 위험스러운 넓은 세계로 몰아넣기 위해 카인이 표지를 갖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네. 인류의 역사에 영향을 끼친 모든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그들이 운명에 대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유능하고 활동적이었던 걸세. 모세와 부처가 그러했고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도 그러했지.
그 사람이 어떤 파동에 휩쓸리는가, 어떤 극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선택 범위 내에 있는 일은 아닌 걸세. 만약 비스마르크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의견에 동조했었다면 그는 영리한 지배자는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운명의 인물이 될 수는 없었을 걸세. 나폴레옹도, 케사르도, 로욜라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랬던 거야! 사람들은 그것을 언제나 생물학적이며 진화론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네! 지구의 표면에 거대한 변혁이 일어나서 수서동물을 육지로, 육서동물을 물 속으로 밀어넣었을 때, 그런 새롭고도 전대미문의 일을 수행하고 새로운 적응에 의하여 자기들의 종족을 구할 수 있는 운명에 대하여 준비를 갖추고 있던 표본들이 있었다네. 그것이 그 이전에 자기의 종족 가운데서 보수적이고 보존적인 성향을 가진 것이엇는지, 아니면 오히려 기이한 별종이며 혁명적인 것이었는지를 우리가 알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그들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과정 속에서 자기의 종족을 구할 수 있었던 거야. 우린 그 점을 잘 알 수가 있다네. 그래서 우리는 준비를 하려는 거야!”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룰 때 에바 부인은 때때로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 이러한 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기의 견해를 펼치는 우리들 갖가의 신뢰와 이해심에 가득 찬 경청자이자 반향이었는데 그러한 생각들이 모두 그녀에게서부터 비롯되어 다시 그녀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 가까이에 앉아 있다거나 때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성숙함과 영혼의 분위기에 한몫 끼는 일이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나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나 혼돈이나 혹은 혁신이 일어나면 그녀는 곧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내가 잠잘 때 꾸는 꿈조차 나에게는 그녀로부터의 영감에 의한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자주 그녀에게 내 꿈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 꿈은 그녀에겐 쉽게 이해가 가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으며 그녀가 분명한 느낌으로 파악해낼 수 없는 기상천외한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 동안 나는 마치 우리들이 나눈 일상 대화의 복제와도 같은 꿈을 꾸었다. 온 세계가 혼란에 빠지고 나 혼자서나 아니면 데미안과 함께 긴장하여 위대한 운명을 기다리는 꿈을 꾼 것이었다. 운명은 가리워진 채로 있었지만 어딘지 에바 부인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그녀에 의해서 선택되거나 혹은 배척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운명이었던 것이다.
여러 차례 그녀는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당신의 꿈은 완전하지가 않아요. 싱클레어, 당신은 제일 좋은 것을 잊어버리셨어요. ---“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 잊어버린 부분이 생각이 났고 나는 어쩌면 그것을 잊을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때때로 나는 불만을 느끼고 어떤 욕구로 고민하곤 했다. 그녀를 팔에끌어안지도 못하면서 그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곧 그것을 알아차렸다. 한 번은 내가 여러 날 동안이나 찾아가지 않았다가 아직도 어지러운 마음으로 다시 그녀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나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당신이 믿지도 않는 소원에 정신을 잃어서는 안 돼요. 당신이 무엇을 소원하고 있는지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이 소원을 버러거나 아니면 완전하고 올바르게 바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당신이 그 소원의 성취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확신하게 되도록 소원할 수 있다면 그때엔 그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러나 지금 당신은 소원을 하면서도 다시 후회하기도 하고 동시에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내가 전설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께요.”
