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화랑세기
법흥대왕 : 위화랑
지소태후(법흥왕과 보도의 딸) : 원화 폐지 -> 화랑
화랑은 선도(仙徒1))이다. 우리나라 아국(我國2))에서 신궁(神宮3))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大 祭)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燕)의 동산(桐山), 노(魯)의 태산(泰山)(에서 한 것)과 같다.
옛날 연부인(燕夫人)이 선도(仙徒)를 좋아하여 많은 미인을 길렀는데 이름 하기를 국화(國花) 라 하였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로서 원화(源花)를 삼게 되었 다.
지소태후(只召太后)가 이것(원화)을 폐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들로 하여금 받들게 했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위화랑(魏花郞)을 사랑하였는데,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 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을 받드는 일을 위주로 하였는데, 국 공(國公4))들이 무리(화랑도)에 들어간 후에 선도는 도의(道義)를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 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5)
1. 위화랑
화랑은 선도이다. 우리 나라는 신궁을 모시고 하늘에 제사지내기를 마치 연나라가 동산에, 노나라가 태 산에 제사 지내듯 하였다. 옛날에 연부인이 선도를 좋아하여 많은 미인을 기르면서 국화라 이름하였는 데, 그 풍속이 우리 나라에 흘러들어 여자로써 원화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는데 화랑이란 홍대왕이 위화랑을 사라하여 활랑이라 부른데서 기인하였으니 화랑의 명칭이 이 때부터 비롯하였다.
전에는 선도들이 다만 신을 받드는 것만으로 주를 삼았는데 국공 열행 이후에는 선도들이 도의로써 서 로 면려하였으므로 현좌충신과 양장용졸이 여기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화랑의 역사를 몰라서는 안될 것 이다. 위화랑은 섬신공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벽아부인이다. 어머니가 조지왕의 총애를 받음으로 인하 여 비처삼마복자가 되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마복칠성이다. 아시공의 아버지는 선모이고 아버지는 보 혜이며 수지공의 아버지는 이혼이고 어머니는 준명이며 이등공의 아버지는 숙혼이고 어머니는 홍수며 태종공의 아버지는 아진종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며, 비량공의 아버지는 비지이고 어머니는 묘양이며 용취공의 아버지는 덕지이고 어머니는 가야국의 융융공주이다.
어떤 이는 법흥대왕이 칠성의 첫째 위치에 있고 위화랑은 어머니가 미천하기 때문에 칠성에 끼지 못했 다고 한다. 그러나 칠성록과 보혜기에 모두 이등공은 없고 위황공이 실려있으니 누구의 설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공은 얼굴이 백옥같고 선명하고 말을 잘하였다. 벽아부인이 나을에 있을 적에 딸 하나를 낳았 는데 그가 바로 비처후 벽화부인이다. 벽화부인이 궁으로 들어가자 공은 벽화부인의 사제로서 궁을 출 입하면서 총애를 받았다. 법흥대왕은 이때 부근의 아들로서 위는 국공에 있었으나 총애는 공만 못하였 다. 아시공이 대왕을 권하여 몸을 낮추어 공에 절을 하게 하자 공이 그 사실을 섬신공에게 고하니 섬신 공이 말하기를 "국공이 몸을 낮추어 너에게 절을 하는 것은 너를 신하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왕은 늙었고 국공에게 큰 인망이 있으니 너는 그를 섬기도록 하라."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곧 국공의 신하가 되어 그를 섬기게 되었는데, 옛일을 잘 알았으므로 법흥은 그를 나의 등통이라고 칭찬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비처가 과연 죽고 지증대왕이 즉위하여 법흥을 태자로 삼았다. 그러자 공은 벽화후를 권 하여 태자를 섬기도록 하여 딸을 낳았으니 이가 삼엽궁주이다. 이때 태자비 보도부인은 바로 비처의 따로서 태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보도의 동생 오도는 묘심이 선혜후와 사룡하여 낳았기 때문에 매우 아 름다워 태자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오도는 삼엽궁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과 깊이 결탁하여 은밀히 서로 정을 통하여 옥진궁주를 낳았다. 그런 사실을 안 태자는 오도를 아시공에게 벽화부인을 비량공에 게 주고 이에 정비보도부인만을 사랑하고 공을 축출하여 멀리하였다. 그러나 보도부인은 덕을 입었다 고 여겨 지증대왕에게 청하여 공을 전추에 봉하여 제사를 맡게 하였는데 연제부인도 공을 사랑하였다.
옥진이 궁중으로 들어가서 사랑을 받게 됨에 따라 공은 다시 과거처럼 왕의 총애를 받아 마침내 이찬의 지위에 올랐다. 옥진이 법흥의 사랑을 독점하게 되자 법흥은 보도부인을 중으로 만들고 공을 보도의 신 하가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지소태후가 정권을 담당하여 화랑을 설치할 때 공을 그 으뜸으로 삼아 풍월 주라 호칭하였다. 지소태후는 바로 보도의 딸로서 입종공의 부인이 되어 진흥대왕을 낳았다. 그러나 법 흥대왕은 옥진공주를 사랑하여 진흥을 태자로 세울 뜻이 없으므로 지소가 이를 근심하자 공은 곧 대의 로써 옥진을 깨우쳐 진흥을 세우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때문에 사 도태후도 무사였으니 공의 덕이 크다 하겠다.
공의 자손이 매우 많은데 장녀 옥진궁주와 차녀 금진부인은 바로 오도부인이 낳았다. 옥진이 처음 영실 공에게 시집간지 얼마되지 않아 법흥대왕의 사랑을 받아 비대공을 낳으니 대왕이 비대를 세워 태자를 삼고자 하자 공이 간하기를 "저의 딸은 골품이 없고 또 영실과 함께 살았으니 그자식을 태자로 세우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법흥왕이 죽자 지소태후는 비대공을 왕자로 격하시켜 공의 제 사를 받들게 하였다. 비대공의 딸 개원궁주가 동륜태자를 섬겨 아들을 두었다. 공의 아들 이화랑은 바로 준실부인이 낳은 아들이다. 준실부인은 수지공의 누이고 자비왕의 외손으로 얼굴이 예쁘고 문장을 잘하 였다. 처음에 법흥대왕의 후궁이 되었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다시 공에게 시집와서 이화랑을 낳았다. 이 화랑 역시 얼굴이 잘 생기고 문장을 잘 하였으므로 지소태후가 총애하여 항상 좌우에서 모시고 있게 하 였다. 그런데 태후의 딸 숙명궁주가 이화랑을 좋아하여 둘이 함께 도망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원광 조사로서 우리나라의 큰 성인이다.
원광조사의 동생 보리사문이 바로 나의 증조이다.
화랑의 시조이고 사문의 아비이다. 청아(靑我)의 손자이고 벽아(碧我)의 아들이다. 생시에는
선(仙)이고 죽은 후에는 부처이다. 원만하게 늘 존재하니 공덕이 모자람이 없도다.
2. 미진부공
미진부공은 아시공의 아들로 어머니는 법흥대왕의 따님이신 삼엽궁주인데, 삼엽궁주께서 백학의 꿈을 꾸고서 공을 낳았다. 공은 용모가 아름답고 재주가 많았으므로 법흥대왕이 공주를 사랑하여 비대공등 과 함께 궁중에서 키웠다.
이때 옥진궁주에 대한 법흥대왕의 총애가 대단하여 옥진의 소생인 비대공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자 지소 태후는 정통성을 들어 비대공을 태자로 세우는 것을 곤란하게 여겼는데, 삼엽궁주와 아시공이 태후 편 을 들었다. 이 때문에 태후는 삼엽궁주와 공을 사랑하였다. 그러다가 태후가 청정하게 되자 공을 폐신으 로 삼으니 이 때 공은 16세의 나이로서 태후의 뜻을 잘 맞추었다.
이전에는 삼산공의 딸 준정이 원화가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백제에서 온 보고공주가 낳은 법흥대왕의 딸로 절색인 남모공주가 공과 더불어 서로 사랑하였는데 태후는 공을 총애하므로 남모공주를 도와 원화 로 세우고자 하였다.
2과거에 법흥대왕이 옥진궁주의 사부인 영실공을 용양군으로 삼고 은총을 내려 높은 지위에 두고 원화 를 혁파하라 명하였다. 이 때문에 준정이 영실공을 잘 섬겨 남모공주가 원화로 세워지는 것을 저지하였다.
태후는 비록 유명에 따라 영실공을 계부로 삼기는 하였지만 실지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공에 게 명하여 원화를 혁파하게 하였다. 태후는 또 낭도들이 부리기에 넉넉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공에 게 부탁하여 낭도를 갑절로 늘리게 하자 준정은 이를 시기하여 그 낭도들을 술로 유인하여 수상에서 해 쳤다. 모도, 남모공주의 낭도가 이를 고발하니 태후는 곧 원화를 폐하고 선화를 화랑으로 삼아 그 무리 를 풍월이라 호칭하고 그 두목을 풍월주라 호칭하였는데 위화공이 화랑의 우두머리가 되고 공이 차석 이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공이 우두머리가 되었다. 공이 남모를 잃은 뒤에는 아내를 얻지 않았다. 과 거 공이 법흥대왕의 외손으로 궁중에서 법흥왕을 모실 적에 후궁 묘도부인과 사릉한 일이 있었으나 감 히 말을 하지 않았는데 태후가 그 사실을 알고서 허락해 주니 공은 곧 묘도부인을 아내로 맞아 미실랑주 와 미생랑을 낳았다. 미실랑은 재색이 뛰어나 진흥왕과 진평왕을 섬겨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미생랑도 화랑이 되었다. 공이 충성을 다해 지소태후를 섬기다가 총애가 쇠하자 국가에 몸바치기를 원하여 낭도 들을 거느리고 전쟁에 나아가 큰공을 여러 번 세웠다. 그러다가 미실랑주가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공의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고 부인 묘도도 또한 궁주에 이르러 대원신통을 이었으니 아 성대하도다.
다음과 같이 찬 한다.
색으로 임금을 섬겨 충성을 다하였고 용맹으로 국가를 위하여 또 힘을 다하였다. 부인 묘도는 위공의 딸
로 미화를 낳았으니 천도가 영원하다 하겠다.
3. 모랑
모랑은 남모의 아우이다. 이전에 법흥대왕이 국공으로서 백제에 들어갔다가 보고공주와 사통하여 뒤에 보고공주가 백제에서 도망하여 신라 궁중으로 들어와서 남모와 모랑을 낳았는데 모두 미색이 있었다. 미진부가 화랑이 되어 모랑은 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진흥대왕 9년에 태후의 명령으로 제3대 풍월주가 되어서는 남모의 혼령을 위로하였다. 위공이 딸 준화를 그에게 주어 사위로 삼았으니 바로 이화랑의 누 이이다. 딸 준모 하나만을 낳고 일찍 죽었으므로 드디어 이화랑으로 그의 뒤를 계승케 하였다. 동성의 아름다움이여 위화랑의 사위가 되었네. 대왕의 다을로서 태후의 총애를 받았네.
4. 이화랑
이화랑은 위공의 아들이다. 살결이 옥 같고 눈은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다웠다. 음악과 문장에 능하였고 열 두살에 모랑을 잘 보좌하니 태후가 무척이나 총애하였다. 당시에 황화, 숙명, 송화 등의 공주가 모두 공에게서 배웠으므로 공이 숙명공주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당시에 태후가 임금을 존귀하려는 마음 에 공주로 하여금 임금을 받들게 하였는데 상은 그가 동복누이라는 이유로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고 공 주 역시 그러하였다. 공주의 아버지는 바로 태종공이며 당시 수석 재상으로서 나라의 중추적인 인물이 었다. 이 때문에 감히 공주를 소홀하게 여길 수 없었는데 공주는 그 총애를 믿고 제멋대로 굴더니 태자 를 낳아 황후로 봉해지자 더욱 기탄하는 바가 없었다.
상은 본래 사도황후를 총애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동륜공을 태자로 삼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 다. 이때에 이르러 숙명후는 공과의 관계를 더욱 자주 가져 상에게 발각되었으므로 왕이 그를 내쫓으려 하자 태후가 울면서 간하였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상이 숙명의 침실에 간 적이 없었는데도 숙명 이 임신을 하였으므로 숙명은 공과 함께 도망갔다. 여러 신하들이 태자가 공의 아들이 아닐 것이라고 의 심하였으므로 이에 동륜공을 태자로 삼았다. 공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또한 도리어 동륜공의 한결같은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사도황후가 왕에게 권하여 힘써 보살펴주어 태후의 마 음을 편한케 해주라고 하자, 드디어 숙명과 부부가 될 것을 허락하였다. 그래서 원광과 보리를 낳았으니 역시 하늘의 뜻이 아니었겠는가?
개국5년에 모랑공이 비사벌을 유람하다가 병이 나서 길에서 죽자 낭도들이 이에 공을 받들기를 원하였 는데 그때에 공은 태후의 총애를 받아 늘 궁중에 있었기 때문에 사양하려 하니, 낭도들이 말하기를 "위 공의 아들이 그 자리에 앉지 않으면 누가 않겠습니까?" 하였다. 태후가 명령하여 그 자리에 앉게 하고 제4대 풍월주로 삼아 군현을 순행케 하였다. 그때 마침 태후가 만호랑주를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 산한 뒤에 떠나게 되었다. 옥진공주의 동생 금진도 위공의 딸이었는데 법흥대왕을 섬겼으나 아들이 없 었고 대왕이 죽자 물러나 문천가에 살았는데 남모가 애당초 받들려고 하였으나 태후가 허락하지 않았 다. 구리지공이 그와 사통하여 토함공을 낳았는데 매우 정묘하여 일찍부터 낭적에 들었다. 이때에 이르 러 그를 받들어 부제로 삼았다. 태후가 그를 궁중으로 불러 보고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비량숙공만 못 하지 않고 아름다움은 벽모보다 더 나으니 훌륭한 인재를 얻었음을 경축할 만 하다."하였다. 공도 토함 공을 매우 사랑하여 행동을 언제나 함께 하니 금진랑주가 고맙게 여기고 공에게 축수를 올렸다. 토함공 의 동생 사다함공이 크게 묘량의 풍모를 가지고 있어서 많은 낭도들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그 당시 무궁 랑이란 자가 있었는데 또한 인망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많은 무리들을 데리고 있었다. 사다함공이 나이 가 어리면서 의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만나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공자는 참으로 옛날 신릉군, 맹상군에 비견됩니다." 하고 섬기기를 원하니 사다함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받 아들이겠는가" 라고 하고 공에게 귀의하였다. 공이 태후에게 아뢰기를 "토함의 아우 사다함은 나이가 어린데도 스스로 낭도들을 데리고 있으니 국선이라 이를 만 합니다." 하니 태후가 그를 궁중으로 불러 음식을 하사하고 사람을 포용하는 방법을 물었다. 사다함이 대답하기를 "남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그 들의 좋은 점을 좋게 여겨주는 일뿐입니다." 하니 태후가 기특하게 여겨 대왕에게 말하여 귀당으로 삼 아 궁문을 맡게 하니 그의 무리 1천 여명이 모두 충성을 다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때에 비조공의 아 들 문노에게 검술을 배우게 하니 문노가 말하기를 "칼은 한 사람을 대적하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 찌 고귀한 사람이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자 공이 말하기를 "한 사람을 대적하지 못하고서 어찌 만 인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이 아이는 호협심이 있어 비록 따르는 무리가 많다 하더라도 적이 없지 않 을 것이니 그대가 잘 돌보아 주십시오"하였다. 이에 문노가 자기 무리 오백명으로 사다함을 따를게 하 니 그 위세가 토함보다 더 성대하였다. 그 때에 동륜공이 차츰 성장하였으나 대왕은 그를 보도할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마침 토함으로 하여금 보필하게 하니 토함이 말하기를 "이것이 저의 직분입니 다." 하고는 화랑의 자리를 아우에게 물려주었다. 그리하여 공은 사다함을 보좌로 삼고 토함과 마찬가 지로 아끼니 당시 사람들은 공이 인재를 얻었다고 축하하였다. 얼마 뒤에 가야가 배반을 하자 사다함은 총군을 요청하여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공은 그에게 주위를 넘겨주고 토함공과 함께 오로지 태 자를 보필하는 일에만 힘썼다. 아! 훌륭하도다. 공의 깨끗한 덕과 영광된 이름은 만세토록 전하여 끊기 지 않으리라. 공이 숙명공주와 함께 영흥사에 전심하니 태후도 귀의하였고 숙태자도 화려한 장식을 벗 고 수계하였다. 공의 아들 원광법사는 숙명공주의 소생이다. 수태할 때 공주가 공을 사모하는 마음을 스 스로 억제할 수 없었으나 화를 당할까 염려하여 자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금불이 나타나 말하 기를 "나는 약사불인데 공주의 배를 빌려서 태어나고 싶소." 하였다. 이에 공주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 고 합장 배례하니 부처는 공주를 안고 앞으로 엎어졌는데 흡사 뱃속으로 들어오는 듯하였다. 그때 마침 공도 공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어 궁중으로 몰래 들어가 엿보니 공주가 드러누워 마치 안고 있 던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둥대고 있었으므로 그 까닭을 묻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부처 의 힘이다." 하고는 서로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으니 과연 대성여래였다. 숙명은 또 공의 딸들을 낳았는 데 곧 화명과 옥명이며 모두 궁중에 들어가 진평대왕의 후궁이 되었다. 원광의 아우 보리는 태자의 딸 만룡에게 장가들어 예원각간을 낳았는데 그는 곧 나의 할아버지이다. 공은 또 토함공의 동생에게 장가 들어 서자 일곱명을 낳았는데 모두 귀히 되었다.
찬한다.
이황의 풍류는 계림의 청담 꺼리이네. 귀족의 자제로서 왕의 공주에게 장가들었고 금불이 와서 의지하 니 그가 곧 약사여래였네. 화랑의 가문으로서 원광법사의 아버지이니. 수많은 공의 족속. 만세토록 무궁 하리.