그녀는 별에 반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바닷가에 서서 손을 뻗치고 별에 예배했고 별의 꿈을 꾸고 자기의 생각을 별에게 보냈다. 그렇지만 별을 사람이 끌어안을 수야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거나 또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충족될 희망도 없이 별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이 생각에서 체념과 그리고 자기를 개선시키고 정화시켜줄 무언의 충실한 고민을 읊은 한 편의 완전한 생명의 시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꿈은 모두 별을 찾아갔다. 그는 어느 날 밤 다시 바닷가의 높은 벼랑 위에 서서 별을 쳐다보고 별에의 사랑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동경이 절정에 달한 순간 그는 별을 향해서 허공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도약의 순간에 다시 한번 번개처럼 생각했다. 정말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다! 라고. 그는 바닷가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사랑하는 법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그가 뛰어올랐던 그 순간에 단단하고 호가실하게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정신력을 가졌었다면 그는 하늘로 날아올라가서 별과 일체가 될 수 있었을 터였다.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또 요구해서도 안 되지요. 사랑은 자기의 내부에서 확신에 이를 수 있는 힘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끌려오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게 되는 거지요.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 의해서 끌리고 있어요. 당신이 나를 끌게 되면 나는 가겠어요. 나는 아무런 선물도 드리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당신에게 획득 당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다음번에는 나에게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다. 희망도 없이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자기의 영혼 속에 완전히 침잠하여 사랑하는 나머지 타 없어질 것 같다고 느꼈다. 그에게는 이 세계가 사라져버렸으며 더 이상 푸른 하늘도 파릇한 숲도 보이지 않았고 시냇물도 그에게는 졸졸거리지 않았고 하프도 그에게는 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은 사라져버리고 그는 가난하고 비참해졌다. 그러나 그이 사랑은 나날이 자라서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소유할 수 없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파멸해버리고 싶은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때 그는 사랑이 자기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의 사랑은 자꾸만 강력해져서 그녀를 끌어당겼고, 그 아름다운 여자는 마침내 그를 따라오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가 왔고, 그는 그녀를 끌어당기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 여자가 그의 앞에 와서 서자 그녀는 아주 달라져버렸고 그는 자기가 잃어버린 온 세계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겼음을 깊은 전율을 느끼며 알게 되었고 그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 세계는 그의 앞에 서서 그에게 몸을 맡겨왔다. 하늘과 숲과 시내, 이 모든 것들이 새로운 빛을 띠고 생생하고도 화창하게 그에게 다가와서는 그의 것이 되었고 그의 말을 속삭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단순한 한 사람의 여인을 얻는 대신 온 세계를 그의 마음속에 지니게 되었다. 하늘의 모든 별들은 그의 내부에서 타올랐고 그의 영혼을 뚫고 지나가며 환희의 불꽃을 퉁겼다---그는 사랑을 하였다.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잃어 버리기위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에바 부인에 대한 사랑이 내게는 내 생활의 유일한 내용처럼 느껴졌다. 매일같이 그것의 모양은 달라졌다. 때때로 나는 확실하게 나의 본성이 나를 이끌어 도달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그 여자 개인이 아니라 나의 내심의 상징에 불과하며 그것은 나를 나의 내부로 더욱더 깊이 끌고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때론 나는 내 마음이 발하는 절박한 질문에 대하여 마치 내 속의 무의식적인 어떤 것이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또한 내가 그녀의 곁에서 관능적인 욕망에 불타올라 그녀가 만진 물건에 입맞추는 그런 순간도 있었다. 그리고 점차로 관능적인 사랑과 비관능적인 사랑이, 현실과 상징이 서로서로 겹쳐졌다. 내가 우리 집의 내 방에서 그녀를 조용한 마음으로 생각할 때면 그녀의 손을 나의 손 안에, 그녀의 입술을 내 입술 위에 느끼는 것처럼 생각되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녀의 곁에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진정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때도 있었다.
어떻게 사랑을 지속적이고 불멸의 것으로 간직할 수 있는가를 나는 예감하기 시작했다. 어떤 책을 읽으며 나는 새로운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에바 부인의 입맞춤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며 성속학 향기로운 따스한 미소를 내게 보내주었다. 나는 마치 내 자신의 내부에 무슨 진보라도 이룩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내게 있어서 중요하고 운명적이었던 온갖 것들이 그녀의 모습을 지닐 수 있엇다. 그녀는 나의 모든 사상으로 변신할 수 잇었고 나의 모든 사상은 그녀로 변신할 수 있었다.
이 주일 동안이나 에바 부인과 떨어져서 지내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부모님과 함께 지내야 할 성탄절의 휴갈르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집에 있으면서 그녀를 새악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었다. H시로 되돌아와서도 나는 이 안정감과 관능적인 그녀의 현재로부터의 독립감을 즐기기 위해 이틀 동안이나 그녀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또한 나는 그녀와의 결합이 새로운 비유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용솟음치며 흘러들어가는 바다였다. 그녀는 별이었고, 나 자신도 별로서 그녀에고로 가고 있는 중이었으며 우리는 서로 만났고 서로끌리고 있음을 느꼈으며 함께 있으면서 가깝고 쟁쟁히 울리는 원을 그리며 서로의 주위를 영원토록 행복하게 맴도는 것이었다.
내가 다시 그녀를 방문한 첫날 나는 이 꿈을 이야기해주었다.
”그 꿈은 참 아름답군요.” 그녀는 조용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진실이 될 수 있게 하세요!”
이른 봄날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 있었다. 나는 거실에 들어섰다. 창문이 하나 열려 있어서 훈훈한 바람이 히아신드의 무거운 향기를 방안으로 휘몰아넣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는 계단을 통해서 데미안의 서재로 갔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는 언제나처럼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은 어두웠고 커튼은 모두 드리워져 있었다. 막스가 화학실험실로 꾸며놓은 조그만 옆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져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밝고 하얀 봄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나는 무심코 한쪽 커튼을 제쳤다.