5. 사다함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이다. 이전에 비량공이 벽화후를 사모하여 늘 그의 변소에 가곤 하였는데 법흥 대왕은 비량공을 아껴 그 사실을 알고도 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결국 벽화후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 았기 때문에 이름을 구리지라 하였다. 벽화후처럼 얼굴이 아름답고 비량공처럼 용기가 있더니 성장하 여 낭도의 무예를 좋아하였다. 금진랑주와 관계를 맺어 토함, 새달, 사다함을 낳았는데 새달은 이화공의 첩이 되었다. 사다함은 12세에 이미 검술에 능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였으며 16세에 정병 5천명을 거느 리고 전단문으로 쳐들어가 백기를 세우고서 가야군을 대파하였다. 그 공으로 토지를 하사하자 모두 부 하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사로잡은 포로들을 모두 풀어주어 양인으로 만들었다. 대왕은 더욱 그를 사랑하 여 알천의 땅을 하사하였지만 그는 굳이 사양하고 그 가운데 불모지 약간만을 가려서 받고 말하기를 " 이것이면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게 하는데 충분합니다." 하였다. 그때에 이화공은 왕의 총애를 많이 받고 있었으므로 낭도들에게 싫증을 내었다. 그리하여 공을 제5대 풍월주로 삼고 공의 동포제인 설원랑 을 보좌로 삼았다. 설원랑은 그때 나이가 12세였다. 공의 신하 무관랑이 많은 공을 세우고도 신분이 미 천하기 때문에 보답을 받지 못한 채 죽자 공은 슬프게 여겨 애통해하다가 몸이 야위어져 죽었다. 공이 본래 미진부공의 딸 미실을 사랑하였고 미실 또한 공을 좋아하였으나 태후가 세종에게 시집가도록 명하 였기 때문에 끝내 장가들지 않고 죽었다. 낭도들이 다시 이화공을 세우자고 요청하니 이화공이 말하기 를 "세종 전군이 더 낫다."하였으므로 세종을 세워 풍월주로 삼았다.
찬한다.
비량공의 후예이고 위화공의 소자이다. 전장에 나가 많은 공을 세우고도. 스스로 불모지를 택하였네. 청
조산속에 송백이 길이 푸르리.
6. 세종
태종공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지소태후이다. 단아하고 아름다운 풍채를 가졌고 태후에게는 효도하고 대 왕에게는 충성을 다하니 대왕도 그를 매우 사랑하여 말하기를 "이는 나의 막내동생이다." 하였다. 어려 서부터 단속하지 않았으나 워낙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여 실수하는 적이 없었다. 태후가 공경들의 예쁜 딸들을 가려 궁중에 모아놓고 공에게 보이자 공은 미실랑주를 가장 좋아하여 가까이 하려 하였으므로 태후는 크게 기뻐하여 미실로 하여금 궁중에 들어와 섬기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다함공이 정벌을 나갈적에 미실이 노래를 지어 전송하였는데 그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궁중에 들어가 전군부인이 되어 있 었으므로 사다함공은 "청조가"를 지어 부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내가 죽어 신병이 되어 전군의 부처 를 보호해 주리다."하였다. 임종할 즈음에 이화공이 그를 안고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네 동생이 아직 어 린데 네가 만약 일어나지 못한다면 누가 뒤를 계승하겠는가?" 하니 사다함이 말하기를 "제 동생 미실의 남편이 모랑공의 고사에 따라 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리하여 이화공이 태후에게 아뢰어 세종을 세우고자 요청하니 태후가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내 자신은 아직 유약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 는가"하였다. 그런데 미실이 세종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종형이 나를 사모하다가 죽었습니다. 죽으면 서 남긴 한마디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장부가 아닙니다." 하였다. 그러자 세종도 그렇다고 여기고 태 화를 설득하여 허락을 받아 제6대 풍월주가 되고 설화랑을 보좌로 삼았다. 이 날 밤에 미실이 과연 꿈을 꾸었는데 사다함공이 품속으로 들어오면서 말하기를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 를 빌어 아들을 낳아야겠다."하였다. 그리하여 하종공을 낳았다. 이때에 동륜태자가 이미 장성하였으므 로 태후가 만호공주를 짝지어 주어 진골정통을 잇고자 하였는데 사도황후는 대원신통을 잇게 하기 위하 여 몰래 의논하기를 "내 아들이 훌륭하니 네가 태자와 가까이하여 아들을 낳는다면 너를 부인으로 삼아 주겠다." 하였다.
이에 미실은 크게 기뻐하고 태자와 관계를 맺어 임신을 하였다. 그런데 대왕은 그것도 모르고서 미실로 하여금 들어와 자신을 받들게 하고 황후궁 전주로 삼았다. 세종이 이에 출정을 요청하여 나가니 미실은 총애를 믿고 방탕하게 굴면서 설원랑 및 그의 아우 미생과 정을 통하였다. 그러나 대왕은 그 사실도 모 르고 그를 받들어 원화로 삼고 두화랑으로 하여금 낭도들을 거느리고 조회하게 하였다. 대왕이 전주와 함께 남도에서 조회를 받으니 원화의 제도가 폐지된지 29년만에 다시 부활되었고 곧 연호를 고쳐 "대창 "이라고 하였다. 미실은 얼굴이 예쁘고 교태를 잘 부렸으며 옥진의 풍모를 크게 닮았는데 당시 사람들 은 사다함의 혼령이 늘 미실의 가슴속에 있으면서 좋은 꾀를 준다고 하였다. 홍제원년 3월에 동태자가 보명궁에서 큰 개의 소동으로 죽자 대왕이 태자를 찾았으나 시종들이 대부분 미실의 낭도로 들어가 있 으므로 미실은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원화의 자리를 내놓았다. 대왕은 또한 세종을 어여삐 여겨 불러 들이고 미실을 다시 세종에게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미실은 세종을 권하여 설원에게 자리를 물려주 게 하였다. 이때에 금태자 또한 미실을 좋아하여 설원, 미생등과 더불어 방외우의 교제를 맺었다. 세종 공은 홀로 청절을 지켜 밖에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궁중에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었는데 담박하여 조금 도 사사로운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태후에게는 효도하고 대왕, 황후, 태자에게는 충성하였으며 미실에게는 정절을 지켰으니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
찬한다.
태후의 사자이고 정승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네. 청아한 행실 우뚝한 의료는 화랑의 본보기였네
7. 설화랑
설화랑의 처음 이름은 설원랑으로 금진낭주의 사자이다. 그의 아비 설정은 낭도로 얼굴이 아름답고 아 첨을 잘하여 구리지 용양의 신하가 되어 낭주와 통정하여 설원을 낳았다. 공은 풍채가 아름답고 옥적을 잘 불었는데 출신이 미천한 탓에 낭도들이 받들고자 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실이 상의 은총에 기대어 낭 도들을 호령하였으므로 낭도들이 감히 많은 말을 하지 못하였다.
제7대 풍월주가 되어 미실을 부풍월주로 삼았다. 설원은 허리를 굽혀 선비에게 겸손하고 재물을 풀어 사람들을 도와주니 낭도들이 모두들 복종하였으나 설원자신은 오히려 자기의 행위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다. 미실은 곧 설원에게 모랑공의 과처인 준화낭주에게 장가들도록 권하였다. 낭주는 당시 나이가 38세로 18년 동안이나 과부로 지내다가 다시 화랑을 낳았으므로 여러 낭도들이 축하하면서 말하기를 " 위공의 후손이니 다시는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그런데 설원은 기탄없이 미실과 통 정하였다.
준화낭주가 그 사실을 알고도 금하지를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준화낭주의 딸 준모가 미실을 통하여 동 태자와 통정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또 금태자와 통정하고자 하니 설원이 이를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 동태자를 섬긴 일을 임금이 알고 계시는데 지금 또 금태자를 받아들일 경우 임금이 그 사실을 알면 반드 시 우리 부부를 좋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하자 준화낭주가 말하기를 "낭군의 말이 옳다"고 하고는 준모에게 여승이 되도록 명하였으나 준모가 따르지 않았다. 설원이 준모를 유혹하여 통정하고는 1년여 동안 계속 정을 통하다가 준모가 임신을 하니 준화가 그 사실을 알고는 노하여 말하기를 "태자에게 바 치는 것을 가로막고는 자신을 정을 통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였다. 설원이 미실에게 도와주기 를 요청하니, 미실이 미생으로 하여금 준모를 취하도록 해서 일이 평온해졌다. 준모는 미생에게 시집가 서 설원의 딸을 낳아 미모라고 이름하였는데, 낭도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당시에 문도일파가 외방에서 세종을 따라다니면서 전공을 세웠으나 지위를 얻지 못하자 설원에게 복종하지 않고서 스스로 한 문파 를 세웠다. 그렇게되자 낭도들이 드디어 두 파로 가라져서 설원파는 정통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하고 문 노파들은 청의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하면서 서로 옳다고 다투니 미실이 이를 걱정하여 세종으로 하여 금 이들을 화합시키게 하였으나 화합시키지 못하였는데 미실이 비록 새 임금에게도 총애를 받고 있었으 나 지도부인만큼 총애 받지 못하였다. 지도부인의 아비 기오공이 문노와 종형제간이었으므로 지도부인 은 평소부터 문노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세워 국선으로 삼고 비보랑으 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였다.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를 좋아하고 협기가 많았으며 설원의 낭도들은 향가 를 잘하고 청유를 좋아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문노의 낭도들을 호국선이라고 부르고 설원의 낭도들 을 운상인이라고 불렀다. 골품사람들은 대부분 설원의 낭도들을 따랐고 민간 사람들은 대부분 문노의 낭도들을 따르면서 서로 의를 연마하는 것으로 주를 삼았다. 진지대왕이 미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 는데 여색을 좋아하고 방탕하였으므로 사도태후가 이를 걱정하여 미실과 의논하여 폐위시키고 노리부 공으로 하여금 왕의 직무를 행하게 하였으니 노리부공은 바로 사도태후의 오빠이다. 그는 미실의 남편 인 세종공과 함께 대사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문노의 낭도들이 복종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사도태후 의 명령으로 두 낭도들을 하나로 통합하고는 다시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고 세종을 상선으로 문노를 아선으로 설원과 비보랑을 좌우화랑으로 미생을 전방화랑으로 삼아 불화를 진정시켰다. 이 때문에 문노 의 낭도들이 미천한 출신의 사람으로서 고관에 많이 발탁되었으므로 초택의 사람들이나 항순한 사람들 이 출신할 수 있는 문호로 여겨 문노를 받들기를 신과 같이 하였다. 그러자 미실이 설원이 문노만 못하 다는 것을 알고는 설원에게 문노를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설원의 낭도들이 불평스러운 기색을 나 타내자 설원이 말하기를 "총주의 명령을 거절할 수는 없다."하고는 무릎을 꿇고 문노를 섬겼다. 이로 인 해 문노의 무리들도 설원에게 복종하니 미실이 기뻐하면서 문노로 하여금 그 자리를 설원에게 사양하 게 하였다.
그러자 문노가 말하기를 "국선이 풍월주보다 아래가 아니고 또 그가 나의 제자가 되었는데 어찌 스승이 제자를 받들어 섬길 수가 있겠는가?" 하니 설원이 말하기를 "국선이 비록 전황이 설립한 것이기는 하나 풍월의 정통이 아니다. 그리고 세종전군은 왕자라는 귀한 신분으로도 사다함공의 뒤를 이었는데 더구 나 내가 사형을 봉향했던 것은 미실궁주의 명 때문이었다. 지금 궁주가 또 양위하도록 명하기 때문에 감 히 반대치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문노가 말하기를 "궁주가 명하였다면 나 역시 어찌 감히 반 대할 수 있는가?" 하고 또 이어 말하기를 "도맥으로는 스승이고 통맥으로는 동생이니 어떻게 처신해야 마땅한가?" 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설원은 나의 충신이고 또 정통의 형이다. 어찌 절하지 않을 수 있겠 는가"하였다. 문노가 이에 절을 하고 신이라 칭하니 미실이 설원에게 이르기를 "내가 너로 하여금 먼저 문노에게 굽히게 하였던 것은 바로 오늘날고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니 설원이 배사하면서 말 하기를 "신의 한 오라기의 터럭까지도 모두 총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 니까?" 하였다.
문노는 국선으로서 화랑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므로 선화라하고 설원은 미실을 영흥사에서 섬겼으므로 뒤에 미륵선화라고 하였다. ᄁ(?)까지 미실에게 충성을 바친 자는 설원이고 끝까지 세종에게 충성을 바 친자는 문노이니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찬한다.
미실의 선하요 선화의 시초로다. 불문에 의탁하여 아름다움을 빛 냈도다. 성대 하도다. 청명이어 청사
에 길이 남으리 시종 한결같은 충성 복의 터전 열으리로다.
8. 문노
문노는 비조부공의 아들이며 가야국의 문화공주이다. 어려서부터 검술을 잘하였고 의기가 있었다. 가야 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사다함이 함께 가서 토벌하기를 청하니 문노가 말하기를 "어찌 어머니의 아들 이 되어서 외조부 나라의 백성을 괴롭힐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가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 가운데 이 사실을 두고 비난하는 자가 있자 사다함이 말하기를 "나의 스승은 의인이다."하고는 가야국에 들어가 서 함부로 살해하지 말라고 경계시키어 문노의 뜻에 보답하였다. 세종이 그의 뒤를 잇자 그의 낭도들을 세종에게 속하게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할 때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으나 어머니가 가야국 출신 인 탓으로 현직에 오르지 못하니 세종공이 애석하게 여겼다.
진지대왕이 폐위되자 공으로 아찬이 되어 비로소 미실에게 총애를 받아 선화의 자리에 올라 제8대 풍월 주가 되었다. 공은 용기가 있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아랫사람들을 아끼기를 자신을 아끼듯이 하였고 청 탁을 구애하지 않고 자신에게 귀속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품어주었으므로 명성이 크게 떨쳐 낭도들이 서로 권면하여 그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사풍이 일어났으니 통일의 대업 에 공에게 비롯하였다 하겠다. 공이 풍월주가 되었을 때 낭도들의 부곡을 나누는 제도가 찬연히 갖추어 지게 되었다. 풍월주로 있은 지 3년만에 비보랑에 그 자리를 전하였다. 공은 오래도록 장가들지 않았었 는데 국선이 되어서 윤궁낭주를 받들어 내원으로 삼았다.
윤궁낭주는 황종공의 딸로 동륜태자를 섬기어 딸을 낳고는 혼자 살고 있었으며 미실 및 미보랑과는 종 형제간이었다. 비보랑이 윤궁낭주를 힘껏 권해 공의 계부로 삼게 하였다. 아들 셋을 낳고 딸 둘을 낳았 다. 공이 선화가 된 데에는 윤궁낭주의 내조가 컸었다.
찬한다.
가야국이 외손이여 의기의 종주로다. 국선으로 화랑이 되어 나라의 기풍을 떨쳐 일으켰도다.
9. 비보랑
비보랑은 비대전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실보낭주로 바로 미진부공의 여동생이다. 설원공과 같은 해 에 태어나 함께 노래를 배웠으나 설원공에 미치지 못하였고 잣대를 배웠으면서도 또한 설원에게 미치 지 못하자 문노의 낭도를 들어가 검술을 배워 드디어 고제가 되어 문노를 보필하여 선화가 되게 하였으 므로 그 공으로 공이 부선화가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제9대 풍월주가 되었다.
힘써 문노의 법제를 준수하였으며 미천한 자를 이끌어 주고 약한 자를 도와주기를 힘썼으며, 낭도들을 나누어 보내어 변수를 위무하였다. 당시에 미생공이 설원공의 부제로서 오랫동안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 는데 문노공이 양위하도록 명하였고, 공이 자리에 있은 것도 3년밖에 안되었으므로 낭도들이 애석하게 여기었다. 이때는 건복 정월(580년)이었다. 공은 노리부공의 딸 세진낭주에게 장가 들어 다섯 아들 세호랑을 낳았고 또 진흥대왕의 딸 덕명공주에게 장가들어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귀현하게 되었다. 서자인 유오랑은 공의 첩인 유지가 낳았는데 지명법사를 따라 진나라(陳)로 들어갔다 가 많은 서책을 가지고 돌아와 사문의 후진에 길을 열어 주었으니 그 공이 역시 크다 하겠다. 찬한다. 법흥왕의 후손이요 진흥왕의 사위로다.
10. 미생
미생은 미진부공의 아들로 어머니는 묘도부인이다. 공의 누이는 미실궁주로 진흥대왕에게 총애를 받았 으므로 공 역시 진흥대왕의 은총을 입어 여러 차례 입궁하여 동태자, 금태자 등과 함께 토함공에게 배웠 다. 사다함공을 따라 낭도가 되었다. 공의 나이 겨우 12세 때에 세종공이 사다함의 뒤를 이어 풍월주가 되어 공으로 전방화랑을 삼고는 자신의 지위를 전하고자 하였는데 미실궁주가 설화랑을 총애하여 공으 로 하여금 설화랑을 섬기게 하였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제10대 풍월주가 되었는데 공의 나이가 이 미 36세였다.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사다함공은 16세에 풍월주가 되었는데 천하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내가 13세에 전방화랑이 되니 사람들이 더욱더 영광스럽게 여기면서 16세가 되기 전에 반드 시 풍월주가 될 것이라고 하였었다. 그런데 어찌 36세가 되어서야 풍월주가 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는 가?" 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내가 총애를 받을 때에도 네가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내가 총애를 받 지 못할 때에는 누가 하종을 위하여 도와주겠는가?" 하고는 하종을 부풍월주로서 삼게 하였다. 당시에 낭도들이 서로 쟁론하였는데 내외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 써서 국력을 강하게 하자는 자들을 통합원류라 하였고 또 한파는 대원신통을 받들고자한 미실의 파가 그 두 번째 파이며 다른 한파는 진골 정통을 받들고자 하는 문노일파로 이들이 세 번째 파였다. 그러나 문노도 세종에게 충성을 바쳤으므로 감히 하종에게 다투지 못하였고 통합파는 하종이 재목이 못된다고 여기에 미생에게도 복종하지 않았 다. 또 다른 한 파는 숙태자를 세우고 원광으로 그를 돕게 하고자 하였는데 이들은 문노파와 통합파가 혼합된 자들로서 이화류라 하였다. 또 다른 한파는 천주공을 세우고 서현랑으로 그를 돕고자 하였는데 이들은 통합파 가운데 가야파들이었다. 공은 풍월주로 있은지 3년 만에 논의가 일치하지 않자 하종에 게 양위하였다. 공은 부귀한 집안에서 성장하여 아랫사람들의 실정을 잘 몰랐고 성품 또한 여색을 좋아 하고 재물을 탐하였으므로 인망이 두텁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선문에 있었기 때문에 낭도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감히 배반하지는 못하였다. 공은 처첩이 많아 자식이 백 명이나 되 니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찬한다.
옥진의 후손으로 대원신통이다. 아들은 백명이고 따르는 무리는 만명이로다.
11. 하종
하종은 세종전군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미실궁주이니 역시 대원신통이다. 문노파가 복종하지 않기 때문 에 이화공의 아들 보리공으로 부를 삼았는데 보리공의 어머니는 숙명공주이니 진골의 정통이다. 그러 나 주형과 부제가 파가 다르기 때문에 자연불화하므로 미실궁주가 걱정하여 마침내 사도태후의 명으로 낭도를 대대적으로 모이게 하여 이화공과 세종공을 제사하게 하여 조화를 이루게 하고 불복하는 사람들 을 많이 등용하여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야파가 점차 다시 세력을 얻게 되자 서현랑으로 삼으니 이 역시 대원신통이다.