바로 그때 나는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가까이에 데미안이 이상스럽게 변한 채 걸상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번갯불처럼 언젠가 이런 일을 본 적이 있었다는 느낌이 나를 스쳐갔다. 그는 두 팔을 아무 움직임도 없이 내리뜨리고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은 채 앉아 있었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다소 앞으로 숙이고 있는 그의 얼굴은 생기가 없고 무감각해 보였고 눈동자에는 조그맣게 반짝이는 빛의 반사가 마치 한 조각의 유리처럼 생기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은 자기 가운데에 깊이 침잠해 있었으며 몸서리쳐지는 마비상태 이외에 다른 표정이라고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사원의 현관에 있는 태고 적의 짐승의 가면처럼 느껴졌다. 그는 거의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되살아난 추억에 몸을 떨었다---수년 전, 내가 아직도 조그만 소년이었을 때 나는 지금과 꼭같은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의 두 눈은 내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의 두 손은 생기없이 나란히 놓여 있었으며 파리가 한 마리 그의 얼굴 위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육 년 전인 그때에도 그는 꼭 이렇게 나이들어 보였고 이렇게 시간을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얼굴에 있는 주름살 하나도 오늘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채 가만히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거실에서 나는 에바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창백하고 피곤해 보였는데 그녀에게서 그런 표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림자가 창문을 스쳐 지나가자 눈부신 하얀 빛이 흔연힛 ㅏ라졌다.
”저는 막스에게 갔었어요.” 나는 성급하게소곤거렸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가 잠을 자는 건지 아니면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옛날에도 한 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읍니다만은.”
”물론 그 애를 깨우지는 않으셨겠죠?” 그녀는 황급히 물었다.
”예, 그는 내가 들어가는 소리를 듣지 않았어요. 저는 곧 되돌아 나왔어요. 에바 부인,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제게 말씀해주실 수는 없으세요?”
그녀는 손등으로 이마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세요, 싱클레어. 아무 일도 없으니까요. 그 애는 명상에 잠겨 있는 거예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녀는 일어서서 막 비가 내리기 시작한 정원으로 나갔다. 나는 함께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거실 안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정신을 혼미스럽게 만드는 히아신드의 꽃향기를 맡기도 하고, 문 위에 걸린 나의 새 그림을 쳐다보기도 하며서 오늘 아침 이 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상스러운 그림자를 답답하게 호흡했다. 이것이 무엇일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에바 부인은 곧 되돌아왔다. 빗방울이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에 방울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녀에게 몸을굽히고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에 입을 맞추었다. 나에겐 그 물방울이 눈물 같은 맛으로 느껴졌다.
”그에게 가 보고 올까요?”
나는 소곤거리는 낮은 어조로 물었다. 그녀는 연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린애 같은 짓 마세요, 싱클레어!” 그녀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깃든 마력을깨뜨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크게 나무랐다. “지금은 가세요. 나중에 다시 오세요. 지금은 당신과 아무런 이야기도할 수가 없군요.”
나는 그 집에서 나와 시내를 지나 산으로 달려갔다. 흩날리는 가는 빗방울이 나를 향해 다가왔고 구름은 무엇엔가 억눌린 듯 겁을 집어 먹은 것처럼 나지막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래쪽에서는 바람이라곤 거의 불지 않았지만 높은 곳에서는 폭풍이 일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잠시 동안 태양이 강철 같은 잿빛 구름 사이로 파리하게 때론 눈부시게 얼굴을 내밀곤 하였다.
그때 하늘에서는 누런 구름이 뭉게뭉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구름이 잿빛의 벽에 걸리고 몇 초 동안 바람이 이 누런 구름과 잿빛 하늘로 하나의 형상을, 한 마리의 거대한 새의 형상을 만들었다. 이 새는 푸른 혼돈으로부터 뛰쳐나와서는 훨훨 날개를 치면서 하늘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나자 폭풍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리고 비가 우바과 뒤섞여 쏟아졌다. 짤막하지만 엄청나게 무서운 천둥소리가 빗발에 얻어맞은 풍경 위에서 울려왔다. 그러더니 곧 다시 햇살이 비쳐들고 갈색의 숲 너머에 있는 가까운 산 위에 희미한 눈이 어슴푸레 비현실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가 흠뻑 젖은 챕 ㅏㄹ마에 밀려서 몇 시간 후에 되돌아오자 데미안이 손수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자기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실험실에는 가스 불이 타고 있었고 종이가 사방에 흩어져 있어 그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 볼 수 있엇다.
”앉게.” 그는 의자를 권했다. “자네는 피곤할 거야. 지긋지긋한 날씨야. 자넨 바깥에서 몹시 헤맨 모양이군, 곧 차를 가져 올 거야.”
”오늘은 무슨 일이 있는 것이군.” 나는 주저하면서 말했다. “그저 약간 뇌우가 친 것만은 아니지!”
그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자넨 무엇을 보았나?”
”응, 구름 속에서 잠깐 동안이지만 하나의 형상을 보았다네.”
”무슨 형상을?”
”한 마리의 새였어.”
”그 새매? 그것이었나? 자네의 꿈의 새 말이야?”
”응, 내 새매였어. 그것은 누렇고 굉장히 컸었네 곧 검푸른 하늘로 날아들어가버렸다네.”
데미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늙은 가정부가 차를 가져왔다.
”자, 싱클레어, 차를 들게. ---나는 자네가 그 새를 우연히 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우연히? 그런 것을 우연히 볼 수가 잇을까?”
”그렇지, 우연히 볼 수는 없겠지. 그것은 무엇인가 의미하고 잇을 거야.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나”
”아니, 나는 다만 그것이 변화를, 운명의 한걸음을 뜻한다고 느낄 뿐이네. 나는 그것이 우리들 모두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네.”
그는 성급한 걸음으로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운명의 한걸음이라고!”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똑같은 꿈을 나도 꾸었다네, 어머니도 어제 똑같은 것을 의미하는 예감을 느끼셨다고 하시더군---나는 사다리를 타고 어떤 나무 줄기엔가 탑엔가에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네. 내가 위에 올라가서보니까 그곳은 넓은 평야였는데, 온 나라가, 도시나 마을 할 것 없이 모두 불타고 있는 것이었어. 나는 아직 전부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네. 아직도 도든 것이 뚜렷하게 파악되진 않으니까.”
”자네는 꿈을 자네와 관련시켜서 해석하나?” 나는 물었다.
”나와 관련시켜서? 그야 물론이지. 자기와 관련되지 않는 꿈을 꾸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그렇지만 그 꿈은 나 혼자에게만 관련된 것은 아니었네. 거기에 대해선 자네 말이 맞아. 나는 자기 자신의 영혼의 동요를 보여주는 꿈과 매우 드물긴 하지만 온 인류의 운명을 암시해주는 꿈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다네. 물론 그런꿈은 드물게밖에 꾸지 않에만. 그것이 예언이고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꿈은 아직 한 번도 꾸어 본 적이 없다네. 그런꿈은 해석이 너무 애매하지. 그렇지만 나에게만 관계되는 것이 아닌 어떤 꿈을 꾸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네. 다시 말하자면 그 꿈은 과거에도 여러 번 꾸어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옛날의 다른 꿈에 속해 있는 것이네. 이 꿈들은 싱클레어,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겠지만 그것들에게서 내가 예감을 얻고 있는 그런 꿈들이란 말일세. 우리들의 세계는 정말 부폐되어 있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멸망이나 또는 그와 비슷한 일을 예언할 근거가 될 순 없는 거지. 그러나 나는 여러 해 전부터 그것들로부터 이 세계의 붕괴가 다가오고 있다고 결론지우거나, 느끼거나, 혹은 자네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도 좋네만, 하여간 그와 같은 것을 느끼는 그런 꿈을 꾸어왔다네.
그것은 처음에는 아주 약하고 아슬아슬한 예감이었지만 갈수록 뚜렷하고 강해지는 것이었네. 아직도 나는 나와도 관련이 있는 어떤 크고 무서운 것이 다가오고 있다 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 싱클레어, 우리들이 여러 번 이야기했던 일을 우리는 경험하게될 걸세! 이 세계는 스스로 혁신하려 하고 있는 것이라네. 죽음의 냄새가 나네. 죽음 없이는 어떠한 새로운 것도 올 수 없는 법이니까.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한층 몸서리처지는 일이로군.” 나는 깜짝 놀라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 꿈의 나머지 부분을 내게 이야기해줄 수는 없겠나?” 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부탁했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수 없다네.” 문이 열리고 에바 부인이 들어왔다.
”여기에 같이 있었군! 설마 슬퍼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녀는 다시 싱싱해져서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은 어머니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아이에게 다가오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우리들에게로 왔다.
”우리는 슬퍼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 우리는 그저 이 새로운 표지에 대해 좀 추측해보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물론 그것엔 아무런 표지도 안 붙어 있어요. 오려고 하는 것은 갑자기 오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결국은 알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러나 나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작별을 고하고 혼자 거실을 지날 때 풍겨온 히아신드의 햐이가 시들고 무미한 죽음의 냄새처럼 느껴졌다. 한 자락의 그림자가 우리들을 덮쳐온 것이었다.