이로 인하여 이화, 미실, 가야 3파가 단결하게 되었다. "당시 궁중에는 3태후가 있었는데 행정대왕이
어질고 효성스러워 잘 받들어 모셨기 때문에 훌륭한 낭도들을 태후궁에 많이 소속시켰다.
태상태후와 사도법주는 미실궁주로서 법운을 삼았기 때문에 정령이 대부분 미실궁에서 나왔다.
그런데 법주의 딸인 아양공주는 바로 서현랑의 어머니인데 가야파의 후광이 되어 미실궁의 세력을 나누 어 가졌다. 만호태후는 대왕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더욱 총애를 받아 진골 정통의 수주가 되었는데 지도 태후가 태상과 만호에게 드나들면서 문노정파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비보랑이 지도의 아들 용춘공을 밀 어 보리공 대신 풍월주로 세우려 하였지만 만호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비록 풍월주의 지위는 얻 지 못하였지만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때문에 서현랑이 "용춘공은 바로 선군의 아들이니 어찌 감히 내가 대적하겠는가?" 하고는 그 낭을 사양 하며 양보하였다. 그렇게 되자 가야파도 용춘공에게 돌아갔는데 이들 역시 대원신통이었기 때문에 미실 파들도 다투지 않았다. 낭도가 모두 축하하면서 "적임자를 얻었다." 하였다. 보리공도 용춘공을 아껴서 당을 달리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니 진골과 대원의 논의가 이 때에 비롯하였다. 하종공이 비록 어머니에 게 효도하여 형세를 살펴 따랐으나 안으로 그 논의를 찬성하면서도 겉으로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당시 은륜공주가 임금의 총애를 잃었는데 이는 바로 태상의 막내딸이었다. 태상이 대원을 염려하여 공 에게 명하여 은륜공주를 받들게 해서 효종공을 낳았다.
앞서 설원공의 딸 미모낭주에게 장가들어 모종을 낳았었다. 효종의 누이는 하희와 월희이고 모종의 누 이는 유모와 영모이다. 공은 청렴 검소하여 여색을 삼가고 아래 사람을 사랑하고 위를 잘 섬겨 세종의 풍토를 많이 지녔기 때문에 처음에는 복종하지 않는 파가 있었으나 결국은 모두 돌아왔다. 3년 동안 풍 월주 자리에 있다가 보리공에게 물려주며 말하기를 "앞서의 열선들이 모두 대성이었는데도 오히려 3 년 동안만 하였는데 내 어찌 감히 오래 있겠는가?" 하니 보리공이 "주형은 미실 원화의 아들이니 어찌 보통 열선과 동례로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지만 공이 굳이 사양하였으므로 보리공이 비로서 풍월주 의 자리에 올랐다. 보리공은 바로 나의 상조이시다. 일찍이 선고에게 하종공에 대해 말하시기를 "지금 세상에 이러한 효자와 충신은 없다." 하셨는데 이는 미실궁주가 차례로 3조를 섬겼기 때문에 다른 형제 가 있어 행동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은륜공주도 골품을 믿고 방탕하였지만 공은 세종공이 미실을 대하듯이 하여 따져 묻지 않았고 태양공주 도 은륜의 형으로서 공과 이웃해 살면서 매우 유혹하였지만 공은 한 번도 가지 않았으니 공이 몸을 깨끗 이 지킴이 이와 같았다.
찬한다. 청근함으로 덕을 지켜 휼륭한 이름 남겼으니, 세종의 아들로서 미실이 낳으셨도다.
12. 보리
보리공은 이화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로서 바로 지소태후의 딸이시다. 꿈에 황색사슴을 보 고 공을 낳았는데,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큰 뜻을 품었다. 자라서 큰형인 원광법사와 함께 학문에 힘썼는 데 원광이 일찍이 가르치기를 "나는 불이 되고 너는 선이 되면 우리 나라를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 다." 하였었는데 공이 비로소 낭도에 소속하여 풍월주의 지위에 올랐으니 그때가 바로 건복8년(서기 586년)이었다. 공은 만호태후의 딸인 만룡낭주로 아내를 삼았는데 나이 겨우 13세였다. 이보다 앞서 태후는 공의 포형인 숙태자를 사랑하여 만룡을 낳았었는데 이때에 태후는 대원의 계통이 진골의 계통 을 빼앗을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만룡을 주었고 만룡도 기꺼이 아내가 되었던 것이다.
만룡의 형 만명은 나이가 들도록 시집가기를 허락받지 못하였는데, 서현랑과 몰래 좋아하였다. 그러자 만호태후는 본래 아양과 좋지 않는 사이였으므로 만명을 가두고 서현은 만놀로 귀양보내려 하였다. 그 러자 만명은 도망하여 서현과 함께 달아났다. 태후는 죄를 주고자 하였으나 공과 만룡이 극력 만류하여 보호되었다. 이때 공의 여형인 화명과 옥명은 모두 진평대왕을 섬겨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공을 중용하려고 하였는데 공은 거절하면서 "우리 가문은 대대로 화랑을 이어온 것으로 만족한데 어찌 벼슬을 하겠는가?" 하였다. 이렇듯 공은 청렴결백으로 자신을 지켰으나 낭주가 태후의 사랑하는 딸이었 기 때문에 상으로 하사 받은 것이 매우 많아 집안이 매우 넉넉하였다. 공은 낭주에게 "나는 낭도의 우두 머리로서 어찌 혼자서 만이 부귀를 누릴 수 있겠는가. 나의 아내는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고 하 자 낭주는 "부부는 한 몸이니 낭군의 마음이 낭첩의 마음입니다. 안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고는 재산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 이로 인하여 낭도들이 모두 부모 받들 듯이 하였으며 무릇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공과 낭주과 함께 가서 위로하고 보호하여 주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두 성인으로 비유 하였다. 낭주는 왕의 누이인 귀한 신분으로서 부도를 극진히 하였으므로 공이 감동하여 다른 여인을 두 지 않았으며 정분이 비할 데 없이 좋았다.
늦게 아들 1명과 딸 1명을 두었는데 아들은 예원이고 딸은 보룡이니 즉 문무왕의 어머니이시다.
3년 동안 풍월주로 있다가 부제 용춘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다. 아 훌륭하도다. 공의 만년의 사적이 고승전에 나온다.
찬한다.
보리사문은 위공의 자손이로다. 만룡과 같은 덕으로 베푼 은혜 산과 같도다.
13. 용춘
용춘은 금륜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도태후이며 용수 갈문왕의 동생이다. 금륜왕은 황란한 행실로 인하여 폐위되어서 3년동안 유폐되어 있다가 죽었다. 그러나 공은 어렸으므로 그 얼굴도 보지 못하였 다. 지도태후는 태상태후의 명에 의하여 다시 신왕을 섬겼는데 공은 신왕을 아버지라 불렀다. 이 때문에 왕은 공을 어여삐 여겨 매우 총애하였다. 장성한 뒤 공은 강개한 뜻을 품고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비보 랑을 섬겨 형과 서제 사이가 되니 비형랑과 무사랑의 낭도가 모두 귀속하여 3파가 모두 추대하기를 원 하였고 이로 인하여 서현랑도 지위를 사랑하여 양보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제13대째이다. 호림으로 부 제를 삼았다. 공은 낭도의 묶은 풍습을 혁파하고 한결같이 인재의 여부로써만 선발하고 골품에는 구애 받지 않으면서 "골품이란 왕이나 신하의 지위를 구별하는 것인데 낭도에 어찌하여 골품을 적용한단 말 인가?" 하니 대중이 크게 흡족해하면서 "문노의 다스림이 다시 밝아질 수 있겠다"고 하였다. 당시에 대 왕이 아들이 없어 공의 형 용수 전군으로 사위를 삼아 전위하려 하였는데 전군이 공에게 물으니 공이 " 대왕의 나이가 아직 젊은데 혹시라도 후사가 있게 되면 아마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전군이 이 로 인하여 사양하였으나 마야황후가 허락하지 않고 마침내 전군으로 사위를 삼으니 바로 천명공주의 남편이 되었다. 이 때문에 내전에서는 공을 더욱 중하게 여겼으므로 호림공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요직으 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이후 낭도로서 등용된 자가 매우 많았다.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면서 용봉의 자태와 천일의 위 의를 지녀 왕위를 이을 만 하자 대왕이 그에게 뜻을 두니 천명공주는 효순하여 양보하였다. 대왕이 공에 게 선덕공주를 받들도록 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받들었다. 그러나 후사가 없 어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이에 대왕은 용수전군에게 모시도록 명하였으나 역시 후사가 없었다. 공은 고 구려로 출정하여 큰공을 세워서 각간에 봉해졌다. 용수 전군이 임종시에 부인과 아들을 공에게 부탁하 였으니 아들은 바로 태종으로 우리의 임금이시다. 공주가 즉위하고 공을 남편으로 삼았으나 공은 후사 가 없음을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니 여러 신하들이 사위를 셋을 두는 제도를 의논하였다. 공은 천명공주 를 아내로 삼고 태종을 아들도 삼았다. 이보다 앞서 공은 왕명으로 호명궁에 있으면서 세 딸을 낳았었 다. 공은 달리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태종으로 아들을 삼은 것이다. 서자 5명과 서녀 18명은 모두 귀히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여 갈문왕으로 추존하였다. 아 훌륭하도다. 성덕의 천지와 같았다.
찬한다.
갈문의 덕이 일월과 같아 삼한의 대업이 힘입어 완성되었도다.
14. 호림
호림은 복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송화공주로 지소태후의 딸이다. 공은 공주의 사생아이기 때문에 아 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비보랑의 아들이라고 하기도 한다. 공은 용력이 많아 격검을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소탈하고 검소하게 처신하고 골품이라 하여 높은 체 하지 않았다. 공의 적형인 마야부인이 당시 황후로서 총애를 받았으므로 용춘공이 공을 발탁하여 부 제로 삼았다. 이 때에 이르러 14대 풍월주가 되었으니 바로 진골의 계통이다.
공은 마음가짐이 청렴 정직하여 재물을 대중들에게 나누어주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공을 "옷벗은 지 장이다." 고 하였다. 공은 낭도들에게 "선과 불은 같은 도이니 화랑도 불을 몰라서는 안된다. 우리의 미 륵선화 보리사문이 모두 우리의 스승이다." 하고는 공은 보리공에게 가서 수계하였는데 이 때문에 선 과 불이 점차 융화되었다. 공은 처음 문노공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 죽었으므로 다시 하종공의 딸 인 유모낭주에게 장가들었다. 이때 미실궁주는 나이가 많았는데도 낭주를 극진히 사랑하여 귀한 아들 을 보고자하여 공에게 천부의 관음을 조성토록 명하여 아들을 빌어서 선종랑을 낳았는데 자라서 율가 의 대성인이 되었다. 공이 더욱 불을 숭배하여 곧 유신공에게 양위하고서 무림거사라 스스로 칭하고 조 정의 일에는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받들어 의견을 물었다. 알천 공들과 칠성우를 만들었는데 통일의 대업이 공등에게서 처음 나온 것이 많았으니 훌륭하고 지극하도다.
찬한다.
태후의 손자요. 진골의 후예로서 불선에 들어 천추에 공을 남겼도다.
15. 유신
5세 (풍월주) 유신공(庾信公)은 서현(舒玄)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인데 곧 만호 태후의 사녀(私女)이다.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인데 또한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이다. 처음 만명과 서현 이 야합하여 임신을 하였는데, (만호)태후는 서현이 대원신통류이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 다. 이에 만노(萬弩)로 도망하여 무릇 20개월 만에 낳았는데 꿈의 상서로움이 많았다.
진평대왕은 사매(私妹)가 괴로움을 받자 서현공을 만노(萬弩)에 봉하였다. 공은 자라자 태양 과 같은 위용이 있었다234). 태후가 보고 싶어 하여 돌아올 것을 허락하여 보고는 기뻐하며, “이는 참으로 나의 손자이다.” 하였다. 이로써 가야파가 마침내 받들었다.
호림공의 부제인 보종공은 미실궁주의 막내아들인데 아버지는 설원이었다. 공이 중망(衆望) 이 있다고 하여 그 지위를 양보하였다. 이는 대개 (미실)궁주가 (만호)태후를 위로하기 위하 여 명한 것이다.
그때 공의 나이가 15살이었는데 커다란 도량을 가지고 있어 낭도들을 능히 다스렸다. 가야파 의 낭도로서 승진하기를 탐하는 자가 말을 하기를 “어른(풍월주)께서는 가야정통(加耶正統) 으로어찌저를사적으로돌보지않습니까?”하였다.공이정색을하며“나는곧태후의손자 인데네가무슨말을하는가?또한대인은사애(私愛)를하지않는다.공이있으면비록미천 하여도 승진을 할 것이다. 어찌 공을 세우지 않는가?” 하였다. 낭도는 크게 부끄게 여기며 물러났다. 어떤 이가 고하기를 그 낭도가 장차 배반할 것이라고 하였다. 공은 “옳지 않으면서 붙는 것은 배반하는 것만 못하다. 그렇지만 그 낭도가 승진을 탐하는 기색으로 보아 반드시 공을 세울 것이다.” 하였는데, 후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공은 이로써 능히 각도(各徒)를 화합 하였다. 늘 도(徒)에게 일러 “우리나라는 동해에 치우쳐 있어 3한을 통합할 수 없다. 이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어찌 구차하게 골품과 낭도의 소속(徒屬)을 다투겠는가. 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면곧나라에외우(外憂)가없을것이니,가히부귀를누릴수있다.이것을잊으면안 된다.” 말하였다.
무리들이 공에게 몸을 바치기를 원하였다. 이에 지혜와 용기가 있는 낭도를 뽑아서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고 고사(高士)들과 힘써 결속을 맺었으며, 중악(中岳)에 들어가 노인에게서 비 결(秘訣)을 받았다. 신변에는 늘 신병(神兵)들이 있어 좌우에서 호위하였다.
돌아오자,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겠다고 청하였다. 공은 사양을 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에 15세 풍월주가 되었다. (만호)태후가 하종공의 딸 영모(令毛)를 아내로 맞이하 도록 명하여 미실궁주를 위로하려고 하였다. 영모는 곧 유모(柔毛)의 동생이었다. 형제가 모 두 선화(仙花)의 아내가 되었다. 그 때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곧 건복(建福) 29년 임신년 (612)이었다. 공이 풍월주의 위에 올랐다. 날마다 낭도들과 더불어 병장기를 만들고 궁마를 단련하였다.
용춘공이 이에 사신(私臣)으로 발탁하였다. 공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시석(矢石)을 피 하지않기로맹세를하고따랐다.용수공또한그아들을맡겼다.공은크게기뻐하며“우리 용수공의 아들은 삼한의 주인입니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덕공주가 왕위를 계승하 였다. 용춘공은 왕의 남편(皇婿)이 되었다. 천명공주는 .... ...주가 불안하였다. 공이 춘추공을 설득하기를 “천도(天道)가 제 스스로 있어 ...은 한 때의 일로 충효에 어긋남이 있었다.” 하였 다. 춘추공이 그렇게 여겼다. 이에 곧 천명을 위로하여 근심을 없앴다. 공이 춘추공에게 말하 기를 “바야흐로 지금은 비록 왕자나 전군(殿君)이라 하더라도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춘추공은 이에 공의 누이인 문희(文姬)를 아내로 맞았고 공의 부제가 되 었다.
이보다 앞서 보종공이 풍월주가 되기 전에 공에게 양보를 하였다. 그러므로 대원파가 불평 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공이 이에 풍월주의 위를 보종공에게 물려주었다. 열국(列國)을 순행 하여 뜻과 기개가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삼한을 통합하였다. 공의 사업과 공덕은 모두 사 책(史冊)에 있으므로 생략한다.
가야의 우두머리이고 신국의 영웅이다. 삼한을 통합하여 오동(五東)235)(吾東 우리 신라)의 질서를 바로 잡아 통치하니 혁혁한 공명은 해와 달과 아울러 함께할 것이다.
아버지는 서현 각간이고 할아버지는 무력 각간이고 증조는 구충대왕이며 고조는 겸지대왕 (鉗知大王)이다.
겸지는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우리나라의 골품(骨品)이 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우리나라 조정에 복종하여 따랐다. 겸지왕 원년(492) 왕의 조카 납수공(納水公)이 우리 덕지 공(德知公)의 딸 계황(桂凰)을 아내로 맞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왕 또한 우리나라 여자를 원하였는데 왕의 어머니 방원(邦媛)이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 왕의 아버지인 질지대왕(銍
知大王)이 영명하여 선정을 베풀어 금관(金官)이 잘 다스려졌다. 질지는 백흔공(白欣公)의 손 아래 누이인 통리(通里)를 왕후로 삼았다.
곧 미해공(美海公)의 딸이다. 그 어머니는 제상공(堤上公)의 장녀인 청아(靑我)이다. 서로 매 우 사랑하였는데 일찍 아들이 없는 것을 한으로 여겼다. 통리는 이에 백흔공의 딸인 하희(河 喜)를데려다첩으로삼았는데,또한딸을낳고아들을낳지못했다.얼마안있어통리가아 들 선통(善通)을 낳았다. 질지가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선통은 말 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는데 들에서 사냥을 하다가 비를 만나 사간(沙干) 김상 (金相)의 집에 들어갔다. 김상은 좌지왕(坐知王)의 외손이었다. 김상의 딸 방원은 교태에 능 하고 아름다웠는데, 선통을 유혹하여 상통을 하였다. 1년 남짓하여 딸을 낳았다. 통리가 듣고 거두어태자비로삼았다.얼마안있어통리와선통이모두죽었다.질지가이에방원을왕후 로 삼았다. 이에 앞서 방원은 질지와 밀통을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아들 겸지(鉗知)를 낳았다. 그러므로 질지는 크게 기뻐하여 왕후로 삼은 것이다. 방원은 ...을 좋아하였다. 질지는 늙어 정치를 다스리지 않았다. (신라)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였다. 이 때문에 방원은 우 리나라를 원망하여 겸지가 우리나라에서 아내를 맞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겸지 10년(501) 에 방원이 죽었다(崩).
겸지왕이 이에 납수공을 보내어 청혼을 하였다. 조정에서는 출충(出忠) 각간의 딸 숙씨(淑氏) 를 허락하여 보냈다. 겸지는 그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왕후로 삼아 구충(仇衝)을 낳았다. 구충 은 계봉의 딸인 계화(桂花)를 아내로 맞아 왕후로 삼아 무력(武力)과 무득(武得)을 낳았다 236). 모두 우리나라에 왔는데 조정에서 예로써 대접하였다. 무력은 진흥제의 딸 아양(阿陽) 을 아내로 맞아 서현을 낳았다. 서현은 만호태후의 딸 만명을 아내로 맞아 (유신)공을 낳았다. 그러므로 공은 실로 진골(眞骨) · 대원(大元) · 가야(加耶) 3파의 자손이다.