종말의 발단
여름 학기 동안에도H시에 머무르고 싶다는 나의 뜻은 관철되었다. 집 안에 있는 대신 우리는 거의 언제나 시냇가에 있는 정원에 나와 있었다. 씨름에 완전히 진 일본인은 가버렸고 톨스토이 신봉자도 오지 않게 되었다. 데미안은 말이 한 필 있었는데, 매일같이 꾸준히 그것을 탔다. 나는 종종 그의 어머니와 단둘이 있었다.
때때로 나는 이러한 내 생활의 평화스러움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고독하게 지내는 것과 단념하는 것과 나의 고로움과 싸우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H시에서 지낸 이 수개월이 내게 있어서는 마치 안락하고 황홀하게, 단지 아름답고 유쾌한 사물과 감정 속에서만 살아도 좋은 어떤 꿈의 섬에서 보내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새롭고 보다 더 높은 공동체의 전조임을 예감했다. 그러나 자주 이 행복감에도 깊은 비애가 엄습해왔는데 그것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느 풍성함과 안락함 속에서 살아가도록 태어나지는 않았던 것이었고 내겐 고뇌와 광분이 필요한 것이었다. 어느 날이고 나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영상에서 잠을 깨어, 단지 고독이나 싸움만이 있을 뿐 아무런 평화도 공존도 없는 그런 다른 사람들의 차가운 세계 속에 다시금 혼자 서 있게 되리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런 생각을 한 뒤부터 나는 아직 나의 운명이 아름답고 고요한 풍경 속에 머물러 있음을 기뻐하며 갑절의 애정으로 애바 부인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여름의 몇 주일은 황급히, 너무도 쉽게 지나 갔다. 학기도 벌써 끝나가고 있었다. 머지않은 이별이 목전에 다가와 있었지만 나는 이별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그 일은 생각조차도 하지 않으려들며 꿀이 있는 꽃에 나비가 집착하듯이 그렇게 이 아름다운 날들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것은 행복의 시절이었고, 내 인생의 최초의 충족이었으며 공동체에의 가입이었다---다음에는 무슨 일이 올 것인가? 나는 또다시 싸워야 하고, 동경에 괴로와하고, 꿈을 꿀 것이며, 고독해질 것이었다.
이러한 날들 중의 어느 날 이러한 예감이 몹시 강렬하게 나를 엄습해왔다. 동시에 에바 부인에 대한 나의 사랑이 갑자기 고통스럽게 불타올랐다. 가슴이 저려 왔다. 머지않아 나는 그녀를 보지도 못하고, 집안을 거니는 그녀의 확고하고도 다정한 발걸음 소리를 듣지도 못하며 내 책상 위에서 그녀가 준 꽃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얻었던가? 그녀를 얻는 대신 그녀를 얻으려 싸우기만 하고, 여원히 그녀를 나의 것으로 빼앗는 대신 꿈을 꾸었고, 안락에 내 몸을 맡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까지 그녀가 나에게 이야기한 진정한 사랑에 대한 온갖 말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련된 경고의 말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벼운 유혹, 혹은 약속 같은 것들이 불현듯 뇌리에 되살아났다---나는 그것들로써 무엇을 이룰 수가 있었던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내 방의 한복판에 서서 나는 내 온 의식을 집중하여 에바 부인을 생각했다. 나는 그녀로 하여금 나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그녀를 나에게 끌어당기기 위해 내 온 영혼의 힘을 집중시키려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로 와야 하며, 나의 포옹을 열망하여야 하며 나의 입맞춤이 그녀의 성숙한 사랑의 입술을 탐욕적으로 헤쳐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선 채로 손가락과 발이 차가와질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힘이 내게서 빠져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잠시 동안 무언가 발고 차가운 것이 나의 내부에 단단하게 응어리졌다. 나는 잠깐 동안 가슴 속에 한 개의 수정을 품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다 나는 그것이 나의 자아임을 알았다. 냉기가 가슴까지 올라왔다.
내가 그 무서운 긴장에서 깨어나자 나는 무엇인가가 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죽을 지경으로 피로했다. 그러나 불타오르듯이 황홀하게도 에바 부인이 방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때 기다란 거리에 말발굽 소리가 울려왔다. 그것은 아주 가까이에서 요란스럽게 들리더니 갑자기 멈췄다. 나는 창가로 뛰어갔다. 데미안이 말에서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래로 내려갔다.
”무슨 일인가, 데미안? 설마 자네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는 내 말을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매우 창백해 보였으며, 땀이 그의 이마에서 양쪽 볼 위로 흘려내리고 있었다. 그는 잔뜩 열이 올라 있는 말의 고삐를 정원의 울타리에 매고는 나의 팔을 잡고 거리로 내려갔다.