금관가야는 수로청예왕(首露靑裔王)에서 비롯하였는데 황룡국(黃龍國)의 여자인 황옥(黃玉) 을 아내로 맞아 거등(居登)을 낳았다. 거등은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을 아내로 맞아 마품(馬品)을 낳았다. 마품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를 아 내로 맞아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는 아궁(阿躬) 아간의 손녀 아지(阿志)를 아내로 맞아 이품(伊品)을 낳았다. 이품은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을 아내로 맞아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는 색을 좋아하여 각국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왕후로 삼았는데 우 리나라에서도 도령(道寧) 아찬의 딸 복수(福壽)를 보내어 아들인 취희(吹希)를 낳았다. 좌지 가 크게 기뻐하여 정후(正后)로 삼았다. 금관(金官)에서 우리나라의 여자를 왕후로 삼는 것이 이로서 비롯하였다. 취희가 왕위에 오르자 복수는 태후로서 집정을 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많 이 등용하였다. 금관인 또한 우리나라에 많이 왔으며 사이좋게 친한 관계가 점점 깊어졌다. 취희는 우리나라 진사(進思) 각간의 딸 인덕(仁德)을 아내로 맞아 질지(銍知)를 낳았는데, 곧 (유신)공의 5세조이다.
16. 보종공
16세(풍월주) 보종공(宝宗公)은 또한 미실궁주의 사자(私子)이다. 홍제(鴻濟) 8년(579)에 사 도태후가 친정(親政)을 하였다237). 미실궁주가 새주(璽主)238)가 되어 정(사)당239)에서 문 서들을보다가낮꿈을꾸었는데백양이가슴으로들어왔다.그것이길한꿈임을알고급히 (진평)제(帝)를 끌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240). (진평)제는 나이가 아직 어려서 궁주의 기분 에 따라 주지 못했다. 이에 금하(衿荷) 설원랑(薛原郞)에게 다시 들어가 모시도록 하여 공을 낳았다. 공은 자라면서 모습이 금하와 같았다. 그러므로 (미실)궁주가 금하에게 내려주고 아 들을 삼게 하였다. 궁주는 공이 막내아들이 되기 때문에 매우 사랑하였다. 하종공 또한 공을 도탑게 사랑하였다. (보종)공은 처음에는 (진평)제를 불러 아버지라고 하였다. 자라자 금하에 게 돌아갔다. 제(帝)는 (보종을) 아들로 생각하여 내리는 재물이 심히 많았다.
(보종)공의 성품은 청아하였고 문장을 좋아하였고 ...정이 많았다. 사람들을 위하여 웃고 울 었으며, 온화함과 순량함은 마치 부녀와 같았다. 사람들이 병들어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 슬 프고불쌍하게여기는것이마치자기가아픈것같았다.새와짐승에대해서도또한그러하 였다.한마리의벌레나한포기의풀도해친적이없었다.선과악,이(利)와해를나누지않았 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늘 작은 청려(靑驪)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며 시가를 지나가 면 사람들이 공을 가리켜 ‘진선공자(眞仙公子)’라고 하였다. 얼굴은 관옥과 같았고 손은 마치 하얀 새싹241)과 같았다.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인물과 산수의 절묘함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 다.호림이사랑하여부제로삼았다.정이마치부부와같아스스로여자가되어섬기지못하 는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궁주가 일찍이 그 바라는 바를 물었더니, 공이 답하기를 “어머니와 더불어 같이 죽는 것입니 다.”하였다.궁주가웃으며“네가색은좋아하지않고나와같이죽기를원하니,또한무슨뜻 인가?” 하였다. 공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무도 어머니만 못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살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궁주가 말하기를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없는 까닭에 오로지 어미 에게정을쏟는것이다.아름다운사람을택하여살아야한다.그렇지않으면내가어찌손자 를 볼 것인가?” 하였다. 공이 “무엇을 아름답다고 합니까?” 하자, 궁주가 “너와 같은 사람이 아름답다. 얼굴은 옥과 같이 아름답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눈은 아리땁게 빛나고 말에는 정(情)의 뿌리가 있는 자이면, 또한 가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정의 뿌리는갈래가많고,아리땁게빛나는것은속기쉽고,붉은연지와옥과같은아름다움은몸 을 지키는 보배가 아닙니다.” 하였다.
(미실)궁주는 이에 윤궁(允宮)의 딸 현강(玄剛)에게 (보종)공을 모시도록 하였으나, 공은 접촉 한일이없이호림공을불러함께살았다.호림공은이에현강과통하여딸계화(桂花)를낳았 다. 공은 이에 현강을 호림공에게 넘겨주고 스스로 아내를 맞지 않았다. 궁주가 근심을 하여 종실의 여자(宗女)들을 모아 말하기를 “나의 아들과 친할 수 있는 사람은 상을 주겠다” 하였 다. 종실의 여자들이 다투어 공을 재미있게 해주려 하였으나 모두 이루지 못하였다. 보명궁 의 딸 양명공주(良明公主)가 꾀를 내어 공을 유혹하여 통하였다. 공이 비로소 여색을 알게 되 었다. 궁주가 크게 기뻐하여 이에 양명에게 큰상을 주었다. 보라(宝羅)와 보량(宝良) 두 딸을 낳고는 또한 가까이 하지 않았다.
공은 화랑이 되어 낭두를 아재비(叔)라 불렀고 한번도 그 차례242)를 바꾸지 않았다. 염장공 을부제로삼았는데오히려형과같이섬겼다.얼굴이늘어린아이와같았다.늘콩죽을먹고 고기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정원의 여러 종류의 고목을 보고 물고기 를 기르고 학을 기르며 그 사이를 거닐었다. 유신공을 엄한 아버지와 같이 두려워하였다. 유 신공이 웃으며 “형이 어찌 제(弟)를 두려워합니까?” 하자, 공이 말하기를 “(유신)공은 바로 천 상의 일월이고 나는 곧 인간의 작은 티끌입니다. 감히 두려워하고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 니까?” 말하였다. 드디어 풍월주의 위(位)를 물려주었다. 유신공이 낭도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선(仙)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보종형공(宝宗兄公)을 따라야 하고, 나라를 지켜 공을 세우려면 마땅히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 하였다. 미실궁주가 일찍이 유신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의 아들은 어리석고 약하니 도와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유신공이 말하기를 “신 이 실로 어리석습니다. 형은 비록 약하나, 그 도(道)는 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미 실)궁주가 죽자(薨), 공은 스스로 더불어 따르지 못한 것을 죄로 생각하여 문을 잠그고 홀로 거처하며 궁주가 쓴 수기(手記) 7백 권을 베껴 집에 간직하였다. 또한 궁주의 초상을 그려서 걸고 아침 저녁으로 절하였다.
역대 상선들의 모임에서는 번번이 아랫자리에 앉아서 오직 “예”, “예” 할뿐이었다. 그러나 우 주의 진기(眞氣)를 깊이 살펴서 어조(魚鳥)와 화목(花木)이 끊임없이 생기는 이치에 정통하 지않은것이없었다.유신공이병이나자공이문득몸소치료하며“우리공은국가의보배 이니 나의 의술을 숨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로써 그가 편작(扁鵲)243)의 학(의학)을 갖추 었음을 모두 알게 되었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유신공이 칠성회(七星會)를 열어 반드시 공에게 물었다. 공은 “나는 물 고기와 새의 벗으로 국사를 어찌 알겠습니까. 오직 여러 공을 따를 뿐입니다.” 하였다. 그러 나유신공은(보종)공의한마디를중하게여겨묻지않는적이없었으니,공의덕또한크다.
어조(魚鳥)의 벗으로 천리를 달관하니, 말없이도 교화하고 도모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적송 (赤松)244)의 아들은 오직 공뿐이다.
부계(父系)는 설원 조에 상세하고, 모계(母系)는 세종 조와 미생 조에 상세하다245). 17. 염장공
공은 건복(建福) 병오년(586) 생이고 신사년(621)에 (화)랑주가 되었다. 태화(太和) 원년 무신 년(648)에 죽었다. 나이가 63세였다246).
17세 (풍월주) 염장공(廉長公)은 천주공(天柱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도태후(知道太后) 이다. 그러므로 공은 용춘공(龍春公)의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가 된다. 공은 풍채가 좋고 말 을 잘하였으며, 무리를 다스리고 윗사람을 잘 섬기는 재능이 있었다. 지도태후가 공을 사랑 하여 용춘공에게 맡겨 호림공에게 속하게 하였다.
그 때 공은 나이가 14살로 보종공보다 6살이 적었으나, 준수하기는 대체로 비슷하였다. 공은 보종공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자원하여 그의 아우(弟)가 되었다. 보종은 형으로 처신하지 않고오히려공을형처섬겼다.공의말을들어주지않는것이없었고정은마치부부와같 았다. 호림공이 풍월주가 되자, 보종공이 부제가 되었고 공은 전방대화랑이 되었다. 그 때 나 이 18살이었는데, 용기와 힘이 있어 능히 무리를 복종시킬 수 있었다. 키가 이미 보종공보다 커서 보종공을 아이처 늘 업어 주었다. 보종공이 유신공에게 양위를 하자247), 염장공이 홀 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종공을 보호하려 하였다. 호림공이 곤란하게 여겼다. 미실궁주가 이 에 염장공을 불러 달랬다.
유신공이 풍월주가 되자 보종을 좌방대화랑으로 삼고 염장공을 부제로 삼고자 하였다. (염장) 공이 보종공을 힘써 추천하여 부제가 되게 하고 스스로는 좌방대화랑이 되었다. 보종공은 일 을본적이없고,공이모두대행하였다.
보종은 내사248)에 욕심이 없었다. 양명(良明)과 결혼시켰는데, 염장공과 혼거하여 아들 장 명(長明)을 낳았다. 하종공의 딸인 하희(夏姬)가 보종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여러 차례 와서 유혹하였다. 보종이 말하기를 “만약 우리 염장과 좋아한다면 나 또한 더불어 좋아할 것이다.” 하였다. 하희는 이에 공에게 시집가서 하장(夏長) · 윤장(閏長) · 춘장(春長)을 낳았는데, 모두 귀하게 되었다.
보종공이 풍월주가 되자 공이 부제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풍월주 역할을 하였다. 그 때 나이 가 31살이었는데, 중망(衆望)을 널리 얻었다. 보종이 1년이 안되어 물려주려 하였다. (염장)공 이 웃으며 “내가 실제로는 풍월주 역할을 하고 있는데 어찌 반드시 물려주려 하십니까?” 하 였다. 보종은 이에 그만 두었다.
공은 부제로 6년간 있었고 풍월주로 6년을 있었기에 전후 11년간 실제로 낭정(郎政)을 주관 하며 3파를 화합시키는데 힘쓰고 서로 교혼을 시켜 마침내 동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낭권(郎 權)의큰것은모두가야파에게돌아가고진골과대원은모두그안에서소멸해버렸으니,또 한 운명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공의 외척과 처족들이 일을 사사로이 청탁하여 3파 낭두의 딸들을 모아 첩으로 삼았기 때문 에 서자가 매우 많았다. 보종공의 집안일을 보아주고 그 재물을 취하여 사용하였다. 유신공 의 부제로서 춘추공을 부제로 삼아 그 지위를 넘겨주었다.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칠숙(漆 宿)의 난을 다스리고, 공으로 발탁되었다. 선덕이 즉위하자, 들어가 조부(調府)의 령249)이 되 어 유신과 춘추에게 재물을 공급하여 주었고 또한 사적으로 치부를 하였다.250) 그 때 사람들 이 공의 집을 가리켜 수망택(水望宅)251)이라 하였다. 금이 들어가는 가는 것을 바라보면 홍 수와같은것을말한것이다.세상에서는공을미생공과비교한바있는데미생은극도로사 치를 하였으나 공은 검약을 몸소 실천하였으니 그 부유함이 미생공보다 훌륭하였다.
소 검소하여 부유하였고 (보종)공에게 충성스러웠고 칠성(七星)과 교유하여 힘을 다하여 찬 동하였다. 통일의 업적이 실로 공에게 힘입었다.
아버지 천주공은 진흥대제의 아들이다. 그 어머니는 월화궁주(月華宮主)로 가야 이뇌왕(異 腦王)의 딸이다. 곧 우리 양화공주(兩花公主)의 딸이다. 진흥의 소비로 들어가 천주공을 낳았 다. 커다란 도량이 있어 가야파가 여러 차례 추대하려 하였으나 파가 달라 허락받지 못하였 다. 지도태후가 홀로 되어 신제(新帝)252)를 섬겼는데, 총애가 쇠하자 천주공에게 시집가서 공의 형제 3인을 낳았다. 모두 천주(天柱)의 풍모를 지녔다. 모계는 용춘공조에 상세하다.
18. 춘추공
18세 (풍월주) 춘추공(春秋公)은 우리 무열대왕이다. 얼굴이 백옥과 같고 온화한 말로 말을 잘하였다. 커다란 뜻이 있었고 말이 적었으며 행동에는 법도가 있었다. 유신공이 위대한 인 물로 여겨 받들어 군(君)253)으로 받들었으나, (무열)왕이 사양하여 부제가 되었다. 유신공이 퇴위하였으나 보종과 염장 양 공이 있었기에 왕은 양보하여 기다렸다. 이에 이르러 풍월주 에 오르니 보령이 24살이었다. 유신공의 누이인 문희(文姬)를 화군(花君)254)으로 삼아 장자 인 법민(法敏)을 낳았는데 곧 우리 문무제(文武帝)이다.
이에 앞서 문희의 언니 보희(宝姬)가 서악(西岳)에 올랐는데 큰물이 경성에 가득한 것을 보고 불길하다고 생각하였다. 문희가 비단치마로 바꾸었다. 그 후 열흘 만에 유신이 공과 더불어 집 앞에서 축국(蹴鞠)255)을 하였는데 곧 정월 오기일(午忌日)이었다. 유신은 일부러 공의 치 마(裙)를 밟아 옷섶의 옷고름을 찢었다. 들어가서 꿰매기를 청하니, 공이 따라 들어갔다. 유신 이보희에게시키고자하였는데병때문에할수없어서문희가이에나아가바느질을하여 드렸다. 유신은 피하고 보지 않았다. 공이 이에 사랑(幸)을 하였다. 1년쯤 되자 임신을 하였다. 그 때 공의 정궁부인(正宮夫人)인 보라궁주(宝羅宮主)256)는 보종공의 딸이었다. 아름다웠으 며 공과 몹시 잘 어울렸는데, 딸 고타소(古陀炤)257)를 낳아 공이 몹시 사랑하였다. 감히 문희 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하였다.
유신은이에장작을마당에쌓아놓고막누이를태워죽이려하며임신한아이의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었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 때 공은 선덕공주를 따라 남산에서 놀고 있었 다. 공주가 연기에 대하여 물으니, 좌우에서 고하였다. 공이 듣고 얼굴색이 변하였다. 공주가 “네가 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느냐?” 하였다. 공은 이에 ...하여 구하였다. 포사(鮑祠) 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얼마 안 있어 보라궁주258)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문희가 뒤를 이어 정궁(正宮)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화군(花君)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 보희는 꿈을 바꾼 것을 후회하여 다른 사람에 게 시집을 가지 않았다. 공은 이에 첩으로 삼았는데 아들 지원(知元)과 개지문(皆知文)을 낳 았다. 이 이야기는 『문명황후사기(文明皇后私記)』에 나온다. 풍월주로 4년간 있었는데 부 제 흠순공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곧 유신공의 포제(胞弟)이다. 왕의 대업은 사책(史冊)에 있 어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세상을 구제한 왕이고 영걸한 임금이다. 한번 천하를 바로 잡으니 덕이 사방을 덮었다. 나아 가면 태양과 같고 바라보면 구름과 같다.
아버지는 용수공으로 금륜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으로 진평대제의 딸이다. 천명 의 어머니는 마야(摩耶)인데 복승공(福勝公)의 딸이다.
19. 흠순공
19세 (풍월주) 흠순공(欽純公)은 유신의 동생이다. 처음에 염장공의 부제가 되었는데 유신공 의 명으로 춘추공에게 양보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풍월주의 위에 이르렀다. 그해에공의아버지서현공과형유신이낭비(娘臂)를쳐서큰공을세웠다.공은분연히말 하기를“나로하여이같은빈그릇만지키라고하니장차무엇이될것인가?나도또한지금 부터 나갈 것이다.” 하였다. 대개 그 때 사람들이 공세우기를 좋아하고 선도(仙道)를 탐구하 지 않았는데, 공 또한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로써 (흠순)공의 재위 4년 동안 한결같이 낭정(郎政)을 돌보지 않고 낭도를 거느리고 지방 에 머물었다. 부제인 예원공(禮元公)259)이 낭정을 대행하였다. 공은 이에 예원공에게 물려 주며 “실제로 (낭정을) 행하는 사람이 풍월주가 되어야 한다.” 하였다. 공은 성품이 활달하였 고, 청탁에 구애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유신공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였으나 공은 홀로 그러지 않고 “어리석은 형이 어찌 두려운가?” 하였다. 그러나 유신공의 우애는 지극히 돈독 하여 공을 마치 어린아이처 사랑하였다.
(흠순)공은 나이 18살에 전방화랑(前方花郞)이 되어 상선(上仙)을 두루 배알하였다. 나의 보 리(菩利) 할아버지260)를 찾았을 때 예원공의 서자(庶姊)인 보단랑주(菩丹娘主)는 바야흐로 나이가 16살이었고 예원공은 9살이었다. 공은 보리 할아버지를 정자 위에서 배알하고, 보단 이 예원공을 데리고 정자 아래 연못가에 있었는데, 그윽한 아름다움이 마치 신선과 같았다. 공은곁눈으로오랫동안보다가갔다. ...수일만에와서보리할아버지를만나뵙고사위가 될것을청하였다.보리할아버지는그...을장하게여겨...하며말하기를“남자가삼가야할 것은색이다.네가나의딸을사랑하되다른여자들을많이거느리지않는다면곧줄수있고, 그렇지아니하면줄수없다”하였다.공이맹세를하였다.보리할아버지는이에보단을공 에게 시집보냈다
보단은보리할아버지의풍모가있어재능과아름다움이남이따를수없이뛰어났고미덕 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흠순)공은 기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모두 보단의 의견을 듣고 결정을 하였다. 일곱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아름답고 용감하며 아버지를 닮아서 집에 돌아오면 단란하고 화목한 분위기가 있었다. 공은 늘 사람들 에게일러말하기를“내가능히국(國)과가(家)를위하여공을세울수있었던것은나의처 가뒤에서도운때문이다.”하였다.유신공은큰일이있으면집에들어가지않고문을그냥 지나갔는데, 공은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집에 이르러 낭주(娘主)와 이야기를 하고 나서 갔다. 공은 늘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지방에 많이 있었는데 낭주는 원망하지 않고 집에 있으 며 기도 드렸다. 집에 돌아오면 한집안 식구들이 떠들며 좋아하였다.(흠순)공은 젊어서 술을 즐겼다.낭주가친히술을빚어다락위에두고드렸다.하루는공이술을찾자낭주가다락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았다. 공이 이상하게 여겨 다락에 올라가니 큰 뱀이 술독에 들어가 취하여 있었고 낭주는 놀라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공은 이에 낭주를 업고 내려왔 다. 마침내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보리할아버지가듣고“처를사랑함이이와같으면곧둘째딸을주어도좋다”하였다.이에 낭주의동생인이단(利丹)을또공에게시집보내어세아들과두딸을낳았다.형제가한지아 비를 섬긴 까닭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은 집에 있으면 오직 좋은 아버지가 되어두낭주및자녀들과노는것이마치어린아이와같았으니,그가삼한의대영걸인줄누 가 알겠는가? 전쟁에 임하면 초목이 모두 떨고 집안에서는 닭과 개가 모두 업신여긴다고 한 것은공을두고한말이다.
공은 재물에는 어두워 늘 염장공에게 구하였다. 염장공은 웃으며 “네가 나를 곳간으로 삼는 데 나의 아이를 기르지 않는다면 나는 손해이다.” 하였다. 공은 이에 여러 아들에게 염장공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여, 그 딸들이 염장공의 재산을 나누어 시집오게 하였다. 보단은 “염(장 공)형은색을좋아하고재물을탐하니그딸을맞으면가풍을상하게될까염려됩니다.”하 였다. 공은 “색을 좋아하는 것은 성품이다. 나 또한 그대가 없었다면 곧 염형261)과 같았을 것 이다.내가재물을탐했다면곧집이부유해져서그대로하여금고생을하지않게했을것이 니, 호색탐재(好色貪財) 또한 할만하지 않는가?” 하였다. 보단은 막을 수 없었다. 그(염장공) 의딸은과연행실이없었다.공또한심하게책망하지않았다.
공의 셋째 아들만이 홀로 (염장공의 딸)을 버리고 유신공의 딸 영광(令光)을 아내로 맞아 아 들인 영윤(令胤)을 낳았으니 그가 곧 반굴공(盤屈公)이다262). 부자가 마침내 전쟁에서 죽었 으니, 아름다운 이름이 백세에 남을 것이다. 넷째 아들 원수(元帥), 여섯째 아들 원선(元宣)은 모두 중시(中侍)가 되었는데 보단의 소생이다. 아홉째 아들 원훈(元訓) 또한 중시였는데 곧 이단(利丹)의 소생이다. 모두 공의 음덕이 이룬 것이다.
공은 여러 차례 대전을 거쳤으나 패한 일이 없었고 사졸을 사랑하기를 어린아이같이 하였 다. 조정에서는 공을 3보(宝)의 하나로 삼았다. 문무제(文武帝) 20년(680) 2월 보단낭주와 더
불어 함께 천계(天界)로 올라갔다. 나이가 83살이었는데 낭주는 2살이 적었다. 자손이 백을 헤아렸고 조문하는 사람이 만을 헤아렸다. 공경할 만 하지 않은가!
유신의 동생이고 보리의 사위이다. 하늘을 뒤집는 큰 공은 좋은 짝을 얻는데서 비롯되었다. 오직 공의 덕은 만세에 이르리라.
20. 예원공
20세 (풍월주) 예원공(禮元公)263)은 보리공의 아들이다. 흠순(欽純)을 따라 화랑이 되었다. 염장공이 풍월주가 되자 흠순공이 부제가 되어 공을 전방화랑(前方花郞)으로 삼았다. 성품이 단아하고 따뜻하고 자상하였다. 자신을 굽혀 다른 사람보다 낮추었고 도로써 자신을 다스렸
다. 낭도들이 축하하여 “과연 이화(二花)의 손자264)입니다” 하였다. 흠순공을 섬기기를 같은 배에서 난 형처를 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흠순공이 풍월주가 되자 부제로서 (낭정을) 대행하여 폐정을 많이 개혁하였다. 가야파의 옳 지 않은 자들이 진골(정통)을 부흥하는 일이라 하여 비방을 하였다. (예원)공이 스스로 물러 나려하자흠순공이노하여그무리를내쫓고말하기를“부제는곧내몸이다.어찌나와조 그마한 차별이라도 있겠는가? 또한 지금 천하가 한집이 되었는데 어찌 진골과 가야가 있겠는 가?” 하였다. 이에 진골정통의 옛 낭두(郎頭)들을 대거 진출시켜 등용하였다.
가야파의 낭두들이 염장공에게 많이 모여 간절히 구원을 청하였다. 염장은 이에 (예원)공을 청하여 술을 내리며 위로하여 말하기를 “듣건대 네가 나이가 어리나 낭정을 잘 한다고 하니 기쁨을금할수없다.”하였다.그때가야파의많은낭두들이당하에서모시고있었는데염 장공이 그들을 가리키며 “이 무리들은 모두 내가 거느리는 바이다. 나를 믿고 너에게 불순하 니 죄를 마땅히 엄히 다스려야 한다. 너는 심한 자를 매로 다스려야 마땅하다.” 하였다.
(예원)공은 “순종하지 않는 자는 없으며 신 또한 (처벌)265)할 뜻이 없습니다. 단지 주형(염장 공)이 노하도록 말을 만든 것이 누차 귀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형의 노함이 조금 가라앉으 면곧신은마땅히모두제자리에임명할수있을것입니다.”하였다.염장공이웃고공의등 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진실로 나의 좋은 아우이다. 나는 이미 선종(仙宗)266)이 보통 풍월 주들과같지않다는것을알고있다.낭도들은본래너의집의무리(物)이니어찌파가있겠느 냐? 이 무리가 고르게 너의 노(奴)들이니 또한 걱정이 되겠는가?” 하였다. 낭두들이 모두 머 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죽을죄를 지었다며 부주(副主)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 였다. 공이 “너희들은 죄가 없는데 쫓겨났다. 내가 그 억울함을 알았으니 각자 돌아가서 기다 려라.” 하였다. 낭두들이 기뻐하며 물러났다.
염장공 또한 크게 기뻐하며 (예원)공에게 술을 억지로 권하며 “첩으로 삼을만한 어리석은 딸 들이 있으니, 네가 택해 보아라.” 하였다. 곧 서녀(庶女) 세 사람을 나아가 공에게 절하게 하였 다.공은사양하며말하기를“신의어머니가매우엄하여감히스스로택할수없습니다.”하 였다. 염장공이 칭찬하며 “이 같은 아들이 있으니 어머니는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곧 세 딸에게명하여손수만든옷을공에게바치고애교를부리게하였다.공이감히거절하지못 하고 거두어 돌아왔다. 모두가 염장공의 첩인 가야파 낭두의 딸들의 소생이다. 염장공은 17 명의 첩이 있었다. 진골정통파가 5명, 대원신통파가 4명, 가야파가 8명이었으며 모두 낭두(郎 頭)의 딸이었는데, 서로 총애를 다투어 구걸하였다267). 예원공이 여러 차례 염장공의 부름을 받고 당(堂)에서 배알을 하면 염장공은 첩을 품고 앉아서 “누구(某)는 실은 이 첩의 형이다. 너는 나를 위하여 (그를) 보호하여 주기 바란다. 나는 장차 첩들 때문에 곤란하여 고생하다가 죽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본래 사사로움이 없는데 첩들이 그냥 두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하 였다. 공은 따듯한 말로 사정을 아뢰어 올리고 물러났다.염장공은 공이 나가는 것을 보고 그 첩에게 말하기를 “예원은 비록 어리나 의리가 있다. 너희들은 나를 강요하여 체면을 잃게 하 지 말라.” 하였다. 첩들은 (예원)공이 어머니에게 효성스러운 것을 알고 값비싼 뇌물로 공의 어머니인 만룡랑주(萬龍娘主)에게 잘 보이려 하였다. 만룡 또한 모두 어루만지고 순종케 하 는데 마음을 씀이 실로 많았다. 만룡은 평소에 미실의 딸 난야궁주(蘭若宮主)와 잘 지냈다. 그 딸 우야공주(雨若公主)는 진평제의 소생인데, 만룡은 공에게 아내로 맞을 것을 명하였다. 공 또한그아름다움을사랑하여서로화합한것이마치아교나옻으로붙여놓은것같아서268) 첩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염장공이 그 딸을 첩으로 삼아주기를 너무 절실히 원하였으 므로, 서로 사이가 나빠질까 염려하여 만룡이 취하기를 권하였고, 우야 또한 권하였다. 공은 부득이 염장공의 딸 찰기(察己)를 첩으로 삼았다. 곧 가야랑두(加耶郞頭) 찰인(察忍)의 딸의 소생이다.만룡이그예의바른태도를보고...정하였다.
공의 부제 선품공(善品公) 또한 미실궁주의 딸인 보화(宝華) 공주의 소생이다. 보화는 난야와 어머니가 같고 우야와는 아버지가 같다. 그러므로 (진평)제(帝)가 (예원)공을 사랑함이 유달 리심하였다.공은선품보다2살이많았다.뜻과취향이서로맞아마침내형제가되었다.은 혜와 사랑함이 날로 두터워지자 문득 끌어들여 화제(花弟)로 삼고 거취를 같이 하였다. 선품 은 대원신통파인 까닭에 낭도 중에 간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정색을 하며 거절하였다. 공 이 풍월주가 되자 끌어들여 부제로 삼았다.
그 때 가야파인 진주공(眞珠公)이 오랫동안 左方(화랑)으로 있었으나 풍월주가 되지 못하였 는데, 어떤 자가 그에게 물려줄 것을 권하였다. (예원)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진주(眞珠)는 나 의형이다.어찌 형에게 동생에게 하는 것처럼 물려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진주는 이에 화랑을 물러나 병부(兵部)에 들어갔다269).
공과 선품은 더불어 낭정을 수행하였는데, 3파를 균등하게 등용하여 중망(衆望)을 크게 만족 시켰다. 선도(仙道)는 보종을 따르고 무도(武道)는 유신을 따랐다. (예원공은) 풍월주에 3년 간 있다가 선품공에게 물려주고 예부로 들어갔다가 조부(調府)로 옮겼다. 선덕대왕(善德大 王)이 총애하여 내성사신270)으로 발탁하였다. 대왕이 붕하자 물러나 양진(養眞)271)을 하였 다.그 때 춘추공이 장차 당나라에 들어가려 하여 문장을 잘하고 풍채가 좋은 사람을 선발하 려 하였다. 선화(仙花) 3인, 승려(僧侶) 3인이 따라 가기 때문에, 그들을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 면 마땅한 사람을 선발할 수 없었다. 흠순공(欽純公)이 “우리 예원이 아니면 누가 그것을 감 당하겠는가?” 하였다. 춘추공이 크게 기뻐하며 선발하였다. 공은 한가롭게 있으려 하여 사양 하였다. 춘추공이 말하기를 “이 같은 유사시에 어찌 한가로이 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이에 따랐다. 조정에서는 당나라 사람들이 색을 좋아한다고 하여 유화(遊花) 3인을 뽑아 꾸며 태우고 거짓으로 종실의 여자라고 이르게 하였다. 공이 “색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도 도가 아닌데 하물며 골품(骨品)을 속이는가272)?” 하며 따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도중에 풍랑을 만났는데 뱃사람이 여자를 바다에 빠뜨리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공이 막으며 “인명은 지극히 중한데 어찌 함부로 죽이겠는가?” 하였다. 그 때 양도(良圖) 또한 선화(仙花) 로서 같이 배를 타고 있었는데, 다투어 말하기를 “형은 여자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주공(主 公)273)을 중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만약 위험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침착하게 말하기를 “위험하면 함께 위험하고 안전하면 함께 안전하여야 한다. 어찌 사람을 죽여 삶을 꾀하겠는가?” 하였다. 말을 마치자 바람이 고요하여졌다. 사람들은 해신(海神)이 공의 말을 듣고 노여움을 풀었다고 생각하였다.
당나라에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은 공이 원광의 조카로 문장을 잘한다고 존중하였다. 유향(柳 享)이 신선(神仙)의 도에 대하여 물었다. 공은 보종(宝宗)이 그 도를 능히 얻었다고 답하였다. 또한 연서(燕書)에 대하여 물었는데, 공이 암송하여 주었다. 또 우리나라의 혼인하는 도274) 에 대하여 물으니, 공이 신의 뜻에 따른다고 답하였다. 어떠한 신이 시조냐고 묻자, “일광의 신이다.” 하였다. 유향(柳享)이 말하기를 “일광과 금천씨(金天氏)275)가 같은가?” 하였다. 대 개전에왔던사신이우리나라에서금천씨를조상으로삼는다고한때문일것이다.공이말 하기를 “금천 씨가 어떻게 신이 되겠는가?” 하였다. 유향이 답을 할 수 없었다. 당나라의 재상 이 묻기를 “너희 나라와 백제는 서로 혼인을 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서로 다투는가?” 하였 다. 공이 말하기를 “백제가 고구려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우리나라가 군대와 땅을 빌 려주어 보호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에게 신하로서 의지하였는데, 점차 안정이 되자 도 리어 우리 땅을 침범하였다. 또한 가야는 본래 우리의 부용국이었고 지금은 이미 우리나라 에들어왔는데,백제가그서쪽땅을빼앗고돌려주지않는다.대개탐욕스고도가없다.그 러므로 천병(天兵)을 얻어 토벌코자 한다.” 하였다. 묻기를 “너희 나라에서 건원하고 칭제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멀리 상고(上古)부터였다. 먼저 온 사신이 법흥 왕부터 시작되었다고 대답한 것은 단지 문자사용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가야가 너희 나라를 부용국으로 삼았는지 너희 나라가 가야를 부용국으로 삼았는지 어느 것이 옳으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한(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기원전 57)에 섰 고, 가야는 한(漢) 광무(光武) 건무(建武) 18년(기원후 42)에 섰으니, 누가 옳은지 알 수 있다 276).” 하였다. 당나라의 재상이 그렇게 여겼다.
돌아올때당나라사람들은유화가말이통하지않고풍토에익숙하지못하기때문에비록 아름다우나 살수가 없다고 하였다. 유화도 함께 돌아오려 하였다. 종자가 그들을 버리려 하 였다.공이“부모와형제가있는데어찌버릴수있는가?”하였다.도중에적병이있는곳을 지날 때 온군해(溫君解)로 하여금 기신(紀信)의 계책277)을 쓰게 하여 벗어났다.
공으로 작(爵)이 오르고 다시 품주(稟主)가 되었다가 2년 후 예부의 영(令)으로 나갔다278). 이어 이부(理府)의 영(令)이 되었다. 여러 차례 요직에 있었으며 품(品)이 이찬(伊湌)에 이르 렀다. 문무제 13년(673) 집사부(執事部)의 대등(大等)279)(또는 위화부 금하)으로 있으며 관 아에서 죽었다(卒). 나이가 67살이었다. 제(帝)가 슬퍼하여 상대등(上大等)의 예로서 장사를 지내 주었다. 오호! 성인은 진실로 수를 누리지 못하는구나. 공의 덕으로서도 상수(上壽)를 누리지 못했으니, 애석하도다! (예원)공은 우리나라의 혼인의 도를 부끄게 여겨 신의 뜻에 따른다고 대답하고 돌아와 의논하여 고치려 하였으나 관습이 오래되어 고치기 어려웠다. 항 상 걱정하였다. 자손들에게 다시는 나쁜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공의 아들인 오 기공(吳起公)이 4촌 누이 운명(雲明)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공이 노하여 보지 않았다. 흠순공 이 웃으며 말하기를 “선품의 딸이니 네가 마땅히 자식으로 여겨야 하는데 도리어 노여워 하 니무슨일인가?산자는불안하고죽은자는원망할것이다.네가그것을살펴야한다.”하였 다. 공은 부득이 허락하였다. 운명은 곧 대문(大問)의 어머니이다280). 대문을 낳자 공은 기뻐 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뜻이구나. 아니면 선품이 이 손자를 점지하려고 너희들을 사랑에 빠 지도록 하였느냐?” 하였다. 마침내 다시는 혼도(婚道)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예원)공의 딸인 온희(溫喜)는 춘장공(春長公)에게 시집갔고, 성희(星喜)는 원수공(元帥公)에 게 시집갔고, 우희(雨喜)는 마차공(摩次公)에게 시집갔다. 서녀(庶女)는 찰희(察喜) · 찰연(察 燕) · 찰미(察美) · 찰해(察亥)이다. 서자(庶子)인 찰덕(察德) · 찰원(察元)은 모두 출세를 하였 다.
선화의 으뜸이요 문장이 뛰어났다. 청빈한 호덕(好德)을 나라를 위하여 다 바쳤네. 신선을 물 으려 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이며, 성현을 물으려 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인가.
아버지는 보리 사문이고 어머니는 만룡낭주이다. 만룡의 아버지는 정숙태자이고 어머니는 만호태후이다. 정숙의 아버지는 진흥대제이고 어머니는 숙명공주이다.
21. 선품공
21세 (풍월주) 선품공(善品公)은 구륜공(仇輪公)의 아들이다. 예원공을 따라 화랑(도)에 들어 갔다. 용모가 절묘하고 언행이 매우 아름다웠다. 문장을 좋아하고 선불(仙佛)을 통달하였으 니 진실로 높은 골품의 인물이다. 예원공이 누이 보룡(宝龍)을 처로 삼게 하여 풍월주의 지위 를 물려주었다. 공은 4년간 풍월주로 있으며 한결같이 예원공의 제도를 따랐다. 부제 양도공 에게 (풍월주를) 전하여 주고 예원공을 따라 내성(內省)에 들어갔다가 얼마 후 예부의 관직을 가졌다. 인평(仁平) 10년(643)에 왕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병을 얻어 돌 아와서 곧 죽었다(卒). 나이가 35살이었다.281) 왕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작을 아찬(阿湌)으 로 올렸다.
후에 (선품)공의 딸 자의(慈義)가 문무제의 후(后)가 되자 파진찬(波珍湌)으로 추증하였다. 공 의 차녀 운명(雲明)은 예원공의 아들 오기(吳起)에게 시집을 갔다. 3녀 야명(夜明) 또한 문무 제를 섬겨 궁주(宮主)가 되었다282). 외아들 순원(順元)은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처음 공이 죽고 보룡(宝龍)이 혼자 살았다. 그 때 문명태후가 선원전군(仙元殿君)을 낳고283) 보룡에게 젓을 먹여줄 것을 청하였다. 문무제가 이로서 보룡의 아름다움을 보고 좋아하였 다. 보룡이 제(帝)에게 장녀를 허락하고 스스로 여승이 되었다. 제(帝)가 애석하게 여겼다.