”자네도 벌써 무엇인가 알고 있는 건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데미안은 나의 팔을 꽉 눌러쥐고 어둡고 동정적이면서도 이상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봐. 이제 터졌다네. 자네도 물론 러시아와의 긴박한 긴장상태를 알고 있었겠지만---.”
”뭐라고, 전쟁이 일어났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아주 낮은 어조로 말했다.
”아직 정식으로 선전포고가 된 건 아니야. 하지만 전쟁이야. 내 말을 믿게. 나는 그날 이래로 이 문제를 갖고 자네를 괴롭히진 않았었지.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세 차례나 새로운 징조를 보았다네. 요컨대 그것은 세계의 몰락도 아니고, 지진도 아니며, 혁명도 아닌 걸세. 전쟁이 일어나는 거야. 자네는 사태가 어떤 결과을 초래하게 될지를 볼 수 있을 걸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기쁨이 될 걸세. 벌써 지금도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난 것을 기뻐하고 있다네. 그들에겐 생활이 그렇게도 무미해졌단 말일세---하지만 싱클레어, 자네는 이것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걸세. 모르긴 하지만 대전쟁, 굉장한 대전쟁이 될 걸세. 하지만 그것도 역시 단순한 시작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네. 그 새로운 것이란 낡은 것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질겁할 일이 되겠지만. 자네는 어떻게 하려는가?”
나는 낭패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내게는 낯설고 아직도 사실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나는 모르겠네---자네는?”
그는 어깨를 움찔했다.
”동원 당하게 되면, 나는 곧 입대하겠네. 나는 소위라네.”
”자네가? 그런 줄은 조금도 모르고 있었네.”
”그렇겠지. 그건 나의 적응의 하나지. 자네도 잘 알겠지만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언제나 올바르기 위해서 좀 과다한 일을 해왔던 것일세. 나는 일주일 내로 전쟁터에 가게 되리라고 생각하네만---.”
”제발---.”
”이봐, 이 일을 감상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네. 물론 살아 있는 사람에게 발포를 명령한다는 것은 내게도 조금도 재미나는 일이 아닐 걸세. 하지만 그것은 전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네. 이제 우리들 모두는 커다란 수레바퀴 속에 휩쓸려 들어가게 될 걸세. 자네도 마찬가지겠지. 자네도 필경 징집당하게 될 거야.”
”그럼 자네 어머니는, 데미안?”
이제서야 비로소 나는 불과 십 오 분 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세상은 얼마나 변해버렸는가! 그 감미롭기 그지없는 영상을 불러일으키려고 나는 온 영혼을 모우고 있었던 것인데 지금 운명은 새로이 위협적인 무서운 가면 뒤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 말인가? 아,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네. 어머니는 믿을 만한 분이니까. 오늘날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말이네. ---자네는 어머니를 그렇게도 사랑하는 건가?”
”자네도 그것을 알고 있었군, 데미안?”
그는 밝고 아주 활달하게 웃었다.
”이 어린 친구야! 물론 그걸 알고 있었지. 나의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서 에바부인이라고 부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네. 그런데 어땠나? 자네는 오늘 어머니나 나를 불렀지, 그렇지 않나?”
”그래, 불렀었네‥‥‥. 나는 에바 부인을 불렀네.”
”어머니는 그걸 감지하셨다네. 어머니가 갑자기 나더러 자네에게 가 봐달라고 부탁하시더군. 그때 마침 러시아에 관한 소식을 이야기하고 있던 참이었네.”
우리는 되돌아서 걸었고 이미 할 말이 거의 없었다. 그는 자기의 말을 풀어서 올라탔다.
이층의 나의 방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나는 데미안이 전해준 소식에 의해서, 아니 그 이전의 긴장에 의해서 내가 얼마나 기진맥진해 있는가를 느꼈다. 하지만 에바 부인은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나는 마음속의 생각만으로 그녀에게 도달했던 것이다. 그녀가 직접 와주었더라면‥‥‥. 오지 않았다 해도---이 모든 것은 얼마나 기이한 일인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 것인가! 이제는 전쟁이 일어난 것이었다. 우리가 자주 이야기했던 바로 그 일이 시작되리라는 것이었다. 데미안은 그것에 대해 그리도 많이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의 조류는 이미 그 어느 곳에선가부터 우리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갑자기 우리의 가슴 한복판을 뚫고 흘러가고 모험과 거친 운명이 우리를 부르고 있으며 지금이 아니라도 불원간 세계가 우리를 필요로 하고 스스로 변화되고자 하는 순간이 오리라는 것은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데미안이 옳았다. 그것을 감상적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엇다. 다만 이상한 일은 이제 내가 그렇게도 고독하게 염원해왔던 ‘운명이라는 문제를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아니 오 세상과 더불어 함께 경험해야 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좋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 저녁 무렵 시내를 걸어가자니 거리는 구석구석 흥분으로 들끓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전쟁’이라는 말밖에는 들려오는 것이 없었다.