문무가 태자가 되자 보룡의 딸 자눌(慈訥)을 비(妃)로 삼아 궁(宮)을 세워(立宮) 자의(慈義)라 하고284), 보룡(宝龍)에게 명하여 입궁(入宮)하여 감(監)이 되도록 하였다. 순원(順元)285)은
이로써 궁중에서 자랐으며 선원(仙元)286) · 당원(幢元)287) 전군과 더불어 같은 예로 작이 올 라가니 영화와 행운이 지극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일러 공의 음덕의 공을 누린 것이라 하였 다.
보화의 아들이고 진흥대왕의 손자이다. 녹이 있으나 받지 않아 복이 자손에 미쳤다. 아버지는 구륜이고 어머니는 보화이다. 구륜의 아버지는 진흥이고 어머니는 사도이다. 보화
의 아버지는 진평이고 어머니는 미실이다.
22. 양도공
22세 (풍월주) 양도(良圖)는 모종공(毛宗公)의 아들이다. 선품공보다 한 살이 적었다. 처음 염 장공을따라화랑이되었다.나이겨우12살에상하의예를알았다.흠순공때에이르러예원 공에게 속하도록 명하였다. 선품공이 풍월주가 되자, 예원공의 명으로 부제가 되어 선품공을 섬겼는데 힘을 다하여 받들고 순종하였다. 풍월주가 되자 전횡이 많아 당시 사람 중에 칭찬 을하지않는사람이많았다.공의성품은사람섬기기를잘하고일의추이에밝았다.부처를 숭상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공명(功名)을 중히 여겼다. 문장을 잘하였고 격검에 능하였다. 늘 강개하여 천하를 말하니, 마치 한 세대의 영웅과 같았다. 상선들에게 몸을 굽혀 존경을 표할 때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재롱을 떠는 것 같아서 윗사람들의 기분을 다 맞추었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어머니 양명공주(良明公主)는 진평대제의 딸이다. 제(帝)는 공의 총명함을 사랑하여 늘 궁중에 불러 들여 내사(內賜)288)를 많이 하였다. 공은 스스로 가 지지 않고 번번이 공주에게 바쳐 동기들과 고르게 나누었다. 양명공주는 처음에 미실궁주를 위하여 그의 아들 보종공에게 시집을 가서 딸 (보라와) 보량을 낳았다. 보종공이 내사(內 事)289)를 좋아하지 않아, 부제인 염장공과 통하여 아들 장명을 낳았다. 그 때 보종공의 조카 모종공은 곧 하종공의 아들이었는데, 빼어난 용모에다 재주가 있어 보종공이 자기처 사랑 하였다. 문장과 화법(畵法)을 가르쳤는데, 공주 또한 더불어 같이 배웠다.
하루는 공주가 꿈에 난새의 상서로움을 얻고 길조(吉兆)라 여겨 보종공에게 말하고 보종공을 끌어 당겼다. 보종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길조가 어찌 홀로 나에게만 있느냐?” 하고는 반드 시 누워 자버렸다. 그 때 모종공이 ...옆에서 묵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갑자기 옷이 더혀졌 다. 공주가 이에 이끌어 그 옷을 빨아 주었다. 마침내 더불어 (사랑)290)하여 공을 낳았다. 대 개 보종공이 공주의 마음이 모종공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벼루(硯池)291)를 발로 차서 사랑(好)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모종공은 공주보다 다섯 살292)이 적었다. 공주는 지극히 사 랑하여 아우님(弟公)이라고 불렀다. 공이 태어나자 보종공은 양도(良圖)라고 이름 지으며 말 하기를 “그림은 아우님(弟公)의 아들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공주가 기뻐하여 그 이름을 허락하였다.
공은 어려서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7살에 이름을 지은 까닭을 물었다. 공주가 대답할 것이 없 어 숨겨서293) 말하기를 “네가 그림을 잘 그리기를 바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하였다. 공이 이에 분발하여 힘써 그림을 그렸다. 진도(陳圖)를 잘 그렸는데 병장기가 매우 정밀하였다. 따 라서 일을 하는 것도 몹시 치밀하였다. 마침내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 되었다.
(양명)공주는 보종공을 지아비로 하고 염장공과 모종공을 사신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늘 모종공을 숙공(叔公)이라고 불렀다. 커서는 곧 친아버지인 것을 알고 더욱 존경하고 효를 다하였고 일찍 알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며 효도하였다. 모종공이 말하기를 “너는 실제 로 나의 아들이지만 적(籍)은 선부(仙父)를 이었으니 사랑을 나누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대개 보종공이 공을 사자(嗣子)로 삼은 까닭이다.공은 그러므로 형 장명(長明)을 뛰어넘어 먼 저 낭계(郎階)에 발탁되었다. 공이 그 형을 걱정하여 양보를 하려고 하자, 염장공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집과 나라에는 모두 사자(嗣子)가 있으니,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비록 형에게 우애롭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죄를 얻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장명에게 형으로처신하지않도록타일렀다.장명은이에몸을굽혀공을섬겼다.공은한층더효도를 하고 우애를 다하였다. 염장공을 섬기기를 또한 아버지에 대한 도리로 하였다.
처음에 장명의 손위 누이 보량(宝良)이 진평의 후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아 전군인 보로(宝 路)를 낳았다. 승만후가 질투를 하여 물러나 살 것을 명하고 장차 종신(宗臣)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보량은 평소에 공을 사랑하여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원치 않았다. 공주가 이에 제 (帝)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만약 보량으로 하여금 양도를 배필로 맞게 하면 곧 보종의 혈통을 이은 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제(帝)가 허락하였다. 보종공 또한 원하였다.
공은 본디 동기(同氣)간에 서로 결합(相合)하는 풍습을 싫어하여 따르지 않았다. 보량이 그 때문에병이생겼다.공주가성을내어책망을하니공이부득이말하기를“저는누나를사랑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사람들이 나무랄까 걱정이 됩니다. 제가 오랑캐(夷狄)의 풍속을 따르 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모두 좋아할 것이지만, 중국(中夏)의 예를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가 모두 원망할 것입니다. 저는 오랑캐가 되겠습니 다.” 하였다. 공주는 이에 ... 공을 감싸 안으며 말하기를 “참으로 나의 아들이다. 신국(神國) 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서 하겠느냐.” 하였다. 이에 보량을 처로 삼아 아 들 양효(良孝)를 낳았다.
(양도)공은 보량을 처로서 대우한 적이 없고 섬기기를 더욱 열심히 하였다. 보량이 노하여 말 하기를“너는내가나이가많다고사랑하지않느냐?너와내가같이산지3년이며이같이아 름답고예쁜아들을낳아부모가매우기뻐하고내가너를잠시라도사랑하지않은적이없 는데, 너는 한결같이 나를 누나로서 섬기고 존경한다. 내가 불상도 신상294)도 아닌데 공경은 무엇때문에하느냐?너는듣지못했느냐,백말의공경은한되의사랑만못하다는것을?부 부 사이에 공경은 해서 무엇하겠느냐?” 하였다.
(양도)공이 웃고 보량을 감싸 안으며 위로하여 말하기를 “같은 굴에서 생사를 하는데 어찌 사 랑을하지않을까닭이있습니까?제가듣기를큰사랑은공경하기를신과같이하고작은사 랑은 희롱하기를 옥(玉)과 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큰사랑으로써 그대와 함께 하기를 원 하지 그대를 큰누나로 생각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보량은 이에 스스로 부끄러워 사과하고공을섬기기를임금과같이하며감히외설스런일로써공앞에서희롱하지않고 말하기를 “나의 지아비는 천하의 훌륭한 사람이다. 여자가 되어 이러한 사람을 섬기다 죽으 면 더 큰 영광이 없다.” 하였다. 비록 한겨울이나 한더위에도 반드시 몸소 음식을 조리하여 공의 입맛에 맞추었으며 조그만 아픔과 작은 병도 걱정하며 정성을 다했다. 늘 보도(寶刀)를 지니고 다니며 따라서 죽을 뜻을 품고 있었다.
(양도)공이 풍월주가 되자 스스로 색(色)이 쇠하였다고 생각하여 능보(能宝)를 뽑아 화주(花 主)295)로 삼으려 하였다. 능보는 본디 보량(宝良)의 침비(枕婢)였는데 승진하여 난방(暖房)
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선부(仙父)의 사자(嗣子)로 통(統)을 얻었는데, 진(골정)통이 그대에게 있다. 그대가 화주(花主)가 아니면 내가 어찌 풍월주가 되 겠는가.”하였다.보량은이에기쁘게화주의지위에올라공과더불어축하를받았다.그때 공의 나이는 28살이었고, 보량의 나이는 33살296)이었다. 공은 낭정을 보량에게 많이 맡겼으 나 큰일은 스스로 맡았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화주297)가 집정하였다고 생각하지만 공은 실제로 큰 낭정을 결정하였다.
풍월주가 된 후, 처음에 낭두(郎頭)298) 7급을 9급으로 고쳤다. 국초에 서민(庶民)의 아들들도 준수하면 곧 낭문(郎門)299)에 나아가 (낭)도가 되었다.300) 13·4살에 동도(童徒)가 되었고, 18·9살에 평도(平徒)가 되었고, 23·4살에 대도(大徒)가 되었는데,301) 대도 중 입망자(入望者) 는 망두(望頭)라고 하였다. 공과 재주가 있는 자를 천거하여 신두(臣頭)로 삼았다. 신두는 낭 두가 될 수 없었고, 오직 망두 만이 낭두가 되었다. 대도(大徒)가 30살이 되면 곧 병부(兵部)에 속하거나 혹은 농공(農工)에 종사하는 일로 돌아가거나 향리의 장(長)302)이 되었다.입망(入 望)의 법에는 상선(上仙)과 상랑(上郞)의 마복자(摩腹子)가 아니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낭 두의 처들은 임신을 하면 곧 산 꿩을 예물로 하여 선문(仙門)에 들어가 탕비(湯婢)가 되었는 데,몇날또는몇달만에총애(幸)를얻으면물러났다.물러날때그남편은재물을들여예를 갖추고 맞이하였다. 이름 하여 사함(謝函)이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석 달이 되면 다시 들어가 는데양과돼지를예물로하였으며,또세함(洗函)이라고하였고몇날이나몇달만에총애 (幸)를 받으면 물러났다. 그 남편은 또 사함(謝函)을 하여 맞았다.
이로써 낭두가 아이를 많이 낳으면 곧 그 재산이 기울게 되었다. 경박한 여자는 선문(仙門)에 서놀고자하여임신을하였다고거짓으로칭하고들어가탕비가되었는데임신이안될까 염려하여 선문의 예졸(隸卒)들과 사통을 하였으며, 혹은 선종(仙種)303)을 얻어 돌아가니 폐 단이 더욱 심하였다. 공이 비로소 입망의 법을 개혁하여 인재를 뽑고, 사함의 풍속을 금하였 다. 낭도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처음에는 낭두에 낭두(郎頭)·대낭두(大郎頭)·낭두별장(郎頭別將)·상두(上頭)·대두(大頭)·도두 (都頭)의 등급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공이 그 위에 대도두(大都頭)·대노두(大老頭)를 더하였 다. 도두(都頭) 이하는 각기 별장을 두어 그 벼슬길을 넓혔고 그 지위를 높였다.
낭두의 딸은 모두 선문에 들어갔는데 이름 하여 봉화(奉花)라 하였다. 위304)로부터 총애(幸) 를받지못하면시집을갈수없었다.그러므로다투어청례(靑禮)를하기위하여아양을떨었 다. 총애를 받은 자는 봉로화(奉露花)라 하였고 아들을 낳은 자는 봉옥화(奉玉花)라 하였다. 옥로(玉露)305)가 아니면 낭두에 새로이 오른 자들이 아내로 맞아 처로 삼지 않았다. 대개 처 로 인하여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봉화는 청례를 하지 못하면 선문에서 늙어 예졸들에게 떨어졌다. 공은 이에 청례와 옥로의 폐단을 금하였다.
서민의 딸들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은 낭문(郎門)에 속하여 유화(遊花)가 되었고,306) 30 살이되기전에는집(田舍)으로돌아갈수없었다.공이또한그폐단을바로잡으니향리(鄕 里)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선문(仙門)의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운 자들 중에는 전횡한다고 생각하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염장공이 걱정을 하여 공에게 지 나치게 빨리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공은 직간하여 말하기를 “미생공은 마복자(摩腹子) 가 ...인이었는데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부주(父主)께서는 마복자가 백인이 니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염장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저들이 좋아 요구하였으 니 또한 가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물을 다스리는 것과 같아, 순리대로 하면 되고 서두르면 물이 샌다” 하였다.
그 때 도두(都頭) 세기(世己)의 처 도리(道里)는 어려서부터 아리땁다는 명성이 있었다. 염장 공의두아들을낳고나와서세기의처가되었다.세기보다12살이많았다.세기를노복과같 이보아서그뜻에맞지않으면세기를매질하였는데못하는짓이없었다.세기에게는첩이3 인 있었는데 첩이 아들을 낳으면 도리가 질투를 하고 철기로 세기를 난타하여 세기는 일어나 서낭무(郎務)를볼수없었다.공이노하여도리를잡아다막볼기를치려하는데,도리가 말하기를 “첩의 죄가 비록 중하나 효장(曉長)과 유장(劉長)의 어미입니다. 국법에 선종(仙種)을 낳은 여자가 볼기를 내놓고 매를 맞는 도리는 없습니다”307) 하였다.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너의죄는곤장세대에해당하나너의말때문에곤장세대를더한다”하였다.이에그치마 를 내리고 묶었다. 보량(宝良)이 간하여 말하기를 “염부(廉父)308)가 알면 마음이 상할까 염 려됩니다. 우리들이 어찌 지위로서 사람을 다스리고 도리어 불효에 빠질 수 있겠습니까?” 하 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 사람을 다스리지 않으면 무리(衆)를 징계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세기(世己)를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사람의 지아비가 되어 처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너의 죄는 파면해야 마땅하다. 너의 처를 곤장치려 하였는데 화주(花主)가 중지시켰으니 마땅히 너를 파면함으로써 너의 처를 징계할 것이다” 하였다.
도리는 세기가 파면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첩이 볼기를 맞을 것이니 지아비 를 파면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부부의 의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한다.만약네가세기를나와같이섬기고감히방자한행동을않는다면당연히볼기 맞는것을면하고너의지아비를보호할수있다”하였다.도리가이로서그지아비에게굴복 하여 방자함이 변하여 순종하게 되었고 다시는 첩들에게 강새암을 하지 않았다. 그 밖에 다 른 낭두의 처들도 모두 선(仙)309)을 믿고 지아비에게 방자할 수 없게 되었다. 낭두들이 서로 축하하여 말하기를 “신주(新主)의 덕화가 안방까지 깊이 미쳤다” 하고, 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공은 실제로는 색을 좋아하여 낭두의 처들이 공의 아들을 많이 낳았으며 폐신(嬖臣) 찰의(察儀)가 위로 보량(宝良)을 범하는데도 금하지 않았다. 낭두들이 많이 정으로 사사롭게 높이 올랐다. 낭정(郎政)의 일이 전횡에서 많이 나왔다. 상선(上仙)들이 운상(雲上)에서 의논 을 하고 3파가 막하(幕下)에서 다투었다.
공은이에보량에게“무리를다스리는것은마치파리를쫓고풀을뽑는것과같다.오래지 않아 ...이 없어질 것인데 어찌할 것인가” 말하였다. 보량이 웃으며 말하기를 “낭군은 무리를 다스리는 데는 능하나 스스로는 통제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하였다. 공 또한 웃으며 “누가 나 의 처를 강새암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나는 낭정에서 물러날 것이다” 하였다.
이에 부제인 군관에게 물려주며 말하기를 “너는 능히 장엄하고 정중하여 자제력이 나보다 뛰 어나다” 하였다. 공은 4년간 풍월주로 있으며 오래된 폐단을 개혁한 것이 매우 많으니 어찌 공이 없다고 하겠는가? 공의 사랑하고 미워함은 심히 치우쳐, 마음속에 성이 나면 종신토록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아래 사람들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공이 풍월주에 오를 때 문충(文忠)과 선제(善祭) 등이 모두 부제의 지위를 다투었는데,310) 공이 홀로 염장공의 아 들 윤장(閏長)을 끌어서 부제로 삼았다. 윤장의 누이 춘화(春花)가 공의 애첩이었으므로, 윤 장은 나이가 어리고 경박하여 총애를 믿고 법을 어기기를 여러 번 하였다. 염장공이 명하여 부제를 그만두게 하였다. 문충(文忠)·선제(善祭)·천진(天眞)·하장(夏長) 등이 다시 부위(副位) 를 다투었다. 공이 홀로 군관(軍官)을 끌어서 부제로 삼았다. 여러 상선(上仙)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명을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보현궁(普賢宮)의 사손(嗣孫)이 부제가 되지 못한 다면곧누가될수있습니까?”하고,곧그첩천운(天雲)을군관의처로삼아서뜻을공고히 하였다.
처음에 (양도)공과 더불어 군관의 누나 명란(明蘭)이 사(통)을 하였는데, (양도)공이 이미 보 량을 아내로 맞이하였기에 명란이 장명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장명이 공만 하지 못하여 그 어머니를 원망하였다. 석명은 곧 양명(良明)의 이부형(異父兄)이었다.311) 군관은 이에 장명 을 설득하고 명란을 공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공은 이에 군관을 현명한 사람이라고 여겨 발탁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방하여 말 하기를 “남의 부인312)을 첩으로 삼고, 중매한 자를 발탁하였다” 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군관이침착하고중후하고커다란지략을가지고있어위아래사람을다스릴수있었으니공 의 현명함이 어찌 명란(明蘭)에 구애를 받았겠는가? 이로써 군관은 공을 받들기를 하늘과 같 이하였고,출입할때는반드시서로도왔다.군관은용기가있어전쟁을잘하였기에공의훈 업또한군관의손에서많이나왔다.
일찍이당나라에사신을가다가도중에점장이를만나,점을친즉말하기를“두공은모두장 상(將相)의 운을 가졌습니다. 단 비명에 죽겠습니다” 하였다. (양도)공은 웃으며 “대장부가 말가죽으로 송장을 싸야지 아녀자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당연하다” 말하였다. 공 은 과연 당나라의 옥에서 죽었다.313) 군관은 점이 신통하게 맞는 것을 보고 소심해져서 조심 하였다. 마침내 흠돌(欽突)의 난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자살하였다. 아! 성하고 쇠하고 막 히고 통달하고가 문득 또한 운명이구나!
공은 일곱 (명의) 아들과 ... (명의) 딸이 있었으며 서자녀(庶子女)는 각기 10여명이 있었다. 군관또한공의누이2인을아내로맞아아들18인을두었는데,흠돌의옥사에많이연루되었 다.공의처보량은공이전사한것으로잘못듣고칼로써자결하였다.공의세아들과두딸 은절(沙門)의노비가되었다.대개공의가풍을알수있다.
미실의 후예이고 진평의 손이다. 나라를 지키는 장군(干城)이 되어 공은 하늘과 땅을 덮었다. 어려움에 임하여 몸을 던졌고 만리에서 혼을 불러 장사지냈다. 대인은 기림이 없으니 천지 와 더불어 남으리라.
아버지인 모종의 아버지는 하종(夏宗)이고, 〈어머니는 미모(美毛)이고〉,314) 양부(養父) 보 종(宝宗)의 아버지는 설원이다.
어머니인 양명(良明)의 어머니는 보명(宝明)인데, 지소태후와 침신(枕臣) 구진(仇珍)의 사이 에서 태어났다. 보명은 아름답고 부드러워 향기가 있었다. 세 명의 제(帝)를 섬겼으나 총애가 쇠하지 않았다.
진평제가 즉위하였을 때 나이가 13살이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쳤다. 사도태후가 보 명과 미실에게 명하여 (진평)제(帝)를 도(導)315)하도록 하였다. 미실은 위가 낮고 골이 천하 여 보명에게 상도(上導)를 양보하였다. 보명은 그 때 석명(昔明)을 가진지 3개월이었기에 굳 이 사양하였다. 이에 미실이 먼저 사랑(幸)을 받았다. 제(帝)는 양기(陽氣)가 통하게 되자(通 暢) 스스로 보명궁에 이르러 도(導)할 것을 구하였다. 보명이 감히 어길 수가 없어 사랑(幸)을 받았다. 이 해 9월 (진평)제(帝)는 보명과 미실을 좌우후로 삼았다.
보명은 석명(昔明)을 낳고나서 3년간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양명(良明)을 낳았다. 양명은 보명 을 많이 닮았다. 그러므로 (진평)제(帝)가 매우 사랑하여, 늘 제(帝)의 곁에 있었다. 나이가 20 살이 넘어 비로소 보종공에게 시집을 가서 보량(宝良)을 낳았다. 28살에 모종공과 통하여 공 을 낳았는데, 보배로운 난새로 생각하여 어머니로서의 사랑이 더욱 깊었다. 공 또한 지극한 효성으로 종신토록 명을 어긴 바 없었다.
23. 군관공
23세 (풍월주) 군관공(軍官公)은 동란공(冬蘭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석명공주(昔明公主) 이니 진지제의 딸이다. 양도공보다 세 살이 적었다. 인품이 넉넉하고 후덕한 것이 지소태후 의 전형(典型)316)이 있었다. 15살에 활을 잘 쏘았고 힘이 세서 당할 자가 없었다. 병서를 읽 는 것을 좋아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그릇이 크다고 하였다. 석명이 말하기를 “내가 해마(海 馬)의 꿈을 꾸고 이 아이를 낳았다. 반드시 우리 집의 천리구317)가 될 것이다.” 하였다.
(군관)공은 어려서부터 양도공(良圖公)을 따라 노는 것을 좋아하였다. 석명(昔明)이 일찍이 진평의 후궁으로 있을 때 양명(良明)과 더불어 함께 살며 3생318)의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고 아들을 낳으면 함께 아들로 삼기로 하였다. 이에 이르러 석명이 양명에게 “우리 자매의 마음 을 이 아들이 알았다.” 말하고는 공에게 명하여 양도공과 더불어 삼생형제(三生兄弟)가 될 것 을 약속하게 하였다. 양도공이 위가 오르면 반드시 공을 자기가 있던 자리에 이끌어 앉혔다.
그 때 윤장(閏長) 또한 양도공의 사랑하는 아우(弟)로서 (군관)공과 나란히 경쟁하였는데, 공 은스스로그세를당할수없는것을알고일마다윤장에게양보하였다.윤장은공과같은나 이인데 한 달 먼저 낳으므로 공은 형으로 섬겼다. 윤장은 색을 좋아하였고 재물을 탐하였으 며종녀(宗女)나유화를많이범한까닭에여자의사사로운말을듣고죄없는사람에게허물 을 씌웠다. 소문이 궁중(九重)에 퍼졌다. 염장공이 그것 때문에 대죄(待罪)토록 하였다. 양도 공이 이에 공을 이끌어 부제로 삼고 보량과 더불어 낭정을 함께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공은 일을 신중히 처리하였고 한결같이 양도공의 마음씨 쓰는 법을 따랐다.
그 때 양도공의 폐신인 찰의(察儀)가 미모로 아양을 잘 떨어 보량(宝良)과 내통하고 전횡을 많이하였다.공이검을뽑아참하려하자찰의가낭하에달려들어가나오지못하였다.보량 이 말하기를 “이 병아리를 죽이면 누가 우리 부부에게 미칠까 걱정이다.” 하였다. 이때부터 찰의는감히다시낭정에대하여말을하지못하였다.그때사람들이통쾌하게여겼다.
(군관)공의 성품은 주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 사생활을 엿볼 수 없었다. 보량이 늘 “군관은 진정으로 우리 부부의 신하이다.” 하였다. 선덕제(善德帝)가 일찍이 궁정 의 연회(內宴)319)에서 조용히 보량에게 일러 말하기를 “듣건대 너의 폐아(嬖兒)가 아름답다 고 하는데 그 아름다움이 과연 어떠한가?” 하였다. 보량이 대답하여 “신이 듣건대 천자는 신 하의 내사는 묻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폐하가 굳이 물으신다면 신첩에게 한 명의 사신이 있으니 보여 드리겠습니다.” 말하였다. 다른 날 군관(軍官)을 데리고 뵈었다. 대개 (선덕)제의 뜻이 찰의에게 있었는데 군관을 뵈게 한 것이다. 제(帝)가 군관에게 “사람들이 말하기를 네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무슨 재주가 있느냐?” 물었다. 군관이 말하기를 “신의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지 않고 단지 마음속에 있습니다.” 하였다. 제(帝)가 “네 마음속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는 가?” 하자, 군관이 말하기를 “신은 보량 부처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고, 보량 부처는 폐하를 위 하여 죽기를 원합니다. 소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단지 이 것뿐입니다.” 하였다. 제(帝)가 그 착함을칭찬하며음식을내리고보량을보며말하기를“네가데리고있는한아이가나의열 아이보다 낫다. 잘 기르기를 바란다.” 하였다. 처음에 염장공의 누이 천장낭주(天長娘主)는 수품공(水品公)에게 시집가서 딸 천운(天雲)을 낳았는데, 천운은 경국지색320)이 있었다. 천 운의 동생 천광(天光) 또한 얼굴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양도공의 폐신(嬖臣)321)이 되었다. 양도공이 마음으로 천운을 좋아하여 천장낭주에게 몸소 청하여 첩으로 삼고, 사랑하여 잠시 도 떨어지지 않았다. 보량이 그것을 걱정하였다. (군관)공이 이에 처첩의 도(道)로서 간하였 다. 양도공이 이에 천운을 공의 처로 삼도록 하였다. 공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천광 또한 공에게 소속되었다. 공이 풍월주가 되자, 양도공이 천광을 부제로 삼으라고 명했 다. 공이 말하기를 “처의 동생을 이끌어 주었다는 여론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양도 공이말하기를“네가그렇게한것이아니고바로내가명령한것이다.”하였다.공은부득이 천광을 부제로 삼았다. 그리고는 천운에게 말하기를 “너는 화주(花主)가 되었고 너의 동생은 부제가 되었으니, 낭도들이 반드시 나를 사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여 믿지 않을 것이 다.” 하였다. 천운이 웃으며 “낭군 또한 주군(主君)322)의 첩의 동생이 아닙니까? 우리들의 살 갗한점머리털한오라기도주군(主君)의은혜가아닌것이없습니다.어찌감히주군의명 을어길수있습니까?낭군은단지조심하며명을받들면됩니다.그리고천광이제멋대로행 동하지 못하게 하면 또 옳지 않겠습니까?” 말하였다. 공이 “그대의 말이 옳다.” 하였다.
(군관)공은 풍월주로 4년간 재위하며 오로지 명을 받드는 것을 주로 하여 한결같이 양도공의 구정(舊政)을 따랐으며 낭두를 쫓아내고 승진시킬 때 조그만 변화도 없이 부드럽게 지나갔 다. 그런데 양도공의 낭정은 모두 보량에게서 나왔다. 천운(天雲)이 비록 화주(花主)의 자리 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빈 그릇을 끌어안고 있는 것과 같았다. 불평(不平)하는 낭도들이 노래 를 지어 비방하기를
보량의 문안에는 사람이 구름 같고 천운의집위에는흰구름이지나간다 고 하였다.
천광이 매번 보량이 사사로움을 행하고 낭두들이 불평하는 실상을 말하면, 곧 천운이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감히 은혜로운 주(군)의 흠을 말하는가?” 하였다. 천광이 말하기를 “그 은혜 를 갚고자 하기 때문에 흠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군관)공이 천천히 위 로하여말하기를“네누나의견해와나의견해가같다.머지않아네가풍월주가되면네마음 대로하겠지만지금은우리부부의흠을보지않는것이좋다.”하였다.이로써천광은감히 한가지일도말하지않았다.
(군관)공은 장엄하고 정중하며 큰 뜻이 있어 조그만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진노하면 천둥번 개가이는것같았으나,마음은 실로 부드럽고 온후하여 부인을 감읍하게 할 수 있었다.부부가 대단히 화목하여, 역대의 풍월주들이 모두 낭두의 처와 딸들을 거느렸으나, 공은 홀로 한 번도 사랑(幸)을 하지 않았다. 그 때 사람들의 소문에 이르기를,
천운은 높고 높아 인간의 비가 되기 어렵다
라 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군관)공과 양도공(良公)이 모두 선덕제(善德帝)를 입시(入侍)하 여 작위를 뛰어 넘어 받았기 때문에 식자(識者)들이 그것을 잘못으로 여겼다.
보현공주(普賢公主)의 후손이고 금륜왕(金輪王)의 손이다. 양도공에게 한결같이 의지하였고 생사도 같은 근본이다. 빛나는 공이 있는데 하루아침에 원통함을 머금었다. 오호! 푸른 하늘 이여이무슨업의뿌리인가.
아버지는 동란(冬蘭)이고 할아버지는 동종(冬宗)이다. 증조는 오종(五宗)이다. 오종공은 사 실공주(梭失公主)의 아들이다. 보현공주가 어렸을 때 법흥대제와 사랑(和好)하여 사실공주 를 낳았다.
법흥대제가 사실을 입종공(立宗公)에게 시집보내어 오종공을 낳았다. 오종공은 곧 진흥대제 의 이모형(異母兄)이다. 오종이 비차부(比次夫)의 딸 비란(比蘭)을 아내로 맞아 딸 오란(五蘭) 을 낳고, 황종공(荒宗公)의 아들 동종(冬宗)을 데려다 아들로 삼아 오란을 배필로 삼게 하여 동란을 낳았으니, 공은 실로 보현과 사실의 적사(嫡嗣)이다. 석명공주가 처음에 진평제를 섬 겨두딸을낳고출궁하였다.
동란공은 그 때 음성서(音聲署)의 장(長)323)으로 향가(鄕歌)를 잘하였다. 석명이 동란공에게 가무를 배웠다. 마침내 서로 사랑하여 딸 석란을 낳았다. 제(帝)가 허락하여 혼인을 하였으나 동란공은감히처로대하지못하고군(君)으로섬겨자녀를계속낳았다.공은그네번째이 다. 석명의 어머니는 보명인데 금륜제(金輪帝)를 섬겨 현조(玄鳥)324)의 꿈을 꾸고 석명을 낳 았다. 그러므로 공은 실로 황종공의 증손이고 구진(仇珍)의 외예(外裔)가 된다.
24. 천관공
24세 (풍월주) 천광공(天光公)은 수품공(水品公)의 아들이다. 얼굴이 아름다운 꽃과 같고 교 태는 마치 부인과 같았다. 말은 친절하고 거동은 단아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협기가 있어 강 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왔고, 자신의 뜻을 과감하게 실행하여 상선(上仙)으로 인하여 동 요되지 않았다.
(천광)공은 나이 14살에 흠순공(欽純公)이 풍월주로 있을 때325) 화랑이 되었는데, 양도공이 보고 좋아하여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았으며 그 아래에 소속되어 폐신(嬖臣)이 되었다. 이로 인 하여 양도공(良圖公)이 여러 번 공의 집에 이르러 잤다. 공의 어머니 천장랑주(天長娘主)는 곧 염장공의 누이인데 공의 누나 천운과 더불어 양도공을 맞이하여 밤을 새워 이야기하며 즐 겼는데 날이 밝아오는 것도 알지 못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천운(天雲)은 마침내 양도공에게 시집을 갔다.
양도공은 천장의 은혜를 갚고자 군관공에게 (천광)공을 부제(副弟)로 삼도록 명하였다. 공이 부제가 되었다. 양도공이 공에게 춘화(春花)의 누이 윤화(尹華)와 결혼하라고 명하여 공은 그 녀를 아내로 삼았고 이에 이르러 윤화는 화주(花主)가 되었다. 처음에 윤장(閏長)의 아우 하 장(夏長)이 공과 더불어 부제가 되려고 경쟁을 하였는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 러 양도공이 (천광)공에게 명하여 하장의 아우인 춘장(春長)을 부제로 삼도록 하였다. 춘장(春 長)은 곧 윤화의 형이다. 윤화의 어머니 하희(夏姬)는 곧 하종공의 딸이다. 그 어머니 은륜공 주(銀輪公主)는 사도태후의 딸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재(私財)가 있었다. 윤화(尹華)가 그것 을 얻어 공에게 시집을 갔기에, 곤란한 사람을 돕는데 넉넉하였다.
염장공 이후 낭정이 가야파에게 많이 돌아갔으므로,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에는 출세하지 못 한 자들이 많았기에, (천광)공이 개탄하여 발탁하여 주었다. 양도공과 군관공 때에 낭두들은 염장공의 마복자들이 많이 등용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공이 그들을 많이 물리치며 말하기 를 “낭두는 낭정(郎政)에 중요한 자들이다. 어찌 나의 옹(翁)326)만이 홀로 중하고 낭정은 중 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하였다. 쫓겨난 자들이 모두 염장공을 찾아가 공의 허물을 말하였다. 염장공이 웃으며 “너희들이 새로운 풍월주를 따르지 않는데 나 또한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찰두는 계해년(603) 생이고 찰석은 을축년(605) 생이다.〉
그 때 가야파의 우두머리인 찰인(察忍)은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아직 대노두로 있었고 처첩 과 자녀가 백을 헤아렸으며, 출입하고 거동하는 것이 완전히 상선(上仙)과 같았다. 그 아들인 찰두(察斗)와 찰석(察石)이 모두 도두(都頭)가 되었는데 각기 첩이 수십 인이었다. 낭두들이 그 아들과 사위에서 많이 배출되었고, 대도두(大都頭) 당보(唐甫) 또한 찰인(察忍)의 사위였 으며그막내아들인찰의(察儀)가양도공의폐아(嬖兒)가된것등그권세를당할자가아무 도 없었다. 찰인의 처 옥두리(玉斗里)는 절색으로 역대의 상선을 섬긴 까닭에 높은 지위에 올 랐던 것이다. 공은 본디 찰인을 미워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먼저 찰인을 파면시키고, 진공정 통의 구두(舊頭) 만덕(萬德)을 대도두로 삼고 당보도 대노두가 되었다. 당보는 곧 당두(唐斗) 의 아들로 대원신통파였다. 그러므로 가야파가 크게 놀라 다투어 상선에게 가서 보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공은 우뚝 서서 들어주지 않고 규칙을 새로이 정하였다. 대노두(大老頭)는 60살까지로 한정 하고, 대도두(大都頭)는 55살까지로 한정하고, 도두(都頭)는 50살까지로 한정하고, 대두(大 頭)와 상두(上頭)는 45살까지로 한정하고, 낭두(郎頭)와 대낭두(大郎頭)는 40살까지로 한정 하였다. 별장은 각기 그 지위에 따르게 하였다. 인원은 3파를 고루 써서 사리사욕에 치우치 지 않도록 하였고, 망두(望頭)는 재주와 그릇에 바탕에 의거하고 마복자를 논하지 않도록 함 으로써 신진의 문을 크게 열었다. 인심이 크게 흡족하였다.
그때국사가점차어려워졌다.공과여러낭두들이낭도를거느리고친히활쏘고말달리는 것을 익혔는데, 모인 자들을 선발하여 병부에 보충하였다327). 공이 5년간 풍월주의 지위에 있는 사이에 낭정(郎政)은 무사(武事)로 많이 돌아갔다. 선덕제의 병이 몹시 위독해지자, 비 담(毗曇)328)과 염종(廉宗)이 모반을 하였다. 유신공이 신주(新主)329)를 받들어 전쟁을 독려 하였다.그때서울(京師)의군대가적어공이낭도를모두동원하여먼저그진으로돌격하였 다. 비담이 패하여 달아나고 난이 평정되었다. (천광)공은 그 공(功)으로 발탁되어 호성장군 (護城將軍)이 되었다.
곧 풍월주의 지위를 부제인 춘장에게 전하여 주고, 오로지 왕사(王事)에 힘써 변방에 나가 장 군이 되고 조정에 들어와 재상이 되며(出將入相) 많은 공적이 있었기에 중흥 28장(將)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가히 공경할만하지 않은가! 공의 성품은 외유내강하고 사리를 분명히 살 폈고 사민(士民)을 사랑하고 구휼하여 옷을 벗어 주기도 하였다. 술은 즐겼으나 많이 마시지 않았고 색을 좋아하였으나 방사(房事)에 어지지 않았다.
윤화랑주(尹華娘主)가 자녀 7명을 낳았다. 공의 첩은 5명이 있었다. 진수(眞凁)는 진복공(眞 福公)의 누이이다. 효월(孝月)은 효종공(孝宗公)의 딸이다. 경화(京華)는 윤화(尹華)의 누이 이다. 찰언(察言)은 찰의의 누이이다. 만수(萬水)는 만덕(萬德)의 딸이다. 각기 자녀가 있어 일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찰인은비록그지위를잃었지만딸을공에게바쳤고,공이지극히공적이고사심이없는것 을 알았기에 감히 원망하거나 허물하지 않고 그 자손을 타일러 말하기를 “신주(新主)는 진실 로 세상에 드문 영웅이다. 우리들이 어찌 일시의 잃음을 가지고 원망을 마음에 두겠는가? 기 쁜것은이훌륭한선(仙)을얻었으니우리외손을낳아서기르면나의집안이또한번창할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로써 3파가 화합하고 좋아하여 서로 혼인을 하고, 모두 공의 덕을 칭 송하였으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수품(水品) 상대등330)인데 곧 구륜공(仇輪公)의 아들이다. 구륜공이 반야공주(般 若公主)를 아내로 맞아 수품공을 낳았다. 반야의 어머니는 미실궁주(美室宮主)이고 구륜의 어머니는 사도태후인데, 모두 진흥대제가 아버지다. 수품공은 천주공(天柱公)의 딸 천장랑주 (天長娘主)를 아내로 맞았으니 곧 지도태후의 사생(私生)이다. 천주공 또한 진흥대제의 아들 이다. 세계는 염장공조에 자세하다.