나는 에바 부인의 집으로 가서 정원의 정자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내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전쟁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내가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에바 부인이 내게 말했다.
”친애하는 싱클레어, 당신이 오늘 나를 부르셨지요. 왜 내가 직접 가지 않았는지를 잘 아시겠지요. 그러나 이걸 잊지 마세요. 당신은 이제 부르는 법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 언제든지 표지를 지닌 누군가가 필요하게 될 때는 다시 부르세요!”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는 정원의 황혼 속으로 걸어나갔다. 잠잠한 나무들 사이를 이 신비에 찬 여인은 아주 당당한 걸음으로 지나갔고 그녀의 머리 위에는 뭇별들이 조그맣게, 조용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이야기의 끝이 가까워졌다. 사태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곧 전쟁은 시작되었고 데미안은 은회색의 군복을 입고 이상스레 낯선 모습으로 떠나갔다. 나는 그의 어머니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그녀와 작별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내 입에다 입을 맞추고 잠시 동안 나를 가슴에 끌어안아주고는 불타는 큰 두 눈으로 나의 눈을 바싹 들여다보았다.
모든 사람들은 형제와도 같았다. 그들은 조국과 명예를 생각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한순간 들여다본 운명의 가리지 않은 얼굴에 불과했다. 젊은 사람들은 병영에서 나와서 기차를 탔고 그 많은 얼굴들 위에서 나는 하나의 표지를 보았다---그것은 우리들의 표지가 아니라---사랑과 죽음을 의미하는 아름답고 고귀한 표지였다. 나도 역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포옹을 당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흔현히 그것에응답했다. 그들이 그런 짓을 하는 심정은 단순한 도취일 뿐이지 운명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흥분은 신성했는데 그것은 모두가 운명의 눈에 잠깐 동안의 도취된 시선을 던진 데서 기인된 것이었다.
내가 전쟁터에 왔을 때는 거의 겨울이 다가와 있었다.
처음에 나는 끊임없는 사격의 느낌에도 불구하고 만사에 대해 다소 실망했다. 옛날에 나는 인간이 왜 그렇게 드물게밖에는 하나의 이상을 위하여 살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았다. 물론 그것은 개인적이거나 자유롭거나 선택된 이상일 수는 없었고 공통적이고 떠맡겨진 이상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내가 인간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공통적인 위험이 그들을 획일화시켰다 하더라도, 살아있는 사람들이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이거나 대단히 훌륭한 태도로 운명의 의지에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많은 사람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공격할 때뿐 아니라 다른 때에도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으며 터무니없이 거대한 것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보여주는 겸허하고도 아득한, 다소는 홀린 듯한 시선을 갖고 있음을 보았다. 설령 이들이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바를 믿고 있고 그렇다고 말한다 하더라도---그들은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며 그들은 소용에 닿는 사람들이었던 것이고 그러한 그들에게서 미래는 형성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가 전쟁과 영웅주의를, 명예나 그밖의 낡아빠진 이상을 완고히 고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표면적으로는 인간성의 모든 음성이 멀리서 들릴 듯 말 듯 울리면 울릴수록, 이 모든 것은 마치 전쟁의 외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 대한 질문이 단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처럼 그렇게 피상적인 것에 불과햇다.
가장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었다. 새로운 인간성과 같은 그 무엇인가가. 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그들 가운데의 대다수가 내 옆에서 죽어갔지만---그들은 증오와 분노도, 살륙과 파괴의 감정도 그들의 적에 대해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들에게 있어서 적이란 그 목적과 마찬가지로 매우 우연한 것이었다. 가장 과격한 것조차도 본래의 감정은 적에 대해서 행해진 것이 아니었고 그 피비린내나는 행동은 내심의 방사이며, 새로이 태어나기 위하여 미쳐 날뛰고 죽이고 파괴하고 스스로 죽어버리려고 하는 내부에서 분열된 영혼의 방사에 불과한 것이었다. 거대한 한 마리의 새가 날에서 나오려고 싸우고 있는 것인데 그 알은 이 세계였고 따라서 이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어느 이른 봄날 밤, 나는 우리가 점령한 농가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맥 없는 바람이 우울하게 간간이 불어왔고 플랑드르 지방의 높은 하늘엔 구름덩이가 흩날려가고 있었다. 구름의 뒤쪽 어딘가에 달이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날은 하루종일 왠지 불안했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근심이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나는 그 어두운 전초지에서 이제까지의 내 생활과 에바 부인과 데미안을 열렬히 생각했다. 나는 백양나무에 기대서서 움직이고 있는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몰래 바르르 떨고 있는 하늘의 밝은 빛이 곧 커다랗게 솟아오르는 형상의 행렬이 되었다. 나의 먁박이 이상할 정도로 가냘프게 뛰고 바람과 비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피부의 상태와 선뜻선뜻 느껴지는 내부의 경각성에 의해 나는 지도자가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구름 속에 대도시가 보였고, 그곳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광대한 풍경 속으로 떼를 지어 흩어져갔다. 그들의 한복판에 반짝이는 별을 머리에 단, 산맥처럼 거대하며 에바 부인 같은 표정을 지닌 한 사람의 힘찬 신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모습 속으로 사람들은 마치 커다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빨려 들어가서는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 여신은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여신의 이마 위에 박힌 점이 환하게 빛났다. 마치 꿈이 그 여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신은 두 눈을 감았고 그 커다란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돌연 여신은 아루 날카로운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이마에서 별들이, 수많은 반짝이는 별들이 튀어나오고 그것들은 멋진 활 모양과 반원을 그리면서 어두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그 별들 가운데의 하나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내게 쏜살같이 똑바로 날아오며 나를 찾는 것 같았다---그러자 그것은 굉음을 내며 수없는 불꽃으로 작열했고 나를 솟구쳐 올렸다가는 다시 땅에 내동댕이쳤다.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세계가 내 위에 무너져내렸다.