대원신통에서 나왔고 가야파에 들어갔다.331) 세 화랑을 도왔고 국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오직공의맑은덕은만세에바야흐로빛날것이다.
25. 춘장공
25세 (풍월주) 춘장공(春長公)은 염장공의 셋째 아들이다. (춘장)공의 성품은 너그럽고 어질고 덕을 좋아하였으며, 윗사람을 받드는데 지성으로 하고 자기의 뜻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천광공(天光公)의 누이 천봉랑주(天鳳娘主)를 아내로 맞아 화주(花主)로 삼았다. 낭정(郎政) 은 한결같이 천광(天光)의 명에 의거하여 행하였고, 천광공의 명으로 찰두(察斗)를 대도두(大 都頭)로 삼았고 만덕을 대노두(大老頭)로 삼았으므로 가야파의 세력이 점차 다시 창성하게 되었다. 부제(副弟) 진공(眞功)은 천광공의 애첩 진수(眞凁)의 아우이다.
(춘장)공은 낭정을 진공과 찰두에게 맡기고, 매일 낭주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냈다. 낭주가 말하기를 “나의 형332)이 풍월주로 있을 때는 아침부터 밤까지 바빴는데, 낭군이 풍 월주가 되고는 낮에도 일이 없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다. 공이 웃으며 “바쁘다면 자체 가 바쁜 것이고, 한가하다면 자체가 한가한 것이지, 어찌 추호의 가감이 있겠소?” 하였다. 그 러나 공은 집에서는 근검으로 자제를 훈계하였다. 늘 낭주와 더불어 낭두의 처와 딸들을 독려하여 정포(征袍)를 만들어 출전한 낭도들에게 보냈다. 몰래 서울과 시골로 다니며 가난하 고 고달픈 사람을 구휼하였다. 인망이 크게 돌아왔다.
풍월주로 6년간 있다가 진공에게 물려주고 창부(倉部)로 발탁되어 들어갔다. 곧 집사부(執事 部)로 옮겼는데 그 일이 맞았으므로 여러 번 승진하여 중시(中侍)가 되었다. 공은 늘 스스로 겸손히말하기를“나와같은사람을가히일러행운아라고할수있다.한가지재능도없이 단지 부형과 상선(上仙)들의 음덕에 의지했을 뿐이다.” 하였다. 공적을 스스로 내세운 적이 없었다.
기상이 천주공과 닮은 점이 많았다. 그러므로 천장(天長)이 늘 천봉(天鳳)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의 지아비는 형(阿兄)333)을 닮지 않고 나와 몹시 닮았고, 너는 너의 아버지를 닮았고 나 를닮지않았다.너의부부는도리어나의부부와흡사하다.”하였다.그말이대개빈말이아 니었다. 공은 일찍이 보종공(宝宗公)의 청결함을 사모하여 덕을 세우는 표준으로 삼고 틈이 생기면 반드시 화주와 같이 몸소 그 사당에 나아가 절하며 기도하고 돌아왔다. 보량(宝良)을 섬기기를 어머니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하여 청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보량은 이에 그 딸 양시(良時)를 (춘장)공에게 주어 첩으로 삼았고, 다른 잡스런 여자는 없었다. 공의 행실은 선문(仙門)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다.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주의 후예로 이 같은 성인이 있다. 마음가짐이 깨끗하였고 자애로써 ...을 하였다. 내조가 짝이 되어 아름답고 복록이 날로 새롭다.
아버지는 염장공이고 어머니는 하희(夏姬)인데 곧 하종공의 딸이다. 하희의 어머니 은륜공주 는 진흥대제의 딸이다.
26. 진공공
〈진공은 임오년(622)생이고 임자년(652)에 화랑334)이 되었다.〉
26세 (풍월주) 진공(眞功)은 사린공(思隣公)의 아들이다. 처음 미실궁주가 진흥대제를 섬겨 반야공주(般若公主)를 낳았다. 천광공은 반야공주의 적손(嫡孫)이다. 또 수종전군(壽宗殿君) 을 낳았는데 후에 사진(思眞)으로 고쳤다. 그 아들이 곧 사린이다. 그러므로 진공과 천광공은 재종형제가 된다.
반야가 일찍이 수종에게 “어머니는 자녀가 많은데 같은 아버지의 형제는 오직 너와 나뿐이 다.” 말하고, 대대로 서로 저버리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수품공 또한 사린을 사랑하 기를 같은 배에서 난 형제처 하였다. 사린의 어머니인 호린(好隣)은 곧 호림공(虎林公)의 누나이다. 사린은 처음에 임종공(林宗公)의 대사(大舍)가 되었는데 임종공의 첩 호명(好明) 과 통(通)하여 딸 진수(眞凁)를 낳았다. 임종공이 곧 호명을 사린의 처로 삼게 하여 진공을 낳 았다.
(진공은) 문장에 능하였고 풍채가 있었고 기묘한 꾀를 좋아하였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였으며, 또한 굳세고 용맹스러워 무리를 다스리기에 족했다. 그러나 색을 좋아하였고 마음 이 탐욕스러웠고 사사로운 비밀을 많이 행하여, 인망(人望)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찰두(察斗) 와결탁하여찰두의딸세명을첩으로삼았다.또한찰두의아들승(昇)의처대씨(大氏)를첩 으로 삼았다. 찰(察)과 대(大) 양족의 처와 딸 중 아름다운 자들은 모두 공부(供簿)335)에 올랐다.
이에 앞서 진공과 달복공(達福公)의 아들 흠돌(欽突)이 사이가 좋았다. 흠돌의 누나 흠신(欽 信)이 보로전군(宝路殿君)에게 시집가서 두 딸을 낳았는데 아름다웠다. 진공과 흠돌이 꾀를 써서 흠신의 두 딸과 정을 통했으나, 흠신과 보로전군은 알지 못했다. 흠신의 어머니 정희(政 姬)는 곧 유신공(庾信公)의 누이인데, 진공의 무례함에 노하여 유신공에게 고하여 벌을 주려 하였다. 흠돌은 크게 두려워하여 곧 찰의(察儀)에게 귀중한 뇌물을 주어 보량(宝良)을 설득하 게 하였다. 보량은 이에 알아듣고 정희를 제지하며 말하기를 “폭로하면 단지 나의 자녀가 상 처만 입지만 감추면 곧 물방울처럼 스스로 없어질 것입니다. 어찌 생각을 깊이 하지 않습니 까?” 하였다. 정희가 곧 멈추었다. 이때부터 진공은 더욱 거리낌이 없어졌다.
흠신은 또한 진공이 출중하고 용감하다고 생각하여 보로(宝路)를 버리고 진공에게 가려고 하 였다. 진공은 이에 사람을 시켜 보로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흠신은 병이 있으니 버리고 다시 좋은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이 좋다.” 하였다. 보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곧 유신(庾信)의 3녀 작광(酌光)을 맞이하여 처로 삼았다.
진공은 이에 흠신을 처로 삼았고 풍월주가 되자 화주로 삼았다. 논자(論者)들이 옳지 않게 여 겼다. 진공은 개의치 않고 아울러 흠돌을 부제로 삼았다. 흠돌은 마음이 험악하고 간사한 꾀 가 많아 사람들이 모두 꺼렸다.
그 때 가야파가 크게 성하여 찰씨(察氏) 일문에서 낭정을 모두 장악하였다. 찰의는 도두별장 (都頭別將)인데 대도두로 행세하였다. 흠돌은 찰의와 죽음을 같이할 친구가 될 것을 허락하 였다. 찰의가 보량(宝良)과 득통을 하고 진덕제(眞德帝)를 알현하였다. 제(帝)는 그 작(爵)을 올려 주고 총애하였다.
이에 앞서 흠돌은 자의(慈儀)의 아름다움을 알고 보룡(宝龍)의 어리석음을 속이고 (자의를) 첩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보룡이 막았다. 얼마 안 있어 보룡이 당원전군(幢元殿君)을 낳았다. 흠돌은 사람을 시켜 보룡의 추함을 떠들게 하여 위협하였다. 대개 보룡에게 왕336)의 총애가 있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의(慈儀)가 태자비가 되자 흠돌은 장차 화가 미칠까 두려 워하여사람들로하여금자의가덕이없다고험담을하여궁지로몰았다.그때흠돌은문명 황후(文明皇后)의 조카였다. 그러므로 권세가 내외를 압도하였다. 자의궁(慈儀宮)은 마음을 졸이며 조심하였다. 흠돌이 문명후(文明后)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자의가 후일 후(后)가 되 어 아들을 (태자로) 세우면 대권이 진골정통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므로 가야파는 위태로울 것입니다. 신광(信光)을 일찍 태자비로 삼아 우리 집안(族)을 편안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신광은 유신공의 딸로 태자의 첩이 된 사람이다.
27. 흠돌공
〈흠돌은 정해년(627) 생이고 병진년(656)에 화랑이 되었다.〉
신광의 형 진광(晋光)은 곧 흠돌의 처였다. 그러므로 흠돌은 유신공의 공(功)을 핑계대서 말 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그 무리를 굳게 하려 하였다. 문명후는 거의 기울었으나 태자가 받아 들이지 않아 흠돌의 계책은 마침내 깨졌다. 진공(眞功)은 풍월주의 지위에 5년간 있다가 흠돌 에게 물려주었다. 그 때 태손(太孫) 소명전군(昭明殿君)337)이 이미 태어났고, 무열제는 자의 (慈儀)의 현숙함을 매우 사랑하였다. 흠돌은 감히 다시는 그 계책을 말하지 못하였다. 이에 보 룡궁(宝龍宮)에 정성을 바치고, 그 딸을 순원(順元)의 첩으로 들일 것을 청하였다. 보룡궁은 속임수를 두려워하여 좋은 말로 거절하였다. 흠돌은 다시 사람을 시켜 야명궁(夜明宮)과 나 의 아버지 오기공338)에게 정성을 바치고 전에 저지른 악행을 덮으려 하였다.
그 때에 야명(夜明) 또한 인명전군(仁明殿君)을 낳았는데 준수하고 용봉의 모습이 있었다. 태 자가 매우 사랑하였다. 흠돌이 스스로 말하여 인명(仁明)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였다. 야명(夜 明)이 부득이 받아들였다. 그 때 순원공(順元公)이 흠돌에게 속아, 비밀히 흠돌의 딸과 사통 을 하였다. 그러므로 흠돌을 위하여 야명을 설득한 것이다.
무열제(武烈帝)가 붕(崩)하고 문무제가 즉위하자, 자의(慈儀)를 후(后)로 삼았다. 자의는 흠돌 의 악함을 알았으나, 문명태후에게 효도를 하였으므로 한마디 말도 발설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흠돌은 호원공(好元公)의 아들 흥원(興元)을 부제로 삼았다. 애초에 태양공주(太陽 公主)가 진평대제를 섬겨 태원(太元)과 호원(好元)을 낳았는데 제(帝)를 닮지 않았다. 공주는 어려서 금륜태자(金輪太子)339)를 섬겼는데 사신(私臣)을 좋아 하였다. 제(帝)를 섬길 때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양군(태원과 호원)은 통(統)을 얻지 못하였다. 흥원은 제통(帝統) 이 자기에게 있다고 혼자 생각하여 조정을 원망하고, 누이를 흠돌의 첩으로 삼아 결탁하였다.
28. 오기공
<오기는 계사년(633) 생이고 임술년(662)에 화랑이 되었다.〉
(흠돌은) 야명궁에 정성을 바치게 되자 선위(仙位)를 나의 아버지 오기공에게 전하고자, 흥원 을 계책으로 꾀어 양보하게 하였다. 아버지는 낭정(郎政)이 무너졌기에 받지 않으려 하였다. 진골정통파의 낭두들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고 피를 흘리며 따져 말하기를 “공이 나아가 지 않는다면 신(臣) 등이 장차 자멸할 것입니다” 하였다.
자의(慈儀) 황후 또한 나아갈 것을 권하여 마침내 (풍월주의 지위를) 받았다. 흠돌은 풍월주 로 7년간 있고 나서 아버지가 비로소 풍월주의 위에 나아갔는데 실제 28세 (풍월주)다.
이 때 낭정(郎政)이 이미 어지러워졌기에 급작스럽게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진공(眞功), 흠 돌(欽突), 흥원(興元) 등이 모두 낭도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위에서 낭정을 전횡하였다. 아버 지는 바로 잡을 수 없는 것을 알고 3년간 재위하고 부제인 원선공(元宣公)에게 물려주었다.
29. 원선공
〈원선(元宣)은 병신년(636) 생이고 갑자년(664)에 화랑이 되었다.〉
원선공(元宣公) 또한 4년간 재위하고 역시 군관공(軍官公)의 적자인 천관(天官)에게 물려주었다.
30. 천관공
〈천관은 기해년(639) 생이고 정묘년(667)에 낭(郎)340)이 되었다.〉
천관의 처는 곧 흠돌의 딸이다. 그리하여 낭정(郎政)이 다시 흠돌의 무리들에게 돌아갔다. 천 관은 8년간 풍월주의 지위에 있었다.
31. 흠언공
〈흠언은 을사년(645) 생이고 갑술년(674)에 낭(郎)341)이 되었다.〉
그리고 (흠)돌의 아들 흠언(欽言)이 대신하였다. 대개 그 첩 언원(言元)의 소생이기 때문이었 다. 흥원(興元)의 조카로 흥원의 딸342)을 화주(花主)로 삼았다. 흠언(欽言)은 5년간 (풍월주 로) 있었다.
32. 신공공
〈신공(信功)은 기유년(649) 생이고 무인(678)년에 낭(郎)343)이 되었다.〉
그리고 진공(眞功)의 아들 신공이 대를 이었는데 곧 흠돌의 조카로 또한 흥원의 딸344)을 화 주(花主)로 삼았다.
수년 내에 낭정(郎政)은 한결같이 3간(三奸)345)의 손으로 들어갔다. 흠돌은 아첨하여 문명태 후를 섬겼다. 이에 그의 딸이 유신공의 외손이므로 태자346)에게 바쳤다. 태자와 모후(母 后)347)는 흠돌의 딸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소명태자(昭明太子)는 무열제의 명으로 흠운(欽運)의 큰 딸을 아내로 맞기로 약속 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흠운의 작은 딸은 스스로 소명제주(昭明祭主)가 되기를 원하였다. 자 의후(慈儀后)가 허락하였다. 이것이 소명궁(昭明宮)이다. 태자와 더불어 모후(母后)가 자주 소명궁으로 거둥하였다. 태자가 소명궁을 좋아하여 마침내 이공전군(理恭殿君)348)을 낳았 다. 후(后)가 이에 소명궁(昭明宮)에게 명하여 동궁(東宮)으로 들어가게 하고 선명궁(善明宮)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총애함이 흠돌의 딸보다 컸다. 흠돌의 딸이 투기를 하였다.
문명태후가 죽자(崩), 흠돌 등이 스스로 그 죄가 무거운 것을 알고 두렵고 불안하였다. 게다가 흠돌의 딸이 총애를 잃었다. 흠돌 등이 이에 모반을 꾀하였다. 야명궁(夜明宮)을 핑계로 삼아 인명(仁明)을 옹립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것이다.
문무제의 병이 크게 악화되자 아버지 오기공이 북원(北原)으로부터 들어와 호성장군(護城將 軍)이 되었는데, 실제로는 자의황후(慈儀皇后)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때 진공이 호성 장군으로 인부(印符)를 내어 주지 않으며 말하기를 “주상(主上)이 병으로 누웠고 상대등이 문서를 내리지 않았는데 어찌 중요한 직(職)을 가벼이 넘겨주겠는가?” 하면서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대개 적(敵)들의 모의가 이미 치밀했기 때문이었다.
(문무)제가 죽었으나 비밀에 부쳐 발설을 하지 않고 사람들을 시켜 비밀리에 경외(京外)의 군 대를 입성시켜 흠돌 등이 군사를 동원하여 야명궁과 군관공(軍官公)의 집을 포위하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오기공의 심복인 낭두가 그 계책을 공에게 발설하였다.
그 때 시위삼도(侍衛三徒)는 적(賊)들 편에 많이 서 있었다. 자의황후가 걱정하였다. 오기공 (吳起公)이 이에 순원(順元) · 개원(愷元) · 당원(幢元) · 원수(元帥) · 용원공(龍元公) 등과 더불 어 비밀히 사병(私兵)을 불러 들어가 호위하고 삼도(三徒)의 대감(大監)을 모두 파면하여 다 스렸다349). 흠돌 등은 이에 크게 놀라 진격하여 대궁(大宮)350)을 포위하였다. 서불감(舒弗 邯) 진복공(眞福公)이 수병(手兵)351)을 이끌고 포위를 깨고 들어와 말하기를 “경외(京外)의 병력이 크게 이르렀다. 너희들은 적신(賊臣)에게 미혹되었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 때 흠돌 등이 그 무리를 속여 말하기를 “상대등 군관(軍官)과 각간 진복(眞福)이 (문 무)제의 밀조(密詔)를 받아 인명(仁明)을 즉위시켰다.” 하였다. 그러나 군관(軍官)이 움직이 지 않았고 진복은 포위를 깨뜨렸으므로 무리들이 의심하여 서로 다투었다. 이에 큰소리로 왕 에게 충성할 자는 오른쪽, 적(賊)을 따를 자는 왼쪽으로 서라고 선포하였다. 그러자 무리 중에 오른쪽으로간자들이많았다.흠돌등은일이이루어지지않은것을알고포위를풀고물러 가려 하였다. 오기공(吳起公) 등이 병사를 풀어 대파하였다. 경외(京外)의 병력이 또 이르렀 다. 적은 이에 3간(三奸)을 사로잡아 바쳤다. 반란이 비로소 평정되었고 삼도(三徒) 중에는 이 로서죽임을당한자가매우많았다.
자의태후(慈儀太后)가 화랑을 폐지하라고 명령을 하고 오기공(吳起公)으로 하여금 낭도(郎 徒)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병부(兵部)에 속하게 하고 직(職)을 주었다352). 그러나 지방 의 낭정(郎政)은 옛날 그대로 스스로 남아 있었다. 실직(悉直)이 가장 성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풍속이다시서울에점점퍼졌다.중신(重臣)들이모두오래된풍속을갑자기바꾸면안된 다고 생각하였다. 태후가 이에 득도하여 국선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353). 화랑의 풍속은 그 리하여 크게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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