나는 흙에 뒤덮이고 많은 상처를 입고 백양나무 곁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나는 지하실에 누워 있었고 포탄이 나의 머리 위에서 우르릉거리고 있었다. 나는 화물자동차 안에 누워서 황막한 벌판 위를 덜거덕거리며 지나갔다. 나는 대개 잠을 자고 있었거나 아니면 혼수상태였다. 깊이 잠들면 잠들수록 나는 무엇인가가 나를 끌어당기고 있고, 나는 나를 지배하는 어떤 힘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격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마구간의 짚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몹시 머두워 누군가가 내 손을 밟고 지나갔다. 그러나 나의 내심은 더 계속해서 가려고 애썼다. 한층 더 강력하게 그것은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다시 차 안에 누워 있었고, 그 후에는 들것인지 사다리 위에인지 누워 있었다. 점점 더 강력하게 그 어느 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있음을 느꼈고 마침내 나는 그곳에 가야만 한다는 절박감 외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나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밤이었고, 나는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나는 내 마음속에서 강력한 끌림과 절박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나는 내가 어떤 홀 바닥 위에 잠자리를 펴고 드러누워 있으며 내가 부름을 받은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의 매트리스 바로 옆에 다른 매트리스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누군가가 누워 잇었다. 그는 몸을 굽혀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위에 표지를 갖고 있었다. 그는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말을 할 수가 없었거나 하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머리 위 벽에 걸린 등불이 그의 얼굴을 비쳐 주었다. 그는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한히 오랜 시간을 그는 끊임없이 내 두 눈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천천히 그의 얼굴을 내 가까이로 가져와 우리는 거의 얼굴이 맞닿을 정도가 되었다.
”싱클레어!~” 그는 거의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눈으로 그에게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거의 동정에 가까운 미소를 지었다.
”꼬마!”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입은 이제 나의 입과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나직이 말을 계속했다.
”프란츠 크로머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 그는 물었다.
나는 그에게 눈을 깜박여 보였다. 미소를 지을 수도 있었다.
”어린 싱클레어, 들어봐! 나는 떠나지 않으면 안 돼. 자네는 아마 언젠가 나를 다시 필요로 하게 되겠지. 크로머나 그밖의 일에 대해서 말야. 그때 자네가 나를 부른다고 해서 나는 이미 그렇게 쉽게 말을 타고 가든지 기타를 타고 가든지 할 수가 없을 거야. 그럴 때에는 자넨 자기 자신의 내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네. 그러면 내가 자네의 내부에 있음을 알게 될 거야. 알겠어? ---그리고 조금만 더! 에바 부인이 부탁했어. 만약 자네가 언젠가 나쁜 처지에 있을 때는 그녀가 나에게 주어 보낸 입맞춤을 자네에게 해주도록 말이네‥‥‥ 눈을 감게, 싱클레어!”
나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치지 않고 쉴새없이 피가 조금씩 흐르는 내 입술 위에 그가 가볍게 입맞추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다. 붕대를 감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자 나는 빨리 옆의 매트리스로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이 누워 있었다.
붕대를 감는 것은 몹시 아팠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아팠다. 그러나 나는 열쇠를 발견했고, 때때로 어두운 거울 속에 운명의 형상이 졸고 있는 그곳, 내 자신의 내부에 완전히 들어가기만 하면, 나는 단지 그 어두운 거울 위에 몸을 굽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이젠 완전히 데미안과 같은, 내 친구이자 지도자인 데미안과 같은 내 자신의 모습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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